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네번째 주일 / 4월 세번째 주일

주님의 나타나심을 믿습니다

요한복음 20:24 - 29

정해빈 목사


  



1. 4월에 눈도 오고 그랬는데 오늘은 날씨가 화창합니다. 오늘이 4월 17일인데 아직도 꽃이 피지 않았습니다. 나무 가지는 나왔는데 잎은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캐나다에서는 봄이 늦게 옵니다. 하지만 일주일만 기다리면 모든 나무와 꽃들이 활짝 피게 될 것입니다. 마치 운동경기 하는 선수들이 출발 신호가 떨어지면 일제히 앞으로 달려가듯이 모든 나무와 꽃들이 하늘에서 신호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서재경 목사님이 쓰신 “봄”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봄은 거저 오는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설 ‘立’에 봄 ‘春 ’ 일어서는 것이다. 봄은 사방에서 일어서는 것이다. 모두 함께 일어서는 것이다. 어느새 버들강아지는 단단한 껍질을 밀치고 온몸을 부풀리며 일어서고 산골짜기 여울물은 차가운 얼음장에 부딪쳐 부르르 몸서리치며 일어선다... 깨어나지 않고 볼 수 있는 봄은 없느니 일어서지 않고 맞을 수 있는 봄은 없느니... 봄은 거져오는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봄은 일어서는 것이다. 봄은 사방에서 한꺼번에 일어서는 것이다. 모두 다 함께 손잡고 일으키는 것이다. 일어서라 봄! 일으켜라 봄!” 입춘(立春)이라는 말이 봄을 일으킨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계절의 봄, 역사의 봄은 가만히 기다린다고 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함께 손잡고 일어나야만 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늘은 우리보고 일어나라고 따뜻한 날씨를 내려줍니다. 땅은 그 따뜻한 날씨를 받아서 두꺼운 껍질을 깨고 올라옵니다. 하늘과 땅이 서로 만나서 봄을 만듭니다. 우리의 부활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부활을 헬라어로 “아나스타시스”(anastasis), “에게이로”(egeiro) 라고 부르는데, “일어선다, 일어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봄이라는 말이 일어선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부활 신앙도 함께 손잡고 같이 일어나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여러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무덤에서도 나타나시고 길에서도 나타나시고 다락방에서도 나타나시고 산에서도 나타나시고 호숫가에서도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우리 주님이 그렇게 많이 나타나셨는데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왜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주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는데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것이 너무 슬프고 실망스러워서 고향으로 내려갈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길동무로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언제 예언자가 고난을 받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까? 그리스도가 고난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야 영광도 받을 수 있습니다.” 길동무가 이렇게 성경을 풀어서 설명하였고 여관방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길동무가 빵을 떼어서 축복하시고 그들에게 떼어 줄 때 그들의 눈이 열려서 바로 이 길동무가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일곱 명의 제자들이 고향 갈릴리 호숫가에서 고기를 낚고 있을 때 주님이 나타나셔서 “무얼 좀 잡았습니까” 말씀하셨습니다. “못 잡았습니다.” “그물을 오른쪽에 던지십시오 그리하면 잡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물을 오른쪽에 던지니 153 마리의 고기들이 올라왔습니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말을 거는 이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서 동산지기를 만났는데 마리아는 그 동산지기가 예수님의 시신을 가지고 갔다고 생각해서 예수님의 시신을 어디로 가지고 갔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동산지기가 “마리아야” 부르는 순간에 비로소 그 동산지기가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이렇게 성경에는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셨는데 제자들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왜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부활 이전과 부활 이후의 예수님 얼굴이 똑같았다면 제자들은 당장에 예수님을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부활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가르침을 듣고 나서야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성경의 이런 말씀들은 부활 이전과 부활 이후가 매우 다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부활 이전 육체 그대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몸으로, 새로운 존재로, 새로운 얼굴로 부활하셨습니다. 어쩌면 오늘날에도 부활의 주님은 다른 얼굴로 우리들에게 나타나시는 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깨닫지 못해서 그렇지, 부활의 주님은 오늘날에도 때로는 아이의 모습으로, 때로는 여인의 모습으로, 때로는 노인과 나그네의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나타나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2.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쓴 단편 소설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톨스토이의 작품 속에는 기독교 신앙, 부활 신앙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가난한 구두수선공 마르틴이라는 사람이 지하실의 작은 방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 가난해서 아내도 죽었고 아이들도 병으로 죽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 본 고향 노인이 마르틴에게 한번 읽어보라고 성경을 전해줍니다. 마르틴은 성경을 읽다가 예수님을 꿈에서라도 꼭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 “마르틴, 내일 내가 너에게 가겠다”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다음날 마르틴은 두근거리며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이른 아침 창밖을 보니 늙은 노인이 문 앞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마르틴은 노인을 안으로 들어오게 한 다음에 따뜻한 차를 대접하고 몸을 녹이게 한 다음에 돌려보냈습니다. 조금 있으니 갓난아이를 안고 있는 한 여인이 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마르틴은 그 여인을 안으로 불러서 빵과 스프를 먹이고 몸을 녹이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죽은 아내의 오래된 외투를 주어 보냈습니다. 조금 있다가 창밖을 보니 어떤 아이가 사과 파는 할머니의 바구니에서 사과를 훔쳐 달아다나가 붙잡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르틴은 밖으로 나가 아이의 사과 값을 대신 계산할 터이니 아이를 놓아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루가 지났지만 예수님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이런 음성이 나타났습니다. “마르틴, 오늘 내가 너를 여러 번 방문했는데 그 때마다 나를 반갑게 맞아주어 고맙다.” 이런 음성이 들리고 노인의 얼굴과 아기 엄마의 얼굴과 아이의 얼굴이 나타났다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음성이 들렸습니다. “마르틴 그들이 바로 나였다.” 꿈에서 깬 마르틴은 침상에서 일어나 성서를 펼쳤습니다. 거기에 이런 구절이 쓰여 있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25:40) 이 이야기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옛날과 다른 모습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다양한 얼굴로 나타나신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십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보고 슬퍼서 무덤 앞에서 울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너무 사랑해서 예수님의 유품, 옷,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을 다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옛날 육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육체가 없어지면 예수님도 없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부활은 육체 소생, 즉 과거 육체가 그대로 다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을 주님은 마리아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20장 말씀에는 저 유명한 도마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자들이 도마에게 “우리가 주님을 보았다”고 말하니까 도마는 “내 눈으로 예수님의 못자국을 만져 보아야만 부활을 믿겠다”고 말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못자국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 말씀 속에 초대 교회의 신앙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눈에 보여야만 믿는 사람보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믿는 사람이 더 복되다는 것입니다. 부활이 어디 있느냐? 눈에 보이는 증거를 가지고 와라,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때, 초대 교인들은 주님께서 옛날 모습이 아니라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고백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바람, 공기, 햇살, 사랑은 보이지 않지만 존재합니다. 민심은 천심이라고 하는데 민심이라는 것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민심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사람들이 이심전심으로 느끼는 민심이 있습니다. 강물처럼 도도하게 흐르는 민심이 선거 때가 되면 잘못된 정부와 지도자를 심판합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초대 교인들은 부활의 주님께서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때로는 예배를 통해 나타나시고 때로는 성찬식을 통해 나타나십니다. 때로는 가난한 이웃을 통해 나타나시고 때로는 고통받는 이웃을 통해 나타나시고 때로는 역사를 통해 나타나십니다. 어제 노스욕센터에서 세월호 2주기 추모 예배가 있었는데 어쩌면 부활의 주님은 그 자리에 나타나셨는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나도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다음에 주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은 고향으로 내려가는 엠마오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용기를 주셨고, 고기를 잡지 못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고기를 잡게 하셨습니다. 시신이 없어져서 슬퍼하던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셨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날에도 우리들에게 나타나십니다. 매일 만나는 옆 사람이 부활의 주님일 수도 있고 가난한 이웃이 부활의 주님일 수도 있습니다. 가만히 주변을 돌아보시면 부활의 주님께서 나타나셨다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서 부활의 주님을 체험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The risen Christ reveals differently

