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첫번째 주일 / 11월 네번째 주일

누가복음 21:25-36, 데살로니가전서 3:11-13

대림절, 너희의 머리를 들어라

정해빈 목사

 

 

오늘부터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대림절을 영어로 에드번트(Advent)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오다, 도착하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아벤투스(Adventus)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의 황제가 어느 동네를 방문하면 동네 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황제가 오는 것을 기다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초대 교회 성도들은 만왕의 왕 되시는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날을 기다리며 대림절을 묵상했습니다. 대림절은 두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는 과거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억하는 것을 가리키고 둘째로는 미래에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대림절은 평화의 왕이신 주님의 탄생과 주님의 다시오심을 기다리는 기간을 가리킵니다. 기독교 신앙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기다림으로 시작됩니다. 그래서 세상달력은 1월부터 시작되지만 교회달력은 11월 말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세상달력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달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살아가고 미래를 기다릴 수 있습니다. 달력이 없다면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를 구분하지 않고 무질서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동물은 달력이 필요 없습니다. 동물은 시간을 계산할 줄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은 달력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달력을 통해서 지금이 어느 때인지를 압니다. 1월이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고 2월이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달력이 우리의 삶을 의미있고 풍성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상달력에 더해서 교회달력이라는 또 하나의 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2개의 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달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보다 더 의미있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달력이 세상의 시간을 깨우쳐 준다면 교회달력은 영적인 시간을 깨우쳐줍니다. 교회달력은 우리가 1년 12달 영적인 시간을 깨달으며 주님과 동행하도록 우리를 인도해 줍니다.

 

그림을 보시면 교회달력이 어떻게 시작되고 끝을 맺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교회달력은 11월 넷째주일 대림절부터 시작해서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창조절로 끝을 맺게 됩니다. 대림절/성탄절/주현절/사순절/부활절은 우리에게 하나님나라를 가르쳐 주신 성자 예수님을 묵상하는 절기이고, 성령강림절은 우리를 치료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묵상하는 절기이고, 창조절은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묵상하는 절기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1년 12달 성부, 성자, 성령님을 묵상하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림을 보시면 교회달력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 수 있습니다. 교회달력은 우리의 삶을 기쁘고 의미있고 풍성하게 만들어 줍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는 주어진 시간을 아무런 의미/목적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달력을 따라가면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시간도 축복이고 교회달력도 축복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시간을 기뻐하고 감사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가리킵니다. 교회달력을 통해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 때 우리는 풍성하고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혹시 매일매일의 삶이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교회달력을 따라가면서 주님과 동행하며 매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인생을 살 때 우리의 삶은 훨씬 더 기쁘고 의미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대림절은 기다림의 계절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구원해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은 우리의 힘만으로는 우리가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교통과 과학기술이 발전해서 옛날 왕들이 누리지 못했던 편리한 생활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편리해진만큼 세상은 더 불안해지고 위험해졌습니다. 인류는 편리한 세상을 만들었을지는 몰라도 정의롭고 평화롭고 안전한 세상을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좋은 세상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메시야가 오셔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으로 만들어 주기를 우리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누가복음 21장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씀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해와 달과 별들에서 징조들이 나타나고 바다와 파도가 성난 소리를 내고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리면 인자가 올 때가 가까이 왔다는 뜻이니 그런 징조가 보이면 일어서서 너희의 머리를 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머리를 들라는 말씀은 깨어서 준비하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무화과나무에서 잎이 나오면 여름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처럼, 세상이 흔들리는 징조가 보이면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깨달으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2000년 전 누가교회가 박해받고 고난을 견디면서 주님의 다시오심을 기다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000년 전 누가교회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했다는 것 때문에 로마제국과 유대교로부터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주님의 다시오심을 기다리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고난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기다리는 것은 수동적인 자세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기다리는 것도 적극적인 의지가 있어야 기다릴 수 있습니다. 누가교회는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미래를 기다렸습니다.

