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후 첫번째 주일 / 1월 두번째 주일

창립50주년,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니

누가복음 4:16 - 21

정해빈 목사




오늘부터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사역을 묵상하는 주현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4장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취임 설교를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복음서를 보면 성탄절 이야기 다음에 바로 예수님의 공생애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청소년 시절을 자세하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많은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거칠고 힘든 목수 일도 하셨을 것이고, 세례 요한을 따라 광야에 들어가서 기도 생활도 하셨을 것입니다. 갈릴리 농민들과 어부들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도 보셨을 것이고, 예루살렘 성전과 궁궐도 보셨을 것입니다. 이런 시간이 지난 후에 대략 30세가 되셨을 때, 예수께서는 자기가 자라신 갈릴리 나사렛에 오셔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는 이사야 61장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주님의 영의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 부으셔서....” 이렇게 설교를 시작하셨습니다. 보통 어떤 사람이 공직에 오르면 제일 먼저 취임 연설을 합니다. 취임 연설을 들어보면 그 사람이 앞으로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취임 설교를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바로 이 말씀 속에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사역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자유와 해방과 용서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주님께서 시작하신 이 사역을 계속하라고 교회를 세워 주셨습니다.


주님의 영의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 부으셔서...” 예수님은 공생애를 그냥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 주의 영의 기름 부음을 받고 나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왕이나 제사장이나 예언자가 취임할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하나님의 종으로 임명하고 축복했다는 뜻에서 그 사람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50년 전 엘리자베스가 영국 여왕으로 취임할 때도 상징적으로 그 사람 머리 위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기름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종으로 선택받았고 그 사람이 해야 할 직책이 신성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기름 붓는다는 말(anoint)에서 메시야/그리스도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사람이 메시야/그리스도입니다. 하지만 왕이나 제사장이나 예언자가 취임할 때만 기름을 붓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이가 어린 사람도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사무엘기상 16장을 보면 사무엘 선지자가 당시로는 시골이었던 베들레헴을 찾아가서 이새의 막내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부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린 다윗에게 기름을 부음으로서 비록 지금은 나이도 어리고 힘도 없지만 앞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려주었습니다. 어린 자녀를 축복하고 그의 미래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도 우리 자녀들에게 영적인 기름을 부어달라고 기도하면 좋을 것입니다. 이 아이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좋을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사람들은 메시야를 3가지 방식으로 이해했습니다. 첫째로 사람들은 독립 전쟁을 이끄는 전쟁 용사를 메시야로 이해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자는 무엇보다 능력이 있어야 한다, 침략자를 무찌를 만한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군대 장군을 메시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메시야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칭 메시야를 따라서 오랫동안 독립전쟁을 일으켰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종말에 오시는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아직은 때가 오지 않았다, 역사의 마지막 때가 되면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메시야가 나타나서 자신들을 일으켜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두번째 메시야 이해입니다. 그런데 유대교 신비주의, 기독교 신비주의가 이해하는 세번째 메시야 이해가 있습니다. 진짜 메시야는 군대 장군도 아니고, 종말에 오시는 메시야도 아니고, 우리들이 메시야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들 모두가 작은 메시야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은 너무 크고, 너무 문제가 복잡하고, 너무 많이 망가졌기 때문에 한 사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것은 마치 큰 조각 그림을 퍼즐로 맞추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퍼줄 맞추기 해 보셨습니까? 큰 그림을 퍼즐로 맞추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기저기 흐트러진 수백 개, 수천 개 퍼즐을 하나씩 하나씩 집어서 천천히 조각을 맞추어야 합니다. 한명이 퍼줄을 다 맞출 수도 없습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협력해서 조각을 맞추어야 큰 그림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망가지고 흐트러진 큰 퍼줄과 같습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한명의 뛰어난 메시야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 명의 메시야들이 나와야 합니다. 우리들이 작은 메시야가 되어서 함께 노력해야만 망가지고 흐트러진 이 세상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혼자서 큰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큰 사랑을 가지고 작은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메시야 중의 메시야 되시는 예수님은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고 주님께서 내게 기름 부으셨다고 말씀하시고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예수께서 우리의 구원자/메시야 되심을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사역은 주님만 하시는 사역이 아니라 우리들도 해야 하는 사역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작은 메시야가 되어서 주님께서 시작하신 사역을 계속 이어가라고 우리들을 부르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세상을 어지럽혀 놓고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메시야를 보내달라고 기도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 우리들을 향해서 너희가 세상을 어지럽혀 놓았으니 너희가 작은 메시야가 되어서 세상을 치료하여라, 너희가 서로가 서로에게 메시야가 되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 끝부분을 보면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은혜의 해는 50년째가 되는 해, 희년(禧年)을 가리킵니다. 안식일이 발전해서 안식년이 되었고 안식년이 발전해서 희년이 되었습니다. 일주일에 하루는 종도 쉬고 동물도 쉬라는 뜻에서 안식일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땅을 6년간 경작했으면 7년째 되는 안식년에는 땅을 1년 쉬게 하여라, 혹시 누군가가 너의 종이 되어서 그 종을 6년간 부려 먹었으면 7년째 되는 안식년에는 그 종을 풀어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면 49년이 되고 그 다음 해가 50, 희년이 됩니다. 희년이 되면 남에게 산 땅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희년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해이고 이웃에게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는 해입니다. 희년은 기쁨의 해이고 축제의 해이고 감사의 해입니다. 50년이 되면 사람들은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빚을 탕감해 주고 나눔을 실천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 희년 사역을 하라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성령을 부으시고 기름을 부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올해로 우리 교회가 창립50주년 희년이 되었습니다. 올해는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해이고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해입니다. 지난 50년 동안 우리를 이끌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지난 세월을 감사드리고 앞으로의 시간을 바라보면서 희년 사역을 실천하십시다. 민족과 인류의 화해를 위해서, 창조 세계의 보존을 위해서 일하는 우리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시편 23편 시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께서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주님께서 나를 귀하게 여기시고 주님을 위해서 일하라고 내 머리에 기름을 부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우리들을 작은 메시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들이 바로 주님의 일꾼이요 종이요 메시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시고 부자도 사랑하시지만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더 사랑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만 살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 받은 일꾼이 되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50th anniversary, you anoint me with oil

