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후 여덟번째 주일 / 2월 네번째 주일

주현절, 완전한 사람이 되십시오

마태복음 5:38 - 48

정해빈 목사




지난 12월 두 달 동안 주현절 절기를 지켰습니다. 주현절은 주현(主顯), 주님이 나타나셨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하나님 나라 사역을 묵상하는 절기를 가리킵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나타나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제자들을 가르치셨으며 병자를 고치시고 악한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마태/마가/누가/요한복음서에는 주님께서 행하신 사역과 말씀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셨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복음서 중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장 잘 요약한 말씀을 꼽으라면 마태복음 567장에 기록된 산상설교/산상수훈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산에 오르셔서 제자들을 향해서 하나님 나라의 제자들이 행해야 할 삶의 자세를 길게 가르치셨습니다. 산에서 설교했다고 해서 산상설교/산상수훈이라고 부릅니다. 산상설교만 읽어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내가 만일 성경의 3장만 가지고 무인도에 가야 한다면 나는 마태복음 567장 말씀을 가지고 가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산상설교는 예수님의 가르침 중의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현절 절기를 지키면서 산상설교를 묵상하지 않고 그냥 지나간다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묵상하려면 반드시 산상설교를 묵상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주현절 마지막 주일을 맞아서 산상설교의 메시지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마태복음에는 구약성경의 출애굽기와 비슷한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십계명을 받고 내려온 것처럼 예수님도 산에 올라가셔서 새로운 계명을 설교하셨습니다. 구약성경 처음 다섯 권을 모세가 썼다고 해서 모세오경이라고 부르는데 마태복음에도 예수님이 다섯 번 설교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모세와 비교해서 모세와 비슷하지만 모세보다 더 위대하신 분, 모세보다 더 크신 분으로 예수님을 고백했습니다. 이스라엘/히브리 백성들은 이집트를 떠나 시내산에 도착해서 율법/십계명을 받았습니다. 이제부터는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야 한다, 노예근성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 백성으로 살려면 하나님 계명을 지켜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율법/십계명이다, 모세가 이렇게 설교를 했습니다.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십계명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관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이 되려면 옛날 생활을 청산하고 율법/십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고, 우상을 숭배하지 말아야 하고,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아야 하고, 안식일을 지켜야 하고 부모를 공경해야 하고 거짓말하지 말아야 하고, 이웃의 것을 탐하지 말아야 합니다. 십계명을 지키면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이고 십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아직 하나님 백성이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십계명은 하나님 백성이냐 아니냐를 나누는 기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0가지 계명을 지키는 것이 겉으로 보면 쉬운 것 같지만 제대로 지키려면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을 섬기고 우상을 섬기지 말아야 한다고 했는데 우상이 무엇이냐면 내가 제일 좋아하고 사랑하고 관심 갖는 것이 우상입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면 돈이 우상이 됩니다. 하나님 이름을 부끄럽지 않게 하는 것도 쉽지 않고 거짓말 안하는 것도 쉽지 않고 이웃의 것을 탐하지 않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10가지 계명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 백성이 되려면 최소한 10가지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백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산에 오르셔서 제자들에게 새로운 율법, 십계명보다 더 지키기 어려운 산상설교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되고 나의 제자가 되려면 산상설교를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높은 수준의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십계명이 신앙의 기초 과정이라고 한다면 산상설교는 신앙의 고급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의 제자가 되려면 유대교 조상들 보다 신앙이 더 깊고 높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이 쓰여질 당시 마태 교회는 정통 유대교로부터 배척을 받고 있었습니다. 마태 교회는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이 모인 곳이었고 일반 유대인들은 정통 유대교를 믿었습니다. 정통 유대인들이 마태 교회를 향해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냥 우리들처럼 모세 오경 믿으며 살면 되지 굳이 예수를 믿으며 살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마태 교회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더 크신 분입니다. 모세는 우리에게 십계명을 주었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산상설교를 주셨습니다. 십계명이 신앙의 기초 과정이라면 산상설교는 신앙의 완성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더 높고 넓게 만들고 우리를 더 완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유대교의 인종주의, 배타주의, 우월주의를 넘어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서하는 제자의 삶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태 교회는 이렇게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운동 경기를 할 때 수준이 비슷한 사람이 운동을 하면 실력이 늘지 않습니다. 탁구나 축구나 골프를 할 때, 나보다 수준이 높은 사람과 같이 운동하면 내 실력이 올라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께서는 높은 수준의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그 가르침을 따라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산상설교의 가르침이 너무 수준 높아서 그 말씀대로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의 제자가 되려면 이 말씀을 목표로 삼아야 하고 이 말씀대로 살기가 힘들지만 그래도 이 말씀대로 살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되어 있는데 여러분은 누가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을 돌려 대고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고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하였는데 여러분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 것처럼 여러분도 하늘 아버지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제자가 되려면 바리새인들이나 이방인들 보다 더 수준 높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몇 달 전에 미국의 미셀 오바마가 대통령 선거 지원 연설을 하면서 저쪽 사람들이 반칙과 비방을 하면서 수준 낮게 나와도 우리들은 똑같이 대응하지 말고 수준 높게 가자고 연설해서 큰 박수를 받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서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자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여러분들도 완전한 사람이 되십시오.” 아버지께서 자비로운 것처럼 여러분들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십시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큰 부담이 되지 않는데 아버지께서 완전한 것처럼 여러분들도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은 큰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들이 하늘 아버지처럼 완전하게 살 자신이 없습니다. “완전이라는 말을 완벽하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말고,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사는 것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하나님을 따라가는 사람이 영적으로 완전한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주님께서는 구약의 율법보다 더 수준 높은 말씀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진을 보시기 바랍니다. 구약 율법은 모압 사람들과 같이 살지 말라고 했는데, 모압 사람 룻은 이런 인종 편견에 도전해서 나중에 다윗의 증조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구약 율법은 우스 사람들은 악하다고 했는데, 우스 사람인 욥은 동방에서 가장 의로운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구약 율법은 외국인들이나 내시는 쫒아내라고 했는데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 교회는 아프리카 내시 사람을 환영했습니다. 구약 율법은 사마리아 사람을 멀리하라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과 대화하셨습니다. 바로 이런 삶을 살라고 주님께서 우리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완벽하게 살 수는 없지만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따라 구약 율법의 편견과 차별, 인종주의, 배타주의, 우월주의를 넘어서 원수를 사랑하고 복수하지 않으며, 이웃을 사랑하고 환영하며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piphany, be perfect as your heavenly father

