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첫번째 주일 / 4월 세번째 주일
부활절, 동산지기 예수
요한복음서 20:15-18, 사도행전 10:38-40

정해빈 목사

 

 

오늘 우리는 코로나 이후 두번째 부활절을 기념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지난 2020년 3월 코로나 전염병이 시작된 이후로 우리는 지난 2년 동안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미국에서 100만 명, 캐나다에서 38,000명, 한국에서 20,000명을 포함해서 전 세계에서 6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전염병으로 인해 우리는 매순간 죽음의 위협을 경험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코로나만이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많은 민간인들이 죽어가고 있고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 기후변화로 인해 인류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전염병, 전쟁, 기후변화가 우리의 삶을 절망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음을 매일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암울하고 힘든 상황에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부활을 기념하고 축하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2020년 코로나로 인해 뉴욕시가 봉쇄되었을 때 독신으로 혼자 살고 있던 프리랜서 작가 Max는 더 이상 사람을 만날 수도 없고 껴안을 수도 없고 악수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하루종일 방안에 있거나 아니면 조심스럽게 혼자서 산책하는 일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그를 힘들게 하였습니다. 우울증과 외로움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는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또 너무 많이 남아있는 자유시간을 보내기 위해 취미생활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에게는 몸과 마음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고 자극을 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그는 일본의 작은 나무 재배 기술인 분재가 위로와 희망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분재나무를 집으로 가져와서 정성스럽게 키웠습니다. 분재나무에서 잎이 나고 꽃이 피는 과정이 그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죽은 것처럼 보이는 작은 나무에서 잎이 나고 꽃이 나는 것을 보며 때로는 울음을 터트리기도 하였습니다. 작은 분재나무가 그의 우울증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 일종의 부활체험이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신학이 신에 대해 연구하고 종교가 신을 예배한다면 신비주의는 신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신학도 아니고 종교도 아니고 신비입니다. 부활은 연구하는 것도 아니고 예배하는 것도 아니고 체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요 신비이며 체험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일으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일깨워줍니다. 부활은 절망과 죽음과 사망권세가 아무리 강해도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과 손자손녀들의 키가 자라고 지혜가 자라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부활을 경험합니다. 땅 속에서 죽은 것처럼 보이는 씨앗들이 추운 겨울을 견디고 땅 위로 올라오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부활을 경험합니다. 꽃과 나무들이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새 잎을 보여줄 때 우리는 삶 속에서 날마다 부활을 경험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말씀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로 알아보지 못하고 정원사로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생각해 보면 마리아는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았습니다. 사랑스런 정원사가 식물들을 터치할 때 죽었던 식물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정원사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만져주실 때 우리는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기 위해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영적인 눈을 뜨고 우리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매순간이 부활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부활의 신비가 우리 삶의 곳곳에 숨어 있음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죽음이 생명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곳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매일매일의 삶 가운데서 우리를 일으키기 위해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날마다 체험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Today we are gathered to meditate, rejoice and celebrate the second Easter since the Covid-19 outbreak. We have almost died in the last two years. Due to the Covid-19 pandemic, more than 6 million people, including 1 million in the United States, 38,000 in Canada and 20,000 in Korea have lost their lives. Covid-19 was not the only threat to our lives. We see many of civilians dying in Ukraine every day. In addition, climate change, which is getting serious day by day, is threatening our future. We see every day that the pandemic, war and climate change are driving our lives to despair and death. These dark circumstances made us ask this question. What does it mean amidst this despair to remember, commemorate, and celebrate the resurrection?

 

When the first lockdown hit New York City in 2020, freelance writer Max who is single and lives alone, was struck by how little he touched living beings anymore. Due to the pandemic, he could no longer see his family and friends. The only thing he could do was stay in the room all day or take a quiet walk alone away from people. None of this was good for his mental health. Depression and anxiety took over his mind. So he needed something that would provide more vitality and stimulation for his mind. One day he happened to find that Bonsai, the Japanese art of cultivating tiny trees, provides him with some kinds of hope and energy. Watching the leaves and flowers bloom on a small, seemingly dead tree, he felt the strength, mystery, and awe of life. He sometimes cried while looking at the bonsai. It was a kind of resurrection experience to him.

