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다섯번째 주일 / 2월 첫번째 주일

이사야서 6:5-8, 누가복음서 5:4-11

주현절, 깊은 곳으로 가십시오

정해빈 목사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이라는 미국 여의사가 있었습니다. 1865년 뉴욕에서 태어난 로제타는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여성들에게 의대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퀘이커 신도들은 이것이 옳지 않다고 여겨서 세계 최초로 펜실베니아 여자의과대학을 세웠고 덕분에 로제타는 의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시아에 의사가 부족하다는 말을 들은 로제타는 의료 선교사가 되기로 다짐을 하고 1890년 25세의 나이에 조선 땅을 밟았습니다. 로제타는 약혼자였던 캐나다 온타리오 출신 의사 윌리엄 홀과 조선 땅에서 결혼하였고 결혼하자마자 남편 윌리엄은 평양에서 진료하였고 로제타는 서울에서 진료하였습니다. 불행하게도 남편은 청일전쟁 부상자들을 치료하다가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서 결혼한 지 2년 만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혼자 남은 로제타는 43년간 조선에서 활동하면서 조선 최초의 여자의학전문학교와 여성병원을 세우고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어느 날 로제타의 통역을 도와주던 선교사가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가난한 선비의 딸인 김점동이라는 여학생이 통역을 하였고 그때부터 로제타는 김점동을 딸처럼 여기며 데리고 다녔습니다. 로제타는 잠시 미국으로 귀국했을 때 김점동을 미국으로 데리고 가서 의과대학에 입학을 시켰습니다. 김점동은 남편 성을 따라서 이름을 박에스더로 개명하고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한인으로는 서재필 다음 두번째, 한인 여성으로는 최초의 의사가 되었습니다. 박에스더는 의사 자격증을 따자마자 조선으로 돌아가서 서울과 평양을 오가면서 매년 3천 건 이상을 진료했습니다. 당시 조선 여성들은 남자 의사를 만나는 것을 부끄러워했습니다. 김점동이 의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많은 여성들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주술이나 부적에 의존하던 여성들에게 위생교육을 시켰습니다. 하지만 박에스더는 너무 무리를 해서 그런지 10년 동안 진료를 하다가 결핵으로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로제타는 젊은 시절에는 남편을 잃었고 나중에는 딸 같은 박에스더을 잃었습니다.

 

박에스더와 로제타의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로제타는 남편이 죽기 전에 조선에서 셔우드 홀이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셔우드는 조선에서 태어난 첫번째 서양 사람이 되었습니다. 셔우드는 아버지가 살았던 캐나다 토론토로 유학와서 토론토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된 후에 자신이 태어났고 어머니가 있는 조선으로 돌아가서 어머니와 함께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셔우드는 박에스더를 누나처럼 따랐는데 박에스더가 조선에서 10년간 진료하다가 결핵으로 죽은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래서 셔우드는 조선에 결핵병원을 세웠고 결핵퇴치비용을 모금하기 위해서 우표처럼 생긴 크리스마스 실(christmas seal)을 판매했습니다. 아버지 윌리엄, 어머니 로제타, 아들 셔우드, 박에스더 의사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감동을 줍니다. 그들은 평생 고통받는 조선 백성들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사람을 살리는 어부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즘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입니다. 2020년부터 코로나 방역을 지휘하고 있는데 3년째 일을 하다보니 머리가 하얗게 되었습니다. 100년 전에 박에스더 의사가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정은경 의사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덕분에 한국이 코로나에 잘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4개의 복음서가 모두 기록할 만큼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어느 날 아침 갈릴리 호숫가에 계신 예수님은 사람들이 몰려들자 시몬의 배에 오르셔서 배 위에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말씀을 마치신 후에 그물을 씻고 있는 시몬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어부였기 때문에 고기 잡는 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고기를 잡으려면 적당히 얕은 곳으로 가야 합니다. 너무 깊은 곳에는 고기가 살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메시지입니다. 풍성한 인생, 풍성한 열매를 맺으려면 너의 인생의 그물을 깊은 곳에 내리라는 말씀입니다. 찬송가 302장을 보면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왜 너 인생은 언제나 거기서 저 큰 바다 물결 보고 그 밑 모르는 깊은 바다 속을 한번 헤아려 안 보나.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보고 맘이 조려서 못 가네”

