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네번째 주일
성탄 주일, 희망의 노래
누가복음 1:46 - 55
정해빈 목사

 

대림절 네번째 주일, 성탄 주일을 맞아 우리는 기쁨과 희망을 노래합니다. 오늘은 노래하는 날이요 찬양하는 날입니다. 성탄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절망과 탄식이 가득찬 이 세상에서 희망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성탄을 노래하는 찬양의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천사들이 찬양을 했고 요셉과 마리아가 찬양을 했습니다. 안나와 시므온 선지자가 찬양을 했고, 동방박사와 목자들이 찬양을 했습니다. 하늘의 별들과 마굿간의 동물들이 찬양을 했습니다. 우리가 기쁨과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홀로가 아니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붙들기 위해서 찾아오셨습니다. 고통많은 이 세상을 살리기 위해서 찾아오셨습니다. 연약한 자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연약한 아기 예수로 찾아오셨습니다. 기쁨과 희망이 없는 인생은 무력하고 절망적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성탄의 은혜가 없었다면 우리의 삶은 절망적인 인생이 되었을 것입니다. 고통/비극/폭력/절망이 가득 찬 세상을 볼 때 기쁨과 희망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의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낮은 곳으로 내려오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기쁨과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마음이 구주 하나님을 좋아함은 주님께서 이 여종의 비천함을 보살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 주님은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머니와 아기, 천사와 목자의 이야기, 사랑과 놀라움, 기쁨과 희망이 가득 찬 이야기를 노래합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가 진실하며 이 이야기 속에 새로운 희망이 있음을 믿습니다. 마리아가 노래한 것처럼, 비천한 자가 높임받고 굶주린 자가 배부르게 되는 날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우리가 부르는 성탄 캐롤이 세상 멀리 퍼져서 고통과 절망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기쁨과 희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소망의 촛불을 키면 킬수록, 기쁨의 노래를 부르면 부를수록, 어둠과 절망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노래를 부르면 절망이 물러갑니다. 노래가 어둠을 이깁니다. 빛이 어둠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리아처럼 희망의 노래를 부르십시오. 여러분은 홀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기쁨과 희망의 노래가 여러분 위에 함께 하기를 빕니다. 아멘.

On this Christmas Sunday, we sing joy and hope. Today we sing loud saying "we are not alone, God is coming to be with us and to save us." As angels and shepherds sang the birth of Jesus long time ago, today we sing loud with joy and hope. Life without joy is overwhelming, overburdened, and oppressive. We sing not because we can make it, but because we are not abandoned. God holds us and brings us joy no matter how bad and tragic we are. Our joy and hope do not come from this world where trouble, tragedy, violence, and despair take place every day. Our joy and hope come from God of love who is willing to come down to us. The more and more we are in troubles, the more and more we sing joy and hope.

Today we hear Mary sing. Out of despair and tragedy, Mary sang hope and change for the new world. "with all my heart I praise the Lord, and I am glad because of God my Savior. You cares for me, your humble servant. From now on, all people will say God has blessed me. God All-Powerful has done great things for me, and your name is holy. You always shows mercy to everyone who worships you. You drags strong rulers from their thrones and puts humble people in places of power. You gives the hungry good things to eat, and sends the rich away with nothing." Today we sing the story of a mother and child, of angels and shepherds, a story full of love and surprise. We want it to be true, though we know that hope is precarious, as vulnerable as a newborn baby. We believe the movement finally comes that we have been waiting and yearning for. We believe the promises of joy to the world and peace on earth. We want our carols to be loud and strong. Today we sing of birth and babies within our hearts. Today we light candles, sing joy, yearn for your coming, knowing that for right now, darkness is bearable, darkness fades away soon, and the new day of hope comes to us. Amen.

Posted by 정해빈
,

대림절 세번째 주일
위험 사회와 아기 예수
마태복음 2:13 - 18

정해빈 목사

 

1. 최근 몇 년 사이에 나온 유명한 책 중에 [피로 사회]라는 책이 있습니다. 독일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한병철 교수가 이 책을 썼습니다. 한 교수는 과거 사회는 [규율 사회]이고 현재 사회는 [성과 사회]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과거에는 규율/통제/억압이 강했습니다. 국가/사회/종교가 해야 할 것과 하지 않아야 할 것을 정해 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개인의 자유가 없고 통제와 간섭이 많았습니다. 옛날 한국에서도 1970년 유신 시대 때 머리를 길러도 잡아가고 치마 길이가 짧아도 경찰이 잡아가던 그런 시대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규율이 강한 국가나 사회가 있습니다. 규율이 강한 사회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빼앗고 억압하기가 쉽습니다. 사회가 규율이 너무 강하면 그 규율에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 정신적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께서 살던 유대 사회가 바로 그랬습니다. 로마제국과 헤롯왕과 예루살렘 성전이 백성들을 통제하고 감시했습니다. 군사적으로 억압하고 경제적으로 세금을 부과하고 종교적으로 죄책감을 심어 주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귀신들린 사람들과 병자들을 고치신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그것은 그 당시에 국가/사회/종교의 억압적인 규율에 견디지 못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한 사회가 너무 엄격하고 자유가 없으면 약자들이 견디지를 못합니다. 규율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한 집안에 아버지가 너무 엄격하고 무서우면 자식들이 위축되고 기를 못 펴게 됩니다. 사람을 억압하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닙니다.