Matthew 5:38 - 48


You know that you have been taught, "An eye for an eye and a tooth for a tooth." But I tell you not to try to get even with a person who has done something to you. When someone slaps your right cheek, turn and let that person slap your other cheek. If someone sues you for your shirt, give up your coat as well. If a soldier forces you to carry his pack one mile, carry it two miles. When people ask you for something, give it to them. When they want to borrow money, lend it to them. (Matthew 5:38 42)


You have heard people say, "Love your neighbors and hate your enemies." But I tell you to love your enemies and pray for anyone who mistreats you. Then you will be acting like your Father in heaven. He makes the sun rise on both good and bad people. And he sends rain for the ones who do right and for the ones who do wrong. If you love only those people who love you, will God reward you for that? Even tax collectors love their friends. If you greet only your friends, what's so great about that? Don't even unbelievers do that? But you must always act like your Father in heaven. (Matthew 5:43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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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후 일곱번째 주일 / 2월 세번째 주일

주현절, 가정의 결핍을 치료하시다

누가복음 7:11 - 17

정해빈 목사



몇 주 전에 주현절, 사회적 결핍을 치료하시다이런 제목으로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성경에는 예수께서 사람들의 병을 고치신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사회적 결핍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시고 그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려면 꼭 갖추어야 할 것들이 많이 있는데 그런 것들이 부족할 때 우리는 무엇이 결핍되었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건강의 반대말이 결핍이고 결핍의 반대말이 건강입니다. 사람은 우선 신체적인 결핍이 없어야 합니다. 사람은 의식주, 입어야 하고 먹어야 하고 잠을 자야 합니다. 좋은 음식과 깨끗한 물을 먹고 마셔야 하고 따뜻한 햇빛을 쬐어야 하고 깨끗하고 위생적인 환경에서 살아야 합니다. 잘 입고 잘 먹고 잘 자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신체적인 조건, 의식주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집이 없는 사람도 쉼터에 가면 최소한의 의식주 혜택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사람은 신체적인 결핍이 채워질 때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은 또한 사회적인 결핍이 없어야 합니다. 내가 속한 사회가 편안하고 안전해야 나도 편안하고 안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회가 위험하고 공격적이고 차별적이면 사람은 불안해서 정상적인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전쟁과 테러가 없어야 하고 인종차별과 폭력과 억압이 없어야 하고 여성과 노인과 장애인들과 어린이들이 보호받아야 합니다. 인종, , 신분, 빈부격차에 상관없이 누구나 존중받고 보호받을 때 사람은 이 땅에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신체적으로 건강하다고 하더라도 내가 속한 사회가 불안하고 위험하면 나는 온전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나와 사회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건강한 사회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은 또한 영적인 결핍이 없어야 합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영적인 사랑과 보호 속에서 살아야 온전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내가 가정으로부터 사랑받고 있고 이웃으로부터 사랑받고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때 사람은 온전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선포함으로서 사람들의 영적인 결핍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교회 신앙생활을 통해서 이런 영적인 결핍을 채움 받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원하고 말씀으로 변화받기 원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받기 원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런 영적인 결핍을 채워주는 곳이 되어야지 반대로 사람을 억압하거나 겁 주거나 불안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을 강요해서도 안 되고 무서운 하나님, 벌 주는 하나님을 증거해서도 안 됩니다. 