John 20:24 - 29


When it was evening on that day, the first day of the week, and the doors of the house where the disciples had met were locked for fear of the Jews, Jesus came and stood among them and said, ‘Peace be with you.’ After he said this, he showed them his hands and his side. Then the disciples rejoiced when they saw the Lord. Jesus said to them again, ‘Peace be with you. As the Father has sent me, so I send you.’ When he had said this, he breathed on them and said to them, ‘Receive the Holy Spirit. If you forgive the sins of any, they are forgiven them; if you retain the sins of any, they are retained.’ (John 20:19 - 23)


But Thomas (who was called the Twin), one of the twelve, was not with them when Jesus came. So the other disciples told him, ‘We have seen the Lord.’ But he said to them, ‘Unless I see the mark of the nails in his hands, and put my finger in the mark of the nails and my hand in his side, I will not believe.’ A week later his disciples were again in the house, and Thomas was with them. Although the doors were shut, Jesus came and stood among them and said, ‘Peace be with you.’ Then he said to Thomas, ‘Put your finger here and see my hands. Reach out your hand and put it in my side. Do not doubt but believe.’ Thomas answered him, ‘My Lord and my God!’ Jesus said to him, ‘Have you believed because you have seen me? Blessed are those who have not seen and yet have come to believe.’ (John 20:24 - 29)


The four gospels in the Bible say in the same way that the risen Christ revealed himself to his disciples but his people could not recognize him. The Christ went in company with his disciples when they walked down to Emmaus from Jerusalem. But they did not know that their traveling companion was the risen Christ. When the disciples went back to their home village and tried to catch fish, the Christ appeared to them saying, "Cast the net to the right side of the boat, and you will find some." But they did not realize at first that this man was the risen Christ. In John 20, Mary Magdalene wept since she thought that someone has taken away the Lord's body. She thought that resurrection is something to do with a earthly body. But the scripture says that Jesus’s resurrection is not about Jesus’ old body. Jesus was risen with a new and glorified body. Later she realized that the man who said to her, was not a gardener but the risen Christ.


