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절 후 열한번째 주일 / 8월 네번째 주일

성령강림절, 참회록과 성화

예레미야 1:4-7, 누가복음 13:10-17

정해빈 목사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운다.” 윤동주 시인이 쓴 [참회록]이라는 시입니다. 시에 나오는 것처럼 나이 24년 1개월 되었을 때 일본 유학을 가기 위해서 배를 타려면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해야만 했습니다. 윤동주는 그때의 부끄러운 심정을 이렇게 시로 표현했습니다. [참회록] 하면 AD 400년 경 초대 기독교를 대표하는 어거스틴이 떠오릅니다. 어거스틴은 예수를 만나 회심한 후에 사생아를 낳았던 방탕했던 과거를 고백하는 [참회록/고백록]을 썼습니다. 유교의 맹자는 인간은 하늘로부터 4가지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사람은 동물과 다르고 스스로 반성하고 성찰하는 능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측은지심(惻隱之心):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애처롭게 여기는 마음. 수오지심(羞惡之心): 의롭지 못함을 부끄러하는 마음. 사양지심(辭讓之心): 겸손하여 남에게 사양할 줄 아는 마음. 시비지심(是非之心):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아는 마음. 이 4가지 마음 중에서 수오지심(羞惡之心), 의롭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참회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윤동주는 구리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면서 창씨개명을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부끄러워했습니다. 사람은 연약하기 때문에 누구나 잘못할 수 있습니다.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윤리/도덕을 저버릴 수도 있을 수 있고 자기 처지가 급하기 때문에 이기적인 행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부끄러운 행동을 할 수 있는데 부끄러운 행동을 한 것보다 부끄러운 행동을 한 후에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행동을 부끄러워하는데 어떤 사람은 자기행동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거울을 보면서 자기를 부끄러워하는 사람, 자기를 성찰하고 참회하는 사람은 희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가 존경하는 믿음의 사람들도 때때로 부끄러운 행동을 한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들의 부끄러움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기록을 해 놓았습니다. 한 나라가 역사 교과서를 쓸 때 자기 나라의 부끄러운 과거를 정직하게 기록한 나라는 선진국입니다. 하지만 자기 나라의 부끄러운 과거를 숨기는 나라는 선진국이 아닙니다. 일본정부는 역사 시간에 한일병합, 위안부, 강제징용, 난징대학살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용기 있는 국가만이 자신들의 과거를 정직하게 인정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KBS 방송이 일제 강점기 일제에 협력한 밀정 895명을 발표한 것을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독립운동을 했는데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일제가 계속되니까 변절해서 돈을 받고 독립운동을 밀고했습니다. 독립운동하다가 지쳐서 그만두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돈을 받고 동지를 팔아넘긴 것은 부끄러운 행동입니다. 그들 중 일부는 아직도 국립묘지에 묻혀 있습니다.

 

성경은 부끄러운 행동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기록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기근을 피해서 이집트에 들어갔을 때 이집트 사람들이 남편인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길 것이 두려워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사라를 누이라고 하면 사라를 빼앗겨도 오빠는 죽이지 않겠지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어떻게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저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존이 불안한 나그네 신세인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은 배가 고픈 형에게 팥죽을 주고 장자권을 넘겨받았고 눈이 좋지 않은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형과 아버지을 속이고 사기를 칠 수가 있을까 생각할 수 있지만 야곱 입장에서는 사냥만 하러다니는 에서가 아브라함과 이삭의 뒤를 이어서 믿음의 족장이 되는 것은 집안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야곱은 이 일로 인해서 20년 이상 혹독한 회개/참회의 시간을 가져야만 했습니다. 다윗은 군대장군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자기 부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권한을 이용한 성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 일로 인해서 자신의 가족들이 서로 원수 되고 붕괴되는 벌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야곱/다윗은 모두 큰 잘못을 저질렀지만 정직하게 잘못을 인정/참회하고 오랜 반성의 시간을 통해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단계를 보통 칭의-성화-영화로 표현을 합니다. 첫번째는 칭의(justification) 입니다. 예수 믿고 과거의 죄를 용서받고 세례받고 의인으로 인정받고 거듭나는 단계입니다. 두번째는 성화(sanctification) 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지고 주님을 닮아가고 거룩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단계입니다. 마지막 세번째는 영화(glorification) 입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부활의 몸으로 변화되고 영화롭게 되어서 주님과 하나되는 단계입니다. 칭의는 주님을 모시는 단계이고, 성화는 주님을 닮아가는 단계이고, 영화는 주님과 하나되는 단계입니다. 칭의는 과거를 가리키고, 성화는 현재를 가리키고, 영화는 미래를 가리킵니다. 칭의-성화-영화 중에서 신앙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기간이 지금 현재를 가리키는 성화입니다. 우리들이 예배드리고 성경공부하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봉사하고 훈련하는 것도 이 성화를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부끄러운 행동을 할 때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성화의 길을 가도록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신앙의 훈련에는 끝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날까지 살아있는 동안 매일 말씀 읽고 기도하면서 주님을 닮아가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일과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부르시면서 모태에서부터 너를 선택하였고 너를 거룩하게 구별해서 예언자로 세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태에서부터 선택한 것을 칭의라고 말할 수있고 거룩하게 구별한 것은 성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오늘 두번째 말씀인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18년 동안 허리 굽은 여자를 안식일에 고쳐주셨습니다. 회당장이 안식일에는 일을 하면 안 되는데 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냐고 따지니까 “너희는 안식일에도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서 밖으로 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않느냐. 이 여자가 18년 동안 사탄에게 묶여 있었으니 오히려 안식일에 이 여인을 사탄의 묶임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18년 동안 등이 굽은 여자의 과거를 고쳐주신 것이 칭의라면 고침받고 난 후의 지금 현재의 새로운 삶은 성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여자가 칭의/성화의 길을 걸어가는데 비해서 예수님을 반대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나서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래도 부끄러워할 때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희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용기있는 사람만이 부끄러워하고 반성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오늘이 성령강림절 마지막 주일인데 성령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칭의, 의롭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날마다 주님을 닮아가도록 우리를 성화시켜 주십니다. 신앙의 훈련에는 끝이 없습니다. 주님의 마음/성품/삶을 닮아야 합니다. 참회와 성화 두가지를 다 해야 합니다. 부끄러운 과거는 참회해야 하고 참회한 다음에는 거룩한 삶, 성화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고 성화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entecost, repentance and sanctification

