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세번째 주일 / 5월 첫번째 주일
부활절, 갈릴리에서의 부활체험 
요한복음서 21:9-14, 17-19

정해빈 목사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사람들을 식탁으로 초대하시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 가난한 사람들과 소위 죄인이라고 멸시받는 사람들을 환영하시고 그들과 함께 식탁을 자주 나누셨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식사하시다 보니 예수님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먹기를 탐하는 자요 포도주를 즐기는 자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식사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기쁨을 미리 보여주는 식탁교제(table fellowship)였습니다. 우리가 주일예배를 드릴 때 말씀을 듣고 성찬식을 나누는 것처럼 예수님이 베푸신 식탁교제는 함께 모여서 하나님나라의 말씀을 듣고 함께 음식을 나누는 거룩한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카리켜서 “조건없는 식탁교제” 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가르치시고 가난한 자들을 먹이시고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나라를 가르치시고 가난한 자들을 먹이시고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시는 것이 식사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건없는 식탁교제”의 자리에서 하나님나라의 말씀이 선포되었고 병자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신학자들이 예수님의 공생애를 “조건없는 식탁교제” 라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조건없는 식탁교제에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시고 가난한 자를 먹이시고 병자를 치료하신 3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식탁교제는 하나님나라의 기쁨과 풍족함과 치유를 미리 경험하는 곳이었습니다.  

 

옛날 사회는 계급사회, 신분사회였기 때문에 식사하는 자리가 다 정해져 있었습니다. 주로 자기와 신분이 같은 사람들하고만 식사를 즐겼습니다. 높은 자리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있었고 낮은 자리에서 음식을 시중드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아니하고 사람들을 식탁에 초대하심으로서 하나님나라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차별없는 환영과 식사가 하나님나라의 시작임을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나라의 식탁교제는 기독교신앙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다른 종교들을 보면 가난한 자들을 식탁에 초대하고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그들의 병을 고쳐주는 장면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조건없는 식탁교제"의 자리에서 실천하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육체적, 정신적 온전함을 추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오천 명의 군중들을 먹이셨고 성목요일에는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에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제자들과 함께 식탁을 나누셨습니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성목요일에 하신 만찬이 최후의 만찬이 아니라 예수님의 식사가 부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신 것은 그들을 다시 일으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어부 일을 하고 있을 때, 주님을 버린 것 때문에 상처와 트라우마로 낙심하고 있을 때, 주님을 따라다녔을 때의 소명과 열정을 다 잃어버렸을 때, 주님께서는 그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을 먹이시고 위로하신 후에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들을 먼저 먹이신 후에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아직 부활을 깨닫지 못하고 지쳐있는 제자들을 일으키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제자들의 부활체험이 단 한 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곳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세번째로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고 오늘 말씀은 기록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부활의 주님께서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제자들에게는 예루살렘에서 나타나셨고 어떤 제자들에게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나타나셨고 어떤 제자들에게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나타나셨습니다. 특히 오늘 말씀 요한복음서 21장은 갈릴리에서 고기를 낚고 있는 7명의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셨다고 기록을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좀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갈릴리 어부들은 하나님나라 운동을 하시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큰 감동을 받고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제자들 중에는 종교개혁운동, 신앙운동, 심령회복운동을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다닌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을을 돌아다니시면서 하나님나라를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상한 심령을 회복시키시는 것을 보고 영적으로 은혜 받아서 예수님을 따라다닌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 제자들 중에는 사회개혁운동을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다닌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에 기록된 안식년과 안식일과 희년의 정신을 가르치시고 약자보호법과 빚을 탕감해주자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아서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나선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 제자들 중에는 헤롯과 로마제국을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 독립운동, 정치운동을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나선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나선 이유가 종교개혁운동이든, 사회개혁운동이든, 정치적인 운동이든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감동을 받고 제자가 되어서 예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이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서 어부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죄책감이 남아 있었습니다. 물고기들도 자신들의 마음을 아는지, 아무리 그물을 내려도 물고기가 잡히지 않습니다. 문득 베드로는 예수님을 처음 만난 날, 물고기를 잡지 못하다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서 물고기를 많이 잡았던 그 때를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문득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이 자신에게 한 번 더 나타나셔서 이번에는 오른쪽에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방향만 바꾸어서 그물을 내렸더니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지금 자신에게 나타나셨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물속에 뛰어들어서 예수님이 어디에 계신지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이것은 신비로운 체험이었습니다. 육신의 눈으로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물이 찢어지도록 물고기를 잡을 때, 바닷가에서 모여서 생선을 구우며 식사할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신들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제자들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았다면 그렇게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무언가 말할 수 없는 예수님의 현존이 느껴졌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위로와 당부의 말씀을 하고 계시다는 것이 충분히 느껴졌습니다. 바닷가에서 먹는 아침식사 자리가 단순한 아침식사 자리가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들을 찾아오셔서 다시 기운을 내서 일어서라고 자신들을 먹이시는 자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에 항상 하셨던 바로 그 식탁교제가 바로 지금 이 순간 재현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목소리가 그들의 마음에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너희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진실로! 아직도! 너희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을 합니다. “주님, 저희들은 아가페 같은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할 자신이 없습니다. 하지만 친구 같은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여라, 내 양을 돌보아라.”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식탁교제를 했던 것처럼, 내 양들을 돌보고 먹이고 치료해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양을 돌보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제자들처럼 스승을 버릴 때도 있고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먹이시고 우리를 다시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연약한 이웃과 가까운 이웃을 먹이고 돌보고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처럼 우리는 젊었을 때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지만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돌봄을 주고 돌봄을 받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주님의 음성을 기억하며 다시 일어서서 서로 먹이고 서로 보살피고 서로 돌보는 사명을 감당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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