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세번째 주일 / 3월 세번째 주일

요한복음 4:28-42

사순절,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와 용기

정해빈 목사

 

 

 

지난 주일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12년 전 1908년 방직공장에서 일하던 미국 여성 노동자들이 화재로 숨진 여성들을 기리며 뉴욕에서 모여서 여성차별반대, 노동조합 결성을 요구했습니다. 이 행사가 계기가 되어서 매년 3월 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지키고 있습니다. 여성들이 거리를 행진하면서 이런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우리가 행진하고 또 행진할 땐 남자들을 위해서도 싸우네. 왜냐하면 남자는 여성의 자식이고 우린 그들을 다시 돌보기 때문이지. 그런 우리가 마음과 몸이 모두 굶주리네. 그러니 우리에게 빵을 달라, 그리고 장미를 달라.” [세계 여성의 날]을 가리키는 두가지 상징이 빵과 장미입니다. 빵은 굶주림을 해소할 생존권을 가리키고 장미는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투표권을 가리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는 여기서 차별받고 소외된 사마리아 사람들을 찾아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동시에 예수님을 동네 사람들에게 소개한 사마리아 여인의 용기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유대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 사이의 갈등을 허무는 이야기이고, 성차별의 장벽을 허무는 이야기이고, 선생님과 제자 사이의 아름다운 만남에 대한 이야기이고, 한 여성이 스승과의 만남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고 지도자가 되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사순절 첫째주일의 주제가 시험이고, 둘째주일의 주제가 자유라면, 셋째주일의 주제는 아름다운 만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사마리아 지역 최초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세계 여성의 날]이 2000년 전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3가지 편견을 지적하셨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과거의 전통이 지금 그들이 겪고 있는 영적인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과거의 전통을 가리키는 것이 야곱의 우물입니다 “선생님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선생님이 우리 조상 야곱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라는 말입니까? 그는 우리에게 이 우물을 주었고 그와 그 자녀들과 그 가축까지 다 이 우물의 물을 마셨습니다." 우리는 야곱의 후손입니다. 우리는 야곱의 전통에 의지해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이 여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옛날 전통이 지금 사마리아 사람들의 영적인 갈증을 해결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아픔과 상처를 치료해 줄 수 있는 새로운 진리, 새로운 우물, 생수를 만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새로운 우물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 요한복음의 고백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들이 그대들의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대에게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네 남편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옛날부터 섬기는 다섯 명 여섯 명의 우상들을 가리킵니다. 오랬동안 섬겨왔던 그런 우상들이 그대들의 진정한 남편/배우자/동반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당장 그대들을 온전하게 구원할 수 있는 새로운 구원자를 만나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지역/장소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서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조상은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아버지께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유대인들이 다윗/솔로몬을 조상으로 섬기고 다윗/솔로몬이 만든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다면 사마리아인들은 아브라함/야곱/모세를 조상으로 섬기고 아브라함/야곱/모세가 제사드렸던 그리심산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따라서 사마리아인들은 아브라삼/모세/야곱이 제사드렸던 그리심산이 나중에 세워진 예루살렘보다 더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어느쪽 말이 맞을까요?

 

오늘날로 따지면 한민족 5000년 역사에서 서울과 평양의 정통성을 따지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평양은 고조선/고구려/고려시대와 연결되어 있고 서울은 조선시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유대와 사마리아 사람들은 서로의 정통성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옳으냐 그리심산이 옳으냐 하는 주장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지역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을 사랑하고 사마리아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예배를 받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사마리아 사람들이 과거에 대한 집착, 우상에 대한 집착, 지역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 진실하신 하나님을 만나도록 그들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사마리아가 속한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했고 그때부터 외국 사람들이 들어와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남쪽 유대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피가 섞였다고 해서 그들을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님 당시 1등 국민은 로마시민, 2등 국민은 유대인, 3등 국민은 갈릴리 사람들, 4등 국민은 사마리아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차별을 인정하지 않으시고 사마리아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과 화해하기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고 그 여인을 통해서 더 많은 사마리아 동네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을 동네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이 여인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실 수 있었습니다. 요한보음 4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보다 더 적극적으로 행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이 적극적으로 중재했기 때문에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이 만날 수 있었고 서로 화해할 수 있었습니다. 과거의 집착/우월감/경쟁의식에서 벗어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함께 만나고 함께 예배드리는 역사가 이 여인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을 동네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중재자가 중요하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우리는 요즘 Corna19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을 배려하기 위해 물리적으로 1-2미터 거리두기를 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우리의 마음은 사회적 차별/경계/경쟁을 버리고 함께 고통을 나누고 서로 협력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국가 간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서로 협력하고 건강한 사람은 마스크를 노약자에게 양보하고 서로 배려하고 돌보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요즘 전세계적으로 가장 귀한 것이 마스크인데 개성공단에서 매일 마스크를 만들어서 전세계로 수출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월감/자존심/경쟁의식이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편견없이 민족의 화해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이 생명을 살립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먼저 일어서서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바로 우리들이 사마리아 여인처럼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동네 사람들에게 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요한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과거의 편견에서 벗어나서 민족의 화해를 위해서 일하고 우리 주변 동포들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 화해의 소식, 사랑의 소식을 전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Lent, Samaritan Woman’s change and courage

