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여섯번째 주일 / 5월 네번째 주일
부활절, 바울과 루디아, 동양과 서양 
요한복음서 14:24-26, 사도행전 16:9-15

정해빈 목사

 

 

 

한국에서 활동한 캐나다 선교사들 중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윌리엄 존 멕켄지(William John Meckenzie) 선교사입니다. 1861년 캐나다 동쪽 끝 노바스코샤에서 태어난 멕켄지는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 조선에 대한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아서 조선선교를 결심합니다. 하지만 당시 캐나다장로교는 재정여력이 없어서 그의 선교사 후원을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친구들의 도움을 얻어서 교단 파송 선교사가 아닌 개인 선교사 자격으로 32살의 나이에 조선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는 황해도 소래 마을 사람들이 조선 최초의 교회를 세우고 나서 목회자를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가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소래교회는 1883년 세워졌는데 이때는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선교사가 아직 한국 땅을 밟기 이전이었습니다. 소래 마을에 살던 서상륜/서경조 형제가 인삼 장사를 하기 위해서 만주를 오고가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죽게 되었는데 당시 만주에서 선교하던 매킨타이어와 로스 선교사의 도움으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서상륜은 로스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로스 선교사와 함께 성경을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이들 형제들이 소래지역에 복음을 전한 것이 계기가 되어서 아직 서양 선교사가 조선 땅에 도착하기도 전에 조선 최초의 교회가 소래 지역에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캐나다에서 온 멕켄지 선교사는 소래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조선 사람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면서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서양 사람이 조선 사람과 똑같은 한복을 입고 똑같은 음식을 먹고 똑같은 초가집에서 생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마을 사람들과 똑같이 살면서 복음을 전했고 아이들 교육에도 힘썼습니다.

 

소래교회 십자가 깃발과 관련된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진을 보시면 기와집으로 지은 소래교회 옆에 높은 십자가 깃발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조선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고 그 결과로 조선 땅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멕켄지 선교사는 하얀 바탕에 빨간색 십자가, 적십자 깃발을 교회당 옆에 높이 달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깃발을 보면서 이곳이 교회라는 것과 치외법권(治外法權) 지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동학농민들, 청나라, 일본 어느 누구도 소래교회를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또 전쟁에서 부상당한 동학농민들이 소래교회에서 치료를 받기도 했습니다. 또한 일종의 도피성으로서 피난민들이 소래교회에 몰려들기도 했습니다. 멕켄지 선교사는 조선 사람들과 똑같이 너무 열정적으로 살다가 풍토병을 견디지 못하고 2년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멕켄지가 죽은 후에 서상륜은 캐나다장로교회에 멕켄지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를 썼고 그 편지를 받은 캐나다장로교회는 본격적으로 조선선교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16장 말씀을 읽어보면 멕켄지 선교사가 조선 땅에 도착해서 선교를 한 것처럼, 사도바울도 낯선 땅 빌립보에 도착해서 선교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래 정통 유대교인이었던 사도바울은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들이 유대교를 망치고 세상을 어지럽힌다고 생각해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러던 중에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 변화를 받아서 정반대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되시는 주님의 부활을 통해서 죽음이 무너지고 차별이 무너지는 새로운 세상, 미래의 부활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첫번째 방향전환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사도바울이 환상체험을 통해서 두번째 방향전환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1,2,3차 이렇게 세 번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본래는 소아시아 지역, 이스라엘 땅 위에 위치한 지금의 터키 지역을 순회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소아시아의 중요한 도시를 다니면서 1차 선교여행을 마쳤고 이어서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교회에 선교보고를 한 후에 2차 선교여행을 떠나려고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2차 선교여행을 계획하면서 1차 선교여행 때 다녔던 지역을 다시한번 둘러본 후에 다른 아시아 지역을 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사도바울의 앞길을 막으시고 그들을 계속 서쪽으로 이끄셔서 마침내 당시 동양과 서양의 경계선으로 알려진 트로이/드로아 지역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터키에 속한 트로이/드로아 지도를 보면 바닷가 서쪽은 유럽 마케도니아 지역이었고 바닷가 동쪽은 아시아 터키지역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곳에서 환상체험을 합니다. 유럽 마케도니아 사람이 자신을 향해서 이곳으로 와서 자유와 해방의 복음을 전해달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이곳 마케도니아 지역에 영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으니 이곳에 와서 복음을 전해달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환상체험이 주님의 뜻인 줄 알고 방향을 서쪽으로 바꾸어서 배를 타고 유럽 마케도니아 지역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마케도니아 지역은 다른 곳에 비해서 미개한 지역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정통 유대인이었고 태어난 곳도 이스라엘 북쪽 다소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미개한 서쪽 땅을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서쪽으로 와달라는 환상을 보고나서 동양에서 서양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두번째 환상체험/방향전환이 되었습니다.

