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후 여덟번째 주일 / 7월 세번째 주일
원수가 가라지를 뿌렸구나
마태복음 13:24 - 30
정해빈 목사

  

 

 


1. 지난 주일에 욥기를 설명하면서 욥이 고난받은 것은 욥이 죄가 많아서도 아니고 하나님이 악해서도 아니고 욥이 베헤못과 리워야단이 뛰어다니는 거친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베헤못(하마)는 사람의 힘/사나움을 가리키고 리워야단(악어)는 자연의 힘/사나움을 가리킵니다. 욥기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조용하고 착한 세상이 아니라 거칠고 사나운 세상이라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착한 사람이 고통 받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사나운 사람을 만났거나 사나운 자연을 만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이 세상에 사나운 사람과 사나운 자연이 없다면 착한 사람이 고통받는 일은 많이 줄어들 것입니다. 자연이 거칠고 사나우면 가난한 사람들이 제일 먼저 피해를 봅니다. 하지만 요즘은 과학이 발전해서 자연을 잘 연구하면 자연의 사나움을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습니다. 자연 재해도 미리미리 대비하면 피해를 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연보다 더 무서운 것이 사람의 악입니다. 옛날 말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고 사람을 잘못 만나면 사기를 당하거나 큰 고통을 받게 됩니다. 착한 사람이 고통 받는 가장 큰 이유는 착한 사람을 골탕 먹이고 이용해 먹는 나쁜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람들이 악한 제도를 만들고 악한 제도가 선한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권력을 가지고 횡포를 부리는 권력자/독재자들, 사람들을 거짓으로 속이는 사기꾼들, 인터넷/전화/편지로 무엇에 당첨되었다, 세금을 적게 냈다고 전화해서 개인 정보를 빼가고 돈을 빼가는 사기꾼들, 끝없는 탐욕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나쁜 기업/금융인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착한 사람들이 피해를 봅니다. 최근에 카톨릭 교황이 남미를 방문해서 끝없는 탐욕을 부추기는 자본주의가 오늘날의 악마/사탄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빈부격차가 심한 남미를 둘러보면서 “돈에 대한 인간의 탐욕이 인간성을 망치고 인류를 노예로 삼고 있다고 질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악하고 탐욕스러운 사람들 때문에 욥과 같은 선한 사람들이 피해를 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실 때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시고 거칠고 사나운 세상을 살 때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해져라 (마태복음 10:16)” 말씀하셨습니다. 뱀은 슬기로움/지혜를 가리키고 비둘기는 온유함/순수함을 가리킵니다. 성경을 보면 뱀은 간교함의 상징으로 부정적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지혜의 상징으로 긍정적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간교함과 지혜의 차이는 그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머리를 쓰면 간교함이 되지만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 머리를 쓰면 지혜가 됩니다. 예수께서는 거칠고 사나운 세상을 살 때 뱀의 지혜와 비둘기의 순수함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둘기의 순수함 없이 뱀 같은 지혜만 있는 사람은 쉽게 간교한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진실/순수함이 없고 간교함과 술수만 있기 때문에 쉽게 타락할 것입니다. 반대로 비둘기 같은 진실/순수함만 있고 뱀 같은 지혜가 없는 사람은 거칠고 사나운 세상을 헤쳐 나갈 지혜가 없고 너무 순진하기 때문에 쉽게 쓰러지고 이용당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살아야 하는 세상은 거칠고 사납습니다. 하나님의 방식이 통하지 않습니다. 악과 불의와 폭력이 있습니다. 또 세상이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 현실을 정확하게 보는 지혜와 순수한 마음 두 가지를 잃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몇 년 전에 우리 교회 나오셨던 새가족 한 분이 자기는 북한에서 살 때에 아주 거칠고 사납게 살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기 동네에서는 착하게 살고 양보하면서 살면 고마워하는 것이 아니라 무시당하기 때문에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거칠고 사납게 살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거칠고 사나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부러 사나운 척 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거칠고 악한 세상을 살지라도 비둘기 같은 온유함/순수함을 잃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악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착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습니다. 이 세상에 욥과 같이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세상이 악하고 사나우니까 나도 살아남기 위해서 더 악하고 사나워져야겠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비둘기 같은 순수함/온유함을 잃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2.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시면서 하나님 나라는 땅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땅에 떨어져서 열매를 맺으면 이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이 됩니다. 좋은 씨앗이 땅에 떨어지면 좋은 열매를 맺어야 그것이 정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아무리 좋아도 이 땅이 거칠고 사납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땅에 뿌리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좋은 씨앗이 땅에 떨어졌다고 해서 무조건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렸는데 처음에는 길가에 떨어져서 새들이 쪼아 먹었고 두 번째는 돌짝 밭에 떨어져서 말라 버렸고 세 번째는 가시덤불에 떨어져서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네 번째 떨어진 씨가 좋은 땅에 떨어져서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결실을 얻었습니다. 세 번 실패하고 나서야 겨우 열매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착한 사람이 고난을 받는 다면 그것은 착한 사람이 사는 이 세상이 거칠고 사납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사나운 사람과 자연이 뒤섞여 있는 세상을 지금 살고 있습니다.