Luke 4:16 - 21


Jesus went back to Nazareth, where he had been brought up, and as usual he went to the meeting place on the Sabbath. When he stood up to read from the Scriptures, he was given the book of Isaiah the prophet. He opened it and read, "The Lord's Spirit has come to me, because he has chosen me to tell the good news to the poor. The Lord has sent me to announce freedom for prisoners, to give sight to the blind, to free everyone who suffers, and to say, <This is the year the Lord has chosen.>" Jesus closed the book, then handed it back to the man in charge and sat down. Everyone in the meeting place looked straight at Jesus. Then Jesus said to them, "What you have just heard me read has come true today." (Luke 4:16 21)


To anoint someone means to say that someone is special, designated for greatness. When the psalms 23 says “You anoint me with oil,” he is saying, God, you have given me the gift of being special, and I accept the responsibility that comes with that gift. One of the most important words in Christian and Jewish theology derives from the custom of anointing someone with oil to mark that person as special. The word is “messiah,” which literally menas God’s anointed one. Messiah does not have to be one person. Some Jewish mystics says that the problems of the world are too great for one person to solve, however powerful. Rather, every one of us has to be a “messiah in miniature,” doing something, however small, to repair and redeem the world.


When Jesus began his public ministry, Jesus proclaimed “The Spirit of the Lord is upon me because he has anointed me with oil to bring good news to the poor.” As God anointed Jesus with oil as the way of appointing and blessing his ministry, we also believe that God anoints us with oil as the servant, messenger, and the people of God. Mother Teresa said, “Few of us can do great things but all of us can do small things with great love.” God has anointed my head with oil. God expects me to do my share to bring about God’s kingdom. As the small messiahs, we are called to proclaim release to the captives and recovery of sight to the blind, to let the oppressed go free, and to proclaim the year of the Lord’s favour.’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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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주일 / 성탄절 후 첫번째 주일

