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여섯번째 주일 / 10월 두번째 주일

욥기 1:20-22, 23:6-9

추수감사절, 고난을 이기는 용기

정해빈목사

 

 

Thanksgiving means Thanks and Giving. Today we gathered together to confess our “Thanks” to God. We thank God for family, friends, church, and communities. We thank God for nature and abundant harvest. We thank God for courage and patience. We have gone through many challenges and difficulties during the Pandemic season. But through the guidance and grace of God, we were able to survive all the pains and sufferings. Today we also gathered here to express our “Giving.” We are called to practice our giving and sharing to those needed. God blessed us so that we are able to give something to our communities. Today we give our love, talents, and food to our neighbors. Today we want to join the joy of thanksgiving by confessing thanks and giving. By expressing thanks and practicing giving, we want to rejoice together with God and our communities.

 

You may know this painting called [The Fog Warning] by Winslow Homer. A fisherman is paddling a small boat in fear and anxiety because big waves and heavy fog are coming to him. He is in trouble so he is doing his best to go to a safe harbor. If we were in that situation, we will be also terrified and scared, and we may complain to God. In that situation, it would not be possible to give thanks to God.

 

The fisherman has faced big waves and heavy fog. No miracle, no angle, and no God there. It seems hard to confess thanks and gratitude in that situation. Yet God has given him the power and strength to go through all the challenges and difficulties. God has given him the courage and patience to overcome all the pains and sufferings. Since God has given him the power and strength, he was able to reach a safe harbor. God does not send us the problem. God sends us the spiritual power to deal with the problem. When Job the innocent, lost everything, he struggled between thanks and resentment. He thanked God first as the creator, giver, and taker. But later he blamed God because he could not know the cause of suffering. After a long period of spiritual wrestling, Job finally realized that God does not give him suffering, but gives him the strength and courage to overcome all the difficulties. For the last two years, we have suffered a lot due to COVID-19. But we can still confess our gratitude to the Lord today because the Lord has given us the courage and wisdom to overcome all the hardships.

 

미국의 자연주의 화가 윈슬로우 호모가 그린 [안개 경보]를 보면 작은 배에 탄 어부가 안전한 항구로 가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큰 물고기 두 마리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멀리서 큰 파도와 짙은 안개가 그를 덮쳐오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저 그림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 어부는 지금 큰 어려움 속에 빠져 있습니다. 안전한 항구에 도달할 수도 있고 아니면 큰 파도와 짙은 안개에 빠져서 길을 잃거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저 순간에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천사도 보이지 않고 기적도 보이지 않습니다. 저 어부는 마음 속으로 하나님을 원망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깊이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저 어부에게 인생의 시련과 맞서 싸울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셨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싸워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겪는 고난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불완전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겪을 수밖에 없는 고난들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맞서 싸우고 고난을 극복하고 통과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 속에 나오는 저 어부는 주님께서 주신 힘과 능력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노를 저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코로나로 인한 고통을 겪으면서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올해에도 모든 성도님들이 교회당에 모이지 못했고 전교인식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렇런 상황에서 온전하고 기쁜 감사를 드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겪는 이러한 고통을 통해서 감사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은 우리 인생에 고통과 시련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에 고통과 시련이 없을 때만 감사를 드린다면 우리는 감사를 고백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에는 항상 고통과 시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것은 고통과 시련이 있을지라도 그 고통을 견디고 극복하고 통과할 수 있는 힘과 지혜와 용기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겪는 고난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불완전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겪는 고난들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 것이 아니라 고난과 맞서 싸우고 고난을 극복하고 고난을 통과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생의 고난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여전히 주님께 감사를 고백할 수 있습니다.