미국 애틀랜타 에모리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토마스 롱(Thomas G Long) 이라는 분이 쓴 [What Shall We Do]라는 책이 있습니다. 한글로는 [고통과 씨름하다] 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지금부터 260년 전인 1755년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리스본은 주민 25만 명 중에서 1/10인 2만 5천명이 신부/수사/수녀일 정도로 유럽에서 가장 종교적이고 경건한 도시였습니다. 그렇게 경건한 도시 리스본에 1755년 11월 1일 오전 갑자기 큰 지진과 해일이 일어나 최소 1만 명에서 최대 10만 명이 죽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진이 일어난 11월 1일은 만성절이라고 해서 하늘에 올라간 성인들을 기념하는 카톨릭 축제일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축제일을 맞아 성당에서 예배를 보고 있는 중에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리스본 뿐만 아니라 1700년대 유럽 사회 전체를 뒤흔들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직접 조종하시고 통제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배 중에 일어난 지진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사람들 중에는 당시 유럽이 너무 부패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리스본을 심판하셨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라 자연 스스로의 법칙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연은 윤리 도덕을 알지 못합니다. 그냥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때로는 조용하게 때로는 거칠게 움직입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1755년에 일어난 이 사건이 유럽을 중세 시대와 근대 시대로 나누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착하고 안전한 세상이 아니라 욥기에 나오는 베헤못과 리워야단이 뛰어다니는 세상이라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우리는 이 거칠고 사나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13장을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가 나옵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기 밭에다가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과 같은데 사람들이 잠자는 동안에 원수가 밀 가운데 가라지를 뿌렸습니다. 주인의 종들이 와서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주인 어른, 어른께서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주인이 종들에게 말했습니다.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이 말씀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악의 원인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가라지는 원수/악이 뿌렸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라지를 뿌리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괴롭히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악한 분이 아니라 선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믿음이 있기 때문에 거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다보면 때로는 억울하고 슬픈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신앙에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원수가 가라지를 뿌렸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내가 겪는 아픔/질병/상처/고난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괴롭히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을 누가 망쳐놓았습니까? 악이 망쳐놓았습니다. 성경은 악이 이 세상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자세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악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마지막 날에 가라지가 뿌리 뽑힐 때까지 우리는 밀과 가라지가 섞인 세상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괴롭히고 벌 주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비록 우리의 삶에 고통이 있을지라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일으키시는 선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An enemy scattered weed seeds
Matthew 13:24 - 30

Jesus then told them this story: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what happened when a farmer scattered good seed in a field. But while everyone was sleeping, an enemy came and scattered weed seeds in the field and then left. When the plants came up and began to ripen, the farmer's servants could see the weeds. The servants came and asked, "Sir, didn't you scatter good seed in your field? Where did these weeds come from?" (Matthew 13:24-27)

"An enemy did this," he replied. His servants then asked, "Do you want us to go out and pull up the weeds?" "No!" he answered. "You might also pull up the wheat. Leave the weeds alone until harvest time. Then I'll tell my workers to gather the weeds and tie them up and burn them. But I'll have them store the wheat in my barn." (Matthew 13:28-30)

Last Sunday, we had heard from the book of Job that Behemoth indicates the wild power of human beings, and Leviathan means the wild power of nature, the power of chaos and randomness. The Book of Job says that the reason Job suffered is not because he was a sinner or God is cruel, but because Job is living in the world where the wild human power and nature ruled over. That is why Jesus said when he sent out his disciples to the world, "I am sending you like lambs into a pack of wolves. So be as wise as snakes and as innocent as doves." (Matthew 10:16) Jesus said, "be wise and innocent!" Being wise without innocent would make us sneaky, while being innocent without wise naive and weak.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when a farmer scattered good seed in a field. But while everyone was sleeping, an enemy came and scattered weed seeds. When the servants asked, 'Sir, didn't you scatter good seed in your field? Where did these weeds come from?' the farmer said, 'An enemy did this.'" This parable gives us some clues regarding the world we live. The scripture does not say clearly where this enemy came from, but it says obviously that these weed seeds did not come from God. All the sufferings we face did not come from God; they came from an enemy, the evil power. This fact gives us a solace to live the world. We are destined to live the world where good and weed seeds mixed together. But we are not afraid, since God did not sow an evil, but goodness. Although this world is not perfect, we are called to live and grow in the vulnerable world, since God is with us.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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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일곱번째 주일 / 7월 두번째 주일
욥기, 베헤못과 리워야단
욥기 40:15 - 41:3
정해빈 목사


1. 한평생 바르고 의롭게 살았던 욥은 자신이 받은 끔찍한 고통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문제로 씨름한 욥이 마지막에 도달한 결론은 하나님은 선하거나 자비롭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바쁘셔서 나 같은 사람이 억울하게 고통받는 것에 대해 관심이 없으시거나 아니면 원래 하나님이 잔인하고 난폭하셔서 자신이 지은 피조물을 아무 이유 없이 고난에 빠트리기도 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이런 분이라고 생각하자니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내가 이런 하나님, 너무 바쁘거나 아니면 너무 잔인하고 난폭한 하나님을 믿어왔던가? 욥의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욥은 정말 하나님이 이런 분이 맞는지 저 세상에 가서라도 꼭 하나님을 만나 대답을 듣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욥의 이러한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욥과 같은 경우에 처했다면 우리들도 욥과 같이 혼란스러워하거나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원망했을 것입니다. 한평생 하나님을 섬기고 바르고 경건하게 살았는데 하는 일마다 잘 안 되고 실패한다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욥기에 나오는 3가지의 주장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1번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 2번은 하나님은 선하시다, 3번은 욥은 의인이다. 욥의 고난을 설명하려면 3가지 주장 중에서 하나를 부정해야 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3번을 부정했습니다. 욥은 의인이 아니고 죄인이기 때문에 그 죄 값으로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욥이 완벽한 사람은 아닐 지라도 이 세상에서 가장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욥이 죄가 많아서 고난을 받는다는 친구들의 주장은 틀린 것이 됩니다. 욥은 2번을 부정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한 분이시라면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실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고 전지전능하시고 힘이 센 분이지만 착한 분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신이기 때문에 당연히 전지전능하다고 생각한 욥은 결국 2번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이 고난받은 이유는 하나님이 심술을 부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잔인하고 괴팍한 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무고한 사람을 시험에 빠트리는 분이시구나, 내가 하나님께 잘못 걸렸구나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세가지 주장 중에서 1번을 부정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욥이 고난받은 것은 하나님이 악해서도 아니고 욥이 죄인이기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요?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지 않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지 않다면 그런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있습니까? 이렇게 말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힘이 세고 무엇이든지 알 수 있고 할 수 있고 세상 모든 일을 당신의 뜻대로 관리/통제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창조주라고 해서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부모가 자식을 낳으면 자식은 부모의 것이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식이 영원토록 부모의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부모가 어린 자식을 앉혀놓고 내가 너를 낳았으니 너는 내 말을 들어야 한다고 말하면 어린 자식은 부모의 말을 듣겠지만 다 큰 자식을 앉혀놓고 내가 너를 낳았으니 너는 계속 내 말을 들어야 한다고 말하면 그 자식은 부모의 말을 듣지 않을 것입니다. 다 큰 자식이 마마보이가 되어서 사사건건 부모에게 물어보고 부모의 허락을 받으며 살아간다면 그 자식은 부모의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부모의 마음과 같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고통에 빠트리는 악한 분도 아니고 세상 모든 일을 통제하고 사사건건 간섭하는 분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셨지만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분이십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는 선한 분이십니다.

