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두번째 주일 / 3월 두번째 주일
사순절, 아브라함의 평화조약
창세기 15:12-18, 21:22-27
정해빈 목사

 

 

요즘 우리는 지난 주일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사순절(四旬節:Lent)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순절 기간이 돌아오면 세가지 주제를 묵상합니다. 첫째로는 우리를 위해서 고난받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묵상하고 둘째로는 우리 주변의 고통받는 이웃들을 기억하고 셋째로는 나에게 찾아오는 고난을 극복하려고 노력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종교들 중에서 고난/고통/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이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고난을 회피하지 않고 극복하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들은 고난에 대한 나름대로의 가르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종교가 만들어졌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종교들은 고통을 소극적으로 이해하거나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라고 가르칩니다. 불교는 인생이 고통의 바다이고 인생에 고통이 있는 것은 인연에 얽매여 있거나 욕심이 많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속세의 인연을 끊고 욕심을 버리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인연이나 욕심 외에 다른 이유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 철학자들이나 동양의 유교나 도교는 인생의 고통이 운명적으로 주어진 것이니 운명을 거절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가르칩니다. 인생이 새옹지마(塞翁之馬)와 같기 때문에 지금의 고통이 복이 될 수도 있고 또 복이 고통이 될 수도 있으니 고통에 대해서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옛날 중국 국경지대에 어떤 노인이 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말이 멀리 도망갔다가 다른 말들을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노인의 아들이 말을 타고 달리다가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덕분에 아들은 군대 소집에 면제가 되었습니다. 이 가르침도 좋은 가르침이기는 하지만 인생의 고난을 너무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독교는 고난을 소극적으로 받아들이지도 않고 운명적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기독교는 고난과 적극적으로 씨름하는 종교입니다. 성경책을 읽어보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개인적인 고난, 역사적인 고난, 자연적인 고난, 우주적인 고난, 이렇게 4가지의 고난이 모두 다 적혀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신앙인들은 이 4가지의 고난과 씨름하면서 인생을 살았고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싸워 이길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고난은 우리가 흙으로 지어진 연약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찾아오고, 이 세상이 아직 완성되지 않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찾아오고, 이 세상의 악이 세상을 지배하기 때문에 찾아옵니다. 우리들은 새하늘과 새땅, 하나님나라가 완성되는 그날을 바라보면서 고난과 씨름하며 인생을 살아갑니다. 개인적인 고난이 찾아올 때는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고난을 극복하고 세상의 악이 우리에게 고난을 줄 때는 그 고난을 회피하지 않고 맞서 싸웁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려고 노력합니다. 이렇게 기독교 신앙은 개인적인 고난, 역사적인 고난, 자연적인 고난, 우주적인 고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려고 노력합니다. 우리가 고난받을 때 기독교 신앙은 우리가 고난에 대처할 수 있도록 믿음과 지혜와 용기를 줍니다. 이런 귀한 기독교/성경의 가르침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을 잘 대처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 한국에서는 야당 후보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습니다. 지난 5년간 한국은 큰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코로나 방역을 잘 했고 세계에서 열번째로 잘 사는 나라가 되었고 한국노래, 한국영화, 한국드라마, 한국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앞으로 한국은 어떻게 될까요? 사람들 중에는 새로운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트럼프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선거에서 이겼다고 해서 좋아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대통령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한국을 발전시킬 수도 있고 퇴보시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요즘 우크라이나에서는 러시아의 침략으로 인해 국민들이 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지금 전세계가 힘을 합쳐서 코로나를 물리치고 기후위기에 대응을 해도 부족할 판에 전쟁을 하고 있으니 전세계가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러시아는 이번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큰 대가를 치루어야 할 것입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죽음을 각오하고 앞장서서 러시아와 싸우는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고 그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뉴스를 보니까 나토가입을 안하겠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나토가입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더라면 전쟁을 피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크라이나처럼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가 핀란드입니다. 핀란드는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 양쪽의 공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 핀란드는 유럽과 러시아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펼치면서 안정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유럽과 러시아 사이에서 외교를 잘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크라이나 국민들과 양쪽 젊은 군인들이 전쟁으로 인해 죽어가는 것을 보면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들의 판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본래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만나는 수메르 문명 지역 갈대아 우르에서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를 따라서 하란으로 이동하였고 아버지가 죽자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이주해서 남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왜 본토와 고향과 친척을 떠났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다고만 기록을 했습니다. 당시 갈대아 우르는 수메르 문명이 있었고 물이 많아서 살기가 좋았습니다. 하지만 가나안 땅은 외딴 곳이었고 사막이 근처에 있는 삭막한 땅이었습니다.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을 떠나서 살기 힘든 곳으로 가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학자들 중에는 아브라함 가족이 수메르 문명에서 왕족이었는데 전쟁에서 패해서 어쩔 수 없이 가나안 땅으로 피난을 갔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면서부터 고난이 시작되었습니다. 자식도 없고 땅도 없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렇게 고통스러운 인생을 사는 동안에 좋으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믿은 신들이 많았습니다. 전쟁의 신도 농사의 신도 있었고 쾌락의 신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나그네 생활을 하면서 나그네를 축복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고 그를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으로 만드셨습니다.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이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되어라. 다른 사람을 축복해 주는 사람이 되어라”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어쩔 수없이 고향을 떠났기 때문에 인생의 큰 고난을 만났지만 그 고난을 통해서 좋으신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새로운 소명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창세기 15장은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맺은 언약을 설명하고 있고 창세기 21장은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이 맺은 언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이 되기로 하나님과 서약을 맺었습니다. 이어서 아브라함은 가나안 왕 아비멜렉과 평화조약을 맺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식구가 많았고 아비멜렉에게도 식구가 많았습니다. 자칫하면 두 집안이 가나안에서 땅과 물을 차지하기 위해서 싸울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섬기는 좋은 사람이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이 나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두 사람은 평화조약을 맺었고 아브라함은 그에게 양과 소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두 사람의 만남을 통해서 두 집안이 서로 도움을 받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15장에 나오는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계약도 중요하지만 창세기 21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평화조약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더 중요한 깨우침을 줍니다. 아브라함은 남의 땅을 빼앗지도 않았고 이 땅이 내 땅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았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을 존경하고 인정하면서 함께 공존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분열과 갈등과 전쟁이 일어나는 이 시대에 우리들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이 될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평화를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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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첫번째 주일 / 3월 첫번째 주일
사순절, 힘의 유혹을 이기게 하소서
누가복음서 4:1-8, 9-13
정해빈 목사