교회는 사람을 자유하게 하고 감사하게 하고 기쁘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주시고 우리를 가르치시고 우리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사람은 이렇게 신체적인 결핍이 없어야 하고 사회적인 결핍이 없어야 하고 영적인 결핍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온전하고 행복한 삶을 이 땅에서 누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신체적인 결핍, 사회적인 결핍, 영적인 결핍 뿐만 아니라 가정의 결핍을 치료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하는 결핍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가정의 결핍입니다. 우리는 가정을 통해서 이 땅에 태어나고 가정을 통해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가정을 통해서 인생을 마칩니다. 가정은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근원이요 보호처 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의 삶에 중요한 가정이 결핍되면 우리의 삶은 파괴되고 병들게 됩니다. 이 세상에 사연 없는 가정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가정에 사연이 있고 아픔이 있고 상처가 있습니다. 나의 가정뿐만 아니라 부모와 형제까지 포함해서 생각해 보면 모든 가정에 어려움이 있고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가정의 결핍을 치료해 주심으로 사람들을 일으켜 주셨고 사람들의 삶을 온전하고 풍성한 삶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7장 말씀을 보면 나인 성에 사는 과부 이야기가 나옵니다. 과부의 아들이 죽어서 장례 일행이 성문 앞을 지나가게 되었을 때 예수께서 그 장면을 보시고 가엾게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가엾게 여기셨다, 불쌍히 여기사라는 말을 헬라어로 스플랑크니조마이(splagcnivzomai)라고 하는데 이 말은 애간장이 녹는다,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가리킵니다. 주님께서는 자식을 잃은 과부의 아픔을 보시고 같이 슬퍼하셨습니다. 남편 없이 홀로 아들을 키우는 과부 입장에서는 외아들이 유일한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관에 손을 대시고 죽은 아들을 향해서 젊은이야, 청년아 일어나라!” 말씀하심으로 그 죽은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나인 성 과부의 가정에 큰 결핍이 생긴 것을 보시고 그 가정의 결핍을 채워 주셨습니다. 이 과부의 아들이 왜 죽게 되었는지 성경은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먹지 못해서 죽었을 수도 있고 병들어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신학자들 중에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아들을 향해서 청년아 일어나라말씀하셨습니다. 이 아들이 어머니의 과보호 속에서 자라서 젊은이답게 청년답게 살지 못하고 어린 아이로 살다가 죽음을 맞이했을 수도 있습니다. 남편 없는 어머니에게는 아들이 유일한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밤낮으로 자식을 남편처럼 여기면서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자식을 밤낮으로 끼고 살면 아들은 청년으로 자라지 못하고 영원히 어머니의 어린 아들로만 살게 됩니다. 이 아들은 어머니의 지나친 보호와 울타리에 갇혀서 청년으로 자라지 못하고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일찍 죽게 된 아들도 불쌍하고 아들에게 의존해야만 했던 과부도 불쌍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가정을 보시면서 창자가 끊어지듯이 심히 슬퍼하셨습니다. “청년아 일어나라말씀하심으로 그 가정의 결핍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가정 결핍에 대한 이야기는 이 외에도 성경 여러 곳에서 많이 나옵니다. 마가복음 5장을 보면 예수께서 병들어 죽게 된 회당장 야이로의 열두 살 된 딸을 고쳐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버지 야이로가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으니 내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옛날에 열두 살이면 소녀인데, 아버지는 열두 살 된 딸을 어린 딸이라고 불렀습니다. 나인 성 과부가 아들을 과보호해서 문제가 된 것처럼, 이 아버지는 열두 살 된 딸을 새장 속에 가두고 강요와 통제 속에서 딸을 키웠는지도 모릅니다. 옛날 가부장적인 사회에서는 아버지가 딸들을 그렇게 키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인생을 꽃 피우지 못하고 죽게 된 딸을 향해서 소녀야 일어나라말씀하심으로 그 딸을 일으켜 주셨습니다. 어린 딸이 아니라, 한 사람의 소녀로서 그를 일으켜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주님께서는 신체적인 결핍, 사회적인 결핍, 영적인 결핍을 채워주실 뿐만 아니라 가정의 결핍을 채워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가정의 결핍 때문에 고통받는 가정들이 많이 있습니다. 경제적인 결핍이나 건강의 결핍으로 인해 고통받는 가정이 있습니다. 부모의 지나친 간섭과 과보호로 인해 자녀들이 숨 쉬지 못하고 병 드는 가정도 있습니다. 사회가 억압적이면 가정도 억압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옛날 한국에서 군사 문화가 나라를 지배할 때는 군사 문화가 학교와 가정과 모든 사회를 지배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결핍된 가정에 찾아오셔서 우리들의 가정을 고쳐 주셨습니다. 아픈 자녀들을 고쳐 주셨고 아픈 부모를 고쳐 주셨습니다. 사랑이 필요한 가정에는 사랑을 주셨고 자유가 필요한 가정에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경직된 가정을 사랑의 가정으로 바꾸어 주셨고 억압된 가정을 자유로운 가정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날에도 가정의 상처를 치유해 주셔서 그 가정이 사랑이 충만하고 자유와 기쁨이 충만한 가정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가정을 회복시키시고 자유하게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가정의 결핍을 채움받고 해결받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Epiphany Jesus healed family’s deficiency

