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8:1 - 8
몸으로 하나님 만나기
정해빈 목사



1. 지지난 주일에 ‘눈의 우상과 귀의 말씀’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고대 중동 종교들이 건물/성전/무당으로 이루어진 눈의 종교였다면 히브리 종교는 귀의 종교였습니다. 나라를 잃고 땅을 빼앗기고 포로로 끌려가고 성전이 무너지고 예배/제사가 없어져도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히브리 사람들은 수많은 고난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물론 히브리 신앙에도 눈에 보이는 신앙 전통이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제사장 옷을 입었고 제사를 드리기 위해 성막/천막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성막/천막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임시 건물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은 동상 만드는 것을 금지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나중에 다윗/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었는데 그것은 본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옛날에는 책이 귀했기 때문에 한 사람이 책을 읽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말씀을 귀로 듣고 암기했습니다. 우리 옛날 할머니들이 심청전 같은 판소리를 몇 시간 외웠던 것과 비슷합니다. 노래방/가라오케가 없었던 시절에는 노래 가사를 다 외웠는데 노래방/가라오케가 생기면서 노래 가사를 다 잊어버렸습니다. 옛날 히브리 백성들이나 초대 교회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을 귀로 들었습니다. 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면서 말씀의 힘으로 고난을 견뎠습니다. 귀로 듣는 말씀이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눈의 종교와 귀의 말씀’에 대한 결론 부분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눈의 종교가 아니라 ’귀의 종교’가 되어야 합니다. 보고 즐기고 구경하는 종교, 눈의 화려함과 쾌락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종교가 아니라 말씀을 귀로 듣고 묵상하는 종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귀의 종교에서 몸의 종교로 나아가야 합니다. 신앙의 최종 목적은 눈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도 아니고 귀로 하나님을 듣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멈추면 안 됩니다. 귀에 들리는 말씀을 온 몸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몸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몸으로 살지 않으면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신앙이 됩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서기관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서기관들은 도덕적으로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신앙이 좋은 평신도들이었고 서기관들은 말씀을 기록하고 필사하는 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매일 말씀을 읽고 낭독하고 귀로 들었습니다. 툭 건드리면 말씀이 튀어나올 절도로 말씀을 많이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말씀을 듣기만 할뿐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몸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몸으로 이웃을 사랑하지도 않았고 몸으로 이웃을 섬기지도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향해 위선자들이고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이 아니라 말씀을 듣기만 하고 말씀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이 눈에 보이는 동상을 만들지 말라는 이야기는 눈에 보이는 형상은 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깊게 생각해 보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만나려면 하나님을 내 몸 안에 모시고 살면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내 몸 안에 모시고 살면 굳이 동상을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니까 하나님 동상을 만들고 절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내 몸 안으로 모시고 살면 굳이 동상을 만들 필요가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바깥에 계신 것이 아니라 내 몸 안에 계십니다. 하나님을 몸 안으로 모시고 살면 나의 몸이 성전이 됩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사셨습니다. 하나님을 몸 안에 모시고 사셨습니다. 몸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셨습니다. 평생 몸을 움직이며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본래 직업이 목수이셨습니다. 몸을 움직이시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과 식사하시고 병자들을 만지시고 고치시고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런 삶을 통해서 예수님의 몸과 하나님의 영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2.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귀로 듣는 단계에 멈추지 않고 몸 안에 하나님을 모시고, 몸으로 하나님 말씀을 실천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오늘 말씀 창세기 18장 1절을 보면 “주님께서 마므레의 상수리 나무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나그네 복장을 하고 나타나셨을 수도 있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나그네 복장을 하고 나타났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천사들이 나그네가 되어 아브라함에게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들에게 달려가 엎드려 절을 하고 우리 집에 들어오셔서 발을 씻고 쉬었다 가시라고 말을 합니다. 나그네들이 집안으로 들어오자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빵을 만들게 하고 종들에게는 송아지를 잡아서 요리를 만들게 합니다. 8절에 보면 “그들이 나무 아래에서 먹는 동안에 아브라함은 서서 시중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옛날 중동 지방에서는 나그네가 집에 찾아오면 정성을 다해 대접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만약 도움을 요청하는 나그네를 대접하지 않으면 그것은 그 집안의 수치일 뿐만 아니라 온 마을의 수치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유목민들은 손님이 찾아오면 정성을 다해서 손님을 대접합니다. 아브라함이 이런 전통 때문에 나그네를 대접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단순한 대접에 그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자기 앞을 지나가는 나그네를 집으로 초대했고 가장 좋은 음식을 만들었으며 그들이 음식을 먹는 동안에 곁에 서서 시중을 들었습니다. 종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 자신이 직접 손님들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나그네들이 하나님이시거나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천사들이라는 것을 모르고 단순히 섬김의 마음으로 손님을 대접했을 수도 있고, 그들이 하나님이시거나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천사들이라는 것을 알고 손님을 대접했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의 섬김입니다. 길가는 나그네를 집 안으로 초청해서 자신이 직접 몸을 움직여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손님이 식사하는 동안 곁에 서서 시중을 들었습니다. 정성을 다해 나그네를 섬겼느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나그네들이 바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몸으로 나그네를 섬기는 아브라함의 태도를 보시고 내년 이맘때에 자식이 있을 것이라고 그를 축복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나기 전에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나 밤새도록 씨름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서 씨름을 했는데 그 사람이 몸으로 나타난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야곱의 몸 안에 들어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야곱의 몸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야곱의 마음이 씨름을 합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지 않고 몸으로 씨름을 했습니다. 몸으로 씨름을 하다가 허리를 다쳐 쩔룩거려야만 했습니다. 이 씨름을 통해서 잔꾀와 힘을 자랑하던 야곱이 겸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몸으로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가 성경 여러 곳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처형당하셨을 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지금 실패와 상처의 마음을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열심히 예수를 따라다녔지만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마음 속에 큰 상처를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그네로 변장해서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길을 걸어가면서 성경말씀으로 그들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회복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이 나그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제자들과 나그네가 여관 방에 모여 떡과 잔을 나눌 때에 비로서 제자들은 이 나그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합니다. 말씀을 깊게 묵상하면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하지만 말씀만 가지고는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말씀에 더해서 몸을 움직여서 함께 음식을 나눌 때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몸이 움직여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몸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입니다. 우리의 몸이 소중합니다. 신앙의 완성은 몸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나의 몸 안에 들어와서 나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내 몸이 너무 늙었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몸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도 몸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옷을 갈아입고 버스/지하철을 타고 교회에 나오는 것이 바로 몸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주방에서 설거지하고, 방을 청소하고, 이웃과 악수하고, 어린 아기들을 안아주고, 손님을 대접하고 시중드는 것 모두가 몸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들입니다. 건강에 대한 책을 읽다가 사람에게 가장 안 좋은 것 중의 하나가 의자에 오래 앉아 있는 것이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운동을 안 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 의자에 오래 앉아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래 앉아 있으면 빨리 죽고 몸을 움직여야 오래 산다고 합니다. 몸을 움직여야 내 몸도 살고 나의 신앙도 삽니다. 몸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몸으로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108번 절을 하는 전통이 있고 이슬람교에서도 몸으로 절을 하는 전통이 있는데 기독교는 몸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전통을 잃어버렸습니다. 본래 초대 교회 전통 중에 해가 뜨는 동쪽을 향해 손을 올려 기도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이런 전통을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신앙의 완성은 눈도 아니고 귀도 아니고 몸입니다. 몸을 움직여 찬양하고,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손님 대접하고, 꽃을 기르고, 아기들을 안아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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