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절 첫번째 주일/6월 두번째 주일

성령강림절, 청출어람(靑出於藍)

요한복음 14:8-17

정해빈 목사

 

 

한자성어에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이 단어를 아실 것이고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 단어를 모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푸를청, 날출, 어조사어, 쪽람. 푸른색을 띄는 쪽 식물에서 물감을 뽑았는데 그 뽑은 물감이 원래 쪽 식물보다 더 푸르다는 뜻입니다. 처음 것보다 나중 것이 더 좋다고 할 때 이 말을 사용하기도 하고 제자가 스승을 능가할 때 이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4장에서 제자들에게 청출어람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2절.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해서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계속 할 것이고 내가 하는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제자가 스승보다 더 큰일을 할 수 있을까요? 제자가 아무리 뛰어나도 스승을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떠날 때가 되니까 제자들이 불안해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러한 마음을 아시고 여러분은 내가 하는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라고 그들을 격려해 주셨습니다.

 

제자 빌립이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 이렇게 말하니까 주님께서 빌립에게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하면 “나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시오. 그러면 내가 믿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빌립도 예수님에게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그래도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일을 보고 믿어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우리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니까 하나님께서 육신의 옷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을 보려면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을 보라는 것이 요한복음의 메시지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이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는 신앙이 기독교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고 은혜받았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때가 되어서 예수님이 떠날 때가 되니까 제자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두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첫째. 여러분은 내가 하는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입니다. 둘째. 내가 떠나면 다른 보혜사 성령님이 오셔서 여러분을 도와줄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두가지를 약속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은 용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구원하고 세상을 변화시킬 만한 큰 가르침, 영적인 가르침이 세상에 전파되려면 두가지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로는 하늘의 큰 가르침을 전하는 스승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는 그 스승의 가르침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제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스승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스승의 가르침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제자들이 없다면 그 하늘의 가르침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하늘의 가르침이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스승의 역할이 50% + 제자의 역할이 50%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인류 역사에는 세상을 변화시킬만한 큰 가르침을 전하는 스승은 있었지만 그 스승의 가르침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제자들이 없었기 때문에 역사에서 사라지는 스승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일을 하는 제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 최고의 지식인 사도바울 같은 제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역사에 뿌리를 내릴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실 때는 예수님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주셨기 때문에 걱정할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주님이 떠나시려고 하니까 제자들이 걱정을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보혜사는 쉽게 말하면 변호사입니다. 만약 나에게 아주 신실하고 유능한 변호사가 있다면 나는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그 변호사 덕분에 어려운 일을 잘 대처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난민변호사, 이민변호사, 부동산변호사, 형사소송변호사, 민사소송변호사가 나를 도와준다면 나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우리를 보호하고 변호하시는 보혜사/변호사 성령님을 보내줄 터이니 내가 떠나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조금 있다가 “평화가 있기를” 봉헌송을 부를 텐데,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말씀하시고 힘을 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사가 “힘을 내라 힘을 내라 끝날까지 내 평화가 함께할 것이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스승이나 배우자나 부모의 도움 없이 스스로 자립해야 하는 경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스승이 떠나면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가슴에 품고 스스로 자립해야 하고, 배우자가 떠나면 남은 배우자는 먼저 떠난 배우자를 가슴에 품고 스스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젊은 청년들은 성인이 되면 부모의 곁을 떠나 스스로 자기 인생을 개척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을 만나면 내가 스승이나 배우자나 부모 없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상황을 미리 아시고 내가 떠나면 우리가 주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보혜사께서 도와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청출어람. 스승보다 더 나은 제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죽지 않고 오늘날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약속한 보혜사 성령께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도와주시고 변호하시는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의 앞길을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스승과 배우자와 부모를 떠나 나 혼자서 인생을 개척해야 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불안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보혜사 성령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홀로가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거룩한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가 주님보다 더 큰 일을 하도록 우리를 축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힘을 내라 힘을 내라 끝날까지 내 평화가 함께 할 것이니.” 보혜사 성령님의 은혜가 성도님들의 삶에 늘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Pentecost, the student becomes the teacher

John 14:8-17

 

Philip said to him, “Lord, show us the Father, and we will be satisfied.” Jesus said to him, “Have I been with you all this time, Philip, and you still do not know me? Whoever has seen me has seen the Father. How can you say, ‘Show us the Father’? Do you not believ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s in me? The words that I say to you I do not speak on my own; but the Father who dwells in me does his works. Believe m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s in me; but if you do not, then believe me because of the works themselves. Very truly, I tell you, the one who believes in me will also do the works that I do and, in fact, will do greater works than these, because I am going to the Father. I will do whatever you ask in my name, so that the Father may be glorified in the Son. If in my name you ask me for anything, I will do it. (John 14:8-14)

 