Luke 7:11 - 17


Soon Jesus and his disciples were on their way to the town of Nain, and a big crowd was going along with them. As they came near the gate of the town, they saw people carrying out the body of a widow's only son. Many people from the town were walking along with her. When the Lord saw the woman, he felt sorry for her and said, "Don't cry!" Jesus went over and touched the stretcher on which the people were carrying the dead boy. They stopped, and Jesus said, "Young man, get up!" The boy sat up and began to speak. Jesus then gave him back to his mother. Everyone was frightened and praised God. They said, "A great prophet is here with us! God has come to his people." News about Jesus spread all over Judea and everywhere else in that part of the country. (Luke 7:11 17)


Today’s gospel shows that many families in Rome’s empire experienced varying degrees of physical, spiritual, and social stress and death. Jesus’ healings are acts that repair imperial damage and enact God’s life-giving empire in restoring people’s lives. Jesus healed their families with proclamation of the Kingdom of God where the blind receive their sight, the lame walk, the lepers are cleansed, the deaf hear, the dead are raised, and the poor have good news brought to them. Jesus healed physical, social, and spiritual deficiency. The healing power of Jesus flowed down from God to those in need. The spirit of God always runs down to fill up our wound and deficiency. We pray that God heals physical, social, and spiritual deficiency in the world.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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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후 여섯번째 주일 / 2월 두번째 주일

