성탄절 / 송년주일 / 12월 네번째 주일

성탄절,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누가복음 2:8-14

정해빈 목사



오늘은 우리들 모두가 기뻐하고 축하하는 날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구세주가 오늘 태어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우리는 홀로가 아닙니다. 예전 시골에서는 성탄절 새벽에 집집마다 다니면서 새벽송을 부르곤 했습니다. 온 동네에 눈이 하얗게 내리던 새벽에 가정을 방문해서 찬송을 부르고, 메리 크리스마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인사를 했습니다. 가정을 축복하고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들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가 태어나셨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본래 구세주라는 말은 세상을 구원하실 분을 가리키는데 본래 이 말은 로마 황제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옛날 로마 사람들에게 구세주가 누구냐고 질문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마 황제가 구세주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황제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면 시민들은 황제가 전쟁을 이기고 평화를 가져 왔다고 해서 그를 구세주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황제가 아니라 아기 예수님이 구세주라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 두 명의 구세주가 있는데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방식이 서로 다릅니다. 로마 황제는 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서 평화를 가져왔고 예수님은 정의를 통해서 평화를 가져왔습니다. 어떤 평화가 참 평화냐, 원수를 무찌르고 전쟁에서 무조건 이기는 것이 참 평화냐 아니면 정의를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것이 참 평화냐, 오늘 말씀은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아기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시는 데 있습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구원해 주시고 평화를 주십니다. 내가 주님을 기다립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림이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합니다.” (시편 130). 시편 시인이 고백한 것처럼 신앙의 선배들은 오랫동안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렸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다림에 응답하셔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가만히 앉아 계시는 분이 아니라 미래에서 현재로 오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하늘에 머물러 있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죄와 고난이 가득한 세상, 낮고 천한 곳으로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하고 어두운 그늘에 숨어 있을 때 그를 찾아오셨고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고 죄책감 속에 숨어 있을 때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갈 길을 알지 못하고 방황할 때 그를 찾아오셨고 아브라함이 후손을 걱정할 때 그를 찾아오셔서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을 때 불타는 떨기나무를 통해 나타나셔서 그가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독교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높은 곳을 버리고 낮고 천한 곳으로 내려와서 우리를 도와주고 구원해 주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오시는 가운데 있다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도 오셨고 지금도 오시며 미래에도 오십니다. 결정적으로는 아기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잃어버린 자들을 찾기 위해 아기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관계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찾고 사랑하기 때문에 혼자 있지 않고 상대방과 삶을 나누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고 피조물과 함께 아픔과 사랑을 나누기 위해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사랑은 또한 희망입니다. 상대방을 참으로 사랑하는 자는 상대방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상대방을 돕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와 불의와 고난 속에서 고통당하는 것을 보시고 우리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우리를 먹이시고 용서하시고 깨우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죄와 불의와 고난에서 우리를 건지셔서 은혜와 평화와 생명이 넘치는 새로운 삶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영화 중에 [미녀와 야수, Beauty and Beast]가 있습니다. 저주를 받아서 야수가 된 채로 성에 갇혀 사는 젊은 왕자가 여인을 만나게 되고 그 여인을 통해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자 저주가 풀려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성탄절 이야기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본래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는데, 죄의 저주에 사로잡혀서 하나님께서 주신 본래의 인간성을 잃어버리고 야수/괴물/동물이 되었습니다. 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들을 사랑해 주셨고 우리들은 그 사랑을 통해서 죄에서 해방되어 본래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죄와 불의와 고난에 사로잡힌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해,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선한 목자 되시는 주님, 우리의 아픔을 아시는 주님, 우리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주님, 가짜 구세주가 아닌 진짜 구세주가 오늘 태어나셨습니다. 우리는 홀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구원받았고 회복받았습니다. 참 평화를 얻었습니다. 죄와 저주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여 준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기뻐하고 또 기뻐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Christmas, a Savior was born for you

