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후 네번째 주일 / 1월 다섯번째 주일

주현절, 사회적 결핍을 치료하시다

마태복음 4:23-25, 8:14-17

정해빈 목사




사람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많은 것들을 필요로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 부족할 때 우리는 보통 결핍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영양이 결핍되었다, 정신이 결핍되었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사람은 신체적인 조건과 사회적인 조건과 영적인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신체적인 결핍이 일어나면 사람은 건강해질 수가 없고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결핍과 영적인 결핍이 일어나면 사람은 건강해질 수가 없습니다. 첫째로 사람은 신체적인 결핍이 없어야 합니다. 의식주, 입어야 하고 먹어야 하고 잘 수 있는 집이 있어야만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식사에 포함된 수분을 제외하고 하루 평균 1리터의 물을 마셔야 하고 5대 영양소,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 비타민, 무기질을 섭취해야 합니다. 위생 관리도 잘 해야 하고 신선한 공기도 마셔야 하고 햇빛도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만 신체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활동하셨던 갈릴리에서는 신체적인 결핍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위생 관념이 부족해서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도 많았고 음식이 부족해서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본래 갈릴리는 농사짓기에 좋은 땅이었고 갈릴리 호수가 있어서 농수산물이 많았습니다. 가만히 나두면 풍족하게 살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갈릴리 사람들은 로마와 헤롯과 성전이 부과한 세금 때문에 빈곤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가 세금을 거두고 그 다음에 갈릴리를 지배한 헤롯이 세금을 거두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세금을 거두어 가니 갈릴리 사람들은 이리저리 다 빼앗기고 신체적인 결핍, 빈곤 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충분히 먹지 못하고 깨끗하지 못한 환경에서 살면 사람은 영양이 부족하고 면역이 약해져서 쉽게 질병에 걸리게 되고 쉽게 죽게 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평균 수명이 30세였습니다. 물론 그보다 더 오래 산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어렸을 때 일찍 죽은 사람도 있기 전체적으로 따지면 평균 수명이 30세에 불과했습니다. 오늘날에는 평균 수명이 길어져서 옛날 기준으로 하면 내 나이에서 20년을 줄여야 합니다. 지금 50세 되신 분들은 옛날로 따지면 30세와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70세 되신 분들은 내 나이가 50세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지금 80세 되신 분들은 내 나이가 60세다 이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옛날에는 60세에 회갑잔치를 했는데 오늘날에는 80세에 하는 것이 맞습니다. 옛날에는 신체적인 결핍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양 결핍, 위생 결핍을 겪었습니다. 예수님은 신체적인 결핍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의 질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의사들이 마을과 가정을 방문해서 치료하는 것을 왕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의사들이 왕진하듯이, 마을과 가정을 방문해서 말씀으로 위로하시고 그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음식이 필요한 이에게는 음식을 주시고 치료가 필요한 이에게는 치료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예수님이 환자의 가정을 방문해서 치료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둘째로 사람은 사회적인 결핍이 없어야 합니다. 사회가 평화롭고 안전해야 사람이 불안을 겪지 않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내가 사는 사회가 평화롭고 안전해야 사람이 외출도 할 수 있고 친구도 만날 수 있고 사회생활도 할 수 있습니다. 캐나다 사회가 평화롭고 안전하니까 우리들이 자유롭게 외출도 할 수 있고 일도 할 수 있고 사람도 만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 사는 사회가 인종차별이 심하고 위험하고 불안하다면 우리들은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이 땅을 살 것입니다. 사회가 불안하거나 위험하면 사람들의 정신도 불안해져서 육체의 질병이나 정신적인 질병을 앓게 됩니다. 지진, 화재, 전쟁, 학살, 인종차별이 일어나서 학대를 당하고 자녀나 부모를 잃어버렸다고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일을 당하면 사람은 극심한 스트레스와 정신질환을 앓을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병자들과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치신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복음서에는 왜 이렇게 귀신들린 사람들 이야기가 많이 나올까요? 옛날 사람들은 정신적인 질환을 앓는 사람들을 귀신들렸다고 표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귀신들렸다는 말은 그 당시 사회가 심각하게 불안하고 억압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 군대가 갈릴리에 쳐들어와서 로마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죽이고 마을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학살합니다. 그런 상황이 오면 그런 상황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정신이 미치거나 불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들을 만나시고 그들의 아픔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세상이 억압적이면 억압적일수록 하나님의 자녀들은 서로를 더 사랑하고 서로를 더 지켜주고 서로를 더 품어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의 힘으로 세상의 악에 저항하고 사랑의 힘으로 참고 견뎌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아프면 열 사람이 그 사람을 지켜주고, 한 마을이 아프면 열 개의 마을이 그 마을을 지켜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불안하면 불안할수록 우리들의 사랑은 더 튼튼하고 깊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사람은 영적인 결핍이 일어나면 안 되고 영적인 보호와 사랑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영적인 은혜와 사랑이 있어야만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 내가 귀한 존재라는 깨달음이 나에게 자존감과 자신감을 줍니다.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가 왜곡되어서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면 사람은 영적인 결핍을 느껴서 버림받았다는 생각과 죄책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가 그랬습니다. 복잡한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을 향해서 죄인이라고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계속 듣게 되면,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고 죄책감과 두려움 속에서 수동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내가 가난한 것도 벌 받았기 때문이고, 내가 불행하게 된 것도 벌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 많은 사람들이 신체적인 결핍, 사회적인 결핍, 영적인 결핍 속에서 살았습니다. 한 가지 결핍만 와도 제대로 살기가 힘든데 3가지 결핍이 한꺼번에 오니 사람이 정상적인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몸은 잘 먹지 못해서 아프고, 로마가 지배하는 세상은 폭력적이고, 거기에 더해서 종교는 가난한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멸시하니 사람이 제대로 살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심으로 영적인 결핍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로해 주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여러분의 것입니다. 지금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로하실 것입니다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인지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두려움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사시면서 많은 사람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1526절이 말하는 것처럼 치료의 하나님, 여호와 라파를 직접 증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충만에서 결핍으로 흐릅니다. 장마철에 비가 오면 물이 웅덩이에 고이듯이 하나님의 은혜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결핍이 있는 곳으로 흘러서 그 결핍을 채워줍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주의 은혜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결핍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일으켜주시고 그들의 결핍을 채워 주십니다. 인생을 살면서 결핍을 느끼시는 분들은 주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내가 신체적인 결핍을 겪고 있습니다. 내 몸을 고쳐 주옵소서. 주님, 내가 사회적인 결핍을 겪고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내 삶을 고쳐주옵소서. 주님, 내가 영적인 결핍을 겪고 있습니다. 내 영혼이 지치지 않도록 나를 찾아오셔서 내 영혼을 채워 주옵소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 치료의 하나님, 여호와 라파 되시는 주님의 능력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 내려와서 우리의 결핍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 교회가 오늘날 신체적인 결핍, 사회적인 결핍, 정신적이고 영적인 결핍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이들을 돕고 치유하는 복된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piphany Jesus healed social deficiency

