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세번째 주일 / 9월 세번째 주일

창조절, 빛이 있어라 말씀하셨다

창세기 1:1-3, 잠언서 8:22-27

정해빈 목사


 


 


1. 성령강림절이 지나고 9월부터 창조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세상에는 세상 달력이 있듯이 교회에는 교회 달력이 있습니다. 대림절/성탄절/주현절/사순절/부활절은 성자 예수님을 묵상하는 절기이고 성령강림절은 성령 하나님을 묵상하는 절기이고 창조절은 창조주 하나님을 묵상하는 절기입니다. 앞으로 9월부터 11월까지 창조, 자연, 생태계, 역사, 인간, 하나님 나라, 종말 등의 주제를 묵상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 기록/고백이 중요합니다. 이 말씀 속에 우리 삶의 모든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라 고대인들의 신앙고백을 기록한 책입니다. 가끔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6일 만에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했으니까 하루를 천년으로 계산해서 지구가 6천 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을 하면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를 조롱합니다. 성경이 과학책이라면 학교 과학(Science) 수업 시간에 성경을 공부해야 하지만 과학 수업 시간에 성경을 공부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과학책이 아니라 고대 신앙인들의 신앙고백을 기록한 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과학이 성경보다 더 중요하냐면 그렇지 않습니다. 과학은 우리에게 지식을 가르쳐 주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삶의 지혜와 의미와 목적을 가르쳐 줍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과학책보다 성경책이 우리의 삶에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려면 지식도 필요하지만 삶의 지혜와 의미와 목적이 더 중요합니다.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신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진실되고 의미있고 풍성한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성경은 일종의 옛날 역사책인데 사람들이 역사책을 쓰는 이유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나라가 발전할 때 역사책을 쓰거나 아니면 나라가 망했을 때 역사책을 씁니다. 나라가 발전할 때는 자기 나라를 자랑하기 위해서 역사책을 씁니다. 반대로 나라가 망할 때는 국민들을 위로하고 잘못된 과거 역사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역사책을 씁니다. 일제 시대에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라는 책에서 조선의 지도층이 고대 만주에서 활동했던 조상들의 진취적인 기상을 잃어버리고 한반도에 안주하고 가난한 백성들을 수탈하고 중국 사대 사상에 젖어들면서 스스로 왜소해졌기 때문에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고 썼습니다. 조선 백성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해서 [조선상고사]를 썼습니다. 마찬가지로 히브리 백성들은 나라가 망해서 바벨론 포로가 되었을 때 성경책을 써서 백성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려고 하였습니다. 바벨론 제국에 포로로 끌려와보니 바벨론 사람들이 마르둑이라는 최고 신을 믿고 있습니다. 바벨론의 창조 신화에 의하면 최고신 마르둑과 바다를 관리하는 신 티아맛(Tiamat)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마르둑이 티아맛을 죽여서 그 반쪽을 위로 휘어서 하늘을 만들고 나머지 반쪽을 아래로 휘어서 땅을 만들었습니다. 전쟁에서 이긴 마르둑은 자기와 함께 싸운 신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서 인간을 만들어 신들을 섬기게 했습니다. 바벨론의 창조 이야기는 전쟁으로 시작해서 전쟁으로 끝이 납니다. 창조 이야기를 보면 그 나라의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 바벨론은 창조 이야기를 통해서 자기 나라가 얼마나 힘이 쎈 나라인지를 과시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히브리 백성들은 이런 창조 이야기를 믿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인들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고백한 창조 이야기는 아름답고 평화스럽습니다. 거기에는 전쟁도 없고 갈등도 없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고 했습니다. 여기 보면 혼돈, 공허, 어둠, 깊은 물 같은 말이 나오는데 모두가 부정적인 말들입니다. 이런 말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히브리 백성들의 어려운 상황을 가리킵니다. 세상에 어둠이 가득하고 혼란스럽습니다.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온 세상을 다스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둠이 깊음 위에 있다는 말은 당시 세상에 물이 많아서 물이 생명을 위협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당시 바벨론 제국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있어서 자주 물이 범람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어둠/혼돈/공허/깊음이 많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빛을 만드시고 질서를 세우시고 사람이 살기에 좋은 세상을 만드셨다고 그들은 고백했습니다.