2. 욥이 고통받고 있을 때 욥의 3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찾아와서 욥을 위로하고 욥의 고난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욥은 친구들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대들이 나를 찾아와 준 것은 고맙지만 그대들의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나중에는 4번째 친구 엘리후가 와서 욥의 고난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4명 모두 욥을 설득시킬 수 없었습니다. 4명의 친구들은 한결같이 전통적인 지혜에 근거해서 욥의 고난을 설명하려고 하였습니다. 죄가 있기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이라고 말하거나, 하나님께서 그대를 시험하시니까 이 시험을 잘 참으면 나중에는 잘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이 욥을 설득할 수 없었습니다. 죄 때문이라면 내가 무슨 엄청난 죄를 지었다고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하냐고 따졌고, 시험 때문이라면 내가 이런 끔찍한 시험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졌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이런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욥과 4명의 친구들 사이에서의 긴 대화가 끝난 후에 드디어 하나님께서 욥기 38장에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질문에 대해서 크게 2가지로 대답하셨습니다. 첫 번째 대답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없다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때에 주님께서 욥에게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서 대답하셨다.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 네가 그처럼 많이 알면 내 물음에 대답해 보아라. 누가 이 땅을 설계하였는지 너는 아느냐? 누가 그 위에 측량줄을 띄웠는지 너는 아느냐?” 내가 세상을 지을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때로는 우리 머리로 이해 안 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두 번째 대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38장-39장에서 첫 번째 대답을 하셨고 40장-41장에서 두 번째 대답을 하셨습니다. 40장-41장을 보면 베헤못과 리워야단이 나옵니다. 베헤못은 하마를 가리키고 리워야단은 악어를 가리킵니다. 학자들은 40장-41장에 하마와 악어가 나온다고 해서 이 장을 악어 장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욥기서를 이해하는 결정적인 열쇠가 40장-41장, 악어 장 속에 숨어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베헤못과 리워야단은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가장 사납고 무서운 동물을 가리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사자를, 아시아 사람들이 호랑이를 가장 사납다고 생각한다면 중동 사람들은 하마와 악어를 가장 사납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20세기 유대교를 대표하는 랍비 헤롤드 쿠슈너(Harold S. Kushner)는 베헤못은 인간의 사나움을 가리키고 리워야단은 자연의 사나움을 가리킨다고 말했습니다. 베헤못은 인간의 사나움 또는 잠재력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화가 나면 때로는 무서운 하마처럼 변하기도 합니다. 하마가 힘이 아주 쎈 것처럼 사람은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무한한 잠재력을 선한 곳에 쓰면 기술을 개발하고 질병을 고칠 수 있지만 그 잠재력을 나쁜 곳에 쓰면 핵무기를 만들고 전쟁을 일으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 로봇처럼 만들지 않으시고 자신의 잠재력을 어디에 쓸지 스스로 선택하도록 자유를 주셨습니다. 리워야단은 사나운 자연을 가리킵니다. 악어가 이리저리 난폭하게 뛰어다니는 것처럼 자연도 때로는 난폭하게 행동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창조하시고 자연에게도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자연은 도덕과 상관없이 자연의 법칙대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자연을 잘못 만나면 사람은 자연으로부터 해를 입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난폭한 자연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의 일부분입니다. 극단적인 예이기는 하지만 우리도 세상을 살다보면 욥과 같은 고난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잠재력을 잘못된 곳에 써서 고난을 자초할 수도 있고 사나운 자연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강도떼가 욥의 가축들을 도적질해 갈 수도 있고 자연재해를 만나 가족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욥의 고난은 죄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이 악해서도 아닙니다. 그것은 욥이 베헤못과 리워야단이 뛰어다니는 사나운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토론토 북쪽 Wonderland 놀이공원에 가면 가장 높고 무서운 놀이기구 이름이 베헤못과 리워야단입니다. 10대-20대 청년들은 탈 지 모르지만 일반 사람들은 너무 무섭고 어지러워서 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가장 무섭다는 뜻에서 욥기에 나오는 사나운 짐승 이름을 붙인 것 같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사나운 동물들을 만드셨을까요? 악이 없는 세상을 만드셨다면 우리는 고통없는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주어진 인생을 사는 것보다는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있는 인생이 더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자유도 없고 시련도 없고 도전도 없는 인생은 지루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로봇처럼 만들지 않으시고 선과 악, 거친 자연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스스로 인생을 선택하며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토인비는 인류 역사는 도전에 대한 응전의 과정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분명히 이 세상에는 고난과 시련이 있습니다. 사람의 악과 자연의 악이 우리를 위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과 악 중에서 악을 선택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악을 선택하면 할수록 억울한 사람들이 더 많이 나올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잘못이 아니라 악을 선택한 사람 잘못입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하나님을 믿고 따를 때, 우리는 이 거친 세상을 선한 세상으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선하신 하나님을 믿고 우리의 잠재력을 선을 위해 쓸 때 이 세상에서 억울한 사람들은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억울하게 고난받는 자들을 위로하고 사납고 악한 세상을 선한 세상으로 바꾸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Job, Behemoth and Leviathan
Job 40:15 - 41:3

