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절 첫번째 주일 / 5월 네번째 주일

에스겔서 37:1-9, 사도행전 2:14-18

성령강림절, 내가 너희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정해빈 목사

 

 

요즘 코로나19로 인해 가장 고통받고 있는 나라가 인도입니다. 인도에서는 하루 40만 명의 확진자가 나오고 있고 시신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사망자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선진국을 중심으로 백신이 보급되고 있지만 특정 나라와 지역의 감염을 막지 못하면 코로나 감염은 머지않아 다시 전세계적으로 확산될 것입니다. 요즘 시대는 전세계가 빠르게 왕래하는 지구촌 시대이기 때문에 그들의 문제가 언제든지 나의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미국/캐나다를 비롯한 선진국들이 백신보급에 적극 나서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전세계 국가들이 백신나눔운동을 전개해서 함께 방역에 나설 때 코로나를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인도 외에 요즘 뉴스에 나오는 나라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과의 갈등입니다. 이스라엘과 가자 지구는 로켓포와 폭격을 주고받으며 군사적으로 충돌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봉쇄조치로 인해서 가자 지구에 사는 사람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곳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요즘 이런 뉴스를 보면서 모든 인류가 질병과 갈등에서 벗어나 공존과 평화를 누리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유월절/부활절로부터 50일이 지나고 오늘부터 오순절/성령강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생명과 평화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할 때, 죽음과 갈등과 전쟁은 물러가고 생명과 평화가 우리를 찾아올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의하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을 때, 온 세상이 어둡고 혼돈이 가득할 때, 하나님의 영이 불어와서 창조가 시작되었습니다. 창세기 2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어둠과 혼돈이 물러가고 질서가 시작되고 생명이 시작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사람을 일으켜 줍니다. 우리 말에 기절(氣絕)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기운 기(氣), 끊어질 절(絕), 기가 끊어졌다는 뜻입니다. 기가 끊어지면 사람은 기절, 정신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이 건강하게 살려면 기가 끊어지면 안되고 기가 통해야 합니다. 기가 통한다는 말을 “기통한다, 기똥차다” 라고 표현을 합니다. 우리가 어떤 신나는 일을 만날 때 이런 표현을 쓰는데 이 말은 속된 말이 아니라 기가 통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태권도를 하는 선수들은 몸을 움직일 때 기합을 넣습니다. 기합을 넣는다는 말은 기가 합한다, 기가 합해진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기가 합해지면 힘이 생기고 힘이 생기면 높이 뛸 수 있고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쓰는 표현 중에 “신명난다, 신바람이 난다” 는 표현이 있습니다. 신명(神命), 귀신 신(神), 명령할 명(命), 하늘의 영이 나에게 내려와서 나에게 명령하고 나를 기쁘게 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람이 건강하려면 첫째로는 육체가 튼튼해야 하고 둘째로는 마음/영혼/기운이 기쁘고 튼튼해야 합니다. 육체가 튼튼해도 마음이 시들고 즐겁지 않으면 사람은 건강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슬프고 지치고 우울하면 기가 없는 상태, 무기력(無氣力)한 상태가 되고 맙니다. 요즘 굶주리는 사람은 없지만 코로나 질병으로 인해 무기력한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주시고 우리의 영혼을 일으켜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신명나는 삶, 신바람나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일으켜 주십니다. 성령이 임하면 어둠과 혼돈이 물러가고 기쁨과 활력이 찾아옵니다. 성령께서 코로나19로 인해 집안에 갇혀 있는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우리의 지친 마음을 다시 일으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에스겔서 37장은 바벨론에 의해 죽어간 히브리 백성들이 다시 살아나는 환상을 기록했습니다. 당시 에스겔은 바벨론 제국에 의해 포로로 끌려가서 고통 중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에스겔에게 나타나셔서 죽은 뼈들이 가득찬 골짜기를 보여주시고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말씀하셨습니다. 에스겔이 주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선포하니 뼈들이 움직이고 뼈들 위에 힘줄이 뻗치고 살이 오르고 살 위에 살갗이 덮여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속에는 생기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에스겔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아, 너는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렇게 일러라. '나 주 하나님이 너에게 말한다. 