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절 후 다섯번째 주일/7월 두번째 주일

성령강림절, 서로가 서로를 구원한다

누가복음 10:25-37

정해빈 목사

 

 

오늘 우리가 읽은 이번 주일 성서일과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입니다. 무엇을 설명하려고 할 때 그냥 말하기보다 예를 들어서 설명하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예수님도 청중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비유를 주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비유 두가지를 말하라면 “탕자의 비유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말할 수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너무 유명한 이야기라서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이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네덜란드의 유명한 화가인 반 빈센트 고흐도 “선한 사마리아인” 그림을 그렸습니다. 저는 오늘 이 이야기가 강조하는 3가지 주제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 번째 주제는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율법교사, 제사장, 레위 사람, 이렇게 3명의 종교지도자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교사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냐고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에 쓰여진 대로 네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쳐 주니까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냐고 질문을 했습니다. 율법교사가 자기지식을 자랑하고 예수님을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서 계속 질문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 이웃이 누구냐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를 보면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서 길에 쓰러졌는데 제사장도 그 옆을 피해서 지나갔고 레위 사람도 그 옆을 피해서 지나갔습니다. 유대교를 대표하는 율법교사, 제사장, 레위 사람 모두 이웃의 아픔에 무감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강도만난 자를 지나친 것은 그들이 율법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 레위기를 보면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이 거룩한 것처럼 자신들도 거룩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강도만난 자를 도와주면 피가 옷에 묻어서 더러워지니까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본래 뜻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온 세상을 거룩하게 하라는데 있습니다. 강도만난 사람이 쓰러져 있다면 그 사람이 지금 더러워져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씻기고 치료해서 거룩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내가 열심히 성경읽고 기도하는 것은 나의 경건생활을 위해서 좋은 일이지만 나의 경건이 나의 개인적인 경건에 멈춰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지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자비로우니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거룩한 교회가 되자고 말하기 보다는 우리 교회가 자비로운 교회가 되자고 말하는 것이 더 옳습니다. 본래 거룩과 자비는 같은 뜻인데 거룩을 말하면 자꾸 개인적인 거룩을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거룩을 자비로 바꾸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개인적인 거룩에 집착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귀족이 되었기 때문에 이웃의 아픔에 무감감했습니다. 종교지도자가 명예와 권력과 재물을 탐하면 귀족이 되어서 타락하기가 쉽습니다. 귀족이 되니까 강도만나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이 귀찮은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저 같은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교회를 자식에게 물려주고, 성범죄를 저지르고, 교회 돈을 착복하고, 가짜뉴스를 퍼트리면서 정치권을 기웃거리고, 불법으로 교회를 건축하는 목사들의 위선을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종교지도자가 혼자서만 거룩한 척 하지 말고, 귀족처럼 살지 말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뜻에서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종교지도자들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내가 혹시 여기 나오는 타락한 종교지도자는 아닌지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두번째 주제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준 사람은 유대인들이 평소에 무시하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강도만난 사람을 유대인이라고 생각하면, 자신이 평소에 존경하는 제사장이 그냥 지나가고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인도 그냥 지나갔는데 자신이 평소에 무시했던 사마리아 사람이 자신을 구해 주었습니다. 강도만난 사람은 이 일을 통해서 자신이 사마리아 사람을 무시했던 것을 회개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 중에도 좋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라가 둘로 갈라졌는데 서로가 정통성을 주장하며 대립했습니다. 남유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윗/솔로몬의 후손이고 예루살렘 성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민족의 정통성이 자신들에게 있고 북이스라엘은 나라가 망한 후에 앗시리아에 의해서 피가 섞였기 때문에 정통성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북쪽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모세의 후손이고 12지파 중에서 10지파의 후손이기 때문에 정통성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 페르시아에서 살던 유대인들이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사마리아에서 살던 사람들과 충돌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하여튼 정통 유대인들은 북쪽 사마리아 사람들을 무시하고 그들에 대한 반감이 있었는데 정작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은 자신이 평소에 무시했던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설명하면 어떤 기독교인이 강도를 만나 쓰러졌는데 평소에 존경하는 카톨릭 신부님도 그냥 지나가고 개신교 목사님도 그냥 지나갔는데 평소에 안 좋게 생각했던 이슬람교인이 자신을 구해주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느 나라 사람이냐, 그 사람의 종교가 무엇이냐, 그 사람의 지위가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 중에는 나보다 더 선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으라 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들은 청중들은 자신들이 존경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지나쳤는데 자신들이 무시하는 사마리아 사람이 유대인을 구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청중들에게 누가 나의 이웃인가 아닌가 따지지 말고 고통받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그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강도만난 사람을 구해 준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었다는 이 이야기는 우리 안에 있는 편견, 우리가 더 옳고 우리가 더 정통성이 있다는 편견을 벗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이 이야기의 세번째 주제는 서로가 서로를 구원한다는 주제입니다. 1970년대 토론토대학에서 공부하시고 민중신학을 연구하셨던 서남동 목사님은 강도만나 피 흘리는 사람이 우리의 메시야라고 말했습니다. 나를 구해주고 나에게 깨달음을 주는 사람이 메시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강도만나 피 흘리는 사람이 나의 메시야가 될 수 있을까요? 강도만난 사람 입장에서는 사마리아 사람이 자신을 구해주었으니까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의 메시야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 입장에서는 강도만난 사람을 통해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그 사람을 통해서 많은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강도만난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의 메시야가 될 수 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사마리아 사람은 다른 사람들처럼 이기적인 인생을 살았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만난 사람을 통해서 사랑을 실천하였고 이 사랑을 통해서 자신도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메시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을 “서로가 서로를 구원한다”로 정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강도만나 피 흘리는 사람이 예수님이요 우리의 메시야 입니다. 예수님은 작은 사람에게 물 한잔 주는 것이 바로 나에게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메시야를 만나야 하는 것처럼, 구원받으려면 지금 강도만나 피 흘리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귀족처럼, 짐승처럼 살지 않고 사마리아 사람처럼 살 수 있습니다. 강도만난 사람을 그냥 지나치는 사람은 하나님께 책망을 받을 것이고 그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은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강도만나 피 흘리는 사람이 예수님이고 우리를 구원할 메시야라는 사실을 깊이 기억하십시다. 아멘.

