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다섯번째 주일/4월 첫번째 주일
사순절,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다
요한복음 12:1 - 8
정해빈 목사

 

 

오늘 우리는 이번 주일 성서일과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베다니에 사는 마리아가 나드 향유 옥합을 깨트려서 예수님의 발에 부은 이야기를 함께 읽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마태복음에도 나오고 마가복음에도 나오고 누가복음에도 나옵니다. 모든 복음서에 이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은 이 이야기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이름없는 한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다고 기록을 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왕이 취임하려면 반드시 머리에 기름을 부어야만 했습니다. 히브리어로 메시야, 헬라어로 그리스도라는 말 자체가 기름부음 받은 자(the anointed)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왕 중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아무도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서 예수님이 왕 중의 왕이라는 것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헌신을 통해서 비로소 글자 그대로 “기름부음 받은 자, 메시야/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보통 우리가 예수님을 가리켜서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는데 이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드렸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아무나 왕에게 기름을 부울 수 없었고 백성들을 대표하는 권위있는 남성 예언자가 왕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예수님에게 기름을 붓지 않으니까 한 이름 없는 여성이 예수님에게 기름을 부어 드렸습니다. 여인은 이 행동을 통해서 스스로 여성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향해서 당신은 권위있는 남성 예언자도 아닌데 왜 나에게 기름을 부었냐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은 예수님이 왕 중의 왕이요, 참 메시야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머리에 기름을 부은 그녀의 행동에 깊은 감동을 받으셨고 그녀를 진정한 예언자로 인정하셨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메시야/그리스도라는 것을 제일 먼저 고백한 사람은 베드로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은 받지 않으시고 한 여인의 행동은 받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영광과 출세의 그리스도만을 생각하고 고난과 섬김의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의 고백을 받지 않으셨고 반대로 이 여인은 예수님이 고난과 섬김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참 메시야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기름을 부어드렸기 때문에 이 여인의 행동을 받으셨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 중의 진짜 제자는 베드로가 아니라 이 여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이야기는 기름부음이 일어난 장소, 이스라엘의 다윗 성전과 이 여인의 집을 비교함으로써 다윗과 예수님 중에서 누가 진정한 메시야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화려한 성전에서 대제사장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고 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성전 밖 베다니 초라한 한 여인의 집에서 기름부음을 받고 왕이 되셨습니다. 다윗은 화려한 성전에서 환호와 갈채 속에서 왕이 되었지만 예수님은 고난을 앞두고 근심 중에서 왕이 되셨습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진정한 메시야는 누구인가? 권력인가 섬김인가? 다윗인가 주님인가, 누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메시야인가를 우리들에게 묻고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한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다고 기록을 했는데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은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기름을 부었다고 기록을 했습니다. 발에 기름을 부었다는 것은 2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을 축복하기 위해서 기름을 부어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발은 사랑과 섬김을 가리킵니다. 성목요일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서로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옛날에는 하인들이 주인의 발을 닦았습니다. 그래서 선생이신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니까 제자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내가 너희 발을 씻겨 준 것처럼 너희도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신체 중에서 가장 더러운 곳이 발입니다. 하지만 발은 섬김과 실천을 가리키기 때문에 귀합니다. 가롯 유다가 이 장면을 보고서는 “이 향유를 300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 하고 말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그는 도둑이어서 돈자루를 맡아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것을 훔쳐내곤 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헬라어를 자세히 보면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한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난한 사람들을 항상 너희 곁에 두고 그들을 돌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에 가장 가난하고 힘든 분은 죽음을 앞에 둔 예수님이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가장 가난하고 힘든 분이셨기에 마리아는 옥합을 깨트려서 주님께 드렸습니다. 가롯유다처럼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자고 말하는 것은 쉽지만 마리아처럼 지금 가장 가난하신 예수님을 돌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물론 말을 해서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설득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말을 많이 해도 발로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사시면서 가난한 자들을 먹이고 병자들을 고치기 위해서 발로 걸어 다니셨습니다. 마리아는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시고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는 예수님을 위해서 주님의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두번째로 마리아는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발에 기름을 부어드렸습니다. 요한복음 12장 앞장 11장을 보면 예수님이 마리아의 오라버니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리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니까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이 시기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즉 예수님은 나사로는 살리시고 반대로 당신은 죽음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다른 사람은 살리고 자신은 죽는 것이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주님께서 죽으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시체를 매장할 때 기름을 발랐습니다. 마리아는 오라버니는 살리시고 대신 죽음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그의 몸에 기름을 부어 드렸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마리아는 3가지 행동으로 주님은 감동시켰습니다. 첫째로 마리아는 기름을 부어드림으로써 예수님을 메시야/그리스도, 기름부음 받은 자로 만들어 드렸습니다. 둘째로 마리아는 발에 기름을 부어드림으로써 예수님의 섬김의 행동을 축복해 드렸습니다. 셋째로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면서 거룩한 낭비를 실천했습니다. 예수님은 돈을 계산하는 가롯유다를 향해서, “유다야, 너는 돈을 계산만 할 줄 알았지 언제 한번 거룩한 낭비, 뜨거운 사랑의 낭비를 해 본적이 있었느냐” 물으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무엇이든지 아껴야 하고 낭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끼는 이유는 꼭 필요한 순간에 뜨거운 사랑, 거룩한 낭비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뜨거운 사랑, 거룩한 낭비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아름답습니다. 이 땅에 뜨거운 사랑, 거룩한 낭비가 없다면 우리의 인생은 각박한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시가 있습니다.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만이 거룩한 낭비를 할 수 있습니다. 뜨겁게 사랑하기 때문에 아낌없이 줄 수 있고 이런 뜨거운 사랑을 받은 사람은 고난을 견딜 수 있습니다. 뜨거운 사랑이 고난을 이깁니다. 오늘 말씀은 복음서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의 이야기도 함께 전파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하나님 나라의 기쁨이 무엇인지, 뜨거운 사랑이 무엇인지, 거룩한 낭비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서 재산을 탕진한 것처럼, 이 여인도 죽음의 길을 떠나시는 주님을 축복하기 위해서 기름을 탕진했습니다. 하지만 그 탕진은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하는 복된 탕진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이런 아름다운 사랑과 헌신의 이야기를 오늘 여기에서 실천해야 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Lent, anointing Jesus’ feet
John 12:1 - 8