너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불어와서 이 살해당한 사람들에게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 하나님께서는 전쟁으로 죽어간 히브리 백성들의 뼈가 다시 살아나게 하시고 다시 살아난 사람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뼈와 살 위에 생기가 임해야만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죽었던 뼈와 살이 살아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폐쇄적인 특정 민족의 부활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독일의 나치 정권은 “피와 흙”(Blood and Soil)을 구호/슬로건으로 삼았습니다. 피는 독일의 게르만 민족을 가리키고 흙은 독일의 자연을 가리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은 “피와 흙”을 외치며 독일 게르만 민족의 부흥을 주장했습니다. 죽었던 뼈와 살, 죽었던 피와 흙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특정 민족이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인류에게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 될 것입니다. 다시 살아난 뼈와 살 위에 하나님의 성령이 부어질 때, 다시 살아난 뼈와 살은 하나님께 쓰임받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코로나로 인해 고통받는 모든 나라와 민족이 다시 살아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통받는 나라와 민족이 단순히 과거의 영광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시 살아난 나라와 민족이 성령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을 포용하는 새로운 공동체, 인류를 위해 헌신하는 새로운 공동체, 하나님께 쓰임받는 새로운 공동체로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부활절이 기독교의 시작이라면 성령강림절은 교회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활절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이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부활신앙, 부활사건, 부활능력이 없었더라면 기독교는 시작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활절이 기독교의 시작이라면 성령강림절은 교회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활을 깨달은 제자들이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지만 아직 교회를 시작하기에는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제자들은 오순절날에 하늘에서 불같이 내려오는 성령체험을 하고나서 용기를 얻어서 교회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사도행전 2장은 예루살렘에 모인 성도들이 오순절에 성령을 만난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오순절을 맞이해서 해외에서 많은 동포들이 예루살렘에 왔는데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자신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성령을 받은 성도들이 민족과 언어의 차이를 뛰어넘어 서로 소통하는 새로운 공동체/교회를 시작하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사셨을 때는 대부분의 제자들이 갈릴리 어부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을 받음으로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개방적인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열게 해 주셔서 우리가 모든 차별과 편견을 뛰어넘는 새로운 공동체가 되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베드로는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일이 지금 이루어졌다고 선언했습니다. 진실로 성령께서는 젊은이들이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이 꿈을 꾸고 남종과 여종들이 예언을 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신분과 배경과 차별을 뛰어넘는 새로운 공동체, 모두가 똑같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모두가 똑같이 서로 사랑하고 물질을 나누는 새로운 공동체가 시작되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셔서 우리가 지치고 낙심하고 무기력해지지 않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죽었던 뼈와 살이 성령을 통해 새로운 생명으로 일어서고, 낙심하고 지친 영혼들이 성령을 통해 다시 기운이 살아나는 역사가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일어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성령이여,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소서. 성령이여, 답답하고 무기력한 우리의 영혼을 일으켜 주옵소서. 성령이여,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시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성령이여, 질병과 억압과 전쟁으로 고통받는 인도, 미얀마,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일으켜 주옵소서.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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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일곱번째 주일 / 5월 세번째 주일

