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2:12 - 22
약한 지체가 더 귀하다

정해빈 목사

 

1. 최근 카톨릭 교황(교종)이 한국을 방문해서 세월호 유가족들을 만났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2014년 8월에는 교황이 한국을 방문했고 작년 2013년 10월에는 전세계 개신교를 대표하는 세계교회협의회(WCC)가 부산에서 열렸습니다. 그때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부산에 몰려와서 WCC는 정통 기독교가 아니라고 해서 행사 내내 반대 시위를 했습니다. 이번에도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카톨릭은 기독교가 아니라고 반대 집회를 열었습니다. 해외에서 손님이 오면 반갑게 환영을 해야지 자꾸 반대를 하니까 개신교 이미지가 점점 나빠집니다. 교황께서 이런 연설을 했습니다. “대부분의 선진국처럼 한국도 정치적 분열, 경제적 불평등, 자연환경 관리에 대한 관심사들로 씨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회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열린 마음으로 소통과 대화와 협력을 증진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과 취약계층 그리고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각별히 배려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한국 지도자들이 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이순신 장군을 소재로 만든 [명량]이라는 영화가 사상 최대 반응을 얻고 있다고 합니다. 토론토에서도 지난 8/15일 부터 다운타운에서 상영을 시작했습니다. 시대가 답답하고 우울하면 좋은 영화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2년 전 2012년에는 [레미제라블] 영화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1789년 프랑스 황제가 무너지고 자유/평등/박애 공화정이 세워졌는데, 얼마 못가서 공화정이 다시 무너지고 황제가 다시 등장했습니다. 그 시절 프랑스 시민들의 저항과 슬픔을 노래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옛날 시대가 지나고 더 좋은 시대가 와야 하는데, 그런 시대가 빨리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답답해하던 사람들에게 이 영화가 감동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의 노래가 들리는가? 성난 사람들의 노래가 들리는가? 다시는 노예가 되지 않을 사람들의 노래라네. 심방 박동 소리가 울려 퍼져 북을 울리고 내일이 밝으면 새로운 삶이 있으리라 프랑스는 혁명이 시작된 지 100년이 지나서야 오늘날의 민주주의 국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2012년에는 [레미제라블], 2013년에는 [변호인]이라는 영화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을 소재로 만든 영화인데, 고생 끝에 변호사가 되어 돈을 잘 벌던 사람이 우연한 기회에 민주화 운동을 하던 대학생들의 변호를 맡으면서 인권 변호사가 되어가는 과정을 잘 그렸습니다. 억울한 사람들의 인권을 위해서 일하다 보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동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고 결국에는 한 사람의 결단이 세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올해의 대표적인 영화로 상영 중인 [명량]도 [변호인]과 비슷한 메시지를 줍니다. 임금이라는 사람이 한양을 버리고 의주 땅으로 도망갈 때 이순신은 왜적과 싸워 나라를 구합니다. 이순신의 인기가 너무 올라가니까 잘 싸우고 있는 장군을 옥에 가두고 고문을 합니다. 이순신의 아들이 아버지에게 “임금이 아버님을 버렸는데 무엇 때문에 충성을 합니까?” 말을 합니다. 그러자 이순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충성은 임금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에게 하는 것이다.” 명량해전이 끝났을 때 이순신은 기뻐하는 대신에, 전쟁으로 억울하게 죽어간 백성들을 생각하며 통곡을 합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이런 영화에 열광하는 것은 영화 주인공 같은 지도자에 목이 마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책임을 회피하고 남의 탓으로 돌리고 무섭고 권위적인 지도자는 많아도 백성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돌리는 지도자는 많지 않습니다. 한국 뉴스를 보면 공동체를 살리는 소식보다는 공동체가 부서지는 소식이 더 많이 들려옵니다. 세월호 사고가 난지 4개월이 지났는데도 정부와 여당은 책임 규명을 회피합니다. 군대에서는 병사 한명이 구타당해 목숨을 잃었고 며칠 전에는 중학교 3학년 학생들이 중학교 1학년 학생을 때려 숨지게 만들었습니다. 군대귀신, 폭력귀신이 한국 사회 전체에 퍼져 있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강자가 약자를 괴롭힙니다. 사회의 정신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한자로 공동체(共同體)를 우리 말로 표현하면 “한 몸”이 됩니다. 공공 공자, 같을 동자, 몸 체자, 공동체는 같은 몸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서로 같은 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상대방을 때리고 괴롭히지 못할 것입니다.

