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첫번째 주일 / 12월 첫번째 주일

이사야서 2:1-5, 마태복음 24:36-42

대림절, 칼을 쳐서 보습을

정해빈 목사

 

 

 

미국 뉴욕에 있는 UN(United Nations, 국제연합) 빌딩에 가보면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 2장 말씀이 벽에 돌로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They shall beat their swords into plowshares, and their spears into pruning hooks; nation shall not lift up sword against nation, neither shall they learn war any more.

 

“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 나오는 plowshare는 보습/쟁기를 가리키고 pruning hooks는 가지치기하는 낫을 가리킵니다. 이사야는 주님께서 칼과 창을 녹여서 쟁기를 만들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칼과 창은 보기에도 위험합니다. 칼과 창은 물건을 자르고 찌르는데 쓰는 것 외에는 쓸데가 없습니다. 하지만 쟁기는 흙을 갈고 식물을 심는데 사용됩니다. 칼은 생명을 죽이고 쟁기는 생명을 살립니다. 집집마다 칼이 서너 개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하지만 어느 집에 칼이 수백 개 있다면 그 집은 정상이 아니라 이상하고 위험한 집일 것입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UN이 만들어졌는데 이사야 말씀처럼 이제는 더 이상 나라들이 모여서 서로 싸우지 말고 칼과 창을 녹여서 인류 행복을 위해서 사용하자는 뜻에서 성경말씀을 벽에 새겼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지금 강대국들은 서로를 겨냥하며 수천 개의 핵무기를 쌓아놓고 있습니다. 어느 집에 칼이 수백 개 있으면 그 집이 이상하고 위험한 것처럼, 핵무기를 수천 개 쌓아놓고 있는 나라들은 이상하고 위험합니다. 지금도 한반도는 물론이고 세계 여기저기에서 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UN이 중재역할을 잘해서 칼을 쟁기로 녹이고 더 이상 전쟁도 없고 군사훈련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세계 모든 나라들이 무기를 사고 개발하는데 쓰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사용한다면 인류는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할 것입니다. 과연 그런 날이 올까요? 그렇게 할 수 있는 지도자가 있을까요?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 수없이 많은 지도자가 있었지만 칼과 창을 녹여서 쟁기를 만드는 지도자는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런 지도자가 나타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처럼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백성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해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대림절 절기를 지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 달력은 1월 1일 시작하지만 교회달력은 대림절(Advent)부터 시작합니다. 오늘이 교회달력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대림절은 “도착한다, 기다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고 첫번째 촛불은 희망을 상징합니다. 우리들은 오늘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이 땅을 새롭게 해주시고 이 땅에 평화를 주시기를 기다리며 희망을 상징하는 촛불을 켰습니다. 세상이 힘들면 힘들수록 희망을 말하고 노래해야 합니다. 희망이 우리들을 다시 일으켜 주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줍니다. 민족 간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고 UN이 해야 할 일이 있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모든 인류가 사이좋게 앉아서 주님을 찬양하는 희망, 칼과 창이 녹아서 쟁기가 되는 희망을 선포하고 실천하도록 우리는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갑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니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길을 따릅시다. 우리 함께 주님의 빛 가운데서 걸어갑시다” 이렇게 외치고 희망을 선포하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늘 말씀을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마태복음 말씀은 종말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날과 그 시각은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고 노아 시대에 홍수가 나는 것을 사람들이 알지 못한 것처럼 인자가 올 때도 그러할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밭에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질 것이고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둘 것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땅에서 하늘로 올라간다는 뜻을 가진 한자말이 휴거(携擧, 이끌 휴, 들어올릴 거, 이끌어서 하늘로 올린다, rapture)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성도들이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는 사람들은 오늘 말씀이 휴거를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글성경은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질 것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영어성경은 one will be taken and one will be left,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는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원래 그 자리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데려가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원래 그 자리에 남아있는 것이 좋을까요? 바로 앞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를 보면 어느 것이 좋은 지를 알 수 있습니다. 때를 알지 못하고 먹고 마신 사람들은 모두 홍수에 휩쓸려갔지만 때를 알고 때를 준비한 노아의 가족들은 끝까지 남았습니다. 홍수에 휩쓸리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은 노아의 가족들이 인류의 새역사를 시작했습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유혹을 받아서 이리저리 끌려다닐 때가 있고 때로는 전쟁/재난/사고 때문에 갑자기 세상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마태복음이 쓰여질 당시 핍박과 유혹을 받아서 마태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고 전쟁/재난/사고 때문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힘들고 불안하기 때문에 때로는 원래 있던 자리를 지키기가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 자리에 끝까지 남아있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이 희망이 있는 것은 미래의 때를 준비하면서 끝까지 남아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 끝까지 남아서 밭을 갈고 물레를 돌리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역사는 발전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희망을 상징하는 대림절 첫번째 촛불을 켜며 주님께서 칼과 창을 녹여서 쟁기를 만들어 주실 것을 우리는 고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은 주님 혼자서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우리도 해야 할 일입니다. 이사야와 마태복음에 공통적으로 쟁기와 관련된 말씀이 나왔습니다. 칼과 창을 녹여서 쟁기를 만들고 그 쟁기를 들고 휩쓸리지 않고 끝까지 남아서 밭에서 일하는 사람이 있을 때,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 질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을 다하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Advent, beating their swords into plowshares