‘Look at Behemoth, which I made just as I made you; it eats grass like an ox. Its strength is in its loins, and its power in the muscles of its belly. It makes its tail stiff like a cedar; the sinews of its thighs are knit together. Its bones are tubes of bronze, its limbs like bars of iron. ‘It is the first of the great acts of God - only its Maker can approach it with the sword. For the mountains yield food for it where all the wild animals play. Under the lotus plants it lies, in the covert of the reeds and in the marsh. The lotus trees cover it for shade; the willows of the wadi surround it. Even if the river is turbulent, it is not frightened; it is confident though Jordan rushes against its mouth. (Job 40:15-23)

‘Can you draw out Leviathan with a fish-hook, or press down its tongue with a cord? Can you put a rope in its nose, or pierce its jaw with a hook? Will it make many supplications to you? Will it speak soft words to you? Will it make a covenant with you to be taken as your servant for ever? Will you play with it as with a bird, or will you put it on a leash for your girls? Will traders bargain over it? Will they divide it up among the merchants? Can you fill its skin with harpoons, or its head with fishing-spears? Lay hands on it; think of the battle; you will not do it again! Any hope of capturing it will be disappointed; were not even the gods overwhelmed at the sight of it? (Job 41:1-9)

Long after having listened to the complaints of Job and the dispute between Job and his 4 friends, Eliphaz, Bildad, Zophar, and Elihu in chapter 3 to 37, God finally showed up and responded to Job's question, such as why do good people suffer in God's world? Did I deserve to be miserable? Did you allow this tragedy to happen to me because you are a furious and cruel God? God's first answer is that you, a creature, cannot fully understand the wisdom of God, the Creator. We do not know fully how God created and manages the world. It means that there are some mysteries in the world that we cannot understand completely. God said in chapter 38, "where were you when I laid the earth's foundation?"

It is God's second answer, however, that makes us surprised. God said to Job, "look at the two most ferocious and dangerous animals that I created in the world." Literally speaking, Behemoth means a hippopotamus and Leviathan a crocodile. But spiritually speaking, Behemoth means the free power of human being to choose good or evil, while Leviathan indicates the power of nature, the power of chaos and randomness. These creatures represent forces of the created world with which even God is challenged to contend. They are responsible for most of the misery in the world, most of the bad things that happen to people who deserve better. The Book of Job says that the reason Job suffered is not because he was a sinner or God is cruel, but because Job is living in the wild world where the human power and nature ruled over. God gave us freedom to lead the world as we wish. If we make a right decision and take care of innocent victims, this world become more reliable.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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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여섯번째 주일 / 7월 첫번째 주일
욥기, 선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욥기 19:25 - 27; 23:1 - 7
정해빈 목사

 

 

 


1. 세상을 살다보면 이해 안 되는 일들이 많을 때가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자연재해, 생로병사, 사고와 질병을 겪을 때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원인과 결과가 분명하면 이해할 수 있지만 원인없는 일이 벌어질 때 이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일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옛날에 비하면 세상일을 아는 지식이 많아졌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지구 끝이 사각형으로 되어 있어서 바다 끝에는 절벽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지구가 동그랗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태양이 지구 주변을 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은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과학자 갈릴레오는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말했다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 했습니다. 교황으로부터 심문을 받고 자기 소신을 취소했던 갈릴레오는 법정을 나가면서 혼자말로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과학이 발전할수록 더 많은 사실들이 밝혀질 것입니다. 새롭게 밝혀지는 사실/진실에 대해서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밝혀질 때 우리는 과거의 무지와 오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성경을 읽다보면 이해 안 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되었지만 나중에 이해되는 경우도 있고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성경을 많이 읽어도 여전히 이해 안 되는 것들도 있습니다. 신앙은 영적이고 신비적인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종교에는 반드시 영적인 것과 신비적인 것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덮어놓고 믿는 것이 바른 신앙생활일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머리가 이해하지 못한 것을 가슴이 믿을 수 없다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머리로 이해 안 되는 것을 가슴으로 믿을 수 없습니다. 내가 믿는 것을 머리로 이해할 때 더 잘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신앙에 대해서 묻고 질문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신앙은 더 풍성해 질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가장 이해 안 되는 본문 중의 하나가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이 맨 처음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어떻게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하나뿐인 자식을 죽여서 불로 태워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실 수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이 본문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아들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아들은 자기 인생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너는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 나를 더 사랑하느냐 아니면 자식을 더 사랑하느냐? 너는 나를 위해 하나뿐인 자식을 바칠 수 있느냐? 이렇게 시험하셨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물질, 재물, 건강, 자식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시험을 잘 통과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본문이 고대 중동 지방에 있었던 자식을 신에게 바치는 악습에 대한 히브리 사람들의 신앙 고백을 기록했다고 보기도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자식을 바치는 것을 좋아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아브라함을 시험해서 자식을 바치라고는 했지만 자식을 죽이려는 순간에 등장해서 자식을 살려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 대한 약간 다른 관점을 하나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22장 4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종들과 이삭을 데리고 사흘 길을 걸어 모리아 산에 도착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3일을 걸어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이런 요구를 하실까? 내가 자식을 너무 사랑하니까 질투가 나셨나?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자식을 죽여 불로 태워 바치라고 말씀하실 수가 있을까? 이런 하나님을 내가 믿어야 하나? 하나님은 잔인하신 분인가 아니면 선하신 분인가? 아마도 아브라함은 이런 갈등을 하면서 3일을 걸어갔을 것입니다. 어느 집에 아주 자비롭고 인자하신 아버지가 한분 계셨습니다. 평생 자식들에게 아쉬운 소리나 싫은 소리 한번 하신 적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자식들을 불러놓고 “이유를 묻지 말고 내가 돈이 필요하니까 천만원 내 앞으로 가지고 와라” 말을 합니다. 자식들이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저럴 분이 아닌데 왜 저런 말을 하실까? 이제껏 한 번도 저런 요구를 하신 적이 없는데 왜 저런 요구를 하실까? 아버지가 갑자기 변하셨나? 나이드시더니 노망이 드셨나? 자식들이 갑자기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와 비슷한 혼란을 겪었습니다. 하나님이 저런 요구를 하실 분이 아닌데 왜 저런 요구를 하실까? 왜 갑자기 선하신 하나님이 잔인한 하나님이 되셨을까? 아마도 아브라함은 이런 고민을 하면서 3일을 말없이 걸어갔을 것입니다.