Jeremiah 1:4-7, Luke 13:10-17

 

Now the word of the Lord came to me saying, “Before I formed you in the womb I knew you and before you were born I consecrated you. I appointed you a prophet to the nations.” Then I said, “Ah, Lord God! Truly I do not know how to speak for I am only a boy.” But the Lord said to me, “Do not say, ‘I am only a boy’ for you shall go to all to whom I send you and you shall speak whatever I command you.” (Jeremiah 1:4-7)

 

Now he was teaching in one of the synagogues on the sabbath. And just then there appeared a woman with a spirit that had crippled her for eighteen years. She was bent over and was quite unable to stand up straight. When Jesus saw her, he called her over and said, “Woman, you are set free from your ailment.” When he laid his hands on her, immediately she stood up straight and began praising God. But the leader of the synagogue, indignant because Jesus had cured on the sabbath, kept saying to the crowd, “There are six days on which work ought to be done. Come on those days and be cured and not on the sabbath day.” But the Lord answered him and said, “You hypocrites! Does not each of you on the sabbath untie his ox or his donkey from the manger and lead it away to give it water? And ought not this woman, a daughter of Abraham whom Satan bound for eighteen long years, be set free from this bondage on the sabbath day?” When he said this, all his opponents were put to shame and the entire crowd was rejoicing at all the wonderful things that he was doing. (Luke 13:10-17)

 

One of the most remarkable features of the Bible is that it does not hide human shame, weakness or sins. For example, when Abraham, the father of faith, entered Egypt with his wife Sarah to avoid famine, he acted as if he was Sarah's brother to preserve his life. Abraham's grandson Jacob deceived his brother and father to steal his brother's inheritance right. Jacob had to have a severe time of repentance for more than 20 years because of this. David made Bathsheba, the wife of the army general Uriah, his wife. For this crime, David's family had to be judged by God. Anyone can do wrong or commit sins, but only courageous people can admit and repent what they did. God helps us to repent and live a sanctified life. The Holy Spirit transforms us, makes us new creatures, and sanctifies us. Even if we sin and are ashamed, we do not despair since God recognizes us, makes us righteous again, and calls us to live a holy life. God forgives our wrongdoings and gives us the opportunity to stand up again. Although there was a shameful moment in our life before, we can escape from the past by repentance and sanctification. Indeed, we are called to live a holy life little by little each day by the guidance of the Holy Spirit, transforming us into a new creation.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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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후 열번째 주일 / 8월 세번째 주일

광복절, 믿음의 조상들이 걸어간 길

히브리서 11:32 – 40

정해빈 목사

 

 

 