 

A theologian said, “Theology is the study of God, religion is the worship of God, and mysticism is the experience of God.” We do not know exactly what the resurrection means. But we do know that resurrection is a kind of awe and mystery. Resurrection reminds us that no matter how strong the power of death is, it cannot overcome the power of God's love. When we see our children grow in height and wisdom, we experience resurrection. When we see the seeds hidden in the ground survive the cold winter and grow above the ground, we experience resurrection. When we see new leaves emerging from flowers and trees through the cold winter, we experience resurrection. According to today's scriptures, Mary Magdalene did not recognize the risen Christ and mistook the resurrected Jesus for a gardener. But spiritually speaking, Mary recognized Jesus properly. The resurrected Jesus has appeared to us as our gardener. Just as dead plants come back to life when a gardener touches them, we will be come back to life when the resurrected Lord as a gardener touches us. Dear sisters and brothers, although many pain and despair still remain in our lives, I pray that everyone see and experience the risen Christ, our gardener, who comes to us to raise us up.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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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여섯번째 주일 / 4월 두번째 주일
종려주일,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
누가복음 19:33-40, 19:45-48

정해빈 목사

 

 

오늘은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종려주일/고난주일입니다. 오늘부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신 마지막 일주일이 시작되었습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머무셨던 마지막 일주일을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일요일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고 월요일에는 부패하고 타락한 성전을 심판하셨고 화요일에는 성전 제사장들 및 헤롯 당원들과 토론하였고 수요일에는 마르다/마리아/나사로의 집에서 식사하셨고 목요일에는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다가 로마 병사들에게 붙잡히셨습니다. 금요일 새벽 대제사장과 빌라도 총독에게 심문받으시고 오전 9시 십자가에 매달리셨다가 오후 3시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을 자세하게 읽어보면 예수님이 어떤 고난을 받으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일주일 전 일요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유월절은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명절이었습니다. 해외는 물론이고 지방에 사는 많은 유대인들이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찾았습니다. 옛날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셔서 조상들을 노예에서 해방시키셨듯이,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셔서 로마의 억압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 주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로마제국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는 유월절날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 해안가에 있는 기병대와 보병을 예루살렘으로 행진시켰습니다. 기병대와 보병은 칼과 창을 들고 말을 타고 화려한 복장을 하면서 서쪽 문을 통해서 예루살렘 성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시간에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동쪽 문을 통해서 성전에 들어오셨습니다. 빌라도의 행진이 폭력을 과시하고 제국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면 예수님의 행진은 비폭력을 통한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은 빌라도의 행진을 환영하지 않았고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행진을 환영하였습니다.

 

제국의 황제들은 군대를 거느리고 말을 타고 도시에 입성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도시에 입성하셨습니다. 나귀는 집에서 기르거나 농사지을 때 필요한 작고 온순한 동물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셨다는 이야기는 예수님이 백성들을 짓밟는 권력자가 아니라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겸손하신 왕, 평화의 왕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도성 예루살렘아, 크게 기뻐하여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내가 에브라임에서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며 전쟁할 때에 쓰는 활도 꺾으려 한다. 그 왕은 이방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그의 다스림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를 것이다.” (스가랴 9:9-10)

 

예수님은 스가랴서 선지자의 예언대로 병거와 군마와 활을 없애고 온 세상에 평화를 선포하시기 위해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다른 나라를 공격하는 군대 사령관을 원하지 않습니다. 소위 강대국의 지도자들이 위대한 러시아, 위대한 중국을 외치면 외칠수록 전쟁은 더 많이 일어날 것이고 더 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할 것입니다. 우리는 국가의 지도자들이 나귀를 타고 행진하시는 예수님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군중들은 이렇게 외치며 주님을 환영하였습니다.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 하늘에는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는 영광!”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이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지금까지의 역사를 큰 눈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설명하면, 아직 창조의 완성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이 세상은 사탄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전쟁과 갈등이 많고 아프고 신음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사탄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신앙적으로 표현하면 그 사람이 악한 영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대신 서로 갈등하고 싸우도록 만듭니다. 이 세상이 파괴되는 것은 신앙적으로 표현하면 악한 영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머리가 뿔난 도깨비가 사탄이 아니라 사람을 지배하는 악한 영이 사탄입니다. 사람이 술과 도박과 마약에 중독되거나,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거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거나,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학대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악한 영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사탄에게 억눌려 있는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백성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 하늘에는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는 영광!”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을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상으로 바꾸어 주십시오. 주님만이 우리의 임금님이십니다. 우리는 주님이 통치하는 나라에서 살고 싶습니다”

 