신년주일, 선하심과 인자하심

시편 25:1 - 10

정해빈 목사




페르시아의 어느 왕이 신하들에게 마음이 슬플 때는 이것을 보고 위로를 받고 마음이 기쁘고 흥분할 때는 이것을 보고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는 물건을 찾아오라고 말했습니다. 신하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물건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어느 지혜로운 신하가 반지를 만들어서 왕에게 주면서 이 반지에 쓰여 있는 글자를 항상 생각하면 마음이 슬플 때는 위로를 받고 마음이 기쁘고 흥분할 때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 반지에 쓰여진 글자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글자였습니다. 지난 한해 마음이 힘들고 슬프셨던 분들은 이 글자를 보면서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지난 한 해 마음이 기쁘고 흥분했던 분들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글자를 보면서 마음을 가라앉히시기 바랍니다. 나를 힘들게 했던 시간도 지나가고 나를 기쁘게 했던 시간도 지나갑니다. 시간이 지나간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시간이 지나가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을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가기 때문에 과거에서 벗어나서 미래로 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에게 새로운 시간/기회를 주셨습니다. 어제 잘못했어도 오늘 더 잘하라고 우리들에게 새로운 시간/기회를 주셨습니다.


새해가 되면 많은 성도님들이 올 한해 나를 가르치고 인도해 줄 말씀을 찾습니다. 교회들 중에는 새해가 되면 성경구절이 기록된 책갈피를 모아놓고 성도님들이 앞으로 나와서 책갈피를 제비 뽑도록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뽑은 성경구절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생각해서 일 년 동안 지키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일 년 동안, 아니 평생 동안 내 삶에 적용해야 할 좋은 성경 말씀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성경에는 내 삶에 적용해야 할 많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하나를 소개하자면 선하심과 인자하심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시편 23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른다고 했습니다. 내가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라다닌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선하시고 인자하신 주님의 은혜가 나를 항상 따라다니도록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나를 따라다니는 주님의 은혜와 함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가끔 사람들 중에는 인생에서 성공하기 위해 열심히 앞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내버리고 앞을 향해 빨리 달려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인생을 달려가면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그런 사람들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어느 등산가가 원주민들과 함께 산을 오르는데 어느 날 원주민들이 더 이상 길을 가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길을 걸어가지 않느냐고 물어보니까 원주민들이 우리가 너무 빨리 걸어와서 우리들의 영혼이 못 쫓아오니까 영혼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와 함께 걸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없는 성공은 불행한 성공이 되기가 쉽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악착같이 노력해서 빨리 부와 권력을 차지했지만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없기 때문에 그 끝이 아름답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진정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빨리 간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니라 바른 목적지를 향해서 걸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는 목적지가 잘못되면 아무리 빨리 가도 소용이 없습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를 따라다니는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함께 길을 걸어가는 사람만이 후회없는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주의 선하심은 공의로우심을 가리킵니다. 선의 반대말은 악입니다. 주의 공의로우심이 항상 나를 따라다니면서 나에게 속삭입니다. 빨리 성공하려고 하지 말고 정의롭게 성공하십시오. 악을 행하지 마십시오. 때로는 손해볼 지라도 선을 행하십시오. 주의 선하심이 나를 따라다니면서 나에게 말을 합니다. 주의 인자하심은 주의 자비를 가리킵니다. 마찬가지로 주의 자비가 나를 따라다니면서 나에게 속삭입니다. 인자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십시오. 까다롭고 이기적이고 인색한 사람이 되지 말고 너그럽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십시오.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따라다니면서 나에게 말을 합니다. 오늘날 선하고 인자한 사람은 바보 취급을 받기도 합니다.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약삭빠르고 이기적이어야 한다고 사람들이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선하고 인자한 사람은 바보같고 가는 길이 느린 것 같아도 그런 사람들이 세상을 바꿉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사람이 있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선하고 인자한 마음이 없는 사람이 성공하면 그 사람은 세상을 어지럽힐 가능성이 높습니다. 독한 사람은 세상을 어지럽히지만 선하고 인자한 사람은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시장에서 생선 파는 할머니가 모은 돈으로 더 어려운 사람을 돕고 있다는 이야기라든지, 한국의 오뚜기 식품 회사가 세상에 알리지 않고 조용하게 심장병 어린이 4000명을 수술했다는 이야기와 같이 선하고 인자한 사람들이 세상을 바꿉니다. 앞으로 케찹이나 라면을 살 때는 오뚜기 회사 제품을 구입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25편도 시편 23편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님, 내가 젊은 시절에 지은 죄와 반역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님의 자비로우심과 선하심으로 나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주님은 선하시고 올바르셔서 죄인들이 돌이키고 걸어가야 할 올바른 길을 가르쳐 주신다.” 과거에는 내가 주님을 거역했지만 이제부터는 주님의 자비로우심과 선하심으로 나를 기억해 주시고 걸어가야 할 올바른 길을 가르쳐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인생을 앞만 보고 너무 빨리 걸어가면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쫓아오지 못하게 됩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없는 성공은 무의미합니다. 그 성공은 이기적인 성공이 되거나 세상을 어지럽힐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약 우리가 반지에 어떤 글자를 새겨 넣고 그 글자를 매일 보면서 하루하루를 시작한다면, 그 글자는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선한 사람이 되십시오. 정의롭고 반듯한 사람이 되십시오. 악을 행하지 말고 선을 행하십시오. 인자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십시오. 인색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너그럽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십시오나를 향해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기억하면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함께 동행하며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New Year, goodness and mercy shall follow me