오늘은 8월 세번째 주일, 8.15 해방 광복절 74주년 감사예배로 드리는 날입니다. 요즘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계속 뉴스가 나오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제철에 강제 징용으로 끌려간 4명이 기업을 대상으로 불법강제징용 손해배상을 청구했습니다. 4명중에 3명은 돌아가셨고 1명만 살아계십니다. 피해자들은 미지급 임금이나 보상을 요구하지 않고 배상을 요구했습니다. 보상은 합법적으로 손해를 끼친 것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고 배상은 불법적인 것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피해자들은 밀린 임금이나 보상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불법으로 끌고 가서 노동을 시킨 불법을 배상하라고 요구했습니다. 2008년부터 시작된 이 재판은 10년을 끌어오다 지난 2018년 10월 대법원에 의해 최종 결정이 내렸습니다. 대법원은 일본이 1965년 한일협정을 맺을 때도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그때 일본이 한국에 보상한 것은 국가와 국가 사이에 보상한 것이고 따라서 일본 국가권력이 개입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는 한일협정으로 해결될 수 없고 피해를 본 개인이 회사를 향해서 위자료/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일본 전범기업을 향해서 아직 살아있는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배상하라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일본 아베 정부가 반도체 부품 한국 수출을 규제하고 수출우대정책을 폐지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여러 차례 사과했지만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단 한 번도 인정한 적이 없었습니다. “피해를 줘서 미안하지만 한일병합이 불법은 아니었다, 피해를 줘서 미안하지만 위안부 여성들이 불법이 아니었다. 피해를 줘서 미안하지만 강제징용이 불법은 아니었다” 이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웃나라와 관계가 좋으려면 서로 침략하지 않고 존중하면서 살면 됩니다. 서로 행복하게 사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프랑스와 독일이 원수처럼 지냈지만 지금 평화스럽게 사는 것은 독일이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철저하게 사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역사를 보면 고려시대부터 가을에 추수할 때쯤 되면 왜구들이 쳐들어와서 노략질을 일삼았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일본에 쳐들어가서 일본여성들을 위안부로 끌고 간 적도 없었고 일본청년들을 군대/징용으로 끌고 간 적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침략하지 않았는데 일본은 틈만 나면 한반도에 쳐들어와서 우리를 괴롭혔습니다. 일본은 옛날부터 나라가 힘들면 이웃나라를 공격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일본은 세계에서 국가부채가 제일 많을 뿐만 아니라 30년째 경제가 성장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노인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도 일본이고 젊은이들이 결혼/취업 안하는 나라가 일본입니다. 2011년 후쿠시마에서 방사능이 터져서 그쪽 지역은 지금도 접근할 수가 없고 방사능이 없어지려면 300년이 지나야 합니다. 이렇게 나라사정은 안 좋은데 한국이 자꾸 따라오니까 한국에 경제전쟁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일본에서 만든 제품이 최고로 좋았지만 지금은 핸드폰/TV/냉장고/반도체/조선/철강을 한국이 더 잘 만듭니다. 일인당 국민소득으로 보면 한국과 일본 사이에 큰 차이가 없습니다.

 

여러분, 한국사람들이 더 친절할까요 아니면 일본사람들이 더 친절할까요? 한국사람들이 더 친절합니다. 한국사람들이 일본사람들을 더 좋아할까요 아니면 일본사람들이 한국사람들을 더 좋아할까요? 한국사람들이 일본사람들을 더 좋아합니다. 한국사람들이 일 년에 일본을 750만명 방문하고 중국사람들이 800만 명 방문합니다. 중국인구가 14억이니까 0.5%가 일본을 방문한다면 한국은 인구가 5000만 명이니까 15%가 매년 일본을 방문합니다. 인구대비로 일본을 가장 많이 방문하는 나라가 한국입니다. 일본 대형서점에 가면 한국을 혐오하는 혐한 서적들이 비치된 코너가 따로 있고 일본 시내에서는 트럭에 마이크를 달고 한인/조센징은 한국으로 떠나라고 외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고 일본 TV를 켜면 한국을 조롱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서울 서점에서는 일본을 혐오하는 코너도 없고 트럭에 마이크를 달고 일본인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없고 TV에서 일본을 조롱하는 사람들도 없습니다. 한국사람들이 훨씬 더 수준높고 점잖고 친절합니다. 물론 일본사람들 중에는 양심적이고 친절하고 정직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런 사람들을 존경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일본을 통치하는 아베 정권이 군국주의/제국주의를 부활시키려고 시도한다는데 있습니다. 일본이 그런 식으로 하면 절대로 동아시아에서 존경받을 수 없고 진정한 선진국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아베 정권에게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일본사람들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로 돌아가려고 하는 일본정부를 반대합니다. 어느 나라이든지 다른 나라를 괴롭히고 침략하려고 하는 제국주의를 우리는 반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정의와 평화와 생명을 위해서 일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 11장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일한 믿음의 조상들을 볼 수 있습니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예언자들. 그들은 각각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마다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고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와 생명과 사랑을 위해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 방식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에 고난과 죽음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믿음의 조상들 중에는 적절한 보상과 대가를 받지 못하고 인생을 마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39절.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으로 말미암아 훌륭한 사람이라는 평판은 받았지만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의를 위해서 살다가 억울하게 고난받고 죽임당했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이라는 평판은 받았지만 완전한 상급은 받지 못했습니다. 그 상급은 하나님 나라일 수도 있고 부활일 수도 있습니다. 더 중요한 말씀은 40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계획을 미리 세워두셔서 우리가 없이는 그들이 완성에 이르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행한 의로운 삶을 우리가 완성시켜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없이는 그들의 노력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에게는 믿음의 선배들이 피 흘리면서 실천한 정의와 생명과 평화를 완성시켜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성경은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우리 앞에 있다고 말했는데 성경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에도 독립운동에 헌신한 많은 증인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한국은 옛날부터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지만 부당한 억압과 침략이 있을 때는 절대로 굴복하지 않는 민족이라는 것을 제국주의자들에게 깨우쳐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국을 꿈꾸는 나라를 망하게 하셨습니다. 이집트제국도 망했고 바벨론제국도 망했고 로마제국도 망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했던 믿음의 선배들, 바른 삶을 보여주었던 믿음의 조상들을 따라가며 이 땅을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Korean Independence Day, our ancestors of faith