All the witnesses of the resurrection confessed that Jesus appeared to them with a different figure. They realized that the risen Jesus are with them whenever they gather, remember him, and do the mission of Jesus. They confessed that they “saw” him in the road, in the river, and in the table. They said that the Christ “appeared” to them although he was not visible. When Thomas said, “I cannot believe in resurrection, unless I see the mark of the nails in his hands, and put my finger in the mark of the nails and my hand in his side,” the risen Christ said to him, “Have you believed because you have seen me? Blessed are those who have not seen and yet have come to believe.” This story shows how early Christians understood resurrection. They believed the risen Christ is always with us with a new spiritual body. We also believe that the risen Christ is with there where people weep and people are working together for God’s justice.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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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세번째 주일 / 4월 두번째 주일

부활을 기다리는 사람들

고린도전서 15:17 - 24

정해빈 목사

    



1. 요즘 우리는 4월 부활의 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4월에는 4.19를 비롯해서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을 더 기다립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부활 신앙은 중요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마지막 결론은 부활로 끝을 맺게 됩니다. 부활 신앙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믿음을 가지고 거친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부활 신앙이 없다면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소망없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부활을 헬라어로 아나스타시스”(anastasis) 또는 에게이로”(egeiro)라고 하는데 다시 일어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절망에서 일어난다, 죽음에서 일어난다, 실패에서 일어난다는 말이 본래 성경이 말하는 부활의 뜻입니다. 교회에서 자주 부르는 영어 노래 중에 “You raise me up”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When l am down and, oh my soul, so weary, when troubles come and my heart burdened be, Then l am still and wait here in the silence until you come and sit awhile with me. You raise me up so l can stand on mountains.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내 영혼이 힘들고 지칠 때, 괴로움이 밀려와 나의 마음을 무겁게 할 때, 나는 여기에서 고요히 당신을 기다립니다. 당신이 내 옆에 와 앉을 때까지, 당신이 나를 일으켜 주시기에 나는 산에 우뚝 서 있을 수 있고 당신이 나를 일으켜 주시기에 나는 폭풍의 바다도 건널 수 있습니다.” 이 노래처럼 주님이 나를 일으켜주신다고 믿는 신앙이 부활 신앙입니다. 부활을 꼭 죽은 다음에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죽음 다음에도 일어나지만 지금 현재에서도 일어납니다. 절망에서 일어나고 질병에서 일어나는 것도 부활입니다. 과거 상처에서 일어나고 과거의 내가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것도 부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일으키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신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살리신다, 누구도 하나님을 막을 수 없다는 신앙이 부활 신앙입니다.

 

부활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부활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활을 오해하는 한두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첫째로 부활은 육체 소생(resuscitation)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잠깐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는 것으로 부활을 이해하면 안 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잠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면 그것은 죽었던 육체가 다시 깨어나는 것이지 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아닙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면 그 사람은 제일 먼저 배고프니까 밥 좀 달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10년 더 산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은 다시 죽어야 합니다. 이 육체를 가지고는 영원히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로운 몸, 영적인 몸을 입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69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알기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다시는 죽지 않으시며, 다시는 죽음이 그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이 육체를 가지고 죽었다가 살아났다면 언젠가는 또 죽어야 하는데, 그리스도께서 영적인 몸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다시는 죽지 않으신다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각각 다른 곳에서 만났습니다. 길에서도 만났고 호숫가에서도 만났고 방 안에서도 만났습니다. 주님께서 시공간을 초월해서 영적인 몸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 밖에서 울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흰 옷 입은 천사가, “여자여, 왜 우느냐?” 물으니까 마리아가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대답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죽은 것이 슬픈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육체/시신이 없어진 것이 슬퍼서 울었습니다. 마리아에게는 예수님의 육체가 중요했습니다. 살아계실 때 보았던 그 육체를 잃어버린 것이 슬퍼서 울었습니다. 마치 육체가 없어지면 예수님도 없어지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셨는데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인줄로 알았습니다. 여보세요, 당신이 그를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 두었는지를 내게 말해 주세요, 내가 그를 모셔 가겠습니다.” 당신이 주님의 시신을 옮겼냐고 물었습니다. 내가 주님의 시신을 모시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마리아야부르니 마리아는 그때서야 그 동산지기가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내 몸에 손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복음의 이 말씀 속에 부활의 깊은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옛날 육체는 없어졌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의 옛날 육체가 없어졌다고 해서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옛날 육체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옛날 육체가 없어졌다고 해서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옛날 육체는 없어졌지만 새로운 몸이 만들어졌습니다. 옛날 육체는 없어졌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나에게 나타납니다. 환상으로도 나타나고 말씀으로도 나타나고 마음으로도 나타납니다. 부활이 육체 소생이 아니라 새로운 몸, 영적인 몸으로 다시 나타나는 사건이라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잘 보여줍니다.

 