Psalms 25:1 10


To you, O Lord, I lift up my soul. O my God, in you I trust; do not let me be put to shame; do not let my enemies exult over me. Do not let those who wait for you be put to shame; let them be ashamed who are wantonly treacherous. Make me to know your ways, O Lord; teach me your paths. Lead me in your truth, and teach me, for you are the God of my salvation; for you I wait all day long. (Psalm 25:1-5)


Be mindful of your mercy, O Lord, and of your steadfast love, for they have been from of old. Do not remember the sins of my youth or my transgressions; according to your steadfast love remember me, for your goodness’ sake, O Lord! Good and upright is the Lord; therefore he instructs sinners in the way. He leads the humble in what is right, and teaches the humble his way. All the paths of the Lord are steadfast love and faithfulness, for those who keep his covenant and his decrees.(Psalms 25:6-10)


“Goodness and mercy shall pursue me.” That means they will not only accompany me and bless my life. They will run after me and find me where I am. It is vision of a world where goodness and mercy will characterize every stage of the lifespan, where adolescents will be merciful to one another instead of treating one another cruelly out of their own insecurity. We cannot persuade God that we deserve God’s unearned love. But we can express confidence, born of all our experiences with God, that we will blessed with God’s love, not because of who we are but because of God is. Celebrating and beginning New Year, we pray that we walk with God slowly, so that God’s goodness and mercy will accompany, bless, run after, and find me where I am.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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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 송년주일 / 12월 네번째 주일