옛날 사회가 [규율 사회]라면 오늘날의 사회는 [성과 사회]라고 한병철 교수는 말했습니다. 규율 사회가 다른 사람이 나를 억압하는 사회라면 성과 사회는 내가 나를 억압하는 사회입니다. 현대 사회는 성과를 요구하고 나는 그 성과를 내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면 성과를 내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를 혹사하게 되고 때로는 자신이 자신을 억압하기도 합니다. “너는 이것밖에 안 되냐, 더 노력해라, 더 성과를 내라, 그래야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 내가 내 자신을 괴롭힙니다. 그렇게 성과를 내기 위해 달려가다가 생각만큼 성과를 내지 못하면 자신감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낙오자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이것이 심하면 우울증 같은 병을 겪게 되기도 합니다.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심하다 보면 쉴 때 쉬지도 못하고 일 중독이 되어서 자기를 학대할 수 있습니다. 성과 사회는 필연적으로 피로 사회로 연결됩니다. 성과를 내기 위해서 바쁘게 살다 보니 피로가 쌓입니다. 하루하루가 피곤하다는 말이 현대인들이 자주 쓰는 말이 되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요즘 사회는 수없이 많은 정보가 몰려오는 사회입니다. 수시로 정보를 체크하고 몇 분 간격으로 인터넷과 이메일과 문자 메시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요즘은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도 서로 이야기는 하지 않고 각자 자기 핸드폰만 들여다본다고 합니다. 성과를 요구하고 정보를 요구하는 사회에 살다보니 피로와 스트레스가 쌓여만 갑니다. 옛날 사회가 통제와 억압을 하는 규율 사회였다면 오늘날은 성과를 요구하는 성과 사회, 그래서 피곤이 겹치는 피로 사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오늘날의 사회에 또 다른 이름을 붙인다면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요? [차별 사회]라고 이름을 붙일 수도 있습니다. 옛날과 비교해 보면 오늘날이 더 빈부격차가 늘어났습니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한 사람이 일을 하면 한 가정이 먹고 살 수 있었는데 요즘은 두 사람이 일을 해야만 겨우 먹고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소득격차가 그렇게 심하지 않았고 취직을 하면 정규직이 되었고 비정규직이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의 절반이 비정규직입니다. 대부분의 청년들이 시간당 5불(5천원)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합니다. 대기업들은 엄청난 돈을 쌓아두고 있으면서도 직원을 뽑을 때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정규직 채용을 잘 하지 않습니다. 비정규직으로 사람을 뽑다가 시간이 지나면 해고하고 다시 사람을 뽑습니다. 대한항공 40세 여자 부사장이 1등석 비행기를 탔는데 왜 땅콩 봉지를 가지고 오냐고 욕설을 하고 가던 비행기를 되돌려서 사무장을 내리게 했습니다. 원래 메뉴엘에는 처음에는 봉지를 보여주고 승객이 먹겠다고 하면 봉지를 뜯어서 접시에 담아서 주도록 되어 있다고 합니다. 승무원은 규정대로 했습니다. 회장 아버지를 둔 덕분에 젊은 나이에 부사장이 되었으면 겸손하면 좋을 텐데 겸손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위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아래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요즘 청년들을 3포 세대라고 합니다. 취직, 결혼, 출산 3가지를 포기한다고 해서 3포 세대라고 부릅니다. 어떤 면에서는 오늘날의 청년들이 참 안됐다는 생각을 합니다. 옛날보다 더 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캐나다에서 공부하고 직장 생활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여기도 쉽지 않지만 그래도 사회 제도 면에서는 여기가 한국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의 사회에 대해서 하나만 더 이름을 붙인다면 [위험 사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득 격차와 인종 차별과 종교 갈등이 심하다 보니 사회가 불안해지고 위험해 집니다. 최근 미국 퍼거슨 시에서 흑인을 사살한 백인 경찰에게 무죄가 선고되어서 큰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젊은 흑인 남성이 경찰에 사살될 가능성이 젊은 백인 남성의 21배에 이른다고 합니다. 백인 빈곤층 비율은 10%인데 흑인 빈곤층 비율은 28%에 해당한다는 통계도 나와 있습니다. 또 요즘 제일 세계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들이 시리아 사람들입니다. 몇 년째 내전이 일어나서 수백만 명의 국민들이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에서 피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위험에는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위험도 있지만 자연이 주는 위험도 있습니다. 핵발전소 사고, 에볼라 바이러스, 지진과 태풍 등이 우리의 삶을 위협합니다. 물론 옛날과 비교해 볼 때 과학의료기술이 발전해서 인간의 삶을 더 풍요로워졌고 수명은 늘어났습니다. 그러면 옛날보다 사회가 더 안전해졌느냐? 꼭 그렇지 많은 않은 것 같습니다. 과거보다 수명이 늘어나기는 했는데, 대신에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위험/재난/사고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2014년에는 유독 큰 재난/사고/전쟁/질병이 많았습니다. 성과사회/피로사회/차별사회/위험사회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명에서 볼 때 아기 예수께서 위험 사회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2장을 보면 아기 예수께서 매우 위험하고 불안한 상황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부유한 집안의 왕자님으로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헤롯 왕이 아기 예수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들을 보내서 2살 이하의 아기들을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아기 예수는 부모를 따라 태어나자마자 이집트로 피난을 가야만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상징적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과 모세를 연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집트로 피난을 떠난 것으로 묘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 의하면 아기 예수께서는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태어난 지 40일이 되었을 때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해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아기 예수가 태어나자마자 이집트로 피난을 떠났다고 되어 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태어나지 40일째 되는 날 성전을 방문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태가 맞으면 누가가 틀리고 누가가 맞으면 마태가 틀립니다. 아니 둘 다 틀렸을 수도 있고 둘 다 맞을 수도 있습니다. 마태가 말하려는 바는 이것입니다. 아기 예수께서 위험하고 불안한 사회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죽음의 위협을 피해서 피난을 가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의 사회를 반영합니다. 실제로 헤롯 왕은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 백성들을 아기까지 다 죽였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태어나면서부터 난민이 되었습니다. 불안하게 태어난 다른 아기들과 똑같은 운명을 경험하셨습니다. 누가복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기 예수는 좋은 방에서 태어나지 못하고 손님방/마굿간에서 태어났습니다. 예수의 탄생을 축하한 목자들은 가난한 일용직 노동자들이었고 아기 예수 곁에는 소/말/나귀 같은 가축들이 있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보호하기 위해서 멀리 이집트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연약한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마리아가 안전하게 출산할 방을 찾지 못했을 때, 베들레헴 사람들은 마굿간/손님방을 마련해 주었고 들에서 양을 치는 가난한 목동들은 아기 예수를 찾아와 경배했습니다. 베들레헴 사람들/목동들이 아기 예수를 지켜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의 이야기입니다. 사회가 위험해지면 제일먼저 노인/여성/아기와 같은 약자들이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 약자들을 기억하고 보호할 때 이 사회에 희망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청년 여러분, 이 사회에는 분명히 차별과 위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서로의 손을 잡아주고 서로를 보호하고 지켜 줄 때, 우리는 위험을 견딜 수 있고 차별을 바꿀 수 있습니다.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쉼터를 마련해 주고 따뜻하게 환영할 때, 위험한 사회는 안전한 사회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위험한 곳에 사는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지켜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Danger society and baby Jesus
Matthew 2:13-18