Isaiah 2:1-5, Matthew 24:36-42

 

Today is the first Sunday of Advent when a new church calendar begins. While the secular calendar starts on January 1st, the church calendar starts on Advent. Advent means "to wait and arrive," and the first candle of Advent symbolizes "hope." Lighting up the first candle, we are waiting for the Christ to come again and turn the sword and spear into plows. Hope is not just delusion, but vision and practice. It raises us up again and teaches us what to do. We firmly believe that, as a prophet Isaiah proclaimed, God will resolve conflicts between nations. But at the same time, It is also our mission. We are called to sit together and praise the Lord, proclaiming and drawing a future where the sword and spear will be melt and become plows. The second chapter of Matthew 24 tells us that the day and time are known only to the Father and not to the people. Just as people were swept away in Noah's day, it says, there will be the one who is taken away and the other one who is left behind. It seems that Matthew encourages the congregation to remain faithful in witness even in the midst of conflict until the second coming. The left behind are those blessed who have escaped the great judgment just as Noah's family escaped the flood. It was the families of Noah who had not been swept away but remained to the end to prepare for a new future. God's promise will be fulfilled when we remain till the end, waiting for the Lord's time, plowing the fields and grinding meal.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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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열두번째 주일 / 11월 세번째 주일

창조절, 새하늘과 새땅

이사야서 65:17-25, 데살로니가후서 3:6-13

정해빈 목사

 

 

 