성탄절,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누가복음 2:8-14

정해빈 목사



오늘은 우리들 모두가 기뻐하고 축하하는 날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구세주가 오늘 태어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우리는 홀로가 아닙니다. 예전 시골에서는 성탄절 새벽에 집집마다 다니면서 새벽송을 부르곤 했습니다. 온 동네에 눈이 하얗게 내리던 새벽에 가정을 방문해서 찬송을 부르고, 메리 크리스마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인사를 했습니다. 가정을 축복하고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들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가 태어나셨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본래 구세주라는 말은 세상을 구원하실 분을 가리키는데 본래 이 말은 로마 황제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옛날 로마 사람들에게 구세주가 누구냐고 질문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마 황제가 구세주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황제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면 시민들은 황제가 전쟁을 이기고 평화를 가져 왔다고 해서 그를 구세주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황제가 아니라 아기 예수님이 구세주라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 두 명의 구세주가 있는데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방식이 서로 다릅니다. 로마 황제는 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서 평화를 가져왔고 예수님은 정의를 통해서 평화를 가져왔습니다. 어떤 평화가 참 평화냐, 원수를 무찌르고 전쟁에서 무조건 이기는 것이 참 평화냐 아니면 정의를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것이 참 평화냐, 오늘 말씀은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아기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시는 데 있습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구원해 주시고 평화를 주십니다. 내가 주님을 기다립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림이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합니다.” (시편 130). 시편 시인이 고백한 것처럼 신앙의 선배들은 오랫동안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렸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다림에 응답하셔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가만히 앉아 계시는 분이 아니라 미래에서 현재로 오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하늘에 머물러 있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죄와 고난이 가득한 세상, 낮고 천한 곳으로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하고 어두운 그늘에 숨어 있을 때 그를 찾아오셨고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고 죄책감 속에 숨어 있을 때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갈 길을 알지 못하고 방황할 때 그를 찾아오셨고 아브라함이 후손을 걱정할 때 그를 찾아오셔서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을 때 불타는 떨기나무를 통해 나타나셔서 그가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독교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높은 곳을 버리고 낮고 천한 곳으로 내려와서 우리를 도와주고 구원해 주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오시는 가운데 있다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도 오셨고 지금도 오시며 미래에도 오십니다. 결정적으로는 아기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잃어버린 자들을 찾기 위해 아기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관계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찾고 사랑하기 때문에 혼자 있지 않고 상대방과 삶을 나누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고 피조물과 함께 아픔과 사랑을 나누기 위해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사랑은 또한 희망입니다. 상대방을 참으로 사랑하는 자는 상대방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상대방을 돕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와 불의와 고난 속에서 고통당하는 것을 보시고 우리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우리를 먹이시고 용서하시고 깨우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죄와 불의와 고난에서 우리를 건지셔서 은혜와 평화와 생명이 넘치는 새로운 삶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영화 중에 [미녀와 야수, Beauty and Beast]가 있습니다. 저주를 받아서 야수가 된 채로 성에 갇혀 사는 젊은 왕자가 여인을 만나게 되고 그 여인을 통해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자 저주가 풀려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성탄절 이야기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본래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는데, 죄의 저주에 사로잡혀서 하나님께서 주신 본래의 인간성을 잃어버리고 야수/괴물/동물이 되었습니다. 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들을 사랑해 주셨고 우리들은 그 사랑을 통해서 죄에서 해방되어 본래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죄와 불의와 고난에 사로잡힌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해,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선한 목자 되시는 주님, 우리의 아픔을 아시는 주님, 우리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주님, 가짜 구세주가 아닌 진짜 구세주가 오늘 태어나셨습니다. 우리는 홀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구원받았고 회복받았습니다. 참 평화를 얻었습니다. 죄와 저주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여 준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기뻐하고 또 기뻐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Christmas, a Savior was born for you

Luke 2:8 - 14


That night in the fields near Bethlehem some shepherds were guarding their sheep. All at once an angel came down to them from the Lord, and the brightness of the Lord's glory flashed around them. The shepherds were frightened. But the angel said, "Don't be afraid! I have good news for you, which will make everyone happy. This very day in King David's hometown a Savior was born for you. He is Christ the Lord. You will know who he is, because you will find him dressed in baby clothes and lying on a bed of hay." Suddenly many other angels came down from heaven and joined in praising God. They said: "Praise God in heaven! Peace on earth to everyone who pleases God." (Luke 2:814)


According to Luke, an angel said to the shepherds, “a Saviour was born for you today.” A Saviour was originally named to the Roman Emperor who conquered enemy. Ancient Roman people called the Emperor a Saviour since they thought that he brought peace to the world by victory. But today’s scripture proclaimed that new Saviour was born today. He would bring peace to the world not by victory but by justice. Theologically speaking, Christmas indicates the revelation of God. God comes down to us to save us and to be with us. God came to Adam, when he committed a sin and hid themselves in the shadow. God came to Cain, when he murdered his brother. The coming of God, incarnation, shows how God loves us and wants to save us. As a novel [Beauty and Beast] shows, we were created in God’s own image once, but we were cursed by sin and finally lost the image of God. However God in Jesus came down to us and helped us recover our original image. “Don't be afraid! I have good news for you, which will make everyone happy. This very day in King David's hometown a Savior was born for you. He is Christ the Lord.” Amen.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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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네번째 주일 / 12월 세번째 주일