According to the Easter narratives in the scriptures, 40 days after the resurrection, Jesus left his disciples and ascended into heaven. The scripture indicates that the Lord could not have been with his disciples forever. When the disciples were with Jesus, they had nothing to worry about because Jesus had taught and fed them, and solved all the problems always. But now the Lord has said farewell, and his disciples began to worry about a world without a teacher. So the Lord promised them the Holy Spirit of the Comforter. Jesus told them, "do not be afraid that I leave you. When I am gone, the Counselor Holy Spirit will come, comfort, protect, and lead you." When the time comes, disciples should be self-reliant themselves without a teacher, and adult children should learn to leave their parents. This situation would challenge us and make us uneasy. However, the Lord has known that situation in advance and promised that if the Comforter helps us, we would be able to do something greater than the Lord did. Today 's story reminds us of the proverb, "The student becomes the teacher." Since there were great disciples such as James the brother of Jesus, Peter the supreme leader, and Paul the apostle of Gentiles, the Christian faith could be alive and preached to this day. Beloved believers, I believe that the Holy Spirit of the Comforter, which the Lord promised, is still with us. Do not be anxious if you leave your mentor or parents, and start your own life. The Holy Spirit of the Helper will come and guide you to do greater things than you have done in the past.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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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다섯번째 주일/5월 세번째 주일
부활절, 하나님 나라의 열린 식탁
사도행전 11:5 – 18
정해빈 목사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맨 처음 교회가 시작되었을 때 그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는지, 그들이 무엇을 고민하고 씨름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사셨을 때는 활동무대가 주로 이스라엘 북쪽 갈릴리 지방이었고 예수님이 만난 사람들은 주로 같은 동포 유대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는 갈릴리를 떠나서 더 넓은 지역으로 로마제국으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더 넓은 지역,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까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을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 초대교인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11장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에게 연설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로마군대 백부장 고넬료를 만나고 나서 예루살렘 교회로 돌아오니까 교인들이 베드로를 향해서 어째서 할례 받지 않은 사람 집에 들어가서 함께 음식을 먹었냐고 베드로에게 따졌습니다. 왜 이방인 집에 들어가서 같이 음식을 먹었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다른 민족 집에 가서 음식 먹은 것이 무슨 문제가 되나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2000년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 집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그들과 함께 식사하지도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3가지 규칙이 있었습니다. 남자의 경우 할례를 받아야 하고, 식사할 때는 레위기에 기록된 대로 깨끗한 것만 먹어야 하고,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이라는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는 남들과 구별되는 자기들만의 전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헬라인/로마인들은 이런 규칙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유대인 기준으로 보면 부정한 사람들이 됩니다.

 

누구와 밥을 먹느냐가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상대방과 밥을 먹는다는 것은 그 사람을 나의 친구/이웃으로 인정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한자로 식구(食口)라는 말이 한 집에서 같이 밥 먹는 사람을 가리키듯이 같이 밥을 먹는다는 것은 그 사람과 내가 한 가족이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사시면서 가난한 사람들/병자들/세리들/죄인들을 식탁에 초대하시고 같이 식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리켜서 “저 사람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이다(마태복음 11:19)”라고 말할 정도로 예수님은 사람들과 식사하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셨고,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서 식사하셨고, 최후의 만찬을 주최하셨고, 엠마오 도상에서 제자들과 같이 식사하셨고 이른 아침 베드로를 찾아가서 같이 식사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식사하는 것을 좋아하셨는데 보통 예수님이 베푸시는 식탁을 가리켜서 “열린 식탁(Open Table)”이라고 말을 합니다. 사람의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누구든지 올 수 있는 식탁이기 때문에 그 식탁은 닫혀진 식탁이 아니라 “열린 식탁”이 되었습니다.

 