 

누가복음 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 하나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약속된 미래는 그냥 오지 않습니다. 미래를 바라보고 계획하고 준비해야만 약속된 미래가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옛날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들도 해와 달과 별이 흔들리고 바다와 파도가 성난 소리를 내는 것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가 계속해서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하고 있고 기후변화/환경오염/이상기온의 징조가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보다 지구 온도가 1.5도가 올라가면 기상이변이 일어나서 사람이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 세대는 괜찮을지 몰라도 50년, 100년 후 우리의 후손들은 큰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최근 영국에서 제26회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6) 회의가 열렸습니다. 1995년부터 시작한 회의가 올해 26번째 회의가 되었기 때문에 COP26 이라고 부릅니다. 197개국이 모였는데 국가마다 입장이 다르고 속도가 너무 느려서 이런 식으로 가면 지국 온난화를 막기 위한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는데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2000년 전에도 세상이 흔들렸고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세상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징조를 알아차리고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미래를 맞이할 것이고 세상의 징조를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은 심판받는 미래를 맞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인류가 깨어서 세상의 징조를 알아차리고 기후변화에 잘 대처하면 살 것이고 세상의 징조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인류는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금의 고난에 좌절하지 말고 주님께서 다시오실 미래를 준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000년 전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필요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기후변화로 인해 세상이 불안하고 힘들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머리를 들고 지혜를 모으고 깨어 기도하면서 다가오는 미래를 준비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서로 풍성한 사랑을 나누고 서로를 붙들어 주면서 고난을 견디라고 말했습니다. 고난을 견디고 미래를 준비하려면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혼자보다는 둘이 더 낫고 둘보다는 셋이 더 낫습니다. 함께 모여 기도하고 의지할 수 있는 교회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교회가 우리를 지켜주고 붙들어 줍니다. 세상이 혼란스럽고 흔들릴수록 서로를 붙들어 주고 미래를 준비할 때 새로운 미래는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세상의 징조가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너희의 머리를 들어라, 기도하면서 늘 깨어 있어라,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서로 사랑을 풍성하게 나누십시오. 서로서로 마음을 굳세게 하십시오.” 누가복음과 데살로니가전서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나라를 바라보고 준비하고 기다리면서 대림절을 시작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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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열번째 주일 / 11월 첫번째 주일

룻기 4:9-10, 마가복음 12:38-44

창조절, 과부를 돌보는 보아스

정해빈목사

 

 

지난 주일에 이어서 룻기의 대한 말씀을 한번 더 증거하려고 합니다. 나오미는 인생을 살면서 3번의 재난을 만났습니다. 베들레헴에 기근이 들어서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난 것이 첫번째 재난이었고 낯선 땅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남편이 죽은 것이 두번째 재난이었고 10년쯤 지나서 두 아들을 잃은 것이 세번째 재난이었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인생이 불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남편도 없고 두 아들도 없는데 여기서 살아서 무엇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착한 며느리 룻이 나오미와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나오미와 룻이 나오미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와 보니 고향 사람들이 두 사람을 따뜻하게 맞아 주었습니다. 룻기를 자세히 읽어보면 고향 사람들이 나오미와 룻을 환영해주고 보살펴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밭에서 일하던 남자 일꾼들은 룻이 밭에 떨어진 이삭을 줍는 것을 허락해 주었고 이삭을 줍던 여인들은 룻이 자신들과 함께 이삭을 줍는 것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베들레헴 사람들이 보기에 룻은 모압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베들레헴 사람들이 인종적인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다면 그들은 룻이 이삭을 줍지 못하도록 괴롭혔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들레헴 사람들은 모압 사람 룻을 환영해 주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룻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람은 나오미의 친척 보아스 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밭에서 일하는 일꾼들에게 절대로 룻을 괴롭히지 말라고 말하였고 룻이 이삭을 줍도록 여러 가지를 배려해 주었습니다.

 

