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절 후 아홉번째 주일                      
로마서 3:21-24, 10:9-13
바울의 하나님의 은혜는 공평하다
정해빈 목사

 

 

 

1. 우리는 그동안 성령강림절 절기를 맞이해서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처음 교회 이야기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도 훌륭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도 훌륭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5명을 꼽으라면 스데반/야고보/베드로/빌립/바울을 말할 수 있습니다. 해외 교포 출신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 처음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를 30년간 목회했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갈릴리에서 태어나 예루살렘에서도 목회하고 로마에서도 목회했던 베드로,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후에 사마리아 사람들과 아프리카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던 빌립에 대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울이 있습니다. 해외 교포 유대인으로 공부를 많이 하고 헬라어를 쓸 줄 아는 바울이 있었기 때문에 갈릴리 예수 신앙이 로마 사회로 퍼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없었더라면 기독교 신앙은 이스라엘 땅에 머물고 말았을 것입니다. 학자들 중에는 바울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변질시켰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바울이야말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계승한 진짜 제자였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활동했던 곳은 갈릴리 농어촌이었지만 바울이 활동했던 곳은 로마의 대도시였습니다. 삶의 활동 배경이 서로 달랐습니다. 배경과 형식은 달랐지만 바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로마 사회에 바르게 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바울은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다양한 글을 남겼습니다. 바울이 쓴 편지 덕분에 우리는 처음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신앙생활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에 대해서 알아야 할 주제가 참 많습니다. 바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그의 삶과 신앙을 알아야 하고 바울이 살았던 로마 사회를 알아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 바울의 전향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바울은 12지파 중에서 유대인 중의 유대인으로 꼽히는 베냐민 지파에서 태어났고 율법/정결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바리새파 교육을 받았습니다. 집안과 배경과 교육에 있어서 남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정통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자부심/우월의식이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영적으로는 스데반/예수님/초대 교인들을 만남을 통해서 육체적으로는 육체의 질병을 통해서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강자/기득권에 섰던 사람이 약자 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인종주의자/배타주의자/우월주의자가 예수 믿고 변화되어서 예수의 길을 따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도덕적으로 나쁜 사람이 아니었기에 회심한 것도 아니었고 종교를 바꾼 것도 아니었기에 개종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전향을 했습니다. 이쪽 길에서 저쪽 길로 삶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높은 자리에서 낮은 자리로 내려왔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으러 다니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사람을 꾸짖고 정죄했던 사람이 변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축복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바울처럼 처음에는 강자 편에 섰다가 나중에 약자 편에 선 사람들이 나옵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도 처음에는 이집트 제국의 왕자로 살았다가 나중에 자신이 히브리 노예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히브리 동포들이 이집트에서 억압 받는 것을 도와주다가 이집트 궁궐에서 쫓겨나 광야로 도망을 가야만 했습니다. 이집트 궁궐에서 가만히 있었더라면 한평생 편하게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고통받는 동포들을 구하기 위해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왔습니다. 그 덕분에 40년간 광야에서 도피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모세의 헌신 덕분에 히브리 백성들은 이집트 제국을 탈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보다 먼저 태어난 세례요한도 본래는 제사장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만히 있었으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사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례요한은 광야로 들어가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광야의 예언자, 재야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부패한 성전 쪽에 서지 않고 성전을 비판하는 입장에 섰습니다. 부패한 권력 쪽에 서지 않고 권력을 비판하는 쪽에 섰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예 태어날 때부터 가난한 갈릴리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높은 곳에서 태어났다가 낮은 곳으로 내려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낮은 곳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의 낮은 곳에 태어나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성육신/Kenosis/Incarnation의 신앙입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신앙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2. 트리나 파울로스가 쓴 [꽃들에게 희망을, Hope for the Flowers] 이라는 유명한 동화 책이 있습니다. 막 태어난 줄무늬애벌레가 어느 날 수많은 애벌레들이 하늘 끝까지 솟아있는 기둥을 따라 올라가는 것을 봅니다.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무언가 대단한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줄무늬애벌레는 다른 애벌레들을 밀치고 경쟁하면서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러다가 노랑애벌레를 만난 후에는 꼭대기에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지상에서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줄무늬애벌레는 꼭대기에 올라가는 열망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노랑애벌레를 남겨두고 다시 꼭대기로 올라가서 마침내 정상에 다다랐는데 그곳에서 그는 놀라운 사실 3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정상에는 아무 것도 없다, 둘째 그 사실을 알고도 모두 쉬쉬하면서 숨긴다, 셋째 자기가 올라왔던 기둥과 유사한 것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수많은 애벌레들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는 꼭대기를 향해서 무작정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편 밑에 남아있는 노랑애벌레는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기어가는 것이 아니라 누에고치가 되었다가 나비가 되면 쉽게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정상에 올라갔지만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었던 줄무늬애벌레는 자신이 버리고 떠났던 노랑애벌레가 나비가 된 것을 보고는 자신도 누에고치에 들어갔다가 나비가 됩니다. 그리고는 서로 경쟁하면서 무작정 꼭대기를 향해 올라가는 애벌레들에게 나비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그래서 꽃들에게 희망이 되도록 도와줍니다.