 

얕은 물가에서 사소한 일에 시간을 보내지 말고 더 넓고 깊은 세계로 나가라는 말입니다. 영어 표현 중에 Red Ocean, Blue Ocea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붉은 바다는 서로가 싸우고 경쟁하는 좁은 세상을 가리키고 푸른 바다는 서로 싸울 필요가 없는 넓은 세상을 가리킵니다. 사소한 일로 다투는 붉은 바다, 좁은 바다에서 살지 말고 넓고 깊은 푸른 바다에서 살라는 말입니다.

 

언젠가 TV를 보다가 어느 시장에서 음식을 잘 만드는 가게가 소문이 나니까 바로 옆에 똑같은 음식을 파는 가게가 문을 열어서 두 가게가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쪽 집이 A를 잘 만들고 저쪽 집이 B를 잘 만들면 손님들이 A도 사고 B도 살 것이고 그러면 모두가 행복할 것입니다. 남들 잘하는 것에 뛰어들어서 제 살 깎아먹기 경쟁을 하면 그곳이 붉은 바다이고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개발하고 개척하면 그곳이 푸른 바다입니다. 애플 회사를 세운 스티브 잡스가 회사를 처음 시작할 때 펩시콜라 사장에게 우리 회사로 와서 일하지 않겠냐고 말했더니 사장이 거절을 했습니다. 그러자 스티브 잡스가 “남은 인생 설탕물을 팔면서 살 겁니까? 아니면 나와 함께 세상을 바꾸실 겁니까?” 이렇게 말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펩시콜라 사장 입장에서는 돈과 명성을 얻었으니 회사를 옮길 이유가 없었습니다. 콜라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스티브 잡스의 말을 듣고 신생회사로 옮겼습니다. 아마도 그 사람은 남은 인생 좀 더 의미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말씀하셨는데 여기 나오는 “낚는다”는 말은 헬라어로 “조그레오”를 가리킵니다. 이 말은 “사람들을 위험으로부터 구하여 살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제부터는 사람을 죽음에서 건지는 어부, 사람을 살리는 어부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 모두가 박에스더처럼 사람을 살리는 유명한 의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꼭 유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얕은 물가에서 사소한 일에 신경쓰며 살지 말고 깊은 세계로 들어가서 주님을 만나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어부들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이전에 관심 가졌던 사소한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인생을 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주님 앞에 엎드려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이사야서 6장에서 베드로와 똑같이 말을 했습니다.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는 베드로와 이사야와 똑같은 감정을 갖게 됩니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실패자입니다. 나는 부정한 사람입니다. 나는 그냥 이대로 살겠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깊이있고 의미있는 인생을 살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고 여러번 실패했고 세상적으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소명을 주십니다. 우리 인생이 헛된 것에 시간을 낭비하는 인생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고 이웃을 살리는 깊은 인생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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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네번째 주일 / 1월 다섯번째 주일

예레미야서 1:5-10, 누가복음서 4:24-30

주현절, 예언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정해빈 목사

 

 

 

1300년대 중세시대에 흑사병(Black Death)으로 인해 유럽인구의 절반이 죽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병에 걸리면 피부가 검게 변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이 병을 흑사병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병이 검은 고양이와 관련이 있다고 말을 합니다. 당시 카톨릭 교회는 검은 고양이가 악마의 동물이라고 생각해서 보이는 대로 다 죽였습니다. 검은 고양이가 보기에 좋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검은 고양이를 가까이하는 여자를 마녀라고 생각해서 화형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고양이들이 사라지자 쥐들이 늘어났고 쥐 안에 있는 벼룩이 병균을 사람에게 옮기게 되었습니다. 흑사병은 치사율이 95%에 달할 정도로 치명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 병의 원인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 병을 퍼트린다고 생각해서 그들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병을 없애기 위해서 교회에 가서 기도하거나 무당을 찾아가서 부적을 붙이거나 굿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중세시대에 잘못된 종교와 미신과 편견이 얼마나 어리석은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교회가 흑사병의 원인을 제공했고 무당들이 병을 더 악화시켰습니다. 의학지식이 없는 종교나 무당이 사회를 망칩니다. 오늘날에도 코로나 백신을 맞으면 안된다고 주장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있는데 그렇게 주장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코로나에 걸려서 죽는 일도 있었습니다. 잘못된 종교와 잘못된 무당을 멀리해야 합니다. 흑사병으로 인해서 종교가 지배하던 중세시대가 무너지고 과학과 인문학을 중요하게 여기는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습니다. 흑사병은 1300년대부터 300년 이상 지속되었습니다. 1500년대 미래 예언가로 알려진 노스트라다무스는 청결하지 못한 위생이 흑사병의 원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물을 끓여 마시게 하였고 상수도와 하수도를 분리하게 하였고 길거리에 있는 시체들을 땅 속으로 매장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위생관리를 하게 되자 차츰 흑사병이 물러가게 되었습니다. 미신과 편견을 물리치고 원인을 분석하고 의학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었습니다.