Hebrews 11:32 – 40

 

And what more should I say? For time would fail me to tell of Gideon, Barak, Samson, Jephthah, of David and Samuel and the prophets who through faith conquered kingdoms, administered justice, obtained promises, shut the mouths of lions, quenched raging fire, escaped the edge of the sword, won strength out of weakness, became mighty in war, put foreign armies to flight. Women received their dead by resurrection. Others were tortured, refusing to accept release, in order to obtain a better resurrection. Others suffered mocking and flogging, and even chains and imprisonment. They were stoned to death, they were sawn in two, they were killed by the sword; they went about in skins of sheep and goats, destitute, persecuted, tormented of whom the world was not worthy. They wandered in deserts and mountains, and in caves and holes in the ground. Yet all these, though they were commended for their faith, did not receive what was promised, since God had provided something better so that they would not, apart from us, be made perfect. (Hebrews 11:32 - 40)

 

Celebrating 8.15 the 74th anniversary of Korean Independence Day, we thank God for giving us freedom and liberating us from the Japanese Imperialism. We can not forget the historical fact that our homeland had suffered from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for 35 years during World War II. Yet we do not hate Japanese people but oppose Japanese imperialism, which had oppressed and ruled over Korea illegally. We strongly urge that the Japanese Shinzo Abe government must acknowledge, apologize, and reimburse past illegal controls, and stop trying to return to wrong past history. At the same time, we commemorate the dedication of our ancestors of faith who had fought against imperialism and had prayed for the independence of the Korean Peninsula. Today’s reading reminds us that “by faith” God’s people did some amazing things. They escaped slavery in Egypt, entered the promised land, and fought for the justice of God. The mere mention of the list of names shows that these people are given as excellent examples of faith. Yet often this is not without a price. People suffered, but they had kept the faith. On the contrary, many of those who are commended for their faith did not receive what is promised. But the example for us is not in the receiving but in the persevering. It is because we are part of a long lineage of faithful people – a veritable cloud of witnesses – that we can dare to move forward. As the metaphor of the race implies, choosing faithfulness is neither easy nor passive. It can be demanding and often requires change and growth.  Truly we are called to practice God's justice, peace, and love, following the ancestors of faith.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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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후 여덟번째 주일 / 8월 첫번째 주일
성령강림절, 사람의 생명이 소유에 있지 않다
누가복음 12:13 – 21
정해빈 목사

 

 

 

