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절 네번째 주일 / 6월 네번째 주일
성령강림절, 주님의 임재를 찬양하고 삶을 기뻐하며 
데살로니가전서 5:14-22, 23-28

정해빈 목사

 

 

오늘은 2022년 상반기를 마감하는 주일입니다. 2022년 상반기 동안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열심히 신앙생활하시고 교회를 섬겨오신 모든 성도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2020년 3월부터 코로나가 전 세계로 퍼지면서 우리들 모두는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2020년 3월부터 모든 대면활동과 대면예배를 중지하고 격리생활을 시작하였고 2021년에는 백신 주사를 맞으면서 코로나를 이기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2022년이 시작되면서 우리들 모두는 늦어도 6월이 오기 전에 코로나가 완전히 물러가고 모든 생활이 정상으로 돌아오리라 예상을 했습니다. 다행히 코로나는 거의 사라졌고 지난 주일부터 우리 교회도 마스크를 쓰지 않고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과 고물가로 인해서 경제가 어려워지는 것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굳건히 하며 성실하게 신앙생활 해 오신 모든 성도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바라기는 2022년 하반기에는 코로나도 완전히 물러가고 전쟁도 물러가고 경제도 회복되어서 모든 일상이 정상으로 되돌아오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또 이임예배를 드리면서 제가 마지막으로 설교하는 날입니다. 지난 2005년부터 2022년까지 알파한인연합교회에서 목회할 수 있었던 것은 저에게 큰 영광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훌륭한 선배 목사님들과 성도님들이 계신 교회에서 목회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성도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한 교회에서 너무 오래 목회하다 보니 교회도 변화가 필요하고 저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회 이전도 끝났고 코로나도 끝났으니 이곳 새로운 예배당에서 새로운 목사님이 오셔서 교회를 이끄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한인교회에서만 목회했는데 새로운 교회에서 목회하는 것도 좋은 도전과 경험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어린이교회학교, 요나회 청년들, 새가족동포들, 요셉회/요한회 젊은 가정, 엠마오회 성도님들, 연로하신 사마리아인회 성도님들, 성인장애인공동체, 무궁화요양원을 비롯해서 토론토한인사회와 함께 신앙생활 한 것은 저에게 큰 기쁨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부족한 저를 사랑해주시고 함께 교회를 섬겨주신 모든 성도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다운타운에서 목회하면서 교회를 찾아오는 많은 손님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을 도와드렸던 일도 생각이 나고, 조성준 장로님이 시의원이실 때 조 장로님이 주최한 북한동포 합동결혼식을 토론토시의회 의사당에서 개최한 일도 생각이 나고, 난민신청을 한 북한 동포들이 갑자기 교회로 몰려 들어서 정신없이 그들을 돌보았던 일도 생각이 납니다. 새로운 교회당을 찾기 위해서 토론토의 모든 캐나다연합교회를 돌아다니며 조사하던 때도 생각이 나고, 코로나로 인해서 교회가 폐쇄된 후에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고 한인사회를 위해서 온라인건강강좌를 개설했던 때도 생각이 납니다. 그동안 목회하면서 존경하는 이상철목사님과 이신자 사모님을 비롯해서 서른다섯 번의 장례식 예배를 인도한 것도 생각이 납니다. 사람의 인생에도 생로병사가 있듯이 교회에도 생로병사가 있습니다. 교회가 발전할 때도 있었고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었습니다. 갑자기 새가족들이 교회로 몰려 들어서 교인들이 크게 늘어날 때도 있었고 반대로 코로나로 인해서 모임이 줄어들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바르게 신앙생활 하도록 우리들을 여기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에 3가지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에 좋은 전통과 제도와 역사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토론토한인연합교회/알파한인연합교회는 지난 55년 동안 토론토한인사회와 지역사회와 한국의 민주화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토론토 최초의 한인교회로 시작된 우리 교회에서 토론토한인회, 토론토노인회, 한인합창단, 한인방송국이 시작되었습니다. 또 우리 교회는 모든 제도와 행정과 재정이 투명하고 깨끗합니다. 우리 교회는 목회자는 영적인 일을 담당하고 제직들은 행정과 재정을 맡아서 하는 좋은 전통과 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에 진보적이고 개방적이고 투명하고 깨끗한 전통과 제도와 역사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에 좋은 성도님들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는 젊은 성도님들이 계시고 교회를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신앙생활하시는 연로하신 성도님들이 계십니다. 연로하신 성도님들이 사회정의를 위해서, 한인사회와 지역사회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는 모습을 보면 존경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성실하시고 인자하시고 점잖으신 좋은 성도님들 덕분에 우리 교회는 따뜻하고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에 좋은 교회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아마도 토론토에서 우리 교회처럼 교통이 편리하고 공원이 있고 주차장이 있고 위치와 시설이 좋은 교회당은 없을 것입니다. 토론토 한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노스욕 사거리, 지하철 바로 옆에 있는 새로운 교회당에서 우리는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에 좋은 역사와 전통과 제도를 주셨고 좋은 성도님들을 주셨고 좋은 교회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선물을 주셨으니 우리 교회의 미래는 밝을 것입니다. 좋은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우리가 읽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을 훈계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고 아무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도리어 서로에게 항상 좋은 일을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우리가 잘 하는 3가지, 항상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 중에는 종말론에 심취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었고, 주님의 재림과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마음이 약해서 쉽게 좌절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들을 향해서 종말의 때,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니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까지, 주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실 때까지,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라고 말했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끊임없기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매주일 고백하는 캐나다연합교회 새신조를 보면 “우리는 교회를 이루라고 부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찬양하고, 우주만물을 존중하며 살고, 남들을 사랑하며 섬기고, 정의를 추구하며 악에 항거하고” 이런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찬양하고 우주만물을 존중하며 살고 남들을 사랑하며 섬기고 정의를 추구하며 악에 항거하는 것은 모두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임재를 찬양하고” 다음에 “삶을 기뻐하고” 라는 말이 들어갔더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찬양하고 우주만물을 존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나의 삶이 기쁘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나의 삶을 기뻐할 수 있어야 하나님의 임재도 찬양할 수 있고 이웃을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때로는 우리의 삶에 고난이 찾아올 때도 있고 세상이 불공평하고 의인이 고난받고 악인이 성공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의롭고 평화로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열심히 살라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생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배드리는 매주일이 작은 부활절입니다. 오늘은 슬픈 날이 아니라 기쁜 날입니다. 조성준 장관님 온타리오 노인복지부 장관에 다시 임명되신 것 축하드립니다. 이제 코로나가 끝났으니 다시 정상적인 교회생활을 할 수 있는 것도 기쁜 일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찬양하면서 동시에 삶을 기뻐합시다. 내가 살아있음을 기뻐합시다. 삶이 선물이요 은총임을 기억합시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아름다운 교회당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이 아름다운 교회당에서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을 소중히 여기며 함께 신앙생활하시기를 빕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을 축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성도님들 모두 과거보다 더 행복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찬양하고 삶을 기뻐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정의를 추구하고 악에 항거하면서 계속해서 신실한 삶을 살아가시는 복된 성도님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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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세번째 주일 / 6월 세번째 주일
성령강림절, 악령을 쫓아내시다 
누가복음서 8:26-28, 30-35