 

요즘 우리는 러시아의 침략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에 대한 소식을 계속 듣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세계 3대 곡창지대에 속할 정도로 땅이 비옥하고 밀과 해바라기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국기를 보면 위가 푸른색이고 아래가 노란색인데 푸른색은 푸른 하늘을 가리키고 노란색은 밀과 해바라기를 가리킵니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러시아 말을 듣지 않고 유럽연합과 나토에 가입하려고 하니까 러시아가 침략을 했습니다. 본래 우크라이나는 옛날 소련(소비에트 연합)의 일원이었는데 소련이 해체되고 나서 서방세계 쪽으로 가까이 가니까 러시아가 그냥 두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해서 공격을 했습니다. 한때 같은 연방 국가였던 우크라이나가 왜 러시아를 싫어하는지를 러시아 정부는 알아야 합니다. 1930년대 기근이 들었을 때 소련의 스탈린이 식량을 다 뺏어서 우크라이나 국민들 3백만에서 5백만 명이 굶어 죽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자기들을 억압하고 간섭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땅을 빼앗고 간섭하니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러시아를 좋아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 우크라이나는 유럽 42개국들 중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유럽 국가들처럼 잘 사는 나라가 되고 싶다는 것이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솔직한 생각입니다. 자기들 말 듣지 않는다고 해서 주권국가를 공격하는 행동은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러시아가 무조건 나쁜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한때 러시아가 인류에 공헌한 적도 있었습니다. 독일의 나치 정권이 소련을 공격했을 때 소련 국민들은 일치단결해서 나치 정권을 물리쳤습니다. 러시아는 세계적인 작가와 작곡가들을 많이 배출했습니다. 영국에 세익스피어가 있다면 러시아에는 톨스토이가 있습니다. 땅도 넓고 훌륭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나라가 어쩌다가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나라가 되었는지 안타깝습니다. 좋은 나라가 되려면 좋은 지도자를 뽑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한번 깨닫게 됩니다.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40대 이후에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회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같은 기독교 메시지가 들어있는 책을 많이 썼습니다. 톨스토이는 러시아 농부들이 비록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지만 수백 년 동안 내려오는 기독교 신앙에 근거해서 정직하고 순수하게 살고 있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농부들의 삶을 흠모한 나머지 말년에 시골로 내려가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살았고 러시아 농부들 사이에 전해오는 이야기를 엮어서 책을 만들었는데 그 책이 [바보 이반]이라는 책입니다. 어느 나라에 군인, 장사꾼, 바보 이반 이렇게 3 형제가 살았습니다. 마귀들이 형제들을 가난하게 만들면 서로 싸울 것이라고 생각해서 첫째 아들은 전쟁터에서 지게 만들고 둘째 아들은 장사하다가 빈털터리로 만들고 막내는 배를 아프게 만들었는데 막내는 아픈 배를 움켜쥐고 열심히 농사를 지었습니다. 바보 이반은 전쟁터에서 지고 고향으로 돌아온 첫째 형과 사업에 실패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둘째 형을 받아주고 형들을 위해 집을 지어 주었습니다. 어느 날 형제들을 괴롭히던 마귀가 바보 이반에게 붙잡히자 마귀는 이반에게 볏 집단으로 군대를 만드는 기술과 나뭇잎으로 금화를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 줍니다. 하지만 이반은 볏 집단으로 군대를 만들어서 노래를 부르게 하고 나뭇잎으로 금화를 만들어서 동네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3형제는 나중에 서로 다른 나라의 왕이 되었는데 첫째 형은 군인들을 시켜서 자기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을 혼내주었고 둘째 형은 백성들에게 각종 세금을 부과하였습니다. 그러자 두 나라의 백성들이 견딜 수가 없어서 이반의 나라로 도망쳐오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반은 다른 나라에서 오는 사람들을 다 받아 주었습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이반이 다스리는 나라에서는 누구나 일을 해야 합니다. 