Luke 2:8 - 14


That night in the fields near Bethlehem some shepherds were guarding their sheep. All at once an angel came down to them from the Lord, and the brightness of the Lord's glory flashed around them. The shepherds were frightened. But the angel said, "Don't be afraid! I have good news for you, which will make everyone happy. This very day in King David's hometown a Savior was born for you. He is Christ the Lord. You will know who he is, because you will find him dressed in baby clothes and lying on a bed of hay." Suddenly many other angels came down from heaven and joined in praising God. They said: "Praise God in heaven! Peace on earth to everyone who pleases God." (Luke 2:814)


According to Luke, an angel said to the shepherds, “a Saviour was born for you today.” A Saviour was originally named to the Roman Emperor who conquered enemy. Ancient Roman people called the Emperor a Saviour since they thought that he brought peace to the world by victory. But today’s scripture proclaimed that new Saviour was born today. He would bring peace to the world not by victory but by justice. Theologically speaking, Christmas indicates the revelation of God. God comes down to us to save us and to be with us. God came to Adam, when he committed a sin and hid themselves in the shadow. God came to Cain, when he murdered his brother. The coming of God, incarnation, shows how God loves us and wants to save us. As a novel [Beauty and Beast] shows, we were created in God’s own image once, but we were cursed by sin and finally lost the image of God. However God in Jesus came down to us and helped us recover our original image. “Don't be afraid! I have good news for you, which will make everyone happy. This very day in King David's hometown a Savior was born for you. He is Christ the Lord.” Amen.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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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네번째 주일 / 12월 세번째 주일

성탄주일,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마태복음 1:18 - 25

정해빈 목사 



성경에는 4개의 복음서가 있는데 오직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만 성탄절 이야기를 말합니다. 누가복음이 마리아 이야기를 기록했다면 마태복음은 요셉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성탄절이 되면 사람들은 보통 누가복음에 기록된 마리아 이야기를 많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에 나오는 요셉 이야기도 빼 놓을 수가 없습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서 약혼녀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용하게 파혼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주의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니 그를 아내로 맞이하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요셉은 이 말에 순종해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 들였고 그의 아들을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는 히브리어로 여호수아,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이고, 이사야가 예언한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을 가리킵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약혼자가 아이를 가졌다는 것은 분명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 아이가 장차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것이라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 순종했습니다. 진실로 요셉은 의로운 남자였고 사려심이 깊은 남자였습니다.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고 생명을 보호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줍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는 남녀평등의 시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을 무시하고 여성을 희롱하고 생명을 우습게 여기는 남성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성령의 지시에 따라 여성과 아이를 보호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만약 이 세상에 희망이 있다면 연약한 생명이 자랄 수 있도록 보호하고 양육하는 요셉 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셉이 있기 때문에 마리아가 생명을 낳을 수 있었고 어린 예수가 안전하게 자랄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을 향해서 요셉 같은 사람이 되라고 말합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기꺼이 아버지의 역할을 다하려는 사람이 될 때, 이 세상에는 더 많은 예수가 태어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마리아처럼 연약한 생명을 붙들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버지 없이 홀로 자식을 키워야 하는 여인도 있고 가난하고 위험한 환경에서 자식을 키워야 하는 가정도 있습니다. 마리아는 옛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내가 이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합니까?” 걱정하는 가정이 있다면, 이 험난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걱정하는 부모가 있다면, 우리가 그들을 격려해 줍시다. 우리가 그들의 아버지가 되어 줍시다. “지금은 힘들지만 이 아이를 잘 키우십시오, 그대의 아이가 자라서 세상을 구원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격려해 줍시다. 어린 생명들이 고난을 견디고 자랄 수 있도록, 그들이 성장하여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도록 어린 생명을 양육하고 보호하고 후원하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Out of four Gospels in the Bible, only Matthew and Luke talk about the Christmas stories. While Luke centers the story on Mary’s angle, Matthew tells us how Joseph responded to Mary’s birth. Joseph was at first surprised when he heard that his fiancee Mary was pregnant. So he wanted to cancel his marriage quietly. But the Holy Spirit touched his heart and led him to be the father of Jesus. God chose Mary to be the mother of Jesus and, equally, God chose Joseph to care for them. If Joseph had chosen to accuse Mary, the traditional punishments could have meant death or ostracism, which means of driving person from a society or group. If Joseph had chosen to leave Mary, the Christmas story would have been impossible. But God inspired Joseph to take a risk and courageously, protect Mary and the baby. Today’s Christmas story shows the role model of a man and father. If there was no man like Joseph, Mary would have been impossible to give birth to Jesus. Today’s story shows that the world needs more and more people like Joseph who are willing to take a risk and choose to protect mother and baby who are living in vulnerability. Even today, the Holy Spirit touches and encourages us to be the person of Joseph. Let us bless new mother and new baby no matter where they come from. Let us welcome and bless them so that they survive with love and care in the world. Let us pray that more and more Jesus, Messiah, Emmanuel are able to be born in the world.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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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세번째 주일 / 12월 두번째 주일