정해빈 목사

 

 

 

우리는 요즘 6월부터 성령강림절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성령을 한자로 표현하면, 거룩할 성, 신령할 영, 성령(聖靈)이 됩니다. 한자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은 거룩하고 깨끗하고 신비롭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고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를 일으켜주시고 우리를 깨우쳐 주십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거룩한 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악한 영도 있습니다. 영이 밖으로 표현되는 것이 정신과 생각입니다. 좋은 영에서 좋은 생각과 정신이 나오고 나쁜 영에서 나쁜 생각과 정신이 나옵니다. 거룩한 영은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가져다주고 공동체의 공동의 선을 위해서 일하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 반대로 악한 영은 생명을 파괴하고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지난 4년 전 우리 교회 위쪽에 있는 영/핀치 교차로에서 한 남성이 밴 차량을 몰고 인도로 뛰어들어서 한인 3명을 포함해서 10명이 숨지고 15명이 부상당한 일이 있었는데 최근에 그 사람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여자들이 자기를 만나주지 않는 것에 화가 나서 차를 몰고 인도로 뛰어들어서 선량한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악한 영, 악한 생각, 악한 정신이 그 사람을 지배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악한 영과 생각과 정신에 사로잡히면 그 사람은 생명을 파괴하고 이웃에게 해를 입히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선한 영이 내 삶을 인도하는가, 아니면 악한 영이 내 삶을 인도하는가가 중요합니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이고 국가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러시아의 경우와 같이 국가 지도자가 전쟁을 일으키고 남의 나라를 침략한다면 그 국가의 지도자는 거룩한 영이 아니라 악한 영에 사로잡혔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의 잘못된 결정 때문에 수많은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고 세계경제가 큰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러시아 뿐만 아니라 요즘 남북한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뉴스를 보면 마음이 답답합니다. 북한 지도자는 계속 미사일을 발사하고 핵실험을 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방역을 잘하고 인민들의 삶을 위해서 노력해도 부족할 판에 무기를 개발하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새로 임기를 시작한 한국의 대통령 부부는 주말마다 백화점 쇼핑을 하고 빵을 사먹고 영화를 보고 술을 마십니다. 경제위기/물가위기/안보위기를 맞이해서 24시간 항상 깨어 있어도 부족할 판에 가는 곳마다 사람과 교통을 통제하면서 권력놀음에 심취해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이 선한 사람인지 악한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성령을 히브리어로 “루아흐”(ruah)라고 표현을 했고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프뉴마”(pneuma)로 표현을 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태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고 있었습니다. 여기 나오는 “운행한다” 라는 말은 히브리어 “메라헤페트(תפחרט), 따뜻하게 알을 품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성령께서는 어미 새가 따뜻하게 알을 품듯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땅을 따뜻하게 품어서 생명이 나오게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후에 그 코에 성령을 불어넣어서 사람을 하나님과 소통하는 사람으로 만드셨고 노아의 홍수가 일어났을 때에는 바람(성령)을 불어넣어서 물이 줄어들고 땅이 드러나게 하셔서 노아의 가족들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신약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태어나셨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셨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공생애를 사셨고 성령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능력을 받아서 차별이 없는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렇게 거룩한 영, 선한 영이 역사하면 생명이 태어나고 공동의 선이 세워지고 교회가 세워집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생명이 살아나고 생명이 치료되지만 반대로 이 세상에는 생명을 파괴하고 공동체를 파괴하는 악한 영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 8장 말씀을 통해서 그 악한 영의 실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맞은 편, 이방인의 땅에 속한 거라사 지방에 가셨을 때, 길거리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이 