2. 우리가 욥기서에 보는 욥의 질문도 이와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실까? 내가 누구보다도 의롭고 바르게 살았는데 왜 이런 고난을 주실까? 욥의 질문도 아브라함의 질문과 비슷했습니다. 욥기와 관련하여 3가지의 주장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번은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는 주장이고 2번은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주장이고 3번은 욥이 의인이라는 주장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3번이 틀렸다고 주장했습니다. 욥이 죄인이기 때문에 고난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욥이 당대의 의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욥이 지은 죄가 많아서 고난을 받았다면 욥은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고난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욥도 이와 비슷한 말을 친구들에게 했습니다. 나의 고난이 죄 때문이라면 내가 무슨 죄를 얼마나 크게 졌다고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항변했습니다. 욥은 이 세상에서 가장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욥의 고난이 죄 때문이라는 친구들의 주장 3번은 틀린 것이 됩니다.

욥은 2번이 틀렸다고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지만 선하시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힘은 세지만 착하지 않고 잔인한 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선한 분이라면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실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고 힘은 세지만 선하시지는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욥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하실 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내가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욥을 한번 시험해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으셨기 때문에 지금 자신이 고난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착한 분이 아니라 힘센 분이고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내가 억울하다고 외쳐도 하나님은 피조물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욥의 마음이 더 괴로웠습니다. 하나님, 정말 당신은 잔인한 분이 맞습니까? 당신은 이제 보니 피조물의 고통에는 무관심한 분이셨습니다. 욥은 마지막에 내 육체가 없어질지라도 꼭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이 정말 잔인한 분인지 하나님이 정말 어떤 분인지 대답을 듣겠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욥의 주장대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지만 선하지 않기 때문에 욥이 고난받을 수도 있고, 반대로 하나님은 선하시지만 전지전능하지 않기 때문에 욥이 고난받을 수도 있습니다. 욥의 고난을 설명하려면 1번을 부정하거나 2번을 부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1번과 2번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선택해야 할까요? 힘은 세지만 착하지 않은 하나님? 아니면 힘은 없지만 착한 하나님? 이렇게 질문하면 힘도 세고 마음도 착한 하나님을 믿으면 안 되냐고 물으실 수도 있습니다. 두 가지 다 선택하면 욥의 고난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힘이 세거나 마음이 착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욥의 생각과 정반대로 2번을 선택하고 1번을 부정할 수는 없을까요? 하나님은 힘이 세고 괴팍한 분이 아니라 착하신 분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을까요? 우리 하나님은 이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는 잔인하고 난폭한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하나님은 선하시고 자비로우셔서 우리의 고통을 보며 함께 아파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선하신 하나님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선하신 분이십니다. 다른 것은 포기해도 이것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전지전능하고 힘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처럼 힘을 갖으려고 합니다. 그 힘으로 다른 사람을 억누르려고 합니다. 나는 힘이 있고 너는 힘이 없으니까 너는 내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0년 전에 유럽의 기독교가 아프리카에서 1000만 명의 흑인들을 노예로 잡아서 아메리카로 끌고 갔습니다. 힘 센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그런 짓을 저질렀습니다. 전지전능하고 힘 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자기도 힘 센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하지만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자기도 하나님처럼 선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고 할 것입니다.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 자비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 고통받는 자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Job, God is good and righteous
Job 19:25-27; 23:1-7

My best friends and loved ones have turned from me. I am skin and bones-- just barely alive. My friends, I beg you for pity! God has made me his target. Hasn't he already done enough? Why do you join the attack? I wish that my words could be written down or chiseled into rock. I know that my Savior lives, and at the end he will stand on this earth.  My flesh may be destroyed, yet from this body I will see God. Yes, I will see him for myself, and I long for that moment. (Job 19:19-27)

Job said: Today I complain bitterly, because God has been cruel and made me suffer. If I knew where to find God, I would go there and argue my case. Then I would discover what he wanted to say.  Would he overwhelm me with his greatness? No! He would listen because I am innocent, and he would say, "I now set you free!" I cannot find God anywhere-- in front or back of me, to my left or my right. God is always at work, though I never see him. But he knows what I am doing, and when he tests me, I will be pure as gold. (Job 23:1-10)

When God spoke to Abraham, "take your Son Isaac to the land of Moriah and you must sacrifice him to me on the fires of an altar," Genesis 22 says that Abraham got up early the next morning and chopped wood for the fire. He put a saddle on his donkey and left with Isaac and two servants for the place where God had told him to go. Three days later Abraham looked off in the distance and saw the place. Although he responded to the order of God instantly, God's message would be a big shock to him. How could God say to me like this? What kinds of God do I believe? What kinds of God could say to kill my only son? Abraham would be in great confusion while he walked up to the mountain for three days. These questions seized him for 3 days. Abraham wanted to know what types of God he believe.