2. 맨 처음 세상을 창조하실 때 빛이 있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빛이 있어라가 아니라 반드시 빛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이 어두운 세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어두운 세상을 그냥 놔두지 않고 반드시 밝은 세상으로 바꾸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가리킵니다. 히브리인들은 고백하기를 하나님은 어두움에서 빛을 만드시고 우리를 밝은 세상으로 인도하는 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지금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하고 있지만 반드시 우리를 포로에서 구해주실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빛을 만드신 주님께서는 이어서 "물 한가운데 창공이 생겨 물과 물 사이가 갈라져라" 말씀하셨습니다. 물과 육지의 경계를 정해서 물이 육지를 침범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물이 땅을 삼키는 경우가 많아서 물을 무서워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고백하기를 우리 하나님은 물을 붙잡아두셔서 물과 육지의 경계를 정하신 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물을 붙잡아두니 땅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땅으로 하여금 동물과 식물과 나무와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먹거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구약 성서의 창조 이야기는 이렇게 아름답습니다. 기쁨과 감사와 생명이 넘칩니다. 바베론에 포로로 끌려간 히브리인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이렇게 고백하며 고난을 견뎠습니다. 어두움에서 빛을 만드신 주님, 물에서 땅이 솟아나게 하신 주님, 땅에서 먹거리가 나오게 하시는 주님, 그 주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사 이 세상을 좋은 세상으로 만드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시골에 가보면 100년, 200년 된 오래된 집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집을 지어도 사람이 살고 있느냐 살고 있지 않느냐에 따라서 집이 달라집니다. 집이 사람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집에 사람의 기운이 있으면 오래가지만 집에 사람이 살지 않으면 곧 폐허가 되고 흉가가 됩니다. 집을 크게 고친 것도 아니고 그냥 열심히 쓸고 닦은 것이 전부인데 그런 집은 수백 년을 가지만 그렇지 않은 집은 몇 십 년을 가지 못합니다. 어떤 집은 아내가 집을 쓸고 닦지만 어떤 집은 남편이 집을 쓸고 닦습니다. 가족 중에 누군가가 그렇게 쓸고 닦아야 아름다운 집이 됩니다. 가족 중에 누군가는 그런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도 이와 같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한번 창조하시고 그 다음부터는 나는 모른다고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마치 집주인이 집을 지은 다음에 집을 쓸고 닦듯이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 세상을 유지하고 관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신 다음에 가꾸지 않고 내버려 두셨다면 이 지구는 바로 폐허가 되었을 것입니다. 어둠이 찾아오고 물이 육지를 덮고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지구가 매일 한번 씩 도는 것을 자전이라고 부르고 1년에 한번 씩 태양 주변을 도는 것을 공전이라고 하는데 만약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멈추면 지구 위 생물은 그 순간 살 수가 없게 됩니다. 태양과 조금만 가까워지면 지구는 뜨거워지고 조금만 멀어지면 지구는 추워집니다. 지구의 각도가 1도만 틀어져도 지구는 살 수 없는 곳이 됩니다. 무엇인가 보이지는 영적인 힘이 이 세상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이 망하지 않고 오늘날까지 아름답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창조하시며 관리하시고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오늘 우리가 두 번째로 읽은 잠언서 8장 말씀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일을 시작하시던 그 태초에 주님께서 모든 것을 지으시기 전에 이미 주님께서는 나를 데리고 계셨다. 아직 깊은 바다가 생기기도 전에, 물이 가득한 샘이 생기기도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났다.” 여기서 말하는 나는 지혜를 가리킵니다. 태초에 지혜가 제일 먼저 태어났다는 말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지혜가 가장 먼저 필요하셨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고 했습니다. 잠언서와 요한복음이 말하는 말씀과 지혜는 하나님의 오른팔과 왼팔을 가리킵니다.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말씀과 지혜가 필요하셨습니다. 어둠은 물러가고 빛이 있어라, 바다는 육지를 침범하지 말아라, 땅과 바다에 먹거리가 풍성해져라 말씀하셨습니다. 동시에 이 세상을 아름답고 조화롭게 만들기 위해서 지혜를 사용하셨습니다. 말씀과 지혜는 세상 창조의 원동력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과 지혜로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신 것처럼 우리들도 말씀과 지혜로 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새학년 새학기를 맞아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는 것은 주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 삶의 등불이 되게 하옵소서, 주의 지혜가 내 삶을 이끌게 하옵소서, 그래서 주님께서 아름답게 만드신 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더 조화롭게 더 풍성하게 만들게 하옵소서 기도하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Let there be light 2015년 9월 20일

Genesis 1:1-3, Proverbs 8:22-27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The earth was barren, with no form of life; it was under a roaring ocean covered with darkness. But the Spirit of God was moving over the water. God said, "I command light to shine!" And light started shining. God looked at the light and saw that it was good. He separated light from darkness and nam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Night." Evening came and then morning--that was the first day. (Genesis 1:1-5)

 

From the beginning, I was with the LORD. I was there before he began to create the earth. At the very first, the LORD gave life to me. When I was born, there were no oceans or springs of water. My birth was before mountains were formed or hills were put in place. It happened long before God had made the earth or any of its fields or even the dust. I was there when the LORD put the heavens in place and stretched the sky over the surface of the sea. I was with him when he placed the clouds in the sky and created the springs that fill the ocean. I was there when he set boundaries for the sea to make it obey him, and when he laid foundations to support the earth.(Proverbs 8:22-29)

 

The story of creation is so familiar that we have become accustomed to mining it for historical accuracy or scientific insight. However, its original use was likely liturgical, addressing a community of exiles. It came out of the priestly tradition and was written during the Babylonian exile when Hebrew exiles longed to be assured that God would find order out of their chaos. God would create order illuminating the darkness and separating day from night, land from water. Here the Creator is described as sweeping over the chaos and setting everything in its place. In the midst of despair or hopelessness, when a people feel that God is too absent or too far from their cries, this text of proclamation assures that the Creator has created and continues to do so in the face of chaos or the formless void.

 

God does not make something that is simply there. Rather, everything comes alive with God’s very word and wisdom, and continues to burst forth with life. The Gospel of John 1 and Proverbs 8 describe word and wisdom as God's agents who create the world. God ordered creation with word and made the world harmonious with wisdom. The word symbolizes the power of God and the wisdom indicates the workmanship of God. We are blessed to live out this world that God made with word and wisdom. Although the world is not perfect and struggles with injustice, this world is beautiful and sustainable because God holds the world and is still creating the world. We are called from God to make this world more right and equitable. Let your word and wisdom shine upon us and this world!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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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두번째 주일 / 9월 두번째 주일

창조절, 폭력의 하나님과 자비의 하나님

요나서 4:9-11, 마태복음서 16:1-4

정해빈 목사

 

 


 

1. 창조절을 맞이해서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를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성경은 히브리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고백을 기록한 책인데 그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하나님을 만났는지를 잘 기록해 놓았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히브리 사람들이 고백한 두 종류의 하나님 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전능하시고 힘과 능력이 많으신 메시야 하나님 이미지이고 두 번째는 자비로우시고 인자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이미지입니다. 불행하게도 성경에는 두 번째 이미지보다 첫 번째 이미지가 훨씬 더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비로우시고 인자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보다 전능하시고 힘과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을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떤 이미지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신앙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시고 힘과 능력이 많으신 메시야 하나님이 아니라 자비로우시고 인자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럼 전능하시고 힘과 능력이 많으신 메시야 하나님을 따르면 안 됩니까? 이렇게 질문하실 수 있습니다. 전능하시고 힘과 능력이 많으신 메시야 하나님을 따르다 보면 나도 모르게 힘과 능력을 좋아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폭력적인 하나님을 따르게 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고 쉽게 남을 정죄하고 이웃에게 말과 행동으로 폭력을 행사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전능하시고 힘과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 이미지가 여러 번 나옵니다. 첫 번째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시는 하나님 이미지입니다. 출애굽기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노예로 고통받는 히브리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이집트 사람들에게 10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이 재앙으로 인해 이집트의 첫 번째 자식/동물들이 죽임을 당했고 각종 자연재해와 전염병이 닥쳤습니다. 물론 이 일들은 바로 왕이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메시야가 되셔서 상대방을 향해 폭력을 휘두른 것은 분명합니다. 이 외에도 성경에는 하나님이 전쟁 용사가 되셔서 상대방을 폭력으로 부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히브리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했을 때 그들은 가나안 족속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죽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선한 목적을 위해서는 폭력을 써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폭력을 메시야 하나님의 구원하는 폭력이라고 부릅니다. 옛날에도 그렇고 오늘날에도 이런 하나님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원수에게 무서운 벌을 내려 주십시오. 그들을 모두 전멸시켜 주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전능하시고 힘과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 선을 위해 폭력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으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시고 힘과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의 두 번째 이미지는 우리를 처벌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시는 하나님 이미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지켜주시기 때문에 절대로 나라가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시리아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바벨론이 남유다를 멸망시켰을 때 그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을 어떻게 신앙적으로 해석해야 할 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때 일부 사람들은 우리 민족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외적의 힘을 빌려서 자신들을 처벌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첫 번째 이미지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시는 하나님 이미지라면 두 번째 이미지는 우리를 처벌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시는 하나님 이미지입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멸망했을 때 시드기야 왕은 두 눈이 뽑힌 채로 바벨론으로 끌려갔고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고 젊은이들은 포로가 되어 다른 나라로 끌려갔습니다. 이 모든 끔찍한 일들이 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해석을 하게 되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처벌하는 무서운 하나님이 됩니다. 일제가 35년 동안 한국을 지배한 것도, 수많은 한국 젊은이들이 강제로 군인으로 끌려가고 노동자로 끌려가고 수많은 어린 딸들이 종군 위안부로 끌려간 일도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제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처벌하신 것이라고 믿게 됩니다. 폭력으로 처벌하시는 하나님 이미지입니다.