사람은 오랫동안 옷을 입지 않은 채 무덤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옷을 제대로 입지 않고 무덤에서 지내는 것을 보면 이 사람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통 귀신에 걸리게 되면 두가지 현상이 나타나는데, 첫째로는 자기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귀신에게 끌려 다니게 되고 둘째로는 자해를 하면서 자기 몸을 해칩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이 사람도 자신을 통제하지 못해서 옷을 입지 않고 무덤에서 지냈고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동네 사람들이 이 사람을 쇠사슬로 묶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쇠사슬을 끊고 광야를 돌아다녔습니다. 오늘날에는 정신병에 걸렸다고 표현을 하지만 옛날 사람들은 귀신들렸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옛날 사람들의 생각이 더 정확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의학적으로는 저런 사람을 가리켜서 정신분열, 정신병에 걸렸다고 표현을 합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깊이 생각해 보면 선한 영이 아니라 악한 영이 그 사람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저 사람이 저런 행동을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이름을 묻자 그 사람은 자신의 이름이 군대라고 말을 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군대는 “레기온” 로마군단을 가리킵니다. 당시 거라사 지방에는 유대 땅을 통치하는 로마 군대가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군대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자신을 미치게 만드는 악한 영이 군대였습니다. 우리는 로마군대 귀신이 어떻게 이 사람 속으로 들어갔는지 알지 못합니다. 로마군대에서 일하면서 폭력을 행사하다가 정신이 미쳤을 수도 있고 반대로 로마군대로부터 큰 폭력을 당하고 나서 정신이 미쳤을 수도 있습니다. 군대의 폭력을 목격했거나 자신이 직접 폭력에 가담했거나 아니면 그 폭력의 희생자가 되었을 때, 사람은 정신이상/트라우마를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군대와 전쟁은 사람을 병들고 미치게 만듭니다. 오늘날에도 월남 전쟁이나 이라크 전쟁에 참가한 군인들이 제대 후에 트라우마에 시달려서 정신질환을 앓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6.25 전쟁도 마찬가지이고 우크라이나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쟁과 폭력은 가해자와 희생자 모두 사람을 미치게 만들고 병들게 만듭니다.

 

지난 6월 10일, 캐나다 Globe and Mail 신문에 당시 해병대로 월남전에 참전했던 78세의 한인목사가 자신이 양민학살에 가담했다는 것을 밝혔고 이러한 내용이 다큐멘타리 영화로 제작된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 당시 누가 적군이고 누가 민간인인지 구분이 안 되니까 그냥 마을을 통째로 불태웠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이 분도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신이 한 행동으로 인해서 고통을 받았을 것입니다. 한참 시간이 지나기는 했지만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군대 귀신들은 자신들을 죽이지 말고 대신 언덕에 있는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허락하자 귀신들이 이 사람에게서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고 귀신이 들어간 돼지들은 호수에 빠져서 죽었습니다. 이 사람이 소리를 지르며 돌아다니니까 돼지들이 놀라서 호수에 빠졌을 수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아마도 로마 군대가 돼지고기를 먹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돼지고기를 먹는 군대 귀신을 쫓아내셨고 덕분에 이 사람은 제 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악령을 쫓아내자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불편하게 생각했습니다. 기존질서에 익숙한 사람들이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로마군대와 귀신들린 사람과 돼지 떼가 있는 것을 더 편하게 생각했습니다. 잘못된 체제와 생각과 정신을 바꾸고 생명의 영, 정의의 영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쟁과 폭력의 영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항상 깨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6.25 전쟁이 일어난지 72년, 내년 2023년 정전협정 70주년이 됩니다. 한반도의 정전협정이 종전협정으로 바뀌어서 6.25 전쟁이 공식적으로 끝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크라이나 국민들과 같이 오늘날에도 전쟁귀신에 의해서 고통받는 이웃들을 생각하면서 악한 영을 따라가지 아니하고 생명의 영을 환영하고 생명의 영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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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두번째 주일 / 6월 두번째 주일
성령강림절, 지혜와 사귐의 성령 
잠언서 8:1-4, 22-31