After the wise men had gone, an angel from the Lord appeared to Joseph in a dream and said, "Get up! Hurry and take the child and his mother to Egypt! Stay there until I tell you to return, because Herod is looking for the child and wants to kill him." That night, Joseph got up and took his wife and the child to Egypt, where they stayed until Herod died. So the Lord's promise came true, just as the prophet had said, "I called my son out of Egypt." (Matthew 2:13-15)

When Herod found out that the wise men from the east had tricked him, he was very angry. He gave orders for his men to kill all the boys who lived in or near Bethlehem and were two years old and younger. This was based on what he had learned from the wise men. So the Lord's promise came true, just as the prophet Jeremiah had said, "In Ramah a voice was heard crying and weeping loudly. Rachel was mourning for her children, and she refused to be comforted, because they were dead." (Matthew 2:16-18)

Professor Han, who teaches Philosophy in Germany, said in his recent book [Fatigue Society] that today's society is characterized as a pathological landscape of neuronal disorders such as depression, 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 borderline and burnout. He claims that they are not caused by the negativity of people's immunology, but by an excess of positivity. The immunological paradigm, or control society which dominated the past century is based on a clear differentiation between friend and enemy or inside and outside. During the cold war, everybody knew who the enemy was. Social and political organization in the past is to defend the inside from outside, regardless of whether they pose a threat or not. The otherness of the outside element is sufficient justification for its expulsion.

Han’'s central claim is that, since the end of the cold war, social formations have moved away from this immunological paradigm or control society. The central categories of immunology, otherness and foreignness, are disappearing, and a new category is taking their place: excess of positivity, or fatigue society. The disappearance of otherness means that we now live in a time bereft of negativity. Hyperactivity or burnout are the result of an excess of positivity. The violence/power of positivity stems from over-producing, over-achieving or over-communicating. It is not based on anything alien to the system, it is immanent to the system. He proposes that we live in an achievement society. Achievement society has replaced the "You shall not" of disciplinary society with the affirmation of "Yes you can."

The entrepreneurial subject of achievement society does not need commandments—-it has projects. Han writes: “Disciplinary society is dominated by the No. Its negativity creates the insane and criminals. Achievement society, in contrast, gives rise to depressives and failures.” In addition to his argument, we may say that today's society is discrimination and danger society. We hear the news that many people are still living under the circumstances of distinction, poverty, and oppression. We remember millions of Syrian refugees and black people in Ferguson city in the United Sates. According to Matthew chapter 2, right after baby Jesus was born, Joseph and Mary took the child to Egypt, to escape King Herod's threat. Baby Jesus was born in danger society. Yet, with the help of parents and other good people, baby Jesus was able to grow safely. The Advent/Christmas story tells us how dangerous Jesus was from the beginning and how people responded to this situation with love and solidarity. Amen.