 

Pentecost, each other saves one another

Luke 10:25-37

 

Just then a lawyer stood up to test Jesus. “Teacher,” he said, “what must I do to inherit eternal life?” He said to him, “What is written in the law? What do you read there?” He answered,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strength, and with all your mind; and your neighbor as yourself.” And he said to him, “You have given the right answer; do this, and you will live.” But wanting to justify himself, he asked Jesus, “And who is my neighbor?” Jesus replied, “A man was going down from Jerusalem to Jericho, and fell into the hands of robbers, who stripped him, beat him, and went away, leaving him half dead. Now by chance a priest was going down that road; and when he saw him, he passed by on the other side. So likewise a Levite, when he came to the place and saw him, passed by on the other side. But a Samaritan while traveling came near him; and when he saw him, he was moved with pity. He went to him and bandaged his wounds, having poured oil and wine on them. Then he put him on his own animal, brought him to an inn, and took care of him. The next day he took out two denarii, gave them to the innkeeper, and said, ‘Take care of him; and when I come back, I will repay you whatever more you spend.’ Which of these three, do you think, was a neighbor to the man who fell into the hands of the robbers?” He said, “The one who showed him mercy.” Jesus said to him, “Go and do likewise.” (Luke 10:25-37)

 

The well-known "the parable of the Good Samaritan" gives us three spiritual messages. First, Jesus rebuked the hypocrisy of the religious leaders of Judaism. The scribe tried to testify Jesus with knowledge, and the priest and the Levite in the story did not save the man who was robbed on the road. Perhaps they would have considered personal piety more important than helping neighbors in need. They thought that the person who was shed on the road was dirty and passed by him. It would have been more important for them to go to the temple than to save those in trouble. They paid more attention to piety than to mercy. But Jesus said mercy was more important than piety. Jesus accused the fallen religious leaders who had already become nobility. The second theme of today's story is about the good Samaritan. Surprisingly enough, the person who helped the fallen man on the street was not the religious leaders that the Jews usually admire, but the Samaritan that the Jews usually ignore. A person who was helped by the good Samaritan would have repented that he had ignored him before. Historically, the Orthodox Jews living in the south have long despised the northern Samaritans. In their view, the Samaritans were "unclean" people, mixed with foreign nations. But today's scripture teaches that it is more important to practice love, not to find the nationality, religion, and status of a person. This story helps us not only to get rid of the prejudices that are in us but also to realize that others can practice love more than we do. The third theme of this story is the realization that each other is saving each other. Rev., Seo, Nam-Dong who studied Minjung Theology insisted that the man who met the robber on the roadside is our Messiah.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person who was robbed, since the Samaritan saved himself, the Samaritan became his Messiah. On the other hand, since the Samaritan had the opportunity to save the person who was robbed, the person who was robbed become the Messiah of the Samaritan. Through the practice of love, they became Messiah to each other. More precisely, the person who bleeds on the road is Jesus and our Messiah. If we do not want to be selfish like nobles and beasts, we must meet the person who is suffering now. If we pass someone who is in trouble, God will reprove us, and if we help that person, God will praise us. Today's story makes us realize that the suffering person is the Messiah who will save us. Amen.

Posted by 정해빈
,

성령강림절 후 네번째 주일/7월 첫번째 주일
성령강림절, 선한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
열왕기하 5:1-4, 9-14
정해빈 목사

 

 

 

오늘 말씀은 시리아의 군대장군 나아만이 나병/피부병을 치료받는 이야기입니다. 나아만은 어린 노예 소녀와 엘리사 선지자를 통해서 나병을 치료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깨달음도 얻게 되었습니다. 나아만은 이 사건을 통해서 영적으로 육적으로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인생을 살다보면 나아만처럼 갑자기 몸이 아프다든지 갑자기 큰 사건/사고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만나면 사람은 보통 4가지 단계를 거친다고 합니다. 첫번째는 충격과 부정의 단계입니다. 갑자기 찾아온 이 상황에 큰 충격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부정을 하려고 합니다. 무언가 잘못되었고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 부정의 단계가 짧을 수도 있고 길 수도 있습니다. 두번째는 인정/체념/원망하는 단계입니다. 이 상황이 사실이라는 것이 확실해지면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정하고 체념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세번째는 이 상황을 극복하고 해결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단계입니다.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은 용기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 단계가 가장 길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문제 해결을 위해서 노력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존심을 굽혀야 하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합니다. 예전에는 주변 사람들을 하찮게 생각했는데 이제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합니다. 마지막 네번째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 큰 깨달음을 얻고 감사하는 단계입니다. 질병이 치료되었고 사건/사고가 잘 해결되었습니다. 사람은 이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고 성숙한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동안 내가 너무 교만했구나, 앞으로는 주변 사람들에게 잘 해야 되겠구나, 이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구나, 앞으로는 더 감사하며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충격과 혼란이 있었지만 마지막에는 그 모든 충격과 혼란이 축복이 되었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이전보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깨닫고 더 많이 겸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고통이 변하여 축복이 되었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질병/사건/사고가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때로는 억울하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더 겸손하고 더 선하고 더 감사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메시지입니다.