3.1운동 100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요즘 한국 기독교방송국(CBS)이 만든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가 영화관에서 상영되고 있습니다. 해외에서는 인터넷으로(www.dotoritv.com)에 들어가셔서 “영화”를 클릭하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일본제국주의에 맞섰던 사람들, 당대에는 이기지 못했지만 역사에서는 승리한 우리들의 이야기” 이런 글귀가 보입니다. 압록강과 두만강 북쪽 지역을 간도 땅이라고 부르는데 서북쪽은 서간도, 동북쪽은 북간도라고 부릅니다. ‘간도 대통령’이라 불린 규암 김약연 목사 집안을 비롯해 윤동주 집안, 문익환 집안 등이 북간도로 이주해 600만 평을 사서 새로운 마을을 만들었습니다. 농사를 지으면 1/3은 살림하는데 사용하고(경전), 1/3은 교육에 사용하고(학전), 1/3은 독립운동을 후원하는데 사용했습니다.(군전). 3.1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가 북간도에서 일어났고 청산리 전투, 봉오동 전투에서도 다수의 북간도 기독교인들이 참여했습니다. 집을 지을 때도 기와지붕 처마 끝에 태극기 문양과 십자가를 그린 “막새기와”를 만들어서 지붕을 만들었습니다. 자신들이 조선 사람이고 조선의 독립을 기독교를 통해 이루겠다는 각오를 이런 식으로 표현했습니다. 이 영화를 보시면 일제 간섭을 피해 두만강을 건너간 사람들이 어떻게 마을을 만들었고 어떻게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였고 어떻게 독립운동을 했고 어떻게 캐나다선교사들을 만났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북간도 기독교인들은 모두가 평등한 마을을 만들었고 생명과 평화와 인권과 독립을 위해서 땀을 흘렸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의 노력은 성공했을까요? 그들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일제의 탄압을 받아서 교회가 불타고 마을이 없어지기도 했습니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그들의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는 것은 그들이 성공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삶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방향/이정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소득을 3개로 나누고 기와에 태극문양과 십자가를 그려놓고 학교와 교회를 세운 것이 큰 소득 없이 끝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독립을 기도했고 노래했고 꿈꾸었고 실천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고 노래하고 꿈꾸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대에는 이기지 못했지만 역사에서는 승리한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글귀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당장 길이 보이지 않아도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고 노래하고 꿈꾸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도하고 노래하고 꿈꾸고 실천하는 것이 우리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우리 삶의 방향을 가르쳐 줍니다. 이것이 북간도 기독교인들의 삶과 신앙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메시지입니다. 지금 현실이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미래를 기도하고 노래하고 꿈꾸고 실천하는 신앙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오늘 우리가 첫 번째로 읽은 이사야서 65장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하늘과 새땅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새하늘과 새땅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예루살렘은 기쁨이 가득 찬 도성이 되고, 다시는 울음소리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몇 날 살지 못하고 죽는 아이가 없고, 백 살에 죽는 사람을 젊은이라고 할 정도로 모든 노인들이 장수하고, 집을 지은 사람들이 자기가 지은 집에 들어가 살고, 포도나무를 심은 사람들이 자기가 기른 나무의 열매를 먹고,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풀을 먹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뱀이 흙을 먹이로 삼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서는 서로 해치거나 상하게 하는 일이 전혀 없을 것이라고 이사야 선지자가 선포했습니다. 정말 이런 세상이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로 해치거나 상처주지 않고 모두가 기쁨과 평화를 누리고 모두가 장수하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뒤집어서 해석하면, 이사야가 살았던 시대가 그만큼 힘들고 고통스러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강자들이 쳐들어와서 남의 집과 포도원을 빼앗고 아이들은 병 들어서 일찍 죽고 노인들도 장수하지 못합니다. 이사야서 65장은 히브리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70년 만에 포로에서 돌아와서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었는데 세상은 옛날과 그대로입니다. 바벨론이 무너지니까 페르시아가 등장하고 페르시아가 무너지니까 헬라왕국이 등장해서 식민지 백성들을 괴롭힙니다. 역사에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절망 가운데서 사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만드실 새하늘과 새땅을 선포했습니다. 예언자의 사명은 정의와 평화가 가득찬 미래를 선포하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미래를 선포하고 노래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것이 예언자의 사명입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우리가 두 번째로 읽은 데살로니가서후서 2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서 어느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으려고 수고하고 고생하면서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일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마십시오. 우리가 들으니 여러분 가운데는 무절제하게 살면서 일은 하지 않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고 합니다. 조용히 일해서 자기가 먹을 것을 자기가 벌어서 먹으십시오. 형제자매 여러분,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사야 시대 백성들이 강대국의 침략 속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리고 절망 속에서 살았다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정반대로 지나친 종말론 신앙 때문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사야 시대 사람들은 종말론을 잃어버렸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종말론에 너무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종말, 새하늘과 새땅을 기다리는 것은 좋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신세를 지려고 하지 말고 자기 먹을 것을 자기가 벌어서 먹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좋은 미래가 빨리 오지 않는다고 해서 낙심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참된 종말론 신앙은 현실을 도피하지 않습니다. 미래를 기다리면서 동시에 지금 현실에 최선을 다합니다. 현실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낙심하지 않고 새하늘과 새땅이 이루어질 때까지 낙심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신앙이 올바른 기독교 신앙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창조절 절기를 마치면서 새하늘과 새땅에 대해서 묵상했습니다. 우리들은 지금 현재 세상이 새하늘과 새땅으로 변화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새하늘과 새땅은 창조의 완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완성을 위해서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살고 모두가 100살까지 건강하게 사는 세상, 모든 사람이 자기 집을 빼앗기지 않고 인종/연령/배경에 상관없이 누구나 차별받지 않는 세상, 인간과 자연이 서로 의지하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을 우리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고난 가운데서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새하늘과 새땅을 선포하며 백성들을 위로하였고 사도바울은 종말을 기다리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남의 신세를 지려고 하지 말고 주님이 오실 때까지 열심히 땀 흘리면서 일을 하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없이 일하실 수 없고 우리도 하나님 없이 일할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새하늘과 새땅은 하나님께서 만드시지만 새하늘과 새땅을 준비하고 앞당기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목표와 방향과 꿈을 주시고 우리는 그 목표와 방향과 꿈을 향해서 열심히 땀 흘릴 때 새하늘과 새땅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미래를 바라보는 신앙입니다. 지금 현실이 어렵지만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보며 하루하루 그 꿈을 향해서 기도하고 노래하고 꿈꾸고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Creation, new heavens and a new earth

Isaiah 65:17-25, 2 Thessalonians 3:6-13

 

I am about to create new heavens and a new earth; the former things shall not be remembered or come to mind. No more shall there be in it an infant that lives but a few days, or an old person who does not live out a lifetime; for one who dies at a hundred years will be considered a youth, and one who falls short of a hundred will be considered accursed. They shall build houses and inhabit them; they shall plant vineyards and eat their fruit. The wolf and the lamb shall feed together, the lion shall eat straw like the ox; but the serpent—its food shall be dust! They shall not hurt or destroy on all my holy mountain. (Isaiah 65:17-25). Now we command you, beloved, in the name of our Lord Jesus Christ, to keep away from believers who are living in idleness and not according to the tradition that they received from us. For even when we were with you, we gave you this command: Anyone unwilling to work should not eat. For we hear that some of you are living in idleness, mere busybodies, not doing any work. Now such persons we command and exhort in the Lord Jesus Christ to do their work quietly and to earn their own living. Brothers and sisters, do not be weary in doing what is right. (Thessalonians 3:6-13)

 

