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네번째 주일 / 3월 네번째 주일

사순절, 고난의 주님을 따라갑니다

마태복음 16:21 - 28

정해빈 목사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16장 말씀을 보면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다.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베드로의 원래 이름이 시몬 바요나였는데 그의 이름을 베드로(반석)으로 바꾸어 주시고 너의 믿음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어서 주님께서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날 것이라고 말하자 베드로는 주님을 향해서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하고 항의하였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그리스도/구세주/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기 때문에 너의 믿음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이 말씀에 근거해서 베드로를 1대 교황으로 떠받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쨌든 베드로는 처음에 주님을 구세주로 고백해서 칭찬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주님께서 고난받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바람에 사탄이라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칭찬을 받자마자 책망을 받았습니다. 교황이 순식간에 사탄이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사탄이라고 책망 받은 것은 그가 주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주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고난을 빼고 주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기 때문에 사탄이라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은 아무리 주님을 나의 구세주로 고백했다고 하더라도 주님의 고난을 인정하지 않으면, 주님의 고난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주님의 고난을 따라가지 않으면 주님을 향한 고백은 주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교회는 당연히 주님을 구세주로 고백해야 합니다. 하지만 주님을 구세주로 고백했다고 해서 저절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 고백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어떤 고백이냐가 중요합니다. 고난이 빠진 고백은 진정한 고백이 될 수 없습니다. 고난을 빼고 주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면 자칫하면 그 고백은 사탄이 될 수도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받으신 고난을 기억하고 묵상하고 그 고난을 따라가겠다는 고백이 있어야만 진정한 주님의 제자, 주님의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주님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가지 이미지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영광의 그리스도이고 또 하나는 고난의 그리스도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영광의 그리스도와 고난의 그리스도가 정확하게 반반씩 나옵니다. 예를 들어서 마가복음이 16장으로 되어 있는데 중간 8장을 기준으로 앞부분은 영광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 적혀 있고 뒷부분은 고난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 적혀 있습니다. 마태복음도 28장으로 되어 있는데 대략 절반이 되는 16장에서 앞뒤가 구분이 됩니다. 복음서의 전반전은 영광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고 후반전은 고난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16장 말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바로 이 말씀을 시작으로 앞부분은 영광의 그리스도가 기록되어 있고 16장부터 고난의 그리스도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음서의 앞부분에는 예수께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기적과 능력을 행하시니까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영광의 그리스도와 고난의 그리스도가 있는데 제자들은 영광의 그리스도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메시야는 큰 힘과 능력이 있어야 하고 우리들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 우리들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는 메시야는 메시야가 아니다, 만일 메시야가 힘 없이 고난받는다면 그것은 메시야가 아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처음에 영광을 보여주시고 나중에 고난을 보여 주셨습니다. 나에게는 하나님 아들로서 영광과 능력도 있지만 동시에 고난도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고난 받으셨고 우리가 받는 고난의 현장을 찾아오셔서 우리들 곁에서 우리들과 함께 고난받으셨습니다. 어느 집에 아빠와 아이가 있는데 아빠가 바빠서 아이와 잘 놀아주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아빠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아이가 원하는 것을 다 사주었습니다. 장난감도 사주고 옷도 사주었습니다. 아이는 처음에 원하는 것을 다 사주는 아빠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아빠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아빠, 나는 더 이상 장난감이나 옷 필요없어. 나는 아빠가 그냥 내 옆에 있으면 좋겠어, 같이 산책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고 내가 아플 때나 슬플 때 내 옆에 있어주면 좋겠어.” 아이가 아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에게는 장난감을 사주는 능력있는 아빠도 필요하지만 내 옆에서 항상 나와 함께 있는 아빠, 나의 기쁨과 슬픔을 같이 나눌 수 있는 아빠가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능력이 많으시지만 동시에 우리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우리가 홀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 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 마음이 힘들고 외로운 사람들, 억울하게 고통받는 사람들 곁으로 내려가셔서 그들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사랑 중에서 가장 큰 사랑은 고통받는 사람 곁에 함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고통받는 사람들 곁에 계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영광의 그리스도만 좋아하고 고난의 그리스도를 거부했을 때, 고난받는 사람들 곁에 서 있지 않으려고 했을 때, 주님께서는 그런 생각은 사탄의 생각과 같다고 베드로를 꾸짖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을 그리스도/구세주/메시야로 고백하는 그 믿음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우리들은 영광의 주님에 대한 믿음도 필요하고 고난의 주님에 대한 믿음도 필요합니다. 영광의 주님께서 마지막 날에 온 세상을 정의롭게 통치하실 것을 믿는 믿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시고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도 필요합니다.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교회, 주님께서 받으신 고난을 따라가는 교회가 참다운 교회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기독교 서점에 가보면 긍정의 힘, 행복의 비결, 기도 응답, 행복한 인간관계같은 책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미국 텍사스 휴스턴에서 목회하는 조엘 오스틴이라는 분이 쓴 [긍정의 힘]이라는 책이 한때 큰 인기를 끈 적도 있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믿고 긍정적으로 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부정적인 일이 일어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긍정적인 일이 일어납니다. 그런 책들이 우리 신앙에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성도님들, 신앙에 도움이 되는 책들 많이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런 책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님 믿고 복 받고 형통하고 성공하는 내용은 많은데 고난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주님께서 고난받으셨나, 왜 이 세상에 고난이 많은가, 이 세상에서 고난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이웃의 고난에 대해서는 눈 감고 영광과 성공만 바라보는 신앙은 이기적인 신앙입니다. 우리 주변을 조금만 둘러보면 고난과 슬픔 중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 고난받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만일 우리들이 영광만 찾으려고 하고 예수 믿고 나만 축복받으려고 한다면 그런 믿음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고난받는 사람들 곁에 서 있는 신앙, 그들의 고난을 함께 짊어지는 신앙, 고난의 주님을 따라가는 신앙이 참다운 신앙입니다. 사순절을 맞아 고난받는 이웃들을 생각하며 고난의 주님을 따라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Lent, we follow the Lord of suffering