성탄주일,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마태복음 1:18 - 25

정해빈 목사 



성경에는 4개의 복음서가 있는데 오직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만 성탄절 이야기를 말합니다. 누가복음이 마리아 이야기를 기록했다면 마태복음은 요셉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성탄절이 되면 사람들은 보통 누가복음에 기록된 마리아 이야기를 많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에 나오는 요셉 이야기도 빼 놓을 수가 없습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서 약혼녀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용하게 파혼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주의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니 그를 아내로 맞이하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요셉은 이 말에 순종해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 들였고 그의 아들을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는 히브리어로 여호수아,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이고, 이사야가 예언한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을 가리킵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약혼자가 아이를 가졌다는 것은 분명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 아이가 장차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것이라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 순종했습니다. 진실로 요셉은 의로운 남자였고 사려심이 깊은 남자였습니다.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고 생명을 보호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줍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는 남녀평등의 시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을 무시하고 여성을 희롱하고 생명을 우습게 여기는 남성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성령의 지시에 따라 여성과 아이를 보호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만약 이 세상에 희망이 있다면 연약한 생명이 자랄 수 있도록 보호하고 양육하는 요셉 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셉이 있기 때문에 마리아가 생명을 낳을 수 있었고 어린 예수가 안전하게 자랄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을 향해서 요셉 같은 사람이 되라고 말합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기꺼이 아버지의 역할을 다하려는 사람이 될 때, 이 세상에는 더 많은 예수가 태어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마리아처럼 연약한 생명을 붙들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버지 없이 홀로 자식을 키워야 하는 여인도 있고 가난하고 위험한 환경에서 자식을 키워야 하는 가정도 있습니다. 마리아는 옛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내가 이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합니까?” 걱정하는 가정이 있다면, 이 험난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걱정하는 부모가 있다면, 우리가 그들을 격려해 줍시다. 우리가 그들의 아버지가 되어 줍시다. “지금은 힘들지만 이 아이를 잘 키우십시오, 그대의 아이가 자라서 세상을 구원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격려해 줍시다. 어린 생명들이 고난을 견디고 자랄 수 있도록, 그들이 성장하여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도록 어린 생명을 양육하고 보호하고 후원하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Out of four Gospels in the Bible, only Matthew and Luke talk about the Christmas stories. While Luke centers the story on Mary’s angle, Matthew tells us how Joseph responded to Mary’s birth. Joseph was at first surprised when he heard that his fiancee Mary was pregnant. So he wanted to cancel his marriage quietly. But the Holy Spirit touched his heart and led him to be the father of Jesus. God chose Mary to be the mother of Jesus and, equally, God chose Joseph to care for them. If Joseph had chosen to accuse Mary, the traditional punishments could have meant death or ostracism, which means of driving person from a society or group. If Joseph had chosen to leave Mary, the Christmas story would have been impossible. But God inspired Joseph to take a risk and courageously, protect Mary and the baby. Today’s Christmas story shows the role model of a man and father. If there was no man like Joseph, Mary would have been impossible to give birth to Jesus. Today’s story shows that the world needs more and more people like Joseph who are willing to take a risk and choose to protect mother and baby who are living in vulnerability. Even today, the Holy Spirit touches and encourages us to be the person of Joseph. Let us bless new mother and new baby no matter where they come from. Let us welcome and bless them so that they survive with love and care in the world. Let us pray that more and more Jesus, Messiah, Emmanuel are able to be born in the world.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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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세번째 주일 / 12월 두번째 주일