손에 굳은살이 박힌 사람은 식탁에 앉아 식사할 수 있지만 굳은살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먹다 남은 것을 먹어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3형제 중에서 바보 이반이 다스리는 나라가 가장 평화롭고 행복한 나라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군대를 좋아하는 큰 형이 다스리는 나라에서도 국민들이 행복하지 않았고 돈을 좋아하는 둘째 형이 다스리는 나라에서도 국민들이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왕이면서도 스스로 농사를 짓는 바보 이반의 나라에서만 국민들은 행복했습니다. 톨스토이가 러시아 농부들을 존경하며 얼마나 멋진 작품을 썼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군대를 좋아하는 큰 형이 지금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푸틴이 톨스토이의 이 작품을 읽고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4장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신 후에 성령에 이끌려서 광야에 가셔서 40일을 기도하셨는데 그 기간에 악마로부터 3가지의 시험/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이끄셔서 시험/유혹을 받게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셨다는 말은 이 시험/유혹이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통과해야 할 테스트/훈련이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시험/유혹을 이기고 극복하는 것이 너무도 중요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40일 동안 간절하게 금식기도를 하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하나님나라는 이 3가지 시험/유혹을 이기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이 3가지 시험/유혹을 이기지 못하셨다면 예수님은 공생애, 하나님나라를 선포할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이 3가지 시험/유혹을 이기는 것 자체가 하나님나라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악마는 금식하시는 예수님을 향해서 지금 배가 고프니까 돌로 빵이 되게 해 보라고 유혹하였고, 예수님을 높은 데로 데리고 가서 나에게 절을 하면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유혹하였고,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가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성전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유혹하였습니다. 빵의 유혹은 경제적인 유혹을 가리키고 나에게 절하고 권력을 가지라는 유혹은 정치적인 유혹을 가리키고 성전 높은 데서 뛰어내려보라는 유혹은 종교적인 유혹을 가리킵니다. 이 3가지 유혹의 공통점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너에게 힘이 있다면, 그 힘을 마음껏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경제적인 권력, 정치적인 권력, 종교적인 권력도 얻을 것이고 세상 사람들이 너에게로 몰려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빵을 만들 수 있어야 하고, 세상권력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하고, 높은 데서 떨어져도 다치지 않을 정도의 능력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당신의 힘과 능력을 나에게 보여주시오, 아니 나와 손을 잡읍시다, 그러면 세상을 호령할 수 있는 힘을 주겠소, 악마는 이렇게 예수님을 시험하고 유혹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의 유혹이 있습니다. 나의 욕심을 위해서 힘을 남용하려는 유혹이 있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사/달란트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전혀 사용하지 않는 유혹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두가지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은 힘을 과시하지 않으시고 하늘 아버지께 순종하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사람은 빵이 필요하지만 빵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고 악마와 손잡지 않으시고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말씀하셨고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힘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오직 가난한 자를 먹이고 병자를 고치고 생명을 살리는 경우에만 당신의 능력을 쓰셨습니다.