 

구약성경 레위기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히브리 백성들에게 거룩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분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인류가 미신을 따르지 않고 레위기의 말씀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위생관리를 철저히 하였더라면 흑사병과 같은 재앙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흑사병은 종교개혁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집에 불이 났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라며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물에 빠졌을 때 수영하지 말고 하나님의 심판이라며 익사해야 하는가? 다리가 부러졌을 때 의사의 도움을 받지 말고 '이건 하나님의 심판이야. 저절로 나을 때까지 참고 버텨야 해'라고 해야 하는가? 나는 하나님께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를 지켜달라고 간구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소독하여 공기를 정화할 것이고 약을 지어 먹을 것이다. 나는 내가 꼭 가야 할 장소나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아니라면 피하여 나와 이웃 간의 감염을 예방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웃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나는 누구든 어떤 곳이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갈 것이다."

 

미신과 편견을 멀리하고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위생관리를 철저히 하고 이웃을 돌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누가복음서 4장은 예수님이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배척받으시는 모습을 기록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묵상한 것처럼 예수님은 세례받으시고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후에 고향 나사렛에 오셔서 취임설교를 하셨습니다. 이제부터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고 희년의 기쁜 소식을 전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고향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요셉의 아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된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고향 사람들 중에는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온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회당 지도자들도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마음속으로 예수님의 취임설교가 너무 과격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복음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갈릴리 지도를 보면 예수님이 자란 나사렛은 농촌지역에 속해 있고 가버나움은 호숫가에 속해 있습니다. 가버나움은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헬라인들도 만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유대인과 헬라인을 만날 수 있고 농부와 어부를 만날 수 있고 배를 타고 이동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가버나움을 공생애 장소로 선정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하나님나라를 가르치시고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가버나움에 사는 유대인/헬라인들은 예수님을 환영하고 말씀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고향 나사렛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해안가에 위치한 가버나움이 개방적인 곳이었다면 오래된 나사렛 마을은 보수적인 곳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엘리야와 엘리사 예언자의 예를 들어서 때로는 이방인들이 유대인들보다 더 개방적이고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가 아합과 이세벨을 피해서 시돈으로 도망을 갔을 때 마침 3년 6개월 동안 기근이 들었습니다. 시돈에 사는 사르밧 과부는 멀리선 온 엘리야에게 물을 주고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을 가지고 엘리야를 대접해 주었습니다. 또 시리아의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의 지시를 순종하였기 때문에 나병에서 고침받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때로는 이방인들이 이웃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우월의식과 배타주의와 미신과 편견을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유대인이 이방인보다 더 우월하다는 편견, 요셉의 아들이 우리를 가르친다고 생각하는 편견을 버리고 새로운 말씀과 새로운 이웃을 환영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우월의식과 편견은 참사랑을 방해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떤 마을은 외지인을 환영하는 곳도 있지만 어떤 마을은 텃새가 너무 심해서 외지인이 정착하지 못하는 곳도 있습니다. 인종에 대한 편견과 우월의식과 잘못된 지식을 버리고 이웃을 환영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예레미야서 1장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부르시는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예레미야가 말도 할 줄 모르고 나이도 어리다고 말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너를 누구에게로 보내든지 너는 그에게로 가고 내가 너에게 무슨 명을 내리든지 너는 그대로 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남유다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남유다가 망할 것이라고 예언하였고 이 때문에 같은 동포들로부터 많은 모욕과 학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예레미야가 동포들로부터 학대받는 것을 생각하시고 예언자가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예언자는 시대를 앞서가서 불편한 진리를 말해야 하기 때문에 때로는 미움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예언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인류는 무지와 편견과 미신에서 벗어나 앞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예언자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노예제도가 폐지되었고 여성의 인권이 신장되었습니다. 인류는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똑같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남성과 여성을 똑같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인류에게로 확대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도 사랑하시고 몸이 아픈 사람도 사랑하시고 성적 소수자도 사랑하시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잘못된 지식, 잘못된 편견, 잘못된 우상을 버리고 이웃을 환영하는 복된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흑사병처럼 잘못된 편견과 지식으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종교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는 복된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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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세번째 주일 / 1월 네번째 주일