 

멕켄지 선교사가 소래마을에서 살다가 풍토병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 것처럼, 낯선 땅에서 낯선 음식과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미개한 땅으로 가는 것이 주님의 뜻인 줄 알고 그 환상체험에 순종하였습니다. 이 환상체험을 통해서 복음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덕분에 유럽이 복음을 통해서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만약 사도바울이 서쪽이 아니라 동쪽으로 갔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복음이 유럽을 거쳐서 미국/캐나다를 거쳐서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동아시아로 전해지지 않고 반대로 처음부터 이스라엘 땅에서 시작해서 동쪽으로 가서 인도를 거쳐서 중국을 거쳐서 한국 땅에 일찍 전해졌더라면 아시아의 역사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땅도 크게 보면 아시아 지역이니까, 복음이 아시아에서 시작되었으므로 아시아에서만 맴돌 것이 아니라 복음이 더 필요한 유럽 지역으로 건너가서 유럽을 변화시키고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럽/마케도니아로 건너간 사도바울은 네압볼리를 거쳐서 마케도니아에서 가장 큰 도시 빌립보에 도착하였고 안식일에 유대 동포들이 기도하는 곳에 가서 예수의 복음을 전했고 그곳에서 자색옷감 장수인 루디아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루디아는 유대인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안식일에 유대인들이 모이는 곳에서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옛날 로마사회에서 옷감을 물들여서 색깔있는 옷을 만드는 것은 고상한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냄새나는 물질을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그런 일은 노예 혹은 노예에서 풀려난 사람들이 담당하였습니다. 아마도 루디아는 노예에서 풀려난 사람으로서 옷감 만드는 재주가 좋았기 때문에 계속 이 일을 했을 것입니다. 루디아는 빌립보에 와서 복음을 전한 바울의 메시지를 받아들인 덕분에 유럽 최초의 기독교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루디아 덕분에 바울은 빌립보에 교회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바울을 후원하였고 바울이 가장 의지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빌립보서를 읽어보면 바울과 빌립보 교인들이 얼마나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한가지 중요한 영적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길을 열기도 하시고 막기도 하십니다. 우리는 여행을 가거나 인생계획을 세울 때 가장 효과적이고 빠르게 갈 수 있는 길을 계획합니다. 하지만 때때로 성령께서는 우리를 전혀 다른 길로 인도하시고 그 전혀 다른 길을 통해서 새로운 지역에서 새로운 만남을 갖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멕켄지 선교사와 사도바울처럼,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낯선 이웃을 방문하고 환영하며 하나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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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다섯번째 주일 / 5월 세번째 주일
부활절, 유대인과 헬라인이 친교를 나누며 
사도행전 11:1-9, 16-18

