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두번째 주일 / 1월 첫번째 주일

이사야서 60:1-4, 에베소서 3:1-10

신년주일, 하늘의 빛을 전하게 하소서

정해빈 목사

 

 

2022년 임인년(壬寅年, 호랑이의 해) 새해가 밝았습니다. 성도님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새해에는 세상이 더 건강하고 평화로운 세상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무엇보다 새해에는 코로나 질병이 완전히 물러가거나 아니면 최소한 겨울철 독감처럼 생명에 지장을 주지 않는 정도로 약화되기를 기대합니다.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는 사람들과 병원에서 근무하는 사람들과 국가 행정을 담당하는 사람들과 일반 시민들의 선한 의지가 모이면 반드시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22년에는 가정과 학교와 직장과 일터에서 중단되었던 일상이 다시 정상적으로 회복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삶은 시간이 지나면 역사가 됩니다. 오직 인간만이 시간을 계산할 줄 알고 역사를 기록할 줄 압니다. 지나간 역사를 통해서 인류는 과거를 반성하였고 그 반성 위에서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였습니다.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면 인류는 많은 잘못과 실수와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지금부터 100년 전 1922년에는 무솔리니가 이탈리아에 극우 파시스트 정권을 세웠고 반대로 러시아에서는 극좌 소련 연방이 세워졌습니다. 한쪽에서는 극우 정권이 인류를 파멸로 몰고 갔고 또 한쪽에서는 극좌 정권이 인류를 파멸로 몰고 갔습니다. 인류는 100년 전의 잘못된 경험을 통해서 과거를 반성하고 새출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100년이 지났는데 오늘날에는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 사이의 바이러스 때문에 인류가 파멸 직전에 서게 되었습니다. 100년 전 인류가 잘못을 깨닫고 반성함으로서 새출발을 한 것처럼 오늘날에도 인류가 지금의 잘못을 깨닫고 반성할 때 인류는 새로운 100년을 향해서 새출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20년, 2021년, 2022년 3년째 계속되는 코로나 사태를 경험하면서 인류의 잘못된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를 새롭게 설계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한국의 어느 목사님이 새해에는 우리의 삶이 이렇게 달라져야 한다고 글을 쓰신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코로나를 극복하고 함께 살려면 4가지를 해야 하는데 첫째로 우리의 삶이 ego에서 eco로 바뀌어야 합니다. ego는 저 사람은 에고가 세다고 말하는 것처럼 이기심/자기고집을 가리키고 eco는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를 가리킵니다. 우리의 삶이 이기심/자기고집이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삶으로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의 삶이 greed에서 green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greed는 탐욕/욕심을 가리키고 green은 생명/녹색/환경을 가리킵니다. 나만을 위한 탐욕/욕심에서 벗어나서 지구촌 전체가 건강한 세상이 되도록 욕심을 내려놓고 소비를 줄이고 생명과 환경을 우선시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1900년만 해도 지구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땅은 14% 정도였는데 지금은 77%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인간이 욕심을 부린 결과 동물에게 기생하던 병이 인간에게 옮겨지고 기후위기가 일어났습니다. 셋째로 우리의 삶이 solitary에서 solidarity로 바뀌어야 합니다. solitary는 고독하게 혼자 사는 삶을 가리키고 solidarity는 함께 협력하고 연대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이제는 개인이나 국가가 혼자서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서로 지혜를 모아야 하고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이웃과 떨어져서 사는 삶은 좋지 못합니다. 넷째로 우리의 삶이 hostility에서 hospitality로 바뀌어야 합니다. hostility는 적대/혐오/미움을 가리키고 hospitality는 환영/환대를 가리킵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나와 피부색이 다르거나 인종이 다르거나 종교가 다르거나 성적 취향이 다르거나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미워했습니다. 그렇게 누군가를 미워하면 자신도 망하고 그 사람도 망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미워하는 삶이 아니라 나와 다른 이웃을 환영하고 환대하고 함께 공존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는 시점에 참으로 적절한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고집이 아닌 존경, 욕심이 아닌 생명, 고독이 아닌 협력, 미움이 아닌 환대의 삶을 살 때 사회적 갈등과 빈부격차와 질병과 환경파괴가 사라지고 우리들 모두의 삶이 조금씩 나아지게 될 것입니다. 2022년에는 우리들 모두가 이런 삶을 살기로 다짐하기를 소망합니다.