팀 체스터가 쓴 [예수님이 차려주신 밥상]이라는 책을 보면 “누가복음의 예수님은 늘 식사하러 가거나 식사 중이거나 식사를 끝내고 나오는 중이셨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중심에는 늘 열린 식사가 있었습니다. 말씀을 전하시고 그다음 병을 고치시고 마지막으로 모두와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기쁘고 평등한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열린 식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격없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보여주기 위해 그들을 식탁에 초대하셨고, 경계를 뛰어넘어 주변인을 품기 위해 그들을 식탁에 초대하셨습니다. 환대와 공동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경험하게 하기 위해 그들을 식탁에 초대하셨고, 우리가 자연과 타인에게 의존적인 존재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 사람들을 식탁에 초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것을 열린 식탁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마태/마가/누가/요한복음에 다 나오는 기적 이야기가 딱 하나 있는데 그것이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입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가 4개 복음서에 유일하게 다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이 기적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마가복음 6장에 의하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명하여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푸른 풀밭에 앉게 하셨습니다. 헬라어로 “때를 지어”라는 말은 심포지아를 가리키는데 이 말에서 심포지엄/향연/잔치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앉았다는 말도 정확하게 말하면 편한 자세로 비스듬하게 누웠다는 것을 가리킵니다(recline). 오병이어의 기적은 단순히 굶주린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푸른 풀밭에 함께 모여서 함께 음식을 나누는 축제의 현장이었습니다. 바로 이 오병이어의 잔치가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었기 때문에 마태/마가/누가/요한은 이 기적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 기적을 급식 기적(Feeding Miracle)이 아니라 축제 기적(Feasting Miracle)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무료 급식소에서 자원봉사하기 위해 교육을 받다보면 식사하러 오는 분들에게 배급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손님에게 대접한다는 마음으로 급식하라는 교육을 가장 먼저 받습니다. 식사하러 오는 사람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존중받는다고 여겨질 때 사람은 만족감과 행복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배고픈 사람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주신 것이 아니라 함께 푸른 풀밭에서 기뻐하고 잔치를 벌임으로서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모든 이웃과 함께 음식을 나눌 때 얼마나 기쁨이 충만한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제자들 중에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가장 극적으로 변한 사람이 베드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최초로 고백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가로막는 바람에 큰 꾸중을 들었고 나중에는 예수님을 3번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3번 물으시고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처음에 권력과 명예를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다녔다가 예수님이 섬김의 길을 걸어가는 것을 보고는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변화 받았습니다. 양들을 돌보고 먹이는 목자의 길이 진정한 제자의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11장 말씀을 보면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된 베드로가 두 번째로 큰 변화를 겪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기도 중에 짐승들과 기어다니는 것들과 공중의 새들이 들어있는 보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환상과 ‘베드로야 일어나서 잡아먹어라’ 하는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속된 것이나 정결하지 않은 것을 먹은 일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니까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하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베드로는 이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과 이방인도 성령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베드로도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러한 보자기 체험을 통해서 초대교회의 문을 이방인들에게 여는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입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이 더럽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행하셨던 열린 식탁을 이제는 이방인들과도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예수님 당시 세상을 삼각형/피라밋이라고 표현한다면 예수님이 행하신 하나님 나라의 열린 식탁은 동그라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피라밋은 밑은 가장 넓고 위로 갈수록 좁아집니다. 옛날 세상이 그랬습니다. 맨 밑에는 노예들이 있었고 맨 위에는 황제가 있었습니다. 맨 위에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맨 밑에 있는 대다수 사람들을 통치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원형/동그라미와 같았습니다. 높은 자리나 낮은 자리가 없었습니다. 모두가 똑같이 동그랗게 앉아서 함께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베드로는 보자기 환상을 통해서 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우리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열린 식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모든 이웃을 환영하고 모든 이웃과 함께 음식을 나누며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생명과 평화와 정의를 선포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aster, an open table of the kingdom of God
Acts 11:1 - 18

 

Now the apostles and the believers who were in Judea heard that the Gentiles had also accepted the word of God. So when Peter went up to Jerusalem, the circumcised believers criticized him, saying, “Why did you go to uncircumcised men and eat with them?” Then Peter began to explain it to them, step by step, saying, “I was in the city of Joppa praying, and in a trance I saw a vision. There was something like a large sheet coming down from heaven, being lowered by its four corners; and it came close to me. As I looked at it closely I saw four-footed animals, beasts of prey, reptiles, and birds of the air. I also heard a voice saying to me, ‘Get up, Peter; kill and eat.’ But I replied, ‘By no means, Lord; for nothing profane or unclean has ever entered my mouth.’ But a second time the voice answered from heaven, ‘What God has made clean, you must not call profane.’ This happened three times; then everything was pulled up again to heaven. At that very moment three men, sent to me from Caesarea, arrived at the house where we were. The Spirit told me to go with them and not to make a distinction between them and us. These six brothers also accompanied me, and we entered the man’s house. He told us how he had seen the angel standing in his house and saying, ‘Send to Joppa and bring Simon, who is called Peter; he will give you a message by which you and your entire household will be saved.’ And as I began to speak, the Holy Spirit fell upon them just as it had upon us at the beginning. And I remembered the word of the Lord, how he had said, ‘John baptized with water, but you will be baptized with the Holy Spirit.’ If then God gave them the same gift that he gave us when we believed in the Lord Jesus Christ, who was I that I could hinder God?” When they heard this, they were silenced. And they praised God, saying, “Then God has given even to the Gentiles the repentance that leads to life.” (Acts 11:1-18)

 

