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절 열한번째 주일 / 8월 첫번째 주일

사무엘기하 12:7-10, 에베소서 4:11-16

성령강림절, 회개와 온전함

정해빈 목사

 

 

오늘 8월 첫째 주일 부터 교회당에서 주일예배를 드립니다. 지난 날을 되돌아보며 우리의 삶을 회개하고 다시 새롭게 출발하는 8월 달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020년 – 2021년 2년 동안은 전염병으로 인해 정상적인 활동이 중단된 기간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는 회개의 기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설교 제목을 회개와 온전함이라고 정했습니다.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면 회개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최근 토론토 다운타운에 있는 라이어슨 대학에서 캐나다의 대표적인 교육자인 라이어슨의 동상이 사람들에 의해 땅바닥으로 끌려 내려오는 일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원주민 기숙학교 제도를 만든 라이어슨의 동상이 학교에 있는 것이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라이어슨은 전국민의무교육 제도를 만드는 등 오늘날의 캐나다 공립교육제도를 만드는데 공헌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성이 초등학교 수준 이상으로 공부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학교에서 남학생과 여학생의 분리를 주장했습니다. 그는 또 원주민 아이들이 기숙학교에서 농업전문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교육자가 어린 아이들을 강제로 부모에게서 떨어지게 만드는 제도를 만들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캐나다 초대 수상을 역임한 존 맥도날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원주민학교를 인디안 마을에 설치하면 아이들이 야만인(Savage) 부모 밑에서 자라게 된다. 그러므로 아이들을 가능한 부모에게서 멀리 떼어내야 한다.” 그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여러 주들을 하나로 묶어서 오늘날의 캐나다를 만들었고 대륙횡단철도를 개통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그는 백인기독교 우월주의에 갇혀 있었고 원주민 기숙학교을 찬성하였습니다. 오늘날의 캐나다를 만든 유명 인사들이 많은 업적을 남긴 것과 동시에 부끄러운 역사를 남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성경말씀처럼 우리들 모두가 허물많은 죄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사무엘기하 12장은 다윗왕의 범죄와 회개를 기록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충성스러운 부하였던 우리야에게서 아내를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야를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서 다윗의 잘못을 꾸짖게 하셨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떤 성읍에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부유한 사람은 양과 소가 많았고 가난한 사람은 양 한 마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어린 양을 마치 딸을 대하는 것처럼 소중히 여겼습니다. 어린 양은 주인과 같은 음식을 먹었고 주님의 품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자에게 나그네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부자는 자기 양 떼나 소 떼에서 한 마리를 잡아서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가난한 사람의 양을 빼앗아서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다윗은 분개하면서 그런 일을 한 사람은 죽어야 마땅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나단은 다윗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임금님을 기름 부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고 또 사울의 손에서 임금님을 구해 주었는데 임금님은 주님의 말을 가볍게 여기고 악을 행하였습니다.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았습니다. 그런즉 이제부터 임금님의 집안에서 재앙과 칼부림이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임금님은 몰래 이러한 일을 행하였지만 주님께서는 온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임금님을 벌하실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는 가난한 사람의 양 한 마리를 빼앗는 부자의 비유를 통해서 다윗 왕의 욕심/타락/범죄를 꾸짖었습니다.

 