대림절, 메마른 땅에 기쁨을 주소서

이사야서 35:1-10

정해빈 목사 




1. 요즘 사람들 사이에 유행하는 유머 중에서 없다 씨리즈유머가 있습니다. 10대는 철이 없다, 20대는 돈이 없다, 30대는 집이 없다, 40대는 정신이 없다, 50대는 일이 없다, 60대는 낙이 없다, 70대는 이가 없다, 80대는 영감이 없다, 90대는 다 필요 없다. 옛날과 비교해 보면 우리들은 요즘 많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핸드폰도 있고 컴퓨터도 있고 냉장고도 있고 자가용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없다는 말이 유행할까요? 아마도 세상은 살기 편해졌지만 무언가 아쉽고 외롭고 허전한 느낌을 받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옛날보다 살기는 편해졌지만 경쟁은 더 심해졌고 빈부격차도 더 심해졌습니다. 가만히 세상을 들여다보면 지난 20-30년 동안에 세상이 급격하게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20-30년 동안에 세상은 많이 차가워지고 무서워졌습니다. 2001년에는 9.11 테러 사건이 벌어졌고 2008년에는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금융위기가 일어났습니다. 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신자유주의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그렇게 어렵게 말하지 않아도 우리들 일상을 통해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1997년 한국에서 IMF 외환 위기가 일어나기 전에는 비정규직이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취직을 하면 무조건 정규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일하는 사람들 가운데 정규직이 절반이고 비정규직이 절반입니다. 캐나다는 다행스럽게도 그런 큰 변화를 겪지 않았습니다. 캐나다 사회가 원래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통과 제도를 지키면서 사는 나라이기 때문에 다행스럽게도 큰 경제 위기를 겪지 않았고 사회복지 제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규제를 철폐하고 간섭하지 말아라, 개인이 자유롭게 일하고 해고되도록 내버려두어라, 이런 주장이 등장하면서 무한경쟁시대가 되었습니다. 사회복지제도가 잘 되어 있으면 경쟁에서 밀린 사람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복지제도가 없는 사회에서 무조건 경쟁만 도입하면 경쟁에서 밀린 사람들은 빈곤층으로 떨어지고 빈부격차는 더 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서구 문명을 자세히 보면 서구 문화가 개인, 자유, 독립, 모험, 경쟁, 개척의 문화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자연과 싸우고 모험을 하면서 문명을 발전시켜왔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신대륙을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들도 서양 사람들이었고 바다를 건너서 신대륙을 개발한 사람들도 서양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럽 이민자들이 아메리카에 온 것도 왕에게 간섭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온 사람들도 있었고 땅을 차지하고 부를 이루기 위해서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너무 개척 정신이 강하고 자부심이 강해서 그런지 원래부터 이 땅에 사는 원주민들을 존중하지 않고 다 죽이고 쫓아낸 후에 땅을 차지했습니다. 동쪽 대서양에 도착한 다음에는 서쪽으로 진출해서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이 땅을 차지했습니다. 이런 문화가 있기 때문에 서양 사람들은 개인의 자유/프라이버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독립/개척/모험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누구의 간섭을 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누구에게 의지하는 사람은 무능한 사람이고 가능한 빨리 독립하고 개척하는 사람은 유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개척하고 독립하고 모험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우리들은 가능한 한 스스로 일어서고 자립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동시에 사람은 본래 서로 협력하고 의지하고 사랑하며 사는 존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실 때 두 가지 원칙을 가지고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 자유 의지가 있는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자유인이 되어라, 네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여라, 옳고 그른 것을 스스로 판단하여라, 자립하고 모험하면서 살아라 말씀하셨습니다. 대체로 보면 서양 사람들이 이것을 잘합니다.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자기 인생을 열심히 살아갑니다. 이것은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사람을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고 협력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사람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기 인생을 개척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고 사람은 반드시 같이 살아야 하고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고 협력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두 번째 메시지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자연 창조와 사람 창조를 다르게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연을 창조하실 때는 서로 분리되도록 만드셨습니다. 