At the end of the season of Creation, we are called to meditate on the words of Isaiah and 2 Thessalonians today. In Isaiah chapter 65, the prophet Isaiah proclaimed God's promised “new heavens and a new earth” to his suffering colonized people. In a world where children do not lose their lives early, old people live their lives fully, their homes and vineyards are not taken away, they do not harm each other, wolves and lambs eat grass together, and humans and nature depend on each other and live in peace. He sang. Indeed, we are praying that this world of division, conflict and pain will be transformed into new heavens and a new earth. We believe that God is still working for the restoration of creation. The Apostle Paul also told the Church members of Thessalonica, who did nothing but wait for the end. "Anyone unwilling to work should not eat. Do your work quietly and earn your own living. Do not be weary in doing what is right." New heavens and a new earth will be made by God, but it is our work and duty to prepare and advance that new creation. We remember that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Korean Christians who lived in North Jiandao had been persecuted, for dreaming, praying, and practicing independence. When we sweat hard toward the goals, directions, and dreams that God gives us, new heavens and a new earth will come to us. We are called not to give up in the midst of suffering, but to look to God's promises.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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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열한번째 주일 / 11월 두번째 주일

창조절, 선한 일과 선한 말

학개서 2:1-5, 데살로니가후서 2:13-17

정해빈 목사

 

 

 

성경말씀을 묵상하기 전에 3가지 이야기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번째 이야기는 캐나다 현충일(Remembrance Day)입니다. 1918년 11월 11일에 1차 세계대전이 끝났기 때문에 이 날을 휴전기념일로 지키다가 나중에 전쟁에 참전한 모든 남녀들을 기념하는 날로 바뀌었습니다.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을 추모하고 재향군인회를 돕기 위해서 빨간 포피꽃(Poppies)를 사서 가슴에 붙이기도 합니다. 이전에 우리교회가 예배드렸던 토론토 다운타운 블루어스트릿연합교회 예배당 입구에 1차세계대전과 2차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목숨을 잃은 수십 명의 교회 청년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시절에는 교인 가족들 중에 목숨을 잃은 자녀들이 많았습니다. 그 당시 교회가 한 중요한 일 중의 하나는 유럽에 간 청년들과 그 가족들을 돕는 것이었습니다. 1940년대 캐나다연합교회 자료를 보면 캐나다가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몇몇 소수의 목회자들은 전쟁은 어떤 이유로든 거부해야 하고 캐나다는 전쟁에 참여하면 안 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캐나다연합교회는 독일 나치 정권이 유럽을 침략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참전을 지지했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습니다. 프랑스어로 "귀족은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도자들과 교회가 솔선수범하니까 국민들이 지도자들과 교회를 존경하게 됩니다. 지도자들이 군복무도 안하고 세금도 안내면 그 나라는 망하게 됩니다. 나라를 위해 희생된 분들을 추모하는 캐나다 문화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문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번째 이야기는 유진벨 재단입니다. 우리 교회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미술품 전시/판매”를 하고 있는데 그 수익금 일부를 유진벨 재단에 기부하려고 합니다. 유진벨 재단은 북한결핵환자를 돕기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1895년 1대 유진 벨(Eugene Bell) 선교사가 미국 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되어 목포와 광주에서 많은 교회와 학교와 병원을 세웠습니다. 유진벨 부부는 현재 서울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잠들어 있습니다. 유진벨 딸과 결혼한 사위 윌리엄 린튼(William A. Linton)이 2대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린튼은 40년 동안 군산, 전주, 목포, 대전 등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세웠습니다. 윌리엄 린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휴 린튼이 3대 선교사가 되어서 전라남도 섬 지방과 벽지를 돌아다니며 200곳이 넘는 교회를 개척하였고 순천 지역에 결핵요양원을 세웠습니다. 휴 린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스티븐 린튼(Stephen W. Linton, 한국 이름 인세반)이 현재 4대 선교사로 활동 중인데 이 사람이 1995년 한국 선교사역 100주년을 기념하여 유진벨재단을 설립하였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순천에서 보냈고 1979년부터 지금까지 북한결핵환자를 돕고 있습니다. 120년 전 유진 벨로 시작된 한국선교가 4대째 계속되고 있는 것이 감동적입니다. 결핵은 영양실조에 걸리거나 면역이 약하면 걸리게 됩니다. 현재 북한에는 13만 명의 결핵환자가 있는데 초기에 발견하면 쉽게 치료할 수 있는데 대부분 늦게 발견되는 경우가 많아 치료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유진벨 재단은 매년 북한을 방문해서 환자들을 치료하고 의료기기를 기증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독재국가이고 핵무기를 만드는데 왜 도와주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포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교회가 유진벨 재단을 돕는 것이 참으로 귀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번째 이야기는 [국경선 평화학교]입니다. 영국과 미국에서 평화학을 공부하신 정지석 목사님께서 함석헌 선생님과 퀘이커 신자들의 삶에 영향을 받아서 비무장지대가 있는 철원에 [국경선 평화학교] 대안학교를 세웠습니다. 학생들이 그곳에서 평화학, 갈등해결, 유기농농사짓기, 집짓기, 건강보건 등을 배우고 있습니다. 평화는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공부하고 연습해야 합니다. 어떻게 평화를 이룰 것인가, 갈등이 있을 때 어떻게 갈등을 해결할 것인가, 과거에 국가와 국가 사이에 민족과 민족 사이에 갈등이 있을 때 어떻게 갈등을 해결했는가, 예를 들면 캐나다에서 영국계와 프랑스계는 어떻게 갈등을 해결했는가, 영국과 아일랜드는 민족갈등을 어떻게 해결했는가, 이런 주제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유진벨 재단]도 돕고 [국경선평화학교]도 도와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도님들 혹시 여유가 있으시면 오늘 전시회하는 그림 꼭 사시기 바랍니다. 판매 수익금은 전액 이런 단체에 기부될 예정입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학개서 2장 말씀을 보면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 예언자 학개 이렇게 3명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망한지 70년만에 바벨론을 정복한 페르시아의 고레스가 유대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와보니 옛날 다윗/솔로몬이 지은 성전이 폐허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전 건축을 다시 시작했는데 중간에 방해가 만아서 16년 동안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학개 선지자가 다시 건축을 독려해서 20년 만에 성전을 완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옛날 다윗/솔로몬이 지은 성전과 비교하니 너무 초라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이 성전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너희 눈에는 하찮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힘을 내어라. 이 땅의 모든 백성아, 힘을 내어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니 너희는 일을 계속하여라. 내가 너희와 맺은 언약이 변함없고 나의 영이 너희 가운데 머물러 있으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아라.” 옛날과 비교할 때 우리의 행동이 초라해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미술품 전시회를 하는 것이 작은 일이지만 그 작은 나비의 날개 짓이 역사를 바꿀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하는 일을 계속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옛날에 했던 큰일과 비교하면 우리가 하는 일은 작고 초라합니다. 하지만 작은 선한 일들이 쌓이고 쌓일 때 세상은 달라지고 변화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두 번째로 읽은 데살로니가후서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든든히 서서 우리의 말이나 편지로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혜로 영원한 위로와 선한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여러분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세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 중에는 영광의 날, 주님오시는 날, 재림을 기다리면서 아무 일도 안하고 세상 사람들의 신세를 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해서 주님이 다시 오시기를 가만히 기다리지만 말고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여기 보면 “선한 일과 선한 말”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선한 일을 한 두 가지 했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열매를 얻든지 못 얻든지 선한 일을 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11월 11일 Remembrance Day 선한 일에 목숨을 바친 이들을 추모하면서 그리고 학개서와 데살로니가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한 일, 우리가 할 수 있는 긍정적인 선한 말을 계속함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Creation, good work and word