창립50주년, 열린 세계를 가진 나그네

히브리서 11:1 - 10

정해빈 목사




이상철 목사님께서 쓰신 자서전 [열린 세계를 가진 나그네] 출판 기념회가 2011년 우리 교회에서 있었습니다. 그 책을 보면 이 목사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했던 어떤 분이 이 목사님을 생각하면서 장례식 내내 마음이 슬펐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목사님은 캐나다 사회의 지도자 일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선구자로서 인생을 훌륭하게 사셨습니다. 하지만 이 목사님의 개인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본래 이 목사님 가정은 함경북도 명천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1910년 일제가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세우고 땅을 빼앗는 바람에 이 목사님 할아버지께서 가족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크 다보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가 없었더라면 이 목사님 할아버지가 고향을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러시아에서 태어나서 7살 때까지 살다가 소련 공산군이 아이들을 데려다가 공동수용소에서 키운다는 소문을 듣고 중국 북간도 용정으로 피신해서 거기서 부모는 소작농을 하고 이상철은 초등학교와 은진중학교와 중앙사범학교를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일제에 징집되기 직전에 해방을 맞아서 징집을 피할 수 있게 되었고 교사 생활을 하던 중에 중국 공산당이 기독교를 핍박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족을 남겨두고 홀로 서울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이 목사님 인생은 힘센 나라들에 의해서 짓밟힌 지난 100년간의 우리 민족의 슬픈 역사를 잘 보여줍니다. 일제를 피해서 러시아로 갔다가, 소련을 피해서 중국으로 갔다가, 중국 공산당을 피해서 조선 땅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자서진 책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평생 [열린 세계를 가진 나그네]로 사셨습니다. [열린 세계를 가진 나그네]가 우리에게 주는 세가지 메시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나그네 인생을 산 사람은 자기처럼 떠돌아다니는 사람들, 자기처럼 고난받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넓은 마음을 갖게 됩니다. 나그네는 나그네인데 열린 세계를 가진 나그네가 됩니다. 자신이 고난받는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고난받는 이웃을 보면 내 일처럼 아파하고 그들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나라도 없고 집도 없이 떠돌아다녀 본 사람은 떠돌이/나그네의 서러움을 잘 압니다. 이 목사님은 어린 시절 그런 고난을 겪으셨기 때문에 한평생 나그네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을 따뜻하게 보살펴 주셨습니다. 이번 장례식 때 캐나다연합교회 조단 캔트 총회장께서 이번 장례식에 이런 내용의 조사를 보내주셨습니다. Jordan Cantwell, Moderator of the United Church of Canada sent us this letter, “Dear Korean United Church leaders and members, Rev. Lee was deeply revered in The United Church of Canada. As Moderator from 1988 to 1990, he lifted up the voices of the isolated and oppressed, tackling issues relating to the ordination of homosexual persons, racial equality, indigenous, and other human rights issues. Although I never had the chance to meet Rev. Lee, I admire him for providing leadership in a time of great discord in our church. As a committed and compassionate pastor, he worked tirelessly to build bridges between The United Church and other immigrant communities in Canada. The United Church of Canada’s “intercultural vision” owes much to him."