맨 처음에는 모든 것이 뒤섞이고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 땅과 바다를 분리하셨습니다. 하늘과 땅, 땅과 바다가 뒤섞이면 사람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 붙어 있지 말고 서로 떨어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은 위에, 땅은 밑에, 바다는 저쪽, 땅은 이쪽, 이렇게 서로 떨어져 있어야 그 사이에서 사람이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지으실 때는 서로 떨어져 있어라 말씀하지 않으시고 서로 같이 살아라,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면서 살아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여기셔서 배우자/동반자/파트너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고 사랑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을 맨 처음 소개할 때 그냥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반드시 누구의 딸, 누구의 아들, 어느 지역, 어느 지파에 속한 사람이라고 소개를 합니다. 내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족에 속해 있다는 의미에서 내가 속한 공동체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자기 인생을 개척하여라, 말씀하셨고 동시에 서로 떨어져서 살지 말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라,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기 보다는 오직 자기 이익을 위해서만 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날 우리 사회는 무한경쟁시대/신자유주의 시대, 오직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사회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서 35장을 보면 메시야가 오셔서 광야와 메마른 땅을 시냇물이 흐르는 세상으로 만들어 주시고 바벨론에 포로된 백성들을 해방시켜주시기를 노래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첫째로 이사야는 메시야가 오셔서 광야같이 거칠고 냉정한 세상을 따뜻하고 기쁜 세상으로 바꾸어 주시기를 노래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사야와 같은 마음으로 메시야가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메시야가 오셔서 무한경쟁시대, 정글과 같은 세상, 광야같이 메마르고 냉정하고 차가운 세상을 정의가 바로 세워지는 세상, 따뜻한 배려와 돌봄이 있는 세상으로 바꾸어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때에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다.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 세상이 이런 사람들을 차별하는지 차별하지 않는지를 보면 세상이 살만한 세상인지 살기 힘든 세상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차별이 있는 세상은 냉정하고 차가운 세상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하시고 듣지 못하는 사람을 듣게 하시고 억울하고 차별받는 사람들을 일으키셔서 그들이 사슴처럼 뛰게 해 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이사야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포로된 백성들을 자유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사야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무엇보다도 메시야가 오셔서 자신들을 포로에서 해방시켜 주시기를 소망했습니다. 진실로 메시야는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들도 영적인 포로 상태로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무엇에 붙잡혀서 그것에 끌려 다니면 그것이 바로 포로입니다. 악한 영/귀신/무당에 끌려 다닐 수도 있고, 돈에 끌려 다닐 수도 있고, 권력/명예에 끌려 다닐 수도 있고, 잘못된 생각/편견에 끌려 다닐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오셔서 우리들을 사로잡고 있는 악한 영/권세/편견에서 우리들을 자유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은 우리들도 완전한 자유인으로 살지 못하고 이 세상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광야같이 메마른 세상, 냉정하고 차가운 시대, 무한경쟁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오셔서 이 세상을 따뜻하고 평화로운 세상으로, 편견과 차별이 없는 세상으로 만들어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막 같은 세상을 시냇물이 흐르는 세상으로 바꾸어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3절 말씀에 기록된 것처럼,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맥이 풀린 손에 힘을 주시고 떨리는 무릎을 굳세게 해 주시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주님, 이 땅에 오셔서 차갑고 냉정한 세상을 따뜻한 세상으로 바꾸어 주옵소서, 저희들이 서로 자기 이익을 위해서만 살지 않게 하시고 주님과 더불어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며 살게 하옵소서, 기도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Advent, thirsty ground will flow with fountains