 

Six days before the Passover Jesus came to Bethany, the home of Lazarus, whom he had raised from the dead. There they gave a dinner for him. Martha served, and Lazarus was one of those at the table with him. Mary took a pound of costly perfume made of pure nard, anointed Jesus’ feet, and wiped them with her hair. The house was filled with the fragrance of the perfume. But Judas Iscariot, one of his disciples the one who was about to betray him, said, “Why was this perfume not sold for three hundred denarii and the money given to the poor?” He said this not because he cared about the poor, but because he was a thief; he kept the common purse and used to steal what was put into it. Jesus said, “Leave her alone. She bought it so that she might keep it for the day of my burial. You always have the poor with you, but you do not always have me.” (John 12:1-8)

 

John chapter 12 states the story of Mary at Bethany who poured oil on Jesus' feet, six days before the Passover. Mary touched Jesus' heart in three acts. First, by anointing him, Mary made Jesus the Messiah / Christ which means the anointed. Second, Mary blessed Jesus' public life by pouring oil on his feet. Third, Mary anointed his body to bless him walking down the road of death. Mary prepared the oil beforehand for the body of Jesus to be dead. Today's Bible scripture shows us Mary's true commitment to the Lord walking down the path of the cross. Mary realized that the Lord raised her brother Lazarus from the tomb and walked the path of death as a result. Today's passage shows us one of the most touching stories of the Gospel narratives. Jesus said, "wherever the good news is proclaimed in the whole world, what she has done will be told in remembrance of her." When Judas pointed out that it was better to sell this perfume and give it to the poor, Jesus responded, "The poor are always with you, but I am not always with you." Mary poured oil for Jesus, who is now in the poorest condition. While Judas spoke only by mouth to help the poor, Mary practiced the best of love for the poor. Truly passionate love makes our lives enriched and makes us endure suffering. If there is no dedicated love and holy waste on earth, our lives will become dry and barren. Truly passionate and enthusiastic love make us endure suffering and make our lives enriched.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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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네번째 주일/3월 다섯번째 주일
사순절, 가부장적인 아버지를 넘어서
누가복음 15:11 - 24
정해빈 목사

 

 