 

동방의 의인이었던 욥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욥은 이 상황에서도 주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모태에서 빈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 나에게 복을 주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이 언제든지 그 모든 것을 다시 가져가실 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욥은 시간이 지나면서 욥도 사람이기 때문에 고통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난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과 씨름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겪는 고난이 자신의 잘못 때문인지, 하나님의 심판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기 때문인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이 힘으로 나를 억누르실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씀을 드릴 때에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실 것이다. 내게 아무런 잘못이 없으니 하나님께 떳떳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이다. 내 말을 다 들으시고 나서는 단호하게 무죄를 선언하실 것이다.” 욥은 자신이 겪는 고통이 자신의 범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찾고 또 찾았습니다. 진실로 욥은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처럼 하나님과 씨름하는 용기있고 끈질긴 사람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욥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기 위해서 고난을 주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겪는 것은 우리가 연약하고 불완전한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하나님께서는 고난과 맞서 싸우고 고난을 극복하고 고난을 통과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 앞에서도 여전히 주님께 감사를 고백할 수 있습니다.

 

추수감사(Thanksgiving)은 감사(Thanks)과 나눔(Giving)을 가리킵니다. 비록 우리의 삶에 고난이 있지만 주님께서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감사와 나눔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고난 중에서도 감사를 고백하는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고난 중에서도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나는 꽃이에요. 잎은 나비에게 주고, 꿀은 벌에게 주고, 향기는 바람에게 보냈어요. 그래도 난 잃은 건 하나도 없어요. 더 많은 열매로 태어날 거예요. 가을이 오면. (I am a flower. My leaves are for the butterflies. My nectar is for the bees. I give my scent to the wind. Yet I have lost nothing. I will bear more fruits when autumn comes.)” 비록 우리의 삶에 고난이 있지만, 파도를 헤치고 열심히 노를 젓는 어부처럼, 고난 중에도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과 씨름했던 욥처럼, 고난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감사와 나눔을 고백하고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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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다섯번째 주일 / 10월 첫번째 주일

마가복음서 10:2-16

창조절, 여성과 어린이들

정해빈목사

 

 