 

나아만이 나병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안 어린 노예 소녀가 이스라엘에 있는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가면 병을 고칠 수 있다고 말을 전해줍니다. 시리아 최고의 군대장군이 어린 노예 소녀의 말을 믿고 약소국가인 이스라엘을 찾아간 것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고 엘리사가 얼굴도 안보여주고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 말하는 것을 전해 듣는 것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너무 화가 나서 돌아가려고 하였지만 주변 부하들의 말을 듣고 그대로 하였더니 나병이 낫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식으로 말하면 미국의 2인자 부통령이 불치병에 걸렸는데 누군가가 남미 아마존에 있는 가난한 나라의 어떤 마을에 가면 민간요법으로 그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알려줍니다. 그래서 부통령이 그 마을에 갔는데 아무도 자기를 알아주지 않습니다. 대신 당신 병을 고치려면 우리가 하라는 대로 하라고 가르쳐 줍니다. 마을 사람들 말을 들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자존심을 내려놓고 하라는 대로 했더니 병이 낫게 되었습니다. 나아만은 이 일로 인해서 겸손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평소에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노예소녀와 약소국가의 한 예언자가 자기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평소에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사람들이었지만, 바로 그런 선한 사람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입신양명(立身揚名) 출세하여 이름을 세상에 떨친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후손들에게 이름을 남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때로는 선을 포기하고도 하고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을 때, 내가 더 선한 사람이 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사람은 많아도 내가 더 유명한 사람이 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합니다. 내 인생을 돌아보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좀 더 잘해주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아도 내가 유명한 사람이 되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인생을 잘 살았느냐의 기준은 내가 유명한 사람이 되는데 있지 않고 내가 내 배우자와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물론 유명하면서 동시에 선한 사람으로 인생을 살았다면 그 사람은 최고의 인생을 산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유명한 인생과 선한 인생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선한 인생을 선택한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일 것입니다. 독일의 히틀러나 소련의 스탈린은 유명한 사람이었지만 선한 인생을 살지 않고 오히려 악을 행했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그들을 그리워하지 않습니다. 내가 유명하냐 유명하지 않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선한 인생을 살았느냐 살지 않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유명한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하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유명한 사람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이 세상을 바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열왕기하 5장에 보면 3명의 유명한 사람들, 강대국인 시리아의 왕, 시리아의 2인자 나아만, 이스라엘의 왕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아만은 자신과 같은 유명한 사람들이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유명한 사람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선한 힘이 세상을 바꾼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나아만의 병을 고쳐주고 시리아와 이스라엘이 전쟁하지 않도록 화해시키고 관계를 회복시킨 사람들은 평범한 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린 노예 소녀는 나아만에게 엘리사를 소개시켜 주었고 엘리사는 나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고 나아만의 부하들은 나아만을 설득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유명한 권력자들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작은 사람들의 선한 힘과 믿음이 세상을 바꾼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국에서 홍콩에서 세상 여기저기에서 선한 사람들이 모여서 촛불을 들면 처음에는 그들이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그들의 에너지가 쌓이고 쌓이면 그들의 선한 힘이 세상을 바꾸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선한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어 나가도록 선한 사람들을 도와주시고 그들이 포기하지 않도록 그들을 격려해 주십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으라고 말했습니다. 몸을 씻으라는 말은 거듭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성령께서는 교만한 사람을 겸손한 사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우리들도 요단강에 들어가서 성령의 물로 씻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들을 새사람으로 고쳐주실 것입니다. 자연과학에서 쓰는 말 중에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의 작은 운동이 나중에 큰 운동을 일으킨다는 말입니다. 내가 하는 작은 말과 작은 선한 행동이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어린 소녀는 자신을 시리아로 끌고 온 주인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발동해서 나병으로 괴로워하는 나아만에게 작은 선을 베풀었는데 그 작은 선이 나비효과가 되어서 역사를 바꾸게 되었습니다. 진실로 선한 사람들의 작은 힘이 세상을 바꿉니다. 선한 사람이 있는 한 세상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망하지 않는 것은 선을 행하는 평범한 사람들, 국민들, 씨알들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씨알들이 세상을 바꿉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서 선한 마음, 선한 행동을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entecost, good people change the world 
2 Kings 5:1-4, 9-14

 

Naaman, commander of the army of the king of Aram, was a great man and in high favor with his master because by him the Lord had given victory to Aram. The man, though a mighty warrior, suffered from leprosy. Now the Arameans on one of their raids had taken a young girl captive from the land of Israel, and she served Naaman’s wife. She said to her mistress, “If only my lord were with the prophet who is in Samaria! He would cure him of his leprosy.” So Naaman went in and told his lord just what the girl from the land of Israel had said... So Naaman came with his horses and chariots and halted at the entrance of Elisha’s house. Elisha sent a messenger to him, saying, “Go, wash in the Jordan seven times, and your flesh shall be restored and you shall be clean.” But Naaman became angry and went away, saying, “I thought that for me he would surely come out, and stand and call on the name of the Lord his God, and would wave his hand over the spot, and cure the leprosy! Are not Abana and Pharpar, the rivers of Damascus, better than all the waters of Israel? Could I not wash in them, and be clean?” He turned and went away in a rage. But his servants approached and said to him, “Father, if the prophet had commanded you to do something difficult, would you not have done it? How much more, when all he said to you was, ‘Wash and be clean’?” So he went down and immersed himself seven times in the Jordan, according to the word of the man of God; his flesh was restored like the flesh of a young boy, and he was clean. (2 Kings 5:1-4, 9-14)