정해빈 목사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11장은 예수님의 부활/승천 이후 초대교회가 어떻게 발전했고, 어떤 어려움이 있었고, 또 어떻게 그 어려움을 극복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그대가 나를 세번 부인하였지만 아직도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이고 돌봐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부탁을 성실하게 이행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인들과 더 나아가서 이방인/헬라인들을 만나고 그들을 돌보았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사마리아 지역을 순회하던 베드로는 여성 지도자 다비다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욥바로 달려가서 성도들을 위로하고 다비다를 다시 살렸습니다. 다비다가 죽은 욥바 지역은 사마리아 지역에 속했습니다. 베드로가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사마리아 지역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더 나아가서 이방인/헬라인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가이사랴에 있는 로마군대의 백부장 고넬료를 만나서 그와 그의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10장 28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대 사람으로서 이방 사람과 사귀거나 가까이하는 일이 불법이라는 것은 여러분도 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사람을 속되다거나 부정하다거나 하지 말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전통적인 율법의 가르침에 의하면 유대인이 이방인과 사귀거나 이방인을 가까이하는 것은 불법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람을 함부로 속되거나 부정하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이 말씀을 듣고 성령을 받는 것을 보고 성령께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역사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고 돌보라고 하신 말씀은 단순히 유대인만 돌보라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명령대로 유대인 뿐 아니라, 사마리아인, 이방인/헬라인들을 가리지 않고 그들 모두를 만나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렇게 베드로가 사마리아 사람들과 이방인/헬라인들을 만난 후에 예루살렘 교회로 돌아오자 보수적인 유대인 신자들이 베드로에게 항의를 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왔을 때에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 ‘당신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은 사람이오’ 하고 그를 나무랐다.” (행11:2-3).

 

구약의 율법의 가르침에 따르면 유대인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을 만나서도 안 되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되는데 어째서 당신은 그들을 만났냐고 보수적인 예루살렘 유대인 신자들이 베드로에게 항의를 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들에게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했습니다. 욥바성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큰 보자기와 같은 큰 그릇이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그 그릇에는 땅 위에 네 발 짐승들과 들짐승들과 기어다니는 것들과 공중의 새들이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베드로야, 잡어 먹어라” 하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베드로가 보기에 큰 그릇 안에는 깨끗한 동물들과 부정한 동물들이 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속된 것이나 정결하지 않은 것을 먹은 일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자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 하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레위기 11장의 가르침에 의하면 토끼나 돼지처럼 굽이 갈라지지 않았거나 새김질을 하지 않는 동물은 먹어서는 안 되고 또 조개, 굴, 새우, 가재, 장어, 문어, 낙지, 오징어처럼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것은 먹어서는 안 됩니다. 옛날 유대인들은 조금이라도 이상하게 생기거나 경계가 확실하지 않은 것은 먹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도 유대인이기 때문에 그런 동물들을 먹을 수 없다고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환상을 통해서 사마리아 사람들과 이방인/헬라인들이 더러운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똑같이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환상을 체험했기 때문에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줄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자신이 환상을 체험한 것과 고넬료 같은 이방 사람들이 말씀을 받고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전하자 베드로에게 항의하였던 사람들이 잠잠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에게도 회개하여 생명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이야기만 읽으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문제가 다 해결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 중에는 베드로와 바울이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었습니다. 전통적인 고정관념을 넘어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다른 인종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친구가 되는 것은 오늘날에도 쉽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식생활도 다릅니다. 예를 들어서 다른 나라 음식을 잘 먹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상한 맛과 냄새 때문에 다른 나라 음식을 잘 먹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대부분 같은 민족끼리 모여서 삽니다. 다른 인종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그 사람을 통해서 내가 모르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나와 다르기 때문에 나와 다른 사람을 가까이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나와 다른 사람을 가까이 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2000년 전 선민이라고 생각한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보기에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이방인들을 만나는 것을 당연히 싫어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도 전해져야 한다는 것과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의 할례와 식사와 문화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오직 예수를 따르는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사람의 생각이 넓어지고 장벽과 차별이 무너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는 성질이 급하고 욕심이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한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면서 예수님이 글자 그대로 세상 권력을 잡는 구세주가 되면 자신도 권력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고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권력욕과 명예욕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의 환상체험을 통해서 인종의 차별을 깨트리고 앞장서서 헬라인과 이방인을 만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 실수도 하고 잘못도 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베드로가 모든 사람을 환영하는 아름다운 복음의 사람으로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신앙생활을 오래하면 오래할수록 모든 인류를 사랑하고 성품은 깊어지고 믿음은 넓어져야 한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하는 활동들을 헬라어로 표현하면 교육은 “디다케,” 봉사는 “디아코니아,” 사귐과 친교는 “코이노니아”가 됩니다. 그런데 “코이노니아”는 “코이노스(koinos)”에서 왔는데 “코이노스”는 베드로가 환상을 보았을 때 말한 것처럼 거룩하지 못하고 더럽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코이노스”가 사귐과 친교를 뜻하는 “코이노니아”가 되었습니다. 2000년 전 유대인들은 유대인과 헬라인, 남자와 여자, 주인과 종이 교회에서 모여서 성찬식을 나누고 음식을 나누는 것을 거룩하지 못하고 더럽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를 보면 보수적인 양반들은 양반들과 평민들이 한 자리에 앉아서 예배드리고 식사하는 것을 보며 마찬가지로 불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아름답고 거룩한 자리였습니다. 거룩하지 못하고 더럽다는 뜻을 가진 코이노스가 교회의 사귐과 친교를 가리키는 코이노니아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차별의 장벽을 허물고 함께 음식을 나누고 사귐을 나눌 때, 그 자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장 거룩한 자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진정한 코이노니아를 실천하는 따뜻하고 열린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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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네번째 주일 / 5월 두번째 주일
부활절, 베드로와 다비다와 교인들 
요한복음서 10:27-30, 사도행전 9:36 - 43