John 4:28 - 42

 

The story of an encounter in John 4 shows Jesus who was willing to meet the discriminated and marginalized Samaritans and the Samaritan woman who responded to Jesus' invitation. This story is about breaking down the conflict between Jews and Samaritans and the barriers to gender discrimination. Also, the story is about a beautiful meeting between a teacher and a disciple, and about a woman who becomes a leader through an encounter with a teacher. In a conversation with her, Jesus pointed out three prejudices that the Samaritans have long held. First, the past traditions that they had cherished cannot solve the spiritual thirst they are now experiencing. Second, Jesus advised that the idols served by the Samaritans could not also solve their thirst. Third, Jesus told the Samaritans that they should overcome their obsession with the place where they live and instead worship God with only spirit and truth. Jesus met her at the well, and through that woman, he was able to meet more Samaritans. This woman's active mediation allowed Jews and Samaritans to meet and reconcile with each other. It was through this woman that the Jewish and Samaritans met and worshiped together, free from past obsession, superiority, and competition. We can see from today's story that the role of the mediator who introduces Jesus to the people of the town is very crucial.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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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두번째 주일 / 3월 두번째 주일

요한복음 3:1-17, 사순절

사순절, 니고데모가 예수를 찾아오다

정해빈 목사

 

 

 

지난주일 사순절 첫째주일의 주제는 시험이었고 오늘 사순절 둘째주일의 주제는 자유입니다. 이 땅의 욕심과 집착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라, 물질과 명예와 명성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라, 잘못된 종교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라, 이것이 오늘 말씀의 주제입니다. 오늘 설교 후에 봉헌송으로 흑인영가를 부릅니다. “오 자유, 오 자유, 나는 자유하리라, 비록 얽매였으나 나는 이제 돌아가리, 자유 주시는 내 주님께” 이 노래처럼 예수님을 깊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하늘의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밤중에 찾아왔습니다. 그는 정통 바리새파 사람이었고 70명으로 구성된 유대의회 회원 중 한명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그는 국회의원이면서 동시에 행정부 고위관료이면서 동시에 모세율법에 정통한 교수/법관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높은 자리에까지 도달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사회는 로마제국이 다스리고 있었지만 유대 사회 내부의 문제는 유대의회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자유를 주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정치/종교적으로 엘리트에 속했습니다. 그렇게 유대사회를 대표하는 엘리트가 밤중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니고데모가 예루살렘 정치/종교의 지도자였다면 반대로 예수님은 북쪽 갈릴리 출신이었고 직업은 목수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니고데모는 최고 상류층에 속했고 예수님은 최하 하류층에 속했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일반적인 상식을 깨트리면서까지 시골에서 올라온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였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밤중에 찾아왔다는 말에는 몇가지 뜻이 숨어 있습니다. 첫째로는 니고데모가 자신을 숨기기 위해서 밤에 몰래 찾아왔다는 것을 가리키고, 둘째로는 니고데모가 아직은 밤에 속한 사람, 세상과 율법에 속한 옛사람이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셋째로는 그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무덤을 제공한 것으로 보아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비공개적으로 숨어서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제자였다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은 그가 아직 영적인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니고데모는 겉으로 보면 최고의 권력자/지식인/종교인이었고 명예/재물에서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허전했고 그의 마음속에는 지금 삶에 대한 의문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이렇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일까? 로마제국에 협력하면서 국회의원으로 사는 것이 옳은 것일까? 내가 믿는 종교는 옳은 것일까? 왜 내 마음 속에는 기쁨과 평안이 없을까? 내가 믿고 있는 유대교는 지금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나 아니면 고통을 주고 있나? 니고데모는 이런 고민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았을 것입니다. 마침 예수라는 사람이 새롭고 놀라운 가르침을 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밤중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즉시 변화되지는 않았지만 천천히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쫓아내고 이 성전을 허물고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선언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유대인들은 유대교/율법/성전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반대로 그것들을 다 허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유대교가 로마제국에 굴복하고 부패하고 타락한 것을 보고 유대교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던 중에 “이 성전을 허물라”고 외쳤던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숨은 제자가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7장을 보면 니고데모가 갈릴리 출신 예수님을 변호하는 장면이 나오고 요한복음 19장을 보면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신에 기름을 바르고 장사지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가 비록 속도는 느리지만 용기있게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영적 스승을 만나느냐가 중요합니다. 