백성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악한 영이 물러가기를 소망합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임금님, 주님이 통치하는 세상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일주일을 지내는 동안 예루살렘 평화행진을 통해서 로마제국의 폭력에 저항하셨고 부패한 예루살렘 성전을 폐쇄하심으로 종교권력에 저항하였습니다. 정치권력에 반대하고 종교권력에 반대했던 이 두가지 사건 때문에 예수님은 붙잡히셔서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은 폭력을 사용해서 악에 저항하지 않으시고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악에 저항하셨습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은 이런 예수님을 두려워하였고 음모를 꾸며서 밤중에 은밀하게 예수님을 체포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종려주일에 행하셨던 평화의 행진, 생명의 행진, 정의의 행진을 우리가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주님을 환영하였습니다. 종려나무는 대추열매를 많이 맺기 때문에 다산을 상징하고 오아시스에서 자라기 때문에 물과 생명을 상징합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히브리 백성들이 광야를 걸어가다가 종려나무를 보며 기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종려나무는 땅 속 깊은 곳까지 뿌리를 내리고 위로는 30미터까지 올라가고 나무를 베고 남은 그루터기를 불태워도 그 그루터기에서 다시 싹이 나기 때문에 고난을 이기는 용기와 강인한 생명을 상징했습니다. 또한 옛날 사사 드보라가 종려나무 아래에서 공정한 재판을 진행했기 때문에 종려나무는 공정한 재판과 정의를 가리켰습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주님, 우리에게 종려나무와 같은 풍성한 생명과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 공정한 재판과 정의를 주십시오.” 이렇게 외쳤습니다. 어린 나귀는 평화와 섬김을 가리키고 종려나무는 고난을 견디는 용기와 생명과 정의를 가리킵니다. 어린 나귀는 무거운 짐을 들고 묵묵하게 길을 걸어가고 종려나무는 메마른 사막에서 뿌리를 깊게 내려 물을 찾아내고 오아시스를 만들어 줍니다. 만약 인류에게 희망이 있다면 나귀처럼 무거운 짐을 들고 묵묵하게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인류에게 희망이 있다면 종려나무처럼 메마른 사막에 물을 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나귀 같은 삶을 사셨고 종려나무 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슈바이처 박사의 말대로 예수님은 죄악의 낭떠러지로 향하고 있는 인류의 수레바퀴를 막기 위해서 홀로 저항하셨고 그 결과로 거대한 수레바퀴에 짓눌려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자기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악의 낭떠러지에서 깨어날 수 있었고 잘못된 역사의 수레바퀴를 조금이나마 바꿀 수 있었습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죄악의 낭떠러지로 끌고 갈 것인가, 아니면 생명과 평화와 정의의 방향으로 끌고 갈 것인가는 우리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종려주일/고난주일을 묵상하며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과 폭력의 행진을 멈추고 평화의 행진을 묵묵하게 걸어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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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다섯번째 주일 / 4월 첫번째 주일
사순절, 아낌없이 주는 나무
요한복음 12:3-8, 빌립보서 3:5-10
정해빈 목사

 

 

 