Haggai 2:1-5, 2 Thessalonians 2:13-17

 

Haggai 2 we read today is about the rebuilding of the temple. When the Hebrew people had returned from captivity in seventy years, they rebuilt the temple first. However, compared with the first temple in David-Solomon's time, the second temple was small and shabby. Yet God told Governor Zerubbabel, the high priest Joshua, and the prophet Haggai: “Is it not in your sight as nothing? This temple will seem trivial in your eyes. But take courage. Work, for I am with you. My spirit abides among you. Do not fear.” Compared to the big things we did in the past, what we do now can be small and trivial. But when little good things accumulate, we believe, the world will be changed. The Lord has told us not to give up on small good things but to continue.

 

The same is true in 2 Thessalonians, which we read today as the second text. “May our Father and our Lord Jesus Christ, who love us and give us everlasting comfort and good hope by grace, encourage you in your hearts and strengthen you in every good work and word.” Among the Thessalonians, there were those who did nothing and waited for the Lord's return. Paul admonished them not only to wait for the Lord to come again but to do "good things and good words" until the Lord comes again. Doing one or two good works will not change the world. But we are called to do good, whether we gain fruit or not Tomorrow is Remembrance Day. In remembrance of those who gave their lives to good works, and meditating on the books of Haggai and Thessalonica, we believe we should be glorifying God by continuing to do the good things we can do, the positive good things we can do.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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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아홉번째 주일 / 10월 네번째 주일

창조절, 종교의 교만을 멀리하라

누가복음 18:9 - 14

정해빈 목사

 