참된 스승은 자유와 기쁨을 주고 거짓된 스승은 거짓과 억압을 줍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고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람이 불고 싶은 대로 부는 것처럼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이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은 씻는 것을 가리키고 불은 태우는 것을 가리킵니다. 과거의 죄는 씻어야 하고 태워야 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은 과거의 전통/기득권을 버려야만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는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과거의 유대교/기득권에 머무르지 말고, 영적 성장이 멈춘 사람이 되지 말고,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지말고, 폐쇄적인 사람이 아니라 개방적인 사람,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 바람처럼 자유로운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의 사람은 땅을 의지하지만 하늘의 사람은 하늘을 의지합니다. 과거의 사람은 과거의 전통/경력을 의지하지만, 미래의 사람은 위에 계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성령에 의지하는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다시 나는 것을 가리키는 헬라어가 아노덴(anothen)입니다. 본래 뜻은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니고데모는 이 말을 문자적으로 엄마 뱃속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말로 이해를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쁜 짓 하던 사람이 예수 믿고 나쁜 짓 끊으면 그 사람 거듭났다/중생했다/born again 이라고 말을 합니다. 거듭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본래 뜻은 ”위로부터 태어난다,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본다, 하늘의 사람, 성령의 사람, 자유인이 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요즘 코로나19 때문에 가장 고생하는 사람들이 의료진들입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장기려 박사는 평양의과대학/김일성종합병원에서 교수로 일하다가 6.25 때 월남한 후에 부산에 복음병원을 세우고 평생 가난한 이들을 돌보며 살았습니다. 그는 1968년 부산 지역에서 한국 최초로 의료보험 제도를 실시하기도 했습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 정부가 특별 상봉을 제안했지만 다른 이산가족들과 형평이 맞지 않는다고 특권을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재물/명성/명예에 관심하지 않고 사랑을 베푼 그를 보면 하늘의 사람, 자유인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자유인이 되어라, 성령의 사람이 되어라, 하늘의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니고데모는 처음에는 예루살렘에서 유대교 지도자/권력자로 살았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민중을 억압하고 부패하고 타락한 유대교를 거부하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유대교 지도자가 갈릴리 사람 예수를 따라가는 것은 인생을 거는 위험한 모험이었지만 그는 그렇게 결단하였습니다. 종교는 낮은 곳으로 가서 세상을 구원하고 치료하고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만일 전광훈, 이만희 같은 사람들이 사이비 종교를 만들어서 세상에 해를 끼치고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길거리에 나가서 사람들을 선동한다면 그런 종교는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믿을수록, 더 자유롭고 더 사랑스럽고 더 하늘에 가까워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Lent, Nicodemus visits Jesus

John 3:1 - 17

 

Nicodemus' visit to Jesus recorded in John 3 reminds us of how beautiful it is to live as a person of liberty and the Holy Spirit. Nicodemus was one of the political and religious powers of Jewish society at that time. The darkness at which he visited Jesus indicates some symbols. First, he tried to meet Jesus privately, avoiding people's attention. Second, he had not yet discovered the truth and was seized by the power and vested interests of the world. Nicodemus did not immediately follow Jesus, but slowly accepted Jesus' teachings. He knew that Jesus drove people out of the temple in Jerusalem and declared that he would tear down this temple and rebuild it in three days. Perhaps he also felt that there was no hope in Judaism because Judaism not only succumbed to the Roman Empire but also became corrupt. Later he defended Jesus, anointed and buried Jesus' body according to John 7 and 19. Jesus told him that no one could see or enter the kingdom of God unless he was born again from heaven or born of water and the Holy Spirit. As the wind blows as it wishes, it is the same person born of the Holy Spirit. Jesus told him not to stay in the past Judaism or to become stereotyped, but to be as free as the wind blows, and to seek righteous and merciful God. Jesus reminded him that the earthly person relies on the earth but the heavenly person relies on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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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후 일곱번째 주일 / 2월 네번째 주일

출애굽기 24:12-18, 마태복음 17:1-9

주현절, 산의 영광과 땅의 고난

정해빈 목사

 

 

 