우리는 요즘 계속해서 창조절 절기를 지키며 창조신앙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창조절 신앙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줍니다. 해가 뜨고 지는 것도 감사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고 낙엽이 떨어지는 것도 감사하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것도 감사합니다. 창조절 신앙은 우리의 삶을 더 감사하고 더 기뻐하고 더 풍성하게 만들어 줍니다. 창조절 신앙을 갖지 않고 세상을 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삶은 무미건조하고 메마를 것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와도 무덤덤하고, 해가 뜨고 지는 것도 무덤덤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고 낙엽이 떨어져도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창조절 신앙이 없기 때문에 하루하루 무덤덤하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창조절 신앙이 있기 때문에 이름없는 꽃 한 송이를 봐도 놀랍고 신비롭고 감사하고, 작은 대추 도토리를 봐도 놀랍고 신비롭고 감사합니다. 창조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면 할수록 우리는 매일매일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창조신앙을 가만히 묵상해 보면 창조의 원리가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것이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반드시 세상을 창조할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사랑하셔서,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원하셨기 때문에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사랑하면 자신의 것을 나누어 줍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을 보내셔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를 다른 말로 하면 자기나눔, 자기분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나누어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피조물에게 이름을 지어주신 후에는 모든 피조물의 존재 자체를 보시고 보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능력이 뛰어나거나 일을 잘하기 때문에 보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그냥 존재 자체를 보시고 보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산에 있는 작은 나무들, 돌멩이, 길가에 핀 들꽃과 풀들은 아무 쓸데가 없습니다. 튼튼하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기 때문에 쓸모가 없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특별한 기술이 없는 사람들, 힘이 없는 사람들, 아픈 사람들, 노인들은 쓸모없는 존재들입니다. 앞으로 기술이 더 발달해서 컴퓨터가 일하는 시대가 오면 이런 생각은 더 많아질 것입니다. 사람보다 컴퓨터가 일을 더 잘하고 일을 더 많이 합니다. 남들이 갖지 못한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런 생각을 안하겠지만, 내가 컴퓨터보다 똑똑하지도 못하고 일을 잘하지도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내가 세상에서 쓸모가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일 잘하는 기계로 만들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내가 비록 똑똑하지 못하고 힘이 없어도 나의 모습을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창조의 원리가 능력이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하며 이 땅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 10장 말씀을 통해서 창조의 원리가 능력이 아니라 사랑과 돌봄이라는 것을 다시한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에 빠트리기 위해서 이 질문을 했습니다. 그 당시 갈릴리를 통치하는 헤롯 안티파스는 부인과 이혼하고 배다른 형제의 부인과 결혼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된다고 말하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고 남편이 아내를 버리면 안된다고 말하면 세례요한처럼 붙잡힐 수도 있었습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모세가 그렇게 말한 것은 너희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 24장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남녀가 결혼을 하고 난 다음에 남편이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하여 아내와 같이 살 마음이 없을 때에는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써주고, 그 여자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여유있는 남편들이 사소한 트집을 잡아서 아내를 쫓아내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쫓아내면 아내는 수치를 당했기 때문에 살 길이 막막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남편들이 아내를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아내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발견되면 동네 사람들 앞에서 이혼증서를 써 주고 재물을 준 다음에 집에서 내보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이혼증서를 써 주면 부인은 살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본래는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이혼하면 안되지만 남편들이 사소한 이유로 아내를 버리기 때문에 모세는 아내를 보호하기 위해서, 아내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있어날 때만 이혼할 수 있고 이혼할 때는 반드시 이혼증서를 써 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모세가 나름대로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런 제도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쁜 남편들은 모세의 이런 계명을 또 악용하였습니다. 신명기 24장은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일이 생길 때만 이혼증서를 써 주라고 했는데 나쁜 남편들이 아내를 내쫓기 위해서 사소한 것들도 다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밥을 잘 못해도 수치스러운 것이고 빨래를 잘 못해도 수치스러운 것이고 농사일을 잘 못해도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모세는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런 계명을 만들었지만 남편들은 그 계명을 악용해서 얼마든지 부인을 쫓아낼 수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명기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성경이 남자의 관점에서 쓰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자에게 수치스런 일이 있으면 이혼하라고 했는데 반대로 남자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일어났을 때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조건 이혼하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살다 보면 서로 합의해서 이혼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남편들을 향해서 둘이 만나서 한 몸이 되었으니 사소한 트집을 잡아서 남편이 아내를 함부로 버리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옛날에는 부유한 남편들이 부인을 여러 명 두고 부인들을 함부로 대하였는데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창조의 목적이 사랑과 돌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존재 자체를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경제적인 관점이나 이기적인 관점을 가지고 쓸모가 있는가 없는가, 일을 잘 하는가 못하는가 이런 것을 기준으로 배우자를 대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9월 30일은 캐나다 연방 정부가 제정한 ‘Orange Day’ 였습니다. 원주민 기숙학교에서 희생된 어린아이들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렌지 티셔츠를 입었습니다. 어린이들을 부모에게서 떨어뜨리고 학대하는 것은 창조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입니다. 기독교 국가에서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린이들을 꾸짖는 것을 보시고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어린이들은 힘도 약하고 밥만 먹고 돈을 벌어오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어린이들이 쓸모없는 존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린이들은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부모에게 기쁨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비록 우리가 세상적으로 쓸모가 없을 지라도 우리의 모습 자체를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께서 여성들과 어린이들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과 여성들과 어린이들을 창조의 관점에서 바라보시고 그들을 사랑하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컴퓨터는 사람보다 똑똑하고 일도 잘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컴퓨터가 사람보다 귀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일 잘하는 컴퓨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나눌 수 있고 서로를 보며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창조절 절기를 묵상하면서 우리의 모습 자체를 보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처럼 우리도 서로가 서로를 보면서 기뻐하고 감사하고 축복하면서 세상을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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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네번째 주일 / 9월 네번째 주일

이사야서 65:17 - 25

창조절, 해치거나 상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정해빈목사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월요일 미국 뉴욕 UN 총회에서 연설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연설의 일부분을 소개합니다.