오늘 우리가 읽은 이번 주일 성서일과, 누가복음 15장 말씀은 “탕자의 비유”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신 분들은 이 이야기를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너무 유명한 말씀이기 때문에 굳이 설교하지 않아도 이 말씀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에게 가까이 몰려들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투덜거리며 말하였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이 세리들과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을 비난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친구를 사귈 때 나보다 나은 사람을 사귀고 싶어합니다. 우리들도 자녀들에게 친구를 사귀려면 집안도 좋고 공부도 잘하는 사람을 사귀라고 말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왜 당신은 가난하고 배운 것도 없고 율법도 잘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어울리느냐고 따졌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한 대답으로서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이 왜 세리들과 죄인들을 가까이 하시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 몫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아버지가 재산을 나누어 주자 작은 아들은 가지고 가서 방탕하게 낭비했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탕진했을 때 마침 흉년이 들어서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남의 집 종이 되어서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돼지를 돌보게 되었는데 그래도 굶주림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서는 품꾼들이 배부르게 먹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죽는구나” 이렇게 생각한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에게 “내가 아버지 앞에서 죄를 지었으니 나를 아들로 생각하지 마시고 품꾼으로 써 주십시오”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둘째 아들은 두가지 죄를 저질렀습니다. 첫째로는 아버지가 아직 살아계신데 아버지 재산을 달라고 요구했고 둘째로는 아버지가 준 재산을 낭비했습니다. 옛날에는 아버지 재산은 아버지가 죽고 난 다음에 가질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신데 아버지 재산을 달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 빨리 죽으라는 말과 똑같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아버지가 준 돈을 방탕하게 쓰며 낭비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둘째 아들을 보통 방탕한 아들, 탕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 신명기 21장에 의하면 큰 아들은 아버지 재산의 2/3을 가질 수 있었고 나머지 아들들이 1/3의 재산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둘째 아들 입장에서는 아버지 재산의 2/3가 형 것이니까 내가 집에 있어도 얻을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둘째 아들 입장에서는 차라리 1/3을 가지고 밖에 나가서 사업을 하든지 장사를 하든지 내 인생을 살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아버지 집안/종/재산을 물려받으니까 집에 남아 있어야 했습니다. 옛날에는 아버지가 하던 직업을 첫째 아들이 그대로 물려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둘째 아들 입장에서는 굳이 형과 함께 살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첫째 아들은 대체로 모험을 싫어하고 전통을 지키려고 합니다. 하지만 둘째 아들은 가진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려고 합니다. 둘째 아들에게는 첫째 아들에게는 없는 모험심, 개척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인류 역사를 보면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것을 개발하고 역사를 발전시킨 사람들은 첫째가 아니라 둘째였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둘째나 셋째나 넷째로 태어나신 분들은 첫째가 아니라는 것에 섭섭해 하지 마시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대체로 점잖고 모험을 싫어하고 보수적이지만 둘째나 셋째는 개방적이고 진취적이어서 인류의 발전은 첫째가 아닌 사람들에 의해서 주로 이루어져 왔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사람은 둘째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입니다. 오늘 말씀을 가만히 보면 방탕한 사람은 둘째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탕자가 아니라 아버지가 탕자였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둘째 아들보다 아버지가 재산을 더 많이 낭비했습니다. 아버지는 자기 몫을 달라는 둘째의 요구를 들어주었고, 자식이 돌아오기를 집 앞에서 기다렸고, 자식이 오자 달려갔고,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고,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아버지가 아직 죽지 않았는데 자기 몫을 달라는 둘째의 요구를 들어 준 것도 이상하고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를 달려가서 껴안고 잔치를 벌인 것도 이상합니다. 예수님 당시 아버지들은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달려가면 체통이 없어 보입니다. 옛날 아버지들은 조선시대 양반들처럼 권위있게 천천히 걸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 나오는 아버지는 체통이나 권위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재산 탕진하고 거지로 돌아온 자식이 뭐가 좋다하고 달려가서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뒷부분을 보면 이 광경을 본 첫째 아들이 아버지를 구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버지 체통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잔치 한번 베풀지 않았으면서 재산을 탕진한 둘째에게는 왜 살진 송아지를 잡았냐고 따졌습니다. 아버지는 첫째에게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얻었으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니까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비난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자비로운 아버지의 마음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첫아들과 같다면 세리들과 죄인들은 집을 뛰쳐나간 둘째 아들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비로운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껴안아주고 잔치를 베풀어 준 것처럼, 예수님은 둘째 아들과 같은 세리들과 죄인들을 가장 먼저 찾으시고 그들을 껴안으시고 그들을 하나님 나라 잔치에 초대하셨습니다. 첫째 아들이 아버지와 둘째 아들을 못마땅해 하는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과 세리들과 죄인들을 못마땅해 하지 말고 자비로운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본받으라고 예수께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5년 전 쯤에 딸아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제가 매일 아침마다 차로 운전해 준 적이 있었습니다. 아침에 학교 갈 시간이 되었는데 빨리 나오지 않으니까 “지금 가야 한다. 빨리 나와라” 이렇게 말을 하다가 그래도 나오지 않으면 “너 지금 몇 시인데 아직도 안 나오니, 지금 안 나오면 지각한다, 빨리 나와라”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아이는 차에 타서는 왜 아침부터 나에게 소리 지르냐고 따집니다. 엄마는 자기를 사랑하는 줄 아니까 아이를 혼내도 괜찮습니다. 열 번 사랑한다고 말하고 한번 혼내는 것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평소에 사랑한다는 말 안하다가 갑자기 혼내면 아이들이 싫어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이 딱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돈 벌어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집주인/아버지가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집주인/아버지를 무서워했습니다. 아버지는 노예를 죽일 수도 있었고 살릴 수도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자녀에게 재산을 줄 수도 있었고 안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그 당시 엄격하고 가부장적인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아버지, 자식이 달라는 것을 다 주는 아버지, 자식을 위해 재산을 낭비하는 아버지, 둘째가 돌아왔다고 뛰어가는 아버지, 둘째를 껴안고 옷을 입혀주고 잔치를 베풀어주는 아버지, 위엄이나 체통은 전혀 없고 대신 자녀를 보며 기뻐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자비로운 하늘 아버지를 본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사람보다 지위와 위치에 따라서 권위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권위는 필요하지만 권위주의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들 모두가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자비로운 하나님의 모습을 실천하면서 이 땅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Lent, beyond a patriarchal father
Luke 15:11 - 24

 

Then Jesus said, “There was a man who had two sons. The younger of them said to his father, ‘Father, give me the share of the property that will belong to me.’ So he divided his property between them. A few days later the younger son gathered all he had and traveled to a distant country, and there he squandered his property in dissolute living. When he had spent everything, a severe famine took place throughout that country, and he began to be in need. So he went and hired himself out to one of the citizens of that country, who sent him to his fields to feed the pigs. He would gladly have filled himself with the pods that the pigs were eating; and no one gave him anything. But when he came to himself he said, ‘How many of my father’s hired hands have bread enough and to spare, but here I am dying of hunger! I will get up and go to my father, and I will say to him, “Father, I have sinned against heaven and before you; I am no longer worthy to be called your son; treat me like one of your hired hands.”’ So he set off and went to his father. But while he was still far off, his father saw him and was filled with compassion; he ran and put his arms around him and kissed him. Then the son said to him, ‘Father, I have sinned against heaven and before you; I am no longer worthy to be called your son.’ But the father said to his slaves, ‘Quickly, bring out a robe—the best one—and put it on him; put a ring on his finger and sandals on his feet. And get the fatted calf and kill it, and let us eat and celebrate; for this son of mine was dead and is alive again; he was lost and is found!’ And they began to celebrate. (Luke 15:11 - 24)