정해빈 목사

 

 

 

 

2005년에 만든 다큐멘타리 영화 중에 [펭귄의 행진, March of the Penguins]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남극에 사는 펭귄들은 얼음 빙하 위에서 사는 동물인데 여름이 가까워지면서 빙하가 녹으면 물에 빠져 죽기 때문에 빙하가 있는 내륙 안쪽으로 이동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닷가에서는 물고기를 잡아먹을 수 있지만 빙하에서는 바닷가가 없기 때문에 물고기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부모 펭귄의 고생이 시작됩니다.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 펭귄들은 내륙 안쪽으로 이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대장 펭귄이 길을 알아보고 앞장서서 걸으면 나머지 펭귄들은 일렬로 서서 행진을 합니다. 2개월의 여행 끝에 목적지에 도착한 펭귄들은 짝을 맺어서 알을 낳습니다. 알을 낳은 엄마 펭귄은 아빠에게 알을 전해주고 나서 바닷가로 가서 먹이를 구하기 위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갑니다. 엄마 펭귄이 물고기를 가지고 오지 않으면 아빠 펭귄과 알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빠 펭귄은 알을 두 다리 사이 깃털 속에 품은 채로 엄마 펭귄이 음식을 가지고 올 때까지 4개월을 버텨야 합니다. 두 다리 사이 깃털 속에 있는 알이 얼음바닥에 떨어지면 알이 죽기 때문에 아빠 펭귄은 알에서 새끼가 나올 때까지 항상 조심스럽게 또 따뜻하게 알을 품고 있어야 합니다. 갑자기 눈보라가 몰아치면 약 1천 마리의 아빠 펭귄들은 동그랗게 서서 서로 체온을 유지하면서 눈보라와 씨름을 합니다. 맨 바깥쪽에 있는 펭귄이 가장 크게 추위를 느끼며 눈보라와 싸움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바깥쪽에 있는 펭귄들은 가장 안쪽으로 들어오고 안쪽에 있는 펭귄들은 바깥쪽으로 이동을 합니다. 그렇게 교대를 하면서 아빠 펭귄들은 알을 보호하고 서로를 지켜줍니다. 아빠 펭귄이 품고 있던 알에서 아기 펭귄이 태어나면 아빠 펭귄은 아기 펭귄 속으로 자신의 액체를 넣어주면서 아기를 돌봅니다. 멀리 바닷가로 간 엄마 펭귄은 물고기를 입속으로 최대한 많이 삼킨 다음에 다시 2개월을 걸어서 아빠와 아기가 있는 곳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는 모든 물고기를 토해내서 아빠와 아기를 먹입니다. 엄마 펭귄이 돌아오면 이번에는 아빠 펭귄이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 다시 먼 바닷가로 나갑니다. 이런 식으로 아빠 펭귄과 엄마 펭귄은 아기가 자랄 때까지 번갈아가면서 물고기를 잡아 옵니다. 그리고 아기 펭귄이 성인이 되면 부모는 성인이 된 펭귄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합니다.

 