정해빈 목사

 

 

오늘 5월 둘째 주일은 어버이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본래 5월에는 Mother’s Day가 있고 6월에는 Father’s Day가 있지만 두 개를 합쳐서 오늘 어버이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성경에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자녀 된 이 여러분, 주 안에서 여러분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옳은 일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계명은 약속이 딸려 있는 첫째 계명입니다.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하신 약속입니다.” 에베소서 6장의 말씀입니다. 또 잠언서 23장 22절은 “너를 낳아 준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늙은 어머니를 업신여기지 말아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하실 때 어머니 마리아가 옆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리켜서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볼 때 예수님이 목수 일을 하면서, 또 공생애를 사시면서 어머니를 가까이 모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고난 받으실 때 가장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어머니 마리아와 제자 요한이 새로운 가족이 된 것처럼, 우리 교회가 서로 돌봄을 주고 서로 돌봄을 받는 영적으로 새로운 가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히브리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실 때 십계명의 4번째 계명으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말씀하셨고 이어서 5번째 계명으로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말씀하셨습니다. 1번부터 4번까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계명이고 5번부터 6번까지는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인데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의 첫번째 계명으로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멀리 있는 이웃을 사랑하기 전에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과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서로 붙어있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히브리 백성들에게 안식일에는 경제적인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생명의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안식일이 없다면 사람들은 일주일 내내 돈만 생각하면서 일할 것입니다. 안식일이 있기 때문에 잠시 우리의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자연을 산책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가정을 돌볼 수 있습니다. 안식일 계명 바로 다음에 나오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을 경제적인 기준으로 바라보지 말고 생명의 기준으로 바라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옛날 농경사회에서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연로하신 부모님은 더 이상 일을 할 수도 없고 돈을 벌어올 수도 없습니다. 경제적인 기준으로 보면 연로하신 부모님은 무능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생명의 기준으로 보면 나의 생명이 부모님을 통해서 왔기 때문에 부모님은 나의 생명의 근원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지킬 것과 부모님을 공경할 것을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주일에 묵상한 것처럼,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주님을 3번 배반한 베드로에게 똑같이 3번 “아직도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고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이고 돌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9장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탁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욥바”라는 해안가에 위치한 동네가 나옵니다. 이 동네에 초대교회가 생겨났고 다비다/도르가 라는 여제자가 착한 일과 구제사업을 많이 하다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신도들이 베드로가 옆동네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사람을 보내서 지체하지 말고 와 달라고 간청을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심부름꾼을 따라서 급히 욥바에 도착해보니 신도들이 다비다가 자신들을 위해서 만들어 준 속옷과 겉옷을 베드로에게 보여주며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을 바깥으로 내보낸 후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고 시신 쪽으로 몸을 돌려서 “다비다여, 일어나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다비다가 