Matthew 4:2325, 8:14-17


Jesus went all over Galilee, teaching in the Jewish meeting places and preaching the good news about God's kingdom. He also healed every kind of disease and sickness. News about him spread all over Syria, and people with every kind of sickness or disease were brought to him. Some of them had a lot of demons in them, others were thought to be crazy, and still others could not walk. But Jesus healed them all. Large crowds followed Jesus from Galilee and the region around the ten cities known as Decapolis. They also came from Jerusalem, Judea, and from across the Jordan River. (Matthew 4:23-25)


Jesus went to the home of Peter, where he found that Peter's mother-in-law was sick in bed with fever. He took her by the hand, and the fever left her. Then she got up and served Jesus a meal. That evening many people with demons in them were brought to Jesus. And with only a word he forced out the evil spirits and healed everyone who was sick. So God's promise came true, just as the prophet Isaiah had said, "He healed our diseases and made us well." (Matthew 8:14-17)


Today’s gospel shows that many people in Rome’s empire experienced varying degrees of poverty. Understandings of hygiene were limited; social stresses were high; water quality poor, food insecurity was rife with low quality and limited quantities. Such factors resulted in widespread diseases associated with poor nutrition and a lack of immunity. These kinds of diseases were death-bringing in a world that required physical labor for survival. Jesus’ healings are acts that repair imperial damage and enact God’s life-giving empire in restoring people’s lives. They anticipate the completion of God’s working that creates a world in which all people enjoy abundant good food and physical wholeness, where the blind receive their sight, the lame walk, the lepers are cleansed, the deaf hear, the dead are raised, and the poor have good news brought to them. Jesus healed physical, social, and spiritual deficiency. The healing power of Jesus flowed down from God to those in need. The spirit of God always runs down to fill up our wound and deficiency. We pray that God heals physical, social, and spiritual deficiency in the world.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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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후 세번째 주일 / 1월 네번째 주일