보아스는 2:12절에서 룻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댁이 한 일은 주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오. 이제 댁이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날개 밑으로 보호를 받으러 왔으니 그분께서 댁에게 넉넉히 갚아 주실 것이오.” 보아스는 첫째로 룻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것을 칭찬하였고 둘째로 그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날개 밑으로 보호를 받으러 왔으니 주님께서 그대를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비록 그대가 모압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날개 밑으로 보호를 받으러 왔으니 하나님께서 그대를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인지를 알려 주었습니다. 보아스의 말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주의 날개 밑으로 불러 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중에서도 특별히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보호해 주십니다. 룻은 과부였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땅에서 사는 외국인/나그네였습니다. 외국인 과부이기 때문에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가장 외롭고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룻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그대를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보아스의 이 말이 룻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지를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룻처럼 외국인 노동자로 낯선 땅에 왔는데 그 땅에 사는 어떤 사람이 나를 향해서 당신이 이곳에 왔으니 우리가 당신을 보호해 주겠다고 말한다면 나는 큰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신명기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히브리 백성들을 향해서 “너희가 이집트에서 종살이한 것을 잊지 말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아라” 말씀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신명기를 읽어보면 “밭에서 추수할 때 밭에 떨어진 곡식과 네 귀퉁이에 있는 곡식을 거두지 말라, 밭에 떨어진 곡식과 네 귀퉁이에 있는 곡식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몫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회적인 약자들을 특별히 기억하시고 배려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에 약자들을 보호하는 제도를 만들어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약자들을 보호하는 것은 나를 위한 길이기도 합니다. 공동체가 살아야 나도 살 수 있습니다. 내가 살려면 나도 살아야 하고 남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히브리 백성들과 언약을 맺을 때 약자보호법을 지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아스는 하나님과 조상들 사이에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언약대로 실천하였습니다. 외국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베들레헴 사람들과 언약의 정신을 기억하는 보아스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나오미와 룻은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고향 땅에서 살 수 있게 된 나오미와 룻은 보아스에게 자신들을 가족으로 받아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신을 영원히 보호해 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레위기 25장을 보면 어떤 사람이 가난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땅을 팔았을 경우, 가까운 친척이 그 땅을 사서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 주거나, 땅을 산 사람이 50년, 희년이 되면 그 땅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친척이 땅을 사면 땅이 다른 사람들에게 팔리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제도를 가리켜서 “고엘 제도” 라고 부릅니다. 고엘은 무른다/되찾는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난한 친척을 도와주는 사람을 가리켜서 “기업 무를 자(kinsman-redeemer)” 라고 표현을 합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가 되어주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자신보다 나오미에게 더 가까운 친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보아스는 그 친척을 찾아가서 나오미의 땅을 사고 나오미와 룻을 가족으로 받아줄 의사가 있는지를 물었고 그 친척은 고엘 제도를 거절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룻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나오미의 땅을 그 아이에게 주어야 한다는 것을 그 친척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오미의 땅을 사고 과부 2명을 가족으로 받아주는 것이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서 그 친척은 친척의 의무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보아스는 자신이 기업 무를 자가 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기업 무를 자가 되면 나오미의 땅을 사야하고 룻이 아이를 낳으면 나오미의 땅을 그 아이에게 주어야 합니다. 나오미의 땅을 사는 것이나 과부 2명을 가족으로 받아주는 것이 보아스에게는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성경에 기록된 고엘제도, 친척의 의무를 감당하였습니다. 언약을 지키고 친척의 의무를 다하는 보아스 같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나오미와 룻은 가정을 다시 일으킬 수가 있었습니다. 보아스는 2명의 과부에게 다시 살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자신을 희생해서 희망이 없는 과부들을 다시 일으켜 주었습니다. 보아스의 삶이 예수님의 삶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당신을 희생하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보아스의 후손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도 더 이런 뜻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마가복음 12장을 보면 여기에도 과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이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고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이 심판 때에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부들의 가산을 삼킨다는 뜻이 무슨 뜻일까요? 그 구체적인 예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어떤 과부가 동전 2개를 성전 헌금함에 넣는 것을 보시고 그 과부가 자기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나오는 렙돈은 오늘날로 말하면 1달러짜리 동전 2개를 가리킵니다. 보통 교회에서 헌금을 강조할 때 이 이야기를 예로 듭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께서 과부가 한 행동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찾은 가난한 과부가 생활비 전부를 헌금하는 것을 보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주님은 가난한 과부가 헌금을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부유한 성전이 과부를 돌보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율법학자들과 제사장들은 과부를 돌보지 않고 오히려 과부로 하여금 가진 것을 다 털어서 헌금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예수께서 율법학자들의 탐욕과 교만과 위선을 책망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 옛날 보아스는 과부들을 보살펴 주었고 보아스의 후손인 예수님은 과부들의 삶을 불쌍히 여기셨고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는 율법학자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과부들을 돌보고 가족/친척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보아스 같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들도 저 옛날의 보아스처럼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이주민들/이민자들/난민들/나그네들,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을 사랑으로 위로하고 보살피는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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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아홉번째 주일 / 10월 다섯번째 주일

룻기 1:1-5, 16-18

창조절, 나오미와 룻과 오르바의 환대

정해빈목사

 

 