 

Jesus told this parable to the Pharisees and the scribes who blamed Jesus for sitting and eating together with so-called sinners and tax collectors. This parable is commonly called "The Prodigal Son." But it might better be named after "The Prodigal Father," if "prodigal" really does mean "recklessly extravagant." The son wastes his inheritance on a good time in a distant land, but his father seems just as free and even wasteful in lavishing his wealth on a son who seems to come home not so much in sincere repentance as in calculated self-interest and desperation. What was important to the father was not that his son repented, but that he returned to his father's house. When the father saw the son come home, he ran, put his arms around him, kissed him, put a robe on him, and put a ring on his finger and sandals on his feet. Through this parable, Jesus showed us the heart of God who welcomes the so-called tax collectors and sinners. According to the parable Jesus said in the Gospel of Luke chapter 15, God in heaven is not a strict and authoritative patriarchal father, but the one who is awaiting us, hugging us, running toward us, and having a feast for us. Considering that the landlords and fathers of the ancient world had all authority and patriarchy, we can see how amazing the image of God in heaven Jesus showed us. Could we be such a good and compassionate father, as the "Prodigal Father" in this parable? All of us are called to live in the practice of the merciful God in our homes, churches, and societies.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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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세번째 주일/3월 네번째 주일
사순절, 이웃의 고난과 우리의 회개
누가복음 13:1 - 9
정해빈 목사



사순절 세번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은 고난에 대해서 묵상하는 절기입니다.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을 묵상하고 동시에 이 땅에서 고난받는 사람들을 기억하는 절기가 사순절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피할 수 없는 문제 중의 하나가 고난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매일 고난과 시련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면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때로는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좌절하고 절망하기도 하고 때로는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고 하나님을 가까이 만나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수없이 많은 종류의 고난을 경험합니다. 개인적인 고난도 있고 사회적인 고난도 있고 자연적인 고난도 있습니다. 내가 잘못해서 받는 고난도 있고 나는 잘못한 것이 없지만 다른 사람 때문에 받는 고난도 있습니다. 고난이 없을 때는 고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난이 닥치면 우리는 괴로워하고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이 왔는지 고민하고 이 고난을 어떻게 해쳐나가야 하는지 몸부림을 치게 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고난을 크게 5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로 생로병사, 육체의 연약함에서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의 몸이 흙에서 왔기 때문에 우리 몸은 쉽게 부서지고 깨집니다. 옛날에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입안에 있는 뼈를 깎는 수술을 하셨는데, 그 분이 저에게 “목사님, 뼈를 깎는 고통이 얼마나 아픈지 아십니까? 사람들이 왜 종종 ‘뼈를 깎는 고통’이라는 말을 쓰는 지 이제야 알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은 뼈를 깎는 고통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육체의 고난을 겪는 분들은 육체의 고통이 제일 크다고 말할 것입니다. 두번째로 경제적인 가난에서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의식주가 필요하고 최소한의 인간적인 환경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가난은 사람에게 큰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예를 들어서 비싼 월세를 내지 못하는 가난한 노인/청년들은 1.5평 고시원/쪽방에서 잠을 잘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전 세계 곳곳에서 가난과 굶주림을 피해서 여기저기로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경제적인 고난을 겪는 분들은 가난이 주는 고통이 제일 크고 비참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세번째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에서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부모자식, 형제, 부부, 직장동료, 이웃사람과 관계가 멀어지고 다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가정/사회/직장에서 다른 사람과 갈등하고 다투고 고소하면 당사자는 심적으로 큰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에는 육체적인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도 있습니다. 때로는 정신적인 고통이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크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이러 고통을 경험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갈등하고 다투고 고소하고 원수지는 일보다 괴로운 고난은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네번째로 나쁜 사람들 때문에 받는 억울한 고난이 있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악을 행하는 사람 때문에 고난받을 때가 있습니다. 백인우월주의자가 이민자들에게 총기를 난사하고, 강도가 나를 공격하고, 난폭 운전자가 갑자기 내 차를 덮치면 나는 그 고통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분명이 이 세상에는 나쁜 사람들 때문에 억울하게 피해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어쩌면 가장 억울한 고난이 바로 이 고난일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번째로 천재지변/사고가 주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 고난도 네번째 고난과 마찬가지로 억울한 고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연재해와 사고 때문에 일어나는 고난은 나의 잘못과 아무 상관이 없지만 내가 그때 거기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크게 5가지의 고난을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이 외에도 이 세상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고난이 많이 있습니다. 육체의 고난을 겪는 분은 육체의 고통이 제일 크다고 말씀하실 것이고, 경제적인 고난을 겪는 분은 경제적인 고통이 제일 크다고 말씀하실 것이고, 인간관계의 고난을 겪는 분은 인간관계의 고통이 제일 크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쁜 사람 때문에 고난받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 주는 고통이 제일 크다고 말씀하실 것이고, 자연재해/사고로 인해 고난받는 사람은 자연재해/사고가 주는 고통이 제일 크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고난만 받아도 힘든데 만일 이런 고통을 동시에 만나는 분이 계시다면 그 분이 경험하는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으면 몸과 마음이 괴로워합니다. 왜 하필 내가 고난을 받아야 합니까?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들 중에는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고난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13장 말씀이 바로 그 내용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큰 고난이 2가지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빌라도 총독이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를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제물에 섞는 일이 있었고 예루살렘에 있는 실로암 탑이 무너져서 18명이 죽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하고 그 피를 희생제물에 섞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잔인한 일이었습니다. 빌라도가 일으킨 고난은 네번째 고난, 악한 사람 때문에 선한 사람이 받는 고난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고, 실로암 탑이 무너진 것은 다섯번째 고난, 천재지변이나 사고 때문에 일어나는 고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들이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고난 받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성경 신명기 같은 책을 보면 하나님께 순종하면 축복받고 불순종하면 벌을 받는다는 말씀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이 구약성경에 많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 당시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고난받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 모두는 하나님 보시기에 다 똑같이 불완전합니다. 내가 의롭기 때문에 고난받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나도 저 사람과 똑같은 고난을 받을 수 있었는데 저 사람이 나보다 먼저 고난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죽은 것은 그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빌라도라는 나쁜 통치자가 그들을 학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슬퍼하고 같이 아파하기 보다는 그들의 죄를 따지는 사람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청중들을 향해서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같이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너희들도 저 사람들처럼 벌 받기 전에 회개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고난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을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 사람들은 죄가 많아서 벌을 받았고 나는 죄가 없기 때문에 벌을 받지 않았다는 그런 이기적인 생각을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난받는 사람들을 멀리하고 무관심했던 것을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난받는 사람들을 멀리하고 무시하지 않았는지, 내가 가해자 쪽에 서지 않았는지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유대교 랍비인 헤롤드 쿠슈너는 “not why me? but why not me?”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고난이 왔냐고 묻을 것이 아니라 반대로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이 오지 않았냐고 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고난을 나의 고난으로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6절을 보면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니까 찍어 버리겠다고 주인이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자 포도원지기가 내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 지도 모릅니다. 그 때에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버리십시오.” 열매없는 무화과나무는 자비로운 포도원지기 덕분에 1년을 더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비로우시고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망하지 않고 인생을 더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내가 20년을 더 살 수도 있고 30년을 더 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삶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시간과 기회를 주셨습니다. 회개는 고난받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을 옆에서 지켜보고는 있는 우리들이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억울하게 고난받은 이들을 보며 함께 슬퍼하셨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을 향해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는 살아남은 자들이 해야 할 몫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당한 이웃을 보면서 회개하고 그들의 몫까지 대신 살라는 뜻에서 우리들에게 시간과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은 오래 살아야 합니다. 더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고난당한 사람들의 몫까지 살아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의 억울한 고난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살라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시간과 기회를 주셨습니다. 고난과 재난을 당해 고통당하는 이웃을 바라보며 아파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Lent, suffering of neighbours and our repentance
Luke 13:1 - 9