Posted by 정해빈
,

대림절 두번째 주일
광야의 소리, 새로운 미래
이사야 40:1 - 11
정해빈 목사


1. 대림절은 미래를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미래, 더 나은 미래, 새로운 미래를 기다립니다. 2000년 전에는 아기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는 만왕의 왕, 세상의 통치자로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아픔과 갈등과 차별이 있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평화로운 세상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나는 지금 현재가 좋다, 내가 원하는 것을 지금 다 가졌기 때문에 굳이 새로운 미래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나은 미래, 새로운 미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은 경제적 어려움이 사라지는 미래를 기다립니다. 삶의 터전을 아직 마련하지 못하고 안전한 땅에 정착하지 못한 이민자들/난민들/나그네들은 안전한 땅에 정착할 수 있는 미래를 기다립니다. 몸과 마음이 연약하고 아픈 사람들은 몸과 마음의 고통이 사라지는 미래를 기다립니다. 독일의 몰트만이라는 신학자는 2차 세계대전 때 3년 이상 포로 생활을 하면서 절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미래의 소망이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달았습니다. “나는 이제 포로로 죽을 거야, 여기가 끝이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 말대로 쉽게 인생을 단념하게 됩니다. 하지만 포로 중에서도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은 마침내 포로에서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미래를 기다리는 것은 지금 세상에 만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픔과 갈등과 차별이 존재하는 이 세상에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 새로운 미래를 기다립니다. 만약 우리에게 새로운 미래를 기다리는 소망이 없다면 우리는 쉽게 좌절하고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미래를 기다리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 힘만으로는 새로운 미래를 만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소망하나 우리 힘만으로는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더 나은 미래를 꿈꾸지만 때로는 더 나쁜 미래를 만들기도 합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미래의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 왔습니다. 기술과 과학과 제도가 발전하면 더 좋은 사회가 올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기술과 과학과 제도가 발전하면 할수록 불안과 위험이 높아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새로운 미래, 완전한 미래는 하나님께서 도우실 때만이 실현될 수 있습니다. 미래를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의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서 출발합니다. 인간이 불완전하다는 겸손함, 인간이 만드는 미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겸손함을 가지고 주님이 완성하실 미래를 기다려야 합니다.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힘과 하나님의 도우심이 만날 때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우리의 노력과 하나님의 도우심이 만날 때 새로운 미래는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마태복음 25장 말씀을 보면 ‘열처녀의 비유’ 말씀이 나옵니다. 10명의 처녀들이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는데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등불에 기름이 없어서 신랑을 맞이하지 못했고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등불에 기름이 있어서 신랑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어둠을 밝히는 등불은 우리의 삶을 가리킵니다. 우리들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등불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 자체가 어둠을 밝히는 등불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되라고 지음을 받았습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등불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등불은 기름이 있어야만 불을 밝힐 수 있습니다. 등은 하나님이 주시지만 기름은 내가 준비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름은 내 안에 있는 믿음/기도/신앙/일 수도 있고 고난 중에서도 꺼지지 않는 희망일 수도 있습니다. 내 안에 기름이 있어야 합니다. 내 안에 불이 꺼지면 안 됩니다. 신랑이 올 때에 자기 기름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만이 신랑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노력과 하나님의 도우심이 합해질 때 이루어집니다. 신랑이 오려면 누군가는 불을 밝히고 있어야만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신랑이 오고 싶어도 불을 밝히는 사람이 없으면 신랑도 올 수가 없습니다.  내 안에 희망의 기름이 많아서 내 안에 불을 밝히고 있을 때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환영할 수 있습니다.

2.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 40장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동포들에게 들려주는 희망의 말씀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지 70년이 되었습니다. 70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다보니 동포들의 마음속에 절망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과연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대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보다 바벨론 신이 더 강한 것이 아닐까?” 그때 이사야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동포 여러분, 절망하지 마십시오. 70년 복역의 때가 끝났습니다. 고국으로 돌아갈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미래가 오고 있습니다. 우리를 지배하는 바벨론 제국은 영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너는 외쳐라, 무엇이라고 외쳐야 합니까?,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을 뿐이다. 주님께서 그 위에 입김을 부시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다." 하나님께서 은밀하게 일하고 계신다는 확신이 없을 때 우리의 심령은 풀처럼 마르고 꽃처럼 시들게 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온 세상이 바벨론 제국처럼 보입니다. 바벨론의 신 마르둑이 온 세상을 통치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때 새로운 역사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새로운 역사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영적으로 시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새로운 미래는 그냥 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노력과 하나님의 도우심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만드시는  새로운 미래가 올 수 있도록 길을 닦아야 합니다. 새로운 미래는 주님이 만드시지만 길을 닦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백성들에게 외쳐라, 광야에 주님께서 오실 길을 닦아라. 사막에 우리의 하나님께서 오실 큰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계곡은 메우고, 산과 언덕은 깎아 내리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고, 험한 곳은 평지로 만들어라.” 길을 평탄하게 만든다는 말은 높은 자는 낮아지고 낮은 자는 올라가서 차별이 없어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이 오시는데 방해가 되는 걸림돌을 치우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오실 수 있도록 넓은 길을 닦으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넓히십시오. 교만한 마음을 낮추십시오. 거친 마음을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십시오.” 이사야는 외쳤습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이사야가 외쳤던 똑같은 말씀을 세례요한이 외쳤습니다. “주님이 오십니다, 주님 맞을 준비를 하십시오. 길을 평탄케 하십시오. 교만한 자는 자기를 낮추고 불의한 자는 불의한 삶에서 벗어나십시오. 삶의 방향을 바꾸십시오.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받으십시오.” 이사야가 교만한 바벨론 제국을 경고했다면, 세례요한은 교만한 예루살렘 성전을 경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 제국을 낮추신 것처럼, 교만한 예루살렘 성전을 낮추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세례요한은 본래 제사장 집안의 아들이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제사장이 되어서 부유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높은 자리를 버리고 낮은 길을 택했습니다.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으며 백성들을 위해 사는 정의의 예언자, 광야의 예언자, 광야의 소리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백성들을 괴롭히는 강도의 소굴이 되어 있었습니다. 타락한 제사장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외쳤습니다. “무엇이든지 스스로 높다고 하는 것은 낮아지게 될 것입니다. 타락한 성전은 무너질 것입니다. 광야로 가서 회개의 세례를 받으십시오. 주님께서 오고 계십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십시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지금 이 땅을 지배하는 힘들은 시간이 지나면 다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오직 여호와의 말씀은 영원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이 보기에 영원할 것 같았던 바벨론 제국도 무너졌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이 보기에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예루살렘 성전도 무너졌습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제국/성전/사탄/죽음/질병도 다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스스로 높아진 것들은 다 낮아지게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주님의 나라만이 영원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광야에서 들리는 소리가 있습니다. “주님이 오십니다. 주님의 길을 준비하십시오. 마음을 낮추십시오. 마음을 넓히십시오. 삶의 방향을 바꾸십시오.” 우리들은 지금 세상이 아니라 더 나은 세상, 새로운 미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희망과 절망이 뒤섞여 있습니다. 절망스러운 쪽을 보면 모든 것이 절망스러워 보입니다. 그러나 희망스러운 쪽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께서 은밀하게 일하고 계시는 새로운 미래를 볼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만드실 새로운 미래를 기다리는 사람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고 기다립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내 안에 믿음의 기름을 가지고 불을 밝힐 때 주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찾아올 것입니다. 내 안에 희망의 기름이 있어야 합니다, 희망의 불이 꺼지면 안 됩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소망을 갖고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Voice of the wilderness, new future
Isaiah 40:1 - 11