 

전능하시고 힘과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의 세 번째 이미지는 마지막 종말에 악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이미지입니다. 마지막 종말에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진노의 포도주 틀에 가두어넣고 다 죽이는 이야기가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은 로마 제국 치하에서 끝까지 핍박을 견디는 사람은 영광의 면류관을 받지만 로마 제국은 심판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는 이런 부분을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세상에 악인들이 득세하고 의인들이 고난받는 것을 보면서 이런 신앙이 생겨났습니다. 너무 세상이 불공평하니까 하나님께서 지금은 참고 계시지만 마지막 때가 되면 폭력을 행사하셔서 악인들을 다 죽이고 심판하실 것이라는 신앙이 생겨났습니다. 이런 신앙 이미지를 가리켜 폭력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이미지라고 합니다.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출애굽기), 당신의 백성을 처벌하시는 하나님(바벨론 포로), 마지막에 악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요한계시록), 이 3가지 신앙은 모두 폭력을 행사하시는 하나님 신앙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전능하시고 힘과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 이미지를 좋아하다 보면 이런 3가지의 하나님 신앙을 갖게 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는 뜻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아픈 자들을 일으키시고 우리에게 새 힘과 능력을 주시기 때문에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고 힘과 능력이 많으시다는 것을 폭력을 행사하신다는 뜻으로 오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2. 어느 날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징/기적을 보여달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늘/날씨의 징조는 분별할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는 분별하지 못하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기적을 요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의 기적밖에는 아무 기적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힘을 쓰실 때가 언제입니까? 구원하는 폭력이든지, 처벌하는 폭력이든지, 아니면 마지막 때 일어날 심판하는 폭력이든지,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셔서 저 원수들을 다 쳐부수고 악인들을 심판하실 날이 언제입니까? 사람들이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요나의 기적 밖에는 보여줄 기적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통 요나의 기적이라고 하면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견디다 다시 살아난 것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요나 한사람이 죽었다 살아난 것도 기적이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요나서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큰 성읍 니느웨” 사람들을 용서하신 것이 더 큰 기적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큰 능력과 심판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요나의 기적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품에 안으신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기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적 중의 기적은 사랑입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도 기적이지만 저 원수, 원수가 가족(남편, 아내)일 수도 있고 가까운 이웃일 수도 있고 다른 민족일 수도 있지만, 사랑할 수 없는 원수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기적입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원수를 쳐부수자가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자가 되어야 합니다. 악에 저항하되 폭력이 아닌 비폭력으로 저항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폭력의 하나님을 믿지 말고 자비로우시고 진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을 따라 자비로운 삶을 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가끔 신문 방송을 보면 나이 드신 노인들이 군복을 입고 거리를 행진하면서 원수를 쳐부수자 외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막상 전쟁나면 자기들이 전쟁터에 나갈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전쟁이 나면 제일 먼저 꽃다운 청년들이 죽습니다. 보통 청년들은 젊어서 그런지 인생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자기는 사고도 안 나고 죽지도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차 보험회사가 청년 운전자들에게 가장 높은 보험료를 부과하는 것은 청년들이 겁이 없어서 사고를 많이 내기 때문입니다. 군인들 나이가 20살, 21살 인 것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 때 나이는 용감해서 그런지 물불을 안 가립니다. 전쟁이 나면 아직 피어나지도 못는 우리 아들들이 제일 먼저 죽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성경을 들여다봅니다. 비록 성경에는 폭력을 사용하시는 하나님 이미지가 많이 기록되어 있지만 자비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바로 본래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면 그것은 폭력을 사용하셔서가 아니라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새 힘과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창조하시는 하나님, 모든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상한 갈대를 꺼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인줄로 믿습니다. 연약한 생명을 붙드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자비로우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을 따라 사랑과 자비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God of violence and God of compassion

Jonah 4:9-11, Matthew 16:1-4


During the day the LORD sent a scorching wind, and the sun beat down on Jonah's head, making him feel faint. Jonah was ready to die, and he shouted, "I wish I were dead!" But the LORD asked, "Jonah, do you have the right to be angry about the vine?" "Yes, I do," he answered, "and I'm angry enough to die." But the LORD said: You are concerned about a vine that you did not plant or take care of, a vine that grew up in one night and died the next. In that city of Nineveh there are more than a hundred twenty thousand people who cannot tell right from wrong, and many cattle are also there. Don't you think I should be concerned about that big city? (Jonah 4:8-11)


The Pharisees and Sadducees came to Jesus and tried to test him by asking for a sign from heaven. He told them: If the sky is red in the evening, you say the weather will be good. But if the sky is red and gloomy in the morning, you say it is going to rain. You can tell what the weather will be like by looking at the sky. But you don't understand what is happening now. You want a sign because you are evil and won't believe! But the only sign you will be given is what happened to Jonah. Then Jesus left. (Matthew 16:1-4)


God of violence and God of compassion, they are the images of God mainly confessed in the scripture. Both images are incompatible and opposite in terms of character and nature. But the scripture shows both images as if God is sometimes violent and sometimes compassionate. God of violence is expressed in three images in detail; first is messianic violence. God uses God's power to save God's people. According to the book of Exodus, God slaughtered Egyptian people to set God's people free from slavery. Second is punishing violence. When Hebrew people were conquered by the foreign Empires, they thought that it was God's punishment because they did not follow God's law. Third is apocalyptic violence which God will do in the final day of the world. According to the book of Revelation, God is supposed to come down to the world to judge the evil with violence.