우리는 요즘 성서일과에 따라서 누가복음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성경 66권 중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감동과 은혜를 주는 책 중의 하나가 누가복음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이야기 대부분이 누가복음에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장 유명한 비유인 탕자의 비유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누가복음에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성령의 능력을 강조하고 이웃사랑과 섬김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지난 몇 주 동안 살펴보았듯이 유대인이 강도만나 쓰러졌을 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유대인을 구해 주었습니다. 마르다는 집을 찾아온 예수님 일행을 대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멀리서 밤중에 찾아온 손님에게 대접할 빵이 없자 친구를 강제로 깨워서 빵을 빌려서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누가복음은 이렇게 이웃사랑이 무엇인지를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또 하나의 특징은 물질의 탐욕에 대한 경계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나사로의 비유, 삭개오 이야기가 그런 경우입니다. 세금을 과도하게 걷어서 부를 쌓았던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회개하고 자신의 부를 이웃에게 되돌려 주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12장 말씀은 물질의 탐욕에 빠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자기 형제에게 명해서 유산을 자신과 나누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에게 구원/영생/생명/죽음,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묻지 않고 유산분배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유산분배가 얼마나 중요했던지 예수님에게 재판관이나 분배인이 되어 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유산분배가 중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사람의 관심이 온통 유산분배에 있는 것을 보시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향해서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이 거기에 달려있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생명의 생명이 재산에 있지 않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부자가 풍년이 들어서 큰 창고를 짓고는 즐겁게 먹고 마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향해서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한 사람이 이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덜란드의 화가인 렘브란트가 그린 그림을 보면 어리석은 부자가 집문서와 땅문서가 가득 찬 방에서 돈을 세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또 하나의 그림을 보면 부자가 의자에 앉아있고 노동자들이 창고를 짓고 있는데 해는 기울어져 있습니다. 이 부자는 밤이 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가실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체 먹고 마시고 있습니다. 풍년이 들어서 곡식을 많이 거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사람이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많이 번 것은 기쁜 일이고 감사한 일입니다. 이 부자의 문제점은 곡식을 많이 거두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관심이 자기에게만 있다는데 있습니다. 헬라어를 보면 이 사람의 말이 모두 1인칭으로 되어 있습니다. “나의 곡식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나의 헛간을 부수고 더 큰 것을 지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나는 나의 곡식과 물건을 쌓아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영혼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의 영혼아, 너는 몇 년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두었으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이 부자는 오직 자기에게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일 년 동안 자기를 위해서 농사를 지어 준 농사꾼들/소작인들에게 감사하지도 않았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많은 곡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생각은 하지 않고 더 큰 창고를 짓는 데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 부자는 하나님과 함께 기뻐하고 이웃과 함께 기뻐하고 함께 나누는 삶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부자를 어리석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로 이 부자는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자신의 생명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 밤에 하나님께서 마음만 먹으시면 내 생명을 언제든지 거두어 가실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돈/소유/물질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돈/소유/물질은 우리가 사는데 필요한 것들을 절반 정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돈/소유/물질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돈으로 심각한 질병이나 사고를 막을 수도 없고 돈으로 가정이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유산분배를 해결해 달라고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차라리 유산이 없었더라면 형제들이 싸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돈이 의식주는 해결해 줄 수 있지만 삶의 진정한 은혜와 감사와 기쁨은 줄 수 없다는 것을 부자는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이웃을 생각하지 않고 창고를 새로 지으면 내 삶이 안전해진다고 생각하는 부자를 가리켜서 어리석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삶의 안전이 소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서 온다는 것을 부자는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갈릴리 농민들은 아마도 자신들에게 인색한 부재지주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무엇을 소유함으로 인생의 행복을 느끼는 사람,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쌓아두는 증상을 축적 장애(compulsive hoarder)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세상은 물건을 소비하고 쌓아두고 창고를 지으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소유가 아니라 관계가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단순하고 자유로운 삶이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줍니다. 독일의 철학자 에릭 프롬(Erich Fromm)은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에서 이 세상에는 재산/지식/지위/권력 등에 집착하는 소유 중심의 삶과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자체를 귀하게 여기는 존재 중심의 삶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1996년 소유의 종말(The Age of Access)이라는 책을 쓴 경제학자 제레미 리프킨은 미래사회는 소유 중심이 아니라 관계 중심의 사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요즘 시대는 소유를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에 필요할 때만 빌려서 사용을 합니다. 집도 렌트하고 차도 렌트하고 가전제품도 렌트합니다. 소유를 줄여야 좀 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가 되면 젊음도 사라지고, 건강도 사라지고, 재산도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이웃과의 아름다운 관계는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소유가 아니라 관계가 내 삶을 안전하게 지켜줍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왔으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다만 나는 청지기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사람이 나에게 관심하는 것은 오직 나만이 나를 지켜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 주변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그렇게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관계가 좋으면 소유에 집착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더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소유가 아니라 관계 중심의 삶을 살아가고 사람의 생명이 소유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대신 더 사랑하고 더 기뻐하고 더 행복하게 사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entecost, a person’s life is not based on possessions
Luke 12:13 – 21

 

Someone in the crowd said to him, “Teacher, tell my brother to divide the family inheritance with me.” But he said to him, “Friend, who set me to be a judge or arbitrator over you?” And he said to them, “Take care! Be on your guard against all kinds of greed; for one’s life does not consist in the abundance of possessions.” Then he told them a parable: “The land of a rich man produced abundantly. And he thought to himself, ‘What should I do, for I have no place to store my crops?’ Then he said, ‘I will do this: I will pull down my barns and build larger ones, and there I will store all my grain and my goods. And I will say to my soul, Soul, you have ample goods laid up for many years; relax, eat, drink, be merry.’ But God said to him, ‘You fool! This very night your life is being demanded of you. And the things you have prepared, whose will they be?’ So it is with those who store up treasures for themselves but are not rich toward God.” (Luke 12:13 - 21)

 

"The parable of the foolish rich" recorded in Luke 12 describes how foolish it is for us to fall into the greed of possession. This rich man harvested a lot of grain, built a new warehouse, and thought that his life was safe. The problem with this rich man was not that he had gathered a lot of grain, but that all his interest was in him alone. He had no interest in the farmers/peasants who built the farm for him for a year. He neither thanked the workers nor God. Moreover, he did not share it with others, even though he harvested much more grain than he could eat. This rich man did not know that real happiness comes from living with God and neighbours, and from sharing the wealth with them. Second, this rich man did not know that his life belonged to God. He did not notice that God could take his life at any time tonight. He did not catch the fact that wealth can bring us food and shelter, but it can not give us joy, salvation, and the eternal life of the soul. The German philosopher Erich Fromm said in his book, [To Have or To Be] that there are two types of lifestyle in the world; an ownership-centred life and existence-centred life. Jeremy Rifkin, an American economist who wrote a book called [The Age of Access] in 1996, also said that the future society will be a relationship-oriented society, not ownership centred. Today's scripture admonishes us that human's life is not based on possessions. Truly we are called as stewards to use all things given from God for fair distribution and justice. We are called to live a relationship-centred life and to rejoice with God and neighbours, confessing that human's life does not come from possessions.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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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후 일곱번째 주일 / 7월 네번째 주일
성령강림절, 일용할 양식과 용서와 구원
누가복음 11:1 – 13
정해빈 목사

 

 

 