우리는 요즘 성서일과를 따라서 누가복음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마태/마가/누가/요한 4개의 복음서가 있는데 4개의 복음서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더 깊고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치 밥을 먹을 때 한가지 반찬만 있는 것이 아니라 4가지 반찬이 있으면 식사를 더 잘 할 수 있는 것처럼, 4개의 복음서는 우리의 신앙을 더 넓고 깊고 풍성하게 해 줍니다. 마태복음에는 마태복음이 강조하는 깊은 메시지가 있고 마가복음에는 마가복음이 강조하는 깊은 메시지가 있고 요한복음에는 요한복음이 강조하는 깊은 메시지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이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사랑하시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반대로 정치/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을 꾸짖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물질을 나누지 않는 부자의 탐욕을 꾸짖고 불의를 고발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강조하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사람들 가운데서는 누가복음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가장 유명한 2가지 비유를 말하라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탕자의 비유를 말할 수 있는데 이 비유는 오직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도 누가복음에만 나오고 삭개오 이야기도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우리는 아는 유명한 이야기가 오직 누가복음에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를 사랑하셨고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종교지도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누가복음은 나의 신앙을 비추는 거울과 같습니다. 누가복음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의 신앙이 어디에 와 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지난 주일에 억울한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평생을 침묵하면서 살아야 했던 억울한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을 끈질기게 찾아가서 재판관을 굴복시켰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선이 악을 이긴다는 것이 대단히 어렵지만 자비로우시고 진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을 때 악을 이길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말씀도 지난 주일과 마찬가지로 두명의 대조적인 사람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경건한” 바리새인이고 또 한사람은 세금을 걷는 “죄인” 세리입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 와서 기도를 했는데 바리새인은 자신이 세리와 같지 않고 경건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와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바리새인이라는 말 자체가 “분리된 자, 구별된 자”를 가리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자신들도 거룩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최대 관심사는 거룩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나쁜 짓을 하지 않았고 열심히 금식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전에 당당하게 나와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세리는 자신이 로마제국을 대신해서 세금을 걷는 것을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내고 가슴을 치며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세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세리가 의롭다고 말씀하셨을까요? 바리새파 사람은 한평생 경건하게 살았고 자신의 종교적 의무를 다했습니다. 칭찬을 받는다면 이 사람이 받아야 합니다. 이 사람의 신앙에 어떤 문제점이 있기에 이 사람은 의롭다고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일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들이 “참여”하는 삶을 살기 원하시는데 바리새파 사람은 “분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만약 바리새파 사람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았더라면 그는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로마 식민지 아래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원해 주십시오. 이 민족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저 세리처럼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세금을 걷어야 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제가 고통받는 이웃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깨달음을 주십시오. 헐벗고 굶주린 이웃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십시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았더라면 그는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옆에 있는 세리를 멸시했습니다. 자신이 저렇게 더러운 것들과 다르다는 것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리새파의 이기적/개인주의적인 기도를 받지 않으시고 반대로 어쩔 수 없이 세금을 걷으면서 괴로워하는 세리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만 깨끗한 것을 자랑하는 사람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역사 앞에서 괴로워하는 사람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잠시 한눈을 팔면 바리새인과 같은 신앙을 갖기가 쉽습니다. 이웃을 혐오하고 자기를 자랑하기가 쉽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이웃을 혐오하고 배척하는 집단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한국 개신교입니다. 한국 뉴스를 보면 개신교 일부 목사들이 앞장서서 “난민을 몰아내자, 이슬람 신자를 몰아내자, 동성애자를 몰아내자”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대략 200만명 정도 됩니다. 3D 업종, 가장 더럽고 위험하고 어려운 일을 그들이 하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이슬람교 신자도 있을 것이고 난민 신청자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종교와 문화를 존중해야지 나와 종교와 사상이 다르다고 해서 혐오하고 배척하면 안 됩니다. 일반 단체도 그런 주장을 하면 안 되지만 하지만 교회는 더더욱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교회에서는 “죽이자, 물리치자, 쫓아내자”가 아니라 사랑하자는 목소리가 나와야 합니다. 교회는 혐오/증오하는 곳이 아니라 사랑하는 곳입니다. 사랑을 외쳐야 하는 교회에서 혐오/배제/증오가 넘치고 있습니다. 참으로 슬프게도 한국 기독교가 바리새파 신앙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오늘이 종교개혁 502주년 기념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에 의해서 종교개혁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말씀이 종교개혁 정신인데 이 종교개혁 정신을 한마디로 말하면 오늘 말씀처럼 자기 의를 자랑하고 이웃을 혐오/배척하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는 세리와 같은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참다운 기독교 신앙은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리되는 삶을 살지 않고 갈릴리 마을 속으로 들어가셔서 병자와 귀신들린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나 혼자 만의 경건을 추구하는 신앙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몸과 마음이 아프고 병든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손을 잡아주고 그들을 일으켜 주는 신앙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하나님, 나는 저 더러운 사람들과 같지 않습니다. 나는 거룩합니다.” 이렇게 말하기 보다는 “하나님, 몸과 마음이 아프고 병든 사람들을 구원해 주십시오. 제가 그들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살겠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신앙이 참된 신앙입니다. 종교의 교만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이웃 속으로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Creation, stay away from religious pride

Luke 18:9-14

 

He also told this parable to some who trusted in themselves that they were righteous and regarded others with contempt. “Two men went up to the temple to pray, one a Pharisee and the other a tax collector. The Pharisee, standing by himself, was praying thus, ‘God, I thank you that I am not like other people: thieves, rogues, adulterers, or even like this tax collector. I fast twice a week. I give a tenth of all my income.’ But the tax collector, standing far off, would not even look up to heaven, but was beating his breast and saying, ‘God, be merciful to me, a sinner!’ I tell you, this man went down to his home justified rather than the other; for all who exalt themselves will be humbled, but all who humble themselves will be exalted.” (Luke 18:9-14)

 