2. 둘째로 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권력자들의 부활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부활을 가장 열심히 믿은 사람들은 이집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죽음 후에 육체를 잘 보존해야만 사후 세계에 잘 들어갈 수 있다고 믿어서 시신을 방부제 처리해서 미이라(Mummy)를 만들어 지하에 보관했습니다. 파라오 황제는 자기가 죽은 후 지하 세계를 통치해야 할 때를 대비해서 거대한 지하 궁전을 짓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20만 명의 히브리 노예들이 피라밋과 같은 거대한 지하 궁전 공사에 동원되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 입장에서는 기가 막힙니다. 살아 있을 때도 황제이더니 죽어서도 지하 세계를 통치하려고 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 입장에서는 파라오의 부활이 기쁜 소식이 아니라 끔찍한 소식이었습니다. 중국의 진시황도 불로초를 구해서 가능하면 오래 살려고 하였고 죽었을 경우를 대비해서 파라오처럼 거대한 지하 궁전을 만들었습니다. 35년 동안 최대 70만 명의 사람들이 공사에 동원되었고 지하 궁전의 입구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왕이 매장되고 난 후에 인부들을 안에 가둔 채로 입구를 막기도 했습니다. 권력자들의 부활 이야기는 이 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로마 제국의 네로 황제는 서쪽 로마 사람들로부터는 인기가 없었지만 동쪽에서 처 들어온 외적을 막았기 때문에 동쪽 로마 사람들한테는 인기가 있었습니다. 동쪽 로마 사람들은 네로가 부활해서 서쪽 로마를 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또 요한계시록을 보면 666 이라는 짐승이 등장하는데 히브리어에는 각 철자마다 숫자가 정해져 있습니다. 네로를 히브리어로 쓰고 그 히브리어의 숫자를 더하면 666이 됩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던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가리켜서 네로가 부활한 것과 같다고 생각을 해서 666이라는 숫자를 사용했습니다. 부활이라고 해서 모든 부활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좋은 부활이지만, 바로 왕, 진시 왕, 네로 황제의 부활은 나쁜 부활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지금까지 부활에 대한 두 가지 오해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로 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육체 소생이 아니라고 말씀드렸고, 둘째로 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권력자들의 부활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럼 예수님의 부활은 무엇이냐, 예수님의 부활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객관적인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만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부활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부활이 객관적인 사건으로 일어났다면 로마 사람들도 부활을 보고 헬라 사람들도 부활을 보아야 합니다. 그 당시에 신문 방송 기자가 있었다면 특종, 예수께서 부활하셨다이렇게 신문 기사를 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을 본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제자들만 부활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객관적인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을 간절히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에만 보이는 지극히 사적이고 은밀한 사건이었습니다. 부활이 필요없는 사람에게는 부활이 안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간절히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부활이 보입니다. 부활은 부활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만 나타납니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에게는 부활이 필요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은 부활을 기다리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부활이 아니면 소망이 없는 사람들, 부활이 아니면 슬프고 억울해서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은 간절하게 부활을 기다립니다. 부활은 그런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역사입니다. 2년 전 416일 한국 세월호 참사로 자식을 잃어버린 어머니가 교회에서 이런 간증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부활을 믿습니다. 부활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부활을 믿습니다. 내가 죽으면 반드시 부활해서 그 어린 나이에 물속에 빠져 죽은 내 아들, 내 딸을 꼭 볼 것입니다.” 이렇게 간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1524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 모든 통치와 모든 권위와 모든 권력을 폐하시고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넘겨드릴 것입니다.” 이 세상의 잘못된 통치와 권위와 권력이 무너지고 하나님 나라가 오는 부활을 우리는 기다립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부활을 목격한 것이 아니라 슬프고 억울한 사람들, 주님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만 부활이 나타났습니다. 부활은 부활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만 나타납니다. 주님이 우리를 일으키시는 부활, 역사의 부활, 정의의 부활을 기다리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Those waiting for resurrection

1 Corinthians 15:17 24


Unless Christ was raised to life, your faith is useless, and you are still living in your sins. And those people who died after putting their faith in him are completely lost. If our hope in Christ is good only for this life, we are worse off than anyone else. But Christ has been raised to life! And he makes us certain that others will also be raised to life. Just as we will die because of Adam, we will be raised to life because of Christ. Adam brought death to all of us, and Christ will bring life to all of us. But we must each wait our turn. Christ was the first to be raised to life, and his people will be raised to life when he returns. Then after Christ has destroyed all powers and forces, the end will come, and he will give the kingdom to God the Father. (1 Corinthians 15:17 24)


Resurrection comes from the Greek word anastasis. The first part, ana means "up" and the second, stasis means "a standing." Therefore, the very simple and basic meaning of anastasis is "a standing up." Resurrection means to rise or raise something up from somewhere. This meaning reminds us of the song, “You raise me up.” “When l am down and, oh my soul, so weary, when troubles come and my heart burdened be, then, l am still and wait here in the silence until you come and sit awhile with me. You raise me up so l can stand on mountains.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am strong, when l am on your shoulders.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l can be. You raise me upam strong, when l am on your shoulders. You raise me up so l can stand on mountains.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Resurrection is not resuscitation. Resurrection refers to putting on a new, glorified body, while re-animation, or resuscitation, mean raising the person in the old, mortal body in which they died. Resuscitation is the process of correcting physiological disorders in an acutely unwell patient, such as trauma surgery or emergency medicine. Well known examples are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 and mouth-to-mouth resuscitation. In the Gospel of John chapter 20, Mary Magdalene cried since she thought that someone has taken away the Lord's body. She wanted to keep and bury the dead body of Jesus in sign of love. She thought that she is able to remember the life of Jesus, as long as she has any memory of Jesus’ body. But the scriptures says that Jesus’s resurrection is not resuscitation nor something about Jesus’ old body. According to the testimony of the scripture, Jesus was risen with a new and glorified body.


Resurrection is also nothing to do with the revival of the person in power. In ancient times, many emperors or kings built a huge underground palace so that they could rule over the underworld even after their death. But it is not the resurrection that the scriptures testify to us. Jesus’ resurrection indicates that God raises the innocents or martyrs who were killed by evil. Paul said in 1 Corinthians 15:23, “Christ was the first to be raised to life, and his people will be raised to life when he returns. Then after Christ has destroyed all powers and forces, he will give the kingdom to God the Father.” The risen Jesus revealed himself only to his followers who truly loved him. He did not show himself to the Roman or Greek people. Only experienced his followers Jesus’s resurrection. Resurrection comes only to those who could not forget Jesus’ life. It comes only to those who were killed or oppressed under a false accusation.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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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두번째 주일 / 4월 첫번째 주일

부활,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빌립보서 2:1-11

정해빈 목사 


    



 