오늘 우리가 읽은 룻기 말씀은 인생의 재난을 만난 3명의 여인들이 어떻게 고난을 극복했는지를 기록했습니다. 옛날 사사 시대 유다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나오미 가정이 기근을 피해서 모압 지방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이민을 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가정이 살던 베들레헴은 본래 떡집으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베들(집) + 레헴(떡)이라는 말 자체가 떡집을 가리킵니다. 떡 방앗간 동네로 알려질 만큼 베들레헴은 농산물이 풍성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기근이 들었기 때문에 엘리멜렉/나오미 가정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모압 지방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모압 지방으로 이주하고 나서 굶주림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가정의 재난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모압 지방으로 이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 엘리멜렉이 죽었고 10년쯤 후에는 두 아들마저 죽게 되었습니다. 결국 시어머니 나오미와 며느리 룻과 오르바만 남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옛날 사람들이 기근/재난/질병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았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좋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의료기술의 발달로 인해 많은 질병이 사라졌고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평균수명이 길어졌고 삶이 편리해졌습니다. 하지만 불과 100년 전만 해도 봄철 보리 고개가 있었고 굶주림, 영양부족, 위생부족, 질병으로 인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나오미 가정이 바로 그런 경우였습니다. 나오미 가정은 기근/재난/이주/질병을 모두 겪었습니다. 성경은 나오미의 남편과 두 아들이 왜 죽었는지 자세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영양부족이나 거친 노동이나 질병으로 죽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옛날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10년 동안에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는 신세를 한탄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오미는 1장 13절에서 “주님께서 손으로 나를 치신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고 1장 20절에서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들 마십시오.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몹시도 괴롭게 하셨으니 이제는 나를 마라라고 부르십시오”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오미는 히브리어로 “기쁨”을 가리키고 마라는 “괴로움”을 가리킵니다. 본래 내 이름이 기쁨인데 이제부터는 괴로움이라고 불러달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재난을 만날 때 자신의 팔자가 기구하거나 조상을 잘못 만났거나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나오미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셨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나오미가 하나님께 큰 죄를 지은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목사님들 중에는 나오미 가정이 유대 땅 베들레헴을 떠나 이방인의 땅으로 이주한 것이 큰 죄라고 설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해석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기근을 피하기 위해서 고향을 떠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서 정치적인 억압과 경제적인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 이민/난민의 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생존하기 위해서 힘든 선택을 했습니다. 그들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저주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난 주일에 읽은 욥기의 세 친구들도 욥을 향해서 네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욥과 나오미가 고난받은 것은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기근과 굶주림과 질병 때문에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나오미의 재난은 죄 때문이 아니라 연약한 인간이 자연재해를 만났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만났을 때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저주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재난을 만났을 때 재난을 이기고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이집트의 총리였던 요셉은 7년 풍년이 지난 후에 7년 흉년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곡식을 창고에 저장하였고 흉년이 들었을 때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바로 요셉과 같은 일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자연재해와 질병을 만나기도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과 지혜를 가지고 고난을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제자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묻자, 예수께서는 이 사람이 소경된 것은 이 사람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니고 이 사람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난받는 사람에게 죄를 따지는 것은 고난받는 사람을 더 힘들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만났을 때는 그 사람을 빨리 물에서 건져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고난받는 사람을 만났을 때는 그 사람의 죄를 따질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고난을 이기고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격려하고 일으켜 주어야 할 것입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는 고향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두 며느리에게 나를 따라가지 말고 너희들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새 남편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라고 말했습니다. 두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따라가겠다고 간청하자 나오미는 나를 따라오면 아무런 희망이 없을 것이니 돌아가라고 말하였고 결국 오르바는 시어머니를 떠났습니다. 하지만 룻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님이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그 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 죽음이 어머님과 나를 떼어놓기 전에 내가 어머님을 떠난다면 주님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더 내리신다 하여도 달게 받겠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고난 중에도 서로를 걱정하고 배려하는 세 여인의 아름다운 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의 앞날을 걱정해 주었고 두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앞날을 걱정해 주었습니다. 오르바가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간 것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오르바는 시어머니의 걱정을 덜어드리기 위해 시어머니의 뜻을 따랐을 것입니다. 나오미는 룻과 오르바가 새출발을 하기를 원했고 룻과 오르바는 나오미가 불행해지지 않도록 동행하려고 하였습니다. 진실로 그들은 서로를 축복하고 배려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고난을 대처하는 바른 신앙인의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갑자기 찾아오는 자연재해와 질병을 막을 수는 없지만 서로를 탓하기 보다는 서로를 의지하고 배려할 때 우리는 고난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착한 나오미와 룻과 오르바는 갑자기 찾아온 고난 앞에서도 착한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고 서로를 걱정하고 배려하며 고난을 극복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런 선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고난 가운데서도 선한 마음과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유대 사람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시하였던 것처럼 유대 사람들은 모압 사람들을 동포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본래 모압과 암몬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들이었기 때문에 유대 사람들의 친척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대 사람들이 보기에 모압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방해하는 사람들이었고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난받는 나오미를 가장 가까이서 돌보았던 사람들은 모압 며느리 룻과 오르바였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말하는 것처럼 강도만난 유대 사람을 돌보았던 사람도 사마리아 사람이었고 마찬가지로 과부가 된 나오미를 돌보았던 사람도 모압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같은 인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환대/돌봄을 실천하는 삶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지역, 인종, 성별, 문화, 종교에 대한 선입관을 벗어버리고 아무런 조건없는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오미와 룻과 오르바처럼 고난 중에도 서로를 배려하고 축복함으로서 함께 고난을 극복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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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여덟번째 주일 / 10월 네번째 주일