이 목사님께서 총회장 하실 때인 1988-1990년에 캐나다는 크게 3가지 논쟁을 겪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아시아에서 온 이민자들과 백인들과의 관계 문제였고, 둘째는 성적 소수자들의 권리 문제였고, 셋째는 백인들과 원주민들과의 갈등 문제였습니다. 이 목사님께서는 총회장을 하시면서 이 3가지 문제를 적절하게 해결하셨고 모든 사람들을 포용하셨습니다. 아시아 사람이 최초로 총회장이 됨으로서 백인들이 아시아 사람들을 존중하는 계기를 마련하셨고, 성적 소수자들이 교회 내에서 차별받지 않도록 지도력을 발휘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원주민 지도자들을 찾아가 캐나다연합교회를 대표해서 사과하셨습니다. 캐나다 역사를 보면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도 없었기 때문에 부끄러운 점이 하나도 없는데 다만 한 가지 과거 캐나다 정부가 원주민 자녀들을 기독교가 운영하는 기숙사에 강제로 보내서 자녀들을 가르치게 한 것이 부끄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무리 백인 지도자가 원주민들을 찾아가도 원주민들이 받은 상처 때문에 마음 문을 열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기들과 비슷하게 생긴 수염 난 사람이 자신들을 찾아와서 캐나다연합교회를 대표해서 사과를 하니까 원주민들의 마음이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이 목사님께서 원주민 문제를 다 해결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목사님께서 원주민 문제에 상당한 공헌을 하신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 목사님께서 인종문제, 소수자 문제, 원주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어린 시절 고난 받으며 살았던 나그네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더 마음을 여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이 나그네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열린 마음을 갖고 다른 이웃에게 따뜻하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둘째로 나그네는 겸손하고 검소하고 단순한 마음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갑니다. 나그네는 무거운 짐을 들고 여행을 떠나지 않습니다. 짐을 단순하고 가볍게 해야 인생이라는 먼 여행을 쉽게 떠날 수가 있습니다. 영적인 나그네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그네는 이 세상의 물질과 권력과 명예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언제든지 응답해야 하고 있으라면 있어야 하고 가라면 가야하기에 나그네는 무엇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 무엇에 묶여 있어서도 안 됩니다. 나그네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인생을 따라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그네는 순례자가 되기도 하고 선구자가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가기 때문에 순례자이고 남이 가지 않은 길을 먼저 가기 때문에 선구자입니다. 이 목사님께서는 한평생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으로 가라고 하시면 그곳으로 가셨고 이곳으로 가라고 하시면 이곳으로 가셨습니다.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고 겸손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셋째로 나그네는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고비를 여러 번 넘긴 사람은 하루하루 살아있는 것이 기쁘고 감사하게 여겨집니다. 인생이 힘들면 힘들수록 더 기쁘고 감사해야만 힘든 인생을 견딜 수 있기 때문에 영적인 나그네는 고난 중에서도 감사하고 작은 것에도 감사합니다. 내가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 참된 나그네요 순례자요 선구자입니다. 이 목사님께서는 많은 고난을 겪으시면서도 항상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인생을 사셨습니다. 하나님 덕분에 내가 이렇게 살고 있다고 고백하셨고 어렵고 힘든 일들을 수행하시면서도 항상 웃음과 유머가 넘치셨습니다. 어느 교인이 왜 수염을 기르냐고 질문하니까 목사님께서 교인들이 평소에는 양 같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늑대처럼 달려들 때가 있는데 그 때를 대비해서 사자처럼 보이기 위해서 수염을 길렀다고 농담하셨다는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고난 중에서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참된 나그네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 11장에는 저 유명한 믿음의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는 삶이 믿음의 삶입니다. 선조들은 이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으로 증언되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더 나은 제물을 드렸고, 믿음으로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렸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노아와 아브라함 모두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인생을 살았습니다. 타국에 몸 붙여 사는 나그네처럼 여기저기 떠돌아다녔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인생을 살았습니다. 우리들도 믿음의 선배들과 이상철 목사님을 따라서 열린 세계를 가진 나그네가 되어 이웃을 따뜻하게 품어주고, 겸손하고 단순하게, 그리고 기쁘고 감사한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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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후 다섯번째 주일 / 2월 첫번째 주일