오늘은 주현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셔서 변화되신 것을 기념해서 오늘을 “변화주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주현절의 상징은 빛입니다. 오늘이 주현절 마지막 주일이라서 그런지 출애굽기와 마태복음에 빛이 나옵니다. 산 위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났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을 때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났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고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지난 몇 주 동안 마태복음 5장에 기록된 산상수훈의 말씀을 함께 묵상했습니다. 예수께서 가장 중요한 말씀을 산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얼굴이 해같이 빛나는 영광도 산에서 받으셨습니다. 산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고 말씀과 은혜와 영광을 받는 장소입니다. 오늘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예수님은 산에서 영광/은혜를 받으신 후에 땅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산에서 영광/은혜를 받은 이유는 땅에서의 고난을 견디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은 산에서 영광/은혜를 받으신 후에 십자가 고난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광/은혜/기쁨/감사를 충분히 받을 때 우리는 세상의 고난을 견딜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셨다는 말은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의 예언자 전통을 계승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라는 말씀이 종종 나옵니다. 혈통적으로는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일 수 있지만 삶으로 보면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의 예언자 전통에 서 계셨습니다. 기원전 1400년경 모세는 히브리 백성들을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시켰고 시내산/호렙산에서 율법/십계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개인적으로 부르셨지만 모세를 통해서는 히브리 백성들과 만나서 단체로 계약을 체결하셨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자유와 해방의 히브리/기독교 신앙이 시작되었습니다. 모세는 히브리 신앙을 대표합니다. 이집트 제국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을 섬기고, 억압과 차별이 없는 평등한 하나님 나라를 만들고, 십계명을 지키는 거룩한 제사장 민족이 되겠다고 고백하는 신앙이 히브리 신앙입니다. 시내산 전통, 십계명 전통, 자유와 해방의 전통이 모세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모세를 만나셨다는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모세의 전통, 하나님 나라 전통을 계승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모세가 등장한 지 대략 600년이 지난 후에 엘리야가 등장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율법은 잊혀졌고 사람들은 야훼 하나님 대신 생산과 풍요와 타락의 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졌고 북이스라엘은 폭군 아합과 이세벨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 때 등장한 엘리야는 아합/이세벨 정권에 반대하였고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히브리 전통, 모세의 율법을 잊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 덕분에 엘리야는 아합/이세벨의 미움을 받아서 광야로 도망가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열왕기상 19장 말씀을 보면 아합/이세벨의 미움을 받은 엘리야가 시내산/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아직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000명이 있으니까 그들과 함께 무너진 히브리 신앙을 재건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가 시내산/호렙산에서 받은 사명을 한마디로 말하면 모세가 시작한 히브리 신앙을 계승하는 것이었고 무너진 율법/십계명을 다시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 모두 시내산/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산은 하나님을 만나 말씀/사명받고 은혜받고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하는 장소입니다. 모세와 엘리야 모두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 말씀/사명받고 은혜받고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 말씀/사명받고 은혜받고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하셨습니다. 산에 기도원이 있는 것도 다 이런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산은 하나님 만나고 은혜받는 장소입니다.

 

예수님은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시고 은혜/영광 받으셔서 옷이 빛과 같이 희게 되었고 얼굴이 해같이 빛나셨습니다. 이 장면을 본 베드로가 너무 기분이 좋아서, “선생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에다가 초막 셋을 지어서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 세분을 모시겠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딴 소리 하지 말고 예수님의 뜻을 따르라는 메시지입니다. 산 위에서 초막 짓고 계속 살 생각하지 말라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이 산 위에 오르신 것은 영광/은혜를 받고나서 산 아래로 내려가고자 함이었습니다. 산 위에서 영광을 받고 산 아래에서 고난을 받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산 위에서 영광을 받아야만 산 아래에서 고난을 견딜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산 위로 오르셨습니다. 산 위에 오르신 것은 산 아래로 내려가기 위함이었습니다. 산 위에서 영광/은혜/축복만 받으려고 하고 산 아래로 내려가지 않으려는 신앙은 거짓된 신앙입니다. 영광/은혜/축복만 받으려고 하고 고난/헌신/희생을 거부하는 신앙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예수 믿으면 가정이 행복하고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고 삶이 형통해집니다. 하지만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고통받는 세상 속으로 내려가서 고통받는 이웃과 함께 아픔을 나누고 고난에 동참하고 이웃을 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인도의 지도자 간디는 사회를 망치는 7가지 사회악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원칙없는 정치(Politics without Principle), 노동없는 부(Wealth without Work), 양심없는 쾌락(Pleasure without Conscience), 인격없는 지식(Knowledge without Character), 도덕성없는 상업(Commerce without Morality), 인간성없는 과학(Science without Humanity), 희생없는 예배(Worship without Sacrifice). 고난/희생없는 영광/예배는 거짓된 종교입니다.