주현절, 어부와 물고기

마태복음 4:12 - 23

정해빈 목사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4장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단계가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가장 먼저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시고 광야에 가셔서 3가지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그리고는 헤롯이 세례요한을 처형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북쪽 갈릴리로 올라가셔서 그곳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의 처형이 공생애를 시작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를 전환점/Turning Point라고 합니다. 내가 사업을 해야 되겠다, 결혼을 해야 되겠다, 유학/이민을 가야 되겠다,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전환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세례요한의 죽음이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때로는 한 사람의 죽음, 한 사람의 헌신적인 삶이 다른 사람에게 전환점을 주기도 합니다. 지난 월요일은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을 추모하는 미국 국경일이었고 지난 금요일에는 오바마가 퇴임하고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민주당 대통령 경선에 참여했던 버스 샌더스 의원이 킹 목사님의 용기를 배워야 한다고 연설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1960년대 미국 지도자들이 킹 목사님을 지지하다가 킹 목사님이 미국의 베트남 참전에 반대하자 태도를 바꾸어서 미국에서 인종차별 운동만 하면 되지 왜 외교에 참견하느냐고 킹 목사님을 비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킹 목사님은 물러서지 않고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킹 목사님의 자유, 평화, 비폭력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고 연설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킹 목사님의 이런 활동이 8년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큰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도 요한의 죽음이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살아있을 때는 본격적인 활동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마도 10년 이상 자신의 멘토/스승인 요한을 따라다니면서 많은 것을 체험하고 깊이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헤롯이 자신의 부정을 비판한 요한을 성에 붙잡았다가 처형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죽음을 슬퍼하셨습니다.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는 가난하고 깨끗한 사람이었고 정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권력자들은 그런 요한이 눈의 가시처럼 보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요한의 사역이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는 요한이 한 사역을 계속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시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하나님 나라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시작하셨습니다. 여기에 요한과 예수님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요한은 주로 요단강에서 말씀을 전했고 사람들이 그에게로 몰려들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직접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자신이 자랐던 북쪽 갈릴리 지역으로 올라가서 그 곳에서 하나님 나라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은 갈릴리를 가리켜서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가 차지한 지역이고 이방인의 땅이며 어둠의 땅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갈릴리가 이방인의 땅이라고 말한 것은 이방 사람들이 갈릴리를 지배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옛날에는 앗시리아 제국이 갈릴리를 지배했는데,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 제국이 갈릴리를 지배했습니다. 갈릴리는 가장 북쪽 외딴 곳이었고 제국들이 통치하는 곳이었습니다. 가난한 농민들과 어부들이 로마 제국 치하에서 고통받으며 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고통받는 바로 그곳,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곳 사람들을 위로하시고 치료하셨습니다. 보통 사람이 큰 일을 하려면 큰 곳에 가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외롭고 가난하고 힘든 곳으로 가셔서 그곳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작고 보잘 곳 없는 곳에서 시작됩니다. 작은 곳을 변화시키는 사람은 큰 곳도 변화시킬 것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 가신 것처럼, 임현수 목사님도 북한에 들어가셨다가 현재 재판받고 수감 중에 계십니다. 북한전복음모행위를 했다고 하는데 백보 양보해서 죄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연세가 많으신데 이제 그만 석방되기를 바랍니다. 북한 땅에 양로원, 탁아소, 고아원을 세우시고 동포들에게 많은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이 문제는 외교적으로 푸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캐나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임 목사님이 석방되도록 노력해 주기를 요청합니다. 각 나라들마다 세상을 통치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로마는 창과 칼로 세상을 지배하고 통치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로마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선언하셨습니다. 로마의 방식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부들을 향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지 않겠냐고 말씀하시고 당신을 따라온 그들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이 고기 잡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향해서 나를 따라오너라 나는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부는 어부인데 물고기 잡는 어부가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드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우리에게 주는 몇가지 메시지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직업을 통해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부들을 향해서 어부 일 그만하고 이제부터 목수가 되어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부는 어부 인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직업을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회사 다니는 사람이 주님의 일을 하겠다고 회사 그만두고 신학교 갈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나의 직업을 통해서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같은 직업이지만 목적이 달라지면 됩니다. 관점을 바꾸면 됩니다. 내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면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향해서 직업을 바꾸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직업의 목적을 바꾸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이루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바로 주님의 제자입니다. 둘째,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사람을 낚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부가 물고기를 잡는 것은 물고기를 잡어 죽여서 먹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향해서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격려하고 후원하고 일으키는 사람, 그런 사람, 그런 멘토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눈먼 사람을 눈 뜨게 하고, 억눌린 사람을 풀어주는 그런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을 전도해서 교회 나와서 예수 믿게 하는 것도 사람을 살리는 일이고 더 나아가서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격려하고 그들을 일으키는 것도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라고 우리들을 부르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는 우리를 어부로 부르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향해서 물고기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마태복음 419절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Follow me and I will make you fish for people.”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는 말씀입니다. make you fish, 여기 나오는 fish는 동사, 무엇을 낚는다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그런데 만약 fish를 명사로 해석하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너희를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물고기로 만들겠다는 뜻이 됩니다. 물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들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물고기도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물고기를 먹듯이 우리들도 그렇게 모든 것을 다 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먹어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모든 것을 다 주고 떠나듯이 우리들도 자기를 내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물고기를 신앙의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ησος Χριστός, ΘεοΥός, Σωτήρ, (이에수스 크리스토스 테우 휘오스 소테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Jesus Christ, Son of God, Saviour). 예수의 첫글자 이오타.” 그리스도의 첫글자 ,” 하나님의 첫글자 테타,” 아들의 첫글자 웁실론구세주의 첫글자 시그마를 합치면 ΙΧΘΥΣ(익수스)가 되는데 익수스는 헬라어로 물고기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표시로 서로 익수스(물고기) 그림을 보여 주었습니다. 기독교를 가리키는 두 가지 상징이 있다면 하나는 십자가이고 하나는 물고기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따라오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라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사람을 살리는 어부가 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나를 먹어라, 나를 내어주는 물고기 같은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piphany, I will make you fish for people

Matthew 4:12 23


When Jesus heard that John had been put in prison, he went to Galilee. But instead of staying in Nazareth, Jesus moved to Capernaum. This town was beside Lake Galilee in the territory of Zebulun and Naphtali. So God's promise came true, just as the prophet Isaiah had said, "Listen, lands of Zebulun and Naphtali, lands along the road to the sea and east of the Jordan! Listen Galilee, land of the Gentiles! Although your people live in darkness, they will see a bright light. Although they live in the shadow of death, a light will shine on them." Then Jesus started preaching, "Turn back to God! The kingdom of heaven will soon be here." (Matthew 4:12-18)