Our God has said: "Encourage my people! Give them comfort. Speak kindly to Jerusalem and announce: Your slavery is past; your punishment is over. I, the LORD, made you pay double for your sins." Someone is shouting: "Clear a path in the desert! Make a straight road for the LORD our God. Fill in the valleys; flatten every hill and mountain. Level the rough and rugged ground. Then the glory of the LORD will appear for all to see. The LORD has promised this!" Someone told me to shout, and I asked, "What should I shout?" We humans are merely grass, and we last no longer than wild flowers. (Isaiah 40:1-6)

At the LORD's command, flowers and grass disappear, and so do we. Flowers and grass fade away, but what our God has said will never change. There is good news for the city of Zion. Shout it as loud as you can from the highest mountain. Don't be afraid to shout to the towns of Judah, "Your God is here!" Look! The powerful LORD God is coming to rule with his mighty arm. He brings with him what he has taken in war, and he rewards his people. The LORD cares for his nation, just as shepherds care for their flocks. He carries the lambs in his arms, while gently leading the mother sheep. (Isaiah 40:7-11)

We are living the Second Sunday of Advent, the season of peace, the season that waits for the LORD's coming. We wait for the new and better future, new heaven and new earth, that Jesus will bring in a final day. Waiting something seems like boring and tedious. But waiting something does not mean to stay long quietly without any activities. Rather it means to envision, dream and draw the future close to us. Waiting is not a passive attitude but a positive action of doing something. We wait for the new and better future by dreaming and participating in the new world that God promised to fulfill for us. Just as only five out of ten bridesmaids waited for the groom with their lamps in Matthew chapter 25, we wait for Jesus's coming with our own lamp with enough oil, oil of prayer, hope, and courage.

We wait for the better future because we cannot satisfy with the "status quo" which means the existing state of affairs. We want change. The world of injustice must be changed. We see all kinds of struggles, conflicts, and the cry of the outcast everywhere in the world. Their misery seems even worse and worse. We wait for the better future, since we know that this world must be changed to the new world that does not hurt and harm anyone. We believe when Jesus comes to us again, everything will be changed to the complete world that God had intended. We believe when Jesus comes to us as the final ruler, all things will be renewed and Jesus will rule over the world with peace and justice.

When Hebrew people lived as captives in the Babylonian Empire for 70 years, Prophet Isaiah proclaimed, "Your slavery is past; your punishment is over. Clear a path in the desert! Make a straight road for the LORD our God! Fill in the valleys! Flatten every hill and mountain! Level the rough and rugged ground! Flowers and grass fade away, but what our God has said will never change!" Nothing is ever eternal, Isaiah said. Empire, temple, satan, worldly power, death, and disease, everything will be disappeared when Jesus comes to us. When everything seems unchanged and despair seems to last forever, God suddenly changes the world and brings a new life to us. A voice from the wildness, "Encourage my people! Your slavery is past! God brings a new future." Amen.


Posted by 정해빈
,

대림절 첫번째 주일
성찬, 모든 이에게 떡과 잔을
에스겔 34:11 - 16
정해빈 목사

 


1. 창조절 절기가 끝나고 그리스도의 탄생과 다시 오심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대림절(Advent)이 시작되었습니다. 세상 달력은 1월부터 시작되지만 교회 달력은 한 달 일찍 대림절부터 시작됩니다. 대림절을 시작하면서 성찬식을 함께 합니다. 성찬은 보이는 말씀입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 칼 바르트(Karl Barth) 같은 신학자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3가지 방식으로 말씀하시는데, 첫번째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말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두번째로 성서 안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세번째로 예배 시간에 선포된 말씀(설교와 세례와 성찬식)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말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말씀, 기록된 말씀, 선포된 말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첫째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평생 말씀대로 사셨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책에 기록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수천 년 동안 신앙의 선배들이 성령의 감동받은 것을 책에 기록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예배시간의 선포(설교/세례/성찬식)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3가지 방식으로 말씀하시는데,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2000년 전에 오셨기 때문에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책에 기록된 말씀은 우리가 보고 읽을 수 있지만 내 몸으로 체험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몸으로 체험하는 것은 세번째 말씀, 성찬식뿐입니다. 우리는 떡과 잔을 먹고 마심으로 그리스도를 내 몸 안에 모시게 됩니다. 성찬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 몸 안에 모신다는 의미에서 중요성이 있습니다. 단순히 귀로 듣는 것도 아니고 눈으로 보는 것도 아닙니다. 떡과 잔을 먹고 마심으로 그리스도를 내 몸 안에 모심으로서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가 됩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를 보면 성찬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이 문제로 천주교와 개신교가 나누어지기도 했고 같은 개신교 안에서도 의견이 나누어지기도 했습니다. 천주교가 이해하는 성찬을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이라고 합니다. 화체, 몸으로 변한다, 사제가 성찬을 위해 기도할 때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다고 가르칩니다. 글자 그대로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빵과 포도주를 아주 거룩하게 받아먹습니다. 성찬식이 끝나고 남은 빵과 포도주도 그냥 버리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몸이기 때문에 사제가 다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보통 카톨릭에서는 성찬을 할 때, 일반 신자들에게 빵은 주는데 잔은 주지 않습니다. 잔은 사제들만 마십니다. 먹으려면 다 같이 먹어야지 자기들만 잔을 마시는 것이 어떻게 보면 치사하게 보입니다. 잔은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사제/신부들만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지금부터 600년 전 체코의 얀 후스(Jan Hus)라는 사람이 성찬식을 할 때 최초로 일반 신자들에게 떡과 잔을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미사/예배를 볼 때 라틴어로 하지 않고 체코 말로 미사를 인도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후스는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화형을 당했습니다. 후스를 영어로 하면 거위가 됩니다. 얀 후스는 화형을 당할 때, “나 거위의 꿈은 지금 이루어지지 않지만 먼 훗날 나 거위의 꿈은 반드시 이루어져서 하늘을 날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보통 교회개혁이 500년 전, 1517년에 일어났다고 알고 있는데, 그보다 100년 전, 지금부터 600년 전에 후스의 개혁으로부터 교회개혁은 시작되었습니다.