 

최근 한국 대구에 있는 신천지 교회에서 다수의 코로나바이러스 환자들이 발생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어떤 교인은 검사를 두 차례나 거부하고 바이러스를 주변에 전염시켰고 그 교회는 교인들에게 예배 참석했다는 것을 숨기라고 지시하고 교회당 문을 잠그고 소독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나 종교를 선택해서 믿을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종교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그 종교가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지, 사회를 위해서 헌신하고 고난에 참여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영광/은혜만 받으려고 하고 책임은 지지 않으려고 하는 종교는 가짜 종교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에게 영광과 은혜와 축복을 주십니다. 만약 우리가 영광을 받는다면 그것은 땅에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산 위의 영광은 산 아래의 고난으로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을 받으신 후에 산 아래로 내려가셔서 고난을 짊어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광과 축복을 이웃과 나누고 때로는 고난도 짊어지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piphany, mountain glory and earthly suffering

Exodus 24:12-18, Matthew 17:1-9

 

The story that Jesus met Moses and Elijah on the mountain indicates that Jesus succeeds in their prophetic tradition. Moses freed the Hebrew people from slavery in Egypt and received the Law from Mount Sinai. Through Moses, the Hebrew and Christian faith of freedom and liberation began. The story of Jesus' encounter with Moses on the mountain indicates that Jesus inherits the tradition of Moses, the vision of the kingdom of God. When Elijah appeared about 600 years after Moses, the Law was forgotten and people served Baal and Asher, the gods of production and corruption, instead of Yahweh God. Having witnessed these scenes, Elijah insisted on the northern Israelites not to forget the Hebrew tradition which Moses had delivered to them. Moses and Elijah both met God on Mount Sinai. Thus, the mountain symbolizes the place where we encounter God, God's mission, and grace. When Peter saw Jesus' face shining like the sun, he got excited and said, "If you wish, I will make three dwellings here." Yet from the cloud, a voice said. “This is my beloved son. With him, I am well pleased. listen to him!” Jesus' purpose on the mountain was to go down the mountain after receiving glory. If a religion emphasizes only the glory and blessings on the mountain and does not have the willingness to go down the mountain, that would be false faith. We believe that God gives us glory and grace. But if we are glorified, it is because there is work to be done on earth. Today's scripture reminds us that glory on the mountain must lead to service on earth. After receiving the glory of heaven, Jesus descended down and suffered for righteousness. With the glory and blessing given by God, we are called to go down the mountain and devote ourselves to the kingdom of God.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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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후 여섯번째 주일 / 2월 세번째 주일

마태복음 5:21-37

주현절, 분노와 간음과 맹세

정해빈 목사

 

 