1. 성경은 하나님을 인격적인 분으로 고백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격적이시고 의지와 감정이 있는 분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고 때로는 우리들 때문에 기뻐하시고, 때로는 우리들 때문에 슬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우리와 멀리 떨어져서 저 하늘 높이 계시고 인간의 삶에 무관심하고 아무런 감정도 없는 차가운 분이 아니라 우리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분으로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과 대화하기 원하시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하나님과 우리들의 관계를 부모/자식 관계나 신랑/신부 관계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아버지/어머니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랑이 되시고 우리들은 하나님의 신부가 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고백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히브리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고통을 들으시고 그들을 구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성경이 고백하는 하나님은 사랑과 긍휼이 많은 분이십니다. 히브리 백성들은 이집트를 떠나 시내산에 도착해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우리가 이제부터 야훼 하나님만을 섬기겠습니다. 앞으로 우리의 주님이 되어 주십시오, 대신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지키겠습니다.” 서약을 했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히브리 백성들 사이에 계약/언약이 맺어졌습니다. 하나님은 히브리 백성들의 주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셨고 히브리 백성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서로 간에 인격적인 관계가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들은 세상을 살면서 여러 가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하나님, 이웃, 가족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관계라는 것이 가까울 때도 있지만 멀어질 때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언제 관계가 가까워지고 언제 관계가 멀어질까요? 서로에 대한 기대가 충족되면 관계가 가까워지고 서로에 대한 기대가 충족되지 못하면 관계가 멀어집니다. 서로에 대한 의무를 다하면 관계가 가까워지고 서로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관계가 멀어집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서로의 기대가 충족되면 관계는 가까워지지만 서로의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기대는 멀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기대하시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이것이 모세가 하나님과 맺은 시내산 언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관계가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것이 문제일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것이 문제일까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 문제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 문제일까요? 좀 더 쉽게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섭섭하실 때가 많을까요?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에게 섭섭할 때가 많을까요? 상대방과 맺은 인격적인 관계, 사랑의 관계가 깨어졌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요?

 

계약/언약은 양쪽 당사자들이 약속을 지킬 때 가능합니다. 한쪽만 계약을 어겨도 그 계약은 깨지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항상 사람들이 먼저 계약을 깨트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셔서 당신이 맺으신 계약을 언제나 지키시는데 사람들은 너무 쉽게 계약을 어겼습니다. 하나님이 필요할 때는 계약을 지키다가 하나님이 필요 없으면 계약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히브리 백성들이 계약을 지키지 않고 다른 우상을 섬기고 불의를 행하는 이야기가 수없이 많이 나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빨리 내려오지 않자 기다리다 못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고 광야를 지나면서 배고프고 목마르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주었더니 이런 음식은 더 이상 못 먹겠다고 고기를 달라고 불평을 했습니다. 출애굽기 33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너무 화가 나셔서, 너희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라, 하지만 나는 너희와 함께 가지 않겠다, 너희는 고집이 센 백성이므로 내가 너희와 함께 가다가는 너희를 없애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삐지셨습니다. 너무 실망스러워서 너희들하고 같이 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호세아서를 보면 하나님을 신실한 남편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부정한 여인으로 표현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편이 집 나간 부인을 찾아서 집으로 데리고 오면 부인이 또 집을 나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그와 같았습니다. 기회만 있으면 하나님의 품을 떠나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섭섭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계약을 깨트리지 않으시는데 우리들이 항상 계약을 깨트립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탄식하는 이야기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 그런데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섭섭한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에게 섭섭한 이야기도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하시면서 하나님에게 섭섭할 때가 있으십니까? 언제 하나님에게 섭섭하다고 느끼십니까? 어떤 문제를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했는데 문제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이 듭니다. 내가 열심히 교회 다니고 열심히 신앙생활했는데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이 듭니다. 갑자기 어떤 사고를 만났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질병에 걸렸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이 듭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고난받을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성경에는 하나님께 섭섭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101, 주님,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그리도 멀리 계십니까? 어찌하여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에 숨어 계십니까? 악인이 으스대며 약한 자를 괴롭힙니다. 악인은 스스로 쳐 놓은 올가미에 스스로 걸려들게 해주십시오. 악한 자는 자기 야심을 자랑하고 탐욕을 부리는 자는 주님을 모독하고 멸시합니다.” 내가 고난받을 때 왜 숨어 계시냐고 하나님께 섭섭해서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욥기 1323, 내가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내가 어떤 범죄에 연루되어 있습니까? 어찌하여 주님께서 나를 피하십니까? 어찌하여 주님께서 나를 원수로 여기십니까?” 내가 왜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하느냐고, 내가 고난받을 때 왜 나를 피하시냐고 주님께 따졌습니다. 이렇게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섭섭한 이야기도 많이 나오지만,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께 섭섭한 이야기도 많이 나옵니다. 우리가 먼저 계약을 어겨서 계약이 깨진 경우도 있지만, 내가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해 주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섭섭한 것은 우리들만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섭섭함을 느끼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외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예수님도 하나님에게 섭섭함을 느끼셨습니다. 끝까지 순종했는데 왜 나를 구해주지 않습니까? 왜 나를 버리십니까? 왜 침묵하십니까? 예수님도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외침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순교자들/정의로운 사람들의 억울함을 대변합니다. 의인이 고통받고 악인이 잘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섭섭합니다. 정의가 보이지 않고 악이 활개 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섭섭합니다. 억울하고 답답한 일을 당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섭섭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해도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섭섭합니다. 하나님,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잘 섬기며 살았는데,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는데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보상은커녕 오히려 손해를 보고 억울한 일을 당하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한탄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과연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실까요?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신학자들 중에 하나님을 용서하자는 말을 사용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야지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용서할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매순간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는 항상 침묵하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부활입니다. 억울할 일을 당하거든 부활을 보아라, 하나님께서 아무 일도 안하고 계신다고 생각되거든 부활을 보아라,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신다고 생각되거든 부활을 보아라,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내가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들을 다시 일으킬 것이다, 나는 너희와 맺은 언약을 잊지 않을 것이다, 내가 나의 백성들을 다시 일으킬 것이다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섭섭합니다.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주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셨습니까?, 의인들이 순교당할 때 주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셨습니까? 내가 그때 바로 그 자리에 너희와 함께 있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억울한 죽음을 당하거든 부활을 보아라,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부활이 있기 전까지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심으로, 세상 권력자들이 틀렸고 예수님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부활입니다. 이 부활 신앙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억울한 일을 당해도 견딜 수 있습니다. 부활 신앙을 통해서 위로와 소망을 얻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Resurrection, God’s response to suffering