누가복음서 4:14-21, 고린도전서 12:12-20

주현절, 토지공개념과 희년

정해빈 목사

 

 

토지공개념(土地公槪念, public concept of land ownership)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토지는 본래 우리들 모두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개인이 지나치게 토지를 많이 소유하면 안되고 가능하면 공공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는 개념이 토지공개념입니다. 그래서 개인이 토지를 많이 소유하면 무거운 세금을 내야 합니다. 그린벨트, 도시공원, 공공임대주택 같은 정책들이 토지공개념에 속합니다.1800년대에 태어난 미국의 경제학자인 헨리 조지(Henry George)라는 사람이 토지공개념을 처음 주장하였습니다. 헨리 조지는 급진적인 사람이 아니라 합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1800년대 공산주의자들은 땅과 자본 모두를 개인이 소유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헨리 조지는 토지와 자본을 구분해서, 자본은 개인재산이니까 국가가 간섭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토지는 다릅니다. 토지는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땅을 소유한 사람은 재산의 일부를 사회를 위해서 공헌해야 합니다. 토지공개념이 없으면 사회는 양극화가 심해질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매일 힘들게 일해서 먹고 사는데 어떤 사람은 땅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부를 쌓는다면 일해서 먹고 사는 사람은 일할 의욕을 잃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먹고 살기 위해서 건물주가 되고 싶어 합니다. 토지는 늘어날 수가 없기 때문에 인구가 많아지면 가치가 계속 올라갑니다. 그러다보면 토지를 소유한 사람은 엄청난 부를 쌓게 될 것이고 사회의 빈부격차는 더 커질 것입니다. 헨리 조지는 국가가 개인의 소득에 대해서 세금을 매기는 것처럼, 토지에 대해서 반드시 세금을 매겨서 토지가 지나치게 개인재산의 증식수단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되고 나서 북한정부는 지주들이 가지고 있던 땅을 국가가 소유하고 농민들에게는 경작권만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남한정부는 농민들에게 경작권과 소유권을 모두 다 주었습니다. 연간 소출의 30%를 5년간 지주에게 내면 농민은 자신이 경작하는 땅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대부분의 농민들이 소작인이었기 때문에 땅을 소유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5년이 지나면 농민들은 땅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생산이 늘어나고 중산층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소유권을 주지 않고 경작권만을 주는 정책보다 소유권과 경작권을 모두 주는 정책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 지을수록 그 소득을 자신이 가질 수 있으니까 농민들이 자기 땅에서 더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토지공개념이 있어야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토지를 통해서 얻어진 이익의 일부는 모두를 위해서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땅은 햇빛과 공기와 물과 같습니다. 햇빛과 공기와 물과 땅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위해서 만들어 주신 선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을 통해서 개인이 지나치게 사사로운 이익을 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토지공개념을 말씀드린 이유는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4장이 토지공개념과 같은 원리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시험을 이기신 후에 갈릴리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서 61장을 읽으시고 이 말씀에 근거해서 취임설교를 하셨습니다. 대통령이나 수상의 취임연설을 들어보면 그들이 자신의 임기동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취임설교를 들어보면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 무엇을 하시려고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제 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할 것입니다.”