Isaiah 35:1-10


Thirsty deserts will be glad; barren lands will celebrate and blossom with flowers. Deserts will bloom everywhere and sing joyful songs. They will be as majestic as Mount Lebanon, as glorious as Mount Carmel or Sharon Valley. Everyone will see the wonderful splendor of the LORD our God. Here is a message for all who are weak, trembling, and worried: "Cheer up! Don't be afraid. Your God is coming to punish your enemies. God will take revenge on them and rescue you." The blind will see, and the ears of the deaf will be healed. Those who were lame will leap around like deer; tongues once silent will begin to shout. Water will rush through the desert. (Isaiah 35:1-6)


Scorching sand will turn into a lake, and thirsty ground will flow with fountains. Grass will grow in wetlands, where packs of wild dogs once made their home. A good road will be there, and it will be named "God's Sacred Highway." It will be for God's people; no one unfit to worship God will walk on that road. And no fools can travel on that highway. No lions or other wild animals will come near that road; only those the LORD has saved will travel there. The people the LORD has rescued will come back singing as they enter Zion. Happiness will be a crown they will always wear. They will celebrate and shout because all sorrows and worries will be gone far away. (Isaiah 35:7-10)


In the 6th century BCE, God promised a new, holy path for Israel that would lead them out of bondage in Babylon to a new future for Judah. Christian interpretations of exile and redemption will inevitably look different than they did for ancient Judah. However, our days are also filled with suffering and bondage. We daily wander from obedience to God and into the open arms of sin, death, and devil. The confession we pray on Sunday is true every day of the week: “We confess that we are in bondage to sin and cannot free ourselves.” We daily need water in the wilderness to strengthen our weary knees and to renew our faltering faith. Just as the people in ancient Israel longed for the new day that the Messiah would bring, we also wait for the day that the Lord comes and sets us free from individualism, selfishness, loneliness, and suffering.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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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두번째 주일 / 12월 첫번째 주일