At that very time there were some present who told him about the Galileans whose blood Pilate had mingled with their sacrifices. He asked them, “Do you think that because these Galileans suffered in this way they were worse sinners than all other Galileans? No, I tell you; but unless you repent, you will all perish as they did. Or those eighteen who were killed when the tower of Siloam fell on them—do you think that they were worse offenders than all the others living in Jerusalem? No, I tell you; but unless you repent, you will all perish just as they did.” Then he told this parable: “A man had a fig tree planted in his vineyard; and he came looking for fruit on it and found none. So he said to the gardener, ‘See here! For three years I have come looking for fruit on this fig tree, and still I find none. Cut it down! Why should it be wasting the soil?’ He replied, ‘Sir, let it alone for one more year, until I dig around it and put manure on it. If it bears fruit next year, well and good; but if not, you can cut it down.’” (Luke 13:1 - 9)


Today's Bible scripture tells us stories about those who were slaughtered and those who died in an accident by an unrighteous ruler. Jesus pointed out that they suffered not because of their sins but because of the evils of the world and our indifference. Once Rabbi Harold Kushner said, "when there is suffering, we should not ask 'why me?' but 'why not me.' Today's story reminds us not to rejoice in things we have not suffered, but to stand with those who are afflicted. God called us to repent our indifference and to work hard so that no more unfortunate suffering and calamity would occur on this earth.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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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두번째 주일 / 3월 세번째 주일
사순절, 암탉이 제 새끼를 품듯이
누가복음 13:31 - 35
정해빈 목사