 

가난하고 억눌리고 아픈 사람에게 기쁨과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가복음 61장 2절,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이 부분은 읽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바로 세우고 사람과 세상을 치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복수하겠다는 이사야의 글을 읽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기독교 신앙이 얼마나 역사적이고 정의롭고 자비로운지, 개인을 향해서는 사랑이 풍성하고 사회를 향해서는 개혁적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기독교 신앙은 처음부터 정의와 자유와 해방의 신앙이었고 개혁적인 신앙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기독교는 정의와 자유와 해방의 신앙이 되지 못하고 있고 개혁적인 신앙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개혁적인 신앙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대형교회들과 유명한 목회자들이 권력을 추구하였고 돈의 노예가 되었고 교회를 자식에게 세습하였고 윤리적이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렇게 된 것은 한국교회가 예수님의 취임설교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이 예수님의 취임설교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누가복음 4장 18절을 설교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예수님의 삶과 말씀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오늘 말씀을 신앙의 좌우명으로 삼고 묵상하고 실천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사람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4장 19절에서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셔서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나오는 “은혜의 해”는 희년을 가리키는데 이 희년이 오늘날의 토지공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이 발전해서 안식년이 되었고 안식년이 발전해서 희년이 되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사람과 동물이 휴식을 취해야 하고 7년째 되는 안식년에는 땅이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7년이 일곱 번 지나서 50년째가 되면 다른 사람에게서 샀던 땅을 본래 주인에게로 되돌려 주어야 합니다. 히브리 백성들은 7년째 되는 안식년에 땅을 쉬게 하고 50년째 되는 희년에 땅을 본래 주인에게 되돌려줌으로서 빈부격차를 막고 토지공개념을 실천하였습니다. 토지공개념이 수천 년 전에 이미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백성들이 이삭을 주울 수 있도록 밭의 네 귀퉁이를 남겨두라고 말씀하셨고 추수할 때 밭에 떨어진 이삭을 그들을 위해 남겨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히브리 백성들은 희년을 지키면서 땅을 보호하고 이웃이 너무 가난해지지 않도록 보호하면서 오랫동안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해 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갈릴리에서는 희년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로마제국이 쳐들어와서 농민들을 수탈하고 그 다음에는 헤롯왕이 농민들을 억압하고 그 다음에는 성전 관리들이 세금을 거두어 갑니다. 이렇게 삼중으로 고통받다 보니 마을과 공동체는 무너졌고 희년의 말씀은 사라졌습니다. 예수께서는 갈릴리에 가셔서 희년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무너진 마을과 공동체를 다시 살리고 무너진 희년의 말씀을 다시 살리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공생애, 하나님나라 사역이 개인을 살리고 사회를 살리고 자연을 살리는 아름다운 발걸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인류학자가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을 찾아가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나무에 매달아놓고 아이들에게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이 먹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인류학자가 “시작” 하고 외치자 아이들이 모두 함께 손을 잡고 가서 나무에 매달린 음식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인류학자가 일등이 되면 혼자 먹을 수 있는데 왜 함께 가느냐고 묻자 아이들이 “우분투”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우분투”는 “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다(I am because we are)”는 뜻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가 있는 것처럼, 우리들 모두가 한 몸이신 그리스도의 지체요, 작은 지체일수록 더 소중하다고 말했습니다. 눈과 입과 코와 귀는 크기는 작지만 가장 소중한 지체입니다. 마찬가지로 작은 지체들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공동체는 건강한 공동체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의도하지 않게 학교와 가정과 직장에서 코로나에 감염되어 고통받는 분들이 있습니다. 감염이 되면 육체도 고통스럽지만 왠지 죄인이 될 것 같아 마음도 고통스럽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따뜻하게 위로하고 작은 지체를 더 소중히 여겨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취임설교로 선포하신 말씀을 묵상하면서 선착순이 아니라 서로를 배려하고 소중하게 여기며 희년정신을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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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두번째 주일 / 1월 세번째 주일

요한복음서 2:6-11, 고린도전서 12:7-11

주현절, 슬픔을 기쁨으로 채워주소서

정해빈 목사

 