 

There is a saying that "When tigers die and leave their skins, people die and leave their names." Everyone wants to be famous. Perhaps it is because descendants may remember their names. For this purpose, sometimes we find ourselves giving up moral goodness and try to accomplish our goals regardless of means and methods. But when the last moment of life comes, people regret that they have not become better and more compassionate. On the other hand, there are not many people who regret not being more famous. The secret to the success of life would depend not on how we become famous but on how good we are to our family and the people around us. We usually think that famous people have the power to change the world. But today's scriptures state that It is not powerful but good people to change the world. Three famous people in charge, King of Syria, General Naaman, and the king of Israel, could not save the world. But a young slave girl, the prophet Elisha, and the men of Naaman worked together to change the world. The slave girl brought to Syria introduced Naaman to Elisha, the prophet Elisha of Israel gave instructions on how to fix leprosy, and Naaman's men persuaded Naaman. Truly the small and good practices of ordinary people change the world. The Holy Spirit helps "small" people to do good and encourages them to not give up. Just as the word "butterfly effect" in natural science points out, a small gesture can cause a bigger movement later on. Our little words and actions can save people and change the world. As long as there are good people in the world, we believe, the world will never be destroyed. Even if we are not famous, the Holy Spirit will help and encourage us to do good toward the world. Truly good people change the world. Amen.

Posted by 정해빈
,

성령강림절 후 세번째 주일/6월 다섯번째 주일
성령강림절,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
갈라디아서 5:13-25
정해빈 목사

 

 

오늘이 6월 마지막 주일인데, 본래 6월은 우리 교회가 속한 캐나다연합교회의 생일이 있는 달입니다. 지금부터 94년 전인 1925년 6월 10일, 캐나다감리교회, 캐나다장로교회 70%, 캐나다회중교회가 합쳐서 캐나다연합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캐나다연합교회에 대해서 2가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첫번째는 캐나다연합교회를 소개하는 상징 문장(Crest)입니다. 물고기 모양은 초대 기독교인들을 가리킵니다. 헬라어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Ίησοῦς Χριστός, Θεοῦ Υἱός, Σωτήρ”의 첫 글자를 붙이면 물고기(ΙΧΘΥΣ, 익쑤스)란 단어가 되기 때문에 물고기는 옛날 초대 기독교인들을 가리켰습니다. 가운데 X는 십자가/그리스도를 가리키고 비둘기는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킨다는 것을 강조하는 감리교를 가리키고, 불타는 떨기나무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는 장로교를 가리키고, 성경책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는 회중교회를 가리키고 아래는 알파와 오메가(처음과 나중)을 가리킵니다. 오른쪽 밑에 보면 이 땅의 원래 주인인 모학(Mohawk) 원주민들의 표어, 아퀘 니아테테와네렌(Akwe Nia’Tetewá:neren), “모두가 연결되어 있습니다”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고 왼쪽에는 라틴어 우트 옴네스 운음 신트(ut omnes unum sint), “모두가 하나되게 하옵소서”(That all may be one, John 17:21)라는 글자가 들어있습니다. 캐나다연합교회에 속한 모든 교인들이 초대교회의 물고기, 비둘기, 떨기나무, 성경, 알파와 오메가의 유산을 기억하고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하나되게 하소서” 이렇게 고백하자는 뜻에서 상징 문장을 만들었습니다.

 

캐나다연합교회를 가리키는 두번째 상징은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매주일 고백하는 새신조(New Creed)는 1968년에 만들었습니다. 새신조는 성령님을 “우리와 남들 안에서 성령으로 역사하십니다” 이렇게 짧게 고백했습니다. 1968년에 만든 새신조는 예배용으로 좋기는 하지만 좀 더 체계적인 신앙고백이 필요하다고 여겨서 2006년에 새로운 신앙고백을 만들었는데 제목을 [믿음의 노래, Song of Faith]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우리의 고백이 딱딱한 문서/교리가 아니라 노래/찬양이 되어야 한다는 뜻에서 새로운 신앙고백을 [믿음의 노래]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믿음의 노래]를 자세히 보면 성령님을 고백한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분은 태초부터 만물 위를 바람처럼 다니시며, 모든 기운과 물질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고 우리의 마음속에서 운행하십니다.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신실하시며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분, 세상에서 일하시되,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We sing of God the Spirit, who from the beginning has swept over the face of creation, animating all energy and matter and moving in the human heart. We sing of God the Spirit, faithful and untameable, who is creatively and redemptively active in the world. "성령께서 거룩한 분을 찬양하라고 도전을 주십니다. 익숙한 방식뿐만 아니라, 생소한 방식으로도 찬미하라 일어주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찬양합니다. 가슴 깊이 간절한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분, 근심과 고백을 감싸주시는 분, 그분은 우리와 세상을 변화시키십니다." The Spirit challenges us to celebrate the holy not only in what is familiar, but also in that which seems foreign. We sing of the Spirit, who speaks our prayers of deepest longing and enfolds our concerns and confessions, transforming us and the world. 2006년에 만든 [믿음의 노래]가 시적으로 아름답게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진실로 우리의 신앙고백은 딱딱한 교리가 아니라 아름다운 노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성령님을 기뻐하고 찬양하고 노래했습니다.