요한복음서 17:12-19, 사도행전 1:15-17, 21-26

부활절, 가룟유다와 맛디아

정해빈 목사

 

 

인류의 공동선을 위해서 일하는 21세기의 예언자를 꼽으라면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 지구환경을 위해 일하는 그레타 툰베리 같은 사람들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2019년 3월 극우 테러로 51명의 무슬림들이 목숨을 잃었을 때 아던 총리는 스카프를 쓰고 피해자들을 껴안았습니다. 유명해지고 싶어 테러 현장을 생중계한 가해자에 대해서는 이름을 부르지 않고 “범죄자”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뉴질랜드 정부는 자동소총 판매를 금지시켰고 일반인이 보유한 자동소총을 정부가 다시 사들이는 프로그램을 실시했습니다. 아던 총리는 약자나 소수자 한두 명을 상징적으로 집단에 넣어주는 토크니즘(tokenism)을 거부하고 내각의 절반 이상을 여성들과 원주민들에게 할애하였습니다. 2018년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뉴질랜드를 방문했을 때는 뉴질랜드 전체 시민을 대표한다는 뜻에서 마오리족 전통 의상을 입고 여왕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또한 아던 총리는 지도력을 잘 발휘해서 뉴질랜드를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코로나에 대처하는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한편 지난 4월 22일은 지구의 날이었습니다. 스웨덴의 환경 운동가인 18세의 크레타 툰베리는 2019년 유엔본부에서 열린 기후행동 정상회의에서 연설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그는 이 연설에서 미래세대를 위해서 UN이 제시한 산업혁명 이전 대비 기후변화 한계치를 기존에 국제사회가 합의한 2°C가 아니라 1.5°C로 재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지구평균 온도가 2°C 이상 올라가면 해수면이 상승해서 지구에 재앙이 닥칩니다. 그래서 각 나라의 지도자들이 기후행동 정상회의에서 모여서 모든 나라들이 온실가스를 줄여서 지구평균온도를 2°C 이상 올리지 않기로 합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크레타 툰베리는 기후변화의 속도가 심각하기 때문에 온도상승의 한계를 2°C가 아니라 1.5°C로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를 실망시키고 있습니다. 모든 미래세대의 눈이 여러분을 향해 있습니다. 여러분이 우리를 실망시키기를 선택한다면 우리는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책임을 피해서 빠져나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전 세계가 깨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든 아니든 변화는 다가오고 있습니다.” 툰베리는 기성세대 지도자들에게 자신과 같은 미래세대를 위해서 기후변화 재앙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오늘은 부활절 마지막 주일, 승천주일입니다. 우리는 지난 7주 동안 부활의 기쁨과 부활의 능력과 부활의 소망을 묵상하였습니다.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신 후에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에서 땅에 남아 있는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고별기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제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내가 아버지께 비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 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셨지만 제자들은 땅에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이 땅에서 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성령의 도움을 받으며 이 땅에서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처럼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남은 제자들을 걱정하시며 악한 자에게서 제자들을 구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처럼 우리도 부활의 증인으로 부름받았습니다. 예수님처럼 하늘로 올라가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있는 동안 부활의 증인으로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21세기의 예언자, 21세기의 부활 증인으로 부름받았습니다. 인류의 공존과 평화를 위해, 창조세계의 보존을 위해, 기후변화/전염병 예방을 위해 부름받았습니다. 지구촌에 거하는 모든 생명들이 안전하고 풍성한 삶을 살수 있도록 일하라고 부름받았습니다. 21세기에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종차별과 편견과 폭력의 세상을 부활의 기쁨이 넘치는 세상으로 변화시키라고 주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이것이 부활절의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며 고군분투할 때,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를 격려하시고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사도행전 1장은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가룟유다를 대신해서 맛디아를 부활의 증인/사도로 선출한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그들은 가룟유다의 자리에 새로운 사람을 채워서 12명의 사도(apostolos, 使徒, 파견된 자)를 세우기를 원했습니다. 성경은 가룟유다를 재물을 탐하고 세상적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묘사를 했습니다. 그는 재물을 관리할 정도로 유능하였기 때문에 주님의 신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은돈 30냥에 예수님을 팔고 비극적으로 인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주님의 제자로 부름받은 사람이 배신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삶은 우리가 어떤 마음을 품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젊은 시절 정의를 외치던 사람이 시간이 지나면서 부패하고 타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의 마음이 욕망으로 채워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최후의 만찬의 모델을 찾다가 한 착한 청년을 만나서 그를 모델로 예수를 그렸습니다. 세월이 지나서 다시 범죄자를 찾아서 그를 모델로 가룟유다를 그렸는데 알고 보니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가룟유다를 대신할 사람으로 요셉과 맛디아를 선출하였고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시는 주님, 주님께서 이 두 사람 가운데서 누구를 뽑아서 이 섬기는 일과 사도직의 직분을 맡게 하실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십시오." 후보로 선출된 두 사람에게 제비를 뽑게 하니 맛디아가 뽑혔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제비를 뽑는 이야기가 종종 나옵니다. 히브리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도착하였을 때 서로 좋은 땅을 가지려고 싸우지 않고 대신 제비뽑기를 통해서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옛날 제사장들은 우림과 둠밈 두가지 돌을 가지고 다니면서 그것을 주사위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열두번째 사도가 될 만한 두 사람을 선출하였고 두 사람으로 하여금 제비를 뽑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두 명의 후보는 자신들이 선출하였지만 최종결정은 하나님께 의뢰하였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렇게 사람의 노력과 하나님의 뜻 모두를 존중하는 지혜로운 교회였습니다.