지난 3월 8일은 세계여성의 날(International Women’s Day)이었습니다. 매년 3월 달이 되면 여성의 날과 관련된 행사가 많이 열립니다. 사람의 절반은 여성이고, 할머니/어머니/아내/누이/딸/며느리가 여성입니다. 여성의 날이 있으면 남성의 날이 있어야 되는 것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여성의 날을 지키는 것은 여성 차별이 세상에 아직도 많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크게 3가지 차별, 계급차별, 인종차별, 성차별이 있었습니다. 계급차별은 노예제도가 폐지되면서 공식적으로는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노예제도는 없어졌지만 빈부격차라는 새로운 계급차별이 등장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인종차별은 옛날에 비하면 많이 없어졌지만 아직 남아있습니다. 지난 금요일 뉴질랜드에서는 백인 우월주의자가 이민자들과 이슬람 사람들을 향해서 총을 쏴서 49명이 사망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극단적인 인종차별/종교차별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3가지 차별 중에서 가장 많이 남아있는 차별을 꼽으라면 여성차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성민우회라는 여성단체가 직장 여성들에게 지금까지 살면서 성차별/성희롱/성추행을 경험해 본적이 있냐고 설문 조사를 했더니 65%가 그렇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여성들은 학교와 직장과 일상생활에서 성차별/성희롱/성추행을 너무 많이 당해서 일일이 셀 수가 없다고 대답하기도 했습니다. 영국 BBC 방송국도 영국 여학생의 1/3이 성희롱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보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남성들은 여성들이 학교와 직장과 일상생활에서 어떤 차별을 받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한국에서는 여자 검사가 남자 검사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고발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검사는 사람을 기소할 수 있는 권한이 있기 때문에 가장 힘이 센 직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이 센 검사들 사이에서도 성추행이 있다는 이야기는 이런 성차별과 성추행이 직장에 만연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최근에는 미국 헐리우드 여배우들이 남자배우들에게 추행/폭력을 당했다고 고발하는 Me Too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고 최근 한국에서는 유명 남자 연예인들이 여성을 상대로 범죄를 저질렀다는 뉴스가 매일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100년 전인 1918년 영국에서는 자기 이름으로 집을 가지고 있는 30세 이상의 여성에게 선거권이 처음 주어졌고 10년이 지난 1928년에 21세 이상 모든 여성에게 선거권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니까 100년 전에는 여성들이 선거에 나갈 수도 없었고 투표할 수도 없었습니다.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을 주제로 한 <서프러제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서프러제트는 참정권을 뜻하는 서프러지(suffrage)에 여성을 뜻하는 접미사 ‘ette’를 붙인 말로 여성 참정권을 얻기 위해서 일하는 여성 운동가들을 가리킵니다. 세탁 공장에서 일하는 한 여성이 처음에는 아무 생각없이 살다가 차츰 여성 참정권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행동하는 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 영화를 보면 여성들이 참정권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때로는 과격한 행동도 서슴치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 여성이 국왕이 타고 가는 말에 뛰어들어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왜 남자만 투표하고 여자는 투표하면 안 되냐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감동적인 영화는 <히든 피겨스, Hidden Figures, 숨겨진 사람들>라는 영화입니다. 1960년대 초 미국 NASA는 우주 로켓을 먼저 개발한 소련을 따라잡기 위해서 기술자들을 모집하는데 3명의 천재 흑인 여성들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 자기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3명의 흑인 여성들이 백인 여성들과 백인 남성들로부터 차별받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흑인이기 때문에 인종차별도 받아야 했고 여성이기 때문에 성차별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런 수모와 차별 끝에 이들은 전문가로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여성들이 지난 10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차별을 받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번 주일 성서일과 누가복음 13장 말씀을 보면 몇몇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걱정해서 갈릴리를 통치하는 헤롯 왕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니까 여기를 떠나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헤롯을 여우라고 부르시면서,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것이요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끝낸다고 여우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갈 것이고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를 통치하는 헤롯에게 붙잡히지 않기 위해서 갈릴리를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정치/경제/종교의 모든 권력이 몰려있는 예루살렘에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을 다양한 모습으로 고백했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새로운 율법을 가르치는 율법 교사로 묘사했고, 마가복음은 우리를 위해 고난받는 종으로 묘사했고, 요한복음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으로 묘사했습니다. 히브리서는 우리를 위해 대신 기도하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피 흘리신 대제사장/제물로 예수님을 묘사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말씀을 보면 누가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을 향해서 걸어가시는 정의의 예언자,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이 말씀을 선포하시고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정의의 예언자로 고백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지금까지 많은 예언자들이 예루살렘 권력자들에 의해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예레미야는 말씀을 전하다 예루살렘 감옥에 갇혔고 이사야는 전설에 의하면 톱으로 몸이 잘려지는 순교를 당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예언자들이 걸어갔던 길을 피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누가복음이 예수님을 정의의 예언자로 고백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꾸짖기만 한 것이 아니라 부패하고 타락한 그곳을 향해서 슬퍼하시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예루살렘은 예루(도시)+살렘(평화)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글자 그대로 “평화의 도시”가 되어서 암탉이 새끼를 품에 안듯이 가난한 사람들을 품어주고 하나님의 평화와 자비를 드러내는 곳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부패하고 타락한 강도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스럽고 정의롭고 따뜻한 도시가 아니라 부패하고 타락한 도시를 바라보면서 슬퍼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무섭고 잔인하고 진노하시는 분으로 묘사하는 장면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잔인한 하나님을 왜 믿어야 하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확실히 성경에는 그런 장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하나님을 무섭고 잔인하고 진노하시는 분, 남성 군대 사령관으로 묘사하는 장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예수님 말씀처럼 여우와 늑대가 병아리를 잡아먹으려고 올 때에 암탉이 목숨을 걸고 새끼를 보호하듯이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으시는 하나님의 모습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여성의 날을 맞이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여성의 마음과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여성을 비하하는 가장 잘못된 속담입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는 것이 아니라 암탉이 울고 새끼를 낳고 알을 낳아야 집안이 잘 됩니다. 암탉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십니다. 가난한 자들을 먹이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교회가 가져야 할 마음이 암탉의 마음입니다. 우리 교회가 암탉이 날개를 펴서 자기 새끼를 보호하는 것처럼, 서로서로 보호하고 사랑하고 품어주는 곳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암탉과 같은 교회, 어머니와 같은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모든 사람을 환영하고 품어주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홀로가 아닙니다. 암탉이 목숨을 바쳐서 새끼를 보호하듯이 주님께서는 목숨을 바쳐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십니다. 고난이 있을 때, 우리의 목자되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사순절을 묵상하면서 선하시고 자비로시고 진실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묵상하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Lent, as a hen gathers her brood