다윗은 한때 민중의 영웅이었습니다. 양을 치는 시골에서 8번째 막내아들로 태어났지만 믿음과 용기가 뛰어나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이 젊은 시절 10년 동안 도피생활하는 것을 보며 다윗을 좋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의 지지는 떨어졌고 다윗의 지지는 올라갔습니다. 사무엘기상 22장을 보면 다윗이 사울의 핍박을 피해서 광야에 있는 아둘람 굴에 피신했을 때 압제를 받는 사람들과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 400명이 다윗의 주변에 몰려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억울한 사람들이 다윗에게 몰려들었다는 말은 백성들이 다윗에게 큰 희망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저 사람을 따라다니면 억울할 일은 없겠구나, 만약 다윗이 사울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되면 다윗은 백성들을 보살피는 좋은 왕이 되겠구나, 백성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젊은 시절 민중의 영웅이었고 희망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다윗은 의리가 있었고 백성들의 고통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한 때 민중의 영웅이었고 언약궤를 옮기면서 백성들과 함께 춤을 추고 음식을 나누었던 다윗은 왕이 되고 나서 점점 타락해져서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이웃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4가지 계명을 어기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나서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였습니다. 그가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며 쓴 시가 시편 51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살려 주셨지만 다윗은 인생을 마칠 때까지 자신의 범죄 때문에 자신의 집안이 망해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 세상에 완벽한 영웅은 없고 우리들 모두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육자 라이어슨에게도 잘못이 있었고 초대 총리 맥도널드에게도 잘못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흑인 노예들을 해방시켜 오늘날의 미국을 만들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원주민 땅을 빼앗았고 흑인들을 중남미로 이주시켜서 그곳에 흑인 식민지를 건설하자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인종차별철폐 운동을 일으켰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여성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고 비폭력 저항의 대명사인 마하트마 간디는 흑인들을 비하하고 인도인의 우월성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실수와 잘못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범죄를 비롯한 이러한 이야기들은 우리의 지식/경험/인격이 부족하기 때문에 항상 공부하고 항상 기도하고 항상 회개하고 항상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에베소서 4장 말씀은 우리가 영적인 성장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도자로, 또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사도는 교회에서 리더쉽을 담당하는 사람을 가리키고, 예언자는 잘못된 것을 바르게 지적하는 사람을 가리키고, 복음 전도자는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환영하는 사람을 가리키고, 목사는 교회를 돌보는 사람을 가리키고 교사는 신앙을 바르게 설명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각자가 받은 직분은 다르지만 목표는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 모두가 그리스도를 믿은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까지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이 이상 더 어린아이로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인간의 속임수나 간교한 술수에 빠져서 온갖 교훈의 풍조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라야 합니다.” 이러저리 흔들리거나 끌려다니지 말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모든 면에서 자라야 한다는 말은 말과 생각과 행동이 자라야 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영적인 성장을 멈추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 다다를 때까지 모든 면에서 자라야 한다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식물은 흙과 물과 햇빛을 받으면 쑥쑥 자랍니다. 집에서 채소를 기르시는 분들은 식물이 얼마나 잘 자라는지를 아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말씀과 기도와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말과 생각과 행동이 자라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과 인격과 성품을 닮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들 모두는 다윗처럼 흠이 있고 불완전하고 실수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런즉 성령의 인도함을 통해서 기도와 말씀묵상을 통해서 온전함으로 나아가는 노력을 멈추지 않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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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열번째 주일 / 7월 네번째 주일

사무엘기하 11:11-15, 에베소서 3:14-21

성령강림절, 결핍과 풍성함 사이에서

정해빈 목사

 

 