Although Peter, along with the early Christian community, initially believed separation and division are essential for faithfulness, they soon discovered the spirit of the risen Christ breaks down those divisions and separation. The separation helped hold the Jewish people together as a community, but it also made them susceptible to the division that kept empire ideology alive and powerful. Even before Peter arrives back in Judea, Christian leaders had heard Peter was threatening their survival by creating bonds with those known as Gentiles. But the spirit comes to Peter in a dream. It is a dream that leaves no doubt that God’s saving work looks nothing like the divisive empire favouring peace promised by Rome. Rather, it is a gift from God, drawing us ever deeper into unity with the God of all of creation. Peter told them, "the spirit told me to go with them and not to make a distinction between them and us.” Today's scripture states that the open table made by Jesus is spreading to the Roman Empire through the Early Church. Just as Jesus had invited the poor, tax collectors and sinners to the table without any discrimination, Peter also had a meal with the Gentiles after experiencing the vision. The story shows clearly how the open or equal society made by Jesus and the pyramid or discrimination society created by the Roman Empire is different. It reminds us that our church should also welcome all neighbours, share an open table, and proclaim to the world the joy, peace, and justice of the kingdom of God.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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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네번째 주일/5월 두번째 주일
어버이주일, 달리다와 다비다
사도행전 9:36 - 43
정해빈 목사

 

 

오늘은 5월 두번째 주일/어버이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연로하신 성도님들/부모님 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빕니다. 성경에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십계명의 다섯번째 계명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고, 잠언서 1장 8절은 “아이들아, 아버지의 훈계를 잘 듣고 어머니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말아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녀 된 여러분, 주 안에서 여러분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옳은 일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계명은 약속이 딸려 있는 첫째 계명입니다.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하신 약속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은 이 땅에서 잘되고 오래 사는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이 인생도 성공한다는 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또 잠언서 16장 31절은 백발은 영화로운 면류관이니 의로운 길을 걸어야 그것을 얻는다고 말했습니다. 요즘 시대를 가리켜서 Anti Aging 시대라고 말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 노화를 방지하고 젊어질 수 있을까 노력을 많이 합니다. 건강하고 젊어지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이 드는 것을 피하거나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이 드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백발은 영화로운 면류관이고 의로운 길을 걸어야 그것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백발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그동안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가정을 돌보고 자녀를 키웠다는 증거입니다. 백발이 되신 분들 염색하지 마시고 백발이 영화로운 면류관이다 생각하시고 하루하루 행복하게 사시기를 빕니다.

 

5월은 가정의 달인데 옛날의 가정과 오늘날의 가정을 비교해 보면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00년 전만 해도 3세대나 4세대가 함께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보통 가정마다 식구가 10명이 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식구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어서 요즘은 4인 가구가 제일 많고 1인 가구가 그 뒤를 잇고 있습니다. 2016년 캐나다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1인 가구가 전체 가구의 28%를 차지하고 자녀가 있는 전통적인 가구가 26%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2016년부터 전체 가구 중에서 혼자 사는 가구가 제일 많아졌습니다. 한국도 비슷합니다. 지금은 4인 가구가 제일 많고 그 다음이 1인 가구인데 2030년이 되면 한국도 전체 가구 중에서 1인 가구가 제일 많아지게 된다고 합니다.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거나 배우자와 사별하고 혼자 사는 분들이 많아지다 보니까 1인 가구가 점점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혼자서 밥 먹는 “혼밥”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식품점을 가면 혼자 사는 사람들을 위한 상품이 나와 있고 식당을 가면 혼자 사는 사람들을 위한 자리가 있을 정도로 1인 가구가 요즘 유행이 되었습니다. 혼자 살면 다른 사람 신경쓰지 않아도 되고 좋은 점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혼자 사는 것이 항상 좋을 수는 없습니다. 살다 보면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고 가족의 보살핌을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지으실 때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1인 가구가 점점 많아지는 시대에서 교회가 영적인 가정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부모님으로 모시는 영적인 가정입니다. 우리 교회가 서로서로 돌보고 보살피는 가정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는 공생애를 사시면서 아픔이 있는 가정을 치료하시고 회복시키셨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가정을 방문해서 치료하시고 회복시키시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셔서 열병을 앓고 있는 장모를 고쳐주기도 하셨고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시고 그 아이를 집으로 돌려보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한 가정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모든 식구가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가정의 아픔을 아시고 병자를 고치심으로 그 가정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이 가정을 항상 좋게만 보신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픔이 있는 가정을 회복시켜 주셨지만 동시에 가정에 불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4절.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나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자기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며느리가 자기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내가 가정에 평화를 주는 것이 아니라 불화를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다보면 가정과 충돌할 수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가정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자녀나 배우자에게 집착하지 말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가정은 행복한 곳이지만 가정 때문에 고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2000년 전 가정은 너무도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이어서 아내, 딸, 며느리 들이 고통을 많이 받았습니다. 지금도 그런 곳이 있지만 예를 들어서 부모가 딸을 강제로 시집을 보내려고 하면 딸은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때로는 가정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과 보수적인 가치관이 충돌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 가정이 하나님 나라와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유와 평등과 사랑의 하나님 나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 가정이 더 좋은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억압적인 가정이 평등한 가정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픔이 있는 가정을 치료하고 회복시켜주셨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억압적인 가정을 자유로운 가정으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달리다와 다비다인데 서로 이름이 비슷합니다. L자를 T자로 바꾸면 달리다가 다비다가 됩니다. 마가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12살 된 죽은 딸을 살리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달리다 쿰,” 달리다는 소녀, 쿰은 일어나라, “소녀야 일어나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12살 된 딸이 왜 죽었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육체적인 병에 걸려서 죽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정신적인 이유 때문에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학자들 중에는 이 아이가 아버지의 지나친 과보호와 엄격함 때문에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하고 죽었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12살이면 가장 활기차게 살아야 할 나이인데 아버지가 아이를 집 안에만 가두어 두고 너무 엄격하게 다루어서 그랬는지 하여튼 소녀가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 들어가셔서 “달리다 쿰, 소녀야, 일어나거라, 이제부터 당당하게 너의 인생을 살아가거라, 밝고 활기차게 너의 인생을 살아가거라” 말씀하시고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9장에는 베드로가 다비다를 살리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달리다가 소녀를 가리킨다면 다비다는 중년 여인을 가리킵니다. 다비다는 예수님을 믿는 여제자였고 착한 일과 구제사업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다비다가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베드로가 와보니까 과부들이 울면서 다비다가 그들에게 만들어 준 속옷과 겉옷을 보여주었습니다. 다비다가 홀로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 옷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소녀를 향해서 “달리다 쿰” 말했던 것처럼, 다비다를 향해서 “다비다여 일어나시오” 말하고는 손을 내밀어서 그녀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소녀를 죽음에서 일으켜주셨고 베드로는 과부들을 돌보았던 여제자 중년 여인 다비다를 살려주었습니다.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능력이 예수님을 통해서 교회를 통해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제 탈북민 새가족들을 돌보셨던 네티 하프만 목사님 추모예배가 있었습니다. 추모 예배를 참석하며 오늘날의 다비다가 네티 목사님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비다 이야기는 혈육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새로운 가정이 교회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비다가 홀로 사는 사람들을 돌보고 그들을 위해 옷을 만들어 준 것처럼, 우리 교회가 1인 가구가 점점 많아지는 이 시대에 다비다처럼 어르신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영적인 가정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가 달리다와 다비다를 살리는 교회, 홀로되신 분들을 돌보는 교회, 어르신들을 존경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Mother’s Day, Talitha and Tabitha
Acts 9:36 - 43