When Job faced the tragedy that he had never experienced before, he had the same question about God as Abraham had in mind. Where did this severe suffering come from? According to the Book of Job, we are invited to deny one out of three points to explain the hardship of Job. First, God is powerful; second, God is good; third, Job is a righteous person. Job's three friends negate the third points whereas Job denies the second points. According to their perspective, Job suffers because Job is a sinner or God is not good but powerful and omnipotent. They thought that the suffering came from Job's sinfulness or God's free will. But We cannot deny the second point that God is good. The scripture says repeatedly that God is good and generous. Job's suffering comes from neither Job is sinful nor God is cruel and powerful. Rather God is with us when we weep and cry. Do not think that everything comes from God. Rather God is always here to help us.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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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다섯번째 주일 / 야외예배

흙과 바람과 물과 불

시편 139:13-18, 예레미야 18:1-8

정해빈 목사

 

 

 

1. 오늘 2015년 6월 마지막 주일은 야외 예배를 드리는 날인데 비가 와서 야외 예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아쉽기는 하지만 비가 와야 생명이 살 수 있으니까 비 오는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올해 캐나다 날씨는 여름에도 쌀쌀한 것 같습니다. 오늘 설교는 야외예배를 염두해두고 준비했는데 야외예배는 아니지만 그냥 준비한 대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옛날 고대 그리스에서는 자연의 근본 물질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던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자연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자연의 근본 물질은 무엇일까? 이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인류 최초의 철학자, 자연철학자라고 부릅니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같은 철학자들은 인간/사회/윤리에 대해 관심을 보였는데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같은 사람들이 등장하기 이전에 가장 먼저 활동했던 사람들이 바로 자연철학자들이었습니다. 인류에 맨 처음 등장했던 자연철학자들 중에 엠페도클레스라는 철학자는 세상 만물이 4가지 원소, 흙과 바람과 물과 불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4가지가 서로 얼마만큼 끌어당기고 섞이느냐에 따라서 세상 만물이 다르게 만들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재료들을 쪼개고 분해해 보면 결국 4가지, 흙과 바람과 물과 불만 남게 된다, 그래서 바로 이 4가지가 세상 만물을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재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리스 철학자가 말한 이 4가지 재료가 성경에도 이와 비슷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성경은 4가지 재료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4가지 재료를 가지고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실 때도 4가지 재료를 가지고 창조하셨고 당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계시하실 때도 4가지 재료를 사용하셨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아름답게 만드실 때 이 4가지 재료를 결정적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사람은 결국 이 4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 이 4가지를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왜 이 4가지 재료가 사람에게 중요한지 하나씩 하나씩 생각해 보겠습니다. 4가지 재료의 순서가 중요한데 첫째는 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흙으로 사람을 지었다는 것은 우리가 자연의 일부요, 피조물이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맨 처음 흙에서 나왔습니다. 흙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흙에서 난 것을 먹고 흙을 밟아야 건강합니다. 바울은 흙에서 난 몸을 첫 번째 몸이라 부르고 부활할 때 갖게 되는 영적인 몸을 두 번째 몸이라고 불렀습니다. 부활할 때 갖게 되는 두 번째 몸은 죽은 다음에 갖게 되는 것이고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갖게 되는 몸은 흙으로 된 몸입니다. 흙은 겉으로 보기에 더럽고 약하고 깨지기 싶습니다. 우리의 몸은 약합니다. 하지만 그 흙에 다른 것이 더해지면 흙은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여기에 창조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흙으로 만드셨지만 우리를 흙에 머물지 않게 하시고 새로운 존재, 영적인 존재, 아름다운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 단계가 두 번째 바람의 단계입니다.

 