 

“예루살렘아, 일어나서 빛을 비추어라. 구원의 빛이 너에게 비치었으며 주님의 영광이 아침 해처럼 너의 위에 떠올랐다.”

 

이사야 선지자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다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백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이사야 60장을 쓴 저자를 가리켜서 제3이사야라고 부릅니다. 이사야서는 3명의 예언자가 썼는데 나라가 망하기 전에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한 예언자를 제1이사야라고 부르고, 나라가 망해서 히브리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을 때 같이 끌려가서 포로된 백성들을 위로한 예언자를 제2이사야라고 부르고, 마지막으로 히브리 백성들이 포로에서 해방되었을 때 백성들에게 앞으로 해야 할 소명을 가르쳐 준 예언자를 제3이사야라고 부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서 60장은 제3이사야에 의해서 쓰여졌습니다. 바벨론에서 50년 동안 계속되었던 포로생활이 끝나고 백성들이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때 이사야는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백성들 위에 떠오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포로에서 벗어나 고국으로 돌아가는 백성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우리 위에 떠올랐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나라를 다시 재건하고 성벽을 재건하고 성전을 재건하십시오. 그리하면 우리를 통해서 세상 사람들이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이사야는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을 이렇게 축복해 주었습니다.

 

“이방 나라들이 너의 빛을 보고 찾아오고 뭇 왕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보고 너에게로 올 것이다.”

 

하나님께서 히브리 백성들에게 비추시는 빛은 이방 나라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빛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바벨론처럼 세상을 호령하는 큰 나라가 되십시오, 세상을 통치하는 제국이 되십시오,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빛을 세상에 전하십시오. 세상 사람들을 축복하는 빛이 되십시오.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빛을 전파하는 곳이 되게 하십시오” 이사야 선지자가 백성들에게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사야서 60장 말씀이 오늘날의 코로나 포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고백합니다. 옛날 히브리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 시대를 살았는데 우리들은 오늘날 코로나 포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 시대가 끝이 난 것처럼 코로나 포로 시대도 결국은 끝이 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처럼 코로나 포로 시대가 끝이 나면 우리는 다시 우리의 삶을 재건해야 할 것이고 특히 우리의 교회가 하나님의 구원의 빛을 세상에 비추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3장에서 이사야 선지자와 같은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던 사도바울을 부르셔서 이방인에게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빛을 세상에 전하게 하셨습니다.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말씀을 받아들이면 하나님 나라의 공동 상속자가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인종차별도 없고 빈부격차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 모두는 한 몸을 이루고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향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하나님 나라의 공동상속자들이 한 몸을 이루어 신앙생활하는 곳이 교회라는 것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에서 제일 먼저 시작되고 그 다음에 세상으로 조금씩 전파됩니다.

 

“그것은 이제 교회를 통하여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에게 하나님의 갖가지 지혜를 알리시려는 것입니다.”

 

이 말씀처럼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의 지혜를 세상에 알려주는 곳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처럼, 그리고 사도바울의 말씀처럼, 우리 교회가 질병으로 고통받는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의 빛을 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이 한 몸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알려주는 교회, 하나님의 지혜를 알려주는 교회, 세상을 구원하고 치료하는 영광의 빛을 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고집이 아닌 존중, 욕심이 아닌 생명, 고독이 아닌 협력, 미움이 아닌 환대의 삶을 살기로 다짐하면서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

성탄절 첫번째 주일 / 12월 네번째 주일

누가복음서 2:1-7, 2:43-52

송년주일, 생명은 환대를 통해서 자랍니다

정해빈 목사

 

 