교회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는 성찬을 할 때, 그리스도께서 떡과 포도주라는 “물질 안에, 물질과 함께, 물질 아래(in, with, and under)" 임재하신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을 공재설(consubstantiation)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글자 그대로 떡과 포도주로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주변에 그리스도의 몸이 거주하신다고 보았습니다. 신자들이 성찬을 할 때, 신자들은 떡과 포도주와 그리스도의 몸을 동시에 먹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떡과 포도주를 통해서 우리 몸에 들어오신다고 보았습니다. 마치 장작에서 불이 붙으면 불이 장작의 안과 밖과 주변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것처럼, 성찬을 행할 때 그리스도께서 떡과 포도주 주변에 임재하신다고 보았습니다. 카톨릭의 화체설이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다는 입장이라면, 마틴 루터의 공재설은 그리스도의 몸이 떡과 포도주 주변에, 안과 밖과 위와 밑에 임한다는 입장을 가리킵니다. 성찬에 대한 세 번째 이해는 칼빈과 쯔빙글리의 영적 임재설/상징설입니다. 칼빈과 쯔빙글리는 그리스도께서 떡과 포도주에 영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임하신다고 보았습니다. 성찬을 행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되게 만드십니다. 칼빈은 말하기를, 성찬을 할 때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대신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신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성찬 중에 마음이 치유되기도 하고 병이 낫기도 합니다. 또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기억하게 만듭니다. 쯔빙글리는 신자는 세례와 성만찬을 통해서 구원의 드라마를 회상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헌신과 충성과 순종을 선언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2. 성찬은 한마디로 말하면 거룩한 식사를 가리킵니다. 성찬은 첫째로 감사의 식사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떡과 포도주는 자연에게서 나왔고 자연은 하나님에게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굶주리지 않도록 가장 중요한 두가지, 밀가루와 포도주를 주셨습니다. 우리의 생존에 가장 필요한 것 두 가지가 떡과 잔입니다. 밀가루와 포도주만 있으면 사막에 떨어져도 살 수 있습니다. 떡/밀가루는 우리가 먹는 주식 빵/밥을 가리키고 잔/포도주는 우리에게 필요한 물/음료를 가리킵니다. 성찬은 둘째로 교제의 식사입니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몸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먹음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고 동시에 성도님들과 함께 먹음으로서 성도님들과 한 몸이 됩니다. 셋째로 성찬은 소망의 식사입니다. 먼 훗날 마지막 때에 일어날 하나님 나라 잔치를 기다리며 성찬을 나눕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마지막 때에 어린 양이 베푸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가 나옵니다. 성찬은 미래에 있을 하나님 나라 잔치를 미리 맛보고 그것을 고대하는 소망의 식사입니다. 성찬에는 이렇게 3가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감사, 교제, 소망. 성찬은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가리킵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중에 자주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베푸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차별없이 식탁에 초대하셨습니다.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을 가장 먼저 식탁에 초대하셨습니다. 보통 전통 교회에서는 교회에 등록된 세례 교인만 성찬에 참여하게 합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가 속한 캐나다연합교회(The United Church of Canada)는 예배에 참석한 누구나 성찬에 참여하도록 권유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아무런 조건없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식탁으로 초대하셨기 때문입니다. 성찬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성찬을 나눌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베푸셨던 사랑의 식탁을 회상하고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사랑의 식탁이 중단되지 않고 계속 이어지기를 고대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에스겔 말씀을 보면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여기저기 흩어진 백성들을 하나로 모아서 그들에게 잔치를 베푸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내가 여러 민족 속에서 내 양 떼를 데리고 나오고, 여러 나라에서 그들을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이스라엘의 산과 시냇가와 거주지에서 그들을 먹이겠다. 기름진 초원에서 내가 그들을 먹이고, 이스라엘의 높은 산 위에 그들의 목장을 만들어 주겠다. 그들이 거기 좋은 목장에서 누우며, 이스라엘의 산 위에서 좋은 풀을 뜯어 먹을 것이다.” 저 옛날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포로로 끌려간 히브리 백성들을 다시 모아서 그들을 배부르게 먹이시는 꿈을 꿈꾸었습니다. 이 말씀처럼 우리는 모든 사람이 풍성하게 먹고 마시는 하나님 나라 잔치를 소망하며 성찬에 참여합니다. 목자이신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기를 고대하며 성찬에 참여합니다. 성찬에 참여하면서 과거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현재의 그리스도를 체험하며 미래의 그리스도를 소망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굶주리는 자는 배불리 먹게 되고 주린 자는 풍족하게 마시게 될 것입니다. 성찬을 하면서 우리는 또한 지금 이 순간에도 풍족하게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는 이웃들을 기억합니다. 주님, 어서 오시옵소서. 이 땅의 모든 이들에게 떡과 잔을 주소서. 이 땅의 모든 이들이 먹고 마시는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가 이 땅위에 임하게 하옵소서. 아멘.