1964년 쉘 실버스타인이 쓴 [아낌없이 주는 나무, The Giving Tree] 라는 유명한 그림책이 있습니다. 어느 마을에 소년과 소년이 아끼는 사과나무가 있었습니다. 소년은 나무 그늘 밑에서 그네를 타고 책을 읽고 사과를 따먹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청소년이 된 소년은 가끔 나무를 찾아와서 지금 자신에게는 돈이 필요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자 나무는 자신의 사과를 가져가서 팔라고 말했고 소년은 사과를 팔아서 돈을 벌었습니다. 청년이 된 소년은 이번에는 집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나무는 나뭇가지로 집을 지으라고 말했고 청년은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집을 지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중년이 된 소년은 지금 마음이 슬퍼서 배를 타고 먼 곳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나무는 나무줄기를 파서 배를 만들라고 말했고 중년이 된 소년은 나무줄기를 파서 배를 만들어서 먼 곳으로 떠났습니다. 먼 곳으로 떠난 소년은 노인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노인이 나무를 찾아가니 나무는 그루터기만 남아있었습니다. 그루터기만 남은 나무는 나에게 와서 앉으라고 말했고 노인은 그루터기에 앉아서 쉼을 얻었습니다. 나무는 돈이 필요할 때 열매를 주었고 집이 필요할 때 가지를 주었고 배가 필요할 때 줄기를 주었고 쉼이 필요할 때 그루터기를 주었습니다. 소년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고 필요할 때 도움을 주는 것만으로도 사과나무는 행복했습니다.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겨울을 지난 나무들이 새봄을 준비하는 것을 볼 때마다 모든 나무가 [아낌없이 주는 나무] 라는 생각이 듭니다. 뿌리는 물을 저장하고 땅을 튼튼하게 만들어 주고 줄기는 목재를 만들어 주고 잎은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만들어 주고 열매는 먹을 것을 가져다줍니다. 만약 이 세상에 나무가 없어서 사막과 같다면 사람은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성도님들 집 주변에 나무 하나를 정해서 대화도 나누어 보고 껴안기도 하고 거름도 주면서 평생 친구관계를 맺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그림책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나무가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선물해 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읽으면 [아낌없이 주는 나무]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예수님도 아낌없이 주는 인생을 사셨고 마리아와 사도바울도 아낌없이 주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우리의 어머니들도 자식을 위해서 아낌없이 주는 인생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를 돌아다니면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시고 가난한 자를 먹이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악령을 쫓아내셨습니다.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 머리 둘 곳이 없으시면서도 가난한 백성들을 향해서 아낌없이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서 길을 걸어가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에서 고난받으실 것을 아셨지만 그 길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아낌없이 십자가 위해서 살과 피를 다 내주셨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썩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 스스로 한 알의 밀알이 되셨습니다. 진실로 예수님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은 인생을 사셨습니다.

 

예수님 뿐만 아니라 마리아도 아낌없이 주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마리아는 나드 향유 옥합을 깨트려서 예수님의 발에 부어 드렸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왕이 취임하려면 반드시 머리에 기름을 부어야만 했습니다. 히브리어로 메시야, 헬라어로 그리스도라는 말이 기름부음 받은 자(the anointed)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발에 기름을 부어 드렸습니다. 머리는 가만히 앉아서 세상을 통치하는 것을 가리키고 발은 세상을 걸어다니면서 생명을 살리고 섬기는 것을 가리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걸어오셔서 우리를 살리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발이 가장 귀하다고 생각해서 발에 기름을 부어드렸습니다. 우리는 보통 머리를 귀하게 여기고 발을 천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생명은 발에서 시작됩니다. 머리가 생각이라면 발은 실천입니다. 예수님은 성목요일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서로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옛날에는 하인이 주인의 발을 닦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니까 제자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여러분의 발을 씻겨 준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의 발을 씻겨주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한 것과 같이 여러분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기 전에 예수님의 발이 귀하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의 발에 먼저 기름을 부어 드렸습니다. 또한 마리아는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기름을 부어드렸습니다. 옛날에는 시체를 매장할 때 기름을 발랐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죽음의 길을 걸어가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주님의 죽음을 미리 준비하는 마음으로 그의 몸에 기름을 부어 드렸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백성들을 대표하는 남성 예언자가 왕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예수님에게 기름을 붓지 않으니까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기름을 부어 드렸습니다. 마리아는 이 행동을 통해서 스스로 여성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향해서 당신은 남성 예언자도 아닌데 왜 나에게 기름을 부었냐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대로 마리아의 헌신에 감동을 받으셨고 그녀를 진정한 예언자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마리아는 평생 모은 비싼 기름을 아낌없이 부음으로써 예수님을 기름부음 받은 자로 만들어 드렸고 발에 기름을 부음으로써 예수님의 섬김을 축복해 드렸고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면서 그의 몸에 기름을 부어 드렸습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은 인생을 산 사람은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태어난 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았고 최고의 지파 중 하나인 베냐민 지파 출신이었고 바리새파 사람이었고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율법으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사도바울은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나서 최고의 대학에서 공부했고 박사학위를 받았고 지난 인생에서 결격사유가 전혀 없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겼습니다. 사도바울이 개척한 초대교회에는 유대 그리스도인과 헬라/로마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전통이 유대교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1등 교인으로 자처하였고 헬라/로마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 전통을 잘 몰랐기 때문에 2등 교인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도바울은 헬라/로마 그리스도인들의 권익을 위해서 한평생을 살았습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유대인/헬라인, 남자/여자, 주인/종 사이에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정통 유대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자신의 모든 특권을 다 버리고 헬라/로마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아낌없이 주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최고의 상류층에 속한 사람이 낮은 자들의 권리를 위해서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아낌없이 주는 그런 변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가롯 유다는 마리아가 비싼 나드 향유 기름을 예수님의 발에 붓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향유를 300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항상 너희 곁에 두고 그들을 돌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에 가장 가난하고 힘든 분은 죽음을 앞에 둔 예수님이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가장 가난하고 힘든 분이셨기에 마리아는 옥합을 깨트려서 주님을 축복해 드렸습니다. 가롯유다처럼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자고 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처럼 지금 가장 가난하신 예수님을 위해 거룩한 낭비를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그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유다야, 너는 바른 말만 할 줄 알았지 언제 한번 마리아처럼 뜨거운 사랑의 낭비를 해 본적이 있었느냐”