서양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찬송가를 꼽으라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Amazing Grace, 찬송가 305장)와 “때 저물어서 날이 어두니”(Abide with me, 찬송가 481장) 찬송을 말할 수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은혜로운 찬송입니다. “때 저물어서 날이 어두니” 찬송도 그에 못지않게 잘 알려진 찬송입니다. 이 찬송의 원래 제목은 “내 곁에 머무소서”(Abide with me)입니다. 영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찬송이고 인도의 간디가 가장 좋아하는 찬송이기 때문에 지금도 인도는 힌두교 국가이지만 중요한 국가 행사 때 이 찬송을 부릅니다. 이 찬송은 죽음의 위협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용기와 평안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전쟁터에서 많은 병사들이 죽음의 위협과 싸우면서 이 찬송을 불렀고 병원에서 임종을 맞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때 저물어서 날이 어두니 구주여 나와 함께 하소서 내 친구 나를 위로 못할 때 날 돕는 주여 합께 하소서. 내 사는 날이 속히 지나고 이 세상 영광 빨리 지나네 이 천지만물 모두 변하나 변찮는 주여 함께 하소서.”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되면 사람은 누구나 슬픔과 두려움과 외로움을 느낍니다. 군인은 전쟁터에서, 임종을 앞에 둔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슬픔과 두려움과 외로움을 느낍니다. 그 때 신앙인은 이 찬송을 부르며 위로를 받습니다. “주님,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되었을 때, 나의 친구들이 나를 위로 못할 때, 내 곁에 머물러 주십시오” 이렇게 고백할 때 신앙인은 하늘의 위로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2021년 마지막 송년주일 예배를 드리며 이 찬송을 묵상합니다. 지난 1년 동안 우리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았습니다. 2년째 계속되는 코로나로 인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많았고 토론토 한인사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코로나 때문은 아니지만 원로목사님이신 김익선목사님과 이정숙장로님께서 하늘의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지난 1년을 살면서 한편으로는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달으면서 우리는 겸손을 배울 수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우리와 동행해주시는 주님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지난 1년 동안 고통스러운 시간을 참고 인내하면서 꿋꿋하게 견뎌 오시고 교회와 지역사회와 가정을 위해 봉사해 주신 모든 성도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우리의 고통은 당분간 계속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Abide with me”(내 곁에 머무소서) 많은 사람들이 이 찬송을 부르며 고난과 시련을 견뎠듯이 우리도 이 찬송을 부르며 꿋꿋하게 삶을 이어나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누가복음서 2장을 보면 예수님이 태어나신 시대상황이 나옵니다. 아우구스투스 로마황제가 세상을 다스릴 때, 구레뇨가 시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 황제가 칙령을 내려서 세금을 걷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호적을 등록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다윗 가문의 자손이기 때문에 마리아를 데리고 북쪽 갈릴리 나사렛을 떠나서 고향/본적인 베들레헴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로마황제가 모든 사람에게 호적등록을 하라고 했다든지, 호적등록을 하는데 거주지에서 하지 않고 굳이 멀리 떨어진 고향/본적에 가서 해야 한다든지, 마리아처럼 임신한 사람을 데리고 가서 등록을 해야 한다든지 하는 내용이 역사적으로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이기 때문에 꼭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본래 북쪽 갈릴리에서 살았던 마리아와 요셉이 호적등록을 하기 위해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 왔다가 예수님을 출산한 것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가 말하려고 하는 메시지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내전을 종식시켰기 때문에 세상을 구원한 구세주라는 명칭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누가는 또 다른 구세주가 마구간에서 태어났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로마의 구세주는 전쟁승리를 통해서 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하지만 마구간에서 태어난 구세주는 정의를 통해서 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누가 진정한 구세주인가? 세상을 정복하고 식민지 백성들을 억압하고 전쟁승리를 통해서 평화를 가져다주는 사람이 진정한 구세주인가 아니면 마구간에서 태어나서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고 병자를 고치고 우리에게 깨우침을 주는 사람이 진정한 구세주인가를 누가는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천사는 들에서 양을 치는 목동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여 준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이 왜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일까요? 백성들을 창과 칼로 억압하는 가짜 구세주가 아니라 우리에게 참 평화를 가져다 줄 구세주가 태어났기 때문에 이것이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이라고 누가는 말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류의 삶을 더 힘들게 하고 파멸로 이끄는 권력자는 가짜 구세주입니다. 하지만 세상을 더 정의롭게 만들고 세상을 살리고 치료하는데 헌신하는 사람은 진정한 구세주입니다.