대림절, 메마른 땅에 기쁨을 주소서

이사야서 35:1-10

정해빈 목사 




1. 요즘 사람들 사이에 유행하는 유머 중에서 없다 씨리즈유머가 있습니다. 10대는 철이 없다, 20대는 돈이 없다, 30대는 집이 없다, 40대는 정신이 없다, 50대는 일이 없다, 60대는 낙이 없다, 70대는 이가 없다, 80대는 영감이 없다, 90대는 다 필요 없다. 옛날과 비교해 보면 우리들은 요즘 많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핸드폰도 있고 컴퓨터도 있고 냉장고도 있고 자가용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없다는 말이 유행할까요? 아마도 세상은 살기 편해졌지만 무언가 아쉽고 외롭고 허전한 느낌을 받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옛날보다 살기는 편해졌지만 경쟁은 더 심해졌고 빈부격차도 더 심해졌습니다. 가만히 세상을 들여다보면 지난 20-30년 동안에 세상이 급격하게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20-30년 동안에 세상은 많이 차가워지고 무서워졌습니다. 2001년에는 9.11 테러 사건이 벌어졌고 2008년에는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금융위기가 일어났습니다. 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신자유주의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그렇게 어렵게 말하지 않아도 우리들 일상을 통해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1997년 한국에서 IMF 외환 위기가 일어나기 전에는 비정규직이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취직을 하면 무조건 정규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일하는 사람들 가운데 정규직이 절반이고 비정규직이 절반입니다. 캐나다는 다행스럽게도 그런 큰 변화를 겪지 않았습니다. 캐나다 사회가 원래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통과 제도를 지키면서 사는 나라이기 때문에 다행스럽게도 큰 경제 위기를 겪지 않았고 사회복지 제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규제를 철폐하고 간섭하지 말아라, 개인이 자유롭게 일하고 해고되도록 내버려두어라, 이런 주장이 등장하면서 무한경쟁시대가 되었습니다. 사회복지제도가 잘 되어 있으면 경쟁에서 밀린 사람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복지제도가 없는 사회에서 무조건 경쟁만 도입하면 경쟁에서 밀린 사람들은 빈곤층으로 떨어지고 빈부격차는 더 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서구 문명을 자세히 보면 서구 문화가 개인, 자유, 독립, 모험, 경쟁, 개척의 문화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자연과 싸우고 모험을 하면서 문명을 발전시켜왔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신대륙을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들도 서양 사람들이었고 바다를 건너서 신대륙을 개발한 사람들도 서양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럽 이민자들이 아메리카에 온 것도 왕에게 간섭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온 사람들도 있었고 땅을 차지하고 부를 이루기 위해서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너무 개척 정신이 강하고 자부심이 강해서 그런지 원래부터 이 땅에 사는 원주민들을 존중하지 않고 다 죽이고 쫓아낸 후에 땅을 차지했습니다. 동쪽 대서양에 도착한 다음에는 서쪽으로 진출해서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이 땅을 차지했습니다. 이런 문화가 있기 때문에 서양 사람들은 개인의 자유/프라이버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독립/개척/모험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누구의 간섭을 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누구에게 의지하는 사람은 무능한 사람이고 가능한 빨리 독립하고 개척하는 사람은 유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개척하고 독립하고 모험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우리들은 가능한 한 스스로 일어서고 자립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동시에 사람은 본래 서로 협력하고 의지하고 사랑하며 사는 존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실 때 두 가지 원칙을 가지고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 자유 의지가 있는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자유인이 되어라, 네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여라, 옳고 그른 것을 스스로 판단하여라, 자립하고 모험하면서 살아라 말씀하셨습니다. 대체로 보면 서양 사람들이 이것을 잘합니다.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자기 인생을 열심히 살아갑니다. 이것은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사람을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고 협력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사람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기 인생을 개척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고 사람은 반드시 같이 살아야 하고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고 협력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두 번째 메시지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자연 창조와 사람 창조를 다르게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연을 창조하실 때는 서로 분리되도록 만드셨습니다. 맨 처음에는 모든 것이 뒤섞이고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 땅과 바다를 분리하셨습니다. 하늘과 땅, 땅과 바다가 뒤섞이면 사람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 붙어 있지 말고 서로 떨어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은 위에, 땅은 밑에, 바다는 저쪽, 땅은 이쪽, 이렇게 서로 떨어져 있어야 그 사이에서 사람이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지으실 때는 서로 떨어져 있어라 말씀하지 않으시고 서로 같이 살아라,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면서 살아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여기셔서 배우자/동반자/파트너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고 사랑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을 맨 처음 소개할 때 그냥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반드시 누구의 딸, 누구의 아들, 어느 지역, 어느 지파에 속한 사람이라고 소개를 합니다. 내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족에 속해 있다는 의미에서 내가 속한 공동체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자기 인생을 개척하여라, 말씀하셨고 동시에 서로 떨어져서 살지 말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라,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기 보다는 오직 자기 이익을 위해서만 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날 우리 사회는 무한경쟁시대/신자유주의 시대, 오직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사회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서 35장을 보면 메시야가 오셔서 광야와 메마른 땅을 시냇물이 흐르는 세상으로 만들어 주시고 바벨론에 포로된 백성들을 해방시켜주시기를 노래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첫째로 이사야는 메시야가 오셔서 광야같이 거칠고 냉정한 세상을 따뜻하고 기쁜 세상으로 바꾸어 주시기를 노래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사야와 같은 마음으로 메시야가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메시야가 오셔서 무한경쟁시대, 정글과 같은 세상, 광야같이 메마르고 냉정하고 차가운 세상을 정의가 바로 세워지는 세상, 따뜻한 배려와 돌봄이 있는 세상으로 바꾸어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때에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다.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 세상이 이런 사람들을 차별하는지 차별하지 않는지를 보면 세상이 살만한 세상인지 살기 힘든 세상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차별이 있는 세상은 냉정하고 차가운 세상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하시고 듣지 못하는 사람을 듣게 하시고 억울하고 차별받는 사람들을 일으키셔서 그들이 사슴처럼 뛰게 해 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이사야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포로된 백성들을 자유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사야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무엇보다도 메시야가 오셔서 자신들을 포로에서 해방시켜 주시기를 소망했습니다. 진실로 메시야는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들도 영적인 포로 상태로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무엇에 붙잡혀서 그것에 끌려 다니면 그것이 바로 포로입니다. 악한 영/귀신/무당에 끌려 다닐 수도 있고, 돈에 끌려 다닐 수도 있고, 권력/명예에 끌려 다닐 수도 있고, 잘못된 생각/편견에 끌려 다닐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오셔서 우리들을 사로잡고 있는 악한 영/권세/편견에서 우리들을 자유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은 우리들도 완전한 자유인으로 살지 못하고 이 세상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광야같이 메마른 세상, 냉정하고 차가운 시대, 무한경쟁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오셔서 이 세상을 따뜻하고 평화로운 세상으로, 편견과 차별이 없는 세상으로 만들어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막 같은 세상을 시냇물이 흐르는 세상으로 바꾸어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3절 말씀에 기록된 것처럼,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맥이 풀린 손에 힘을 주시고 떨리는 무릎을 굳세게 해 주시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주님, 이 땅에 오셔서 차갑고 냉정한 세상을 따뜻한 세상으로 바꾸어 주옵소서, 저희들이 서로 자기 이익을 위해서만 살지 않게 하시고 주님과 더불어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며 살게 하옵소서, 기도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Advent, thirsty ground will flow with fountains