맨 처음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두 번째 단계로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생기가 바로 바람입니다. 하나님의 숨결, 생기, 히브리어로 루하흐, 하나님의 영, 성령입니다. 사람 모양의 흙에 바람이 들어가자 진짜 사람이 되었습니다. 흙과 바람이 만나야 사람다운 사람이 됩니다. 사람과 짐승의 차이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짐승은 본능대로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바람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바람이 들어갔기 때문에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갈대인 것은 사람의 코에 하나님의 영/바람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바람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있는 사람은 동물처럼 행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있는 사람은 양심이 있기 때문에 양심적인 사람, 도덕적인 사람, 종교적인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이 없는 사람은 동물처럼 행동합니다. 짐승과 사람의 차이점은 하나님의 바람, 영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이 숨을 쉬어야 살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생기/영/바람이 우리 안에 들어와야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있고 양심과 도덕이 살아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바람이 불어야 공기가 통하고 공기가 통해야 생명이 살 수 있습니다. 흙으로 된 우리 몸에 바람이 들어가야 진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2.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바람/생기를 불어넣으신 하나님께서는 세 번째로 우리에게 물을 채워주셨습니다. 사람 몸의 70%는 물/피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살려면 흙과 바람 외에 물이 있어야 합니다. 물은 첫째로 생명을 낳고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맨 처음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맨 처음 생명이 물에서 나왔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생명은 항상 물에서 나옵니다. 지구에 생명이 사는 것은 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태어난 곳도 물입니다. 아기 생명을 감싸는 물을 양수라고 합니다. 물/오하시스가 있어야 거기에서 생명이 나오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물은 둘째로 생명을 씻겨주는 역할을 합니다. 흙과 바람으로 지어진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죄를 짓고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선과 악 중에서 악을 선택할 수도 있고 점점 몸과 마음에 때가 묻어서 하나님과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생명수로 우리를 씻겨 주셔서 우리가 새로운 삶, 거듭난 삶, 중생하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물은 창조와 재창조, 중생, 깨끗함, 거듭남을 가리킵니다. 물을 통해서 우리는 깨끗해집니다. 예를 들어서 눈에서 나오는 물을 눈물이라고 부르는데 사람은 눈물을 흘릴 때 몸과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또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하는 세례/침례 의식이 있습니다.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입니다. 영적인 거듭남이 일어날 때 항상 물이 사용되었습니다. 물이 더러운 것을 씻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홍수는 물을 통한 세상 정화/청소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더러워지고 부정하게 되었을 때 생명의 물로 우리를 씻겨주시고 우리를 거듭나게 만들어주십니다. 우리는 물에서 나왔고 물을 통해서 생명을 유지하게 되고 물을 통해서 더러워진 몸과 마음을 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세 번째 재료는 물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4번째 재료는 불입니다. 우리 몸이 흙과 바람과 물로 되어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쉬운데 불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 몸과 불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불은 사랑의 에너지, 공동체의 에너지입니다. 불은 우리를 서로 묶어주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우리의 삶을 진실하게 만들고 의미있게 만들어 줍니다. 공동체를 세워주는 불,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불입니다. 두려움에 떨던 초대 교회 제자들이 오순절에 용기를 내서 교회를 세운 것도 성령의 불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일본의 사회철학자 이마무라히토시(今村仁司)는 “의미는 불을 피울 때 만들어진다”는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불을 피우는 순간 경건해지고 진실해지고 따뜻해집니다.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중의 하나가 야외로 캠핑을 가는 것입니다. 도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캠핑을 갈 수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로는 불을 피우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옛날 원시인들이 서로 모여서 불을 피웠던 경험이 우리 유전자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인류는 불을 피우면서 삶의 의미를 찾고 공동체를 세워나갔습니다. 원시인들이 동그랗게 불을 피우고 앉아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서로간의 오해도 풀리고 공동체의 문제도 해결됩니다. 불가에 앉으면 질투심도 사라지고 마음도 부드러워집니다. 그래서 그는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은 불을 발견한 것인데 단순히 음식을 익혀먹고 추위를 이길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불이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공동체를 세워주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인류의 종교도 불이 있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예배 시간에 저렇게 촛불을 피우는 것도 불이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불을 피우는 순간 사람은 진실해지고 거룩해집니다. 중년 남자들이 캠핑장에서 불을 피우고 싶은 것은 잃어버렸던 삶의 의미를 되찾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불을 피우면서 나를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흙/바람/물/불을 통해서 우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몸은 비록 더럽고 약한 흙에서 나왔지만 그 흙에 바람/물/불이 더해질 때 우리의 몸은 아름다운 그릇이 되고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읽은 예레미야 18장에서 우리를 흙으로 비유하셨습니다. 토기장이가 그릇을 빗다가 그릇이 좋지 않으면 그릇을 다시 만들 듯이 좋은 그릇이 되지 못한 유다 백성들을 다시 만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주님께서는 시편 139편 말씀처럼 “내 장기를 창조하시고 내 모태에서 나를 짜 맞추셨습니다.” 부드러운 흙과 하나님의 생기, 깨끗한 물과 뜨거운 불을 가지고 사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아름답고 풍성해집니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바람과 물과 불을 통해 우리를 더 좋은 그릇, 아름다운 그릇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흙과 바람과 물과 불을 통해 좋은 그릇이 되어 아름답고 복된 삶을 살고 사랑의 공동체/교회를 세워나가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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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두번째 주일 / 캐나다연합교회창립90주년기념주일
캐나다연합교회, 예수의 얼굴이 되어
마태복음 5:14-16, 고린도후서 3:18, 4:6
정해빈 목사

 

 

 


1. 올해 캐나다 날씨는 이상해서 계절이 바뀌어도 여전히 쌀쌀합니다. 오늘부터 6월, 7월, 8월 여름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2015년 6월 첫째 주일은 캐나다연합교회 창립90주년 감사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지난 금요일과 토요일 토론토 연회가 열려서 창립90주년을 축하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서로 다른 교단이 연합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역사하셔야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가 속한 캐나다연합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슬라이드를 보면서 지난 90년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으려고 합니다. 지금부터 148년 전인 1867년 7월 1일 여러 주가 합쳐서 캐나다라는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1876년 소위 원주민 보호법에 따라서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원주민 기숙 학교가 시작되었습니다. 1896년 벤쿠버에서는 일본 감리교회가 있었고 1902년 연합운동이 시작되었지만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때문에 연합운동이 보류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25년 6월 10일 토론토 다운타운 경기장에서 캐나다장로교, 캐나다감리교, 캐나다회중교회가 모여서 캐나다연합교회가 만들어졌습니다. 카톨릭이 하나인 것처럼 개신교도 서로 연합하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연합교회가 만들어졌습니다. 장로교와 감리교와 회중교회가 하나로 합친 것은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때 비둘기, 성경, 떨기나무, 알파와 오메가 그림을 넣은 교단 상징 문장이 만들어졌습니다. 1930년대에도 여전히 기독교가 운영하는 기숙사 학교가 있었고 1935년에 벌써 중국연합교회가 50주년 축하행사를 가졌습니다. 1936년 여성이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았고 1939년부터 1965년까지 목회자들이 전쟁 반대 운동을 벌였습니다. 1946년 캐나다연합교회와 캐나다성공회 사이의 연합 운동이 있었고 1948년 비로소 원주민 기숙 학교가 문을 닫기 시작했습니다. 캐나다연합교회는 1952년 사스카츄완 주의 수상인 Tommy Douglas가 시작한 공공의료제도를 적극 지지/후원하였습니다. 이것이 발전해서 오늘날 캐나다 시민이면 누구나 무료로 의료혜택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62년 전국여신도회가 창립되었고 1968년 복음형제교단이 캐나다연합교회에 합류했습니다.