어느 덧 2021년 7월 마지막 주일이 되었습니다. 작년 11월말부터 오늘까지 Zoom 또는 유투브 또는 주보를 이용해서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에 참여해 주신 성도님들과 코로나 인한 어려운 시기에 예배가 중단되지 않도록 봉사해 주신 분들과 저희들의 삶을 안전하게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8월이 시작되는 다음 주일부터는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려고 합니다. 모든 것이 조금씩 정상으로 되돌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최근 캐나다에서는 원주민 기숙학교 어린이 무덤이 5월 이후 네번째로 발견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약 천개의 무덤이 발견되었고 과거에 원주민 정책을 만들었던 정치인들의 동상이 시민들에 의해 제거되고 있습니다. 2015년 진실과화해위원회는 6년간의 조사 끝에 원주민 기숙학교 학생 4천 100명이 영양실조와 질병, 학대 등에 숨졌다고 발표한 적이 있었는데 그 발표의 구체적인 증거들이 요즘 계속 발견되고 있습니다. 원주민들은 원주민 학교 약 70%를 운영했던 가톨릭교회의 수장인 교황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캐나다 역사에는 환경보호, 다문화정책, 전국민의료보험 등 자랑스러운 역사도 있지만 반대로 부끄러운 역사도 있습니다. 원주민기숙학교, 인종차별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지난 6월 토론토 스타(Toronto Star) 신문에 캐나다 정부가 1885년부터 1947년까지 62년 동안 행했던 중국인 인두세에 대한 글이 실린 것을 보았습니다. 대륙횡단철도를 놓기 위해 캐나다에 온 중국 남자 노동자들은 당시 일인당 500불에 해당하는 인두세 때문에 아내와 가족들을 캐나다로 데리고 올 수가 없었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1923년에 발표된 중국인이민금지법으로 인해 중국인들은 1923년부터 1947년까지 24년 동안 입국이 금지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그 당시 캐나다에 사는 중국인들의 남녀비율이 2000대 1이었고 중국인 남성 노동자들은 결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캐나다 정부는 1949년 이전에는 아시아인들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캐나다에 사는 중국인들이 모두 부유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2016년 인구 조사에 의하면 백인들의 빈곤율은 12%이었고 흑인들과 중국인들의 빈곤율은 똑같이 23%였습니다.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빈곤에 시달리는 중국인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중국인차별정책 때문에 중국인 1세들이 지금도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캐나다 정부는 과거 정부가 저지른 원주민학살, 원주민기숙학교, 중국인인두세, 인종차별, 백인우월주의에 대해서 사과하고 과거의 과오를 전철삼아서 더 이상의 억압과 차별이 없는 새로운 나라,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사무엘기하 11장은 다윗왕의 범죄를 기록했습니다. 다윗은 장군들과 군인들을 전쟁터에 내보낸 후에 저녁에 옥상에서 혼자 거닐다가 한 여인을 발견하고는 그를 강제로 빼앗았습니다. 다윗이 빼앗은 그녀는 다윗의 심복 우리야 장군의 아내 밧세바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행동을 숨기기 위해서 우리야 장군을 불러서 집에 들어가서 잠을 자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충직한 우리야 장군은 병사들이 전쟁터에 있는데 혼자서 집에 갈 수 없다고 말하며 궁궐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요압 장군에게 편지를 써서 우리야를 전쟁터 맨앞으로 보내서 그를 죽게 만들라고 말했습니다. 젊은 시절 언약궤를 되찾고 나서 백성들과 함께 춤을 추고 함께 음식을 먹었던 다윗은 이제 권력을 남용하고 간음과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솔선수범하는 마음으로 전쟁터에 참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참가하지 않고 궁궐에 홀로 남았습니다. 그는 외로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옥상을 거닐다가 남의 아내를 빼앗았고 충직한 부하 장군을 속이기 위해 궁궐로 불렀고 마침내는 그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범죄일 뿐만 아니라 국가권력의 범죄이기도 했습니다. 모세는 신명기 17장에서 왕은 군마를 많이 가져도 안되고 아내를 많이 가져도 안되고 금/은을 많이 가져도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모세의 유언을 지키지 않았고 반대로 행동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신앙의 결핍, 도덕의 결핍, 양심의 결핍, 사랑의 결핍, 관계의 결핍이 범죄를 낳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도덕과 양심, 은혜와 사랑, 감사와 기쁨이 부족한 사람은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권력과 이성과 재물을 찾습니다. 다윗은 어느 순간부터 도덕과 양심의 결핍, 신앙의 결핍, 사랑과 관계의 결핍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과 율법을 멀리하기 시작하였고 자신의 허전한 마음을 권력과 이성과 재물로 채우려고 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율법을 어기는 범죄로 이어졌고 결국 그는 이 범죄로 인해서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결핍은 불만을 낳고 불만을 미움을 낳고 미움은 범죄를 낳습니다. 결핍은 우리의 마음을 잘못된 길로 인도합니다. 예를 들면 이민자들이 많이 오면 직업을 빼앗긴다고 생각해서 이민자들을 차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차별하는 사람들은 마음에 결핍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결핍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환영할 여유가 없습니다. 이민자를 학대하면 그 사회는 좁고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사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민자들이 오면 직업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인구가 많아지고 인구가 많아지면 직업이 많아지기 때문에 모두에게 유익이 됩니다. 이민자들이 많이 오면 그 나라는 더 건강해지고 풍성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왕래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입니다. 마음이 풍성한 사람들은 이민자들이 모두에게 유익이 된다고 생각하고 이민자들을 환영할 것입니다. 마음에 결핍이 있으면 죄를 저지르거나 다른 사람을 학대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풍성한 사람은 복을 나누어 주고 이웃을 환영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에베소서 3장에서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겉사람이 외모와 육체를 가리킨다면 속사람은 영혼과 마음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겉사람도 강건해야 하고 속사람도 강건해야 합니다. 겉사람이 강건하다고 하더라도 속사람이 강건하지 못하면 마음에 결핍이 오고 마음에 결핍이 오면 마음이 지치게 되고 마음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헛된 것을 바라보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허전해지지 않도록 은혜와 사랑과 자비로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채워 주십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이 충만하여지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충만하시니 여러분들도 하나님을 닮아서 충만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얼마나 크고 넓고 높고 깊은지를 알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풍성하시고 충만하시니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도 풍성하고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때로는 이런 말씀들이 공허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우리는 매일 결핍 속에서 살아갑니다. 갖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지만 갖고 싶은 것을 다 갖을 수 없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없습니다. 매일 결핍을 느끼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충만하시니 여러분도 충만해지기를 바란다는 말이 공허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주만물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풍성한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풍성하시니 우리들도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거하는 사람은 결핍이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주님께 인정받기 위해서 더 많이 소유하거나 더 유명한 사람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결핍을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가 마음 문을 닫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마음 문을 활짝 열어놓으면 주님께서는 풍성한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주님과 더불어 풍성하고 감사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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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아홉번째 주일 / 7월 세번째 주일