 

개인이든지 국가이든지 힘을 발휘하고 싶은 유혹은 언제나 찾아옵니다. 일제가 한반도를 침략하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하듯이 남의 나라를 차지하고 싶은 유혹이나 힘으로 남을 굴복시키려는 유혹은 언제나 우리를 찾아옵니다. 하지만 에수님은 간절하게 기도하며 힘을 사용하라는 세가지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이 유혹은 너무 달콤하기 때문에 예수님도 이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 간절하게 기도하셔야만 했습니다. 사순절을 지내는 동안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힘과 욕심의 유혹을 이기고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지배가 아니라 섬김, 욕심이 아니라 비움의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예수님이 유혹과 싸우는 동안 성령께서 예수님을 도와주셨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성령님과 함께 고통받는 이웃을 위해 기도하며 40일의 영적 순례를 시작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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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여덟번째 주일 / 2월 네번째 주일
주현절, 모세와 엘리야의 위로를 받다
출애굽기 34:29-32, 누가복음서 9:29-36
정해빈 목사

 

 

오늘은 주현절 여덟번째 주일, 주현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예수님은 때가 되었을 때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시고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광야에서 금식하며 시험/유혹을 이기신 예수님은 갈릴리에 가셔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시고 가난한 자들을 식탁에 초대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정치/경제/사회/종교적으로 억눌리고 소외된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치료와 자유를 얻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 말씀을 듣고 삭개오처럼 변화된 사람들도 있었고 예수님 말씀을 듣고 새롭게 변화된 마을도 있었습니다. 원래 갈릴리 지역은 땅이 비옥하고 호수가 있어서 농민들과 어부들이 살 만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에는 모세의 율법과 납달리 지파와 스불론 지파의 전통이 남아있었는데 예수님 시대에 로마제국과 헤롯이 지배하면서 모세의 전통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를 돌아다니면서 서로를 지켜주고 보호해 주는 언약의 정신을 일깨워주셨습니다.

 

갈릴리가 비옥한 땅과 호수가 있었지만 로마제국의 억압을 받았던 것처럼, 요즘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러시아의 침략 때문에 큰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국기를 보면 위는 파란색이고 아래는 노란색입니다. 위 파란색은 하늘을 가리키고 아래 노란색은 밀밭을 가리킵니다. 이 땅은 밀을 생산하는 곡창지대로 유명한데 옛날 소련 시절부터 오랫동안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억압을 받아왔습니다. 체르노빌 핵 발전소 사고로 인해 피해를 입은 것도 이들이었습니다.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주권국가를 침략한 러시아 푸틴은 규탄받아 마땅합니다.