While Jesus was walking along the shore of Lake Galilee, he saw two brothers. One was Simon, also known as Peter, and the other was Andrew. They were fishermen, and they were casting their net into the lake. Jesus said to them, "Come with me! I will teach you how to bring in people instead of fish." Right then the two brothers dropped their nets and went with him. Jesus walked on until he saw James and John, the sons of Zebedee. They were in a boat with their father, mending their nets. Jesus asked them to come with him too. Right away they left the boat and their father and went with Jesus. Jesus went all over Galilee, teaching in the Jewish meeting places and preaching the good news about God's kingdom. He also healed every kind of disease and sickness. (Matthew 4:19-23)


When John the baptizer was arrested and killed by King Herod, Jesus began his public ministry as one way of extending John’s ministry for the Kingdom of God. Jesus settled in Capernaum in the territory of Zebulun and Naphtali which was occupied by imperial powers. It positions Jesus as the light or saving presence that shines in the darkness of Rome’s imperial domination. Jesus asserts God’s light or saving rule in Roman Galilee. Jesus calls fishermen to a different loyalty and way of life, creates a new community, and gives them a new mission, fish for people. His summons exhibits God’s empire at work, this light shining in the darkness of Roman-ruled Galilee. Today’s message shows that we are called not only to be “spiritual fishers” for saving and healing people, but also “fishes” given to those in need.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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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후 두번째 주일 / 1월 세번째 주일

