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0:1-4, 12-17
눈의 우상과 귀의 말씀
정해빈 목사

 

1. 지지난 주일에 구약 성경이 인류에게 3가지 해방의 선물을 주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자연으로부터의 해방, 권력으로부터의 해방, 우상으로부터의 해방의 선물을 주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3번째 해방인 우상으로부터의 해방에 대해서 좀 더 깊게 묵상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출애굽기 20장 말씀은 십계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십계명은 구원의 조건일까요 아니면 구원의 선물일까요? 십계명은 구원받기 위한 조건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후에 선물/계약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지키면 내가 너희를 구원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노예에서 해방하였는데 이제부터는 노예로 살지 않고, 나의 백성으로, 자유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에서 주셨습니다.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벌 받는다 이런 뜻이 아니고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데 이제부터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자유의 선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십계명입니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 하나님이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해방시킨 신이다,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신 후에 첫째로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새번역 성경은 “내 앞에서”라고 했는데 옛날 성경은 “나 외에는” 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내 앞에서”가 맞을까요? “나 외에는”이 맞을까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과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의 뜻이 서로 다릅니다. 본래 히브리 성경은 “내 앞에서”라고 되어 있는데 히브리 성경을 헬라어 성경으로 번역하면서 “나 외에는”이라고 번역을 했고 그 헬라어 성경을 옛날 한글 성경이 그대로 번역을 했습니다. “내 앞에서”가 맞는 표현입니다. 본래 히브리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뜻은 하나님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부르면서 속으로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타종교인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불교 신자에게 부처님 버리고 하나님 믿으라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 백성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려면 똑바로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속으로는 엉뚱한 신을 믿으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럼 하나님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않으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느냐?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 제2계명이 나왔습니다.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제1계명과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제2계명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떤 모양이든지 눈에 보이는 형상을 만들어서 이것이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가만히 보면 제1계명과 제2계명 모두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십계명이 우상 숭배 금지를 제일 먼저 언급한 것은 우상 숭배가 하나님 신앙을 가장 크게 위협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가 하나님 신앙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어떤 형상을 만들어 놓고 이것이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바로 그것이 하나님 신앙을 가장 크게 위협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으로 보려고 하지 말아라, 눈에 보이는 것은 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이다, 이것이 십계명 1, 2계명의 메시지입니다.

옛날 모든 종교들은 신을 상징하는 형상이 있었습니다. 이집트의 종교에도 형상이 있었고 가나안의 종교에도 형상이 있었습니다. 형상의 종교는 사람을 수동적이고 기복적으로 만듭니다. 거기에는 도덕과 윤리가 없습니다. 정치/종교 권력자들은 큰 동상을 만들어 놓고 백성들로 하여금 그 동상에게 절을 하게 합니다. 이 동상에게 절을 하면 복을 받을 것이고 절을 하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백성들을 통제하고 백성들을 수동적인 존재로 만듭니다. 인터넷으로 어떤 사진을 보았더니 북한 사람들이 큰 동상 앞에서 절하고, 남한에서도 사람들이 큰 동상 앞에서 절하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동상 앞에서 절하는 것은 북한이나 남한이나 똑같은 것 같습니다. 일제 시대에도 일제는 신사참배, 천황에게 절을 하도록 강요했습니다. 히브리 백성들도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할 때 동상에게 절을 하도록 강요받았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집트를 탈출하고 나서 이제부터는 어떤 동상에게도 절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한 것입니다.