대림절, 용서는 회개에서 시작됩니다

마태복음 3:1-12

정해빈 목사 




1. 대림절 두번째 주일에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 말씀은 마태복음 3장에 나오는 세례요한에 대한 말씀입니다. 전 세계 교회들이 매주일 공통적으로 읽는 성서일과 말씀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 시편에서 하나, 복음서에서 하나, 서신서에서 하나, 이렇게 4개의 말씀이 매주일 주어지는데 대림절 기간에 꼭 등장하는 복음서 말씀이 세례요한에 대한 말씀입니다. 대림절 기간에는 반드시 세례요한이 하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의 말씀을 듣고 몸과 마음을 회개해야 한다, 세례요한을 만나 먼저 회개한 다음에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이것이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집안에 귀한 손님이 오면 식구들이 집안 청소를 하는 것처럼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이 기간에 몸과 마음을 단정하게 하고 예수님을 영접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성탄절은 일 년 중에 가장 기쁜 날이지만 성탄절을 기다리는 대림절 기간은 조금 엄숙하고 진지한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들 모두가 조금 진지하고 차분하고 정직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례요한의 사역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회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야가 오실 터인데 메시야를 만나려면 먼저 자신의 삶을 회개하고 이 세상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부패하고 타락한 권력자들/종교인들을 향해서 회개하여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외쳤습니다.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 도끼를 이미 나무뿌리에 갖다 놓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실 것이다.” 소리높이 외쳤습니다. 정의를 외치는 말씀이 부담스럽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은혜롭고 따뜻한 말씀만 들을 것이 아니라 불의를 고발하는 이런 말씀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유대교 율법에 의하면 회개를 하려면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서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로 불로 태우는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제사장들, 서기관들, 귀족들이 살고 있었고 제사에 필요한 모든 시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헤롯이 지은 성전은 겉으로 보기에 크고 화려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겉으로는 화려했으나 속으로는 부패하고 타락한 성전을 찾아가지 않았고 반대로 광야에 사는 세례요한을 찾아가서 그의 말씀을 듣고 회개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부패하고 타락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곳에 가서 회개의 제사를 드린다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았습니다. 성전 제사장들 입장에서는 백성들이 동물을 가지고 와서 제사를 드려야 자기들 할 일도 생기고 수입도 생기는데 백성들이 세례요한을 찾아가니 세례요한이 많이 미웠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타락한 것은 성전이 권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치이든 종교이든 사람과 돈이 몰리면 그 권력의 달콤함에 취해서 타락하기가 쉽습니다. 회개의 첫걸음은 성전을 찾아가지 않고 광야로 가는 것입니다. 회개를 하려면 광야로 가야 합니다. 광야에는 돈도 없고 권력도 없고 큰 건물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고 땅과 하늘과 별만 있는 곳, 하나님과 나만 있는 곳, 홀로 떨어진 외딴 곳, 조용한 곳, 골방으로 가서 욕심을 내려놓고 우리의 지난 삶을 회개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한의 말을 듣고 물속에 들어가 회개하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요한이 회개를 외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스스로 바르고 깨끗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깨끗한 삶을 살아야 다른 사람에게도 깨끗한 삶을 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본래 제사장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제사장직을 마다하고 광야에서 살면서 메뚜기와 꿀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이런 단순하고 깨끗한 삶을 살았기에 회개를 외칠 수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요한이 깨끗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그가 요단강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를 찾아갔습니다. 요단강은 옛날 이스라엘 조상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목욕을 하고 죄를 씻고 회개하는 곳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옛날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요단강 물속에 들어가서 과거를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기 원했습니다. 물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과거의 내가 죽고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화려한 성전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광야로 가서 옛날의 처음 순수했던 신앙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었던 그때의 순수한 마음, 순수한 감격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2. 회개를 가리키는 헬라어 Metanoia(메타노이아)는 단순히 죄를 고백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냥 단순히 잘못했습니다 말만 하면 안 되고 이제는 더 이상 과거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삶의 자세와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세례요한은 회개를 말했고 예수님은 용서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회개와 용서 사이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회개가 먼저이고 용서가 그 다음입니다. 회개해야 그 다음에 용서가 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려면 먼저 세례요한을 만나서 회개하고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을 만나서 용서받는 것이 신앙의 순서입니다. 회개를 하려면 철저하게 해야 합니다. 철저하게 회개하는 사람만이 철저하게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철저하게 회개하지 않은 사람을 쉽게 용서해 주면 그 사람은 똑같은 죄를 저지르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어린아이가 무엇을 크게 잘못했는데 아빠 엄마가 너무 쉽게 괜찮아 이렇게 용서해 주면 아이는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아이가 잘못을 했을 때는 예를 들어서 1시간 의자에 앉게 해서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깨닫게 해 주어야 합니다. 너무 쉽게 용서해 주면 안 되고 진심으로 깨닫고 반성할 때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가끔 뉴스를 보면 유명한 정치인/기업인들이 죄 짓고 감옥에 갔다가 너무 쉽게 사면이 되어서 풀려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쉽게 용서받은 사람은 나중에 똑같은 죄를 저지르기가 쉽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돈 있는 사람은 죄가 없고 돈 없는 사람은 죄가 되는 세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우리아 장군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는 범죄를 저질렀다가 나중에 회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의 범죄를 용서해 주겠다, 그러나 너의 가정에 비극이 많을 것이다말씀하셨습니다. 너의 범죄 때문에 생긴 비극을 보면서 철저하게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철저한 회개가 있어야 용서도 있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같다.” 프랑스의 사상가 알베르 카뮈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프랑스는 톨레랑스/관용으로 유명한 나라입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너그럽게 인정하고 존중합니다. 하지만 범죄자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처벌을 합니다. 그래야 똑같은 범죄가 다시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용서는 회개에서 시작됩니다. 예수께서는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들에게 용서를 선포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하면 누구든지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다만 용서받으려면 진정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간혹 사람들 중에는 진정으로 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용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용서하는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충분한 용서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깊이 만나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을 받아야 합니다. 예전에 어떤 책에서 읽은 이야기가 기억이 납니다. 어느 부부가 새해 파티를 마치고 새벽에 운전하다가 어린 소년을 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 부부는 이 사건에 대해서 모든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인정했고 할 수 있는 모든 책임을 다졌습니다. 죽은 소년의 부모들도 이 부부를 용서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부부는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 자신들을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생활이 무기력했고 매일매일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결국 부부는 이혼하게 되었고 직장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주변 사람들이 이 부부를 용서해 주어도 이 부부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부부는 나중에 교회 기도 모임을 통해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되었고 그 만남을 통해서 용서함을 받고 비로소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에게 용서의 선물을 내려 주십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성탄절은 기쁜 날이지만 대림절은 무겁고 진지하게 반성하고 회개하는 기간입니다. 대림절에는 세례요한을 만나고 성탄절에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 신앙의 바른 순서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세례요한을 먼저 만나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이 우리가 무엇을 회개해야 합니까? 외쳤을 때 세례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속옷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도 나누어 주십시오. 세리들은 정해 준 것 이상으로 세금을 걷지 마십시오. 군인들은 남을 협박하여 억지로 빼앗지 마십시오.“ 대림절 기간을 보내면서 우리들의 죄악과 탐욕, 이 시대의 죄악과 탐욕을 고백하고 회개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Advent, forgiveness comes form repentance