 

지난 주일에 열왕기상 19장 엘리야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우리가 지쳐서 탈진하지 않도록 성령께서 부드럽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씀하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세상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해서 포기하지 말고, 지금 하는 일이 힘들다고 해서 포기하지 말고, 나 혼자서 일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고 지금 해야 할 일을 묵묵하게 감당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보통 성령충만을 받으면 순복음교회 3박자 축복, 영혼이 잘되고 건강이 잘되고 사업이 잘된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성령충만을 못 받은 것이 됩니다. 성령의 은사는 성공하고 돈 많이 버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오늘 우리가 읽은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온 것처럼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말하는데 그것은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바르게 신실하게 신앙생활하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인정해서 때가 되면 성공할 날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의 성공은 내 신앙생활의 결과가 되어야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가 초막에서 살 수도 있고 궁궐에서 살 수도 있지만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면 성령께서는 우리들에게 9가지 아름다운 삶의 열매를 주십니다. 성령충만을 받으면 더 사랑하고 더 기뻐하고 더 화평하고 더 인내하게 됩니다. 더 친절하고 더 선하고 더 신실하고 더 온유하고 더 절제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진짜 성령의 열매입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를 믿지 않았더라면 그는 상류층 지식인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고 공부를 많이 했고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잘했고 유대교 랍비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풍족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를 믿은 후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복음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 말하는 바람에 동포들의 비난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사도바울은 예수 믿고 나서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반대로 망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쓴 고린도전후서/갈라디아서를 읽어보면 바울을 괴롭힌 사람들이 소위 성공주의자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순복음교회의 3박자 축복처럼 예수믿고 성령충만 받으면 병도 안 걸리고 사업도 잘된다고 설교했습니다. 그들의 눈으로 보면 바울은 보잘 것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글은 잘 쓰지만 말을 잘 못했고 몸에 지병이 있었고 복음을 전하면서도 교회의 후원을 받지 못해서 자기 손으로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성령충만 받으면 성공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사도바울은 성령을 못 받은 실패자로 보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이에 대해서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말했고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고난/십자가를 본받는 삶이 최고의 은사라고 말했습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 사랑/기쁨/화평/인내/친절/선함/신실/온유/절제는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출세하고 돈 많이 버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는 오히려 세상의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믿고 따를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영적인 선물에 해당합니다. 성령충만을 받으면 더 사랑하고 더 기뻐하고 더 화평하고 더 인내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성화시켜주셔서 우리가 고난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고난을 견디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도록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갈라디아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이 바라시는 것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육체의 욕망은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우상숭배와 마술과 원수맺음과 다툼과 시기와 분쟁과 분열과 질투와 같은 것들인데 성령충만을 받으면 육체의 욕망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면 육체의 욕망을 멀리하고 하늘에서 내려온 깨끗한 선물을 받게 되고 세상의 고난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세상의 고난을 견디는 능력이 진정한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께서 만들어 주시는 성령의 열매를 사모하면서 고난 가운데서도 더 사랑하고 기뻐하고 인내하면서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entecost, love, joy, peace, and patience
Galatians 5:13 - 25

 

For you were called to freedom, brothers and sisters, only do not use your freedom as an opportunity for self-indulgence, but through love become slaves to one another. For the whole law is summed up in a single commandment,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If, however, you bite and devour one another, take care that you are not consumed by one another. Live by the Spirit, I say, and do not gratify the desires of the flesh. For what the flesh desires is opposed to the Spirit, and what the Spirit desires is opposed to the flesh; for these are opposed to each other, to prevent you from doing what you want. But if you are led by the Spirit, you are not subject to the law. Now the works of the flesh are obvious: fornication, impurity, licentiousness, idolatry, sorcery, enmities, strife, jealousy, anger, quarrels, dissensions, factions, envy, drunkenness, carousing, and things like these. I am warning you, as I warned you before: those who do such things will not inherit the kingdom of God. By contrast, the fruit of the Spirit is love, joy, peace, patience, kindness, generosity, faithfulness, gentleness, and self-control. There is no law against such things. And those who belong to Christ Jesus have crucified the flesh with its passions and desires. If we live by the Spirit, let us also be guided by the Spirit. (Galatians 5:13 - 25)

 

Galatians chapter 5 testifies of 9 fruits of the Holy Spirit. These fruits have nothing to do with the success, victory, desire, and wealth of flesh. Paul's letters show that those who harassed Paul were proud of the success and victory of the flesh. By their standards, Paul was a loser because he could not speak well, was ill, and was not sponsored by the Church. But Paul emphasized that the fruits of the Spirit are not the pride of the flesh, but to follow Christ's life and participate in his sufferings. The Holy Spirit helps us love and rejoice, more peaceful and patient in our lives. The Holy Spirit sanctifies us so that we will not be shaken in the midst of suffering, but will endure hardship and participate in the character of God. Amen.