 

“인간은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존재입니다. 인류는 공동체를 통한 집단 지성과 상호 부조에 기대어 수많은 감염병을 이겨내며 공존해 왔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역시 인류애와 연대의식으로 극복해낼 것이며 유엔이 그 중심에 설 것입니다. 우리는 코로나 대응을 위해 국경을 초월해 유전체 정보를 공유하고 긴밀한 협업을 통해 백신 개발에 성공했으며 치료제 개발도 빠른 진전을 이루고 있습니다. 코로나를 이기는 것은 경계를 허무는 일입니다. 우리의 삶과 생각의 영역이 마을에서 나라로, 나라에서 지구 전체로 확장되었습니다. 나는 이것을 '지구공동체 시대'의 탄생이라 생각합니다. '지구공동체 시대'는 서로를 포용하며 협력하는 시대입니다. 함께 지혜를 모으고 행동하는 시대입니다. 지금까지는 경제 발전에 앞선 나라, 힘에서 우위를 가진 나라가 세계를 이끌었지만 이제 모든 나라가 최선의 목표와 방법으로 보조를 맞추어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해야 합니다.”

 

“코로나를 이기는 것은 경계를 허무는 일입니다.” 라는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이 연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인류는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경계를 허물고 서로 지혜를 모아서 어려움을 극복해 왔습니다. 이번 코로나 감염병도 제약회사들은 제약회사들대로 노력하고 의료진들은 의료진들대로 노력하고 국민들은 국민들대로 방역에 협조하고 각 국가들은 국가들끼리 서로 협력했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은 있었지만 큰 고비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유엔(UN) 세계보건기구(WHO) 같은 국제기구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이제는 정말로 지구공동체 시대가 되었습니다. 옛날 정보기술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는 먼 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쪽에서 전염병이 발생해도 그 지역에 머물거나 이쪽으로 확산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또한 옛날 냉전시대에는 서로 대립하면서 국가들끼리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서로 빠르게 왕래하는 시대가 되었고 지구가 하나의 마을처럼 좁아졌습니다. 저쪽 나라에 문제가 생기면 이쪽 나라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이제는 지구촌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함께 노력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코로나 감염병이 우리가 서로 가깝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구촌이 걸어가야 할 길은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전세계의 백신 보급률이 극과 극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기사가 최근 신문에 실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캐나다는 전체 인구의 70%, 영국은 66%, 독일은 63%, 미국은 55%가 12차 주사를 맞았는데 가난한 나라들은 1.9%만 주사를 맞았습니다. 미국 인구의 55%만 주사를 맞은 것은 백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일부러 주사를 안 맞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선진국 국민들은 맞으라고 해도 안 맞는데 가난한 국가의 국민들은 맞고 싶어도 백신이 없어서 맞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1인당 국내총생산 1천달러 이하 저소득국가의 백신 접종률이 1.9%입니다. 세계보건기구가 백신격차를 해소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선진국 국가들이 백신이 부족하다며 수출을 허락하지 않고 있습니다. 백신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백신이 남아도는데도 백신을 맞지 않고 수출을 안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구촌이 하나의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 때까지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서 65장에서 서로 해치거나 상하는 일이 없는 새로운 세상, 새하늘과 새땅을 예언하였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새하늘과 새땅에 대한 말씀이 이사야서 65장과 요한계시록 21장, 이렇게 두 번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원전 6세기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전쟁도 없고 폭력도 없고 질병도 없는 새로운 세상을 만드실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사야가 노래한 하나님 나라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이고 평범하고 소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제국처럼 강대국이 되어서 세상을 호령하면 좋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사야가 소망하는 꿈은 너무도 평범합니다. 예를 들면 집을 지은 사람들이 자기가 지은 집에 들어가 살고 포도나무를 심은 사람들이 자기가 기른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인데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을 보면 히브리 백성들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억압과 수탈을 당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지은 집을 다른 사람이 빼앗지 않으면 좋겠다, 내가 농사지은 것을 다른 사람이 빼앗지 않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사야는 바벨론제국이 쳐들어와서 힘없는 백성들을 죽이고 포로로 끌고가고 집을 빼앗고 농사지은 것을 빼앗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죽었고 노인들도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나라를 잃고 제국의 침략을 받아서 모든 것을 빼앗겨 본 사람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음력 8월 한가위 같으면 좋겠다고 노래한 것처럼, 이사야 선지자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자기가 농사지어서 자기 집에서 살면 좋겠다, 서로 빼앗고 해치는 일이 없으면 좋겠다고 노래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이 땅을 치료하셔서 백 살에 죽은 사람을 젊은이라고 말할 정도로 모든 사람들이 나무처럼 오래 건강하게 살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풀을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이로 삼을 것이다. 나의 거룩한 산에서는 서로 해치거나 상하게 하는 일이 전혀 없을 것이다.”