 

물론 우리는 아껴야 하고 낭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능하면 과소비를 줄이고 환경을 위해서 절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끼고 절제하는 이유는 꼭 필요한 순간에 뜨거운 사랑의 낭비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이 아름다운 이유는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낭비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뜨겁게 사랑하기 때문에 낭비할 수 있고 아낌없이 줄 수 있습니다. 마리아와 사도바울처럼, [아낌없이 주는 나무] 처럼 뜨거운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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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네번째 주일 / 3월 네번째 주일
사순절, 너의 아우가 죽었다가 살아났으니
누가복음 15:1-3, 25-32
정해빈 목사

 

 

 

교회에서 오래 신앙생활 하신 분들은 누가복음 15장 말씀이 [탕자의 비유] 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새번역 성경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로 제목을 달았습니다. [탕자의 비유]라고 제목을 붙이면 탕자(蕩子), 방탕한 자식에 대한 이야기가 되지만 [되찾은 아들의 비유]로 제목을 붙이면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는 이야기가 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 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3가지의 비유가 나옵니다. 맨 처음에 [잃은 양의 비유]가 나오고 그 다음에 [되찾은 드라크마의 비유]가 나오고 세번째로 [되찾은 아들의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한 마리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 다녔고 찾은 후에는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 다음에 어떤 여인이 동전 드라크마 열 개가 있었는데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등불을 켜고 그것을 찾을 때까지 온 집안을 샅샅이 뒤져서 잃어버린 동전 하나를 찾았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이웃 사람을 불러서 내가 잃었던 동전을 찾았으니 함께 기뻐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두번째 비유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 비유가 [되찾은 아들의 비유] 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3가지 비유 모두가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는 기쁨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집에 남아있는 큰아들이나 집을 떠난 둘째 아들 모두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줄 모르고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식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큰아들과 둘째아들 모두가 불효자식이었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아버지의 밭을 관리했지만 감사할 줄로 몰랐습니다. 아버지의 말처럼, 아버지가 가진 모든 것이 자신의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도 축복이었고 아버지의 재산을 관리하는 것도 축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얼마나 큰 축복을 받았는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자비로운 마음을 닮지도 못했고 감사함도 없었고 여유도 없었습니다. 유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이 못마땅하기만 했습니다. 아버지는 불평하는 큰아들을 향해서 너는 항상 나와 같이 있고 나의 것이 다 너의 것이지만 둘째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니 기뻐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들이 큰아들과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살고 있지 않는지를 질문하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으로부터 큰 은혜와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감사할 줄도 모르고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경멸한다면 우리는 첫째 아들과 같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둘째아들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낭비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시간을 낭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무시하고 경멸하고 미워한다면 우리는 첫째 아들과 같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나보다 못한 사람을 만날 때 좀 더 너그러운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먼저 나에게 너그럽게 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큰 은혜를 먼저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은 큰 은혜를 받았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엄격하게 대하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첫째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닮아서 집으로 돌아온 동생을 불쌍히 여겼더라면 아버지는 첫째 아들을 더 믿고 신뢰했을 것입니다.