사무엘기하 7:1-7, 에베소서 2:14-22

성령강림절, 막힌 담을 허무시고

정해빈 목사

 

 

세계의 모든 종교에는 그 종교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물 또는 성전이 있습니다. 성전의 크기와 구조를 보면 그 종교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유대/기독교 신앙은 성전이 아니라 성막/천막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성막/천막은 한 곳에 설치했다가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성막/천막은 유대/기독교 신앙이 가난한 사람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유목민들과 함께하는 신앙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성막은 성전으로 바뀌었습니다. 성막이 성전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유대/기독교 신앙이 더 이상 유목민들을 위한 신앙이 아니라 다른 종교들처럼 기득권을 위한 종교, 국가를 위한 종교로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전을 건축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성전을 짓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기 위해 성전을 짓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최초로 성전을 지은 사람은 솔로몬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넓은 지역을 통치한 솔로몬은 7년 동안 18만 명을 동원해서 성막을 몇배로 확대한 화려한 성전을 지었습니다. 이 성전을 짓기 위해서 솔로몬은 레바논의 백향목을 비롯하여 많은 귀금속과 석재를 사용하였습니다.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그후 바벨론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에 의해 500년 만에 두번째로 건축되었고 다시 500년이 지난 후에 로마시대 가나안을 통치했던 헤롯대왕에 의해 세번째로 건축되었습니다. 헤롯이 지은 세번째 성전은 첫번째와 두번째 성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규모였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의 동쪽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기 때문에 지중해 사람들이 성전을 구경하기 위해 관광을 올 정도로 크고 화려했습니다. 갈릴리에서 올라온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보며 감탄하였을 때 예수님은 이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고 곧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3일 만에 새로운 성전을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각 종교가 지은 거대한 성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저렇게 거대한 성전을 짓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고생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기독교를 예로 든다면 지금 현재 현존하는 교회당 건물 가운데 가장 큰 교회당은 바티칸에 있는 성베드로 성당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묻혀 있다고 알려진 이 성당은 1506년 건축을 시작해서 120년간의 공사 끝에 1626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성베드로 성당 건축 공사 때문에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교황 레오 10세는 성베드로 성당 건축기금을 모으기 위해서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면죄부를 사면 가족들이 지옥과 연옥의 고통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선전하였는데 이것을 보다 못한 마틴 루터는 1517년 비텐베르크교회 정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내걸며 면죄부를 판매하는 카톨릭을 비판하였습니다. 결국 이를 기점으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심하게 표현하면 중세시대 수많은 성도들의 피와 땀을 빼앗아서, 거짓으로 면죄부를 팔아서 성베드로 성당을 지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베드로 성당과 쌍벽을 이루는 성당이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있습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가면 세계적인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가 설계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볼 수 있습니다. 1882년 건축을 시작하여 지금도 공사가 진행 중인 이 성당은 144년 동안의 공사 끝에 2026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사무엘기하 7장을 보면 다윗이 성전을 지으려고 계획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에 이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은 자신은 궁궐에서 사는데 하나님의 언약궤가 휘장 안에 있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다윗을 보좌하는 나단 선지자는 다윗의 말에 동의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에게 나타나셔서 다윗과 나단의 생각을 꾸짖으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온 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떤 집에서도 살지 않고 오직 장막이나 성막에 있으면서 옮겨 다니며 지냈다. 내가 이스라엘 그 어느 지파에게라도 나에게 백향목 집을 지어 주지 않은 것을 두고 말한 적이 있느냐?”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백향목으로 지은 거대한 성전을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사실과 주님은 한 곳에 머무르는 분이 아니라 성막을 통해서 히브리 백성들과 함께 동행하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기독교 신앙은 본래 유목민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 떠돌이들, 양을 치는 사람들, 히브리 백성들과 늘 함께 하셨습니다. 백성들과 동행해야 하기 때문에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성막이 필요했습니다.