Philippians 2:1-11

 

If then there is any encouragement in Christ, any consolation from love, any sharing in the Spirit, any compassion and sympathy, make my joy complete: be of the same mind, having the same love, being in full accord and of one mind. Do nothing from selfish ambition or conceit, but in humility regard others as better than yourselves. Let each of you look not to your own interests, but to the interests of others. Let the same mind be in you that was in Christ Jesus, who, though he was in the form of God, did not regard equality with God as something to be exploited, (Philippians 2:1-6)

 

but emptied himself, taking the form of a slave, being born in human likeness. And being found in human form, he humbled himself and became obedient to the point of death even death on a cross. Therefore God also highly exalted him and gave him the name that is above every name, so that at the name of Jesus every knee should bend, in heaven and on earth and under the earth, and every tongue should confess that Jesus Christ is Lord, to the glory of God the Father. (Philippians 2:7-11)

 

According to Exodus, the second book of the Old Testament, after leading “Hebrews” which means wanderers, out of slavery in Egypt, God made a covenant with Moses and Hebrews on the Mountain Sinai. It is called Mosaic or Sinai Covenant. Generally speaking, a covenant is a sacred agreement between God and a person or group of people. God sets specific conditions and promises to keep and bless us as we obey those conditions such as Ten Commandments. It works as mutually interdependent and obligated. God promises to bless God’s people and they promise to obey God’s rule. However, throughout the history, It was always Hebrew people who broke first the covenant. God revealed Godself as sincere and faithful, whereas Hebrews betrayed God many times and followed other gods or idols of pleasure and prosperity. If we look at the Scripture carefully, we can find how many times God lamented on the betrayal and unfaithfulness of God’s people. We always break a covenant first and disappoint God!

 

God regrets in most cases that we do not keep the covenant with God. However, it is also true that we are also sometimes disappointed in God. We are discouraged when God seems not to help us. We are disappointed when we cry out God’s help, but God seems to be powerless. We lose our hope when the innocent are killed or oppressed, and when we feel that God does not or cannot rule over the world. Even Jesus expressed despair to God when Jesus died on the cross by crying out with a loud voice, ‘Eloi, Eloi, lema sabachthani?’ which means, ‘My God, my God, why have you forsaken me?’ Yet, today’s scripture says that “Easter” is God’s response to suffering. Paul asserts that God highly exalted Jesus and gave him the name that is above every name, so that at the name of Jesus every knee should bend. We believe that Resurrection is the final victory that God will bring us into the world. We do not give up hope since God had raised Jesus from the dead. As Jesus was risen first, we believe that God will raise those martyrs and righteous people who obeyed God to the end. Resurrection, is God’s response to suffering.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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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주일 / 3월 네번째 주일

부활,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셨습니다

사도행전 2:22-24, 32

정해빈 목사 

   



지난 목요일과 금요일 캐나다 토론토에서는 눈과 얼음비가 내렸습니다. 마치 겨울이 다시 온 것처럼 보였습니다. 몇년 전 얼음비가 와서 나무들이 부러지고 정전이 되었던 때가 떠오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화창하고 따뜻한 날씨 속에서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마치 자연의 모든 생명들이 부활을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을 때,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 곁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가지셨던 열정과 헌신이 죽음과 함께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음이 모든 것을 무효화시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많은 사람들이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길을 걸어갈 때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떡과 잔을 나눌 때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고기를 낚을 때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은 또 이렇게 외쳤습니다. “죽음이 주님을 가둘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죽음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죽음을 무서워합니다. 죽음은 우리 사이를 가로막아서 사랑하는 사람을 더 이상 볼 수 없도록 만듭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죽음의 힘은 거기까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볼 수 없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잊게 할 수는 없습니다. 죽음의 힘이 아무리 강해도 뜨거웠던 사랑의 힘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두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마음의 눈으로는 볼 수 있습니다. 두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영적인 눈으로는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죽음이 우리 주님을 가로막을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열정이 죽음보다 더 크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사랑의 힘, 생명의 힘이 너무 강해서 죽음이 이를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환상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떡과 잔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나셨음을 깨달았습니다. 진실로 생명이 죽음보다 강하고 정의가 죽음보다 강합니다.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고 진리가 죽음보다 강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빌라도도 죽었고 악한 권력자들도 다 죽었지만 우리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생명이 죽음보다 강합니다. 진리가 죽음보다 강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며 위로와 용기를 얻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들은 저 옛날 제자들이 말했던 것처럼 이렇게 고백하며 부활을 기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죽음이 주님을 가둘 수 없었습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대로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멘.