 

이 말씀처럼 진실로 우리들은 주님의 거룩한 산, 주님께서 지으신 세상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상하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기독교 신앙이 창조신앙에 굳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매주일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창조하고 계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희망을 잃고 절망 중에 살아가는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저 옛날에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것처럼 앞으로도 새하늘과 새땅을 창조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창조신앙과 구원신앙이라는 두 개의 뿌리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쉬지 않고 창조의 완성, 세상의 완성을 위해서 일하고 계신다는 신앙이 창조신앙이고 하나님께서 억압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원하신다는 신앙이 구원신앙입니다. 이사야 65장은 창조신앙과 구원신앙을 너무도 아름답게 고백하였습니다. “보아라, 내가 새하늘과 새땅을 창조할 것이니 이전 것들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떠오르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이전 것들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새롭고 놀라운 세상이 우리 앞에 펼쳐지기를 우리는 고대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대통령이 유언에서 연설한 것처럼 남북한과 주변 4개 나라가 합의해서 전쟁을 잠시 휴전하는 휴전협정이 아니라 전쟁을 완전히 끝내는 종전협정이 맺어지기를 우리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풀을 먹으려면 이리가 변해야 하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려면 사자가 변해야 하고 뱀이 사람을 물지 않고 흙을 먹이로 삼으려면 뱀이 변해야 합니다. 강자가 먼저 변해야 서로 해치거나 상하게 하는 일이 없는 그런 세상이 올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각자도생(各自圖生),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세상이 되면 이리는 양을 잡아먹게 되고 양들은 양들끼리 서로 싸우는 세상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런 세상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큰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큰일을 할 수는 없지만 새하늘과 새땅을 우리 신앙의 중심에 놓고 날마다 묵상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고난 가운데서도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선포하고 예언하였던 것처럼, 우리들도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노력을 기울이면서 새하늘 새땅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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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세번째 주일 / 9월 세번째 주일

예레미야서 4:22-28, 시편 19:1-6

창조절, 가온찍기, 하늘과 땅 사이에서

정해빈목사

 

 