욥바에서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성실하게 목회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베드로도 다비다의 임종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비다와 베드로 모두, 예수님이 부탁하신 것처럼 양을 먹이고 돌보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에 다비다와 베드로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초대교회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다비다의 임종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와서 기도하였고 그녀에게 일어나라고 말했고 이어서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예수님이 어린 소녀를 향해서 “달리다쿰, 소녀야 일어나라” 말씀하신 것처럼, 베드로도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 주님의 능력을 받아서 다비다를 죽음에서 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가만히 읽어보면 다비다가 임종할 때의 모습이 성도님들이 임종할 때의 모습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님이 임종할 때가 가까워지면 가족들은 한 자리에 모이고 또 목회자를 부릅니다. 그러면 목회자는 베드로가 한 것처럼 지체하지 말고 성도님이 누워계신 곳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목회자는 임종을 앞둔 또는 이미 운명하신 고인을 향해서 기도를 하거나 찬송가를 부르며 임종예배를 드립니다. 사람이 운명할 때 마지막까지 살아있는 것이 청각이라고 합니다. 임종하는 사람은 말을 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지만 완전히 임종할 때까지 가족들와 목회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들이 고인을 향해서 감사의 말을 전하고 목회자가 기도를 하고 찬송가를 부르면 고인은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을 수 있습니다. 또한 베드로는 다비다의 손을 잡았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마지막 순간에 고인의 손을 잡아줄 때, 목회자가 고인의 손을 잡아줄 때, 임종하는 분은 가족들과 목회자의 사랑을 받으며, 자신의 인생이 복된 인생이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아름답고 편안하게 인생을 마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급히 달려왔고 다비다를 향해서 간절하게 기도하였고 다비다를 향해서 다시 일어서라고 말했고 다비다의 손을 잡아 주었습니다. 베드로가 다비다를 향해서 최선을 다해서 목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욥바 주변 지역을 담당하는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요청에 응답하며 최선을 다했고 욥바 지역에서 가난한 성도들을 돌보았던 다비다는 임종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을 위해 속옷과 겉옷을 만들어 주며 최선을 다해습니다. 그렇게 다비다가 교인들을 돌보아주었기 때문에 교인들은 베드로에게 다비다가 만들어 준 속옷과 겉옷을 보여주며 슬피 울 수 있었습니다.

 

인도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며 평생을 살았던 테레사 수녀가 어느 날 정신병에 걸린 여성 환자를 복도에서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수녀들은 이 환자가 테레사에게 덤벼들어서 해를 입히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테레사는 키도 작았고 몸집도 작았습니다. 그래서 수녀들은 이 환자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몸을 꽉 붙잡았습니다. 하지만 테레사는 정신병에 걸린 그 여성 환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다가가서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인사를 했습니다. 테레사가 그의 어깨에 연약한 손을 얹자 그 사람도 순한 양처럼 조용해지더니 미소를 지었습니다. 키도 작고 몸집도 작은 테레사의 따뜻한 미소와 따뜻한 손이 정신병에 걸린 환자의 몸과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나오는 다비다도 마더 테레사처럼 자신을 돌보지 않고 가난한 성도들을 정성으로 돌보았을 것입니다. 다비다의 따뜻한 사랑이 성도들에게 전해지게 되었고 그 사랑이 다시 성도들을 통해서 베드로에게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다비다 같은 성도가 있는 교회는 행복한 교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우리 부모님들이 다비다와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테레사와 다비다 처럼 몸도 연약하고 힘도 없습니다. 오랜 세월 고생하시다보니 허리는 굽어지고 기력은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부모님들의 헌신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살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들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우리 교회가 영적인 가정이 되어서 서로 돌보고 서로 돌봄을 받는 복된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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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세번째 주일 / 5월 첫번째 주일
부활절, 갈릴리에서의 부활체험 
요한복음서 21:9-14, 17-19