요즘 영화관에서 “알라딘의 요술램프”가 상영 중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우연히 요술램프를 얻어서 비볐더니 거인이 나타나서 소원 3개를 말하라고 했습니다. “여름을 없애주세요. 겨울도 없어주세요. LA에서 하와이까지 다리를 놓아주세요” 이렇게 말했더니 거인이 세번째 소원은 힘드니까 다른 것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우리 목사님 설교가 너무 기니까 설교를 줄여주세요.” 말하니까 거인이 “그것은 더 힘들어. 차라리 하와이까지 다리를 만들어 줄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제가 오늘은 설교를 짧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11장에서 주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고 있었는데 제자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준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그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례요한이 가르쳐 준 기도가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어쨌든 세례요한과 제자들이 드리는 기도가 따로 있었고, 유대인들이 드리는 기도가 따로 있었고 바리새인들이 드리는 기도가 따로 있었습니다. 기도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믿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기도 속에 삶의 목적, 신앙의 목적, 존재의 목적이 다 들어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의 존재목적, 선교사명(Mission Statement)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느 단체든지 회칙을 보면 제일 처음에 우리 단체는 이러이러한 것을 위해 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선교사명(Mission Statement)을 보면 우리 교회의 존재목적이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캐나다연합교회의 믿음과 전통 위에 서서,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말씀과 기도로 훈련받아, 지역사회와 한인들을 돌보는 섬김공동체, 다양성과 포용성이 숨쉬는 선교공동체를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는데 누가복음 주의 기도가 마태복음 주의 기도보다 더 짧습니다. 보통 짧은 것이 더 역사가 오래된 경우가 많기 때문에 누가복음 주의 기도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원래의 기도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말하여라. 아버지,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고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십시오.”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말고 아버지로 불러라, 나 때문에 아버지의 이름이 욕되지 않게 기도하여라.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오도록 기도하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구체적으로 3가지 기도제목을 알려주셨습니다. 주의 기도의 핵심은 3가지 기도제목에 있습니다. 첫번째는 일용할 양식이고 두번째는 용서이고 세번째는 악에서의 구원입니다. 이 세상을 유지/지탱하고 인간관계를 유지/지탱하고 개인을 유지/지탱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 이 3가지입니다. 세상이 망하지 않으려면, 인간관계가 파탄나지 않으려면, 개인이 망하지 않으려면 이 3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나라와 나라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고 인간관계가 파탄나고 개인의 삶이 무너지는 것은 일용할 양식이 없거나 용서가 없거나 악에서의 구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이 땅에서 정의롭고 풍성하고 행복하고 기쁜 삶을 살려면 일용할 양식이 있어야 하고 용서가 있어야 하고 악에서의 구원이 있어야 합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3가지가 이루어진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일용할 양식이 있고 용서가 있고 악에서의 구원이 있습니다. 이 3가지와 하나님 나라는 같은 뜻입니다.

 

첫째로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도 일용할 양식이 있어야 하고 세상 모든 사람에게도 일용할 양식이 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일용할 양식 이상의 것이 있으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 베풀어야 합니다. 사람보다 일용할 양식의 기준이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최소한의 의식주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조금 더 여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이 광야생활할 때 하늘에서 떨어지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모았는데 필요이상으로 거두었더니 그 다음날 양식이 썩었습니다. 필요이상으로 쌓아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캐나다 온타리오의 시간당 최저임금이 14불입니다. 하루 8시간 일을 하면 누구든지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주님 저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 저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굶주리는 사람이 없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이 없으면 사람은 일상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삶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일용할 양식이 있어야 합니다.

 

두번째로 주님은 “죄 용서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빚을 가리킵니다. 일용할 양식과 빚의 탕감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말씀은 예수님 당시 갈릴리 농민들이 일용할 양식과 빚 때문에 고통받았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로마제국이 갈릴리 백성들에게 과도하게 세금을 부과하였기 때문에 일용할 양식이 떨어지거나 먹고 살기 위해서 빚을 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같은 식민지 백성들끼리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사는 것이 힘드니까 같은 백성들끼리 서로 빚을 지기도 하고 서로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갈릴리 백성들을 향해서 서로 용서하고 여유가 있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의 빚을 탕감해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안식년/희년의 정신을 실천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기도가 막연하고 추상적인 기도가 아니라 구체적인 기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번째로 주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고, 정확하게 말하면 악에서 구원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악은 힘을 숭배하고 남을 지배하려고 하는 욕망, 바벨탑의 욕망을 가리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힘으로 지배하려고 하는 욕망이 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미국은 세계에서 유일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최강대국이 되려고 하고, 러시아는 옛날 미국과 겨루었던 소련의 영광을 되찾으려고 하고, 중국은 미국과 겨루는 나라가 되려고 하고, 일본은 100년전 제국주의로 되돌아가려고 합니다. 힘을 키워서 남을 지배하려고 하는 욕망에 빠지지 않고 섬기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어떤 사람 집에 손님이 왔는데 대접할 빵이 없자 한밤중에 친구를 찾아가서 빵을 꾸어달라고 했습니다. 친구는 처음에는 거절했다가 나중에는 어떤 사람에게 빵을 주었습니다. 친구가 빵을 준 것은 어떤 사람이 졸랐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옛날 중동지방은 사막지역이었기 때문에 멀리서 손님이 찾아오면 손님이 굶주리고 지쳤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빵을 안주면 그 다음날 마을 사람들은 이 친구가 빵을 주지 않아서 손님이 굶주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친구는 자기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를 찾아온 사람에게 빵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도 이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과 용서와 악에서의 구원을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3가지 기도를 실천하면서 이 땅을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entecost, daily bread, forgiveness, salvation
Luke 11:1 - 13