창립50주년, 생활 신앙

이사야서 42:1 - 7

정해빈 목사




한국 기독교 역사가 개신교는 130, 천주교는 200년이 되었는데 한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신학자를 꼽으라면 김재준과 박형룡, 이렇게 두 분을 말할 수 있습니다. 김재준 목사님은 진보적인 신학자로 알려져 있고 박형룡 목사님은 보수적인 신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박형룡 목사님은 선교사님들이 전해 준 신학을 그대로 계승하고 경건하게 신앙생활 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주일은 거룩한 날이니까 예배만 드려야 하고 일을 하거나 장사를 하거나 오락을 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도 열심히 해야 하고 성경은 성경은 일점일획도 의심하지 말고 문자적으로 철저하게 믿어야 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고 거듭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신학을 가리켜서 정통 보수 신학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비해서 김재준 목사님은 성경을 읽을 때 문자 하나하나에 집착하지 말고 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하나님 믿고 구원받고 천당가는 것에만 만족하지 말고 주의 기도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복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서 이 땅, 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고 복음의 능력이라고 말했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겨자씨처럼, 누룩처럼 세상의 모든 영역에 전파되어서 이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박형룡 목사님의 강조점이 신앙생활에 있다면 김재준 목사님의 강조점은 생활신앙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신앙생활을 잘 해야 합니다. 예배도 열심히 드리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말씀도 열심히 읽고 봉사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런데 김재준 목사님은 신앙생활도 잘해야 하지만 생활신앙도 잘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무리 주일 예배 잘 드리고 기도 열심히 하고 말씀 열심히 읽어도 내 삶에서 나의 신앙이 드러나지 않으면 그 신앙은 죽은 신앙이 됩니다. 하루 24시간 중에서 1시간 열심히 예배를 드렸지만 나머지 23시간 동안에 하나님의 뜻과 아무 상관없이 산다면 그 사람은 신앙생활은 잘 했을지 몰라도 생활신앙은 잘못한 사람일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하는 일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드러내야 합니다. 주일 예배 1시간 뿐만 아니라 나머지 23시간에서, 내가 일터에서 일하고, 사람을 만나고, 가족과 보내는 모든 시간에서 나의 신앙이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을 100번 읽고 40일 철야 기도를 했습니다. 신앙생활은 100점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매일매일의 삶에서 신앙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웃을 사랑하지도 않고, 공의를 실천하지도 않는다면, 그 사람의 신앙은 형식적인 신앙, 열매없는 신앙에 머물고 말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지 모르지만 생활신앙은 잘못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열심히 다니는데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걸어가면서도 기도하고 말씀을 줄줄 외웠습니다. 누구보다도 신앙생활을 잘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생활신앙을 잘 못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지도 않았고 교만했으며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했습니다. 그저 겉으로만 경건한 척 했습니다. 그런 삶을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외식하는 자라는 책망을 듣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인 신앙생활도 잘해야 하지만 더 나아가서 생활신앙도 잘 해야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강도만난 자를 도와주고 함께 아파하는 사람, 그런 생활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과 생활신앙의 차이점은 기독교 뿐만 아니라 유교에서도 나타납니다. 유교 성리학이 조선 시대 500년을 이끌었는데 정통 성리학이 신앙생활을 강조했다면 조선 후기에 등장한 실학은 생활신앙을 강조했습니다. 성리학은 예로부터 명분과 형식과 이론과 예의범절을 중요시했습니다. 제사를 지낼 때는 이런저런 순서를 지켜야 하고 양반은 체통을 지켜야 합니다. 공자 왈 맹자 왈 학문을 해야지,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면 안 됩니다. 땀을 흘려서 농사를 짓거나 물건 만드는 사람은 양반이 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우스개 소리 아실 것입니다. 어느 날 서양 선교사들이 땀을 흘리면서 테니스를 치는 것을 고종 임금이 보았습니다. 고종 임금이 그것을 보면서 하인들 시키면 되지 무엇하러 땀을 흘리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양반은 테니스를 쳐도 안 되고 땀을 흘려도 안 되고 물건을 만들어도 안 되고 음식을 만들어도 안 됩니다. 고상하게 앉아서 책을 보거나 아랫사람의 시중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조선 실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하는 학문이 일반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였던 다산 정약용은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전라도 강진에서 18년 유배 생활을 했는데 그곳에서 500권의 책을 썼고 몸이 아픈 백성들을 위해서 [촌병혹치]라는 의학 서적을 펴냈습니다. 그의 형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유배 생활하는 중에 어부들을 위해서 바다 물고기를 연구한 [자산어보]라는 책을 냈습니다. 보수적인 양반들이 보기에는 양반이 점잖지 못하게 무슨 물고기 책을 쓰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약용과 정약전은 백성들의 삶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정약용은 수원 화성을 쌓는데 백성들이 무거운 돌을 옮기는 것을 보고는 쉽게 옮길 수 있도록 기중기를 개발했고, 지방 탐관오리들이 부패한 것을 보면서 공직자는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는지를 쓴 [목민심서]라는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남북한의 지도자들이 [목민심서]를 읽었더라면 남북한은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베트남을 통일시킨 호치민은 책상에 목민심서를 놓고서 항상 읽었다고 합니다. 성리학자들이 명분과 형식을 중요시했다는 점에서 신앙생활을 했다고 말한다면 실학자들은 백성들의 삶에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생활신앙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경재 교수님께서 쓰신 [장공의 생활신앙 깊이 읽기] 책을 보면 놀랍게도 조선 실학자들의 실사구시, 생활신앙 전통이 김재준 목사님의 신학에 영향을 끼쳤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김재준 목사님은 함경북도 가장 북쪽 아오지 경흥에서 태어나셨는데 그곳에는 옛날부터 유배를 받은 실학자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조선 시대 실학자들이 정부의 미움을 받는 일이 많았는데 미움을 받아서 유배를 가면 북쪽 끝 함경도로 가거나 아니면 남쪽 끝 전라도 강진으로 가거나 둘 중의 하나였습니다. 김재준 목사님의 어머니가 그 지역의 대표적인 실학자였던 채향곡 선생의 4대 후손이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마도 김 목사님께서 평생 진보적이고 실천적이고 개방적인 신학을 펼칠 수 있었던 것도 어린 시절부터 외가로부터 실학자들의 실사구시, 생활신앙 전통을 물려받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 일제시대 함경도나 북간도에 이주를 한 조선 양반들은 정통 양반들과 달랐습니다. 그들은 양반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농사를 지었고 학교와 교회를 세워서 후진을 양성했습니다. 김재준 목사님께서는 박정희 정권 시절에 정권의 탄압을 피해서 캐나다로 망명 오셔서 10년 동안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셨습니다. 조선 시대 실학자들이 유배를 받은 것처럼 김 목사님께서도 유배 생활을 하시면서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 우리 교회 창립50주년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들에게 훌륭한 신앙 전통을 물려주신 선배 목사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서 42장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종,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메시야는 어떤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사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종이고 메시야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어떤 사람일까요?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좋아하실까요? 하나님의 종은 소리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겸손하고 조용하게 일합니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고 진리로 공의를 선포합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바로 이런 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큰일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요란하게 소리를 지르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됩니다. 겸손하고 조용하게 하루 24시간,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을 증거하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흔히 교회에서 신앙생활 잘 합시다이런 말을 많이 합니다. 물론 우리는 예배도 열심히 드리고 말씀과 기도와 봉사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하지만 거기에 멈추지 말고,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실현되도록 노력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함께 아파하는 교회, 꺼져가는 심지를 끝까지 지켜주는 교회,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50th anniversary, living faith

Isaiah 42:1 - 7


Here is my servant! I have made him strong. He is my chosen one; I am pleased with him. I have given him my Spirit, and he will bring justice to the nations. He won't shout or yell or call out in the streets. He won't break off a bent reed or put out a dying flame, but he will make sure that justice is done. He won't quit or give up until he brings justice everywhere on earth, and people in foreign nations long for his teaching. (Isaiah 42:1-4)


I am the LORD God. I created the heavens like an open tent above. I made the earth and everything that grows on it. I am the source of life for all who live on this earth, so listen to what I say. I chose you to bring justice, and I am here at your side. I selected and sent you to bring light and my promise of hope to the nations. You will give sight to the blind; you will set prisoners free from dark dungeons. My name is the LORD! I won't let idols or humans share my glory and praise. Everything has happened just as I said it would; now I will announce what will happen next. (Isaiah 42:5-7)