Isaiah 35:1-10


Thirsty deserts will be glad; barren lands will celebrate and blossom with flowers. Deserts will bloom everywhere and sing joyful songs. They will be as majestic as Mount Lebanon, as glorious as Mount Carmel or Sharon Valley. Everyone will see the wonderful splendor of the LORD our God. Here is a message for all who are weak, trembling, and worried: "Cheer up! Don't be afraid. Your God is coming to punish your enemies. God will take revenge on them and rescue you." The blind will see, and the ears of the deaf will be healed. Those who were lame will leap around like deer; tongues once silent will begin to shout. Water will rush through the desert. (Isaiah 35:1-6)


Scorching sand will turn into a lake, and thirsty ground will flow with fountains. Grass will grow in wetlands, where packs of wild dogs once made their home. A good road will be there, and it will be named "God's Sacred Highway." It will be for God's people; no one unfit to worship God will walk on that road. And no fools can travel on that highway. No lions or other wild animals will come near that road; only those the LORD has saved will travel there. The people the LORD has rescued will come back singing as they enter Zion. Happiness will be a crown they will always wear. They will celebrate and shout because all sorrows and worries will be gone far away. (Isaiah 35:7-10)


In the 6th century BCE, God promised a new, holy path for Israel that would lead them out of bondage in Babylon to a new future for Judah. Christian interpretations of exile and redemption will inevitably look different than they did for ancient Judah. However, our days are also filled with suffering and bondage. We daily wander from obedience to God and into the open arms of sin, death, and devil. The confession we pray on Sunday is true every day of the week: “We confess that we are in bondage to sin and cannot free ourselves.” We daily need water in the wilderness to strengthen our weary knees and to renew our faltering faith. Just as the people in ancient Israel longed for the new day that the Messiah would bring, we also wait for the day that the Lord comes and sets us free from individualism, selfishness, loneliness, and suffering.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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