욥기 42:1-6, 마가복음 10:46-52

창조절,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정해빈목사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욥기 42장은 욥기의 마지막 장입니다. 마지막 장이기 때문에 욥기의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욥기 1장을 보면 욥의 고난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욥은 본래 흠이 없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고 동방에서 가장 큰 부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향해서 욥이 세상에서 가장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니까 사탄이 욥이 의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욥을 축복해 주셨기 때문이고 만약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난을 주시면 욥이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사탄이 욥을 시험하는 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다만 그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은 욥에게서 모든 것을 다 빼앗았습니다. 욥은 하루아침에 그 많던 재산과 가족과 자녀를 잃었고 부인은 떠났고 병까지 얻었습니다. 만약 그렇게 모든 것을 다 빼앗기면 아무리 경건하고 믿음 좋은 욥이라 할지라도 틀림없이 하나님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떠날 것이라고 사탄은 생각하였습니다. 사람이 신앙생활하는 이유는 축복을 받기 위해서이기 때문에 만약 축복이 사라지면 아무도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사탄은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사탄의 생각과는 달리 욥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욥도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하지만 원망은 했을지언정 하나님을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하였습니다. 어서 속히 나에게 나타나셔서 나의 억울함을 들어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떠날 것이라고 생각한 사탄의 예상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만약 우리가 욥처럼 고난을 받는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두가지 길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저주하고 떠날 수도 있고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할 수도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하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살 수 없는 것처럼 욥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하고 탄식하고 하소연하였지만 하나님을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욥기를 보면 3명의 친구와 1명의 신학자가 등장해서 욥과 논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엘리바스, 빌닷, 소발 3명의 친구들은 고난의 원인이 죄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욥 네가 고난을 받는 것은 네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욥은 세 친구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런 고난을 받을 정도로 죄를 짓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엘리후라는 젊은 신학자가 등장해서 세 친구의 주장도 틀렸고 욥의 주장도 틀렸다고 말을 합니다. 욥이 고난받는 것은 죄가 많아서가 아니라 욥을 연단시키기 위함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우리를 연단/훈련시키기 위해서 고난을 주신다고 젊은 신학자는 말했습니다. 3명의 친구보다 젊은 신학자의 말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욥은 이 젊은 신학자의 말에도 수긍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연단하기 위해서 고난을 주신다는 말이 그럴 듯하지만 그런 말이 고난당하는 사람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만약 지금 내가 욥처럼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는데 친구가 찾아와서 네가 고난을 받는 것은 죄가 많기 때문이라고 말하거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너를 연단하기 위해서 고난을 주셨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화를 낼 것입니다. 지금 죽기 일보직전에 있는 사람에게 그런 말은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그냥 내 옆에 있어주고 나를 가만히 안아주고 내 손을 잡아주는 것이 훨씬 더 힘이 됩니다.