 

성전은 두가지 점에서 본래의 히브리 신앙과 배치됩니다. 첫째로 성전을 짓고 성전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르면 하나님을 성전에 가두게 됩니다.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 되었으니 하나님을 만나려면 성전에 가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본래 히브리인들의 조상들은 하나님께서 어느 곳이나 계시다고 고백했습니다. 야곱은 돌베개를 베고 자면서 하나님을 만났고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나 어느 때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시지만 동시에 우리의 삶 가까운 곳에 늘 동행하십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고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고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고 인생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기도 합니다. 성전을 지어놓고 이곳이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하면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성전에 가두게 됩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우리와 동행하시는 성막신앙이 본래의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성전은 사람들을 거룩한 사람과 부정한 사람으로 나눕니다. 성전 건물을 보면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성전 바깥뜰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고 여성들은 여성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에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성전 안마당은 유대인 남자들만 들어갈 수 있고 성소는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고 지성소는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전은 사람을 나누는 장벽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성전이 하나님을 가두고 사람을 나누는 장벽을 만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계획을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성전과 정반대되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일상생활의 모든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사람을 차별없이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성전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에베소서 2장에서 막힌 담을 허무시고 사람을 화해시키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증언하였습니다. 당시 에베소를 비롯한 소아시아 지역 초대교회에서는 유대인 성도들과 헬라인 성도들 사이에 인종적/문화적/신앙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은 똑같이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였지만 먹는 것도 달랐고 생활습관도 달라고 신앙전통도 달랐기 때문에 많은 부분에서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평화이심을 증언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유대인과 헬라인을 나누는 거대한 장벽을 허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과거의 성전을 허무시고 3일 만에 모든 사람을 환영하는 새로운 성전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주님이 성전의 머릿돌이라면 우리는 성전의 지체입니다. 이제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모임이 성전이 되었습니다. 건물로 지어진 성전은 하나님을 건물에 가두고 사람을 차별합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사람들의 모임이 성전이 되었으니 큰 건물도 필요없고 옛날 성전처럼 사람을 나누는 장벽도 필요 없습니다. 그곳이 어느 곳이든지 사람들이 모여서 주님을 예배하는 곳이 성전입니다. 5명이 모여서 예배드려도 예배드리는 그곳이 성전이 됩니다. 주님께서 만들어 주신 새로운 성전, 교회에는 막힌 담이 없습니다. 누구나 환영하고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많으면 많은대로 적으면 적은대로 장벽이 없는 교회, 따뜻한 교회, 사랑이 넘치는 교회, 개방적인 교회를 만들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인종의 장벽, 성별의 장벽, 계층의 장벽을 허무시고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을 따라 평화의 복음, 화해의 복음을 전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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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여덟번째 주일 / 7월 두번째 주일

사무엘기하 6:13-19, 마가복음서 6:22-29

성령강림절, 성령의 춤과 악령의 춤

정해빈 목사

 

 