Jesus preached, taught, and healed people based on God of compassion, not of violence. When people asked Jesus for a sign from heaven, probably saying, "when will God punish the evil? is it the right time to anticipate God's messianic violence?," Jesus mentioned the miracle of Jonah. According to the book of Jonah, God forgave and spare more than a hundred twenty thousand people who cannot tell right from wrong and many cattle in the city of Nineveh. Loving enemies and resisting evil with nonviolence, Jesus said that is the true miracle that God wants to give us. We are called to believe in God in Jesus who has created and is creating the world, loves all lives, raises those in despair, and reconciles all the creatures with God.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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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열한 번째 주일 / 8월 두번째 주일
해방 70주년, 민족을 위한 기도
로마서 2:17 - 24
정해빈 목사

 

 

 

1. 로마서 두 번째 시간입니다. 성경 66권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책을 꼽으라면 욥기, 요한복음, 로마서, 요한계시록 4권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 제국의 수도,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편지인데 당시 로마 교회 신자들이 가장 지식 수준이 높았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의 여러 가지 중요한 개념들을 논리적으로 잘 설명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읽어보면 기독교 신앙이 유대교와 어떻게 다른지, 은혜로 믿음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로마 제국 치하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유대인들은 무엇을 회개해야 되고 헬라인들은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를 잘 설명해 놓았습니다. 로마서의 특징 중 하나는 바울의 민족 동포 사랑입니다. 로마서를 천천히 읽어보면 바울이 자신이 속한 유대 민족의 죄악을 고발하면서 동시에 유대 민족의 구원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자마자 헬라인들/로마인들의 죄악을 고발한 후에 바로 이어서 유대인들의 죄악을 고발합니다. 바울에 의하면 유대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4가지 특권을 받았습니다. 첫째 가장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둘째 모세를 통해서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습니다. 셋째 그 받은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고 넷째 어리석은 사람들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찍 부름받은 유대 민족이 교만하고 타락해서 "너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모독을 받는다"고 지적을 했습니다. 바울은 같은 유대인으로서 동포들을 향해 애정어린 충고를 했습니다.

오늘 말씀 로마서 2장 21절, “그렇다면 그대는 남은 가르치면서도 왜 자기 자신은 가르치지 않습니까?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설교하면서도 왜 도둑질을 합니까? 간음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왜 간음을 합니까? 우상을 미워하면서도 왜 신전의 물건을 훔칩니까?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왜 율법을 어겨서 하나님을 욕되게 합니까?” 그렇게 일찍 하나님을 알고 율법을 받고 선악을 분별하고 다른 민족의 스승이 되었으면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데 왜 말씀대로 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지혜서인 탈무드에 보면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만드셨는데 유대인은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만드셨고 이방인은 지옥에서 불을 때려면 불쏘시개가 필요하니까 지옥의 불쏘시개를 만들려고 이방인을 만들었다는 글이 나옵니다.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른 민족들을 얼마나 무시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유대인들은 기원 후 70년과 135년 두 차례에 일으킨 유대 전쟁을 통해 로마 제국에 의해 완전히 멸망당해서 그 후로 2000년간 나라 읽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보통 로마 제국의 힘이 너무 강해서 유대 사람들이 이길 수 없었다고 이해하는데 사실은 로마 제국 군대가 쳐들어오기 전에 유대 사회는 스스로의 분란으로 인해 무너져가고 있었습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순례자들이 사마리아 지역에서 습격당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러자 남쪽 사람들이 사마리아 지방으로 올라가서 사마리아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로마와 유대 전쟁을 하기 전에 자기들끼리 먼저 싸우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갈릴리 출신 므나헴이라는 젊은 혁명가가 있었는데 시카리라는 작은 칼을 옷 속에 숨기고 가서 로마에 협력하는 사람들이나 부패한 대제사장을 처단하는 일을 했습니다. 당시 대제사장은 로마의 앞잡이로 백성들의 원망이 자자했습니다. 지방 하급 제사장들이 생활비로 받는 십일조를 대제사장이 차지해서 지방에 사는 하급 제사장들이 굶어죽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북쪽 혁명가 므나헴과 남쪽 성전 경비대장 엘리아자르가 힘을 합쳐 유대 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처음에는 혁명이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주둔한 로마 병사들을 제거하고 노비 문서를 불태웠습니다. 그런데 므나헴이 갑자기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선포하고 왕 행세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성전 경비 대장 엘리아자르가 므나헴을 살해하게 되고 므나헴을 따르던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빠져나와 마사다 언덕으로 도망을 치게 됩니다. 결국 예루살렘에는 성전경비대장 엘리에자르를 따르던 사람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로마가 쳐들어와서 먼저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그 다음에 므나헴 일파가 있는 마사다 언덕을 함락시켰습니다. 사마리아와 유대 사이에 지역 간 다툼이 벌어지고 이어서 혁명가들 사이에 주도권 다툼이 벌어져서 로마와 싸우기도 전에 이미 스스로 힘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2. 바울은 70년 유대 전쟁이 일어나기 전 50년대에 로마서를 썼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유대 사회가 이런 식으로 분열하고 타락하면 머지않아 로마에 의해 멸망할 것이라는 것을 예감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의 예상대로 예루살렘은 로마가 쳐들어오기 전 스스로의 분열과 타락에 의해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나라가 망할 때는 외부의 침략이 결정적이지만 그 이전에 내부적으로 붕괴의 조짐이 보이기 마련입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올해로 해방 70주년이 되었는데 우리 민족은 아직도 분단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겪는 모든 비극은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긴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책임을 일본에게만 돌릴 수는 없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지도자들에게 더 큰 책임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120년 전인 1894년 독일인 여행가인 헤세 바르텍이라는 사람이 조선을 방문해서 쓴 [1894년 조선 여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당시의 조선 상황을 잘 묘사했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총칼로 무장한 일본군이 돌아다녀도 사람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일본군보다 조선 정부가 쌀 한 톨까지 다 빼앗아갔기 때문이다. 서울의 길은 좁았고 오물이 쌓여 있었다. 그나마 큰 비가 내려서 오물을 씻어 내릴 수 있었다. 사람들은 잘 씻지도 않으면서 흰옷을 입었는데 여인들은 흰옷을 빨고 다림질하는데 하루의 반을 써야만 했다. 남자들이 일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남자들은 낮잠을 자거나 곰방대 담배를 빨면서 빈둥거렸다. 하지만 여자들은 빈둥거리지 않았다. 집 안이나 마당에서 하루 종일 일을 했다. 사람들은 대개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았다. 일을 열심히 해서 돈을 벌면 관리들에게 빼앗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발전 가능성이 큰 나라이다. 하지만 발전을 혐오하는 정부와 도둑과 다름없는 관리들이 조선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120년 전 독일인이 본 조선 사회는 남존여비, 국가의 기강이 무너지고 관리들의 부패와 타락이 극심한 사회였습니다. 백성들이 일본군보다 조선 정부를 더 미워했다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일제가 쳐들어오기 전에 이미 사회가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우리 민족은 지도자 복이 없는 민족입니다. 남쪽이나 북쪽이나 독재자의 자식들이 통치하는 나라는 정상적인 나라가 아닙니다. 최고 지도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밑에 있는 사람을 끌어내서 총살시키거나 아니면 자리에서 끌어내는 사회는 정상적인 사회가 아닙니다. 우리 민족에게 지도자 복이 없는 것은 지도자를 키워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김구, 김원봉, 여운형, 장준하 같은 지도자들을 아끼고 보호하기 보다는 죽이고 제거하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우리들이 다시 민족의 지도자들을 키워야 합니다. 특히 해외에 사는 해외 교포 사회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고 미래 통일 한국을 위해서 일할 미래의 지도자들을 키워야 할 것입니다.