십계명이 신앙생활의 출발이라면 산상수훈은 신앙생활의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은 유월절에 이집트를 떠나서 50일 만에 시내산에 도착하였고 시내산에서 율법/십계명을 받았습니다. 유월절 후 50일째 되는 날에 율법을 받았다고 해서 이 날을 오순절이라고 부릅니다. 히브리 백성들은 시내산 밑에서 대략 1년 정도 머물면서 말씀을 공부하였고 성막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왜 시내산 밑에서 1년 정도 머물렀을까요? 애굽의 때를 벗고 자유인, 하나님 백성이 되려면 율법/십계명을 공부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십계명은 옛 생활을 벗어나 세례받고 하나님 자녀가 되기 위해서 공부해야 하는 신앙의 출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을 자세히 보면 각각의 계명들이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너희들을 억압하는 이집트의 태양신을 섬기지 말고 너희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신 야훼/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히브리 백성들이 뜨거운 태양 아래서 이집트 바로황제를 위해서 우상/동상을 만드는 강제노동을 한 것을 아시고 나를 위해서 동상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로 히브리 백성들은 노예였기 때문에 하루도 쉬지 못하고 매일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짐승/가축을 포함해서 모든 생명은 최소한 일주일에 하루는 쉴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식으로 보면 십계명이 지키기 무거운 계명이 아니라 노예생활하던 히브리 백성들을 자유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태양신 같은 제국의 신에게 절하지 말라. 힘들게 동상 만들지 말라. 일주일에 하루는 쉬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 계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적질하지 마라. 부모를 공경하라. 거짓말하지 마라. 히브리 백성들은 노예생활을 하면서 부모님을 버리고 살인하고 거짓말하고 도적질하고 간음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히브리 백성들 뿐만 아니라 애굽 사람들도 이런 식으로 살았습니다. 애굽에서는 모두가 무질서하게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히브리 백성들에게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 민족이 되었으니 옛날 생활을 청산해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십계명은 어려운 계명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계명이었습니다. 1번부터 4번까지는 하나님 사랑이고 5번부터 10번까지는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입니다. 십계명을 지켜야 사회가 무질서하지 않고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5장에서 십계명 보다 더 어려운 계명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십계명을 지키면 사회/공동체가 안전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십계명이 사회/공동체를 안전하게 해 줄 수는 있지만 사회/공동체를 행복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사회/공동체가 행복해지려면 십계명 이상의 계명이 필요합니다. 사회/공동체가 행복해지려면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형제/자매에게 성을 내거나 얼간이/바보라고 저주하는 것이 살인하는 것과 똑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살인하지 않으면 사회/공동체는 안전하지만 그 사회가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남북한, 한국과 중국, 한국과 일본이 살인/전쟁하지 않으면 국가는 안전합니다. 하지만 안전하지만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사회가 행복해지려면 서로 미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비록 살인하지 않았을지라도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저주하고 분노하면 그 사회는 겉으로는 안전하지만 속으로는 서로 증오하고 미워하는 지옥같은 사회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살인하지 않았다고 해서 만족해하지 말고 마음으로도 살인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행복한 하나님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간음/이혼에 대한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간음/이혼하지 않으면 가정을 유지할 수는 있지만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간음/이혼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딴 생각을 할 수도 있고 배우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신명기 24장에 보면 아내가 수치스러운 일을 했을 경우 이혼 증서를 써 주고 이혼할 수 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혼 증서를 써 주는 이유는 그래야 아내가 합법적으로 재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수치스러운 일”이 어떤 일이냐는 데 있습니다. 수치스러운 일이 간음은 아닙니다. 간음을 했다면 여자는 돌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유대 남자들 중에는 “수치스러운 일”을 과장되게 해석해서 남편을 잘 섬기지 않거나, 밥을 잘 만들지 못하거나, 옷을 잘 만들지 못하거나 하여튼 사소한 것도 다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에 대해서 확실하게 음행을 한 경우를 제외하고 사소한 일로 아내를 버리는 사람은 간음한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정으로 행복한 가정을 만들려면 간음/이혼 안했다고 만족해하지 말고 진정으로 배우자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맹세에 대한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처음에는 진심으로 맹세했지만 나중에 지키지 않는다면 그 맹세는 결과적으로 거짓 맹세가 됩니다. 예수께서는 진심으로 맹세하고 나서 나중에 지키지 않는 것 보다는 차라리 맹세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을 걸고 과장되게 맹세하지 말고 매순간 예 할 때는 예하고 아니오 할 때는 아니오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다 악에서 나오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과장되게 살지 말고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정직하게 말하는 것이 더 낫다는 말씀입니다.

 

한국영화 [기생충]이 92년 아카데미 시상식 역사상 처음으로 작품상/감독상/각본상/국제영화상을 수상했다는 뉴스가 지난 주에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희극으로 시작해서 비극으로 끝이 납니다. 3가족이 등장하는데 착한 가족은 아무도 없습니다. 반지하실에서 사는 4인 가족이 신분을 속이고 부자 집에 몰래 취직을 했는데 알고 봤더니 전 가정부의 남편이 집주인 몰래 지하실에서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부자 주인은 새로 취직한 운전사에게서 하수구 냄새가 난다고 무시하고 아들 생일잔치에 인디언 복장을 하고 춤을 추라고 말합니다. 운전사는 화가 나서 부자 주인을 죽이고 지하실을 차지하기 위해서 가난한 2가정이 서로 싸움을 벌입니다. 부자가족과 가난한 가족, 가난한 가족과 더 가난한 가족이 서로를 조금씩 배려하고 말을 조심하고 선을 넘지 않았더라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공생, 함께 살아야 서로가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분노와 간음과 맹세에 대한 말씀은 마음가짐에 대한 말씀입니다. 서로가 행복해지려면 십계명을 지키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마음으로 분노하지 말아야 하고 마음으로 간음하지 말아야 하고 말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노와 간음과 맹세를 멀리하고 마음으로 사랑할 때 우리의 관계는 더 따뜻하고 친밀한 관계가 될 것입니다. 단순히 안전한 세상이 아니라 서로가 행복한 세상,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piphany, anger, adultery, and oaths

Matthew 5:21-37

 