Posted by 정해빈
,

성령강림절 후 두번째 주일/6월 네번째 주일
성령강림절,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
열왕기상 19:1-4, 8-12
정해빈 목사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정신적인 질병을 꼽으라면 공황장애, 우울증, 불면증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공황장애는 갑자기 두려움과 불안감이 밀려와서 가슴이 뛰고 호흡이 곤란한 상태를 가리키고 우울증은 활력을 잃어버리고 무기력한 상태를 가리키고 불면증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증상을 가리킵니다. 옛날에는 이런 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런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들도 인생을 살면서 한번쯤은 공황장애나 우울증이나 불면증을 겪었을 수도 있습니다. 갑자기 충격스러운 사고를 만나거나 사업에 실패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우리는 증상을 만나게 됩니다. 공황장애/우울증/불면증 외에 자주 쓰이는 말이 탈진(burnout)입니다. 글자 그대로 불타 없어졌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지친 상태를 가리킵니다. 1970년대 정신분석가인 하버트 프로이덴버거(Herbert Freudenberger)라는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탈진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이후로 이 말은 요즘 현대인들이 자주 쓰는 말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하거나 봉사하는 일을 하거나 정신노동을 하는 사람들, 예를 들면 택시운전사/변호사/교사/경찰/공무원/의사/간호사/정치인/사회사업가/종교인들이 탈진을 많이 경험한다고 합니다. 아마도 사람들을 끊임없이 만나고 봉사하고 섬기다 보면 다른 직업보다 쉽게 지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즘에는 이런 증상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증상을 만나면 숨길 필요도 없고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런 증상이 오면 “요즘 내가 많이 지쳐 있구나, 요즘 내 몸이 많이 약해졌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몸과 마음을 잘 다스리면 이런 증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의사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상담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간구하면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열왕기상 19장 말씀을 보면 엘리야 선지자가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들고 지쳐서 공황장애/우울증/탈진 같은 증상을 겪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대표하는 예언자/지도자를 꼽으라면 모세와 엘리야를 꼽을 수 있습니다. 다윗/솔로몬 시대에 나라의 힘이 가장 셌지만 다윗/솔로몬이 죽고 나서 이스라엘이 둘로 갈라졌기 때문에 다윗/솔로몬은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지도자/예언자는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모세는 히브리 노예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켰고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었고 그들을 광야로 인도했습니다. 엘리야는 모세가 죽고 나서 500년 쯤 후에 등장했는데 500년이 지나고 나니까 백성들이 모세가 가르쳐 준 율법도 잊었고 야훼/여호와 하나님 신앙도 다 잊어버렸습니다. 모세가 이집트 바로 왕과 대결한 것처럼, 엘리야는 북이스라엘의 아합/이세벨과 대결했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무역을 잘해서 강대국이 되었는데 아합/이세벨은 야훼 선지자들을 다 내쫓고 바알을 섬겼습니다. 바알은 가나안 농경신이었는데 바알에게 빌면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고 사람들이 믿었습니다. 바알은 한마디로 말하면 쾌락과 물질의 신이었습니다. 바알에게 제사드리는 신전에 가보니까 먹을 것도 많고 성적으로 쾌락이 넘쳐 납니다. 바알이 돈과 쾌락의 신이다 보니까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십계명을 주신 야훼/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겼습니다. 모세가 죽고 나서 500년 쯤 되었을 때 등장한 엘리야는 바알을 섬기는 450명 선지자들과 누가 하늘에서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는지 대결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대결에서 승리한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을 죽이니까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고 하였고 그래서 엘리야는 도망을 갔는데 육체적/정신적으로 너무 힘들고 지쳐서 죽기 일보직전에 와 있었습니다.

 

모세와 더불어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최고의 예언자인 엘리야가 쓰러졌다는 사실은 사람은 누구나 쓰러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정신의학회가 만든 스트레스 점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견딜 수 있는 최고점수가 200점이라고 한다면 배우자/자식사망이 74점, 부모사망이 66점, 이혼이 63점, 직장파면이 50점, 결혼이 50점, 중병이 44점, 이사가 35점, 시댁/처가와의 갈등이 34점, 직장 상사와의 갈등이 23점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찾아오면 사람은 공황장애/우울증/불면증/탈진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엘리야의 경우를 자세히 보면, 엘리야의 성격에 극단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분이 좋았다가 갑자기 나쁜 상태로 변하는 성격을 조울증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감정기복이 심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스트레스를 더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엘리야는 스스로 자원해서 갈멜산 정상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누가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는지 내기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이 대결에서 승리한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을 죽였는데 이세벨이 화가 나서 자기를 죽이려고 하니까 이번에는 두려움에 떨어서 그만 죽고 싶으니 여기서 죽여 달라고 말했습니다. 바알 선지자들과 싸워 이길 때는 이제 정권이 교체되고 적폐를 청산하고 좋은 세상이 오겠구나 생각하고 기분이 좋았는데 아합의 부인 이세벨이 군대를 동원해서 자기를 죽이려고 하니까 너무 실망스러웠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고 백성들도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투정을 부렸습니다. “하나님, 아무리 큰 기적을 베풀어도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너무 힘들고 지쳤으니 그만 여기서 죽게 해 주십시오”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먹이시고 재우셨습니다. 그리고는 너 혼자서만 바알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사람이 7000명 더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 혼자서 일한다고 생각하면 지치기 쉬운데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너 외에도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40일을 걸어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았던 호렙산/시내산으로 오라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사람이 지쳐 쓰러지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엘리야처럼 최선을 다해 노력했는데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 세상이 쉽게 바뀌지 않을 때, 나 혼자서 일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탈진을 경험하게 됩니다. 세상이 쉽게 바뀌지 않으면 사람은 더 큰 기적을 바라게 됩니다.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더 큰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크고 강한 바람 가운데서도 나타나지 않으시고, 지진 가운데서도 나타나지 않으시고, 불 가운데서도 나타나지 않으시고 마지막 네 번째로 부드럽고 조용한 목소리를 통해서 나타나셨습니다. 부드럽고 조용한 목소리로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부드럽고 조용한 목소리가 성령께서 역사하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고 방언을 하고 기사와 이적을 한다고 생각하기가 쉬운데 성령께서는 부드럽고 조용한 목소리를 통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십니다. 부드럽고 조용한 목소리로 “아무개야, 세상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해서 쉽게 지치지 말아라. 나 혼자 일한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지금 하는 일을 포기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붙들어 줄 것이다”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영어 표현 중에 sustai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붙잡아 준다, 지지해 준다, 지탱해 준다는 뜻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지치지 않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 자녀를 양육하거나 부모님을 모시는 일일 수도 있고, 직장에서 맡은 일일 수도 있고, 사회봉사일 수도 있고,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빨리 뜨거워지면 빨리 식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Soon hot, soon cold. 한번의 기적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성실함과 인내와 끈기가 세상을 바꿉니다. 반짝 성공하고 쉽게 지치는 사람보다는 오래참고 끈기있게 견디고 노력하는 사람이 더 훌륭한 사람입니다. 끈기있는 사람이 세상을 바꿉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지금 나에게 주어진 길을 성실하게 걸어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entecost, a sound of sheer silence
1 Kings 19:1-4, 8-12