창립50주년, 이 땅에 뿌리를 내리며

창세기 50:22 - 26

정해빈 목사



지난 일주일 동안 이상철 목사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 역사상 가장 큰 장례식이 있었는데 장례식장과 주차장과 예배당과 주방에서 봉사해 주신 성도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화요일 조문, 수요일 장례예배, 목요일 하관예배, 3일 동안 약 천명에 해당하는 분들이 참석해 주셨습니다. 또한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조가를 불러주신 성가대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입관예배/발인예배를 하나로 합쳐서 예배를 드리다보니 예배시간이 조금 길어졌습니다. 다음 주일에 사모님과 가족들이 오셔서 함께 예배를 드린다고 연락을 주셨습니다. 오늘과 다음 주일 이상철 목사님을 추모하는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1989년에 나온 이상철 목사 은퇴 기념 설교집, [하나님이 인류의 희망] 머리말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나는 수많은 교우들의 장례식을 집례하고 그들의 유해를 묘지에 묻는 마음 아픈 경험을 했습니다. 그들의 유해가 누워있는 묘지에 우리 두 사람이 묻히게 될 것을 생각하면 그저 감사하고 너무도 어울리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나는 장례식 설교에서 이민자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낯설은 땅에다가 묻는 아픈 경험을 통해 뿌리를 내린다는 말을 종종 한 일이 있습니다. 나같이 평생을 방랑객으로 살아 온 사람이 죽어서 묻힐 만한 땅을 찾게 된 것은 감사한 일이고 하물며 한국 이민자들이 이 땅에 내리는 뿌리의 한 가닥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분수에 넘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글을 읽으면서 이 목사님께서 참으로 생각이 깊으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이민자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낯선 땅에 묻는 아픈 경험을 통해서 이 땅에 뿌리를 내립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죽기 전까지 이 땅은 낯선 땅, 외국 땅, 이민자로 사는 땅이 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부모, 아내와 남편, 자녀가 죽어서 이 땅에 묻히게 되면 이 땅은 비로소 내가 살아야 하고 내 후손들이 살아야 하는 땅이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땅에 묻는 그 아픈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이 땅에 뿌리를 내리게 되고 이 땅의 주인으로서 비로소 정착하게 됩니다.