The Ten Commandments refer to the rejection of Egyptian slavery. God said, first do not serve the god of Egypt but Yahweh God who gave freedom and liberation. Second, do not let anyone make idols and statues for me. Third, ensure that all life can rest at least one day a week. Indeed, they were not a heavy requirement but a gift from God to set the Hebrews free and happy. The same is true of the next commandment. The Hebrew people witnessed parental abandonment, murder, lies, theft, and adultery in Egypt. Yet, God taught them to abandon their old lifestyle, since they became God's holy priesthood. Indeed, the Ten Commandments were not a harsh order, but the minimum admonition that people must keep in order to live a free and happy life. Jesus taught us a more complete Sermon on the Mount than the Ten Commandments. The Ten Commandments can give us minimal safety, but they can not bring us complete happiness. In order for our lives to be happy, we need more than ten commandments. For example, if we don't murder each other, society can be safe, but we must not hate each other in order to be truly happy. The same is true of adultery and divorce. If we do not commit adultery or divorce, we can protect the home, but we cannot make it happy. Jesus said that anyone who abandoned his wife in trivial matters was adulterous, except that she committed fornication. The Lord told us not to commit adultery "even in our hearts." This is why we can obtain true family happiness. The lessons of anger, adultery, and oaths show how important our hearts are. To be happy with each other, we must not be angry with our hearts, not commit adultery with our hearts, and be careful of what comes out of our hearts. As we keep away from anger, adultery, and oath and love our neighbours with our hearts, our relationship will be warmer and more intimate.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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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후 다섯번째 주일 / 2월 두번째 주일

이사야서 58:4-8, 마태복음 5:13-20

주현절, 소금과 빛과 전염병

정해빈 목사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이사야 58장 말씀은 금식에 대한 말씀입니다. 어떤 중요한 기도제목이 있어서 식사를 끊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을 금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투면서 금식하고 주먹질하면서 금식하고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서 금식하는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금식할 때는 위선자들과 같이 남에게 보이려고 슬픈 기색을 띠지 말고 반대로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주고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주고 굶주린 사람에게 먹거리를 주고 떠도는 사람을 환영하고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혀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빛이 새벽햇살처럼 비칠 것이며 주님의 영광이 뒤에서 호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 신앙을 자랑하기 위해서 금식하지 말고 정말 금식을 하려면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돕기 위해서,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의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서 금식하라는 말씀입니다. 몸이 아픈 사람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기 위해 금식할 수도 있고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 금식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금식은 고통 중에 있는 이웃을 돕는 금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을 때 성전이 없었기 때문에 성전제사 대신 금식을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사야는 금식을 하려면 자기 신앙을 자랑하기 위해서 하지 말고 오직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돕고 그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금식하라고 선포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옛날 중동지방에서는 소금이 귀했습니다. 예수님 시대 로마제국은 군인들에게 봉급으로 소금을 주었습니다. 소금이 라틴어로 슬라리움(Salarium)인데 여기서 봉급을 뜻하는 salary와 소금을 뜻하는 salt가 나왔습니다. 직장인(salaryman), 군인(soldier)이란 말도 다 소금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군인이 목숨을 바치고 희생했을 때 받는 것이 소금입니다. 소금은 희생과 헌신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소금은 짠맛이 나야 합니다. 짠맛이 나지 않는 소금은 길가에 버려져서 사람들에게 밟히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소금처럼 그리스도인다운 맛/향기가 나야 합니다. 사랑의 맛, 감사의 맛, 생명과 평화와 정의의 맛이 나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보는 것도 그리스도인답게 보아야 하고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인다워야 합니다. 또한 소금이 음식의 부패를 막는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불의와 부패를 막고 세상을 정의롭게 건강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소금처럼 그리스도인의 맛이 나야하고 세상의 부패를 막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세번째 메시지는 자기를 녹이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수고 녹여야 음식이 삽니다.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씀은 우리들도 세상 속으로 스며들어서, 자기를 녹여서 가정과 교회와 세상을 살리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녹아서 세상이 살면 그것으로 보람을 느끼라는 것입니다. 내가 희생/헌신해서 세상이 살면 그것으로 내 역할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녹여서 세상을 살리는 사람에게 하늘의 큰 상을 내려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열심히 살면서 가정과 교회와 세상을 살린 후에 때가 되면 소리없이 사라지는 것이 억울한 것이 아니라 영광이고 그것이 소금의 사명이라는 말씀입니다.