 

성경은 가룟유다를 대신해서 선출된 맛디아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맛디아가 제자로 선출된 후에 어떤 일을 했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아마도 맛디아는 가룟유다를 대신해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제자의 사명을 성실하게 잘 감당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에는 이렇게 가룟유다처럼 배신하는 사람도 있었고 이름이 나오지 않는 여인들처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예수님 당시에는 제자가 아니었지만 나중에 제자로 선출된 맛디아 같은 사람도 있었고 제자로 추천받았지만 제자로 뽑히지 않은 요셉 같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신앙공동체에서 사라진 사람도 있었고 새로운 주인공이 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이렇게 사람을 잃어버릴 때도 있고 새로운 사람을 찾을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초대교회는 조금씩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승천하셨고 이 땅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남았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셨습니다. 제자가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 땅으로 파송받은 사도들은 교회를 세웠고 새로운 사람을 발굴하였습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서로 협력하고 한편으로는 기도하면서 주님께서 맡겨주신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우리들도 한편으로는 협력하고 한편으로는 기도하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21세기의 예언자, 21세기의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이 땅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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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여섯번째 주일 / 5월 두번째 주일

요한복음서 15:9-17, 사도행전 10:44-48

부활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정해빈 목사

 

 

2015년에 개봉된 영화 [사도]는 조선시대 영조임금과 아들 사도세자 사이의 비극적인 관계를 자세하게 묘사했습니다. 무수리의 몸에서 태어나 왕이 된 영조는 신분을 중요하게 여기는 신하들의 경멸을 받았고 그렇기 때문에 하루하루 긴장 속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영조는 신하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40세가 넘은 나이에 낳은 아들 사도의 세자교육에 집착했습니다. 아들을 위해 직접 자녀교육 책을 써서 주었지만 세자는 나이가 들면서 칼놀이와 그림 그리기를 더 좋아했습니다. 자신의 기대를 저버린 세자를 보며 영조는 분노하였습니다. “너는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왜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이냐? 너를 제대로 된 임금 만들려고 내가 얼마나 노력하는 줄 아느냐? 하나만 삐딱해도 신하들이 멸시한다. 너 같은 인간을 세자로 세운 것이 내 잘못이다. 너는 존재 자체가 역모다!” 아버지의 이 말이 사도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결국 사도세자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영조는 나중에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며 죽은 아들의 이름을 생각할 사(思), 슬퍼할 도(悼), “슬픔을 생각한다”라는 뜻에서 사도(思悼)로 정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말을 꼽으라면 “너는 존재 자체가 역모이다” 라는 말일 것입니다. 이 말은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에 가장 잔인합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존재 그 자체로 귀한 존재입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부모는 나이가 들면 돈을 벌 수도 없고 일을 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부모가 능력이 많기 때문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귀하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을 보면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 바로 다음에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나옵니다. 일주일에 하루는 경제활동을 하지 말고 존재 그 자체를 기뻐하라는 계명이 안식일 계명입니다. 마찬가지로 부모의 능력을 따지지 말고 부모 그 자체를 귀하게 여기라는 뜻에서 안식일 계명 다음에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만드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세례받을 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막1:11)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큰 능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기뻐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존재 자체를 기뻐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존재를 기뻐하십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불완전하고 불순종합니다. 불완전하고 불순종하기 때문에 우리는 의로우신 하나님께 먼저 가까이 다가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완전을 요구하시고 우리의 죄악을 심판하는 분이시라면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게 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불순종하고 불완전할지라도 우리의 존재 자체를 기뻐하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사랑에 의지하며 두려움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요한복음 15장에서 3가지 단어를 같은 뜻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사랑은 계명이고 계명은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고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충만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2000년 전 요한교회가 어떻게 신앙생활했으며 어떻게 고난을 극복하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요한교회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는 이유로 유대교로부터 배척을 받고 있었습니다. 요한교회가 유대교의 배척을 견디는 길은 포도나무와 가지가 붙어있는 것처럼 서로 붙어있는 것이었고 서로 사랑하면서 기쁨을 나누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고난과 핍박을 이기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로부터 배척받는 요한교회를 축복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선택하였고 너희는 나의 종이 아니라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인과 종은 수직적으로 명령하고 훈계하지만 친구와 친구는 수평적으로 서로의 아픔을 나누고 서로 격려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심으로서 고난받는 요한교회를 격려하셨습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이기고 고난을 이깁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요한교회 성도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사랑의 뜨거운 능력만이 고난과 시련을 물리쳐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는 613개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유대교의 율법은 훈계와 명령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그 모든 계명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요한교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율법을 다 지킨 것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하면 613개의 율법은 저절로 지켜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 기쁜 것이고 사랑하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감시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요한교회는 이런 면에서 유대교의 신앙과 달랐습니다. 요한교회는 하나님과의 교제/만남/기쁨을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사랑 안에서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우리는 사랑할 능력이 없습니다. 사랑은 우리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으니 우리는 그 받은 사랑을 이웃과 나눌 수 있을 뿐입니다. 4세기의 신학자 어거스틴은 사랑하는 자(the lover), 사랑받는 자(the loved), 그리고 이 둘을 연합하는 사랑(the love)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과 이 둘을 연합하는 사랑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서 현존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이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은 세상의 고난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사도행전 10장은 베드로가 로마의 군대장교 고넬료를 만나는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와의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가 어느 민족에 속하여 있든지 다 받아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또한 고넬료의 집안 사람들이 복음을 믿고 성령을 받는 것을 목격하였고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사람들을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만남을 통해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기쁨을 주십니다. 베드로는 이방인들은 성령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고넬료와의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랑은 경계를 넘습니다. 사랑은 차별을 넘습니다. 만일 우리가 완전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면 소수의 사람만이 사랑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유대인만 사랑하신다면 유대인이 아닌 사람은 사랑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의 존재를 인정하시고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는 존재 자체가 죄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기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고 우리의 존재를 기뻐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서로 사랑하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서로에게 귀한 존재입니다. 큰 능력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귀한 존재입니다. 그대가 있으니 내가 의지할 수 있고 내가 있으니 그대가 의지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보면 기뻐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답답하고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존재 그 자체를 기뻐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의 고난을 견딜 수 있습니다. 서로 의지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과 같이 서로 사랑하며 사랑의 힘으로 지금의 고난을 극복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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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다섯번째 주일 / 5월 첫번째 주일

요한복음서 15:1-8, 사도행전 8:34-40

부활절, 포도나무와 가지

정해빈 목사

 

 