He was praying in a certain place, and after he had finished, one of his disciples said to him, “Lord, teach us to pray, as John taught his disciples.” He said to them, “When you pray, say: Father, hallowed be your name. Your kingdom come. Give us each day our daily bread. And forgive us our sins, for we ourselves forgive everyone indebted to us. And do not bring us to the time of trial.” And he said to them, “Suppose one of you has a friend, and you go to him at midnight and say to him, ‘Friend, lend me three loaves of bread; for a friend of mine has arrived, and I have nothing to set before him.’ And he answers from within, ‘Do not bother me; the door has already been locked, and my children are with me in bed; I cannot get up and give you anything.’ I tell you, even though he will not get up and give him anything because he is his friend, at least because of his persistence he will get up and give him whatever he needs. “So I say to you, Ask, and it will be given you; search, and you will find; knock, and the door will be opened for you. For everyone who asks receives and everyone who searches finds, and for everyone who knocks, the door will be opened. Is there anyone among you who, if your child asks for a fish, will give a snake instead of a fish? Or if the child asks for an egg, will give a scorpion? If you then, who are evil, know how to give good gifts to your children, how much more will the heavenly Father give the Holy Spirit to those who ask him!” (Luke 11:1 - 13)

 

Luke chapter 11, which we read today, explains the characteristics of the Lord's prayer that Jesus taught us. Jesus told us to call God to be a Father, to pray that God's name is sanctified and that the kingdom of God should come to this earth. The specific details of the kingdom of God can be found in three prayer topics. The first is daily bread, the second is forgiveness, and the third is salvation from evil. Because these three are essential to sustaining this world, human relationships, and personal life, the Lord has told us to pray for these three things. First, Jesus said to pray for the daily bread. Daily bread is the minimum food that we need to live a day. Everyone should have a portion of daily food and those foods leftover should be distributed to those who need it. When the Hebrews were living in the wilderness, they ate manna and quail that fell from the sky every day. Some people wanted to gather beyond necessity but the food leftover was decayed in the next day. In this way, God has trained the Hebrews to abstain from greed. The Lord said to pray that there would be no hungry in the land. Secondly, Jesus said to pray for the forgiveness of sins. The sin here refers to debt. Prayer for daily bread and debt relief indicates that the Galilean peasants suffered from hunger and excessive debt during Jesus' time. The Lord told the people of Galilee to forgive each other and forgive the debt of the poor. Third, Jesus said to pray for salvation from evil. The evil that we speak here means the desire to worship power and to dominate others, the desire of the Tower of Babel. The Lord has told us to pray to be someone who does not rule over others but serves others. When a guest came to someone 's house, there was no bread in his house. So he went to a friend in the middle of the night and told him to borrow the bread. The friend refused at first but later gave someone bread. This friend gave bread to the person who came to him to keep his honour. Jesus said that God's heart is like this person. If we pray earnestly for daily bread, forgiveness, and salvation from evil, God will listen to our prayers to keep God's honour. We are called to live the earth by practicing the three prayers that the Lord has taught us.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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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후 여섯번째 주일/7월 세번째 주일
성령강림절, 마리아의 배움과 마르다의 섬김
누가복음 10:38 - 42
정해빈 목사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지난주일 읽었던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와 같이 읽어야 더 잘 이해될 수 있습니다.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져 있느냐고 물으셨고 율법교사는 네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쓰여져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율법에 쓰여진 대로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율법교사는 나의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고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영생 얻고 구원받으려면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하는 비유이고 오늘 우리가 읽은 마리아/마르다 이야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으면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와 마르아/마르다 이야기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지난 주일과 오늘 읽은 누가복음 10장 말씀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이 강도를 만나 피 흘려 쓰러졌는데 같은 유대인 종교 지도자인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지나쳤는데 평소에 원수처럼 무시하는 사마리아 사람이 자신을 구해 주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이웃 사랑은 내가 평소에 잘 아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고 고통당하는 사람을 조건없이 구해주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에 기독교에서 말하는 이웃 사랑의 놀라움이 있습니다. 율법교사는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누가 나의 이웃인지 아닌지를 알아야 이웃을 사랑할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질문했는데 예수님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누구냐고 물으셨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 아닌가를 묻지 말고 나는 고통당하는 사람의 이웃인가 아닌가를 물으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과 강도만난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구해주었고 서로가 서로에게 메시야가 되었습니다. 