 

두번째로 세상의 빛이 되라는 말씀은 적극적으로 자신을 들어내서 어둠을 몰아내고 주위를 밝게 비추라는 말씀입니다. 빛은 깨끗함과 진리를 가리키고 어둠은 거짓과 불의와 폭력을 가리킵니다. 또한 빛은 따뜻한 에너지를 생명에게 전달해서 식물과 동물을 자라게 합니다. 즉 교회는 세상의 빛이 되어서 어두운 세상을 고발하고 변화시켜야 하고 동시에 뜨거운 빛이 되어서 어두움과 추위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소금과 빛은 정반대입니다. 소금은 세상 속으로 스며들어서 녹아 없어져야 하지만 빛은 자신을 나타내고 드러내야 합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자신을 드러내고 알리고 우리의 활동을 홍보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어서 어두운 세상을 밝히면서 살다가 마지막에는 소금이 되어서 녹아 없어져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즘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중국 커뮤니티가 고통을 겪고 있다는 뉴스가 매일 나오고 있습니다. 감기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것이 혐오바이러스입니다. 동양인이라고 인종차별하는 것입니다. 운동해서 체온이 올라가면 면역력도 올라가듯이 이럴 때일수록 사랑의 뜨거움으로 혐오바이러스를 물리쳐야 합니다. 서로를 배려하고 응원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뜨거운 빛이 어둠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로마시대에 천연두가 유행해서 전체 인구의 1/4이 죽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기독교인들은 두려움을 무릅쓰고 목숨을 아끼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극진하게 돌보았습니다. 특별한 치료제가 없어도 옆에서 누군가가 사랑으로 간호해 주면 치료되는 확률은 높아집니다. 전염병이 한두 번 지나고 보니까 로마제국 인구가 줄어들었는데 기독교인들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무절제하지 않고 친절하고 사랑이 많고 몸과 마음이 깨끗하고 일반 로마사람들보다 건강하다는 것을 로마제국 사람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12명으로 시작된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박해를 받으면서도 로마제국에 전파되는 이유 중의 하나였습니다.

 

"우리 형제들은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병자를 돌보았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였습니다. 많은 형제들이 다른 사람들을 치료하고 자기들은 죽었습니다. 이와 같이 경건함과 열렬한 신앙을 수반한 죽음은 순교에 못지않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죽은 성도들을 포옹하였고 그들을 씻기고 수의를 입혔습니다. 그러나 이교도들은 이와 반대로 행했습니다. 그들은 병들어 앓기 시작한 사람들을 쫓아냈으며 사랑하는 친구들도 멀리했습니다. 그들은 환자들을 길에 내다 버렸고 죽은 사람을 매장해 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죽음을 피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예방하고 조심해도 그것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유세비우스, 교회사. 7.22)."

 

우리는 요즘 산상수훈의 말씀을 계속 묵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십계명과 613개의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이 사람들의 의보다 더 나을 수가 있을까요? 그들은 열심히 기도했고 금식했지만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리 기도와 금식을 많이 해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부당한 결백을 풀어주고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주고 굶주린 사람을 먹이고 떠도는 사람을 환영하고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혀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금식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세상의 빛처럼 살다가 마지막에는 소금처럼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고 녹아 없어지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piphany, salt, light, and plague

Isaiah 58:4-8, Matthew 5:13-20

 

Is not this the fast that I choose: to loose the bonds of injustice, to let the oppressed go free, and to break every yoke? Is it not to share your bread with the hungry, and bring the homeless poor into your house; when you see the naked, to cover them, and not to hide yourself from your own kin? Then your light shall break forth like the dawn and your healing shall spring up quickly. (Isaiah 58:6-7). What does the phrase "you are the salt of the world" mean? Just as salt is salty, we should have the beautiful scent of Jesus. And just as salt prevents the corruption of food, we must prevent the injustices of the world. But most importantly, the role of salt is to melt itself. It would be our great honour if we disappear silently in time after saving the world. Salt teaches us this role.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If darkness refers to lies and injustice, the light indicates love and truth. So the church should be the light that shines the dark world. While salt penetrates into the world and melts away, light must show off and reveal itself. Jesus said, "let your light shine before others, so that they may see your good works and give glory to your Father in heaven." When smallpox prevailed in Roman times, Christians not only cared for each other but also reached out to the sick outside the church. When the epidemic reduced the population of the Roman Empire, the number of Christians did not decrease. After the plague passed, the Roman Empire learned that Christians were kind, loving, clean in body and mind, and healthier than ordinary Romans. The passages of Isaiah and Matthew remind us that fasting that is pleasing to God relieves unjust innocence and that we are called to salt and light. Once again, we are called to live like the light of the world and at the end melt away like salt.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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