나이아가라에 있는 포도원에 가보면 포도나무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작은 나무에서 많은 열매가 열릴까 감탄스럽습니다. 포도나무 열매는 풍성한 삶을 상징합니다. 가정의 달을 맞이해서 성도님들의 가정이 포도나무 열매처럼 풍성해지시기를 기도합니다. 브루스 윌킨슨이 쓴 [포도나무의 비밀, Secrets of the Vine] 이라는 책을 보면 포도나무가 어떻게 결실을 맺는지 그 과정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데는 크게 2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가지가 땅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가지는 무게 때문에 저절로 땅 아래쪽으로 내려가게 되는데 땅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나무줄기와 멀어지고 먼지와 뒤섞이고 햇빛을 받지 못해서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농부는 땅바닥에 주저앉은 가지를 위로 올려서 울타리나 막대기에 묶어 줍니다. 요한복음 15장 2절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잘라버린다”고 번역을 했습니다. “잘라버린다”에 사용된 헬라어가 “아이로(airo)”인데 브루스 윌킨슨은 이 단어의 정확한 뜻이 “잘라버린다”가 아니라 “위로 올려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가지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가지가 아래로 내려가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곰팡이가 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농부는 가지가 땅 아래로 향하지 않도록 위로 올려 줍니다. 위로 향하지 못하고 아래로 향하는 가지의 잘못된 습관을 고쳐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지를 징계하는 것이 아니라 가지를 도와주고 고쳐주고 배려해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두번째 이유는 가지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농부는 가지가 열매를 많이 맺도록 가지와 잎을 적당하게 조절해 줍니다. 가지가 너무 많아서 영양분이 분산되지 않도록 가지치기를 해 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포도나무 가지가 열매를 많이 맺는 3가지 조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가지가 위로 뻗어서 나무줄기와 가까이 있어야 하고 햇빛을 충분히 받아야 합니다. 둘째로 너무 많은 가지 때문에 영양분이 분산되어서는 안됩니다. 셋째로 좋은 포도나무를 만나야 하고 가지를 위로 붙잡아주고 가지를 적당하게 조절해줄 수 있는 좋은 농부를 만나야 합니다. 포도나무 이야기를 인생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풍성한 열매를 맺으려면 우리의 관심사가 위로 향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야 합니다. 또한 너무 많은 일에 관심을 쏟고 근심하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너무 많은 가지가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나무에 붙어있는 단순한 가지가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의 약점을 아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의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가지는 나무를 떠나면 안되고 나무는 농부 손길을 떠나면 안됩니다. 가지가 풍성한 열매를 맺으려면 좋은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하고 좋은 농부의 손길을 만나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좋은 농부와 좋은 나무를 만나야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좋은 농부 되시는 하나님과 좋은 나무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는 풍성한 인생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어린 자녀들과 청소년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만날 때 풍성한 인생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빛으로 창조하셨고 이 세상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고백한 책입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을 대표적으로 기록한 말씀이 요한복음 2장, 10장, 15장입니다. 예수님은 포도주가 떨어진 가나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셔서 이제까지 맛보지 못한 최고의 포도주를 만들어 주심으로서 혼인잔치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포도주가 떨어진 우리 인생에 오셔야 우리의 삶에 다시 기쁨이 채워진다는 것을 이 이야기는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또한 10장 10절에서 나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선한 목자이고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양으로 하여금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풍성한 인생을 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시고 우리가 풍성한 인생을 살도록 도와주기 위해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니 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들을 통해서 요한복음이 삶을 축복하는 긍정적인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풍성한 삶을 살도록 우리를 인도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이 풍성하고 열매맺는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정통 유대교는 삶을 풍성하게 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부패하고 타락하였고 사람들을 율법으로 억압하였습니다. 