[펭귄의 행진] 다큐멘타리를 보면 펭귄들이 얼마나 지혜롭게 자연의 시련에 대처하고 자녀를 키우고 서로 협력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펭귄들은 어디서 저런 삶의 지혜를 얻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만 지혜를 주신 것이 아니라 펭귄과 같은 동물과 식물에게도 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이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도록, 자연의 시련에 잘 대처하면서 생존할 수 있도록 모든 피조물들에게 알맞은 지혜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지난 6월 4일 CBC 라디오 방송에서 캐나다 북쪽에 사는 원주민들이 밤하늘에 보이는 북극성과 북두칠성과 은하수를 가리켜서 “여행자의 오솔길‘이라고 부른다는 방송을 들었습니다. 저 멀리 밤하늘에 북두칠성 거인이 살고 있는데 그 거인이 자신들을 위해서 방향과 길을 안내한다고 생각합니다. 언뜻 보면 미신 같지만 그들은 이런 생각을 통해서 우리들 보다 훨씬 더 자주 밤하늘을 쳐다보고 밤하늘을 경외합니다. 도시에서는 잘 안보이지만 원주민들이 사는 곳에 가면 북두칠성과 은하수가 바로 앞에서 쏟아지는 것처럼 환하게 잘 보입니다. 그들은 어린 자녀들에게 밤하늘의 북극성과 북두칠성과 은하수를 보면서 날짜를 계산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언제 보름달이 떠오르고 언제 초승달이 되는지, 언제 계절이 바뀌는지를 자녀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원주민들은 시계가 없어도 해와 달과 별의 움직임을 통해서 낮의 시간과 밤의 시간, 사계절의 시간, 언제 물고기를 잡아야 하고 언제 이동을 해야하는 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원주민들이 미개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일찍부터 자연의 변화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주민들이 자연의 변화와 이치를 깨닫고 이에 적응하면서 생존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생활의 지혜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펭귄들은 펭귄들 나름대로, 원주민들은 원주민들 나름대로의 생활의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이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할 수 있도록 모든 피조물에게 지혜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잠언서 8장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를 보며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혜를 의인화해서 지혜가 사람들을 향해서 나의 말을 들으면 너희가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잠언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지혜가 옆에 있었고 지혜가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서 세상 창조에 기여하였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주님께서 일을 시작하시던 그 태초에, 주님께서 모든 것을 지으시기 전에, 이미 주님께서 나를 데리고 계셨다. 주님께서 하늘을 제자리에 두시며 깊은 바다 둘레에 경계선을 그으실 때에도 내가 거기에 있었다. 그분이 지으신 땅을 즐거워하며 그분이 지으신 사람들을 내 기쁨으로 삼았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지혜가 하나님의 세상 창조를 도와드렸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지혜가 기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 곳곳에 하나님의 지혜가 숨어있었습니다. 식물이 땅 속에 씨앗을 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과정 속에도 하나님의 지혜가 숨어있고, 펭귄과 같이 동물들의 일상생활에도 하나님의 지혜가 숨어있고,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어서 창조된 사람의 마음에도 하나님의 지혜가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의 모든 곳에 하나님의 지혜가 숨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혜는 우리들을 깨우쳐주고 우리들을 위로하고 우리들을 일으켜 줍니다. 지혜는 우리가 하나님 뜻 안에서 살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 지혜는 우리들을 사랑하고 우리들을 보며 기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리석은 삶을 살지 않도록 하늘의 지혜를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지혜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혜가 성령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이 지혜이고 지혜가 성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는데 보혜사 성령의 다른 이름이 지혜입니다. 성령께서는 때로는 바람과 불처럼 강하게 역사하시지만 때로는 비둘기처럼 조용하게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서 잠언서 8장은 하나님의 성령을 지혜로 표현했는데 특히 여기 나오는 지혜는 히브리어로 여성명사를 사용했습니다. 마치 어머니가 자식에게 지혜를 가르쳐 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지혜는 어머니처럼 따뜻하고 부드럽게 우리를 가르쳐 주고 깨우쳐 줍니다.

 

오늘은 삼위일체주일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성령강림절 두번째 주일에 항상 삼위일체주일을 지켜왔습니다. 그림을 보시면 볼록한 타원형 3개가 서로 겹쳐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위에 있는 왕관 타원형은 성부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키고 왼쪽에 있는 십자가 타원형은 성자 구원자 예수님을 가리키고 오른쪽에 있는 비둘기 타원형은 보혜사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서로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게 존재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자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를 양육해 주십니다. 또 그 다음 그림을 보시면 초대교회 교인들이 성부/성자/성령님을 사람으로 표현해서 그린 그림, 3분이 한 식탁에 앉아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진실로 삼위일체 신앙은 협력과 사귐의 신앙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함께 일하시고 함께 협력하시고 함께 교제하십니다. 

 

잠언서 8장에서 지혜가 우리를 보며 기뻐하였다고 말한 것처럼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보며 기뻐하십니다. 삼위일체 신앙은 기독교가 협력과 사귐과 교제의 신앙이라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서로 협력하시고 상의하시고 교제하시는 것처럼, 우리들도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성도의 교제를 나눕니다. 기독교는 혼자서 신앙생활하는 곳이 아니라 함께 모여서 서로 교제를 나누고 서로 협력하면서 신앙생활하는 곳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풍성하고 기쁜 신앙을 삶 가운데서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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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첫번째 주일 / 6월 첫번째 주일
성령강림절, 더 기쁘고 더 자유롭게 
사도행전 2:1-8, 14-18

정해빈 목사

 

 