최근에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이 남북교류협력 7대 제안 성명서를 발표한 것을 보았습니다. 요즘 경제 성장이 1%-2% 밖에 안 되니까 기업가들이 해결책으로 적극적인 남북경제협력을 제안했습니다. 경제 단체가 오죽 답답하면 이런 제안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북한 경제단체 연락 사무소를 개설하고 개성과 금강산에서 경제협력사업을 확장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개성공단을 더 만들어서 북쪽 근로자들도 혜택을 보고 남쪽 기업도 같이 혜택을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 때 개성공단이 시작되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잘한 결정입니다. 약 130개의 남쪽 기업이 가동 중이고 약 5만 명의 북쪽 근로자들이 일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자원을 중국이 아니라 한국이 개발하면 민족의 번영을 앞당길 수 있다고 제안했습니다. 경제인단체는 경제 관점에서 남북협력만이 민족이 살 길이라고 생각해서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같은 민족끼리 서로를 원수로 여기고 싸우고 전쟁하면 어떤 해결책도 나오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를 풀어 나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자기 민족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저주를 받아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나는 육신으로 내 동족인 내 겨레를 위하는 일이면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바울이 동포 사회를 위해서 얼마나 애타게 기도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우리 민족을 위해서 바울처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1945년부터 2015년까지의 시기는 원망과 다툼을 쌓아놓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원망과 다툼으로 살아온 70년 세월을 기쁨과 화해의 세월로 물줄기를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유대인들도 70년간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70년 유배 생활을 마치고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며 찬송했던 그 감격이 우리 민족에게도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해방 70년과 분단 70주년이 된 우리 민족이 유대 민족처럼 분열과 갈등으로 인해 멸망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한민족이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민족,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백의민족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70th anniversary of Korean Independence day
Romans 2:17 - 24

Some of you call yourselves Jews. You trust in the Law and take pride in God. By reading the Scriptures you learn how God wants you to behave, and you discover what is right. You are sure that you are a guide for the blind and a light for all who are in the dark. And since there is knowledge and truth in God's Law, you think you can instruct fools and teach young people. (Romans 2:17-20)

But how can you teach others when you refuse to learn? You preach that it is wrong to steal. But do you steal? You say people should be faithful in marriage. But are you faithful? You hate idols, yet you rob their temples. You take pride in the Law, but you disobey the Law and bring shame to God.  It is just as the Scriptures tell us, "You have made foreigners say insulting things about God." (Romans 2:21-24)

We can find in the book of Romans how Paul the Apostle loved, prayed, and also rebuked his nation for their arrogance and hypocrisy. According to Paul, the Jewish people had received 4 privileges from God: They were first called to be God's people. They received the Law of God. They can make a distinction between right and wrong. They have an ability to teach other people. However, they did not do them. They take pride in the Law, but they disobey the Law and bring shame to God. Paul mentioned the scripture saying, ‘The name of God is blasphemed among the Gentiles because of you.’ As Paul would have anticipated the collapse of the Jewish society, Jerusalem was totally ruined by the Roman Empire in 70 CE. In fact, they had already fought for each other and split into several parts before the Roman troops arrived in Jerusalem. That was why Paul felt severe pain when he thought of his people. He said in Romans chapter 9, "My heart is broken and I am in great sorrow. I would gladly be placed under God's curse and be separated from Christ for the good of my own people."

Celebrating the 70th anniversary of Korea's liberation from Japan, we pray with all the churches of the world, for the reconciliation and healing of the divided Korean peninsula. We pray that God leads us to overcome the South/North antagonism and conflict by opening an interaction between North and South and to foster an environment which will see peaceful reunific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by concluding a Peace Treaty. We hope to create a spirit of cooperation and solidarity among the churches of the world who pray for peace and reunific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as well as for peace in the global village. As Paul prayed for his nation, we also want to pray for our nation. We pray that all of us who were called as Christians are able to fulfill the duties of the ministry of reconciliation. Lord, give us your Holy Spirit to overflow with the joy of reconciliation amongst our divided selves, and help us make our nation to overflow with your will; in Jesus Christ, who unites us with the joy of liberation.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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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열번째 주일 / 8월 첫번째 주일
로마서, 은혜받은 자와 빚진 자
로마서 1:7-14
정해빈 목사

 


 