 

예수님 이전에 활동했던 세례요한은 미래의 하나님나라를 설교했습니다.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받고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지금, 현재의 하나님나라를 설교했습니다. 미래의 하나님나라를 기다리지만 말고 지금 여기서부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실천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것이고 서로가 서로를 붙들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이 힘들면 힘들수록 서로 용서하고 서로 음식을 나누고 서로 물질을 나누면서 하나님 나라를 지금 당장 실천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하나님은 사람이 움직이기를 기다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움직여야 하늘에 계신 하나님도 우리에게 응답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현재의 하나님나라를 가르치시면서 갈릴리를 돌아 다니셨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활동이 마무리 되었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 3명을 이끌고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산 위에서 예수님의 얼굴 하얗게 변했다고 했는데 갈릴리 북쪽을 가보면 눈이 덮여 있는 하얀 산 헬몬 산이 나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갈릴리 활동을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하얀 산에 올라가셨을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인생의 방향이 크게 바뀌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고국을 떠나서 새로운 나라에 가서 사는 것이나,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서 결혼하는 것이나, 이사를 가거나 회사를 옮기는 것도 인생의 방향이 바뀌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배우자와 사별하고 홀로 된 삶을 사는 것이나, 아주 슬픈 일을 만나는 것이나, 큰 사고나 천재지변을 당하는 것도 인생의 방향이 바뀌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큰 변화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든 아니면 내가 스스로 결정한 것이든 인생의 큰 변화가 찾아오면 사람은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한 불안과 두려움을 이기고 새로운 변화에 대처하려면 나 스스로의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그와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갈릴리 사역을 마무리하였는데 예수님의 앞에는 더 큰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갈릴리를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걸어가는 것이었고 예루살렘에서 부패한 성전을 꾸짖는 것이었고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갈릴리에서는 기쁨도 있었고 보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갈릴리에서 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고난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인생에 큰 변화가 찾아오면 사람은 그 큰 변화를 맞이할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마음의 준비는 나 스스로 해야 하지만 나 혼자만의 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도 필요하고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친구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옛날 신앙의 순례자들은 인생의 큰 변화가 찾아왔을 때 수도원에 들어가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도 하였고 동료들을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였습니다. 인생에 큰 변화가 찾아왔을 때 그 변화에 잘 대처하려면 첫째로는 나 스스로의 준비가 필요하고 둘째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고 셋째로는 친구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 세가지가 갖추어졌을 때 사람은 인생의 큰 변화에 잘 대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말씀은 예수님이 이 3가지 방법을 통해서 인생의 큰 변화를 준비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변화산까지 길을 걸어가면서 인생의 변화를 준비하셨습니다. 우리는 길을 걸으면서 내 자신을 돌아보고 나와 대화를 나눕니다. 기독교는 순례의 신앙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조상들은 다 길을 걸어갔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길을 걸어갔고 야곱도 먼 길을 걸어갔습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셨는데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 모두 길을 걷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는 히브리 백성들을 이끌고 40년을 광야를 걸어갔고 엘리야는 독재자 아합/이세벨의 위협을 피해서 40일을 걸어갔습니다. 예수님도 갈릴리를 걸어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셨고 변화산에 올라가기 위해서 먼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인생에 큰 변화가 찾아올 때, 마음이 괴롭고 슬플 때, 길을 오래도록 걸어가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길을 걸어가면 지혜와 용기와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길을 걸어가면 조용히 나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걷는 것이 기도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고향을 떠나지 않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길을 걸어가야 겸손한 마음으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길을 떠난다는 것은 소유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가진 것이 많으면 길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길을 떠날 때는 짐을 가볍게 해야 합니다. 길을 떠난다는 것은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단순한 삶을 산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두번째로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인생의 큰 변화를 준비하셨습니다.