 

Now in Joppa there was a disciple whose name was Tabitha which in Greek is Dorcas. She was devoted to good works and acts of charity. At that time she became ill and died. When they had washed her, they laid her in a room upstairs. Since Lydda was near Joppa, the disciples who heard that Peter was there, sent two men to him with the request, “Please come to us without delay.” So Peter got up and went with them and when he arrived, they took him to the room upstairs. All the widows stood beside him, weeping and showing tunics and other clothing that Dorcas had made while she was with them. Peter put all of them outside and then he knelt down and prayed. He turned to the body and said, “Tabitha, get up.” Then she opened her eyes and seeing Peter, she sat up. He gave her his hand and helped her up. Then calling the saints and widows, he showed her to be alive. This became known throughout Joppa and many believed in the Lord. Meanwhile he stayed in Joppa for some time with a certain Simon, a tanner. (Acts 9:36043)

 

For many people, the identity of the church has become associated with a rigid morality more focused on individual sins than on the common good. Too often the church is seen as the defender of structures of domination rather than as communities of resistance. For the early church community, however, the church was simply a community. People worshipped, sang, prayed, shared meals, and served others together in small communities. They didn’t stay in a room or a building. They went out to transform the world. Tabitha was devoted to the transformation of her community, specifically the lives of the widows and marginalized. When she is healed, Peter tells her to get up! That movement reinforces the idea of a church that is dynamic, in motion, and moving beyond its walls. Tabitha’s story reminds us that everyday individual and congregational acts of love, compassion, kindness have the power to lift people to life. It also reminds us that we are called to be the church that serves others and especially the widows and the aged people.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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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두번째 주일/4월 네번째 주일

창립기념주일,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사도행전 5:27 - 32

정해빈 목사

 

 