캐나다 인구의 1/5에 해당하는 대략 7백만 명의 캐나다인들이 정신건강과 관련된 고통을 겪은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정신적인 스트레스, 불안, 우울증, 공항장애, 수면장애 등이 다 정신건강에 해당합니다. 요즘처럼 날씨는 춥고 해는 짧고 거기에 더해서 코로나로 인해서 사회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정신건강과 관련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났습니다. 사람은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해가 길고 날씨가 따뜻하면 사람의 기분이 좋아지지만 하지만 요즘처럼 날씨가 춥고 해가 짧으면 사람의 기분이 좋아질 수가 없습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친구를 만날 수도 없고 같이 모여서 운동을 할 수도 없고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도 없습니다. 요즘 같은 상황에서는 평소에 건강한 사람도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우리는 1년 중에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정신건강을 치료받으려면 가정의를 거쳐서 정신과 전문의를 만나야 하는데 전문의를 만나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립니다. 그래서 대부분 전문의를 만나지 못하고 가정의가 써주는 신경안정제를 먹는 것으로 해결하기도 합니다. 정신적인 고통이 너무 심각하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전문의를 만나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정신과 치료는 의료보험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힘든 일을 만났거나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지금 당장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심리상담을 받아야 하는데 심리상담/심리치료는 의료보험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돈을 내야 합니다. 보통 1시간에 150불을 내야 하기 때문에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보험혜택을 받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일반적인 사람들은 심리상담을 받기가 쉽지 않습니다. 전문의를 만나는 것은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심리상담/심리치료는 내가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제 때에 정신질병을 치료받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때를 놓치다 보면 정신질병은 더욱 깊어지게 됩니다.

 

메간 롤프(Megan Rolfe) 청년은 대학생 시절에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시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알버타주 로키산맥 근처에 있는 병원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산을 너무 좋아해서 등산을 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메간은 정신과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을 끊고 혼자서 등산을 다녔습니다. 약을 끊은 것이 첫번째 실수였고 혼자서 등산을 간 것이 두번째 실수였습니다. 어느 날 등산을 하다가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고 정신적인 쇼크가 와서 언덕에서 굴러 떨어지게 되었고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 했습니다. 다행히 정신을 차려서 산 밑으로 내려온 메간은 부모의 도움을 받아서 돈을 내고 정신상담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2018년 캐나다정신건강협회(MHCC, The Mental Health Commission of Canada)가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전체 인구의 절반 정도가 최소 1가지 이상의 정신적인 질병을 겪은 적이 있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정신적인 질병이 이만큼 심각한데 의료혜택은 많이 부족합니다. 심리상담/심리치료도 의료보험에 포함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을 것입니다. 아마 주정부입장에서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니까 그렇게까지 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정신적인 스트레스나 질병은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이 너무나 복잡하고 경쟁이 심하다 보니 누구나 이런 스트레스와 질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겠지만 동시에 가족/교회/공동체/지역사회가 서로를 돌보는 역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요한복음 2장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나서 첫번째로 행한 가나의 기적을 기록했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이 행하신 첫번째 기적은 거룩한 성전이나 회당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지극히 일상적인 장소인 결혼식장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우리의 일상생활을 축복하고 우리의 일상생활에 기쁨을 주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예수의 가족과 제자들이 혼인잔치에 참석했는데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이 사실을 제일먼저 알아차린 어머니는 안타까운 나머지 예수님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예수님은 나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을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소명을 주시기 전까지는 기적을 행할 수 없다고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지금 이 순간 그들을 돕는 것이 주의 뜻인지 아니면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공공장소에서 기적을 행하는 것이 주의 뜻인지 예수님은 깊이 생각하셨습니다. 예수의 대답을 들은 어머니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자 혼인잔치의 슬픔과 당황스러움을 외면할 수 없었던 예수님은 일꾼들에게 돌로 된 여섯 개의 물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말했고 일꾼들이 물을 채우자 예수님은 일꾼들에게 그 물을 손님들에게 가져다주라고 말했습니다. 일생에서 가장 기뻐해야 할 혼인잔치가 슬픈 날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 기적은 예수님 혼자서 일으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혼인잔치를 연 신랑신부가 있었고, 혼인잔치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한 동네사람들이 있었고,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안타까워한 예수의 어머니가 있었고, 돌항아리에 물을 채운 일꾼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의 노력과 협력이 이루어져서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이야기는 상징적인 이야기입니다. 왜 우리의 삶에 슬픔이 있는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설명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슬픔을 기쁨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노력과 예수님의 축복이 만나면 기적이 이루어집니다. 일꾼들이 항아리에 물을 채우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서로 협력하고 노력할 때, 예수님은 우리의 노력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하고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고 항아리의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것은 예수님이 하실 일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처럼 당황스럽고 슬프고 우울한 일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갑자기 우울증이 찾아오는 것처럼, 인생을 살다보면 슬프고 힘든 일들이 우리를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주저앉으면 우리의 슬픔이 우리를 무너뜨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의 어머니와 일꾼들이 서로 협력한 것처럼, 우리가 지금의 슬픔을 이기기 위해서 서로 협력하고 노력할 때, 우리 주님께서 찾아와 주셔서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성령의 은사의 풍성함을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양한 성령의 은사를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지혜의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지식의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믿음의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기적의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의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영을 분별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의 은사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신 것은 서로의 은사가 모여서 공동의 선, 공동이익을 얻기 위함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서로가 받은 은사를 가지고 공동의 선을 추구하지 않고 서로 경쟁하였습니다. 고린도는 항구도시였는데 영적인 은사가 강한 도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선물/은사는 풍성하고 다양합니다. 서로 경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성격에 맞게 모든 사람에게 알맞은 은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언제나 차고 넘치도록 풍성하기 때문에 다툴 필요도 없고 경쟁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은사를 가지고 함께 협력하면 우리의 삶은 더 풍성해질 것이고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이 각자의 은사를 가지고 서로 협력하였기 때문에 큰 기적을 맞보았던 것처럼 우리들도 서로 협력하면서 슬픔과 우울증을 이기고 함께 기뻐하고 감사하며 인생의 잔치를 누리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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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첫번째 주일 / 1월 두번째 주일