 

2. 이런 면에서 볼 때 2000년 전에 사도 바울이 설교한 공동체/한 몸 신앙은 우리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줍니다. 바울은 로마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해외에서 중국 사람 10명이 모이면 식당을 만들고, 일본 사람 10명이 모이면 회사를 만들고, 한국 사람 10명이 모이면 교회를 만든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도 해외에서 10명이 모이면 회당을 만들어 그곳에서 율법을 읽고 배웠습니다. 바울 당시에는 본토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해외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오늘날의 한인 교회가 한인 사회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것처럼, 회당도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습니다. 로마의 대도시에는 여러 민족들이 섞여 살았는데 각 민족마다 자기들 나름대로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런 모임을 통해서 스스로를 보호하고 자치 경제를 유지했습니다. 미국 뉴욕에 유럽 이민자들이 몰려왔을 때, 이탈리아 사람들이 마피아 조직을 만들어서 스스로를 보호했던 것과 유사합니다. 원래 마피아는 이탈리아 자치 조직이었는데 나중에 범죄 집단이 되었습니다. 어쨌든 회당은 당시 로마 사회에서 상당한 권리와 안전을 보장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인 회당 안에서 나름대로 차별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남쪽지방에서 온 사람들은 자신들이 정통 유대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어느 지방 출신입니까? 나는 사마리아 출신입니다. 아 피가 섞인 동네 출신이군요. 당신은 어느 지방 출신입니까? 갈릴리 출신입니다. 아 가난한 동네 출신이군요.” 회당에서 같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도 어느 지방 출신이냐에 따라서 대우가 서로 달랐습니다. 같은 이스라엘 출신이면 그래도 처지가 낳았습니다. 회당 안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을 존경해서 회당에 출입하는 이방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로마 사람이 회당에 들어오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크게 환영을 했습니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유력한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당시 로마 사회에는 노예 출신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스스로 보호받기 위해서 회당에 가입하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회당은 유대교의 율법과 정결법을 엄격하게 지켜야만 회당에 들어올 수 있다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이런 차별은 초대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에는 예수 믿는 유대인들이 모여 교회가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 믿는 로마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초대 교회도 회당이 하는 방식대로 사람들을 차별했습니다. 높은 지위가 있는 사람이 교회에 들어오면 크게 환영을 하지만, 노예 출신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면 이런저런 조건을 달았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해 크게 분노했습니다. 이방 사람들에게 율법과 정결법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고 교회 안에 들어오는 사람에게는 차별을 두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지체는 여럿이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눈이 손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데가 없다’ 할 수가 없고, 머리가 발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데가 없다’ 할 수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몸의 지체 가운데서 비교적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들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바울은 교회를 설명하면서 손/발, 눈/귀를 비교했습니다. 손/발 중에 무엇이 더 귀합니까? 손이 더 귀합니다. 발은 맨 밑바닥에 있습니다. 눈/귀 중에 무엇이 더 귀합니까? 눈이 더 귀합니다. 귀는 얼굴의 가장자리 끝에 있습니다. 손/눈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교인을 가리키고 귀/발은 사회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바울은 보잘 것 없는 귀와 발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맨 밑에 있는 발과 맨 바깥쪽에 있는 귀가 제대로 역할을 해야 몸이 건강해 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발과 귀 같은 성도들을 더 귀하게 여기는 교회가 바른 교회라고 주장했습니다.

 

로마 제국이 말하는 공동체와 바울이 말하는 공동체의 생각이 서로 달랐습니다. 로마 제국은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 공동체 사상을 퍼트렸습니다. 노예와 주인은 한 몸이다, 노예들이 일을 잘 해야 주인들이 잘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로마 제국이 말하는 공동체는 노예들이 희생해서 주인을 섬기는 그런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공동체는 강자가 약자를 섬기고 발과 귀와 같은 성도를 더 귀하게 여기는 공동체였습니다. 교회가 제국의 정신을 본받지 말고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약한 지체를 더 귀하게 여기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룹니다.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고 잘못을 저질러도 책임지지 않는 그런 사회가 아니라, 약자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강자가 약자를 섬기는 그런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공동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