In the Gospel of Luke, we can find Jesus criticizing the Pharisees, calling them not only money lovers but adulterers and hypocrites, too. On the contrary, Jesus ate dinner with prostitutes, tax-collectors, people with leprosy, and so-called sinners. The Pharisee seems to think that God lives right inside him, praising his works and his own goodness. Actually, there isn't much need for God to do anything in the life of this Pharisee except to agree with him. And yet Jesus once again uses an unexpected illustration to teach his audience a lesson. The tax-collector pours out his heart and buries himself so deeply into the voicing of his deepest anguish, his most profound awareness of his own weakness and failures, that he apparently never notices the Pharisee. He flings himself on the mercies of God and depends on God to do something remarkable in his life. There are so many reversals in the Gospel of Luke that perhaps we shouldn't be surprised that this hated collaborator goes home justified while the observant religious type doesn't. In commemoration of the 502nd anniversary of the Reformation, today's scripture reminds us that the spirit of Reformation is not boasting of self-righteousness and holiness but seeking God's mercy. According to Luke, the Pharisee boasted of his godliness and religious duties, separated himself from his neighbors, and hated the tax collector. In contrast, the tax collector acknowledged his weakness, repented of his sins, and begged God's mercy. Today's scripture teaches us that true Christian faith is not in "separation," but in "participation." For example, Jesus entered Galilee village to meet the sick and the poor. Jesus did not separate them from Him but became one with them and healed them. It reminds us that our faith must be based not only on God's grace and mercy but also on solidarity with our suffering neighbors. Truly we are called to live with those who seek God's mercy, not with the Pharisees who boast of their own godliness.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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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여덟번째 주일 / 10월 세번째 주일

창조절, 침묵을 강요당하는 사람들

누가복음 18:1 - 8

정해빈 목사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18장 말씀은 이번 주일 성서일과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억울한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나오는 과부는 빈곤층을 가리키고 재판관은 상류층을 가리킵니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과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서로 만났습니다. 어느 마을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재판관이 있었는데 과부가 찾아와서 내 적대자에게서 권리를 찾아달라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하지만 재판관은 과부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과부는 낙심하지 않고 계속 재판관을 귀찮게 했습니다. 결국 재판관은 견디지 못하고 그의 권리를 되찾아 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들어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백성의 권리를 찾아주시지 않고 모른 체하고 오래 그들을 내버려 두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권리를 찾아주실 것이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의 권리를 찾아주었다면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과부처럼 낙심하지 않고 끈질기게 노력하는 사람을 찾을 수 있겠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두 주인공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재판관입니다. 재판관이라면 누구보다도 공정해야 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고 사람의 인권을 존중해야 하는데 이 재판관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재판관은 하나님을 대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과부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정의로운 판결을 내려야 합니다. 하지만 이 재판관은 그런 판결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옛날 재판관을 오늘날로 말하면 판사나 검사를 가리킵니다. 죄 지은 사람을 기소하는 검사와 사람의 죄를 재판하는 판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바르고 공정해야 합니다. 만약 판사나 검사가 유전무죄 무전유죄, 힘 있고 돈 있으면 벌을 피해가고 힘 없고 돈 없는 사람만 벌을 받으면 그 사회에는 억울한 사람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정의롭고 공정한 사람만이 재판관이 되어야 하고 그런 제도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불의한 재판관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공정한 사람만이 재판관이 될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 세상에 정의롭지 못한 재판관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오늘 말씀의 두번째 주인공은 적대자에게 권리를 빼앗긴 과부입니다. 우리는 적대자가 과부로부터 무엇을 빼앗아갔는지 알지 못합니다. 외부 사람이 혹은 집안 사람이 과부의 재산을 빼앗아갔을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지금 이 과부는 적대자로부터 권리를 빼앗기고 억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과부를 가리키는 히브리어(אַלְמָנָה, almanah)는 “침묵하는 사람, 침묵을 강요당하는 사람, 자기 목소리가 없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과부는 무시해도 될 정도로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옛날 고대사회에서 여성은 말없이 인생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일반 여성도 말을 할 수 없었다면 과부는 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부는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당당하게 재판관을 찾아가서 빼앗긴 권리를 찾아달라고 말했습니다. 아마 주변 사람들은 조용히 하라고 침묵을 강요했을 것이고 재판관도 침묵을 강요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재판관이 자기 말을 들어줄 때까지 찾아가고 또 찾아갔습니다. 결국 억울하게 침묵을 강요당했던 한 여인이 정의롭지 못한 재판관을 굴복시켰습니다. 정의가 불의를 이겼습니다. 약자가 강자를 이겼습니다.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오늘 말씀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침묵을 강요당하는 사람들, 억울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이 억울한 과부를 말씀하신 것처럼 교회는 억울한 사람들, 잊혀진 사람들을 기억하고 대변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과부는 누구일까요? 오늘날 침묵을 강요당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캐나다 사회에서 오랫동안 무시당했던 원주민들이나 어쩔 수 없이 난민이 된 사람들이나 너무도 가난해서 집 없이 떠도는 사람들이 오늘날의 과부일 수 있습니다. 성소수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어날 때는 남자로 태어났는데 여자 같은 성격을 갖고 태어난 사람도 있고, 태어날 때는 여자로 태어났는데 남자같은 성격을 갖고 태어난 사람도 있습니다.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중성같은 사람으로 태어난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의 잘못도 아니고 부모의 잘못도 아니고 하나님의 잘못도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은 오랫동안 그런 사람들에게 침묵을 강요해왔습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침묵을 강요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과 관련해서 3가지 구체적인 예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번째로 최근에 20대 한국 여성 가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있었습니다.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고 나는 자유롭게 인생을 살겠다고 인터넷에 글을 쓴 것 때문에 없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욕설을 들었습니다. 한국사회는 왜 남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을까요?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누구든지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침묵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두번째는 내일(10/21) 있을 캐나다 연방 선거입니다. 어느 정당이 부패하지 않고 나라를 잘 운영할까를 생각해서 투표해야 합니다. 그 중에서도 어느 정당이 잊혀진 사람들, 침묵을 강요당하는 사람들, 원주민들, 성소수자들, 유학생들, 난민들에게 관심을 갖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캐나다에 오래사신 분들은 상관이 없지만 유학생이나 난민들에게는 어느 정당이 집권당이 되느냐가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투표한다는 것은 좋은 재판관을 뽑는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세번째는 스웨덴에 사는 16세 청소년 그레타 툰베리입니다. 그를 통해서 세계 여러 곳에서 “기후파업”이 일어났습니다. 보통 10대 소녀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의 목소리가 세계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지구 기온은 산업혁명 이후 200년 동안 1도 올랐는데 지구 기온이 1.5도 올라가면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이미 1도가 올랐기 때문에 대재앙이 오기 전까지 0.5도가 남았습니다. 그레타 툰베리는 자신들 세대는 앞으로 70-80년 세월을 지구에서 살아야하기 때문에 기성세대들을 향해서 기후재앙 대책을 세워달라고 주장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선이 악을 이길 수 있을까요? 선이 악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습니다. 과부처럼 포기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을 때만 악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재판관이 끈질긴 과부의 청을 들어주었다면 진실하시고 선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어주지 않겠냐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지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고 선을 행하고 정의를 실천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이고 이 세상은 변화될 것입니다. 지치지 않아야 합니다. 과부가 정의롭지 못한 재판관을 굴복시킨 것과 같은 역사를 이 시대에서도 만들어 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Creation, people forced to silence