 

기독교 신앙은 올라가는 신앙이 아니라 내려가는 신앙입니다. 서로 경쟁하고 밀치면서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애벌레 신앙이 아니라 나비가 되어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다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꽃들에게 희망을 주는 신앙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특권의식에 사로잡혔던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나비가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과 희망을 전하는 나비 같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세상 사람들에게 전한 2가지 희망이 있었는데 첫째는 부활이었고 둘째는 은혜였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사람들에게 부활 신앙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열매라고 주장했습니다. 부활이 일어나려면 누군가가 죽음을 이기고 첫번째 부활의 문을 열어야 하는데 예수께서 그 부활의 문을 여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닫힌 문을 처음 여는 것이 어렵지 한번 문이 열리기 시작하면 문은 쉽게 열립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부활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으므로 이제 모든 사람의 부활이 시작될 것이라고 그는 굳게 믿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연약한 몸 때문에 부활을 더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이 부서지고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몸 위에 새로운 영광의 몸이 덧입혀지게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죽기 전에 부활이 일어나게 될 줄로 알았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바울의 부활 신앙은 틀렸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부활 신앙은 죽음과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부활 신앙이고, 죽음을 넘어서는 신앙이라는 것을 바울은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바울이 세상 사람들에게 전한 두번째 희망은 은혜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말씀을 보면 “은혜로 믿음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말이 나옵니다. We are saved by grace through faith. 은혜로 믿음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신앙이 바울을 시작으로 어거스틴과 루터와 칼빈을 거쳐 오늘날 개신교의 중요한 신앙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사람이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게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차별이 없습니다. 햇볕과 바람과 물이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하늘에서 공평하게 내려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은혜는 헬라어로 Karis라고 하는데, 카리스마/선물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모두에게 공짜로 선물을 주십니다. “은혜로 믿음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말은 하늘에서 공평하게 내려오는 은혜를 내가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 은혜대로 살면 구원이 온다는 뜻입니다. 은혜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선물이라면 믿음은 무엇이냐? 그 은혜를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그 은혜처럼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공짜로 받았으니 은혜받은 사람으로서 감사하게 사는 삶이 바로 믿음의 삶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바로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차별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완벽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다 지켜야 구원받는다면 우리들 중에 구원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나는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우리들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 자들입니다. 하루하루 햇살/공기/물을 받으며 사는 삶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더라면 우리들은 더 일찍 죽었을 것입니다. 내가 먼저 은혜를 받았으니 이웃들에게 은혜를 베풀며 사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은혜의 하나님을 본받아서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하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며 사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