Matthew 16:21 - 28


I will give you the keys of the kingdom of heaven, and whatever you bind on earth will be bound in heaven, and whatever you loose on earth will be loosed in heaven.’ Then he sternly ordered the disciples not to tell anyone that he was the Messiah. From that time on, Jesus began to show his disciples that he must go to Jerusalem and undergo great suffering at the hands of the elders and chief priests and scribes, and be killed, and on the third day be raised. And Peter took him aside and began to rebuke him, saying, ‘God forbid it, Lord! This must never happen to you.’ But he turned and said to Peter, ‘Get behind me, Satan! You are a stumbling-block to me; for you are setting your mind not on divine things but on human things.’ (Matthew 16:19 23)


Then Jesus told his disciples, ‘If any want to become my followers, let them deny themselves and take up their cross and follow me. For those who want to save their life will lose it, and those who lose their life for my sake will find it. For what will it profit them if they gain the whole world but forfeit their life? Or what will they give in return for their life? ‘For the Son of Man is to come with his angels in the glory of his Father, and then he will repay everyone for what has been done. Truly I tell you, there are some standing here who will not taste death before they see the Son of Man coming in his kingdom.’ Amen. (Matthew 16:24 28)


Today’s scripture reveals that while Peter expected the Christ of glory and honour, Jesus talked about the Christ of suffering. For Peter’s understanding, Messiah/Christ should control the world with earthly power. Messiah can not and should not carry on any hardships that people are suffering in the world. But Jesus rejected his insistence and showed him as the Christ of suffering the way of serving and being with the afflicted. God's power is revealed not in walks through the pillar of power, but through the dusty alleys of weakness and misery. That is where Jesus walked. That is where he leads us to walk. That is where he strengthens us to bear the burdens of discipleship. It is his burden we take upon our shoulders. Today’s passage shows us that Jesus came to us as the Messiah, not by bringing and controlling the power, but being with us and taking our suffering and weakness instead.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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