구약성경 신명기 17장을 보면 왕의 자격에 대해서 모세가 길게 설명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서 살 때에, 주위의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당신들도 왕을 세우고 싶다면 다음과 같은 사항을 지켜야 한다고 모세는 말했습니다. 첫째로 왕은 군마를 많이 가지려고 해서도 안 되고 군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이집트로 보내서도 안 됩니다. 둘째로 왕은 많은 아내를 둠으로써 그의 마음이 다른 데로 쏠리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셋째로 왕은 금과 은을 많이 모아서도 안 됩니다. 대신 왕은 율법책을 평생 자기 옆에 두고 읽으면서 자기를 택하신 주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과 규례를 성심껏 어김없이 지켜야 합니다. 마음이 교만해져서 자기 겨레를 업신여기는 일도 없고 그 계명을 떠나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도 않으면 그와 그의 자손이 오래도록 이스라엘의 왕위에 앉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가나안에 정착한 히브리 백성들이 왕을 세우지 않고 하나님만을 왕으로 섬기며 자유롭고 평등한 나라를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서 어쩔 수 없이 왕을 세워야 한다면 위와 같은 사항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당부하였습니다.

 

모세가 말한 왕이 해서는 안 되는 3가지는 이집트와 가나안의 왕들을 가리킵니다. 이집트 왕과 가나안 왕들은 군마를 많이 모으고 아내를 많이 두고 금과 은을 쌓아두고 백성들을 통치했습니다. 이런 사회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피라미드 사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맨 위에 있는 왕이 맨 아래에 있는 백성들과 노예들을 억압하고 다스립니다. 히브리 백성들은 오랫동안 이집트에서 이런 왕의 억압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히브리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 가나안 왕을 따라가지도 말고 피라미드 같은 사회를 만들지도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가나안의 문화, 가나안의 종교, 가나안의 정치는 정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히브리 백성들에게 가나안과 같은 제도를 만들지도 말고 왕을 세우지도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왕으로 섬기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어쩔 수 없이 왕을 세워야 한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백성들을 섬기는 왕을 세울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구약성경과 예언자들이 왜 가나안 문화를 닮지 말라고 반복해서 말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사무엘기하 6장은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면서 백성들과 함께 기뻐하는 모습을 기록했습니다. 당시에는 블레셋 사람들이 십계명이 들어있는 언약궤를 빼앗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언약궤를 빼앗길 만큼 블레셋 사람들은 강했습니다. 그들은 철기를 사용했기 때문에 청동기를 사용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길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지도력을 발휘하여 블레셋 군대를 무찔렀기 때문에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길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주님 앞에서 온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나팔을 불었습니다. 다윗의 부인이자 사울의 딸인 미갈은 다윗이 주님 앞에서 뛰면서 춤을 추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그를 업신여겼습니다. 다윗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후에 그곳에 모인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남녀를 가리지 않고 각 사람에게 빵 한 덩이와 고기 한 점과 건포도 과자 한 개씩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미갈이 다윗을 향해 임금님이 체통도 없이 왜 맨살을 드러내며 춤을 추냐고 흉을 보자 다윗은 “내가 스스로 보아도 천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주님을 찬양하는 일 때문이라면 이보다 더 낮아지고 싶소” (삼하 6:22) 라고 말하였습니다. 다윗이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언약궤를 다시 찾은 것을 기뻐하며 춤을 춘 것과 모든 남녀노소 백성들에게 음식을 베푼 것을 보면 다윗이 주님을 찬양하고 백성들과 하나되는 순수하고 겸손한 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하였고 체면을 따지지 않고 백성들과 함께 기뻐하였고 백성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습니다. 다윗이 젊은 시절에는 백성들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백성들과 동거동락을 함께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나이가 들면서 범죄하였고 교만해졌습니다. 