20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 중 한 사람이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입니다. 라인홀드 니버와 리차드 니버 형제가 유명한데 라인홀드 니버는 기독교와 사회문제에 대해서 연구를 많이 했고 리차드 니버는 기독교와 문화에 대해서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기독교와 사회문제에 대한 책을 읽다보면 꼭 만나는 사람이 라인홀드 니버입니다. 미국 클린턴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는 학자 중 한명으로 니버를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니버는 젊은 시절 디트로이트에서 목회하면서 개인은 도덕적일 수 있지만 집단은 도덕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가지고 쓴 책이 1932년에 출간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입니다. 당시 디트로이트에는 헨리포드가 설립한 자동차 공장이 컨베이어 벨트를 통한 대량생산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코미디언 찰리 채플린이 주연한 영화를 보면 노동자가 된 채플린이 빠르게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정신없이 나사를 돌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포드는 노조를 싫어해서 노조를 탄압하기도 했고 대량으로 노동자들을 해고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디트로이트에서는 일자리를 찾기 위해서 남부지방에서 흑인들이 많이 이주했는데 백인들이 흑인들을 인종차별하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니버는 노동자들과 흑인들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정부 책임자들을 만나기도 했고 경영자들과 노동자들을 중재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활동을 통해서 개인들 사이의 갈등에는 사랑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면 집단들 사이의 갈등에는 정의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는 도덕/양심/사랑이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개인과 개인 사이에도 서로의 갈등이 도저히 해결이 안 되어서 헤어지기도 하고 법정에 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개인과 개인 사이에는 도덕/양심/사랑이 끼어 들 여지가 조금은 있습니다. 하지만 집단과 집단 사이에는 도덕/양심/사랑이 끼어 들 여지가 없습니다. 집단은 도덕/양심/사랑에 무감각합니다. 오직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일을 합니다. 인간 역사를 자세히 보면 민족/계급/인종 갈등이 있을 때 한 집단이 자신의 이익을 스스로 자제하거나 스스로를 희생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개인 이기주의보다 집단 이기주의(group egoism)가 훨씬 강하다는 것을 니버는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니버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는 사랑이 기준이 되어야 하지만 집단과 집단 사이에는 정의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한사람이 약한 사람을 괴롭히면 그 사람은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지만 여러 명이 집단을 이루어서 한 사람을 괴롭히면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별로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집단/조직/국가가 무섭습니다. 집단/조직/국가는 본래 성질상 자신들의 힘을 확대하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집단은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도덕/양심/사랑을 쉽게 내버리고 이기적인 행동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단/조직/국가의 이기주의를 막기 위해서는 정의가 필요하고 적절한 힘의 균형과 정의로운 사회제도가 집단/조직/국가의 탐욕과 이기주의를 막아야 한다고 니버는 말했습니다.

 

독일의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이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나치의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이 유대인 학살 죄로 붙잡혀서 재판을 받았는데 그는 겉보기에는 이웃집 옆 사람처럼 아주 선량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법정에서 자신은 아무 생각없이 상관이 시킨 대로만 했기 때문에 자신은 죄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 재판을 보면서 개인적으로는 매우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이 집단/조직에 들어가면 어떻게 저렇게 끔찍한 악을 행할 수 있는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악의 평범성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양심적인 사람도 집단/조직에 들어가면 양심이 마비되어서 끔찍한 악을 행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집단/조직이 얼마나 무섭고 이기적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2장 말씀을 보며 예루살렘 성전 대제사장과 사두개파 사람들과 공의회가 사도들/제자들을 옥에 가두고 신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예수의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제자들은 붙잡혀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때 베드로와 사도들이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살리시고 높이시고 자기 오른쪽에 앉히시고 영도자와 구주로 삼으셔서 이스라엘이 회해하고 죄 사함을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이렇게 담대하게 말을 했습니다. 사도들이 수동적으로 증언한 것이 아니라 위험을 무릅쓰고 적극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를 증언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신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외쳤습니다. 사도들은 예수의 증인이 되었기 때문에 나중에 순교를 당했습니다. 순교자(martyr)라는 말은 증인을 가리키는 헬라어 Martus에서 왔습니다. 증인(martus)이라는 말에서 순교(martyr)가 나왔고 순교라는 말에서 증인이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로마제국과 예루살렘 종교의 박해를 견디면서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과 예수께서 전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세상에 전했습니다. 니버가 말한 것처럼 개인이 변하는 것은 약간 가능할지 몰라도 집단/조직이 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들은 로마제국과 예루살렘 종교에 의해서 순교와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과 증언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삶과 증언은 결국 사람을 변화시켰고 마지막에는 가장 이기적이고 악을 행하는 집단/조직/국가를 변화시켰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겨자씨와 누룩처럼 작을 지라도 부활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 있었습니다.