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능력을 받으셨습니다. 인생의 위기가 찾아올 때, 인생에 큰 변화가 찾아올 때가 하나님을 만날 때입니다. 그곳이 수도원일 수도 있고 산 정상일 수도 있고 골방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과 은혜가 있어야 사람은 인생의 변화에 잘 대처할 수 있습니다. 세번째로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를 통해서 위로와 격려를 받으셨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예언자를 대표합니다.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 사이에 공통점이 많습니다. 모세는 이집트의 바로왕으로부터 핍박을 받았고 엘리야는 북이스라엘의 독재자 아합/이세벨로부터 핍박을 받았고 예수님은 로마제국과 헤롯의 핍박을 받았습니다.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은 모두 정의의 예언자였고 오랜 시간 걸어다녔고 말할 수 없는 핍박과 고난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보다 먼저 인생의 길을 걸어간 모세와 엘리야와의 만남을 통해서 위로를 받으셨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아버지의 은혜가 필요하셨고 동료들의 격려가 필요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변화산에서의 만남을 통해서 큰 힘을 얻으셨기 때문에 고난의 길을 걸어갈 수 있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큰 변화와 위기는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그러한 변화와 위기가 찾아올 때 산을 향해 길을 걸어가며 기도합시다. 주님과의 깊은 만남을 가집시다. 사랑하는 동료들의 격려와 위로를 받읍시다. 우리 하나님께서 인생의 위기와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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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여덟번째 주일 / 2월 세번째 주일
주현절,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과 같이
창세기 45:7-8, 누가복음서 6:27-36
정해빈 목사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6장에는 유명한 말씀들이 많이 나옵니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나오고 너희를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말씀도 나옵니다. 특히 6장 31절에는 저 유명한 황금률(Golden Rule)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이 황금처럼 귀하다는 뜻에서 황금률이 되었습니다. “너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여라. Do to others as you would have them do to you.”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으면 먼저 남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에게 대접받고 싶으면 먼저 남을 대접하고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으면 먼저 남을 사랑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남이 나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당신이 받고 싶은 것을 그 사람에게 먼저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황금률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종교의 가르침에 다 들어있습니다. 학교나 도서관이나 Community Centre에 가보면 여러 종교들의 황금률이 기록된 저런 그림/포스타를 볼 수 있습니다. 유대교의 랍비 힐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에게 해로운 것을 당신의 이웃에게 하지 마시오. 이것이 바로 율법의 핵심이고 나머지는 부연설명입니다. 가서 이것을 실천하십시오.” 유교의 [논어]에 보면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이라는 한자가 나옵니다. 어느 날 자공이라는 제자가 공자에게 “평생 지켜야 할 한마디 말이 있습니까?” 라고 물었더니 공자가 그것은 관용인데,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기독교는 대접받고 싶으면 먼저 대접하라고 능동적으로 표현을 했는데, 유교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수동적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그래서 유교의 가르침을 Silver Rule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슬람교의 경전인 쿠란을 보면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남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신앙인이 아니다, 나의 이웃이 사랑하는 것을 같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 신앙인이 아니다” 이런 말이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의 모든 종교들에 황금률이 나오는 것을 보면 황금률이 인간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필수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이나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해 보라는 [역지사지]도 황금률의 메시지와 같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잘 알고 있지만 잘 지키지는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인데 “서로 사랑하여라” 하는 말씀보다 “너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여라” 하는 말씀이 훨씬 더 구체적으로 와 닿습니다. 이 말씀대로 살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훨씬 더 아름답고 따뜻해 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황금률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황금률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의 삶을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접을 받고 싶거든 남을 먼저 대접하라는 황금률은 내가 남을 대접하면 나중에 그 사람이 나를 대접할 것이라는 약속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황금률에 머무르지 말고 더 나아가서 보답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도움을 주었으면 나중에 도움을 받는 것이 당연한 상식이었습니다. 