 

Ahab told Jezebel all that Elijah had done, and how he had killed all the prophets with the sword. Then Jezebel sent a messenger to Elijah, saying, “So may the gods do to me, and more also, if I do not make your life like the life of one of them by this time tomorrow.” Then he was afraid; he got up and fled for his life, and came to Beer-sheba, which belongs to Judah; he left his servant there. But he himself went a day’s journey into the wilderness, and came and sat down under a solitary broom tree. He asked that he might die: “It is enough; now, O Lord, take away my life, for I am no better than my ancestors...” He got up, and ate and drank; then he went in the strength of that food forty days and forty nights to Horeb the mount of God. At that place he came to a cave, and spent the night there. Then the word of the Lord came to him, saying, “What are you doing here, Elijah?” He answered, “I have been very zealous for the Lord, the God of hosts; for the Israelites have forsaken your covenant, thrown down your altars, and killed your prophets with the sword. I alone am left, and they are seeking my life, to take it away.” He said, “Go out and stand on the mountain before the Lord, for the Lord is about to pass by.” Now there was a great wind, so strong that it was splitting mountains and breaking rocks in pieces before the Lord, but the Lord was not in the wind; and after the wind an earthquake, but the Lord was not in the earthquake; and after the earthquake a fire, but the Lord was not in the fire; and after the fire a sound of sheer silence. (1 Kings 19:1-4, 8-12)

 

Today's story indicates that the Holy Spirit does not always appear through a strong wind, earthquake, or fire, but sometimes appears with a soft and quiet voice. God, who appeared in this way, raised Elijah again and taught him what to do. History says that one miracle does not change the world, but sincerity, patience and persistence change the world. "Soon hot, soon cold." Truly, the Holy Spirit keeps us from giving up quickly. The Holy Spirit sustains us so that we can continue our work. Today's story reminds us that following the guidance of the Holy Spirit, we are called to walk faithfully in the way we are now given for the kingdom of God. Amen.

Posted by 정해빈
,

성령강림절 후 첫번째 주일/6월 세번째 주일

성령강림절, 삼위일체의 신비와 은혜

잠언 8:22 - 31

정해빈 목사

 