정해빈 목사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사람들을 식탁으로 초대하시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 가난한 사람들과 소위 죄인이라고 멸시받는 사람들을 환영하시고 그들과 함께 식탁을 자주 나누셨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식사하시다 보니 예수님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먹기를 탐하는 자요 포도주를 즐기는 자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식사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기쁨을 미리 보여주는 식탁교제(table fellowship)였습니다. 우리가 주일예배를 드릴 때 말씀을 듣고 성찬식을 나누는 것처럼 예수님이 베푸신 식탁교제는 함께 모여서 하나님나라의 말씀을 듣고 함께 음식을 나누는 거룩한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카리켜서 “조건없는 식탁교제” 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가르치시고 가난한 자들을 먹이시고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나라를 가르치시고 가난한 자들을 먹이시고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시는 것이 식사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건없는 식탁교제”의 자리에서 하나님나라의 말씀이 선포되었고 병자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신학자들이 예수님의 공생애를 “조건없는 식탁교제” 라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조건없는 식탁교제에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시고 가난한 자를 먹이시고 병자를 치료하신 3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식탁교제는 하나님나라의 기쁨과 풍족함과 치유를 미리 경험하는 곳이었습니다.  

 

옛날 사회는 계급사회, 신분사회였기 때문에 식사하는 자리가 다 정해져 있었습니다. 주로 자기와 신분이 같은 사람들하고만 식사를 즐겼습니다. 높은 자리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있었고 낮은 자리에서 음식을 시중드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아니하고 사람들을 식탁에 초대하심으로서 하나님나라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차별없는 환영과 식사가 하나님나라의 시작임을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나라의 식탁교제는 기독교신앙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다른 종교들을 보면 가난한 자들을 식탁에 초대하고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그들의 병을 고쳐주는 장면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조건없는 식탁교제"의 자리에서 실천하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육체적, 정신적 온전함을 추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오천 명의 군중들을 먹이셨고 성목요일에는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에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제자들과 함께 식탁을 나누셨습니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성목요일에 하신 만찬이 최후의 만찬이 아니라 예수님의 식사가 부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신 것은 그들을 다시 일으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어부 일을 하고 있을 때, 주님을 버린 것 때문에 상처와 트라우마로 낙심하고 있을 때, 주님을 따라다녔을 때의 소명과 열정을 다 잃어버렸을 때, 주님께서는 그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을 먹이시고 위로하신 후에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들을 먼저 먹이신 후에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아직 부활을 깨닫지 못하고 지쳐있는 제자들을 일으키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제자들의 부활체험이 단 한 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곳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세번째로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고 오늘 말씀은 기록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부활의 주님께서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제자들에게는 예루살렘에서 나타나셨고 어떤 제자들에게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나타나셨고 어떤 제자들에게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나타나셨습니다. 특히 오늘 말씀 요한복음서 21장은 갈릴리에서 고기를 낚고 있는 7명의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셨다고 기록을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좀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갈릴리 어부들은 하나님나라 운동을 하시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큰 감동을 받고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제자들 중에는 종교개혁운동, 신앙운동, 심령회복운동을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다닌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을을 돌아다니시면서 하나님나라를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상한 심령을 회복시키시는 것을 보고 영적으로 은혜 받아서 예수님을 따라다닌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 제자들 중에는 사회개혁운동을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다닌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에 기록된 안식년과 안식일과 희년의 정신을 가르치시고 약자보호법과 빚을 탕감해주자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아서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나선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 제자들 중에는 헤롯과 로마제국을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 독립운동, 정치운동을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나선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나선 이유가 종교개혁운동이든, 사회개혁운동이든, 정치적인 운동이든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감동을 받고 제자가 되어서 예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이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서 어부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죄책감이 남아 있었습니다. 