그것은 그가 모세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이 모세의 가르침대로 군마와 아내와 금은보화를 멀리하고 율법책을 평생 자기 옆에 두고 읽으면서 자기를 택하신 주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과 규례를 성심껏 어김없이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더라면 그는 더 좋은 왕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젊은 시절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부터 노년에 인생을 마칠 때까지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타락하지 않고 겸손하게 주님을 섬기고 사람들과 동거동락하며 사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젊은 시절 다윗은 마음이 순수하였습니다. 그는 언약궤를 되찾았을 때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령의 춤을 추었고 백성들과 함께 똑같은 음식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 헤롯왕은 악령의 춤을 추었습니다. 헤롯은 백성들과 잔치를 벌인 것이 아니라 귀족들과 잔치를 벌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마가복음서 6장은 갈릴리를 통치했던 헤롯 안티파스 왕이 부인 헤로디아의 요구에 따라 세례요한을 처형하는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권력욕심이 많았던 헤로디아는 삼촌 빌립과 결혼해서 딸 살로메를 낳은 후에 이혼하고 또 다른 삼촌이자 갈릴리를 통치하는 헤롯 안티파스와 결혼하였습니다. 이 결혼은 모세의 율법에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반발을 샀고 특히 세례요한은 헤롯 안티파스와 헤로디아의 결혼을 비판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이 자신을 비판한 것을 안 헤로디아는 세례요한을 죽일 계획을 짰습니다. 그의 딸 살로메가 춤을 추자 헤롯 안티파스는 기분이 좋아서 네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살로메는 어머니와 상의한 후에 요한의 목을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마가복음은 헤롯이 요한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마음이 몹시 괴로웠지만 자신이 맹세한 것과 거기에 함께 앉아 있는 사람들 때문에 살로메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고 기록했습니다. 결국 세례요한은 헤롯/헤로디아/살로메에 의해서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경은 이 이야기를 기록함으로서 권력을 탐하고 백성들을 지배하고 예언자를 죽이는 권력자의 횡포, 악령의 춤을 추는 권력자의 횡포를 고발하였습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레닌과 간디를 꼽았습니다. 레닌은 1870년, 간디는 1869년 1년 차이로 태어났고 차별과 억압이 없는 세상을 꿈꾸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목적을 이루는 방식은 달랐습니다. 레닌은 폭력과 독재를 통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고 하였고 간디는 비폭력 저항을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하였습니다. 20세기는 레닌의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극좌 공산주의, 극우 히틀러 나치 정권, 1차세계대전, 2차세계대전 모두 레닌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폭력과 독재를 통해서 목표를 이루려는 방법은 인류를 파멸로 몰고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인도의 전통 불교인 자이나교의 가르침 중에 아힘사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아힘사(ahimsa)는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는 것과 내가 상처를 받을지언정 남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겠다는 가르침을 가리킵니다. 간디는 이 아힘사의 원리를 실천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간디는 종교 간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서 노력하다가 극단적인 힌두교도가 쏜 총탄에 맞아 숨졌습니다. 20세기가 레닌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간디의 시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는다는 아힘사의 가르침은 모든 인류가 따라가야 할 가르침이고 또한 성령의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성령의 춤을 추었고 헤롯은 악령의 춤을 추었습니다. 악령의 춤을 추면 사람이 죽고 성령의 춤을 추면 사람이 살아납니다. 성령강림절을 묵상하며 자연과 함께, 이웃과 함께,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며 성령의 춤을 추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권력을 휘두르고 의인을 억압하고 군마를 모으고 재물을 탐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이웃을 섬기며 성령의 춤을 추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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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일곱번째 주일 / 7월 첫번째 주일