한국의 사상가인 다석 유영모 선생의 글 중에 “가온찍기(「·」)” 라는 글이 있습니다. 가운데 점을 찍는다는 말을 줄여서 “가온찍기(「·」)” 라고 부릅니다. 위에 있는 기억(ㄱ)과 아래에 있는 니은(ㄴ) 사이에 점이 있습니다. 위에 있는 기억은 하늘을 가리키고 아래에 있는 니은은 땅을 가리키고 가운데 있는 점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위에 있는 기억(ㄱ)은 평평한 하늘의 기운이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가리키고 아래에 있는 니은(ㄴ)은 하늘의 기운이 아래로 내려와서 땅에 평평하게 퍼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하늘과 땅의 중간에 서서 하늘의 뜻을 땅에서 이루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주의 기도에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기도하신 것처럼,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사명입니다. 동양/한자 문명에 익숙한 우리들은 천지인(天地人)이라는 말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만 있으면 안되고 그 사이에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가온찍기”와 마찬가지로 하늘과 땅의 중간에 서서 하늘과 땅을 연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역할을 잘 하지 못하면 하늘과 땅이  망가집니다. 부동산 중개인이 중간에서 역할을 잘 하지 못하면 집을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이 모두 손해를 봅니다. 중매를 서는 사람이 중매를 잘 못하면 양쪽 사람의 마음이 상하게 됩니다. 하늘과 땅의 중간에 서 있는 사람의 역할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사람은 하늘의 음성도 들어야 하고 땅의 음성도 들어야 합니다. 하늘의 음성을 듣고 하늘의 뜻에 순종해야 하고 동시에 땅의 음성을 듣고 땅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사람이 하기에 따라서 하늘과 땅을 살릴 수도 있고 망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역할을 잘 하면 하늘은 맑고 높고 푸른 하늘이 될 수 있고 땅은 기름지고 풍성한 땅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역할을 잘하면 천지인(天地人)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운명이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은 “가온찍기(「·」)”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다만 형이상도 아니고 형이하도 아닌 중간 존재로서 가운데 있는 나 속으로 찾아 들어가 가온찍기(「·」)를 성실하게 해야 한다. 가온찍기(「·」)는 참나인 얼나를 깨닫는 자각(自覺)이다. 맨 첫 끝과 맨 막 끝만 알려고 덤벼들면 자칫하면 잘못되기 쉽다. 첫 끝과 막 끝도 나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내 속에 들어가 얼나를 안 자만이 형이상(形而上)도 알고 형이하(形而下)도 안다. 얼나 라는 것의 무한한 가치를 자각하고 날아가는 새를 화살로 쏘아 맞히듯이 곧이 곧고 신성하고 영특하고 영원한 나의 한복판을 정확하게 명중시켜 진리의 나를 깨닫는 것이 가온찍기이다.” 가온찍기를 다른 말로 하면 중국의 사서삼경(四書三經)에 나오는 “중용”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살면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가운데 중심에 서서 양쪽 모두를 품고 사는 삶이 가온찍기/중용입니다. 우리는 천사도 아니고 짐승도 아닙니다. 천사처럼 살 수도 없고 짐승처럼 살아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사는 천사처럼 아무 걱정없이 하나님 옆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짐승처럼 땅만 기어다니며 본능에 따라 움직이며 살 수도 없습니다. 천사는 하늘에서 살기 때문에 걱정할 것도 없고 고민할 것도 없습니다. 짐승도 땅만 쳐다보고 본능에 따라 살기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다릅니다. 사람은 하늘을 보고 살아야 하고 동시에 항상 땅에 발을 딛고 살아야 합니다. 하늘과 땅의 중간에 서서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머리는 하늘을 바라보고 땅은 발을 딛고 사는 삶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삶이 고귀하고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짐승처럼 땅을 딛고 살면서 땀 흘려야 하고 후손을 낳아야 하고 일해야 합니다. 때로는 짐승처럼 경쟁하기도 하고 갈등을 겪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짐승이 아닙니다. 하늘도 쳐다보아야 합니다. 하늘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하늘의 높은 뜻을 이 땅 위에 이루어야 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사명을 잘 감당하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하늘의 뜻을 깨닫는 사람, 얼, 정신이 살아있는 사람, 얼나가 되어야 한다고 다석 유영모 선생은 말했습니다. 