요한교회가 보기에 정통 유대교는 포도주가 떨어진 혼인잔치 같았습니다. 종교는 본래 사람을 구원하고 사람에게 최고의 가르침을 주고 사람을 깨우치고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사람의 인생을 풍성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종교가 타락하면 사람에게 고통을 줍니다. 타락한 종교는 사람을 억압하고 사람을 이기적이고 폐쇄적인 사람이 되게 합니다. 반대로 참된 종교는 삶을 풍성하게 하고 사랑과 나눔, 기쁨과 감사, 정의와 평화의 열매를 맺게 해 줍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바로 이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가 종려나무와 포도나무입니다. 종려나무는 사막에서 자라고 그늘을 만들어 주기 때문에 고난을 이기는 강인한 용기를 상징합니다. 포도나무는 크기는 작지만 열매가 많기 때문에 풍성한 삶을 상징합니다. 포도나무만큼 열매를 많이 맺는 나무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선한 농부이시고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입니다. 선한 농부의 도움을 받고 참 포도나무에서 나오는 영양분을 받은 가지는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즉 우리가 풍성한 열매를 맺으려면 선한 농부를 만나야 하고 참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개인주의가 아니라 함께 있음이 우리에게 풍성한 인생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서양 속담에 “포도는 다른 포도와 함께 있을 때 색깔이 변한다”(a grape changes colour when it sees another grape)는 말이 있습니다. 혼자서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성부/성자/성령의 사귐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포도나무 가지에 같이 붙어 있어야 합니다.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있고 성도와 함께 있는 신앙이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한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좋은 나무에 붙어 있어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좋은 나무, 풍성한 포도나무입니다. 열매를 보면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죄와 죽음과 탐욕의 열매를 맺는 것은 그 사람이 죄와 죽음과 탐욕의 나무에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참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사람은 부활/영생/기쁨/풍성함/사귐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사도행전 8장은 초대교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빌립이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한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빌립은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받았을 때 사마리아로 가서 그곳에서 최초로 복음을 전했고 이어서 성령의 지시를 받고 광야로 내려가서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성경을 설명해 주고 세례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정통 유대교의 입장에서 보면 사마리아 사람이나 에티오피아 사람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피가 섞였기 때문에, 에티오피아 사람은 외국인이었고 내시였기 때문에 포도나무 가지가 될 수 없었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빌립은 그들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예수를 전했습니다. 빌립을 통해서 사마리아 사람들과 에티오피아 내시가 참 포도나무 가지가 되었습니다. 빌립을 통해서 풍성한 부활생명의 은혜가 그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명이 참 포도나무에 붙어있기를 원하십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풍성한 결실을 맺기를 원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풍성한 인생을 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시고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서 모든 가정과 자녀들에게 포도나무 열매와 같은 풍성함의 축복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생명나무/포도나무에서 흘러나오는 은혜를 받아서 예수님이 주시는 부활/영생/기쁨/풍성함/사귐의 열매를 맺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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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네번째 주일 / 4월 네번째 주일