오늘은 삼위일체의 신비와 은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교회달력을 보면 오늘 성령강림절 후 첫번째 주일을 “삼위일체주일”로 지키도록 되어 있습니다. 교회달력을 보면 9월부터 11월까지 창조절은 창조주 하나님을 묵상하는 절기이고, 12월부터 5월까지 대림절/성탄절/주현절/사순절/부활절은 성자 예수님을 묵상하는 절기이고, 6월부터 8월까지 성령강림절은 성령님을 묵상하는 절기입니다. 창조절 부터 시작해서 1년의 마지막 절기인 성령강림절이 돌아왔기 때문에 삼위일체 신앙을 다시한번 생각하라는 의미에서 오늘 성령강림절 후 첫번째 주일을 삼위일체주일로 정한 것 같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우면서도 가장 신비롭고 아름답고 은혜로운 신앙이 삼위일체 신앙입니다. [여호와의 증인] 교리를 믿는 사람들은 성경에 삼위일체라는 말이 없다는 이유를 대면서 삼위일체 신앙을 부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삼위일체 신앙이 여러 곳에 적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바울도 고린도후서 13장 마지막 장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고린도후서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고 성령님은 우리에게 사귐을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자로 삼위일체(三位一體)라는 말은 본질은 하나이지만 3분의 인격이 있다는 뜻입니다. 본질은 하나인데 3분의 인격이 있다는 말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 보혜사 성령님, 이렇게 3분이 우리에게 나타났지만 본질상 한분이라는 뜻입니다. 100%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쉽게 비유를 든다면 하늘에 떠있는 태양이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킨다면 태양에서 나오는 빛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태양이 있고 그 태양에서 빛이 나오면 그 다음에는 따뜻하고 뜨거운 열이 발생하게 됩니다. 따뜻하고 뜨거운 열이 성령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정의 예를 들면 집안의 어머니는 남편 입장에서 보면 아내이고 자녀 입장에서 보면 어머니이고 손주 입장에서 보면 할머니가 됩니다. 아버지도 아내 입장에서는 남편이고 자녀 입장에서는 아버지이고 직장에서는 직장인입니다. 또는 산속에 있는 샘이 하나님이라면 샘에서 흐르는 시냇물은 성자가 되고 샘과 시냇물이 주는 생명의 능력은 성령님이 됩니다. 물이 100%가 되면 수증기가 되고 0도가 되면 얼음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악에서도 도미솔은 각각 자기 소리를 가지고 있지만 도미솔을 함께 치면 가장 기본이 되는 아름다운 화음이 만들어 집니다. 이렇게 본질은 하나이지만 인격과 활동과 나타나는 것은 3개라는 신앙, 인격과 활동과 나타나는 것에 따라서 3개로 구분되지만 본질은 하나라는 신앙이 삼위일체 신앙입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성부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했고 성자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했고 성령 하나님을 보혜사로 고백했습니다. 성부/성자/성령의 역할을 창조/구원/성화 이렇게 3가지 단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고 성자 예수님은 타락한 이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구원받은 우리가 성화의 삶, 거룩한 삶을 살도록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이런 면을 생각해 보면 삼위일체 신앙이 얼마나 신비롭고 아름답고 풍성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잠언 8장을 보면 지혜가 말을 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일을 시작하시던 그 태초에 주님께서 모든 것을 지으시기 전에 이미 주님께서는 나를 데리고 계셨다. 아직 깊은 바다가 생기기도 전에 물이 가득한 샘이 생기기도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났다.” 지혜가 나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도 옆에 있었다고 말을 합니다. 여기 나오는 지혜가 보혜사 성령님을 가리킬 수도 있고 요한복음 1장에 기록된 성자 예수님의 말씀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지혜가 여성명사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성경학자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남성 이미지를 갖고 있다면 여기 나오는 지혜, 보혜사 성령님은 여성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남성보다 여성에게 지혜가 더 많기 때문에 그런지 지혜를 표시할 때 여성명사로 표시를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지혜가 함께 있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삼위일체 신앙의 신비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실 때 혼자 창조하지 않으시고 성부, 성자, 성령과 함께 창조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잠언 8:30-3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분 곁에서 날마다 그분을 즐겁게 하여 드리고 나 또한 그분 앞에서 늘 기뻐하였다. 그분이 지으신 땅을 즐거워하며 그분이 지으신 사람들을 내 기쁨으로 삼았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세상을 창조하면서 함께 협력하고 함께 대화하고 함께 상의하고 함께 기뻐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신앙이 우리에게 주는 2가지 메시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협력”하는 신앙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서로 협력하면서 일하는 것처럼 우리들도 서로 협력하며 일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1400년대 안드레이 푸블료프라는 화가가 삼위일체를 어떻게 그릴까 고민을 하다가 저런 그림을 그렸습니다. 저 그림을 보면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지팡이를 쥐고 있습니다. 누가 서열이 높거나 낮지도 않고 누가 누구를 지배하지도 않고 똑같은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서로 평등한 위치에서 서로 협력하고 의지하는 신앙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삼위일체를 말할 때 “상호내주, 상호침투”라는 말이 자주 쓰입니다. 상호내주라는 말은 서로가 서로 안에 머문다는 말이고 상호침투라는 말은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든다는 말입니다. 성부가 성자 안에 있고, 성자가 성부 안에 있고, 성령이 성부와 성자 안에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습니다. 성도님들, 양손으로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드시고 두 동그라미를 끼워보시기 바랍니다. 두개의 동그라미가 하나의 동그라미가 되기도 하고 하나의 동그라미가 3개의 동그라미가 되기도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서로 협력하면서 한 몸, 공동체를 이루십니다. 삼위일체 신앙이 우리에게 주는 두번째 메시지는 “환영”하는 신앙입니다. 삼위일체를 보여주는 가장 흔한 그림이 서로 손을 잡고 춤을 추는 장면입니다. 우리끼리만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손을 잡고 춤을 추는 신앙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기독교가 처음 시작될 때는 유대인들만 모여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방인들과 여성들이 신앙생활하기 시작했고 더 시간이 지나면서 아시아 사람들과 아프리카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함께 신앙생활하기 시작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환영하시고 모든 사람을 하나님 나라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서로 협력하는 일이 일어나고 차별/소외가 없어지고 모든 사람을 환영하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삼위일체 신앙이고 삼위일체 신앙은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아름답고 풍성한 지를 잘 보여줍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창조하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료하시고 깨우쳐 주십니다. 서로 협력하고 서로 기뻐하고 서로 평등하고 서로 환영하고 서로 손을 잡으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entecost, mystery and grace of the Trinity

Proverbs 8:22 - 31

 

The Lord created me at the beginning of his work, the first of his acts of long ago. Ages ago I was set up, at the first, before the beginning of the earth. When there were no depths I was brought forth when there were no springs abounding with water. Before the mountains had been shaped, before the hills, I was brought forth, when he had not yet made earth and fields, or the world’s first bits of soil. When he established the heavens, I was there, when he drew a circle on the face of the deep, when he made firm the skies above, when he established the fountains of the deep, when he assigned to the sea its limit, so that the waters might not transgress his command, when he marked out the foundations of the earth, then I was beside him, like a master worker and I was daily his delight, rejoicing before him always, rejoicing in his inhabited world and delighting in the human race. (Proverbs 8:22 - 31)

 

On Trinity Sunday, Christians celebrate God of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Spirit. The Trinity is described as a "mystery." It is a reality above our human comprehension that we may begin to grasp but ultimately must know through worship, symbol, and faith. The Trinity is the belief that God is one in essence but distinct in person. The Greek word for person means "that which stands on its own," or "individual reality," and does not mean the persons of the Trinity are three human beings. Therefore Christians believe that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Spirit are somehow distinct from one another (not divided though), yet completely united in will and essence. The Trinity shows us how beautiful and rich our faith is. The Father God created the world and still creates it. Jesus Christ, Word made flesh, taught us the kingdom of God. The Holy Spirit comforts us, heals us, and guides us. Today's Word reminds us that we are called to cooperate with one another, rejoice in one another, be equal to each other, welcome one another, hold hands in hands, and to work for the kingdom of God. Amen.  

 

 

Posted by 정해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