 

큰아들도 불효를 저질렀지만 가장 큰 불효를 저지른 것은 둘째아들이었습니다. 유대 전통에서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큰 아들은 2/3, 둘째 아들은 1/3의 유산을 받았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자신의 몫을 달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살아 있는데도 자신의 몫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를 죽은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자기 몫을 달라고 한 것도 불효였고 받은 유산을 가지고 먼 곳으로 가서 방탕하게 살면서 재산을 낭비한 것도 불효였고 마지막에 거지가 되어서 아버지 앞에 나타난 것도 불효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거의 죽게 되었다가 집으로 돌아온 둘째아들을 안아 주었고 옷을 입혀 주었고 반지를 끼워 주었고 잔치를 벌여 주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둘째가 재산을 탕진하고 방탕한 생활을 한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에게 중요한 것은 자식이 살아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방탕한 자식이라고 해도 아버지는 그 자식이 헐벗고 굶주리는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옛날 사회에서는 자식이 헐벗고 굶주린다면 그것은 아버지에게 큰 수치가 되었습니다. 좋은 아버지라면 마땅히 모든 자녀들을 먹이고 입혀야 합니다. 자녀들이 재산을 낭비하는 것은 둘째 문제였습니다. 돈보다 생명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거의 죽게 되었을 때 그 아들을 온전한 모습으로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아버지의 자비로운 마음을 닮지 못한 첫째아들도 문제이지만 아버지의 유산을 탕진한 둘째아들이 더 큰 문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오늘날에 우리의 자녀들이 둘째아들처럼 유산을 달라고 요구하면서 재산을 낭비한다면,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돈만 낭비한다면, 일할 생각도 안하고 빈둥빈둥 놀기만 한다면 부모의 마음은 답답할 것입니다. 또 어떤 자녀는 정신적인 상처가 있어서 사람들을 안 만나고 바깥으로 나가지도 않고 집 안에만 있으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큰아들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신처럼 열심히 살지 않는 동생을 향해서 미워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일찍 세상에 뛰어들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생각과 고민이 많아서 행동이 느린 사람도 있고 일할 생각은 안하고 세상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정 뿐만 아니라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는 직장이나 가게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 생각없이 시간을 낭비하면서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 안하고 구걸하는 사람들도 있고 일할 의욕이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이 세상에서 아무 쓸모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 나오는 아버지는 이유를 묻지 않고 집으로 돌아온 자식을 입혀주고 씻겨주고 먹여 주었습니다. 그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나의 자녀이니까 헐벗어서도 안되고 굶주려서도 안된다는 것이 아버지의 생각이었습니다. 때가 되면 둘째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깨달아서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아버지는 둘째아들이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주었습니다. 비록 둘째아들과 같은 사람들이 우리가 보기에 게으르고 무능력하고 쓸모없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들도 기본적인 인간적인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세리들과 죄인들을 가리켜서 율법을 지키지도 않는 가치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비록 그들이 율법의 기준으로 볼 때 죄인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든지 버림받아서도 안되고 굶주려서도 안되고 헐벗어서도 안된다는 것이 주님의 생각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비로운 하나님께서는 모든 자녀들이 온전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만약 큰아들 같이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면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들 모두는 허물이 많은 탕자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보기에 둘째아들처럼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 할지라도 그들을 이해해 주고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보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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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세번째 주일 / 3월 세번째 주일
사순절, 살아남은 자의 사명
누가복음 13:1-5, 6-9
정해빈 목사

 

 

사순절을 맞이해서 고난당하는 사람들, 특히 전쟁으로 인해 죽은 사람들과 코로나로 인해 죽은 사람들을 기억하며 오늘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예루살렘을 통치하던 빌라도 총독이 성전에서 제사드리던 갈릴리 사람들을 죽이고 그 피를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제물에 섞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그 피를 동물의 피와 섞었다니 잔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도 빌라도는 갈릴리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들이 반역을 꾸민다고 생각해서 그들이 제사를 드리는 순간에 쳐들어가서 그들을 죽였을 것입니다. 갈릴리 지역은 옛날부터 저항 운동이 많이 일어난 지역이었기 때문에 갈릴리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모였다는 이유만으로 빌라도 총독은 그들을 죽였습니다. 하지만 갈릴리 사람들은 반역운동을 꾀하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드리는 중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단지 갈릴리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것도 성전에서 거룩하게 제사를 드리는 중에 죽임을 당했으니 그것은 억울한 죽음이었고 학살이었고 살인이었습니다. 죽음에는 나이가 들어서 죽는 자연스러운 죽음도 있고 사고나 자연재해 때문에 죽는 안타까운 죽음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억울한 죽음은 나쁜 권력자에 의해서 학살당하는 죽음입니다. 요즘 우리가 우크라이나 뉴스를 보고 있는 것처럼 러시아 군인들이 민간인 아파트와 병원에 대포를 쏴서 죄없는 민간인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는 나쁜 권력자들 때문에 죽는 죽음이 많이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황제는 기독교인들이 황제 숭배를 안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경기장에 보내 맹수의 밥이 되도록 했고 독일의 히틀러는 유대인들과 집시들을 학살했고 소련의 스탈린은 자기 나라의 국민들을 많이 죽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겪을 때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실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우리들은 어떤 신앙적인 관점을 가지고 이런 일들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요?