오늘은 성령강림절 주일이면서 동시에 우리 교회가 속한 캐나다연합교회 창립 97주년 기념주일이기도 합니다. 1925년 장로교회, 감리교회, 회중교회가 합쳐서 캐나다연합교회가 시작되었는데 올해로 97주년이 되었습니다. 그림을 보시면 교단을 상징하는 문장(Crest)을 보실 수 있습니다. 위아래로 볼록한 타원형은 물고기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사람을 살리는 어부가 되라고 말씀하셨고 물고기는 초대 기독교인들을 가리켰습니다. 헬라어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의 첫번째 단어를 합치면 익투스(ΙΧΘΥΣ)가 되는데 익투스는 물고기를 가리킵니다. 일반 사람들은 “익투스” 하면 물고기를 생각하는데 초대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를 떠올렸습니다. 가운데 보이는 X는 예수님을 가리키고, 왼쪽에 있는 성경책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를 강조하는 회중교회를 가리키고, 위에 있는 비둘기는 성령의 능력을 강조하는 감리교회를 가리키고, 오른쪽에 있는 불타는 떨기나무는 하나님의 영광을 강조하는 장로교회를 가리키고 아래쪽에 있는 알파와 오메가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왼쪽 가장자리 위에는 영어로 교단이름이 쓰여져 있고 왼쪽 가장자리 밑에는 라틴어 “우트 옴네스 우눔 신트,” 요한복음 17장 “모두가 하나되게 하소서”가 쓰여져 있습니다. 오른쪽 가장자리 위에는 불어로 교단이름이 쓰여져 있고 오른쪽 가장자리 밑에는 원주민들의 말 “아퀘 니아 테테와 네렌,” “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있습니다”가 쓰여져 있습니다. 가운데 색깔을 보면 하얀색, 노란색, 검정색, 빨간색이 나오는데 이것은 세상을 4가지 단계로 생각하는 원주민들의 전통을 가리킵니다. 자연에도 4계절이 있고 인생에도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 4단계가 있고, 세상의 방향에도 동/서/남/북이 있습니다.

 

이렇게 교단을 상징하는 문장(Crest)를 자세히 살펴보면 감리교회/장로교회/회중교회, 영어권과/불어권과/원주민들, 하나님의 주권과 말씀의 능력과 인간의 반응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캐나다의 모든 이웃들과 함께 서로를 존중하면서 함께 기뻐하고 함께 봉사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지난 2,000년 기독교 역사와 지난 150년 캐나다 역사를 존중하고, 자연과 원주민을 존중하고, 또 한인연합교회와 같은 소수민족의 전통을 지키면서 우리는 이곳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성이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교단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 5/27(금) - 5/28(토) 우리 교회가 속한 Shining Waters Regional Council 지역회가 열렸는데 주제에 해당하는 성경말씀이 고린도전서 12:7절 말씀이었습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 주시는 것은 공동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신 것은 공동이익을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공동이익, 공동선, common good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공동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모든 동물과 식물, 나무와 공기와 흙과 물, 원주민들과 인류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하라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각자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는 열광적인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개인적으로 자랑을 하거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공동선,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는 성령의 은사는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은사/선물을 개인적인 축복으로만 이해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기도도 응답받고 싶고 물질적인 축복도 받고 싶어 합니다. 방언도 하고 싶고, 병 고치는 은사도 받고 싶고, 예언의 은사도 받고 싶고, 남들이 갖지 못한 특별한 은사를 받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신 것은 공동이익, 공동선, common good을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에 다양한 성령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신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지역사회와 한인사회, 인류의 공동선을 위해서 함께 일해야 할 것입니다. 지역회 회의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온타리오의 빈부격차해소를 위해서, 인종차별철폐를 위해서, 원주민들의 권익을 위해서, 환경보호를 위해서, 청소년과 젊은이들을 위해서,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함께 노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진실로 우리는 공동이익, 공동선을 위해서 일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남들보다 특별한 은사가 있다면 그 은사는 공동선을 위해서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지난 6월 2일 온타리오 주 선거에서 조성준 장로님(노인복지부장관)께서 지역주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서 한인 최초로 3선에 당선되셨습니다. 장로님 성령의 은사를 받으셔서 앞으로 4년 동안 캐나다 온타리오 주의 공동선을 위해서 일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구약시대가 성부 아버지의 시대이고 신약시대가 성자 예수님의 시대라면 초대교회는 성령님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옛날 구약시대에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율법과 예언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옛날 히브리 백성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쉽게 가까이 할 수 없는 분이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면 죽기 때문에 하나님의 뒷모습만 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약시대의 하나님은 전통적인 집안의 가장으로서 아버지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서 신약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구약시대의 하나님이 아버지 같은 분이었다면 신약시대의 예수님은 어머니 같은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오셔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가난한 자를 먹이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신약시대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서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신 이후에 초대교회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시대는 성령의 시대입니다. 예수님이 더 이상 우리 곁에 계시지 않습니다. 마치 어린 자녀가 시간이 지나서 성인이 되면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것처럼, 초대교회는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힘들어 할 때, 성령께서 그들을 위로해주시고 깨우쳐주시고 진리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구약시대가 유아기 신앙이고 신약시대가 청년기 신앙이라면 초대교회 시대는 장년기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해결해주시고 예수님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던 시대는 이제 지났습니다. 이제는 교회가 스스로 알아서 길을 헤쳐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가 미래를 향해서 헤쳐 나가려고 할 때 힘든 일도 있을 것이고 어려운 일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 우리를 찾아와 주셔서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오순절 날에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방언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유월절에 처형당하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유월절과 부활절 날짜가 같고 오순절과 성령강림절 날짜가 같습니다. 유월절 후 50일째 되는 오순절은 본래 히브리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날이었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려면 법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법은 우리의 잘못을 깨우쳐 줄 수는 있지만 사람을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율법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지만 성령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문자는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영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그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오순절 날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여러 나라 말로 말하기 시작하였고 해외에서 온 동포들은 제자들이 자기들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사람을 가로막는 신분/인종/언어의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중국말을 못하는데 성령을 받아서 중국말을 하자 중국 사람들이 제 입에서 나오는 중국말을 알아들었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자 말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모든 인종이 함께 기뻐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면 인종의 장벽, 성의 장벽, 신분의 장벽, 언어의 장벽이 무너지고 아들들과 딸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모든 사람들이 고난을 견디고 미래를 꿈꾸는 새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아 더 기쁘고 더 자유롭게, 서로의 마음을 알고 서로의 말을 아는 역사가, 초대교회와 같은 성령의 역사가 우리 교회에서도 일어나기를 소망하면서 모두가 함께 참여하는 아름다운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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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일곱번째 주일 / 5월 다섯번째 주일
부활절, 빌립보의 어둠을 밝히다 
사도행전 16:16-21, 29-34