이 목사님은 언젠가 한인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백인들이 우리를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우리를 소외시키고 있습니다. 당당하게 나가면 주류사회가 분명히 받아들일 것입니다. 어차피 외국에 와서 사는 이상 주류사회에 적극적으로 진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백인들은 심술궂은 데가 있어요. 적극적으로 도전을 하면 받아들이고 소수민족 저희들끼리 놀면 불러들이지 않고 가만 놔둡니다. 그러므로 실수를 하더라도 자꾸 도전하면 함부로 못하지요. 젊은이들은 용기를 가지고 눈을 넓게 보고 당당하게 나가야 됩니다. 일을 하다보면 일부 차별을 당하는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책임을 갖고 열심히 해 주인이 되고 지도자가 되면 오히려 잘 따라줍니다.” 우리가 소수 민족이라고 해서 위축되지 말고 적극적으로 이 사회에 진출해서 이 사회에 뿌리를 내리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말하지 않으면 주류 사회는 우리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고 우리가 진출하지 않으면 그들은 우리의 존재를 알지 못합니다. 이곳이 우리가 뿌리 내리고 살아야 하는 땅이기에 주인 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도전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목사님은 시베리아를 거쳐서 중국을 거쳐서 한국을 거쳐서 벤쿠버를 거쳐서 토론토에 정착하셨고 저희들의 선구자가 되셔서 이 땅을 이민자/나그네들이 존중받는 땅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우리 교회도 이 목사님을 따라서 지난 50년 동안 이 땅에 깊이 뿌리 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1967년 토론토 최초의 한인 교회로 세워진 이후 그냥 이방인으로 살지 않고 이 땅의 주인으로 살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한인 사회를 위해서 일했을 뿐만 아니라 캐나다 사회를 위해서도 일했습니다. 교회가 세워질 때부터 한인교단에 가입하지 않고 캐나다연합교회에 가입해서 이곳 사람들과 함께 교류하며 지냈습니다. 해외에 있는 한인교회들이 감당해야 할 2가지 사명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들은 한인교회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한인교회의 문화와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한인이라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고 김치 먹고 한국말 쓰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뿌리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며칠 전 중국 Community가 주최하는 설날 파티에 가 본 적이 있었는데 수 백명이 모여서 전통 옷을 입고 전통 놀이를 즐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정당 정치인들을 초청할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명절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즐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들도 우리들의 문화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자랑스러워할 뿐만 아니라 후손들에게 우리의 문화를 물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들은 우리의 것을 계승하면서도 동시에 우리끼리만 모여서 살면 안 되고 이곳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현지 사회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외부와 단절된 채 우리끼리만 모여서 살면 우리들은 스스로 게토가 되어서 이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주변인/변방인 으로 남게 됩니다. 당당하게 주류 사회로 진출해서 이 땅을 더 조화롭고 평화롭게, 서로 존중하고 서로 배우는 사회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최근 캐나다연합교회는 Intercultural Church를 만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Intercultural 이란 말을 우리 말로 번역한다면 상호 문화, 교류 문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Multicultural 이란 말을 많이 썼는데 이 말은 서로 다른 문화들이 교류 없이 그냥 공존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요즘은 Multicultural 이란 말 대신에 서로 다른 문화들이 그냥 공존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교류하고 서로 배워야 한다는 뜻에서 Intercultural 이란 말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과거 캐나다 교회는 대부분이 백인 교회였는데 백인 교인이 줄어들면서 백인 교회로 계속 남아 있으면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만드시고 모든 인류를 똑같이 사랑하시는데 백인들만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백인 문화가 캐나다 교회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들이 함께 공존하고 함께 배우는 교회, 그런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 사회에 더 깊이 뿌리를 내려서 캐나다연합교회가 Intercultural Church가 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요셉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우리들은 요셉괴 비슷한 감정을 느끼곤 합니다. 요셉은 가나안 땅에서 살다가 형들에 의해 이집트 노예로 팔려갔지만 성실한 자세로 일한 끝에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마지막 죽기 전에 가족들에게 나중에 후손들이 이집트를 떠나 조상의 땅으로 들어갈 때에 나의 뼈를 꼭 가지고 가야 한다고 유언을 했습니다. 요셉은 이집트 땅에 묻히기를 원하지 않았고 조상들의 땅에 묻히기를 원했습니다.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지만 이집트가 히브리 백성들이 살만한 땅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셉을 모르는 바로 왕이 히브리 백성들을 억압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집트는 나그네들을 환영하는 나라가 아니라 억압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이집트 땅에 묻히기를 원하지 않았고 조상들의 땅에 묻히기를 원했습니다. 요즘 미국에서는 트럼프가 정부 보조를 받는 영주권자들 다 떠나라고 명령을 했는데 연방대법원이 여기에 제동을 걸었다고 합니다. 자꾸 그런 식으로 이민자들을 불안하게 하면, 이민자들이 뿌리를 내릴 수가 없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들은 우리가 죽었을 때 굳이 조상들의 땅에 우리 몸을 매장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이 땅에 매장되어야 우리들의 후손들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이 땅의 주인으로 살 수가 있습니다. 이 땅에 깊이 뿌리를 내려서, 이 땅을 모든 인류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나라, 서로 존중하고 서로 배우는 나라,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실현되는 나라로 만드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50th anniversary, rooting in this land

Genesis 50:22 - 26


Joseph lived in Egypt with his brothers until he died at the age of one hundred ten. Joseph lived long enough to see Ephraim's children and grandchildren. He also lived to see the children of Manasseh's son Machir, and he welcomed them into his family. Before Joseph died, he told his brothers, "I won't live much longer. But God will take care of you and lead you out of Egypt to the land he promised Abraham, Isaac, and Jacob. Now promise me that you will take my body with you when God leads you to that land." So Joseph died in Egypt at the age of one hundred ten; his body was embalmed and put in a coffin. (Genesis 50:22-26)


According to Genesis, although Joseph became the governor of all Egypt, he did not want to be buried in Egypt. For him, that country was not the land where his people, which was called wanderers or Hebrews, can take root deeply with aboriginal people. He knew that the Egyptians would not welcome his descendants later. So before died, Joseph told his brothers to take his body with them when God leads them to the land of promise. However, In contrast to Joseph, we think that we should take root in the land where we live now. The Very Rev. Dr. Sang Chul Lee once said, “Immigrants take root through their painful experiences of burying their loved ones to strange lands." We are called to make this country our land where all people live with love and respect. We are called not to live as immigrants but messengers of the land. We can live together with other people and change the world by taking root deeply in this land.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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