시편 23:1-6, 요한복음서 10:11-18

부활절, 선한 목자

정해빈 목사

 

40년 이상 이집트, 레바논, 예루살렘 등에서 실제로 거주하며 중동지방의 삶과 문화를 연구한 케네스 베일리는 [선한 목자, The Good Shepherd] 라는 책에서 중동지방에서의 목자와 양의 관계를 깊이 연구했습니다. 중동지방에서 양은 귀한 재산이었습니다. 털은 옷으로 사용되었고 고기는 식량과 제사로 사용되었고 배설물은 연료로 사용되었기에 버릴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양은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한 동물이었습니다. 겁은 많고 앞은 잘 안보이고 대신 청력은 발달했기 때문에 조그만 소리에도 놀라서 도망가거나 아니면 그 자리에서 부들부들 떨며 움직이지 않습니다. 양은 길을 잃어버리면 덤불 속이나 바위 밑에 숨어서 살려달라는 소리를 냅니다. 또 양은 아무리 얕은 물가라 하더라도 흐르는 물을 두려워해서 빠르게 흐르는 물을 마시지 않습니다. 개들은 훈련을 시키면 앉거나 눕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양은 불안하면 누워 있지 않습니다. 배가 부르거나 갈증이 해결되거나 우리 안에 안전하게 있을 때만 자리에 누워 있습니다. 이렇게 양은 겁이 많고 아무런 방어수단이 없습니다. 걸음이 빠르지도 않고 염소처럼 뿔도 크지 않기 때문에 다른 맹수의 먹이감이 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목자가 항상 양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양은 청력이 발달했기 때문에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라갑니다. 하루 일과를 마친 목자들은 돌담으로 둘러쌓인 큰 공동 담장에 양들을 집어넣고 문 앞에서 양을 지킵니다. 다음날 목자들이 나타나 양을 부르면 양들은 자신들의 목자의 음성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목자를 따라갑니다. 목자는 한 손에는 막대기를 들고 또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양을 보호하고 인도합니다. 막대기는 짧고 단단하고 지팡이는 길고 끝이 갈고리처럼 굽어 있습니다. 막대기는 맹수를 막는 무기로 사용하고 긴 지팡이는 양들을 안내하거나 구조하는데 사용합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시편 23편은 선한 목자되시는 하나님을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아버지처럼 강하게 막대기와 지팡이로 맹수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시고 때로는 어머니처럼 부드럽게 나를 잔잔한 시냇가로 인도하시고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고 나를 위해 풍성한 식탁을 차려 주십니다. 주님은 나를 해치는 원수에게는 강하게 대하시고 나에게는 부드럽게 대하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존중하시고 나를 인격적으로 대하시는 것은 주님이 선한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시인은 주님께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새번역 성경은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신다”고 번역했습니다. 주님은 지치고 탈진한 우리의 영혼을 다시 일으켜 주십니다. 선한 목자는 양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지쳐있는 양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칩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작년부터 계속되고 있는 코로나19로 인해 “돌봄 탈진”(caregiver burnout)을 경험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집 안에만 있어야 하는 어린 자녀들을 돌봐야 하는 학부모들과 연약한 가족/부모님을 돌봐야 하는 식구들과 요양원/병원에서 장기간 환자들을 돌봐야 하는 의료 종사자들은 돌봄이 계속됨에 따라 탈진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몸과 마음이 지치지 않고 다시 새 힘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편 시인은 주님께서 모든 고난과 시련을 막아준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기적을 일으켜 주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시인은 우리가 지치지 않도록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우리를 회복시켜 주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언제나 선하시고 인자하신 주님,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요한복음 10장에서 “나는 선한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품삯을 받는 목자는 자기 양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양들의 안전을 우선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양들을 위험하게 만들기도 하고 양들의 이름을 제대로 알지도 못합니다. 