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다섯번째 주일 / 4월 첫번째 주일
사순절,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골로새서 1:24 - 29
정해빈 목사
사순절을 맞이해서 고난에 대해서 계속 묵상하고 있습니다. 고난이라는 주제가 워낙 무겁고 심각하기 때문에 고난에 대해서 설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기독교 신앙의 절반이 고난에서 나옵니다. 기독교 신앙을 한마디로 말하면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가 기독교 신앙의 50%를 차지하고 부활이 나머지 50%를 차지합니다. 만약 십자가/고난을 신앙에서 빼버리면 기독교 신앙의 절반이 없어지게 됩니다. 고난이라는 주제가 무겁고 심각하기는 하지만 고난을 깊이 생각하면 거기에서 기독교 신앙의 깊은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종교들 중에서 기독교만큼 고난의 문제를 깊이 씨름하는 종교가 없습니다. 불교는 사람이 어리석고 아집과 인연에 집착하기 때문에 고난을 겪는다고 말합니다. 어리석음과 아집과 인연과 집착을 버리고 도를 닦으면 고난에서 벗어나서 열반, 해탈할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분명히 불교의 가르침에도 수긍할만한 내용이 있습니다. 하지만 고난의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연약하기 때문에 생로병사를 겪는 자연스러운 고난도 있고, 어리석음과 아집과 인연과 집착 때문에 겪는 고난도 있지만 때로는 억울한 고난도 있고 이해할 수 없는 고난도 있습니다. 기독교는 고난을 가지고 씨름하는 종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고난받으셨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고난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고난을 가지고 씨름하다 보면 고난이 주는 깊은 영적인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비록 고난이라는 주제가 너무 무겁고 심각하기는 하지만 기독교 신앙의 절반이 고난에서 오기 때문에 고난을 가지고 씨름해야 합니다. 고난을 씨름하면 할수록 거기에서 깊은 깨달음과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고난이 우리의 신앙을 온전하고 풍성하게 해 줍니다.
고난을 바라보는 몇 개의 시각이 있습니다. 몇가지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을 믿으면 고난이 다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 믿으면 고난이 다 사라질까요? 이스라엘 12지파의 아버지인 야곱은 말년에 자기 인생을 돌아보면서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말했습니다. 야곱은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지만 동시에 많은 고난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하나님 믿으면 고난이 없어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푸른 초장, 잔잔한 시냇가로 인도하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고난이 다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남겨놓으신 약간의 고난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목적을 위해서 우리에게 약간의 고난을 남겨주셨습니다. 이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믿으면 고난이 다 없어진다고 믿는 신앙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리켜서 기복신앙/번영신앙/부적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옛날 사람들은 부적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재앙이 없어진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 믿으면 고난이 다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그런 신앙은 기복신앙/번영신앙/부적신앙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남겨놓으신 약간의 고난이 있습니다.
둘째로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고난을 주시지만 나중에는 큰 축복을 주신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생활 하시는 분들 중에는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가장 많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실제로 이런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요셉은 애굽에 팔려가서 13년 동안 고생했지만 나중에 13년보다 훨씬 더 긴 세월 축복을 받았습니다. 욥도 처음에는 큰 고난을 만나서 재산을 다 잃어버렸지만 나중에는 잃었던 재산의 두 배를 받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지금 고난을 잘 견디면 하나님께서 나중에 그 고난을 잊을 정도로 큰 축복을 주실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이런 신앙이 맞을 때도 있습니다. 지금 고난을 잘 견디면 나중에 더 큰 축복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이런 설명에 해당되지 않는 고난도 많이 있습니다. 고난을 잠깐 견디고 났더니 나중에 더 큰 축복을 받는 사람도 있지만 사람들 중에는 평생 고난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사람들 중에는 고난을 피하지 않고 그 고난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신앙이 바로 이 신앙입니다. 누구나 고난을 겪으면 힘들고 좌절합니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신앙을 가진 사람은 고난을 만날 때에 그 고난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 고난을 통해서 자신을 더 가까이 바라보고 이웃을 더 가까이 바라보고 하나님을 더 가까이 바라보게 됩니다. 고난을 운명 탓이다, 팔자 탓이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신앙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난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참된 신앙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난을 만나면 무조건 피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고난을 만날 때에 무조건 피하려고 하지 않고 그 고난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에게 오는 고난을 통해서 인격이 성숙하고 진리를 깨닫고 신앙이 자라게 됩니다. 사람은 언제 하늘을 진리를 깨달을까요? 어떤 사람이 그냥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저절로 진리를 깨닫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사람은 고난을 받을 때 비로소 확실하게 전에 알지 못했던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고난이 우리를 깨우쳐 주고 고난이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고 고난이 우리를 주님께로 인도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겸손을 배우고 사랑을 배웁니다. 고난은 나를 깨우쳐 주는 영적인 선생입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인은 고난을 만날 때에 무조건 고난을 피하려고 하지 않고 가만히 그 고난을 바라보고 이 고난을 통해서 내가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를 생각합니다. 