Luke 13:31 - 35


At that very hour some Pharisees came and said to him, “Get away from here, for Herod wants to kill you.” He said to them, “Go and tell that fox for me, ‘Listen, I am casting out demons and performing cures today and tomorrow, and on the third day I finish my work. Yet today, tomorrow, and the next day I must be on my way, because it is impossible for a prophet to be killed outside of Jerusalem.’ Jerusalem, Jerusalem, the city that kills the prophets and stones those who are sent to it! How often have I desired to gather your children together as a hen gathers her brood under her wings, and you were not willing! See, your house is left to you. And I tell you, you will not see me until the time comes when you say, ‘Blessed is the one who comes in the name of the Lord.’” (Luke 13:31 - 35)


Luke chapter 13 shows that Jesus is not only a prophet of justice who fights the injustice of Jerusalem, heal the sick, casts out demons, but is a prophet of compassion, grieving to the corrupt and fallen people. Jerusalem originally meant "a city of peace," but it became a corrupt and depraved city. Grieving at the rebellion and disobedience of Jerusalem, Jesus expressed his heart with a hen who gathers her brood under her wings. From today's passage, We find out that the God of Christianity can be best expressed as a good and merciful, not a cruel and terrible one. Truly, the heart of God is like the heart of a hen and the heart of a mother who loves children. Today's scripture shows that the image of a hen should be one of the best images describing the church. We confess that our God will not break a bruised reed, nor will quench a dimly burning wick. We are called to be a church, protecting and loving one another with the Christ.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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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첫번째 주일/3월 두번째 주일
사순절, 예수께서 유혹을 받으셨다
누가복음 4:1 - 13
정해빈 목사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번 주일 성서일과에 해당하는 누가복음 4장,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받고 유혹받으신 이야기를 함께 읽었습니다. 사순절 기간이 되면 예수님이 시험받으신 이야기가 자주 등장합니다. 사순절은 고난과 시련, 시험과 유혹에 대해서 묵상하는 절기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다보면 고난과 시련을 받을 때가 있고 시험과 유혹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가 오면 예수님이 고난과 시련, 시험과 유혹을 이기신 것을 기억하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고난과 시련, 시험과 유혹을 이기라는 뜻에서 사순절 말씀으로 오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이 세례받으신 후에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셨고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을 받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수동적으로 표현하면 예수님의 광야 40일 기간은 악마의 유혹을 받는 기간이었지만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예수님의 광야 40일 기간은 공생애를 하시기 전에 기도하고 훈련하고 연단 받으면서 당신의 사역을 준비하는 기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을 지내면서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하게 깨달으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한가지 중요한 교훈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시험과 유혹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그 시험과 유혹이 왜 나에게 다가왔는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대체로 세상의 유혹은 나의 약점을 파고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약점이 무엇인지, 나를 유혹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를 유혹하는 것이 무언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내가 누구인지, 나의 사명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40일 광야에서 금식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는 악마의 유혹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깨달으셨습니다. 나를 유혹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깨달을 때, 우리는 성숙한 사람, 사명이 분명한 사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가장 먼저 굶주리는 백성들을 배부르게 먹여야 할 것이 아닙니까? 빵이 부족하다면 돌을 빵으로 만들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이 유혹에 대해서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대답하셨습니다. 빵을 먹을 때는 말씀도 같이 먹어야 합니다. 말씀과 빵이 서로 만나야 합니다. 빵은 말씀의 지시를 받아야 합니다. 말씀의 지시를 받지 않는 물질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자기 욕심을 채우는 수단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이 돌로 빵 100개를 만들어서 10명에게 주면 모든 사람이 배부르게 먹을까요? 한 사람이 10개씩 먹으면 모두가 배부를 것 같지만 아마도 힘센 사람이 빵을 차지하려고 하면 배부른 사람과 배고픈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굶주리는 것은 빵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말씀대로 빵을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훈련이 없으면 아무리 빵을 많이 만들어도 굶주림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히브리 백성들이 광야생활 할 때 만나를 내려주셨는데 내일 먹을 것은 내일 거두고 오늘은 오늘 먹을 것만 거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광주리에 담았는데 하루가 지나고 보니까 다 썩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통해서 히브리 백성들에게 말씀에 순종하는 훈련, 욕심을 줄이는 훈련, 물질을 바르게 사용하는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셨는데 마지막에 음식이 12 광주리에 남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음식이 12 광주리에 남을 수 있었을까요? 사람들이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싸가려고 하였다면 음식이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군중들이 예수님 말씀에 감동받고 말씀의 지시를 따랐기 때문에 음식이 남을 수 있었습니다. 만나와 오병이어 이야기는 말씀의 지시를 받아서 물질을 사용할 때 모두에게 풍성하게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질을 사용할 때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지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보라는 뜻에서 예수님은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악마는 두번째로 나에게 엎드려 절하면 세상 모든 나라의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유혹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 모든 나라의 권세와 영광은 당시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로마제국의 권력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악마는 로마제국에 엎드려 절하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나누어 주겠다고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마치 일제 강점기에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 사람들에게 일제에 순종하면 권력을 나누어 주겠다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권력에 복종하는 것을 거부하셨습니다. 성경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중에 제자들에게 “세상 권력자들은 백성들을 마구 짓누르고 폭력을 행사하지만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되고 너희는 백성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유혹 중의 하나가 힘/권력에 대한 유혹입니다. 힘/권력이 있으면 그 힘/권력을 이용해서 자기 욕심을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으 제자들에게 너희는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악마는 세번째로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가서 여기서 뛰어내리면 하나님이 너를 지키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세번째 유혹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어났다는 말은 이 유혹이 잘못된 종교와 관련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강도의 소굴과 같아서 그곳에는 부패하고 타락한 제사장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고 종교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혹세무민하고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고 하나님을 이용하고 자기를 자랑하는 종교는 거짓 종교입니다. 첫번째 유혹이 잘못된 물질에 대한 유혹이고 두번째 유혹이 잘못된 힘/권력에 대한 유혹이라면 세번째 유혹은 잘못된 종교, 자기과시/자기명예/자기우상의 유혹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잘못된 경제, 잘못된 정치, 잘못된 종교의 유혹을 분명하게 보시고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이를 물리치셨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유혹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것이 중요하고 나라와 민족을 유혹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국과 북한이 두번째 정상회담을 했습니다. 북한 입장에서는 실무회담에서 다 합의했는데 미국이 서명을 안 하니까 화가 나서 미국 너희들이 이런 식으로 하면 우리는 핵무기를 더 많이 만들겠다고 생각하면 안 될 것입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계 최강대국이니까 너희 북한은 우리에게 무조건 항복하라고 강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한국 국민들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남북한의 대화를 통해서 다함께 잘사는 나라, 평화로운 나라를 후손들에게 물려줄 것인지, 아니면 서로 싸우다가 다같이 망할 것인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유시민 씨가 쓴 [나의 한국 현대사] 책을 보면 국가의 발전 단계를 4가지로 나누는 대목이 나옵니다. 보통 국가가 세워지면 처음에는 안보국가, 전쟁을 막고 나라를 튼튼하게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는 경제국가, 경제를 살려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민주국가, 민주주의에 대한 욕구가 늘어나기 마련입니다. 민주국가 이후에는 빈부격차에 대한 불만 때문에 복지국가가 만들어집니다. 그러면 복지국가 다음에는 무엇이 와야 할까요? 안보도 주요하고 경제-민주-복지도 중요하지만 그 다음에는 온 인류의 생명과 평화와 환경을 위해서 일하는 나라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광야 훈련을 통해서 말씀이 없는 빵을 멀리하고, 정의롭지 못한 권력을 멀리하고, 타락한 종교를 멀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으셨습니다. 물질의 유혹, 힘의 유혹, 자기우상의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을 깨달으셨습니다. 이러한 유혹을 깨달으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마지막까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공생애를 마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첫번째로는 나의 약점이 무엇인지, 나를 유혹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두번째로는 나에게 다가오는 유혹을 말씀과 기도로 물리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유혹을 물리칠 때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순절을 묵상하면서 예수께서 말씀과 기도로 3가지 유혹을 물리치신 것처럼, 말씀과 기도로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Lent, Jesus was tempted
Luke 4:1 - 13