물고기들도 자신들의 마음을 아는지, 아무리 그물을 내려도 물고기가 잡히지 않습니다. 문득 베드로는 예수님을 처음 만난 날, 물고기를 잡지 못하다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서 물고기를 많이 잡았던 그 때를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문득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이 자신에게 한 번 더 나타나셔서 이번에는 오른쪽에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방향만 바꾸어서 그물을 내렸더니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지금 자신에게 나타나셨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물속에 뛰어들어서 예수님이 어디에 계신지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이것은 신비로운 체험이었습니다. 육신의 눈으로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물이 찢어지도록 물고기를 잡을 때, 바닷가에서 모여서 생선을 구우며 식사할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신들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제자들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았다면 그렇게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무언가 말할 수 없는 예수님의 현존이 느껴졌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위로와 당부의 말씀을 하고 계시다는 것이 충분히 느껴졌습니다. 바닷가에서 먹는 아침식사 자리가 단순한 아침식사 자리가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들을 찾아오셔서 다시 기운을 내서 일어서라고 자신들을 먹이시는 자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에 항상 하셨던 바로 그 식탁교제가 바로 지금 이 순간 재현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목소리가 그들의 마음에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너희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진실로! 아직도! 너희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을 합니다. “주님, 저희들은 아가페 같은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할 자신이 없습니다. 하지만 친구 같은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여라, 내 양을 돌보아라.”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식탁교제를 했던 것처럼, 내 양들을 돌보고 먹이고 치료해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양을 돌보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제자들처럼 스승을 버릴 때도 있고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먹이시고 우리를 다시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연약한 이웃과 가까운 이웃을 먹이고 돌보고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처럼 우리는 젊었을 때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지만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돌봄을 주고 돌봄을 받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주님의 음성을 기억하며 다시 일어서서 서로 먹이고 서로 보살피고 서로 돌보는 사명을 감당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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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두번째 주일 / 4월 네번째 주일
부활절, 여러분에게 평화가 있기를 
요한복음서 20:19-23, 사도행전 5:27-32

정해빈 목사

 

 

지난 주일부터 부활절 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체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세상의 잘못된 권세자들에 의해서 죄 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부활하셔서 나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러한 강렬한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교회가 생겨났고 기독교 신앙이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부활체험이 없었더라면 예수님 사건은 그동안 역사에 많이 나타났던 의인의 죽음 중의 하나로 기억되었을 것입니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는 성경은 기독교인들이 쓴 책이니까 부활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부활이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 외에 부활에 대해서 쓴 기록은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 외에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이 부활에 대해서 쓴 기록들이 있습니다. 유대인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유대 고대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처음에 그를 사랑하게 된 사람들은 그에 대한 애정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으며 그리스도인이라는 종족은 아직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직접적으로 부활이라는 말을 쓰지는 않았지만 예수의 죽음 이후에도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에 대한 애정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리스도인들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또한 2세기 초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라고 불리우는 예수가 총독 빌라도에게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이 미신은 잠깐 동안 억눌려 있었지만 나중에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미신은 유대 지역 뿐만 아니라 세상의 온갖 끔찍하고 부끄러운 것들이 모이고 유행하는 로마에까지 번져 나갔다.”