1.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목표/가치관/교훈을 좌우명(座右銘)이라고 합니다. 당신의 인생 좌우명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물어볼 수 있는데 앉을 좌, 오른쪽 우, 글자 명, 자리 오른쪽에 써놓고 항상 되새기는 가르침이나 명언을 가리킵니다. 옛날 중국의 최원이라는 학자가 있었는데 자신의 형이 살해당하자 분노를 참지 못하고 형을 죽인 원수를 죽입니다. 관아의 추적을 피해 숨어 지내다가 몇 년 뒤 조정의 사면을 받아 고향에 돌아왔는데, 자신의 살인행위를 깊이 뉘우치고자 몸가짐을 경계하는 글을 책상 머리맡에 두고는 항상 몸가짐을 조심했는데 자신이 쓴 그 글 제목을 ‘좌우명’이라고 붙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좌우명이라는 말이 유래되었습니다.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인생의 목표로 생각하고 항상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그것이 나의 좌우명입니다. 사도 바울은 “은혜받은 자와 빚진 자” 이 두 글자를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9절, “나는 사도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사도입니다. 나는 사도라고 불릴만한 자격도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는 원래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날의 내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까지 바울은 은혜라는 말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선택받았기 때문에 자신이 받은 특권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빌립보서 3장 5절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나는 난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요 율법의 의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바리새파가 되었고 율법으로는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12 지파 중에서 가장 자부심이 강한 두 지파가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인데 바울은 자신이 베냐민 지파에 속한 것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이렇게 좋은 배경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자신에 대한 자부심/우월감이 강해서 자칫하면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기가 쉽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사람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붙잡으러 다녔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젊은 시절 은혜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엄격하고 무서운 사람이었습니다. 정통 율법 교사라는 선민의식과 우월의식이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은혜라는 말을 가장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는 편지를 쓸 때마다 제일 첫머리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이렇게 인사했고 편지 마지막에는 “주 예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함께 있기를 빕니다” 이렇게 인사했습니다. 은혜를 모르고 자기 자랑에 빠져 살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 은혜를 전파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은혜는 헬라어로 카리스(charis)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내려주시는 선물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벌주는 하나님, 유대인을 사랑하고 이방인을 심판하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 아니라 은혜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선한 자나 악한 자 모두에게 똑같이 햇빛과 비를 내려주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차별없이 사랑하시고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늘날에는 이게 당연한 것 같지만 2000년 전 바울이 살았던 시대에는 당연하지 않았습니다. 이 깨달음이 결국 바울의 인생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지난 6월 17일 미국 백인 청년이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의 임메뉴얼아프리칸감리교회를 찾아가서 총기를 난사해서 담임 목사를 비롯한 9명의 흑인이 목숨을 읽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 백인 청년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흑인 교회에 가서 총을 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장례식장에서 Amazing Grace,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찬송을 불러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인종차별을 상징하는 남부연합기를 내려놓고 대신 은혜를 말하자고 연설을 했습니다. 원래 이 노래는 흑인 노예 무역을 하던 영국의 존 뉴턴이 회개하고 작사한 것을 아메리칸 인디언 체로키(Cherokee)들의 노래에 붙여서 만든 곡입니다. 이 노래는 피아노 검은 건반만 가지고도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음이 아주 쉽고 서정적입니다. 마치 검은 건반이 그동안 고통받았던 흑인들과 원주민들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흑인노예무역을 했던 존 뉴턴이 쓴 가사와 인디언들의 멜로디가 만나서 오늘날 가장 많은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은혜를 아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차별하지만 자기가 용서받고 은혜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차별하지 않습니다. 존 뉴튼은 젊은 시절 노예 장사한 것을 회개하고 주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셨다고 노래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 우월주의자/인종차별주의자/배타주의자로 살았던 바울도 예수님을 만난 후에 자신의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님을 만난 후에 인류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 평화와 화해와 공의와 평등,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민족적 편견과 우월감에 사로잡혀 살았던 나를 예수께서 찾아오셔서 진리를 알게 하시고 복음의 사람으로 변화시켜주셨으니 그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2. 주의 은혜로 사는 사람은 받은 은혜를 다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빚진 자로 살아갑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 로마서 1장 14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리스 사람에게나 미개한 사람에게나, 지혜가 있는 사람에게나 어리석은 사람에게나, 다 빚을 진 사람입니다.” 바울은 한때 정통 보수 유대교를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이 부패하고 타락한 성전/유대교를 비판하고 십자가에서 달리신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자 바울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스데반에게 돌을 던져 그를 죽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스데반 덕분에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스데반에 빚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물질적인 빚을 지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큰 빚을 져 본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빚은 좋은 것입니다. 영적인 빚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갚아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바울에게는 부채의식이 있었습니다. 우월주의와 배타주의에 사로잡힌 유대인 동포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부채의식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동시에 권력과 우상에 사로잡혀 있는 로마 제국 시민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부채의식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바울은 젊은 시절 배타적이고 보수적인 유대교에 있다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 변화받아 평생을 빚진 자로 살았습니다. 젊은 시절 정의를 위해서 살다가 나이 들어서 변절한 사람은 많아도 젊은 시절 나쁘게 산 것을 인정하고 나머지 인생을 빚진 자로 사는 사람은 맞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바울은 참으로 진실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은혜받은 자로 살고 빚진 자로 살아가는 사람이 참다운 신앙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하나님이 아니라 심판의 하나님이었다면 우리 중에 심판받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햇빛, 공기, 물, 땅에서 나는 모든 것들,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당신의 은혜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 같이 부족한 사람을 자녀 삼아주시고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으니 이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또한 빚진 자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하나님께 빚진 자들이요 부모님께 빚진 자들이요 신앙의 선배들에게 빚진 자들이요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서 헌신한 의인들에게 빚진 자들입니다. 보통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는 구하는 기도를 많이 합니다. 이것도 주시고 저것도 주시고, 가정의 행복, 물질의 축복을 구하게 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그런 것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단계는 구하는 단계에서 베푸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동안 내가 많은 복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빚진 자의 심정이 되어서 복을 베푸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너무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나머지 인생을 빚진 자로 산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 은혜받았으니 이 좋으신 하나님을 동포들에게 전하고 로마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주의 은혜로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감사한 마음, 너그러운 마음으로 세상을 살 것입니다. 빚진 자로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갚아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에 복음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갈 것입니다. 은혜받은 자로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고, 빚진 자로서 세상에 복을 베풀며 사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Romans, we are blessed and indebted
Romans 1:7 - 14