삯꾼 목자는 양들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양을 보호하지 않으면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대제사장 같은 사람들이 삯군 목자였습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양을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칩니다. 뿐만 아니라 선한 목자는 아직 울타리에 들어오지 않은 다른 양들을 기억합니다. 요한복음이 쓰여질 당시 “우리 안에 들어오지 않는 양들”은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방인들을 가리켰습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말한다면 “우리 안에 들어오지 않은 양들”은 공동체에 포함되지 않는 분들, 사랑과 돌봄이 필요한 분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선한 목자되신 주님은 주님을 목자로 고백하는 우리들 뿐만 아니라 아직 공동체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 공동체와 떨어져서 홀로 외롭게 사는 이들을 기억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또한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이 내가 양들을 알고 양들이 나를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과 성령님 사이에 삼위일체(三位一體), 일심동체(一心同體) 친밀한 관계가 맺어진 것처럼, 주님과 양들 사이에도 완전하고 친밀한 관계가 맺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목자이고 우리가 양이라고 말하면 사람이 만물의 영장인데 왜 사람이 양이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고 과학기술을 발전시킬만큼 똑똑하고 지혜롭습니다. 인류가 맹수들과 싸워서 살아남은 것도 인류가 힘은 약하지만 지혜롭고 협동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똑똑하고 지혜롭지 못합니다. 양이 시력이 좋지 않은 것처럼, 사람도 영적인 시력이 좋지 않아서 미래를 알지 못하고 잘못된 길을 걸어가기도 합니다. 사람이 한편으로는 만물의 영장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인지를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2세기와 3세기 로마제국의 박해를 피해서 지하 무덤 속으로 숨었습니다. 그들이 생활했던 지하 묘지를 카타콤이라고 부릅니다. 로마제국의 수도 로마에서 만들어졌고 지금도 남아있는 [산칼리스토 카타콤](Catacombe di San Callisto)에 가보면 젊은 선한 목자가 길 잃은 양을 찾아서 어깨에 메고 나오는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목자는 왼손으로 양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우유통을 들고 있습니다. 이 우유통은 어린 양에게 먹일 양식입니다. 또다른 카타콤에 있는 그림을 보면 선한 목자 주변에 동물들이 모여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예수님을 선한 목자로 고백했습니다. 선한 목자가 기독교 신앙을 가장 잘 표현한다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 신앙을 대표하는 상징은 바뀌었습니다. 하늘의 심판자, 최후의 심판자, 질투하는 하나님, 진멸하는 하나님, 천군천사를 거느린 군주, 십자군 대장,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어린양 등의 상징이 선한 목자를 대체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는 하나님을 가부장적이고 무섭고 심판하는 분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시편 23편과 요한복음 10장은 우리가 고백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잃어버린 양을 되찾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시는 선한 목자이심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한 목자 되시는 주님께서는 지금도 부활하셔서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요즘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 가장 많은 수의 확진자가 발생하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지금 힘들어하고 지쳐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의 고난을 견딜 수 있습니다. 단 한순간도 양들을 잊지 않으시고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주님, 짧은 막대기와 긴 지팡이로 양들을 보호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지금의 고난을 견디고 마음의 평안을 얻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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