“Here is my servant. I have given him my Spirit, and he will bring justice to the nations. He won't shout or yell or call out in the streets. He won't break off a bent reed or put out a dying flame, but he will make sure that justice is done.” Today’s scripture shows that God has chosen people as God’s servants to bring justice to the world for the sake of God’s name. They won't give up until they brings justice everywhere on earth. That message reminds us of offering our bodies to God as a living sacrifice. We are called not to be Sunday Christians or to live a religious life, but to live faith with our whole heart and body in every day life. Let’s us remember that God wants us to spread the love and justice of God into every areas of the world. We are called to live faith.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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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후 첫번째 주일 / 1월 두번째 주일

창립50주년,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니

누가복음 4:16 - 21

정해빈 목사




오늘부터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사역을 묵상하는 주현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4장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취임 설교를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복음서를 보면 성탄절 이야기 다음에 바로 예수님의 공생애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청소년 시절을 자세하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많은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거칠고 힘든 목수 일도 하셨을 것이고, 세례 요한을 따라 광야에 들어가서 기도 생활도 하셨을 것입니다. 갈릴리 농민들과 어부들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도 보셨을 것이고, 예루살렘 성전과 궁궐도 보셨을 것입니다. 이런 시간이 지난 후에 대략 30세가 되셨을 때, 예수께서는 자기가 자라신 갈릴리 나사렛에 오셔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는 이사야 61장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주님의 영의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 부으셔서....” 이렇게 설교를 시작하셨습니다. 보통 어떤 사람이 공직에 오르면 제일 먼저 취임 연설을 합니다. 취임 연설을 들어보면 그 사람이 앞으로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취임 설교를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바로 이 말씀 속에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사역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자유와 해방과 용서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주님께서 시작하신 이 사역을 계속하라고 교회를 세워 주셨습니다.


주님의 영의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 부으셔서...” 예수님은 공생애를 그냥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 주의 영의 기름 부음을 받고 나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왕이나 제사장이나 예언자가 취임할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하나님의 종으로 임명하고 축복했다는 뜻에서 그 사람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50년 전 엘리자베스가 영국 여왕으로 취임할 때도 상징적으로 그 사람 머리 위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기름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종으로 선택받았고 그 사람이 해야 할 직책이 신성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기름 붓는다는 말(anoint)에서 메시야/그리스도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사람이 메시야/그리스도입니다. 하지만 왕이나 제사장이나 예언자가 취임할 때만 기름을 붓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이가 어린 사람도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사무엘기상 16장을 보면 사무엘 선지자가 당시로는 시골이었던 베들레헴을 찾아가서 이새의 막내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부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린 다윗에게 기름을 부음으로서 비록 지금은 나이도 어리고 힘도 없지만 앞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려주었습니다. 어린 자녀를 축복하고 그의 미래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도 우리 자녀들에게 영적인 기름을 부어달라고 기도하면 좋을 것입니다. 이 아이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좋을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사람들은 메시야를 3가지 방식으로 이해했습니다. 첫째로 사람들은 독립 전쟁을 이끄는 전쟁 용사를 메시야로 이해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자는 무엇보다 능력이 있어야 한다, 침략자를 무찌를 만한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군대 장군을 메시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메시야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칭 메시야를 따라서 오랫동안 독립전쟁을 일으켰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종말에 오시는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아직은 때가 오지 않았다, 역사의 마지막 때가 되면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메시야가 나타나서 자신들을 일으켜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두번째 메시야 이해입니다. 그런데 유대교 신비주의, 기독교 신비주의가 이해하는 세번째 메시야 이해가 있습니다. 진짜 메시야는 군대 장군도 아니고, 종말에 오시는 메시야도 아니고, 우리들이 메시야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들 모두가 작은 메시야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은 너무 크고, 너무 문제가 복잡하고, 너무 많이 망가졌기 때문에 한 사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것은 마치 큰 조각 그림을 퍼즐로 맞추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퍼줄 맞추기 해 보셨습니까? 큰 그림을 퍼즐로 맞추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기저기 흐트러진 수백 개, 수천 개 퍼즐을 하나씩 하나씩 집어서 천천히 조각을 맞추어야 합니다. 한명이 퍼줄을 다 맞출 수도 없습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협력해서 조각을 맞추어야 큰 그림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망가지고 흐트러진 큰 퍼줄과 같습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한명의 뛰어난 메시야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 명의 메시야들이 나와야 합니다. 우리들이 작은 메시야가 되어서 함께 노력해야만 망가지고 흐트러진 이 세상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혼자서 큰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큰 사랑을 가지고 작은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메시야 중의 메시야 되시는 예수님은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고 주님께서 내게 기름 부으셨다고 말씀하시고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예수께서 우리의 구원자/메시야 되심을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사역은 주님만 하시는 사역이 아니라 우리들도 해야 하는 사역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작은 메시야가 되어서 주님께서 시작하신 사역을 계속 이어가라고 우리들을 부르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세상을 어지럽혀 놓고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메시야를 보내달라고 기도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 우리들을 향해서 너희가 세상을 어지럽혀 놓았으니 너희가 작은 메시야가 되어서 세상을 치료하여라, 너희가 서로가 서로에게 메시야가 되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 끝부분을 보면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은혜의 해는 50년째가 되는 해, 희년(禧年)을 가리킵니다. 안식일이 발전해서 안식년이 되었고 안식년이 발전해서 희년이 되었습니다. 일주일에 하루는 종도 쉬고 동물도 쉬라는 뜻에서 안식일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땅을 6년간 경작했으면 7년째 되는 안식년에는 땅을 1년 쉬게 하여라, 혹시 누군가가 너의 종이 되어서 그 종을 6년간 부려 먹었으면 7년째 되는 안식년에는 그 종을 풀어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면 49년이 되고 그 다음 해가 50, 희년이 됩니다. 희년이 되면 남에게 산 땅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희년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해이고 이웃에게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는 해입니다. 희년은 기쁨의 해이고 축제의 해이고 감사의 해입니다. 50년이 되면 사람들은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빚을 탕감해 주고 나눔을 실천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 희년 사역을 하라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성령을 부으시고 기름을 부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올해로 우리 교회가 창립50주년 희년이 되었습니다. 올해는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해이고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해입니다. 지난 50년 동안 우리를 이끌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지난 세월을 감사드리고 앞으로의 시간을 바라보면서 희년 사역을 실천하십시다. 민족과 인류의 화해를 위해서, 창조 세계의 보존을 위해서 일하는 우리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시편 23편 시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께서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주님께서 나를 귀하게 여기시고 주님을 위해서 일하라고 내 머리에 기름을 부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우리들을 작은 메시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들이 바로 주님의 일꾼이요 종이요 메시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시고 부자도 사랑하시지만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더 사랑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만 살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 받은 일꾼이 되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50th anniversary, you anoint me with oil