특히 예수님 당시 로마 사회는 후견인(Patron)/수혜자(Client) 사회였는데, 후견인이 수혜자를 보살펴 주면 수혜자는 후견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도움을 줘도 다시 나에게 보답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대가를 기대하지 말고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또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대가를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나를 미워하는 원수에게도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접받고 싶으면 먼저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이 1단계 가르침이라면, 보답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2단계 가르침이고, 나를 미워하는 원수에게 선을 행하는 것은 3단계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단계 가르침도 지키기가 힘든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2단계와 3단계의 삶을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 27절-28절을 보면 4가지 동사가 나오는데, 나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모욕하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을 행하고, 축복하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love, do good, bless and pray. 오늘 말씀을 들으면 우리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주님, 주님의 가르침을 지키는 것이 너무 어렵습니다. 황금률을 지키는 것도 어렵고, 대가를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선을 베푸는 것은 더 어렵고, 더 나아가서 나를 괴롭히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을 행하고 기도하고 축복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심정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대접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다. 너희는 세상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자비로우시니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너희가 이 3가지의 계명을 지키면 하늘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큰 상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또 나의 제자가 되려면 힘들어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45장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3가지 계명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셉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개인적인 원한 관계에 사로잡히지 말고 눈을 크게 뜨고 큰 그림을 볼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많이 쓰는 말 중에 big picture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좁게 보지 말고 그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큰 그림을 보라는 말입니다. 요셉은 형들 때문에 이집트의 종으로 팔려간 이후로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처음에 요셉은 형들을 미워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나이가 들면서 점차 큰 그림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뜻이 계셔서 나중에 있을 흉년에 미리 대비하기 위해서 나를 먼저 이집트로 보내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동생을 노예로 팔아넘긴 형들의 행동이 잘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형들은 분명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자비로운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사랑하셔서 요셉의 비극적인 인생을 긍정적인 인생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런 큰 그림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요셉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명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만드시는 토기장이/화가와 같으십니다. 우리가 겪는 비극/슬픔/아픔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십니다. 요셉이 만일 자신을 팔아넘긴 형들을 미워하고 저주하면서 인생을 살았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쓰임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치 화가가 때로는 부드러운 재료를 가지고 때로는 거친 재료를 가지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 듯이,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원수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난과 시련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더 좋은 인생을 만들어 주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제국은 전쟁과 폭력으로 세상을 다스렸습니다. 폭력은 폭력을 낳고 복수는 복수를 낳습니다. 또 세상에서는 대접을 받았으면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이런 세상은 냉정하고 계산적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이런 계산을 하지 않고 조건없이 사랑을 베푼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훨씬 더 좋은 세상이 될 것이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길은 선으로 악을 갚는 것입니다. 그 길은 힘들지만 그 길만이 폭력이 가득하고 냉정한 이 세상을 치료하고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계명을 신실하게 지키는 사람을 요셉처럼 변화시켜 주시고 더 잘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주현절을 묵상하면서 황금률을 지킬 뿐만 아니라 더 철저한 황금률을 묵상하고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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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여섯번째 주일 / 2월 두번째 주일