 

이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은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하루아침에 어른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사람으로 태어나셨기 때문에 아기로 태어나셔야만 했고 아기로 태어났기 때문에 사람들의 돌봄이 필요하셨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해산할 때 베들레헴에는 방이 없었습니다. 호적등록하러 온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방이 없었을 수도 있고 요셉과 마리아가 가난했기 때문에 방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나마 누군가가 마구간을 내주었기 때문에 아기 예수님은 그곳에서 태어나실 수 있었고 가난한 목자들이 찾아와서 예수님을 경배할 수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출산한 마리아와 요셉, 마구간을 내준 베들레헴 사람, 멀리서 찾아온 목동들, 아기 예수님에게 자리를 내어준 동물들이 있었기 때문에 구세주가 태어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집 안에서 태어나지 않고 집 바깥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의 아기는 집 안에서 태어나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아기는 집 바깥에서 태어납니다. 하지만 집 바깥에서 태어난 아기가 메시야가 되었습니다. 당신이 가난해서 당신의 아기가 집 바깥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서러워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아기가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메시지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곁에 태어나는 모든 아기들이 우리의 구세주입니다. 후세대가 태어나지 않으면 인류는 망할 것입니다. 모든 아기들이 세상의 구세주입니다. 하지만 모든 아기들은 우리의 사랑과 돌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 시대는 식민지 시대였고 고통스러운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가운데서도 서로를 돌보아주는 따뜻한 사랑 덕분에 메시야는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소년이 된 예수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에 갔다가 너무도 신기한 것이 많았는지 부모를 따라 고향에 가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부모는 소년 예수가 친척과 동네 사람들 사이에 있는 줄 알았다가 하루가 지난 후에 소년 예수가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루가 지나서야 부모가 알았다는 말은 옛날에는 아이들이 대가족과 친척과 동네 사람들의 돌봄 속에서 걱정없이 자랐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부모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아이를 찾았고 3일 후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선생들과 대화하는 어린 예수를 발견했습니다. 아이를 잃어버리는 것은 부모에게는 끔찍한 경험과 같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선생들의 보호 속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성탄절 이야기와 소년 예수의 이야기를 함께 들려주고 있습니다. 비록 방이 없어서 마구간에서 태어났지만 아기 예수는 이웃의 환대 속에서 안전하게 태어날 수 있었고 예루살렘에 올라간 소년 예수가 부모와 떨어졌지만 선생의 환대 속에서 안전하게 자랄 수 있었습니다. 아이나 어른을 막론하고 우리들 모두는 지금 힘든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힘들면 힘들수록 서로를 지켜주고 보호해주고 환영해줄 때, 구세주는 어른이 될 것이고 새로운 시대는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1년을 돌아볼 때 우리들 모두는 참으로 지치고 힘든 1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말씀처럼 서로를 지켜주고 보호해주고 환영해줄 때, 새로운 미래는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환대의 마음을 가지고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

성탄주일 온가족예배 / 12월 세번째 주일

누가복음서 1:46-55, 2:8-14

성탄주일,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정해빈 목사

 

 

오늘은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성탄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아기 예수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오늘은 기쁜 날이고 감사한 날이고 축하해야 할 날이고 찬양해야 할 날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을 보면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도 주님의 탄생을 노래하였고 마리아도 주님의 탄생을 노래하였고 하늘의 천사들도 주님의 탄생을 노래하였습니다. 우리 교회 성가대원들도 마스크를 쓰고 오랜만에 주님의 탄생을 노래하였습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은 여성이었고 마리아는 나이가 어린 여성이었습니다. 그 시대는 나이가 많은 여성도 고통스러운 시대였고 나이가 적은 여성도 고통스러운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고통 중에도 메시야의 탄생을 노래하였습니다. 자신들을 통해서 태어날 세례요한과 아기 예수가 세상을 구원하기를 노래하였습니다. 여성들의 노래가 세상을 바꿉니다. 여성들의 노래가 세상을 움직입니다. 세상이 고통스럽고 힘들수록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통 중에 부르는 춤과 노래가 우리를 붙들어 주고 우리를 일으켜 줍니다.

 

하버드대학의 신학자인 하비 콕스(Harvey Cox)는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 “축제를 즐기는 인간”(homo festivus), “환상을 가진 인간”(homo fantasia)이 고난을 견딜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놀이하고 축제를 즐기고 환상을 갖는 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춤추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미래를 노래하는 사람은 현재의 고난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의 고난이 크면 클수록 우리는 노래를 불러야 하고 미래를 꿈꾸어야 합니다.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끌려온 흑인들은 오랫동안 인간 이하의 비참한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인종차별의 고난을 견뎠습니다. 그렇게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그들은 오랜 시간 고난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부르는 찬송을 흑인영가(Spiritual Music)라고 부르는데 그 중의 하나가 “마침내 자유(Free at Last)라는 노래입니다.