정해빈 목사

 

 

우리는 지난 5월 한 달 동안 가정의 달을 맞이해서 따뜻한 날씨 속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슬픈 소식도 있습니다. 지난 화요일(5/24) 미국 텍사스 주에서 18세 청년이 할머니를 총으로 쏜 후에 초등학교에 뛰어들어서 초등학생 19명, 어른 2명을 죽인 일이 있었습니다. 미국 텍사스 주에서는 18세부터 총을 구입할 수 있는데 이 청년은 생일날 소총을 구입한 후에 이와 같은 짓을 저질렀습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내린 것처럼 갑자기 어린 아이들을 잃은 부모의 심정은 말로 헤아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지금도 우크라이나에서 죽어가는 어린이들과 여성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어린이들과 여성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가 있는 것일까요? 미국이라는 나라가 자신의 안전을 스스로 지키고 개인의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라이다 보니, 또 총기회사들의 로비 때문에 총기구입을 강력하게 규제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누구나 총기를 구입할 수 있으면 이런 불행한 일은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운전이 위험하기 때문에 운전을 하려면 필기시험/실기시험을 보고 면허증을 따야 하는데 운전보다 몇 배 위험한 총기를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18세 청년이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번 경우와 같이 자신의 화를 억제하지 못한 사람은 화풀이를 하기 위해서 총을 쏠 것이고 그러다보면 선량한 사람들이 피해를 보게 될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바울이 아시아에서 2차 선교여행을 하다가 트로이/드로아에서 마케도니아 사람의 환상을 보고서 서쪽 마케도니아/유럽으로 배를 타고 건너가서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케도니아 사람이 바울에게 많은 사람들이 신체적/영적으로 고통받고 있으니 이곳으로 건너와서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해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본래 바울은 아시아 지역을 돌아다니려고 하였는데 이 환상을 보고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서쪽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덕분에 유럽 지역에 복음이 전해질 수 있었고 빌립보에서 자색 옷감 장수 루디아가 유럽 최초의 기독교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루디아는 유대인은 아니었지만 안식일에 유대인들과 같이 모여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루디아가 만드는 자주색 옷은 귀족들이 입는 옷이었기 때문에 만드는 과정이 힘들고 복잡했습니다. 루디아는 옷감을 물들이는 기술이 있었기 때문에 부를 쌓을 수가 있었고 바울은 루디아의 집에서 빌립보 교회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유럽 최초의 도시 빌립보에서 복음을 성공적으로 전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바울과 실라가 유럽 최초의 도시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했고 유럽 최초의 기독교인을 만들었고 유럽 최초의 교회를 세웠기 때문에 바울의 빌립보 선교가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읽어보면 바울과 실라가 불의한 경제와 불의한 권력으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번째로 불의한 경제가 바울과 실라를 박해하였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는 곳으로 가다가 귀신들려 점을 치는 노예 여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노예 여종의 주인들은 노예 여종으로 하여금 점을 치게 해서 돈을 벌었습니다. 이 노예 여종이 바울을 따라다니면서 바울을 귀찮게 하니까 바울이 예수의 이름으로 이 여종을 괴롭히던 귀신을 내쫓았고 이 여종은 더 이상 점을 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돈벌이가 끊긴 주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서 로마 관원들에게로 끌고 갔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유럽 최초의 도시라는 빌립보에서 노예제도가 있었고 귀신들려서 점을 치는 여성노예가 있었고 그 여성노예를 통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신매매가 있었고 여성이 학대당하였고 그런 학대를 통해서 일부 사람들이 돈을 벌었습니다. 기독교 복음은 성차별, 인종차별, 불의한 경제와 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빛이 들어오면 어둠이 물러가듯이 기독교 복음이 들어가면 모든 차별과 불의는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빛이 싫어서 그 빛을 박해하기도 합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150년 전, 200년 전 기독교가 조선 땅에 들어왔을 때, 서양종교라고 해서 오해도 있었고 박해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가 생명을 구원하고 인권을 증진시키고 사회를 개혁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 기독교가 전래되었을 때, 여성들은 자기 이름도 없었고 한글을 쓸 줄 아는 여성들도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세워지고 한글 성경이 보급되면서 여성들은 교회에서 자기 이름을 찾게 되었고 한글 성경을 읽으면서 한글을 배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누구 엄마가 아니라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아무개 성도님이 될 수 있었습니다. 