마가복음서 6:4-13, 고린도후서 12:7-10

성령강림절, 연약함의 힘

정해빈 목사

 

 

미국의 비영리 재단에서 운영하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20분짜리 인터넷 강연 동영상이 있습니다. TED(Technology, Entertainment, Design)라고 부르는 많은 강연들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았던 강연 중 하나가 미국 휴스턴 대학 사회복지학과 브렌 브라운( Brené Brown) 교수가 강의한 “연약함의 힘(The Power of Vulnerability)”이라는 동영상이었습니다. 연약하다는 것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교수는 연약함에 놀라운 힘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분은 연구와 조사를 통해서 자신이 연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가치있고 보람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강하고 부유하고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가치있고 보람있는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강하고 부유하고 모든 것을 다 갖추어야 삶의 만족도와 자존감이 높아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조사해 보니 자신이 연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가치있고 보람있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물론 연약하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삶의 만족도가 낮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연약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가치있고 보람있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3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용기(courage), 자비(compasion), 관계(connection)이었습니다. 자신의 약점/연약함을 상대방에게 말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약점을 감추려고 합니다. 하지만 삶의 만족도가 높은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둘째로 삶의 만족도와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연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볼 때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셋째로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관계(connection)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잘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어도 나 혼자서 세상을 잘 헤쳐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칫하면 독불장군이 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연약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도움/관계/연결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브렌 브라운 교수는 자신이 연약하다는 것을 알면서 동시에 용기, 자비, 관계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고 보람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조사를 통해서 깨달았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연약함이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라 연약함이 우리의 삶을 더 풍성하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약함 자체보다 연약함을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더 중요합니다. 연약함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수치, 두려움, 가치없음을 느끼게 됩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수치스러워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자신의 삶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브렌 브라운 교수는 “연약함은 불편하지만 아름다움을 준다”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연약함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연약하기 때문에 겸손해질 수 있고 연약하기 때문에 자비로워질 수 있고 연약하기 때문에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고 연약하기 때문에 매일매일의 삶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연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보다 더 가치있고 보람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연구/조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마가복음서 6장을 보면 예수님이 갈릴리 고향에서 배척받으시는 장면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고 병자를 고치자 고향 사람들이 놀라며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닌가” 말하며 주님을 달갑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가난한 목수 집안 출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가진 선입관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장면을 목격한 주님은 예언자는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예수님의 연약함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외모와 출신과 배경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려는 사람들의 생각이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였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도움이 필요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마을을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열두 제자를 둘씩 마을로 보내서 예수님처럼 복음을 전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식탁을 제공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길을 떠날 때 빵이나 자루나 동전을 가지고 다니지 말고 지팡이만 가지고 다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지중해에서는 가르침을 전하고 점을 치고 굿을 하는 대신 대가와 숙식을 요구하는 순회 설교자들/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무 조건없이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라고 말씀하셨고 다만 그 마을이 너희를 영접할 때만 그 마을에 머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프리카 속담에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혼자서 모든 일을 다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의 도움을 요청하셨습니다. 제자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전하신 하나님 나라 사역은 갈릴리 모든 마을에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고린도후서 12장을 보면 사도바울이 자신이 십사 년 전에 세번째 하늘에 올라가서 하늘의 엄청난 계시를 받았고 주님을 만나는 특별한 신비체험을 했다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의 말에 의하면 그 체험은 너무도 환상적이어서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왜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을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말했는지 그 이유를 헤아릴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 지역은 무당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신비체험이 많았고 고린도 교회 교인들 사이에서도 방언/예언/은사/신비체험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신비체험을 자랑하는 교인들을 향해서 신비체험을 말한다면 자신의 신비체험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은 이러한 신비체험을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약점을 자랑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신비체험을 자랑하지 못하도록 또 교만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몸에 가시(질병)을 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말한 가시가 무엇인지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시력이 좋지 못했을 수도 있고 간질병을 앓았을 수도 있고 풍토병을 앓았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신비체험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는 것보다 연약함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는 것이 훨씬 더 크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약할 때 주님께서 나의 약점을 채워주시고 나를 겸손하게 만드시고 나의 약점을 통해 은혜를 체험하게 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진실로 우리는 연약함을 통해서 주님을 더 의지하게 되고 브레네 교수의 강의처럼 용기와 자비와 관계를 통해서 더 풍성한 삶을 살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능력이 연약함을 통해 나타남을 깨닫고 감사를 고백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미국 뉴욕 유니온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정현경 교수는 똑같은 제목 [연약함의 힘]이라는 책에서 소통과 연결을 중요시하는 연약한 사람들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지금까지의 세상에서는 강한 사람들이 남을 지배하고 세상을 주도하려고 하였습니다. 강한 사람들이 세상을 주도하면 세상이 파괴되고 거칠어집니다. 이제부터는 연약함의 힘을 가진 사람들이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를 의지하며 관계성을 가지고 함께 일할 때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개미와 거미는 연약한 작은 동물이지만 개미와 거미들이 서로 협력하면 맹수를 물리치기도 합니다. 지배와 복종이 아니라 거미줄처럼 네트워크를 넓혀 갈 때 새로운 세상은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연약함이 부끄럽고 수치스런 것이 아니라 연약함이 우리의 삶을 더 풍성하게 하고 더 관계적으로 만들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연약함을 통해서 감사드리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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