Death Could not hold the Lord

Acts 2:22-24, 32


Last Thursday and Friday, we saw snow and freezing rain. We thought that winter is coming back. But today we see that everything is gone. All the nature seems to say that is the Easter! When Jesus was crucified on the cross, all of his followers ran away. They thought that everything is over. They thought that all the passion and vision of Jesus ended with nothing. They thought that death makes everything nothing, useless, and void. But as time passed, more and more people began to say, “Christ is risen! We have seen the Lord! When we walk down the road, when we share the bread and the cup, we have seen the Lord! When we catch the fish again, we have seen the Lord! The Lord revealed himself to us, when we gathered again.” They also said, "Death could not contain the Lord! Death could not hold the Lord!" We think that death is the end of everything. We think that nothing in the world can block death. So we are afraid of death, since it seems to invalidate everything we cherish. We cannot see and touch anymore when our beloved died or even was killed. Death separates us physically from our beloved. 


But the followers of Jesus had witnessed resurrection and realized that God had raised Jesus from the dead. As Peter said in today's scripture, God made death powerless. God took away the power of death. Those who witnessed the resurrection of Jesus said that Jesus’s passion and vision were so powerful and real that even death could not block Jesus’s resurrection. Today's scripture shows that love is bigger than death. Life is bigger than death. Truth and justice is bigger than death. As the disciples said long time ago, today we boldly say, we have seen the Lord! death could not hold the Lord! “Where, O death, is your victory? Where, O death, is your sting? Thanks be to God! God gives us the victory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Therefore, my dear brothers and sisters, stand firm. Let nothing move you. Always give yourselves fully to the work of the Lord, because you know that your labor in the Lord is not in vain.”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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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 고난주일 / 3월 세번째 주일

받아라 이것은 내 몸이다

마가복음 14:17 - 26

정해빈 목사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는 오늘 일요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고, 월요일에 예루살렘 성전을 심판하셨습니다. 화요일에 성전 제사장들 및 헤롯 당원들과 토론하셨고, 수요일에 마르다/마리아/나사로의 집에서 식사하셨습니다. 목요일에 최후의 만찬을 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다가 로마 병사들에게 붙잡히셨습니다. 금요일 새벽에 대제사장들과 빌라도 총독에게 심문받으시고 금요일 오전 9시 십자가에 매달리셨다가 6시간이 지난 오후 3시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보낸 일주일을 가리켜 종려주일/고난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이 절기가 돌아오면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당하셨네, 예수님, 예수님, 나의 죄 위하여 보배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벌레만도 못한 나를 위해 주님이 돌아가셨다고 찬송을 부릅니다. 사순절이 돌아오면 교회에서 이런 설교와 찬송을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들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기 때문에 마땅히 죽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나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이제 나는 죄에서 용서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신앙을 가리켜서 “대속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랫동안 하나님께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해 동물 희생 제사를 드렸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으면 죄 값을 받고 죽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피를 흘려야만 죄가 용서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죽을 수는 없으니까 나 대신 동물을 죽임으로서 죄 값을 치르게 합니다. 오늘날 동물 애호가들이 들으면 동물이 무슨 죄가 있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동물을 죽여서 나 대신 죄를 사하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처형당하셨을 때 맨 처음 제자들은 너무 놀라고 당황스러워서 예수님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를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동물 제사 전통을 가지고 예수님의 죽음을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사에 바쳐질 동물은 흠이 없고 깨끗한 수컷이어야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흠이 없고 완전한 분이시기에 제물로 바쳐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들은 다 죄가 있고 흠이 있기 때문에 완벽한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만이 제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기독교인들은 100%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의 죽음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죽이는 잔인한 하나님이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셔서 피 흘리지 않아도 우리를 용서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탕자의 비유를 보면,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아무 조건없이 탕자를 껴안고 용서해 주었습니다. 네가 죄를 지었으니까 죄 값을 받아야 한다, 네가 피를 흘리던지 아니면 동물이 피를 흘리던지 피 제사를 드려야 한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돌아온 탕자를 그냥 맞아 주었고 용서해 주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죽여서 우리의 죄 값을 치루어야만 우리를 용서하는 그런 잔인한 분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시는 자비로우시고 진실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목적이 아니라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사시다가 그 결과로 마지막에 십자가를 지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악에 대한 저항입니다. 예수님은 빛을 비추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빛이 이 땅에 오니 어둠이 빛을 싫어합니다.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악한 귀신을 쫓아내시고 악을 책망하시니까 권력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조용히 사셨다면 십자가에 처형당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먹이시고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성전을 심판하셨기 때문에 권력자들에게 붙잡히셔서 죽임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의인의 죽음, 불의한 죽음, 억울한 죽음을 가리킵니다. 우리 주님이 그렇게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 순교자들/희생자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아파하면서 다시는 예수님과 같은 억울한 죽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소극적으로 생각하면 악한 권력자들에게 처형당하신 것이 되지만 적극적으로 생각하면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기 위해 죽으신 것이 됩니다. 소극적으로 생각해서 예수님이 불의한 권력에게 죽임당하셨다고 생각하는 것도 맞지만 보다 적극적으로 생각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내어주셨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에게 더 큰 감동을 줍니다. 마가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이 목요일 저녁에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고 있는 사람이 나를 넘겨줄 것이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제자들이 질문을 합니다. “그는 열둘 가운데 하나로서 나와 함께 같은 대접에 빵을 적시고 있는 사람이다.” 내 앞에 지금 빵 그릇이 있는데 그 빵 그릇에 손을 넣어 빵을 움켜쥐고 있는 사람이 나를 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빵은 예수님의 몸을 가리킵니다. 가롯 유다가 지금 내 빵 그릇에 손을 넣어서 내 빵을 움켜쥐고 있는 것처럼, 조금 있으면 가롯 유다가 나를 움켜쥘 것이다, 나를 붙잡을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가롯 유다가 당신을 배신할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신 다음, “받아라, 이것은 내 몸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제자 중 한 사람이 자기 몸을 붙잡을 것을 아시면서도 자기 몸을 내어주셨습니다. 내 몸을 줄 터이니 나를 가져라. 나를 먹고 더 이상 굶주리지 말아라. 나를 먹고 더 이상 배고프지 말아라. 내가 나의 것을 다 줄 터이니 나를 먹고 다시 일어서거라,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셨습니다. 이 빵을 내 몸이라고 생각하고 이 빵을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빵이 너희 몸속에 들어가는 것처럼, 내가 너희 속으로 들어가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자신을 내어주는 최고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자신의 몸을 주심으로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마가복음 15장을 보면 예수님과 바라바 중에서 바라바가 풀려나고 예수님은 처형당하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명절날이 되면 죄수 하나를 풀어주는 전통이 있었는데 빌라도가 누구를 풀어줄까 물었더니 사람들이 예수 대신 바라바를 풀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결국 바라바는 풀려나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바라바는 무장독립운동을 하다가 붙잡히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 옆에 있는 바라바, 자기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붙잡혀서 죽게 된 바라바, 그런데 바라바는 예수님 때문에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바라바가 살아났습니다. 바라바를 위해서 자기 몸을 내어주셨습니다. 자기 몸을 내어줌으로 다른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자기 몸을 내어주는 사랑의 극치가 바로 십자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하면 할수록 우리를 위해서 자기 몸을 내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한평생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하시다가 마지막에는 자기 몸을 다 내어 주셨습니다. 빛으로 오셔서 빛을 비추시다가 어둠에게 붙잡히셨습니다. 악에 저항하시다가 악에 붙잡히셨습니다. 삶의 마지막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마지막 한사람까지 살리기 위해 자기 몸을 내어주셨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주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 옆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기를 버리는 사랑, 제자가 자신을 배반할 것을 아시면서도 받아라, 이것은 내 몸이다, 나를 가져라, 나를 먹어라, 나를 먹고 배고프지 말아라, 나를 먹고 목마르지 말아라, 내가 너희와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말씀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깨닫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Take it, this is my body