서남동 목사님은 강도만나 피 흘리는 사람이 우리를 구원할 메시야라고 말했습니다. 강도만나서 고통받는 사람을 만나야 내가 편협하고 교만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 겸손한 사람, 긍휼의 사람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한국의 중견 탤런트인 김혜자씨가 평소에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인생을 살다가 아프리카에 구호활동을 하러 갔다가 그곳에서 깨달음을 얻어서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라는 책을 쓴 적이 있었습니다. 강도만나 피 흘리는 사람을 만나야 우리가 영적인 눈을 떠서 이 세상에 얼마나 고통받는 사람이 많은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나의 동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고통받는 사람을 조건없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주님은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리아/마르다 이야기는 하나님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구원받고 영생을 얻으려면 내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데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가 이웃사랑을 설명하고 있다면 마리아/마르다 이야기는 하나님 사랑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가 우리의 상식을 깨트리는 것처럼, 마리아/마르다 이야기도 우리의 상식을 깨트리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여성을 비하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두 명의 여성을 격려하고 축복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마르다/마리아의 집에 왔는데 마르다는 시중을 들었고 마리아는 예수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발 곁에/밑에 앉았다”는 말은 문하생, 제자를 가리킵니다. 2000년 전에는 보통 남자 제자들만 스승의 발밑에 앉을 수 있었고 여성들은 시중을 드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밑에 앉아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마도 남성 제자들이 마리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리아를 제자로 인정하셨고 그녀가 좋은 선택을 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차별없이 사랑하시는 것처럼 예수께서도 마리아를 차별없이 사랑하시고 칭찬하셨습니다. 마르다처럼 밖에서 섬김과 봉사를 실천하는 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마리아처럼 방 안에서 말씀을 공부하고 듣는 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마르다와 같은 섬김/봉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마리아처럼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공부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겉으로 보면 예수님이 마르다를 꾸짖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르다를 꾸짖은 것이 아니라 마르다를 격려/칭찬하시고 깨우쳐 주셨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시중을 들었는데 마르다 조차도 동생이 예수님 발밑에 앉아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2000년 전에는 누구나 여자는 밖에서 시중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생각을 깨우쳐 주시고 동생이 좋은 선택을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제자가 될 수 있고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리아의 배움이 귀한 것처럼 마르다의 섬김도 귀합니다. 중동지방에서는 사막이 많기 때문에 집을 찾아온 나그네를 대접하지 않으면 그 나그네는 생명을 위협받게 됩니다. 그래서 중동지방에서는 집을 찾아온 손님을 정성으로 대접하는 전통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마르다는 손님을 대접하는 몫을 선택했습니다. 마르다의 역할은 생명을 살리는 역할이었고 누군가는 꼭 해야만 하는 역할이었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너는 너무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슈퍼우먼/슈퍼맨처럼 가정/직장/교회에서 너무 많은 일을 너무 잘 하려고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식으로 말하면 교회가 너무 많은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교인들을 힘들게 하고 무엇을 강요하고 교인들을 교회에만 붙잡아 두지 말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고 우리를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키시겠지만 우리가 아니어도 다양한 방법으로 새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주의 일을 너무 힘들게 많이 할 필요도 없고 많은 일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자책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입니다. 배움이든 섬김이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해서 기쁜 마음으로 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마르다를 향해서 너무 많은 일로 염려하거나 비교/경쟁하지 말고 자신이 선택한 한가지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하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성령충만을 강조하는 유명 목사님들이 왜 범죄를 저지르고 물의를 일으키냐고 어떤 사람이 질문을 하니까 그것은 유명 목사님들이 배움과 섬김을 게을리 하기 때문이라고, 첫째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가까이 하지도 않고 공부하지도 않고 말씀을 듣지도 않기 때문이고 둘째로 섬김과 봉사를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누가 답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배움을 게을리 하고 섬김을 게을리 하면 사람은 누구나 나태해지고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리아처럼 예수님 발밑에 앉아서 말씀을 공부하고 배워야 하고 마르다처럼 섬김과 봉사를 실천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유럽을 가면 산속에 수도원들이 많이 있습니다. 중세시대를 대표하는 수도원으로 베네딕트 수도원이 있는데 베네딕트를 한자로 쓰면 분도(芬道)가 됩니다. 한국에도 경상북도 왜관에 베네딕트 수도원과 분도출판사가 있습니다. 이 수도원의 표어가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입니다. 하루의 절반은 기도하고 공부하고 나머지 절반은 노동/섬김/봉사를 하면서 농작물을 기르고 장식품/가구를 만들기도 합니다. 마리아처럼 공부하고 기도하고 마르다처럼 섬기고 봉사할 때 우리는 하나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배움이든 섬김이든 무슨 일을 하든지 염려/비교/경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기쁜 마음으로 하면 됩니다. 마리아의 배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마르다의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entecost, Mary’s learning and Martha’s service
Luke 10:38 - 42

 

Now as they went on their way, he entered a certain village, where a woman named Martha welcomed him into her home. She had a sister named Mary, who sat at the Lord’s feet and listened to what he was saying. But Martha was distracted by her many tasks; so she came to him and asked, “Lord, do you not care that my sister has left me to do all the work by myself? Tell her then to help me.” But the Lord answered her, “Martha, Martha, you are worried and distracted by many things; there is need of only one thing. Mary has chosen the better part, which will not be taken away from her.”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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