 

어제 2019년 4월 27일은 일 년 전에 있었던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1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어제 토요일 한국에서는 시민단체가 자발적으로 휴전선 서쪽 끝 강화도에서 동쪽 끝 강원도까지 20만 명이 서로 손을 잡는 “미무장지대 평화손잡기운동, DMZ Peace Human Chain Movement”가 있었습니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 상해임시정부 100주년, 남북정상회담 1주년을 기념하면서 남북한이 서로 싸우지 말고 대화를 통해서 평화와 화해와 번영의 길로 나가자는 뜻에서 평화손잡기운동 행사를 실시했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개인과 개인 사이에는 도덕/양심/사랑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집단/조직/국가는 너무도 이기적이어서 도덕/양심/사랑이 끼어 들 여지가 없습니다. 미국/일본/한국, 러시아/중국/북한이 오직 자기들만의 이익을 위해서 경쟁을 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집단/조직/국가의 갈등에는 정의가 개입해야 하고 집단/조직/국가가 이기적이 되지 않도록 우리들의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처럼 우리들은 부활의 증인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고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할 뿐만 아니라 집단과 집단 사이의 갈등도 중재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는 개인의 영혼을 구원하고 치료하고 회복하는 사명도 있고 더 나아가 집단과 사회를 구원하고 치료하고 회복하는 사명도 있습니다. 개인에게 회개와 용서와 구원을 선포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우리의 신앙이 개인적으로 은혜받고 용서받고 축복받는 데만 관심을 기울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라인홀드 니버가 디트로이트에서 목회하면서 노동으로 혹사당하는 노동자들과 차별받는 흑인들을 위해서 일하고 국가와 회사의 집단이기주의에 맞서서 정의를 외쳤던 것처럼, 우리 교회도 개인을 향해서는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고 집단과 조직과 국가를 향해서는 정의의 메시지를 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1967년부터 지금까지 52년 동안 토론토에서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을 위해서 열심히 일 해왔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교회가 계속해서 우리가 사는 이 땅에 부활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생명과 평화와 정의를 선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도들이 예루살렘 법정에서 부활의 복음을 담대하게 외쳤던 것처럼, 죽음과 절망과 불의를 몰아내고 부활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우리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aster,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Acts 5:27 - 32

 

When they had brought them, they had them stand before the council. The high priest questioned them saying, “We gave you strict orders not to teach in this name, yet here you have filled Jerusalem with your teaching and you are determined to bring this man’s blood on us.” But Peter and the apostles answered, “We must obey God rather than any human authority. The God of our ancestors raised up Jesus, whom you had killed by hanging him on a tree. God exalted him at his right hand as Leader and Saviour that he might give repentance to Israel and forgiveness of sins. And we are witnesses to these things and so is the Holy Spirit whom God has given to those who obey him.” (Acts 5:27 - 32)

 

Today's Bible passage reminds us that we are called to be witnesses of the resurrection. Although the apostles were persecuted by the Roman empire and Jerusalem authority, they did not stop preaching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and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of God. As Reinhold Nieber says, today's scripture indicates that collective repentance is more difficult than personal change. Nevertheless, we believe that the power of resurrection will change the world, and eventually, all individuals and groups will be transformed into the Gospel. In commemoration of the 52nd anniversary of the founding of the church, we once again confess that God has called our church not only for personal salvation but also for social salvation.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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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4월 두번째 주일
종려주일, 노란 예수
누가복음 23:32 – 43
정해빈 목사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고난받으신 일주일을 기념하는 종려주일/고난주일이 돌아왔습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오늘부터 다음 주일까지 일주일 동안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묵상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외쳤듯이 우리들도 오늘 "주님, 나를 구원해주십시오. 우리 가족을 구원해 주십시오. 이 땅과 조국을 구원해 주십시오" 이렇게 고백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듭니다. 오늘은 지금부터 130년 전인 1889년 폴 고갱(Paul Gauguin)이 그린 [노란 예수] 그림을 소개하는 것으로 종려주일 설교를 대신하려고 합니다. 지난 연말 한국에서 옛날에 우리 교회 신앙강좌 강사로 오신 홍순관 목사님을 만났는데 홍목사님께서 [노란 예수] 그림을 프린트에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1848년 프랑스에서 파리에서 태어난 폴 고갱은 당시 유럽 국가들이 제국주의 식민지 개척과 수탈, 자연파괴, 노예사냥 같은 악을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것을 보며 유럽 기독교에 환멸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원시와 순수를 찾아 태평양의 타이티 섬에서 여생을 보냈고 그곳에서 유명한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이 그림을 보면 폴 고갱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몇가지 특징을 알 수 있습니다. 첫번째로 고갱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노란색으로 표현했고 그림의 제목을 [노란 예수, 황색 그리스도]라고 불렀습니다. 왜 노란 예수일까요? 빨간 예수, 파란 예수라고 이름을 붙일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노란 예수일까요? 노란색은 평화로움, 따뜻함, 위로, 평온, 안식을 가리키고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위로해주고 따뜻하게 만들어주고 안식을 준다는 뜻에서 예수님을 노란 색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실제로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얼굴을 보면 고통스러워하거나 분노하는 얼굴이 아니라 죄인들과 악인들을 용서해 주는 얼굴이 보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보면 우리들의 죄가 다 씻어지고 용서되고 깨끗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모든 것을 품어주는 따뜻한 얼굴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당신의 몸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노란 예수]는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으며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 뒤의 들판도 역시 노란색입니다. 노란색은 가을의 열매와 추수를 가리킵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사랑과 섬김과 희생의 길이 인류의 영혼을 풍성하게 하고 추수한다는 의미에서 들판을 노란색으로 표현했습니다. 모든 나무는 자기 열매를 먹지 않듯이 주님은 자신을 제물로 매달아 인류의 구원 양식이 되셨습니다.