This letter is to all of you in Rome. God loves you and has chosen you to be his very own people. I pray that God our Father and our Lord Jesus Christ will be kind to you and will bless you with peace!  First, I thank God in the name of Jesus Christ for all of you. I do this because people everywhere in the world are talking about your faith. God has seen how I never stop praying for you, while I serve him with all my heart and tell the good news about his Son. In all my prayers, I ask God to make it possible for me to visit you. (Romans 1:7 - 10)

I want to see you and share with you the same blessings that God's Spirit has given me. Then you will grow stronger in your faith. What I am saying is that we can encourage each other by the faith that is ours. My friends, I want you to know that I have often planned to come for a visit. But something has always kept me from doing it. I want to win followers to Christ in Rome, as I have done in many other places. It doesn't matter if people are civilized and educated, or if they are uncivilized and uneducated. I must tell the good news to everyone. (Romans 1:11 - 14)

Paul said in Philippians chapter 3, "I was circumcised when I was eight days old, and I am from the nation of Israel and the tribe of Benjamin. I am a true Hebrew. As a Pharisee, I strictly obeyed the Law of Moses." Before meeting with the risen Christ, Paul had lived as a so-called royal orthodox Jew who followed the Law blindly and believed that God selected his people as God's chosen people. Until the risen Christ had called him, he did not think much about grace. He regarded everything he had as natural and right. But later he realized that God in Jesus is not God of Law but God of grace, which means God’s self-giving fair and distributive love. Paul's dramatic meeting with Jesus made him believe the fact that God gives grace to everyone. God makes the sun rise on both good and bad people. And God sends rain for the ones who do right and for the ones who do wrong. (Matthew 5:45)

Feeling deeply graced by God leads us to feel also deeply indebted to God. Paul said in his letter to Romans chapter 1, "I am a debtor both to Greeks and to barbarians, both to the wise and to the foolish." Before Paul converted, he persecuted Jewish Christians by capturing them and bringing them to Rome in chains. He didn't kill Stephen, a young Jew who came from abroad, but encouraged a mob to stone him. So he felt indebted to Jewish christians. Paul also felt indebted to the people in the Roman Empire since the risen Christ called him to spread the good new to all the people in the Empire. As Paul was forgiven and called to be the apostle of God, we are also forgiven by the grace of God. We live every day with sunshine, rain, soil, and wind which come down freely from God as grace. These gifts make us feel indebted to God. We are called to strive to spread the good news of God.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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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아홉번째 주일 / 7월 네번째 주일
룻과 욥, 고난을 통과한 의인들

욥기 42:1-6, 10-11
정해빈 목사

 

 

 


1. 오늘 마지막으로 욥기에 대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까지 6-7번에 걸쳐서 욥기를  설교했습니다. 계속 욥기만 설교하니까 좀 지겹다고 생각한 분들이 계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욥기를 길게 설교한 이유는 그만큼 욥기의 내용이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성경 66권 중에서 가장 내용이 어려우면서도 가장 수준 높은 신학 책이 한권 있는데 그 책이 바로 욥기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성경 66권에는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 있습니다. 역사, 전기, 시, 예언, 편지, 설교 등의 책들이 있는데, 하나님/창조/자연/인간/죄/고난/선과 악과 같은 신학적인 문제를 깊이 다룬 책은 욥기가 유일합니다. 물론 요한복음이나 로마서 같은 책도 깊은 내용을 다루었지만 신학적인 무거운 주제들을 깊이 다룬 대표적인 책은 욥기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욥기는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세계와 자연과 인간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도록 안내해 줍니다. 욥기는 우리들에게 왜 의인에게 고난이 있는지,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 지를 잘 가르쳐 줍니다. 욥기를 제대로 이해하면 이 세상을 바르게 보는 눈을 갖게 되고 잘못된 신앙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구약 학자들 중에는 구약 39권 중에서 룻기/요나서/욥기에 관심을 갖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만약 이 3권이 없었더라면 구약 성경은 유대인들의 우월성/폐쇄성을 강조하고 자기 민족만 사랑하는 좁은 하나님을 설명하는 수준 낮은 책이 될 뻔 했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룻기/요나서/욥기가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이 유대인들의 우월성/폐쇄성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자기 민족만 사랑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넓으신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왜 이 3권의 책이 우리들의 신앙을 넓혀 주었는지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책은 룻기입니다. 모압 여인 룻이 남편을 잃은 후에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이스라엘 땅에 와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다가 나오미의 친척 보아스를 만나 결혼한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착한 며느리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착한 며느리가 유대 사람이 아니라 이방 사람입니다. 여기에 룻기의 놀라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멸시하는 모압 여자 룻이 나중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존경한다는 다윗의 증조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한국에 시집온 외국 며느리 집안에서 한국 대통령이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룻기는 자기 민족만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에 경종을 울립니다. 룻이 보아스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다윗이 태어날 수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을 때 제일 먼저 한 것이 소위 민족의 순수성을 유지한다는 명분하에서 유대 남자와 결혼한 이방 여인들을 내쫓는 것이었습니다. 신명기에 보면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을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에스라/느헤미야는 이 신명기 말씀을 따라서 이스라엘 땅에 사는 이방 사람들을 이스라엘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망한 것은 우리들이 이방 사람들과 섞여 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나라이든지 나라 형편이 어려우면 외국 사람들을 배척하는 배타주의/국수주의/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외국에서 온 이민자/유학생/난민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룻기는 이러한 배타주의/국수주의/민족주의 운동에 경종을 울립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룻과 같은 다른 나라 사람들도 사랑하신다는 사실, 다른 나라 사람들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배려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룻기는 잘 보여줍니다.