 

나쁜 권력자에 의해서 학살당하는 죽음이 억울한 죽음이라면 사고나 자연재해로 인해 죽는 죽음은 안타까운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읽어보면 억울한 죽음에 이어서 안타까운 죽음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실로암 탑이 무너져서 18명이 죽었습니다. 실로암은 기혼에서 예루살렘으로 공급되는 물을 저장한 저수지 이름인데 이 지역의 경비를 위해서 세운 탑이 갑자기 무너져서 18명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사고였지만 막을 수 있는 사고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갑자기 아파트가 무너지거나 다리가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재해 때문이 아니라 그 건물을 짓는 사람들이 잘못된 부실공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사고로 인해 죽는 죽음도 권력자에 의해서 학살당하는 죽음 못지않게 억울하고 슬픈 죽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실로암 탑 공사를 잘 하였더라면 이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빌라도에 의해서 죽은 사람들과 사고로 인해서 죽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죄를 지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신에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억울한 죽음과 안타까운 죽음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두가지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이런 죽음이 그 사람들의 죄 때문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은 사람이 죽는 것은 그 사람이 죄가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생각을 거부하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권력자를 통해서 사람을 죽이거나 사고를 통해서 사람을 죽이는 그런 잔인한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억울한 죽음이나 안타까운 죽음을 당한 사람의 가족에게 찾아가서 당신의 가족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당신의 죄가 많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또 한번의 큰 상처를 받게 될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욥이 갑자기 고난을 당했을 때 욥을 찾아온 친구들이 인과응보(因果應報)를 내세우며 네가 고난을 받는 것은 죄가 많기 때문이라고 말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사람들이 죄가 많아서 이런 일을 당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번째로 예수께서는 “너희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같이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회개하라는 말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회개는 희생자들이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들이 해야 합니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나와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태도를 회개하라는 말씀이요, 그렇게 죽은 사람들을 쉽게 잊어버리는 태도를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사람들은 재수가 없어서 죽은 것이고 나는 그렇게 죽지 않을 것이라는 태도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죽음을 내 일로 여기고 다시는 그런 죽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라는 말씀입니다. 억울하고 안타까운 죽음을 개인적인 일로 여기고 쉽게 잊어버리면 그런 일이 머지않아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음을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지 않으면 잘못된 과거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끔찍한 일을 목격하고서도 그 일이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런 일을 쉽게 잊어버리는 사람들을 향해서 너희가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그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너희에게도 그런 일이 닥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성경은 나이가 들어서 죽는 죽음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대신 억울하고 안타까운 죽음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죽는 죽음은 자연스러운 죽음이요 축복스러운 죽음입니다. 구약성경은 나이가 들어서 죽는 것을 가리켜서 조상의 품으로 돌아갔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기에 나이가 들어서 죽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 장례식에 가보면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기 보다는 고인의 삶을 기억하고 감사하고 축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이 비정상적인 죽음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그 죽음이 불의하고 억울하고 안타까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사람은 왜 나이가 들면 죽을까 같은 한가로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대신에 왜 억울한 죽음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가에 큰 관심을 갖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살아남은 자가 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고 3년을 기다렸는데 열매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포도원지기에게 저 나무가 땅만 차지하니까 찍어 버리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포도원지기는 주인에게 내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줄 터이니 일 년만 더 기다려달라고 말을 했습니다. 포도원지기의 간청 덕분에 3년째 열매가 열리지 않는 무화과나무는 일 년 더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 년 후에 열매를 맺으면 나무는 살 것이고 열매를 맺히지 않으면 뽑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억울하고 안타깝게 죽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열매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것은 우리가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래 살아야 합니다. 그냥 오래사는 것이 아니라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몫까지 짊어지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오래 살아야 합니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다시는 이 땅에 억울하고 안타까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정의의 열매, 평화의 열매, 사랑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억울하고 안타까운 죽음을 당하지 않고 살아남았다면 그것은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살아남은 자의 사명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순절을 묵상하면서 고난받는 사람들과 억울하고 안타까운 죽음을 당한 이들을 기억하며 그들의 몫까지 감당하려고 노력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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