머리를 들고 하늘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하늘의 음성을 듣기만 해서는 안되고 하늘의 음성/뜻을 이 땅 위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사람이 해야 할 사명을 한마디로 말하면 가온찍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 옛날, 시편 19편을 기록한 시인은 하늘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늘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다고 고백했습니다. 시편 시인이 보기에 낮하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고 있고 밤하늘은 하나님의 지식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낮하늘은 낮하늘대로 아름답고, 밤하늘은 밤하늘대로 아름답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은 푸른 하늘이기 때문에 아름답고, 구름이 많은 날은 구름이 많아서 아름답고, 밤하늘은 별이 많아서 아름답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은 그의 솜씨를 알려 줍니다. 낮은 낮에게 말씀을 전해 주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알려줍니다. 하나님께서 해에게 하늘에 장막을 쳐 주시니 해는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처럼 기뻐하고 제 길을 달리는 용사처럼 즐거워합니다.” 시편 시인의 고백처럼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고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창조절에 절기에 딱 맞는 너무도 아름다운 시입니다.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 하늘은 높고 말은 살이 찌는 가을을 맞아서 우리들도 시편 시인처럼 맑고 높고 푸른 하늘을 보며 주님을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성도님들, 가을을 맞아서 가을 하늘을 자주 쳐다보시기 바랍니다. 눈부시게 빛나는 이른 아침 햇살, 붉게 물드는 저녁 석양 노을, 음력 8월 한가위, 추석 보름달이 떠 있는 가을 하늘을 쳐다보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맑고 높고 푸른 가을하늘이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시편 시인은 하늘을 보면서 하늘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늘도 아름답고 땅도 아름답고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도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예레미야서 4장은 전혀 다른 하늘을 말하고 있습니다. “땅을 바라보니 온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 하늘에도 빛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산들을 바라보니 모든 산이 진동하고 모든 언덕이 요동한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사람 하나 없으며 하늘을 나는 새도 모두 날아가고 없다.” 어찌 된 영문인지 그렇게 아름답던 하늘이 캄캄한 하늘이 되었고 산이 흔들렸고 땅이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도 모두 날아가고 없고 모든 것이 텅 비어있습니다. 하늘이 캄캄해지고 땅이 황무지가 된 것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사는 사람이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범죄하니까 하늘이 캄캄해졌고 땅이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하늘과 땅의 운명이 사람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원전 600년경 남유다에서 활동한 예레미야는 북쪽 바벨론제국이 남유다를 침략할 것을 예언하였고 실제로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남유다가 멸망한 것이 바베론제국이 강해서가 아니라 남유다의 지도자들이 부패하고 백성들이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사람이 범죄하고 타락하니까 하늘도 타락해졌고 땅도 타락해졌습니다. 창세기, 신명기, 여호수아 같은 책을 보면 사람이 정의를 실천하면 땅이 풍성한 결실을 맺고 사람이 정의를 실천하지 않으면 땅이 풍성한 결실을 맺지 않는다는 말씀이 반복해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니까 땅에 떨어진 아벨의 피가 울부짖고 땅이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사람이 하늘과 땅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맑고 푸른 하늘을 만드는 것도 사람에게 달려있고 기름지고 풍성한 땅을 만드는 것도 사람에게 달려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오늘날 사람 때문에 하늘도 더러워졌고 땅도 더러워졌습니다. 오늘날에는 공기가 오염되어서 마스크를 쓰고 산소통을 사는 시대가 되었고 물이 오염되어서 생수를 사야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시편 19편이 고백하는 것처럼 하늘과 땅의 가운데에 서서 하늘과 땅을 아름답게 만드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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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두번째 주일 / 9월 두번째 주일