Luke 4:16 - 21


Jesus went back to Nazareth, where he had been brought up, and as usual he went to the meeting place on the Sabbath. When he stood up to read from the Scriptures, he was given the book of Isaiah the prophet. He opened it and read, "The Lord's Spirit has come to me, because he has chosen me to tell the good news to the poor. The Lord has sent me to announce freedom for prisoners, to give sight to the blind, to free everyone who suffers, and to say, <This is the year the Lord has chosen.>" Jesus closed the book, then handed it back to the man in charge and sat down. Everyone in the meeting place looked straight at Jesus. Then Jesus said to them, "What you have just heard me read has come true today." (Luke 4:16 21)


To anoint someone means to say that someone is special, designated for greatness. When the psalms 23 says “You anoint me with oil,” he is saying, God, you have given me the gift of being special, and I accept the responsibility that comes with that gift. One of the most important words in Christian and Jewish theology derives from the custom of anointing someone with oil to mark that person as special. The word is “messiah,” which literally menas God’s anointed one. Messiah does not have to be one person. Some Jewish mystics says that the problems of the world are too great for one person to solve, however powerful. Rather, every one of us has to be a “messiah in miniature,” doing something, however small, to repair and redeem the world.


When Jesus began his public ministry, Jesus proclaimed “The Spirit of the Lord is upon me because he has anointed me with oil to bring good news to the poor.” As God anointed Jesus with oil as the way of appointing and blessing his ministry, we also believe that God anoints us with oil as the servant, messenger, and the people of God. Mother Teresa said, “Few of us can do great things but all of us can do small things with great love.” God has anointed my head with oil. God expects me to do my share to bring about God’s kingdom. As the small messiahs, we are called to proclaim release to the captives and recovery of sight to the blind, to let the oppressed go free, and to proclaim the year of the Lord’s favour.’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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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주일 / 성탄절 후 첫번째 주일

신년주일, 선하심과 인자하심

시편 25:1 - 10

정해빈 목사




페르시아의 어느 왕이 신하들에게 마음이 슬플 때는 이것을 보고 위로를 받고 마음이 기쁘고 흥분할 때는 이것을 보고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는 물건을 찾아오라고 말했습니다. 신하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물건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어느 지혜로운 신하가 반지를 만들어서 왕에게 주면서 이 반지에 쓰여 있는 글자를 항상 생각하면 마음이 슬플 때는 위로를 받고 마음이 기쁘고 흥분할 때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 반지에 쓰여진 글자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글자였습니다. 지난 한해 마음이 힘들고 슬프셨던 분들은 이 글자를 보면서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지난 한 해 마음이 기쁘고 흥분했던 분들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글자를 보면서 마음을 가라앉히시기 바랍니다. 나를 힘들게 했던 시간도 지나가고 나를 기쁘게 했던 시간도 지나갑니다. 시간이 지나간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시간이 지나가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을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가기 때문에 과거에서 벗어나서 미래로 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에게 새로운 시간/기회를 주셨습니다. 어제 잘못했어도 오늘 더 잘하라고 우리들에게 새로운 시간/기회를 주셨습니다.