복음은 여성을 해방시키고 사회를 개혁하고 사회를 평등하게 만들고 불의한 경제를 정의로운 경제로 만들어 줍니다. 바울과 실라는 귀신들렸을 뿐만 아니라 여러 명의 주인들에게 붙잡혀 있는 여성을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복음이 억눌린 사람을 자유하게 하고 복음이 불의한 경제를 자유하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기독교 복음이 들어가면 노예제도가 사라지고 성차별이 사라지고 불의한 경제가 사라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번째로 불의한 권력이 바울과 실라를 박해하였습니다. 이 여종의 주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서 로마의 관원들에게로 끌고 가서 이 사람들이 도시를 소란하게 하고 부당한 풍속을 선전하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로마 치안관들과 간수들이 바울과 실라의 옷을 벗기고 매질을 하고 발에 차꼬를 채운 후에 그들을 깊은 감방에 가두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로마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재판도 하지 않고 매질을 하고 감옥에 가두는 것은 불법이었습니다. 하지만 빌립보의 치안관들과 간수들은 여종의 주인들의 말만 듣고 그들을 지하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불의하고 부패한 권력이 바울과 실라를 박해하였습니다. 하지만 바울과 실라는 좌절하지 않고 감옥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서 감옥문이 열리고 모든 죄수의 수갑과 차꼬가 풀리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잠에서 깬 간수는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는 죄수들이 다 달아난 것으로 생각하고 자결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바울과 실라는 우리가 도망간 것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고 몸을 스스로 해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죄수 신분인 바울과 실라가 목숨을 끊으려고 하는 간수를 살렸습니다. 죄수 신분인 바울과 실라가 간수를 위로하였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간수에게 복음을 전했고 간수와 간수의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로마제국의 공무원이었던 간수는 로마제국의 법과 종교가 최고인줄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통해서 로마제국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참 생명의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위로하고 살리고 자유하게 하는 복음의 참 진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지하 감옥에서 차꼬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신앙과 믿음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감옥 안에서도 감사와 기쁨을 고백하였습니다. 지진이 일어나서 감옥문이 열렸을 때, 두려워한 사람은 바울과 실라가 아니라 간수장이였습니다. 참 신앙인은 어려운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고 오히려 어려운 환경을 뛰어넘는 사람이라는 것을 오늘 말씀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강제수용소에 갇혀 있었던 빅터 프랭클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를 이곳 강제수용소로 끌고 온 사람들은 우리의 건강, 우리의 재산, 우리의 자유,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을 다 빼앗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빼앗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지금의 비참한 상황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유의지입니다. 우리는 운명의 희생자들이 아니라 운명의 주인공들입니다. 주어진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강제로 포로수용소에 끌려왔지만 이 상황에 대처하는 우리의 의지/믿음/용기는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불의한 경제와 권력에 의해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그들의 신앙과 믿음과 의지는 누구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모함도 받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지만 노예를 해방시켰고 간수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빌립보의 어둠을 밝히는 빛의 사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의 사자로서 이 땅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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