주현절, 친밀한 관계와 공적인 삶

이사야서 43:1-7, 누가복음서 3:21-22

정해빈 목사

 

 

행복의 비결에 대한 유명한 연구조사가 있습니다. 1938년 미국 보스턴 하바드대학교 성인연구소가 19세 하바드대학교 대학생들과 보스턴 빈민촌에서 사는 청년들이 얼마나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지를 조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조사는 짧게 하는 조사가 아니라 그들의 자녀/손자녀까지 연구하는 긴 조사였습니다. 성인연구소는 1938년부터 2010년까지 72년간에 걸쳐서 조사 대상자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후손들이 얼마나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를 조사하였습니다. 세계 최고의 대학생들과 빈민촌에 사는 청년들 중에서 누가 더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요? 우리의 예상대로 세계 최고의 대학을 다닌 학생들은 대부분 졸업 이후에 사회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았습니다. 돈도 많이 벌었고 명성도 얻었습니다. 반대로 빈민촌에서 사는 청년들은 평생 빈민촌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 중에서 사회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예상한 것처럼,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서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이 성공할 확률이 높았습니다. 그런데 72년간에 걸쳐서 연구한 이 조사는 “어떤 사람들이 성공하였는가” 와 같은 조사가 아니었습니다. 이 조사의 목표는 단한가지, “어떤 사람들이 행복한 인생을 살았는가, 행복의 비결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행복의 관점에서 사람들을 조사해 보았더니 좋은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행복한 것도 아니었고 빈민촌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불행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들의 가정이 빈민촌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가정보다 확률적으로 더 행복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좋은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무조건 행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대학을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불행한 인생을 산 사람들도 있었고 반대로 빈민촌에서 태어나서 사회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을지라도 내 삶이 행복하다고 말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행복의 조건이 출신이나 학력이 아니라면 행복의 비결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자신의 인생이 행복하다고 대답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찾아보았더니 그 공통점은 관계/연결에 있었습니다. 가족, 친구, 공동체에서 좋은 관계/연결을 가진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자신의 인생이 행복하다고 답변하였습니다. 비록 빈민촌에서 태어났고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관계가 좋은 사람은 인생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습니다. 좋은 가정을 가진 사람, 좋은 친구를 가진 사람, 좋은 공동체/교회를 가진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만족도를 높여주고 우리 삶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을 꼽으라면 돈과 건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돈과 건강은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데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돈과 건강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친밀한 관계일 것입니다. 따뜻하고 친밀한 관계가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 줍니다. 따뜻한 가정, 따뜻한 친구, 따뜻한 공동체/교회가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속량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네가 물 가운데로 건너갈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네가 강을 건널 때에도 물이 너를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서와 누가복음 말씀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설명하였습니다.이사야 43장은 창조신앙과 속량신앙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신앙이 창조신앙이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돌보신다는 신앙이 속량신앙입니다. 우리의 신앙에는 창조신앙도 필요하고 속량신앙도 필요합니다. 마치 부모가 아이를 낳는 것을 창조라고 말한다면 부모가 아이를 보호하고 돌보는 것을 속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이후에 우리를 내버려두신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히브리 백성들이 처한 상황이 바로 이와 같았습니다. 