 

Free at last, free at last. I thank God I'm free at last. Way down yonder in the graveyard walk. Me and my Jesus going to meet and talk. I Thank God I'm free at last. On my knees when the light passed by. Thought my soul would rise and fly. I Thank God I'm free at last. Some of these mornings, bright and fair. Going to meet King Jesus in the air. I thank God I'm free at last. Free at last, free at last. I thank God I am free at last.

 

마침내 자유, 마침내 자유. 주님 감사합니다. 나는 마침내 자유를 얻었습니다. 묘지로 내려가는 저쪽 길에서 나는 예수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것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내가 마침내 자유를 얻었습니다. 내 무릎 위에서 빛이 지나갈 때 내 영혼은 일어나 하늘을 날았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내가 마침내 자유를 얻었습니다. 밝고 깨끗한 아침에 저 하늘에서 왕이신 예수님을 만날 것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내가 마침내 자유를 얻었습니다. 마침내 자유, 마침내 자유.

 

그들이 이 노래를 부른 것은 지금 당장 자유를 얻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언젠가는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될 것을 꿈꾸면서, 미래에 일어날 일을 바라보며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노래를 통해서 미래를 바라보고 미래를 희망하고 미래를 꿈꿀 수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도 새로운 미래를 꿈꾸며 노래하였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통해서 굶주린 자들이 양식을 얻고 비천한 자들이 높임을 받게 될 것을 희망하였습니다. 흑인영가의 노래가 미래의 자유를 노래하였듯이, 마리아도 미래의 구원을 노래하였습니다.

 

My soul magnifies the Lord and my spirit rejoices in God my Saviour, for he has looked with favour on the lowliness of his servant. Surely, from now on all generations will call me blessed, for the Mighty One has done great things for me, and holy is his name.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마음이 내 구주 하나님을 좋아함은 그가 이 여종의 비천함을 보살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 힘센 분이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기쁜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기억하시고 자신을 선택하시고 자신의 비천함을 보살펴 주신 것을 감사하며 주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주님의 부름을 받아서 구세주를 출산하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주님께서 저를 선택하셨으니 저는 주님의 것입니다. 저를 도구로 써 주십시오 고백하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He has shown strength with his arm. He has scattered the proud in the thoughts of their hearts. He has brought down the powerful from their thrones and lifted up the lowly. He has filled the hungry with good things and sent the rich away empty. He has helped his servant Israel in remembrance of his mercy.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그는 자비를 기억하셔서 자기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너무도 아름답고 용기있고 정의로운 찬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리아는 개인의 행복을 구하기 위해 노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메시야가 만들 새로운 세상을 노래하였습니다.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은 겸손해지고 백성을 억압하는 제왕들은 높은 자리에서 내려오게 될 것입니다. 비천한 사람들은 높아지고 굶주린 사람들은 배부르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는 용기있는 예언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과 천사들이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노래하였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주님의 탄생을 노래합니다. 오늘 우리가 노래하는 두번째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신이 만나는 방법에는 두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인간이 신을 만나기 위해서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방법이 있고 신이 인간을 만나기 위해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방법이 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신을 만나기 위해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고 싶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기도와 명상과 고행과 선행과 업적을 많이 쌓으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서 사람이 하늘로 올라갈 수는 없습니다. 불완전하고 죄 많은 인간이 온전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기 위해 내려오시는 길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오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비움과 자기헌신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연약한 아기 예수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가장 낮은 자리, 마굿간에서 아기 예수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세상적으로는 가장 낮고 천한 곳이지만 그곳에는 찬양이 넘쳤습니다. 하늘에서는 천사들이 노래하였고 땅에서는 마리아와 엘리사벳과 멀리서 온 목자들이 노래하였고 마굿간에서는 동물들이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노래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 중에 함께 부르는 찬양이 우리에게 용기와 희망을 줍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찬양합시다. 아기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의 삶을 비추어 줄 것입니다. Merry Christmas! 아멘.   