Luke 18:1-8

 

Then Jesus told them a parable about their need to pray always and not to lose heart. He said, “In a certain city there was a judge who neither feared God nor had respect for people. In that city, there was a widow who kept coming to him and saying, ‘Grant me justice against my opponent.’ For a while he refused; but later he said to himself, ‘Though I have no fear of God and no respect for anyone, yet because this widow keeps bothering me, I will grant her justice, so that she may not wear me out by continually coming.’” And the Lord said, “Listen to what the unjust judge says. And will not God grant justice to his chosen ones who cry to him day and night? Will he delay long in helping them? I tell you, he will quickly grant justice to them. And yet, when the Son of Man comes, will he find faith on earth?” (Luke 18:1-8)

 

In the parable of the unjust judge in the Gospel of Luke Chapter 18, Jesus uses a figure from the very edges of society to teach his followers the lesson. The word for 'widow' in Hebrew means 'silent one' or 'one unable to speak.' In the patriarchal Mediterranean world males alone play a public role. Women do not speak on their own behalf. So this "silent one" is acting outside the normal bounds when she finds her voice and speaks up for herself. Maybe it's because she knows that there's a special place for her in the heart of God, as the Bible often says. Widows, orphans, and aliens are all very close to the heart of God and the focus of God's concern. We might ask ourselves, then, who "the widows" are in our time: the ones without a voice who speak up anyway in protest of injustice. Young people outraged by school shootings have marched and organized and spoken up to the powers that be about the risk they take by simply going to school; people who live with disabilities have valiantly protested in the very halls of Congress over injustice and exclusion; LGBTQ people have to continue to march and protest and put themselves at risk every single day as progress made gets unmade; people of color face everyday disrespect and violence, along with economic injustice. Do we hear the voices of these "widows" in our own time? Are we willing to listen? The story of Luke 18 we read today tells of a widow who is deprived of her right but finally defeated an unjust judge. In ancient times, the widow was "forgotten one" or "silent one." But she never gave up and shouted justice until the unjust judge finally succumbed to her request. This story tells us that when the socially weak does not get discouraged and persists in asserting justice and rights, they can beat injustices. When we are not exhausted, not discouraged, pray, do good, and practice justice, God will respond to our request and the world will be changed. If this corrupt judge responds to the widow's pleas, Jesus said, how much more will a loving God respond to the prayers of our hearts? Our prayer life sustains us even in the worst of times, and it keeps us close to God. It is how we bother God, and it is how God bothers us back. We are called to represent "the people forced to silence" and to proclaim justice without discouragement in this generation, such as the weak widow defeated an unjust strong judge.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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