Mark 14:17 - 26


When it was evening, he came with the twelve. And when they had taken their places and were eating, Jesus said, ‘Truly I tell you, one of you will betray me, one who is eating with me.’ They began to be distressed and to say to him one after another, ‘Surely, not I?’ He said to them, ‘It is one of the twelve, one who is dipping bread into the bowl with me. For the Son of Man goes as it is written of him, but woe to that one by whom the Son of Man is betrayed! It would have been better for that one not to have been born.’ (Mark 14:17-21)


While they were eating, he took a loaf of bread, and after blessing it he broke it, gave it to them, and said, ‘Take; this is my body.’ Then he took a cup, and after giving thanks he gave it to them, and all of them drank from it. He said to them, ‘This is my blood of the covenant, which is poured out for many. Truly I tell you, I will never again drink of the fruit of the vine until that day when I drink it new in the kingdom of God.’ When they had sung the hymn, they went out to the Mount of Olives. (Mark 14:22-26)


Many Christians has thought for a long time that Jesus died for "Penal substitution." It is a theory of the atonement within Christian theology. It argues that Christ, by his own sacrificial choice, was punished in the place of sinners, thus satisfying the demands of justice so God can justly forgive the sins. Penal substitution derives from the idea that divine forgiveness must satisfy divine justice, that is, that God is not willing or able to simply forgive sin without first requiring a satisfaction for it. It states that God gave himself in the person of his Son, Jesus Christ, to suffer the death, punishment and curse due to fallen humanity as the penalty for our sin. As opposed to this theory, Athanasius said, “Christ's death enables us to die to sin by our participation, and not as a satisfaction or payment to justice as such.”


Today's scripture shows that Jesus died not for our sin, but for the love for us. When Jesus and his disciples were eating together on Thursday, Jesus said, “One of you, who is dipping bread into the bowl and eating with me, will betray me.” Jesus implied, “Just as one person is grabbing my bread, he will grab me soon.” Although Jesus knew that this happen to him, Jesus took a loaf of bread, blessed it, broke it, gave it to them, and said, “Take, this is my body.” Jesus gave his body to them as the bread of life. Mark chapter 15 also says that Pilate the governor of Judaea was asked by people to free Barabbas, not Jesus. Barabbas, which means the son of father, was able to be released thanks to Jesus beside him. Jesus gave his body to Barabbas to save him. Considering Palm and Passion Sunday, we meditate on the meaning of Jesus. Jesus died, not to be punished in the place of sinners or to satisfy the demands of justice, but to love us and to quench our hunger and thirst by giving out his body to us. We hear Jesus’ voice even today, “I give you everything that I have. Take my body, and rise again. You are not alone. I am always with you.” Whenever taking the bread and the cup, we confess that Jesus is with us.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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