 

 

 

Posted by 정해빈
,

대림절 세번째 주일 / 12월 두번째 주일

누가복음서 3:7 - 18

대림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정해빈 목사

 

 

우리는 오늘 대림절 세번째 주일을 맞아서 누가복음 3장에 기록된 광야에서 들려오는 세례요한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성탄절을 기다리는 우리들의 들뜬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날 성탄절은 가장 많이 소비하고 쇼핑하는 명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례요한은 우리들에게 성탄절을 참되게 기다리려면 무엇보다 지난 삶을 회개하고 정의를 실천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삶에 합당한 정의의 열매를 맺는 것이 메시야를 기다리는 바른 자세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는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말했고 아브람의 자손이라고 자랑하는 자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고 말했고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도끼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하지 말아라, 교회 다닌다고 구원받았다고 자랑하지 말아라, 삶에 함당한 열매를 맺지 않으면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너무 구체적이고 직설적이어서 우리 귀에 부담스럽게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우리가 이 순간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회개해야하고 무엇을 결단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었습니다. 대림절 기간에는 세례요한이 외치는 광야의 목소리, 정의의 목소리, 회개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대림절을 지내면서 광야에서 들려오는 정직한 목소리를 듣고 회개하고 결단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며 기뻐하실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설교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의 메시지를 듣기 위해서 몰려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요한이 정의롭고 정직하고 깨끗한 예언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메뚜기와 꿀을 먹으며 광야에서 생활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며 저 옛날 조상들이 광야에서 생활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훈련받았던 때를 떠올렸습니다. 전통적으로 히브리 백성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했고 그곳에서 여러 가지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곳에 가면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율법학자들이 있었고 헤롯왕이 지은 거대한 성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그곳이 부패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소리가 옛날 조상들이 건너갔던 요단강에서 광야의 예언자, 정의의 예언자에 의해서 울려 퍼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3장 1절을 보면 세례요한이 살았던 시대를 통치했던 권력자들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디베료 황제가 왕위에 오른 지 열다섯째 해에, 곧 본디오 빌라도가 총독으로 유대를 통치하고, 헤롯이 분봉왕으로 갈릴리를 다스리고, 그의 동생 빌립이 분봉왕으로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을 다스리고, 루사니아가 분봉왕으로 아빌레네를 다스리고,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맨 위에 로마의 2대 황제인 디베료/티베리우스 황제가 있고 그 밑으로 유대를 다스리는 본디오 로마총독이 있고 그 밑으로 각 지역을 다스리는 헤롯과 그의 형제들이 있고 그 밑으로 대제사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내리지 않고 광야에 있는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권력자들이 아니라 재야의 예언자를 당신의 메신저로 선택하셨습니다. 진실되게 하나님을 만나려면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광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오늘 말씀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백성들이 물었을 때, 세례요한은 구체적으로 그들이 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일반 백성들을 향해서는 속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라고 말했고 세리들을 향해서는 너희에게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말라고 말했고 군인들을 향해서는 아무에게도 협박하여 억지로 빼앗거나 거짓 고소를 하여 빼앗거나 속여서 빼앗지 말고 너희의 봉급으로 만족하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은 세리들과 군인들을 꼭 집어서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백성들을 착취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옛날 식민지 시대에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세금을 걷는 사람들과 무기를 든 군인들이었습니다. 세리들은 필요이상으로 세금을 걷어서 착복하였고 군인들은 무력으로 백성들을 동원해서 노동을 시키고 백성들의 것을 빼앗았습니다. 세례요한은 그들을 향해서 백성들을 괴롭히고 빼앗고 억압하는 잘못된 행동을 버리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당신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삶에 합당한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면 메시야가 오셔서 당신들을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회개는 “단순히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이렇게 말하는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회개는 행동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가리킵니다. 잘못된 길을 걸어갔다면 그 잘못된 길을 버리고 바른 길로 가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옛날 백성들이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며 이 질문을 하였듯이, 오늘날 우리들은 우리들 나름대로 똑같은 질문을 하면서 이 질문을 가지고 씨름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메시야를 기다리는 바른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메시야를 기다리며 무엇을 결심해야 하고 무엇을 회개해야 할까요? 우리들의 욕심과 탐욕을 회개해야 할 것이고 자연환경을 파괴한 것을 회개해야 할 것이고 세례요한과 같이 정의롭게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요즘 국가나 회사를 운영할 때 자주 쓰이는 말이 ESG입니다. ESG의 기준에 들어가야 좋은 국가, 좋은 기업, 좋은 단체가 될 수 있습니다. E는 환경보호(Environment)를 가리킵니다. 좋은 기업이 되려면 단순히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에 만족하면 안됩니다. 환경보호에 앞장서야 하고 물건을 만들 때 땅과 물을 오염시켜도 안되고 유해물질을 사용해도 안되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해도 안되고 에너지를 많이 사용해도 안됩니다. S는 사회공헌(Social)을 가리킵니다. 이 기준을 충족시키려면 회사는 사회에 공헌해야 하고 지역사회를 위해서 봉사해야 하고 깨끗한 노동환경을 만들어야 하고 일하는 노동자들이 위험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G는 윤리경영(Governance)를 가리킵니다. 이 기준을 충족시키려면 회사는 지배구조와 재정을 투명하게 해야 하고 세금을 정직하게 납부해야 하고 법과 윤리를 지켜야 합니다. ESG의 기준을 통과해야 21세기를 이끌어 가는 좋은 정부, 좋은 기업이 될 수 있습니다. 정부와 기업 뿐만 아니라 모든 단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예로 든다면 환경을 보호하고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모든 것을 투명하게 윤리적으로 운영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단순히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교회도 ESG를 지켜야 합니다.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오늘날 우리가 세례요한에게 질문한다면 아마도 세례요한은 우리들에게 ESG를 잘 지키라고 말할 것입니다.