 

두번째로 고갱은 마지막까지 주님 곁에 있었던 3명의 여인들을 십자가 밑에 그렸습니다. 그림 오른쪽을 보면 담장을 넘어서 도망가는 남자의 모습이 보입니다. 하지만 3명의 여인들은 십자가 밑에서 주님의 고난을 슬퍼하면서 함께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복음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설명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12명의 제자들은 다 도망갔지만 예수님을 사랑하는 몇몇 여인들은 끝까지 주님과 함께 했습니다. 제자의 가장 큰 조건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본다면 십자가 곁에 있는 이 여인들이 진짜 제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3명의 여인을 자세히 보면 흑인 여인이 십자가에 가장 가까이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폴 고갱이 살았던 시대는 유럽 백인 남성들이 지배하는 사회였고 흑인 여성들은 노예로 팔려가는 시대였습니다. 그 당시 가장 차별받았던 흑인 여성이 십자가에 가장 가까이 앉아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녀의 고통에 함께 한다는 것을 가리키고 주님께서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고난 받으셨다는 것을 가리켜 줍니다. 주님께서 잃어버린 양, 죄인과 병자, 노예, 약자,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가까이 하셨고 마침내 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을 저 그림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고갱은 십자가를 그릴 때 십자가 위에 하늘을 그리지 않고 십자가 끝이 하늘과 닿도록 그림을 그렸습니다. 십자가가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해 줍니다. 십자가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영적인 사다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시고 우리들은 십자가를 통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23장 말씀에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과 두 명의 죄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가운데 매달리시고 죄수들은 오른쪽과 왼쪽에 매달렸습니다. 예수님은 그 고통스러운 순간에서도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로마 병사들과 죄수 한명은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독하였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면 너나 구원해 보아라. 너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여라.” 그러자 또한 명의 죄수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 않느냐. 우리야 우리가 저지른 일 때문에 그에 마땅한 벌을 받고 있으니 당연하지만 이분은 아무것도 잘못한 일이 없다. 예수님,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예수님은 그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한 죄수와의 대화가 우리들에게 큰 깨우침을 가져다줍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왜 로마제국에 붙잡혔는지 알지 못합니다. 독립 운동을 하다가 붙잡혔을 수도 있습니다. 이 사람이 고백하는 것을 보면 이 사람이 양심있고 정직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는 마지막 순간에서도 고통 중에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하시고 그를 위로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진실로 주님은 고통받는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고통받는 사람들 곁에는 항상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잊혀질까 두려운 사람들, 억울하게 고난받는 사람들, 외롭고 힘든 사람들을 기억하시고 그들과 함께 고난 받으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그대들은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고갱이 그린 [노란 예수]와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죄 없으신 주님께서 고난받으심으로 온 세상을 노란색으로 따뜻하고 풍성하게 만들어 주신 것과 고통받는 자를 찾으시고 위로하시는 것을 기억하십시다. 주님은 십자가 고통 중에서도 저렇게 인자하고 자비로운 얼굴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셨고 십자가 고통 중에서도 외롭게 고통받는 사람을 먼저 찾으시고 그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우리들도 주님을 따라서 고통받는 이들을 위로하고,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며, 세상을 따뜻하고 풍성하게 만드는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alm Sunday, Yellow Jesus
Luke 23:32 - 43

 

One of the most iconic paintings of Jesus' cross is [yellow Jesus] painted by Paul Gauguin in 1889. Surprisingly he painted the background of this picture in yellow, which symbolizes peace, rest and abundance. Paul Gauguin seems to have emphasized yellow in the sense that the cross of Jesus forgives us, saves us, and enriches our lives. Moreover, he painted the face of Jesus with a peaceful image, not with anger and painfulness, to emphasize again that Jesus embraces and forgives us. Lastly, he described three women sitting under the cross. In particular, he painted the image of a black woman near the cross to emphasize that Jesus is near those who suffer.

 

Luke 23 points out that two "prisoners" were hanging together beside Jesus on the cross. Jesus said to one of the prisoners who said, "Remember me when you enter into the kingdom of the Lord," that you will be in paradise with me today. Truly the Lord came to us to comfort the suffering. Today's passage states that there is always the Lord beside the suffering people. He came to remember and be with those who were afraid to be forgotten, those who were unjustly afflicted, and those who were lonely and tough. The Lord said to them, "Do not be afraid. I am with you." Today's scripture reminds us that we are also called to comfort the suffering, to share the pain with them, to make the world warm and enrich, along with the Lord.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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