Jesus, full of the Holy Spirit, returned from the Jordan and was led by the Spirit in the wilderness, where for forty days he was tempted by the devil. He ate nothing at all during those days, and when they were over, he was famished. The devil said to him, “If you are the Son of God, command this stone to become a loaf of bread.” Jesus answered him, “It is written, ‘One does not live by bread alone.’” Then the devil[a] led him up and showed him in an instant all the kingdoms of the world. And the devil said to him, “To you I will give their glory and all this authority; for it has been given over to me, and I give it to anyone I please. If you, then, will worship me, it will all be yours.” Jesus answered him, “It is written, ‘Worship the Lord your God, and serve only him.’” Then the devil took him to Jerusalem, and placed him on the pinnacle of the temple, saying to him, “If you are the Son of God, throw yourself down from here, for it is written, ‘He will command his angels concerning you, to protect you,’ and ‘On their hands they will bear you up, so that you will not dash your foot against a stone.’” Jesus answered him, “It is said, ‘Do not put the Lord your God to the test.’” When the devil had finished every test, he departed from him until an opportune time. (Luke 4:1-13)


Today's scripture points to the fact that Jesus, through 40 days of word and prayer, resisted three temptations of the devil. Truly Jesus overcame the temptation of possession, power, and idol. Because Jesus knew exactly the nature of the temptation to interfere with the kingdom of God, he was able to devote himself to public life without hesitation. The meditating of scriptures, on the first Sunday of Lent, invites us to think about what it is that tempts us today. We are called to be mature and whole by overcoming the temptation and through the word and prayer.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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