 

ESG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조금만 노력하면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작은 실천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작은 변화, 작은 실천이 세상을 바꾸기도 합니다. 최근 캐나다한국일보를 보니 한인들의 잘못된 식사예절과 습관에 대해서 쓴 기사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고 큰 소리를 내며 떠든다든지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반말을 하고 무례하게 대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사소한 것이지만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조용하게 말하고 조용하게 행동하고 조용하게 걸어다니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가정과 식당과 공공장소와 회사에서 사소하지만 고쳐야 할 습관이나 행동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우리들에게 삶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과 발걸음 하나하나가 이웃과 자연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평화를 전하고 하나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말과 행동이 되도록 노력하며 조용히 성탄절을 기다리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

대림절 두번째 주일 / 12월 첫번째 주일

말라기서 3:1-4, 누가복음 1:72-79

대림절, 해를 하늘 높이 뜨게 하셔서

정해빈 목사

 

 

종교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종교는 오랫동안 인류의 삶을 의미있고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정치가 사람들 사이의 관계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경제가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면 종교는 삶의 의미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각각의 종교가 인류에게 공헌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불교, 이슬람교, 유대/기독교 모두 각각의 가르침을 통해서 인류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유대/기독교는 어떤 가르침을 통해서 인류를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을까요?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은 유대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유대/기독교가 인류에게 가져다 준 좋은 가르침 중의 하나가 기다림의 신앙, 고난을 극복하는 희망의 신앙입니다. 불교가 내 안의 욕심/집착을 버리는 것을 강조하고 이슬람교가 신에 대한 충성을 강조한다면 유대/기독교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신앙, 고난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하는 신앙, 고난 중에도 포기하지 않고 미래를 기다리는 신앙을 강조합니다. 이런 신앙을 가리켜서 종말론적 신앙이라고 하는데, 종말론은 세상 마지막 날, 지구가 망하는 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날, 창조가 완성되는 날을 가리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유대/기독교 신앙은 역사를 중요하게 여기고 미래를 향해서 전진하는 직선적인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림절은 희망을 노래하고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희망의 반대말은 절망입니다. 절망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는 것을 가리키고 희망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붙잡고 기다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희망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희망은 우리에게 많은 인내와 노력을 요구합니다. 희망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쳐서 포기합니다. 하지만 사람들 중에는 기다리는 것이 오지 않으면 않을수록 힘과 에너지를 모으면서 더 열심히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다리는 것이 오지 않을 때 포기할 것이냐 아니면 그럴수록 힘과 에너지를 모아서 더 열심히 미래를 기다릴 것이냐 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테스트하는 시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굳건하게 믿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굳건하게 믿고 역사가 발전한다고 믿는 사람만이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땅이 매이면 하늘도 매일 것이고 땅이 풀리면 하늘도 풀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노력해야 하늘도 응답합니다. 땅이 먼저 움직여야 하늘도 움직입니다. 미래의 희망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땀과 노력을 흘리면서 최선을 다해서 문을 두드릴 때 희망의 문은 마침내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릇에 물이 조금씩 떨어지다가 때가 되면 그릇 위로 물이 넘치듯이 기다림의 과정을 차곡차곡 준비하며 힘과 에너지를 모으는 사람만이 때가 되었을 때 기다리는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유대/기독교 신앙은 기다리는 신앙, 미래를 희망하며 땀 흘리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류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런 신앙을 배운 사람은 고난 중에도 절망하지 않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서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세상을 보는 관점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역사가 달라집니다. 