Matthew 3:1-12


Years later, John the Baptist started preaching in the desert of Judea. He said, "Turn back to God! The kingdom of heaven will soon be here." John was the one the prophet Isaiah was talking about, when he said, "In the desert someone is shouting, <Get the road ready for the Lord! Make a straight path for him.>" John wore clothes made of camel's hair. He had a leather strap around his waist and ate grasshoppers and wild honey. From Jerusalem and all Judea and from the Jordan River Valley crowds of people went to John. They told how sorry they were for their sins, and he baptized them in the river. (Matthew 3:16)


Many Pharisees and Sadducees also came to be baptized. But John said to them: You bunch of snakes! Who warned you to run from the coming judgment? Do something to show that you have really given up your sins. And don't start telling yourselves that you belong to Abraham's family. I tell you that God can turn these stones into children for Abraham. An ax is ready to cut the trees down at their roots. Any tree that doesn't produce good fruit will be chopped down and thrown into a fire. I baptize you with water so that you will give up your sins. But someone more powerful is going to come, and I am not good enough even to carry his sandals.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His threshing fork is in his hand, and he is ready to separate the wheat from the husks. He will store the wheat in a barn and burn the husks in a fire that never goes out. (Matthew 3:7-12)


John in Matthew’s Gospel is an end-time prophet whose message is that the time has come to repent because Jesus through whom God will affect the transformation from this age to the next is now revealed. The root meaning of “to repent” is “to turn” or to have a dramatic change of mind and direction. To repent is turn away from the values and practices of the old age (e.g., idolatry, violence, injustice, exploitation, slavery, and scarcity) and to turn towards the values and practices of the Realm of God (e.g., love, peace, justice, dignity, freedom, and abundance). John offers listeners a choice. They can repent, and join the movement toward the Realm, or they can continue to collude with the old age and face eternal condemnation at the final judgment. Finally we can learn from the scripture a very crucial lesson that absolute forgiveness comes from absolute repentance. Without repentance without forgiveness! John makes us preparing for seeing Jesus by helping us repent our past. Today’s scripture invites us to realize once again that only those who repent are able to meet Jesus.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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