 

욥은 자신이 너무 많은 말을 하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을 찾아온 친구들과 싸우다보니 너무 많은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피조물인 내가 세상 이치를 다 아는 것처럼 너무 많은 말을 하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이제까지는 주님을 귀로 들었는데 이제 두 눈으로 주님을 보게 되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욥이 지금까지의 과정을 통해서 무언가를 깨닫고 감사를 드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욥이 깨달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첫째로 욥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순간에 자신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것을 보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욥은 고난을 받으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욥을 버리지 않으시고 마지막 순간에 나타나셨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고난을 해결해 주셨기 때문에 감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고난받는 자신을 잊지 않고 나타나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지금 당장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았습니다. 욥은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해서 고난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욥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으셨구나, 나의 고난과 원망과 탄식을 다 듣고 계셨구나, 욥은 이 사실에 대해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두번째로 욥은 하나님께서 친구들의 말을 말을 인정하지 않으신 것에 대해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이 죄 때문이라는 세 친구의 말이나 연단을 위해서 고난이 필요하다는 젊은 신학자의 말을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손을 들어주신 것에 대해서 욥은 감사를 드렸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하심으로서 이 세상에는 욥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의 신비를 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욥이 감사를 드린 것은 하나님께서 고난을 해결해 주셨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욥은 주님께서 자신을 잊지 않고 계셨다는 사실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고통을 아시고 나와 항상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슈퍼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모든 고난을 다 막아주시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마치 무당이 부적을 만들어주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모든 나쁜 것을 막아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적이 아닙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열심히 믿어도 내가 운전을 함부로 하면 사고가 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슈퍼맨이 아니라 우리가 고난당할 때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가 고난을 이길 수 있도록 믿음과 용기를 주십니다. 슈퍼맨처럼 힘과 능력은 많지만 자식에게 무관심한 아버지 보다는 힘과 능력은 부족할지라도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와 항상 동행하는 아버지가 자녀에게는 더 필요합니다. 욥은 하나님은 전능하지만 자신의 고통에는 무관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욥은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선하시고 진실하시고 자신의 고통을 헤아리시고 자신과 동행하는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금 당장 큰 기적을 일으키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나의 고통을 아시고 내가 고난을 극복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시는 것이 더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고난받는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나의 원망을 다 들어주시고 나에게 질문하시고 대화하시는 주님을 통해서 욥은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고난받을 때는 고난을 극복하는 과정이 더 중요합니다. 고난받을 때 나를 버리지 않고 내 옆에 있어주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입니다. 욥은 자신과 항상 동행하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마가복음 10장은 앞이 보이지 않는 거지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는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바디매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욥의 친구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소경이 된 것은 지은 죄가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디매오를 향해서 조용히 하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그의 눈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고통받는 사람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욥을 정죄했던 욥의 친구들과 바디매오를 꾸짖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그들이 바로 영적인 소경들이었습니다. 욥과 바디매오가 고통당한 것은 죄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불완전한 피조물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하시고 자비로운 분이신지를 깨달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두 눈으로 보는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달은 욥처럼, 예수님을 만나 눈이 뜨게 된 바디매오처럼, 두 눈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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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일곱번째 주일 / 10월 세번째 주일

욥기 38:1-7, 히브리서 5:7-10

창조절, 숨어계시는 하나님

정해빈목사

 

 

 

일본의 대표적 현대소설가인 엔도 슈사쿠가 쓴 [침묵]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읽어볼만하고 생각할 점이 많은 소설입니다. 17세기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들이 일본에 기독교를 전했는데 일본 정부가 기독교를 박해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마치 조선시대에 천주교 박해가 있었던 것처럼, 일본에서도 주로 농민 기독교인들이 붙잡혀서 고문당하고 매달려서 죽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일본 정부는 기독교인들에게 십자가를 밟고 지나가면 살려주고 밟고 지나가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만 배교하면 안 되고 너희들에게 기독교를 전한 서양 선교사들도 기독교를 부인해야만 너희들을 살려주겠다고 협박을 했습니다. 일본에서 33년간 체류했던 페레이라 신부는 기독교 신앙을 믿는다는 이유로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농민들을 살리기 위해서 배교를 결정합니다. 이 소설을 보면 그가 십자가를 밟을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할 때 하늘의 음성을 듣는 장면이 나옵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이 음성을 들은 페레이라 신부는 농민들을 살리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십자가를 밟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페레이라 신부의 제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결국 2명의 제자가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일본에 들어가서 스승을 만났고 스승을 통해서 그동안의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습니다. 첫번째 제자는 스승이 배교한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주장하고 스승과 달리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로 생을 마감합니다. 하지만 두번째 제자는 존경하는 스승이 농민들을 살리기 위해서 배교한 것을 이해하고 자신도 배교를 합니다. 그리고는 배교한 사제라는 오명을 쓴 채로 일본에서 남은 인생을 살아갑니다.