유대/기독교는 포기하지 않는 신앙,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신앙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1885년 독일 유대인 철도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이 사람은 2차대전 때는 나치 정권을 피해서 유럽을 떠돌아다니면서 막노동을 하면서 살았고 2차대전이 끝난 후에는 동독에서 늦은 나이인 57세에 처음으로 교수가 되었지만 공산주의의 박해를 받아서 10년 만에 교수직에서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인종차별과 정치적인 박해를 겪으면서 힘든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고난 가운데서도 20년 동안 노력을 기울여서 [희망의 원리]라는 책을 썼습니다. 에른스트 불로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두려움을 물리치고 미래를 상상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희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현실을 단순히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 맞서 싸운다. 이 때문에 희망은 본래의 인간됨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인간은 ‘보다 나은 가능한 삶’에 대한 희망을 통해 현실의 억압이 주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두려움을 피하기는커녕 무엇이 두려움을 일으키고 있는지를 뚜렷하게 바라보고 비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희망은 현실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를 가져다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을 극복할 수 있도록 믿음과 지혜와 용기와 상상력과 창의력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모든 것을 합친 것이 희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현실을 정확하게 볼 뿐만 아니라 현실 너머의 세계를 볼 수 있도록 믿음/지혜/용기/상상력/창의력을 주셨습니다. 희망하는 사람만이 지금의 현실에 맞서 싸울 수 있고 희망하는 사람만이 절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말라기서를 보면 말라기 선지자가 미래를 예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라기는 대략 BC 450년경 히브리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을 때 활동했는데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부패가 심했습니다. 그래서 말라기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특사/전령/메신저를 세상에 보낼 것인데 그 특사가 하나님의 길을 닦을 것이고 세상의 불순물을 제거할 것이고 그 중에서도 특히 부패하고 타락한 레위 자손과 제사장들을 깨끗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의 특사가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인데 그 특사가 세상의 죄악을 바로잡고 정의를 실현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말라기서는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인데 말라기가 살았던 시대는 희망이 보이지 않던 시대였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은 수백 년 동안 앗시리아/바벨론/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말라기 이후 세례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약 400년의 공백기가 있었습니다. 세상은 변하지 않고 백성들을 깨우쳐 줄 선지자들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말라기 선지자는 이런 상황에서도 미래를 포기하지 말라고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말라기서를 읽어보면 미래를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라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지금 식민지 백성으로서 이리 밟히고 저리 밟히면서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때가 올 것이니 절대로 역사를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말라기서와 같은 말씀을 통해서 유대교 신앙이 희망의 신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누가복음서 1장은 세례요한의 아버지 스가랴가 요한의 탄생을 기뻐하면서 부른 노래를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래전에 하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메시야를 보내주실 것인데, 아가야 너는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예언자가 되어라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임을 스가랴는 노래하였습니다. 스가랴는 1장 78절에서 메시야를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는 해를 하늘 높이 뜨게 하셔서 어둠 속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게 하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고백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백 중 하나가 바로 이 말씀입니다. 우리도 스가랴처럼 메시야가 오셔서 오늘날 전염병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삶의 걱정과 불안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밝은 해를 비추어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쯤 마스크를 벗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언제쯤 독일처럼 남과 북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희망이 언제 이루어질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미래를 계획하고 준비하고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희망의 문은 열릴 것입니다. 인종차별과 정치적인 박해를 받으면서도 [희망의 원리]를 쓴 에른스트 블로흐, 말라기, 스가랴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고난 가운데서도 소멸되지 않고 계속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유대/기독교 신앙이 우리에게 물려준 기다림의 신앙, 희망의 신앙, 약속의 신앙을 기억하면서 대림절을 묵상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