하나님 믿으면 고난이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고난을 잠깐만 견디면 더 큰 축복이 온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고난을 신앙의 눈으로 가만히 바라보고 그 고난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을 찾습니다. 이런 사람이 참된 신앙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골로새서 1장 2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분의 몸 곧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워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남겨놓은 고난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하는 고난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님께서 모든 고난을 다 짊어지셨기 때문에 우리가 고난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무거운 십자가의 고난을 짊어지셨습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받으신 똑같은 고난을 짊어질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주님께서는 99%의 고난을 짊어지시고 우리들에게 1%의 고난을 남겨놓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말이 이 뜻입니다. 1%의 남은 고난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입니다. 고난이 없는 것이 유익이 아니라 약간의 고난이 남아있는 것이 유익입니다. 왜냐하면 그 약간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게 되고, 주님의 심정을 알게 되고, 고난이 주는 깊은 신앙적 의미를 깨닫게 되고, 더 성숙한 사람으로 자라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하나님 믿으면 고난이 없어진다고 믿는 신앙도 잘못된 신앙이고, 하나님께서 처음에 고난을 주시지만 나중에 몇 배의 축복을 주신다는 신앙도 부분적으로는 맞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짊어지셨고 아직 남아있는 1%의 고난을 내가 짊어지고 가겠다는 신앙이 가장 성숙한 신앙입니다. 주님의 고난은 사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병자를 고치시고 가난한 자를 먹이시고 죄인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렇게 사랑을 실천하셨는데 잘못된 종교와 잘못된 권력이 주님을 미워하고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고난받을 필요도 없고 상처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면 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이웃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고난받으셨듯이 신앙인들은 사랑을 실천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남겨놓으신 1%의 고난입니다. 고통받는 사람들과 고통을 함께 하고 억울한 사람들과 억울함을 함께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고 헐벗은 사람들을 입혀 줍니다. 고난의 흔적이 있는 교회가 진정으로 살아 있는 교회입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던 것처럼 저희들도 사랑과 섬김과 나눔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고백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Lent, what is lacking in Christ’s afflictions
Colossians 1:24 - 29
I am now rejoicing in my sufferings for your sake, and in my flesh I am completing what is lacking in Christ’s afflictions for the sake of his body, that is, the church. I became its servant according to God’s commission that was given to me for you, to make the word of God fully known, the mystery that has been hidden throughout the ages and generations but has now been revealed to his saints. To them God chose to make known how great among the Gentiles are the riches of the glory of this mystery, which is Christ in you, the hope of glory. It is he whom we proclaim, warning everyone and teaching everyone in all wisdom, so that we may present everyone mature in Christ. Amen. (Colossians 1:24 – 28)
Today's scripture tells us that Christ has left sufferings to us so that we fill the remaining suffering of Christ. Believing God does not mean that we will not face any hardships or troubles. Many people think that suffering is passed for a while, and if we endure sufferings coming to us shortly, God will give more blessing than before. That faith is somewhat correct and meaningful but misses an important truth. Although Christ has took almost all the sufferings, but he also left small hardships to us so that we learn spiritual truth from that hardship and follow Christ by carrying our cross. Christ calls us to bear the remaining 1% of suffering that Christ left to us.
Christ suffered because he healed the sick, fed the poor, and forgave sinners. Corrupt political and religious powers persecuted Jesus so that he could not love them. If we do not love God or neighbors, we would not have to suffer or be hurt. But as the Lord suffered, we are also called to follow the way of love and sacrifice. That is the suffering Christ left behind us. We share the pain with those in grief and with those who are treated unfairly. The church with signs of hardships is truly a living church. As Jesus did not hesitate to carry the cross of love, we are also called to follow Jesus by carrying our cross of suffering. Today’s scripture does not say to avoid or deny suffering, rather say to bear the little suffering left behind by Christ. Am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