 

유세푸스와 마찬가지로 타키투스도 예수의 죽음 이후 이 신앙/미신이 로마에까지 번져 갔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보통 아무리 위대한 스승이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스승이 죽으면 제자들이 흩어지거나 시간이 지나면서 스승의 영향력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더 강하게 세상으로 퍼져갔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무언가 강렬한 신앙체험이 있지 않고서는 이런 현상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실 때 도망갔던 제자들이 부활을 체험하고 나서는 순교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강렬한 부활체험이 그들을 변화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활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아주 쉬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하지만 죽음이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뜨거운 사랑이 죽음보다 더 강합니다. 뜨거운 사랑이 죽음을 넘어서 계속 역사합니다. 뜨거운 사랑이 부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뜨겁게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죽었지만 그 사람이 꿈에도 나타날 수 있고 환상을 통해서도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들 중에는 사랑하는 부모님이나 배우자가 죽었지만 그들이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 계속 나타나는 것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계속 나타나셨습니다. 한 명에게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모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러한 경험이 쌓이고 쌓여서 부활신앙이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다는 것을 제자들이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부활의 첫열매로서 테이프를 끊었기 때문에 우리들도 주님을 따라서 부활할 것을 제자들은 믿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20장 말씀을 보면 제자들이 세상이 무서워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인사하신 장면이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이 무서워 숨어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였으니 세상을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두번째로 “성령을 받아라”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라는 헬라어 말은 성찬식 할 때 “이 빵은 나의 몸이니 받아먹어라“ 할 때의 “먹어라” 와 같은 단어입니다. 성령을 받으라는 말은 나의 몸을 받아먹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받아먹으라는 말입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내 몸 안으로 모시라는 말입니다. 심장이 안 좋아 죽게 된 사람이 건강한 사람의 심장을 이식받으면 그 사람은 다시 살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몸 안에 건강한 사람의 심장이 뛰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성령을 받아라, 나를 받아먹어라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심장이 내 몸 안에서 뛰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내 안에 오셔서 죽어가는 나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내 힘만으로는 이 거친 세상을 살기가 힘들지만 부활하신 예수께서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있으므로 나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나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내 안에 부활하신 주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어서 세번째로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용서해 주라는 말씀을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죄에 붙잡혀 있는 사람들을 죄에서 벗어나게 해 주라는 말씀입니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들, 이 세상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을 품어주고 치료해 주라는 말씀입니다. 부활 백성이 이 세상을 위로하고 용서하면 이 세상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하지 않으면 이 세상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람만이 이 세상을 용서하고 치료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의 죄를 씻겨주고 용서해 주면 이 세상은 변화될 것이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세상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이 변하느냐 변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 부활 백성에게 달려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인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오늘날 현대인들이 3가지의 불안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로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불안을 느끼고, 둘째로 삶에 대한 공허함과 무의미 때문에 불안을 느끼고, 셋째로 죄책감 때문에 불안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오늘날 현대인들이 겉으로는 잘 사는 것 같으면서도 왜 많은 사람들이 불안을 느끼며 사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가장 무서운 것이 죽음입니다. 생명을 위협당하면 사람은 제일 큰 불안을 느낍니다. 또 내가 시간이 갈수록 늙어간다는 것을 깨달을 때 사람은 불안을 느낍니다. 죽음과 연약함에서 오는 불안이 첫번째 불안입니다. 그 다음으로 삶에 대한 의욕이 없고 삶이 지루하다고 느낄 때, 내 삶이 가치가 없다고 느낄 때, 사람은 불안을 느낍니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후회하고 죄책감을 느끼고 양심의 가책을 받을 때 불안을 느낍니다. 폴 틸리히는 바로 이 3가지의 불안에서 해방되는 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요 복음이요 부활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점점 늙어가고 죽음을 맞이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죽음을 정복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삶의 무의미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해야 할 사명이 있는 사람은 세상이 지루하지 않습니다. 또 우리는 죄책감과 후회와 양심의 가책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 씻어주시고 서로 용서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성령을 받으십시오. 나의 심장을 가슴에 품고 세상에 나아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사탄의 권세에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십시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000년 전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죽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물리쳤던 것처럼, 제자들이 예수의 심장을 가슴에 품고 부활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했던 것처럼, 제자들이 과거의 죄책감에서 벗어나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았던 것처럼, 우리들도 죽음과 무의미와 죄책감으로 인해 불안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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