1968년 최초로 평신도 총회장이 선출되었고 해외 선교를 후원하기 위해 Mission and Service Fund가 만들어졌으며 우리가 매주일 고백하는 새신조(New Creed)가 만들어졌습니다. 1971년 캐나다연합교회와 캐나다성공회와 캐나다제자교회의 연합운동이 시도되었다가 1975년 중단되었습니다. 1974년 최초로 흑인 총회장이 선출되었고 1978년 교단 안에 있는 소수민족교회(중국인연합교회, 일본인연합교회, 한인연합교회 등)를 위해서 일하는 전국소수민족위원회가 만들어졌습니다. 사진을 보시면 옛날 우리 교회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80년 최초로 여성 총회장이 선출되었습니다. 1986년 총회장이 원주민들에게 처음으로 사과를 했고 1986년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정책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1988년 이상철 목사님께서 아시아 사람으로는 최초로 총회장에 당선되셨습니다. 처음에는 백인들이 총회장이 되었는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평신도, 흑인, 여성, 아시아 사람들이 총회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1988년 성적 취향이 다른 사람을 교회가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선언서가 만들어졌고 1992년 총회장이 재차 원주민들에게 사과를 했습니다. 1994년 원주민 기숙 학교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펀드가 모금되었고 1998년 원주민들에게 드리는 공식 사과문이 발표되었습니다. 2000년 인종차별 정규정이 만들어졌고 2004년 남아시아 수나미 희생자들을 위한 기금을 전달했습니다. 2005년 동성 결혼을 지지하였고 2007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평화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2011년 세계자본주의가 점점 빈부격차가 심해지는 것을 목격하고 1%의 탐욕에 반대하고 99%의 입장을 대변하는 Occupy Movement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2009년부터 본격적으로 환경오염을 반대하고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2012년 교회 상징 문장을 수정해서, 비둘기, 성경, 떨기나무, 알파와 오메가에 더해서 원주민들을 상징하는 글자와 색깔이 추가되었습니다. 노란색, 검정색, 빨간색, 흰색이 추가되었고 모학(Mohawk) 원주민들이 항상 쓰는 말, 아퀘 니아테테와네렌(Akwe Nia’Tetewá:neren), “모두가 연결되어 있습니다”(All my relations)이라는 글자가 추가되었습니다. 그 옆에 있는 라틴어 글자도 같은 뜻입니다. 우트 옴네스 운음 신트(ut omnes unum sint), “모두가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That all may be one, John 17:21). 2006년 믿음의 노래(Song of Faith)라는 신앙고백서가 발표되었고 2015년 8월 뉴펀들랜드에서 제 42차 전국 총회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2. 캐나다연합교회는 창립90주년을 축하하면서 올해의 주제를 “그리스도의 얼굴이 되어”(Being the face of Christ)로 정했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얼굴이 되자 그런 의미에서 이런 주제를 잡은 것 같은데 나름대로 적절한 주제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모름지기 그리스도의 얼굴이 나타나는 교회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에 교회에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얼굴이 나타나야 합니다. 지난 과거 역사를 보면 교회가 그리스도의 따뜻한 얼굴이 되기보다는 무서운 얼굴이 된 적이 많았습니다. 교회가 고통받고 소외된 사람들을 따뜻하게 품어주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억압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15만 명의 원주민 자녀들이 대여섯 살 어린 나이에 강제로 기숙 학교에 보내졌고 이중 6000명이 질병/자살 등으로 죽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강제로 부모 곁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갔으니 아이들이 얼마나 부모를 보고 싶어했을까요? 약 8만 명의 생존자들이 2007년 정부를 상대로 집단 소송을 냈고 이를 계기로 진실과 화해 위원회가 만들어져서 지난 6년간의 활동을 모은 보고서를 지난 주에 제출했습니다. 대부분의 기숙 학교를 카톨릭이 운영했지만 캐나다연합교회도 이에 동참했다는 점에서 책임을 피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원주민 말살 정책에 참여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얼굴이 나타나는 교회가 아니라 다른 얼굴이 나타나는 교회일 것입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볼 때 교회가 예수님의 얼굴이 아니라 다른 얼굴이 되는 때가 많았습니다. 돈과 권력을 손에 쥐고 국가 교회, 부자 교회인 것을 자랑스러워할 때도 있었고 유럽의 서양 문화를 원주민들에게 강제로 주입할 때도 있었습니다. 캐나다연합교회는 이런 과거를 회개하고 이제는 Intercultural 교회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문화를 존중하고 서로 배우고 교류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더 풍성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백인 문화 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우리 교회 같은 유색 인종 교회들이 더 많이 참여하는 교회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때로는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착한 행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서 세상 사람들이 너희들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여라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어둠 속에 빛이 비쳐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바르게 신앙생활하면 할수록 주님을 닮아가게 되고 주님을 닮아가면 갈수록 우리의 얼굴에 주님의 얼굴이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이 나타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얼굴을 본적은 없지만 예수님의 얼굴은 분명 자비롭고 따뜻하고 긍휼이 풍성한 얼굴이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비로우시니 예수님의 얼굴도 자비로우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가난한 자들과 식사하시며 정의와 자비가 풍성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얼굴이 나타나는 교회에는 분명 따뜻한 사랑과 용서와 자비가 풍성할 것입니다. 감사와 기쁨과 찬양이 넘칠 것입니다. 낯선 사람들과 나그네들을 따뜻하게 환영하는 교회일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도 편안하게 올 수 있고 나이든 사람도 편안하게 올 수 있는 교회일 것입니다. 과거를 묻지 않고 모든 사람을 환영하는 교회일 것입니다. 누구나 와서 예배드리고 은혜받는 교회,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교회, 사람을 꾸짖거나 정죄하지 않는 교회, 성도님들이 은혜받아서 점점 예수의 얼굴을 닮아가는 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일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예수님의 자비로우신 얼굴이 나타나는 은혜롭고 따뜻하고 개방적인 교회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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