창세기 1:26-28, 시편 8:1-9

창조절,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정해빈목사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창세기 1장 26절에서 28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창조하셨고 사람에게 어떤 사명을 주셨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본질과 사명에 대한 말씀이 이 짧은 3개의 구절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창세기 말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 3개의 구절이 가장 중요한 말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라는 표현을 세 번 사용하셨습니다. 여기 나오는 “우리”는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보통 기독교에서는 “우리”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창세기가 쓰여질 당시에는 예수님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니까 삼위일체 신앙고백이 아직 없었습니다. 여기 나오는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사람 이전에 지은 피조물을 가리킵니다. 바로 앞절 1장 2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짐승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짐승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사람을 만들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짐승의 형상을 따라서 사람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사람의 절반은 짐승에게서 왔고 절반은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우리는 짐승과 하나님의 중간에 위치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짐승과 같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짐승/동물은 잔인합니다. 무조건 본능대로 행동합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짐승처럼 잔인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짐승의 형상도 있고 하나님의 형상도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내가 짐승이 되는 것을 막아 줍니다. 오늘 말씀은 내가 짐승같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번째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옛날에는 왕이나 황제만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왕이나 황제를 천자(天子, 신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황제만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고 일반 백성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반 백성은 아무렇게나 다루어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서 지어졌다고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요즘 말로 말하면 모든 사람이 신 앞에서 평등하다는 평등선언, 인권선언, 민주주의 선언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래전에 쓰여진 성경이 얼마나 평등하고 민주적인 책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1장 27절은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똑같이 동시에 창조하셨다고 기록했습니다. 1장 27절 말씀이 중요합니다. 여기에 남자와 여자라는 표현이 처음 나오는데 분명 성경은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똑같이 동시에 창조하셨다고 기록을 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 중에는 남자가 먼저 창조되고 여자가 나중에 창조되지 않았냐고 말씀하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맞습니다. 창세기 1장에는 남자와 여자가 똑같이 창조되었다고 나오는데 창세기 2장에는 남자가 먼저 창조되고 나중에 여자가 창조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먼저 지어진 남자가 사람 역할을 잘 하지 못했습니다. 남자가 먼저 지음받았지만 아직 미완성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들어주시니 비로소 남자가 사람다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같이 있어야 온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자를 먼저 지었다고 해서 남자들이 좋아할 이유가 없습니다. 미완성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지어진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완성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 때도 처음 나온 제품보다 나중에 나온 제품이 더 품질이 좋습니다. 어쨌든 창세기 2장보다 창세기 1장이 더 중요합니다. 창세기 1장은 황제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고 더 나아가 남자와 여자가 똑같이 평등하게 지어졌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말씀이 얼마나 인권을 중요시하고 평등하고 감사하고 감동적인 말씀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세번째로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말씀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은 축복의 말씀이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온 땅에 퍼져서 번성하고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성경은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했습니다.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걸림돌이 됩니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바로 이 말씀, 땅을 정복하고 자연을 다스리라는 말씀이 잘못된 말씀이라고 주장합니다. 땅과 자연은 사람과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사람의 친구이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기독교는 이 말씀에 근거해서 땅과 자연을 마음대로 정복하고 다스렸습니다. 땅과 자연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선물이니까 마음대로 사용해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마음대로 땅과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렸기 때문에 오늘날 환경파괴와 기후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이 맞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땅을 정복하고 자연을 다스리라는 창세기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땅을 치료하고 자연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럼 왜 창세기는 사람에게 땅을 정복하고 자연을 다스리라고 말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수천 년 전 창세기가 기록될 당시 인간이 자연을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당시 인간은 거대한 자연에 비해서 한없이 약한 존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자연을 정복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자연을 정복하려는 인간의 욕심 때문에 자연이 파괴되었습니다. 창세기 2장 15절을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동산에 두시고 그 곳을 맡아서 돌보게 하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오늘날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땅을 정복하고 자연을 다스릴 것이 아니라 에덴동산, 이 지구를 돌보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시편 8편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얼마나 존귀하고 영화롭게 창조하셨는지를 고백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하여 주시며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 주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사람에게 존귀하고 영화로운 왕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손주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사람의 발 아래에 두셨습니다.” 이 말씀도 창세기 1장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대리자로 만드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만물을 다스리게 하셨다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사람의 발 아래에 두시고 세상을 다스리는 권한을 사람에게 위임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다스릴 권한을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았습니다. 이렇게 사람을 귀하게 만드시고 세상을 다스릴 권한을 위임해 주신 것에 대해서 우리는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람에게 이렇게 큰 권한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세상을 살릴 수도 있지만 잘못하면 세상을 망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리하는 대리인이 되어서 세상을 아름답고 조화있게 만드는 사람이 될 것이냐, 아니면 세상을 어지럽히는 사람이 될 것이냐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지만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람은 짐승과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을 모시는 사람은 하나님의 대리인이 되어서 이 땅을 아름답게 섬기고 돌볼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지 않고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이 땅을 아름답게 섬기고 돌보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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