새해가 되면 많은 성도님들이 올 한해 나를 가르치고 인도해 줄 말씀을 찾습니다. 교회들 중에는 새해가 되면 성경구절이 기록된 책갈피를 모아놓고 성도님들이 앞으로 나와서 책갈피를 제비 뽑도록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뽑은 성경구절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생각해서 일 년 동안 지키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일 년 동안, 아니 평생 동안 내 삶에 적용해야 할 좋은 성경 말씀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성경에는 내 삶에 적용해야 할 많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하나를 소개하자면 선하심과 인자하심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시편 23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른다고 했습니다. 내가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라다닌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선하시고 인자하신 주님의 은혜가 나를 항상 따라다니도록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나를 따라다니는 주님의 은혜와 함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가끔 사람들 중에는 인생에서 성공하기 위해 열심히 앞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내버리고 앞을 향해 빨리 달려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인생을 달려가면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그런 사람들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어느 등산가가 원주민들과 함께 산을 오르는데 어느 날 원주민들이 더 이상 길을 가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길을 걸어가지 않느냐고 물어보니까 원주민들이 우리가 너무 빨리 걸어와서 우리들의 영혼이 못 쫓아오니까 영혼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와 함께 걸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없는 성공은 불행한 성공이 되기가 쉽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악착같이 노력해서 빨리 부와 권력을 차지했지만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없기 때문에 그 끝이 아름답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진정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빨리 간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니라 바른 목적지를 향해서 걸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는 목적지가 잘못되면 아무리 빨리 가도 소용이 없습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를 따라다니는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함께 길을 걸어가는 사람만이 후회없는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주의 선하심은 공의로우심을 가리킵니다. 선의 반대말은 악입니다. 주의 공의로우심이 항상 나를 따라다니면서 나에게 속삭입니다. 빨리 성공하려고 하지 말고 정의롭게 성공하십시오. 악을 행하지 마십시오. 때로는 손해볼 지라도 선을 행하십시오. 주의 선하심이 나를 따라다니면서 나에게 말을 합니다. 주의 인자하심은 주의 자비를 가리킵니다. 마찬가지로 주의 자비가 나를 따라다니면서 나에게 속삭입니다. 인자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십시오. 까다롭고 이기적이고 인색한 사람이 되지 말고 너그럽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십시오.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따라다니면서 나에게 말을 합니다. 오늘날 선하고 인자한 사람은 바보 취급을 받기도 합니다.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약삭빠르고 이기적이어야 한다고 사람들이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선하고 인자한 사람은 바보같고 가는 길이 느린 것 같아도 그런 사람들이 세상을 바꿉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사람이 있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선하고 인자한 마음이 없는 사람이 성공하면 그 사람은 세상을 어지럽힐 가능성이 높습니다. 독한 사람은 세상을 어지럽히지만 선하고 인자한 사람은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시장에서 생선 파는 할머니가 모은 돈으로 더 어려운 사람을 돕고 있다는 이야기라든지, 한국의 오뚜기 식품 회사가 세상에 알리지 않고 조용하게 심장병 어린이 4000명을 수술했다는 이야기와 같이 선하고 인자한 사람들이 세상을 바꿉니다. 앞으로 케찹이나 라면을 살 때는 오뚜기 회사 제품을 구입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25편도 시편 23편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님, 내가 젊은 시절에 지은 죄와 반역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님의 자비로우심과 선하심으로 나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주님은 선하시고 올바르셔서 죄인들이 돌이키고 걸어가야 할 올바른 길을 가르쳐 주신다.” 과거에는 내가 주님을 거역했지만 이제부터는 주님의 자비로우심과 선하심으로 나를 기억해 주시고 걸어가야 할 올바른 길을 가르쳐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인생을 앞만 보고 너무 빨리 걸어가면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쫓아오지 못하게 됩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없는 성공은 무의미합니다. 그 성공은 이기적인 성공이 되거나 세상을 어지럽힐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약 우리가 반지에 어떤 글자를 새겨 넣고 그 글자를 매일 보면서 하루하루를 시작한다면, 그 글자는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선한 사람이 되십시오. 정의롭고 반듯한 사람이 되십시오. 악을 행하지 말고 선을 행하십시오. 인자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십시오. 인색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너그럽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십시오나를 향해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기억하면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함께 동행하며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New Year, goodness and mercy shall follow me

Psalms 25:1 10


To you, O Lord, I lift up my soul. O my God, in you I trust; do not let me be put to shame; do not let my enemies exult over me. Do not let those who wait for you be put to shame; let them be ashamed who are wantonly treacherous. Make me to know your ways, O Lord; teach me your paths. Lead me in your truth, and teach me, for you are the God of my salvation; for you I wait all day long. (Psalm 25:1-5)


Be mindful of your mercy, O Lord, and of your steadfast love, for they have been from of old. Do not remember the sins of my youth or my transgressions; according to your steadfast love remember me, for your goodness’ sake, O Lord! Good and upright is the Lord; therefore he instructs sinners in the way. He leads the humble in what is right, and teaches the humble his way. All the paths of the Lord are steadfast love and faithfulness, for those who keep his covenant and his decrees.(Psalms 25:6-10)


“Goodness and mercy shall pursue me.” That means they will not only accompany me and bless my life. They will run after me and find me where I am. It is vision of a world where goodness and mercy will characterize every stage of the lifespan, where adolescents will be merciful to one another instead of treating one another cruelly out of their own insecurity. We cannot persuade God that we deserve God’s unearned love. But we can express confidence, born of all our experiences with God, that we will blessed with God’s love, not because of who we are but because of God is. Celebrating and beginning New Year, we pray that we walk with God slowly, so that God’s goodness and mercy will accompany, bless, run after, and find me where I am.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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