주현절,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예레미야서 17:5-8, 누가복음서 6:20-26

정해빈 목사

 

 

우리는 요즘 성서일과에 따라서 누가복음서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서를 읽어보면 누가복음서가 사회적인 약자들인 여성들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서는 한편으로는 기도와 성령을 강조하고 또 한편으로는 사회정의를 강조합니다. 수직적인 신앙과 수평적인 신앙,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을 모두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서를 읽어보면 개인적인 경건생활도 열심히 해야 하고 동시에 사회정의를 위한 활동도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복음서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감사한 일입니다. 다른 복음서를 읽을 필요 없이 누가복음서만 읽고 이 복음서의 말씀대로 살 수만 있다면 우리들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서는 그 당시 사회에서 소외받고 있었던 여성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님나라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서에 기록된 성탄절 이야기를 보면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나옵니다. 마태복음서에는 요셉이 성탄절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나오는데 누가복음서에는 여성들이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서 8장을 보면 예수님을 따르는 여성 제자들이 나옵니다. 일곱 귀신이 떨어져 나간 막달라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그밖에 여러 다른 여자들이 그들의 재산으로 예수의 일행을 섬겼습니다. 예수님과 12명의 제자들이 갈릴리를 돌아다니려면 그들을 재정적으로 후원해 줄 사람들이 필요한데 여성들이 바로 그러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여성들이 예수님과 매일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동행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은 뒤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물질적으로 후원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 주변에는 겉으로 드러난 남자 제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많은 여성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실 때 남자 제자들은 다 도망갔지만 갈릴리에서 온 여성 제자들은 예수님 곁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이렇게 누가복음서를 읽어보면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더 나은 제자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성을 차별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일부 보수적인 기독교 교단들은 여성이 목회자가 되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카톨릭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1893년 뉴질랜드가 세계 최초로 여성에게 선거권을 주었습니다. 130년 전에는 여성들이 투표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반 사회는 물론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기독교조차도 수천 년 동안 여성들을 차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2000년 전에 쓰여진 누가복음서는 여성들을 예수님의 모범적인 제자들로 기록했습니다. 누가복음서가 얼마나 시대를 앞서간 복음서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서는 여성들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의 것입니다. 굶주리는 사람은 배부르게 될 것입니다. 슬피 우는 사람은 웃게 될 것입니다. 나 때문에 핍박받는 사람은 하늘에서 큰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4가지의 축복을 말씀하신 후에 이어서 부요한 사람과 배부른 사람과 웃는 사람과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말을 듣는 사람은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서에는 8복이 기록되어 있는데 누가복음서에는 4가지 복과 4가지 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서 말씀이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안타까워하시고 그들을 위로하시고 먹이시고 치료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산에서 기도하시고 평지로 내려오실 때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과 두로와 시돈 해안 지방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또 병에서 고침받고 귀신에서 고침받기 위해서 몰려들었습니다. 왜 이렇게 이 세상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아픈 사람들이 많을까, 예수님은 그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향해서 여러분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나라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무시를 당합니다. 당신이 가난한 것은 당신이 노력을 하지 않고 게을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가난을 개인 탓으로 돌리는 것을 능력주의라고 합니다. 나는 내가 노력해서 부자가 되었으니까 부자처럼 살 자격이 있고 당신은 능력이 없어서 가난해졌으니까 가난이 당신 책임이라고 말을 합니다. 부분적으로는 이 말이 맞습니다. 이 세상에는 충분히 일할 수 있는데도 일하지 않기 때문에 가난해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내가 가난한 가정,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을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좋은 집안과 좋은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은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저절로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능력주의는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게 만들고 부자를 교만하게 만듭니다. 이런 생각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많은 아픔과 상처를 줍니다. 이런 잘못된 생각은 옛날에도 있었고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픔과 상처가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품에 안으시고 그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시험이 있다면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나라,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에 가난한 사람들이 먼저 들어간다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가난한 사람들 중에는 착한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습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무조건 하나님나라에 들어간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영적인 관점에서 보면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될 가능성이 더 높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다가 깊게 파인 웅덩이에 제일 먼저 채워지듯이,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하는 가난한 자들을 가장 먼저 찾으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가장 먼저 채워 주십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가난한 사람들은 에너지를 적게 쓰기 때문에 하나님나라에 먼저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날 환경파괴/기후변화는 사람이 에너지를 너무 많이 소비하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지구를 보호하려면 이산화탄소 배출과 에너지 소비를 줄여야 합니다. 부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에너지 소비는 늘어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들 모두가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지금보다 더 가난해져야 지구가 다시 살아날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일인당 에너지 소비를 남들보다 많이 하는 사람은 스스로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에너지 소비를 많이 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나라에 먼저 들어갈 수 있습니다.

 

둘째로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이웃을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과 이웃보다 자신이 가진 소유를 더 의지하기가 쉽습니다. 가진 것이 많기 때문에 사람이 귀한 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은 혼자 힘으로 살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이웃을 의지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물질이 재산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이 재산입니다.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서에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삼는 이야기(16장), 욕심많은 부자는 지옥에 가고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들어갔다는 이야기(16장), 세금으로 재물을 쌓았던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서 회개하고 재물을 나누는 이야기(19장)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인 경건과 기도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정의와 나눔이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며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우리 스스로가 에너지와 소비를 줄이는 가난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주님을 멀리하고 사람의 힘을 의지하는 사람은 광야에서 사는 가시덤불과 같고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언제나 열매를 맺는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이웃을 의지하고 자연을 의지하며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주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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