 

페레이라 신부가 배교를 결정한 것은 두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첫번째로는 신앙 때문에 구덩이에 매달려서 죽어가는 농민들이 너무 안타까워서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배교를 결정했고 두번째로는 하나님의 침묵을 견딜 수 없어서 배교를 결정했습니다. 페레이라 신부는 동료 신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배교한 것은 말이야. 이 엄청난 핍박 속에서 하나님이 아무것도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야. 나는 농부들이 구덩이에 넣어진 뒤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어.” 만약 내가 페레이라 신부라면,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서 배교하지 않고 농민들과 함께 순교하는 것이 옳을까 아니면 죽어가는 농민들을 살리기 위해서 배교하는 것이 옳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서 배교하지 않고 순교한다면 그것도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설사 내가 페레이라 신부처럼 배교한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나를 쉽게 비난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페레이라 신부는 농민 기독교인들이 고문을 받으며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배교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페레이라 신부가 배교한 두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침묵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고통의 현장에서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가장 높은 수준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존경받는 페레이라 신부조차도 하나님의 침묵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힘든 순간이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지금 이 순간,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는 반드시 나타나셔야 된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필요할 때 나타나셔서 고통받는 사람을 구원해 주시고 악한 사람들을 징계하셔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침묵하신다면 도대체 내가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있는가? 우리들도 인생을 살면서 페레이라 신부처럼 가끔 이런 의문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욥기 38장은 욥기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욥기는 고난의 문제를 가지고 3명의 친구와 오랫동안 씨름을 했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만약 하나님이 나에게 나타나신다면 나의 억울함을 말할 것이고 만약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들으시면 나에게 무죄를 선언할 것이라고 욥은 확신하였습니다. 하지만 동쪽에 가 보아도 주님은 계시지 않고, 서쪽과 남쪽과 북쪽에 가보아도 주님이 계시지 않다고 탄식하였습니다. 이렇게 욥이 오랫동안 탄식한 후에 욥기 38장에 이르러서야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욥에게 등장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랜 침묵 끝에 나타나셔서 욥에게 많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숨어있고 너의 억울함을 모른 체한다고 탄식하는데 그렇다면 내가 세상을 창조할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너는 거기에 있었느냐? 누가 이 땅을 설계하였느냐? 누가 땅의 주춧돌을 놓았느냐?”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향해서 내가 고통받을 때 주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이렇게 물으니까 하나님께서 욥에게 똑같이 그럼 너는 내가 세상을 창조할 때에 어디에 있었느냐?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사람인 것처럼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복잡하고 신비로운 원리를 마치 다 아는 것처럼, 그래서 억울한 것처럼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피조물인 네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기 때문에, 네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만났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사람인 것처럼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욥을 책망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욥을 사랑하셨고 욥에게 나타나셨고 욥에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욥을 위로하셨고 욥의 생각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독일의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먼 곳에 숨어 헛기침을 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는 사람과 같다” 엄마와 아이가 큰 집에서 숨바꼭질을 합니다. 엄마를 찾지 못한 아이는 엄마가 나를 버리고 멀리 가 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엄마를 원망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엄마가 멀리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야, 엄마 여기 있어, 잘 찾아봐.” 아이는 엄마 목소리를 듣고 열심히 엄마를 찾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엄마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자 엄마는 아이에게 또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야, 엄마는 집 안에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잘 찾아봐.” 엄마는 아이에게 먼저 얼굴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는 최선을 다해서 엄마를 찾아야 합니다. 엄마는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를 다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에게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에크하르트는 하나님의 존재가 이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헛기침을 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지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어린아이가 숨어있는 엄마를 열심히 찾는 것처럼, 우리들도 숨어계신 하나님을 열심히 찾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열심히 주님을 찾는 사람에게만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히브리서 5장은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고 순종의 삶을 통해서 모든 사람의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실 때에도 침묵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주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이러한 신실한 삶을 사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의 구세주가 될 수 있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숨어계시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숨어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열심히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열심히 당신을 찾는 사람에게만 나타나 주십니다. 문은 두드리지 않으면 열리지 않습니다. 때로는 숨어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유익을 줄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숨어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열심히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하나님과 씨름하며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비록 주님께서 숨어계실지라도 그리스도처럼 흔들리지 않고 순종과 신실함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주님을 만나는 영광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찾으며 신실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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