Now listen to what I, the living LORD God, am saying to you shepherds. My sheep have been attacked and eaten by wild animals, because you refused to watch them. You never went looking for the lost ones, and you fed yourselves without feeding my sheep. So I, the LORD, will punish you! I will rescue my sheep from you and never let you be their shepherd again or butcher them for food. I, the LORD, have spoken. The LORD God then said: I will look for my sheep and take care of them myself, just as a shepherd looks for lost sheep. (Ezekiel 34:7 - 11)

My sheep have been lost since that dark and miserable day when they were scattered throughout the nations. But I will rescue them and bring them back from the foreign nations where they now live. I will be their shepherd and will let them graze on Israel's mountains and in the valleys and fertile fields. They will be safe as they feed on grassy meadows and green hills. I promise to take care of them and keep them safe, to look for those that are lost and bring back the ones that wander off, to bandage those that are hurt and protect the ones that are weak. I will also slaughter those that are fat and strong, because I always do right. Amen. (Ezekiel 34:12 - 16)

From today we will live the new season of Christian calendar, Advent. Advent is a season observed in many Western Christian churches as a time of expectant waiting and preparation for the celebration of the Nativity of Jesus at Christmas. The term "Advent" came from the Latin word adventus, meaning "coming". Latin adventus is the translation of the Greek word parousia, commonly used to refer to the Second Coming of Christ. For Christians, the season of Advent anticipates the coming of Christ from two different perspectives. The season offers the opportunity to share in the ancient longing for the coming of the Messiah, and to be alert for his Second Coming.

Today we share the communion as the way of anticipating the coming of the Christ. The Roman Catholic Church understands the communion as transubstantiation. According to this view, the substance of the elements of bread and wine is transformed by the power of God into the substance of the body of and blood of Jesus Christ. Another view is the Lutheran doctrine of consubstantiation. This view insists that Christ is present "in, with, and under" the elements of bread and wine. A third view is found in the central strand of the Reformed tradition. Its special emphases are that Christ is received by faith through the uniting power of the Spirit.

The Lord's Supper discloses what human life by God's grace is intended to be - a life together in mutual sharing and love. The meaning of the Lord's Supper is inseparable from Jesus's practice of table fellowship with sinners and the poor throughout his ministry. All are invited to this table, but most especially the poor, the sick, the outcast (Luke 14:15-24). Understood in this way, the Lord's Supper has profound significance for Christian ethics and for the mission of the church in the world today.

By sharing the bread and the cup, we long for the kingdom of God that Jesus will accomplish on the earth. By sharing the bread and the cup, we celebrate and advance the feast that God will provide for us in the future. By sharing the bread and the cup, we pray that God feeds the hungry and quenches the thirsty, letting everyone eat and drink spiritually and physically. Communion indicates God's abundant table made up with justice and peace. We pray that the day come soon when God conquers the evil and calls everyone in the world to God's final banquet, the feast of peace and joy. Amen.

Posted by 정해빈
,

창조절 열두 번째 주일
출애굽기 19:5-6, 베드로전서 2:9 - 10
왕의 자유, 제사장의 섬김
정해빈 목사


1. 지난 11월 첫째 주일 평신도 주일 예배를 드릴 때 베드로전서 2장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10절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으로 어떤 사람들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성경 구절입니다.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이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말입니다. 첫째로 우리들은 왕 같은 사람들입니다. 왕 같은 사람들이라는 말은 왕처럼 권력을 누리면서 호화롭게 살라는 뜻이 아니라 이 세상에 굴복당하지 않고 떳떳하고 당당하게 세상을 통치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왕이 다른 사람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대해서 머리를 숙이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 자녀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베드로전서가 쓰여 질 당시 초대 교인들은 로마 제국의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인들은 로마 제국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핍박을 받으면서도 떳떳하고 당당하게 믿음을 지켰습니다.