2.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시다, 그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느냐?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우리는 듣는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나신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시지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어떤 것도 신이 될 수 없다’고 그들은 주장했습니다. 고대 종교들이 눈의 종교라면 구약성경은 귀의 종교였습니다. 눈의 종교는 칼라 TV와 같고 귀의 종교는 흑백 TV와 같습니다. 고대 종교들은 눈의 종교입니다. 화려한 동상과 장식과 성전과 무당들이 백성들을 유혹합니다. 화려한 칼라 TV와 같습니다. 반면에 구약성경은 흑백 TV와 같습니다. 화려한 동상도 없고 성전도 없고 무당도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 백성들은 주변 종교들의 조롱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해서 바벨론에 끌려갔을 때, 바벨론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너희들의 신은 어디에 있느냐, 너희들의 신은 왜 동상이 없느냐, 너희들 신이 보잘 것 없으니까 너희들이 여기로 끌려온 것이 아니냐”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백성들의 조롱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들었던 것이 바로 귀의 종교, 말씀의 종교를 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종교들은 눈을 즐겁게 하는데 구약 신앙은 말씀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많은 백성들이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눈과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다른 종교와 우상을 섬겼습니다. 다윗/솔로몬이 화려한 성전을 지은 것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하나님으로 만들려는 시도였습니다. 우리도 다른 종교들처럼 눈에 보이는 화려한 종교를 가져보자는 뜻에서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역사가 지나고 보니 그 화려했던 눈의 종교들은 다 사라졌고 초라하다고 비웃음을 당했던 귀의 종교, 말씀의 종교, 유대교는 끝까지 살아남았습니다. 나라는 망해도 신앙은 살아남았습니다. 그것은 유대교가 말씀의 종교, 귀의 종교였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땅을 잃어버리고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무너져도 오직 말씀의 힘만으로 그 모든 고난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위해서는 칼라 책보다 흑백 책을 보는 것이 더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눈에 화려한 책은 그 화려함에 빠져서 더 이상 깊게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하지만 흑백 책은 책을 읽고 난 다음에 그 책의 내용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눈의 종교와 귀의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의 종교는 보고 즐기고 구경하는 종교입니다.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눈의 종교에는 윤리와 도덕이 없고 쾌락과 방종으로 빠지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귀의 종교는 귀에 들리는 말씀을 가슴으로 가지고 갑니다. 그 말씀을 깊이 묵상합니다. 그 말씀이 무슨 뜻일까, 그 말씀대로 살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깊이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귀의 종교는 삶의 종교가 되고 윤리와 도덕이 됩니다. 겉으로는 눈의 종교가 멋있고 화려한 것 같지만 그것은 보고 나면 잊혀집니다. 하지만 귀에 들리는 말씀은 내 삶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나를 깨우쳐 주고 나에게 지혜를 줍니다. 고난이 있을 때 말씀이 나를 지켜주고 보호해 줍니다. 히브리인들은 나라를 빼앗기고 땅을 빼앗겼지만 귀에 들리는 말씀을 붙잡았기 때문에 끝까지 고난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고 했습니다. 유진 피터슨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개와 함께 산책을 하는데 개가 죽은 사슴의 뼈를 발견했습니다. 개가 너무 기뻐서 뼈다귀를 물고 빨고 핥으면서 팔짝팔짝 뜁니다. 주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한다는 것이 저와 같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뼈를 푹 끓이면 사골이 되듯이 주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 사골 같은 은혜가 나에게 옵니다. 그러나 말씀은 우리에게 즐거움도 주지만 동시에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말씀 앞에서 고민을 합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신음하기도 합니다. 말씀 때문에 기뻐하고 때로는 말씀 때문에 고통스러워합니다. 말씀 앞에서 기뻐하는 것도 축복이고 말씀 앞에서 몸부림치며 고통스러워하고 신음하는 것도 축복입니다.

시대가 부패하고 타락하며 불의가 만연할 때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깊이 들었습니다. 때로는 이른 아침에 때로는 들판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깊이 들었고 그 말씀을 세상에 선포했습니다. 불의를 고발하고 공의를 외쳤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선포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언자들의 선포를 거부하고 핍박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선포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귀에 들리는 말씀이 그들의 가슴을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히브리 신앙은 말씀의 신앙입니다. 구약성경은 눈에 화려한 종교들 사이에서 귀에 들리는 말씀을 붙잡고 수천 년을 견뎌왔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눈에 보이는 화려한 건물/권력/재물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말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말씀이 우리를 지켜줍니다. 고난을 견딜 수 있는 것도 주의 말씀 때문이고 세상의 악을 멀리할 수 있는 것도 주의 말씀 때문입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가득할 때 우리들은 흔들리지 않고 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들으시고 그 말씀을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길이 보일 것입니다. 시편 1편이 고백한 것처럼, 우리들 모두가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여 새 힘과 지혜를 얻는 복 있는 사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