지금 히브리 백성들은 나라가 망한 후에 바벨론 포로로 끌려와 있었는데 그들은 이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망했고 지금 그들은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후에 우리를 속량하지 않고 버리셨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부모가 아이를 낳은 후에 아이를 버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후에 우리가 미워서 우리를 버리셨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언약/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언제든지 망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를 뒤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자신들은 망했고 남의 나라에서 포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실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버리신 것이 아닐까?” 그들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앙에 큰 회의가 몰려왔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속량주이시라는 것을 선포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시고 값을 지불해서라도 우리를 다른 사람의 손에서 건져오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속량을 히브리어로 표현한 말이 고엘(Goel)입니다. 어떤 사람이 빚이 너무 많아서 다른 사람에게 팔려갔을 때는 그 사람의 친척이 값을 치루고 팔려간 사람을 다시 데리고 와야 합니다. 자원해서 값을 치루고 친척을 다시 데려오는 사람을 고엘/속량자라고 부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엘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우리의 고엘되시는 하나님께서 어떤 대가를 치루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히브리 백성들을 다시 데려올 것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이사야서 43장은 성경 전체 본문 중에서 가장 친밀한 언어로 백성들을 위로하였습니다. 내가 물 가운데로 건너갈 때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내가 불 가운데로 걸어갈 때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말씀을 반대로 뒤집어보면 그만큼 백성들이 오랜 포로생활 때문에 마음이 외롭고 지쳐있기 때문에, 이사야 선지자가 최고의 따뜻하고 친밀한 표현을 통해서 백성들을 위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친밀한 관계가 우리에게 힘을 주고 우리를 다시 일으켜 줍니다. 우리들 모두는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과 위로가 필요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백성을 고엘/속량하신다는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누가복음도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의 친밀함을 기록했습니다. 예수께서 때가 되어 세례를 받으시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예수님 위에 내려왔고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는 너를 좋아한다.” 하나님께서 세례받으시는 예수님을 보시며 기뻐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어린시절/청년시절을 자세하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대략 30세에 세례받으셨다고 가정하면 태어나서 30세가 될 때까지 무엇을 하셨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아버지 요셉을 따라서 목수 일을 했을 수도 있고 세례요한의 공동체에 들어가서 훈련을 받았을 수도 있고 광야에서 오랜 시간 기도생활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대략 10세에서 30세까지 2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예수님은 많은 경험을 하셨고 고민과 훈련을 받으셨습니다. 옛날에는 수명이 짧았기 때문에 옛날의 10세는 오늘날의 20세, 옛날의 30세는 오늘날의 40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긴 과정을 거치신 후에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하나님나라의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고민과 훈련을 다 마치고 세례받으시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셨고 지금까지의 사적인 생활을 마감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고난받는 이웃을 위해서 공적인 삶을 시작하시는 것을 보고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맺기 원하시고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공적인 삶을 사는 것을 보시며 기뻐하십니다. 나만을 위한 사적인 삶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공적인 삶, 봉사의 삶을 살 때 주님께서는 나를 보며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새해를 시작합시다. 가정과 친구와 교회와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새해를 시작합시다. 공적인 삶을 실천하며 새해를 시작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축복해주시고 우리와 동행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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