세상에서 왕처럼 당당하게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세상이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나 세상이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세상에 기가 눌리고 위축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들이 왕 같은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들은 온 세상과 우주만물의 왕 되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아무리 강하고 거칠어도 세상이 하나님의 자녀를 쓰러트릴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살고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자부심/정체성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서 “세상을 소란하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장면이 나오고,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말씀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끌려가지 않고 세상을 뒤흔들고 변화시키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살면 세상 흘러가는 대로 그냥 끌려가기가 쉽습니다. 요즘 시대를 미디어 시대라고 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TV/신문/인터넷을 통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 생각 없이 TV/신문/인터넷을 보다보면 내가 보는 것에 끌려가기가 쉽습니다. 미국의 Fox TV, 한국에서 낮 시간에 TV를 키면 나오는 종편(종합편성채널)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정부에서 틀어주는 TV 뉴스를 그냥 보고만 있으면 안 됩니다. 이쪽 뉴스도 들어보고 저쪽 뉴스도 들어보아야 합니다. 신문을 보더라도 정확한 사실이 무엇인지, 이 사건의 배경에 무엇이 있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깊이 생각하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혜안을 가지고 세상을 바르게 보고,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왕 같은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베드로전서는 우리를 가리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왕은 자유를 가리키고 제사장은 섬김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말은 세상에 끌려 다니지 않고 왕처럼 자유로우면서 동시에 세상을 치유하고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었던 세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왕이고 두 번째는 예언자이고 세 번째는 제사장입니다. 왕은 백성들을 통치하는 사람이고 예언자는 왕과 백성들이 잘못된 길을 갈 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이고 제사장은 제사/나눔/화해를 담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세 종류의 사람들 중에서 일반 백성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사람들이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왕은 멀리 떨어져 있고 예언자는 가끔 등장합니다. 하지만 제사장은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도 제사장을 찾아갔고 병들었을 때도 찾아갔고 죽었을 때도 찾아갔고 제사드릴 때도 찾아갔습니다. 본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자체가 제사장 나라로 출발한 나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복의 근원/통로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통하여 세상 사람들이 복을 받을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복의 근원/통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복이 나에게 와서 나에게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나를 거쳐서 세상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또 오늘 말씀 출애굽기 19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히브리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건져 내신 다음에 제사장의 사명을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주어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 히브리 백성들 전체를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물론 제사장은 12지파 중에서 아론의 후손 레위 지파가 주로 맡았습니다. 그래서 레위 지파는 땅을 분배받지 못했고 백성들을 위해서 제사드리고 병을 고치고 장례를 치르는 대신 백성들로부터 삯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크게 보면 히브리 백성들 전체가 제사장 나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제사장 나라는 돈이 많은 나라도 아니었고 군사력이 강한 나라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거룩한 나라였습니다. 너희 히브리 백성들은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어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2. 제사장이 해야 할 3가지의 사명이 있습니다. 첫째는 제사/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제사장들은 5가지 제사, 번제/소제/화목제/속죄제/속건제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감사를 위해서, 죄 용서와 화해를 위해서, 나눔과 배상을 위해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헌신을 가리켰습니다. 구약의 제사를 오늘날로 바꾸면 예배가 됩니다. 물론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지만 제사/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만나는 연합의 잔치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되고 하나님의 뜻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기뻐하고 은혜받고 소망과 위로를 얻게 됩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종말에 있을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지금 여기서 미리 경험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려야 하는 이유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복/은혜를 만나야만 그 복/은혜를 세상에 나누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의 통로가 되려면 먼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일주일에 한번 예배를 드려야 우리 영혼이 삽니다. 그런 면에서 예배가 참 소중합니다. 성도님들, 주중에는 교회 안 나오셔도 좋은데, 일주일에 한번, 주일 예배를 소중히 여기시고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제사장이 해야 할 두번째 사명은 이웃을 축복하고 물질을 나누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뿐만 아니라 이웃을 축복하고 물질을 나누는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민수기 6장 24절을 보시면 제사장들이 하는 축복 기도가 나옵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에게 복을 주시고, 당신들을 지켜 주시며, 주님께서 당신들을 밝은 얼굴로 대하시고, 당신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님께서 당신들을 고이 보시어서, 당신들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복을 빌어주는 사람이 오늘날의 제사장입니다. 룻기를 보면 룻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와서 이삭줍기를 할 때 밭의 주인인 보아스가 일꾼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여인이 이삭을 주울 때에는 곡식단 사이에서도 줍도록 하게. 자네들은 저 여인을 괴롭히지 말게. 그를 나무라지 말고, 오히려 단에서 조금씩 이삭을 뽑아 흘려서 그 여인이 줍도록 해주게.” 본래 율법에 보면 추수할 때에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위해서 밭의 네 귀퉁이를 남겨두도록 했습니다. 보아스는 율법을 충실하게 지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보아스는 일꾼들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보아스는 "주님께서 자네들과 함께 하시기를 비네" 하면서 곡식을 거두고 있는 일꾼들을 격려하였다. 그들도 보아스에게 "주님께서 주인 어른께 복을 베푸시기 바랍니다" 하고 인사하였다.” 보아스는 참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일꾼이 주인에게 인사하기는 쉬워도 주인이 일꾼에게 인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일꾼들에게 먼저 다가가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보아스가 한 기도가 바로 민수기 6장 24절에 나오는 제사장의 기도와 같은 기도였습니다. 보아스는 일꾼들에게 복을 빌어 주었고 과부 룻을 보살펴 주었습니다. 보아스 같은 사람, 이웃을 축복하고 물질을 나누는 사람이 오늘날의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이 해야 할 세번째 사명은 평화/화해를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히브리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야곱의 형  에서의 후손인 에돔 족속이 히브리 백성들이 지나가는 것을 막은 일이 있었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은 자신들의 친척이 되는 에돔 족속과 싸우지 않기 위해서 먼 길을 돌아서 갔습니다. 또 아브라함의 조카의 후손인 암몬 족속과도 싸우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성경에는 히브리 백성들이 다른 민족과 싸우는 이야기도 나오지만 주변 민족들과 싸우지 않으려고 노력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다른 사람들과 화해하고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오늘날의 제사장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바로 이런 제사장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베드로전서는 우리를 가리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했5습니다. 우리들은 왕처럼 자유로운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끌려다니지 않고 세상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을 통치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입니다. 동시에 우리들은 제사장 같은 사람들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이웃을 축복하고 평화를 선포합니다. 예배/나눔/평화의 삶을 사는 사람이 오늘날의 제사장입니다. 오늘날에도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할 사람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 외롭고 힘든 사람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 에볼라 바이러스와 싸우기 위해서 위험을 감수하고 일하고 있는 의료진들,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바로 오늘날의 제사장들입니다. 우리 교회가 예배/나눔/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왕 같은 제사장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