우리의 신앙을 넓혀주는 두 번째 책은 요나서입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하나님의 부름을 거부하고 반대 방향인 스페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탑니다. 배가 큰 풍랑을 만났을 때 뱃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신들에게 부르짖고 기도를 합니다. 하지만 요나는 배 밑창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풍랑의 원인이 요나 때문이라는 것을 안 뱃사람들은 요나를 희생 제물로 바치고 하나님을 섬기기로 약속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섬긴 사람들은 선지자 요나가 아니라 이방 사람 뱃사람들이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하자 니느웨 사람들은 그 말에 응답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를 살려두셨습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불평하는 요나를 향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가는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와 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원래 선지자는 하나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데 요나는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한 사람들은 요나가 아니라 이방 사람들, 뱃사람들과 니느웨 사람들이었습니다. 원래 니느웨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시리아의 수도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니느웨 사람들을 증오하였습니다. 요나서는 놀랍게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증오하는 니느웨 사람들도 회개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2. 우리의 신앙을 넓혀주는 세 번째 책은 욥기입니다. 욥기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스라는 곳에 욥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흠이 없고 정직하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욥은 우스 사람이었습니다. 예레미야 25장을 보면 우스가 에돔 땅으로 나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장 경건하다고 생각하는데, 놀랍게도 이 세상에서 가장 경건한 욥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에돔 사람이었습니다. 시어머니를 섬기고 하나님을 잘 믿은 착한 며느리 모압 사람 룻, 하나님께 회개한 착한 앗시리아 사람들, 그리고 가장 경건하고 부유한 에돔 사람 욥, 이렇게 룻기/요나서/욥기는 자기들이 제일 착하고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도전합니다. 욥기는 또한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 받고 불순종하면 벌 받는다는 신명기의 가르침에 도전합니다. 신명기에 의하면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은 복을 받고 잘 섬기지 않는 사람은 벌을 받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신명기의 가르침에 의거해서 욥이 고난받은 것은 하나님을 잘 섬기지 않고 죄를 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욥기는 이러한 주장이 틀렸다고 말합니다. 착한 사람이 고난받은 것은 그 사람의 죄가 많아서도 아니고 하나님이 악해서도 아니고 사나운 인간과 사나운 자연이 있는 거친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욥기는 말합니다. 욥기에서 가장 유명한 말씀 중 하나가 욥기서 8장 7절 말씀입니다. “처음에는 보잘 것 없겠지만 나중에는 크게 될 것이다.” 개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 가게나 식당 같은 데 보면 많이 볼 수 있는데 이 말씀은 욥이 한 말이 아니라 욥의 친구 빌닷이 한 말입니다. 처음에는 보잘 것 없었지만 나중에 크게 될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앙의 결과로 보아야지 이것이 신앙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믿는 목적이 나중에 크게 잘 되기 위해서라면 그것은 무당 종교와 다름없습니다. 만약 나중에 크게 잘 안되면 그때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을 버리게 될 것입니다. 욥은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나중에 크게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지금 내가 선하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욥기는 두 가지의 잘못된 신학, 첫째 인과응보의 신학, 사람이 고난받는 것은 그 사람의 죄가 많기 때문이라는 신학과 둘째 번영 신학, 하나님을 잘 믿으면 나중에 크게 성공한다는 번영 신학이 잘못된 신학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잘 되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때로는 이 세상의 악한 사람들 때문에 고난받을 수도 있고, 정의를 위해서 일하다 고난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나중에 잘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기 때문이고 그 길이 옳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룻과 욥은 한때 인생의 바닥에 떨어졌지만 선하신 하나님을 믿고 고난을 극복하고 통과해서 마침내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진실되고 의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꼭 이스라엘 사람만 신앙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이 아니어도 룻과 욥과 같이 사는 사람은 누구나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힘든 인생을 사는 분이 계시면 룻과 욥을 보면서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 욥기서 42장 마지막 장 말씀을 보면 욥의 가족/친구들이 찾아와서 욥을 축복하고 욥에게 금반지를 끼워 주었습니다. 욥은 고난 중에 하나님께 불평했지만 하나님을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고난을 통과했고 하나님의 대답을 들었습니다. 세상과 인생을 보는 눈이 더 깊어졌습니다. 욥은 인생의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모두가 잘 되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평생 바르고 진실되게 살았지만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한 많은 의인들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나중에 잘 될 수도 있고 잘 안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선하신 하나님, 자비로우시고 진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바르게 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인이라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욥은 42장 6절에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이 말을 쉽게 풀이하면 이런 뜻이 됩니다. “지금까지 제가 한 말과 제 친구들이 한 말을 다 거두어들입니다. 지금까지 무지한 말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비록 나는 연약한 인간이지만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위로가 됩니다.” 욥기는 이렇게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선하신 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고난이 하나님에게서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룻과 욥 모두 큰 고난을 받았지만 선하신 하나님을 끝까지 믿고 살았기에 마지막에 주님의 따뜻한 위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믿고 고난을 통과하여 마침내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의인이 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Ruth and Job, passing through hardships
Job 42:1-6, 10-11

Job said: No one can oppose you, because you have the power to do what you want. You asked why I talk so much when I know so little. I have talked about things that are far beyond my understanding. You told me to listen and answer your questions. I heard about you from others; now I have seen you with my own eyes. That's why I hate myself and sit here in dust and ashes to show my sorrow. (Job 42:1-6)

After Job had prayed for his three friends, the LORD made Job twice as rich as he had been before. Then Job gave a feast for his brothers and sisters and for his old friends. They expressed their sorrow for the suffering the LORD had brought on him, and they each gave Job some silver and a gold ring. The LORD now blessed Job more than ever; he gave him fourteen thousand sheep, six thousand camels, a thousand pair of oxen, and a thousand donkeys. (Job 42:10-12)

The book of Ruth, Jonah, and Job are well known as challenging parables against so called  orthodox Jewish traditions. They challenge the Jewish conservative faith based on exclusivism, racism, and superiority. For example, Ruth, the daughter-in-law of Naomi, came back with her from Moab to the land of Israel after the famine. She married Boaz and became the great-grandmother of King David. Although Ruth was not identified as an Israelite, but a moabite woman, she became an ancestor of king David. This story shows if Ruth was not accepted to the people of God, King David would not have been born. This book teaches us that our God exists beyond any racial prejudice and supremacy.

The book of Job opposes two Jewish traditional theologies; first is the theology of Deuteronomy which insists that if you are a good person, God will bless you. But if you are not a good person, God bill punish you. Second is the theology of success or prosperity theology which says that if you endure your hardships, then God will make you flourish. This theology also says that financial blessing is the will of God for Christians. But the book of Job says that the reason Job suffered is not because he was a sinner or God is cruel, but because Job is living in the world where wild people and nature have been ruling over. Like Ruth, Job was not an Israelite. He lived in the land of Uz where ammonite people had lived. Although there were not Hebrew people, Ruth and Job became righteous people startling in the sky. Job said in 42:6, I repudiate my past accusations, my doubts, even my anger, I have experienced the reality of God. I know that I am not alone, and, vulnerable mortal that I am, I am comforted.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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