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네번째 주일 / 3월 두번째 주일

민수기 21:4-9, 요한복음 3:14-21

사순절, 광야에서 만난 불뱀

정해빈 목사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민수기 21장은 히브리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뱀을 만나 죽게 되었다가 장대에 달린 구리뱀을 보고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은 약속의 땅 입구에 일찍 도착해지만 정탐꾼들의 과장된 보고를 받은 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결국 발걸음을 돌려 광야로 되돌아갔습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가나안 땅 입구에 도착했지만 이번에는 에돔 민족이 그들의 발걸음을 가로막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다시 광야로 내려갔다가 동쪽으로 우회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길이 막히고 또다시 광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히브리 백성들은 길을 걷는 동안에 마음이 조급해졌고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습니까? 이 광야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합니까? 먹을 것도 없습니다. 마실 것도 없습니다. 이 보잘것없는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납니다." 백성들이 이렇게 불평하자 불뱀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물어서 많은 백성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민수기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불뱀을 보내셨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불뱀은 광야에서 서식하는 코브라 뱀을 가리킵니다. 코브라 뱀에 물리면 불에 타는 것처럼 고통스럽다고 해서 이름이 불뱀이 되었습니다. 또한 코브라 뱀은 애굽 제국의 수호신을 가리킵니다. 이집트 제국의 파라오(바로) 왕관을 보면 머리에 코브라 뱀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뱀은 한꺼번에 많은 알을 낳고 허물을 벗고 또아리를 틀고 자기 꼬리를 물기 때문에 생식력/창조력/치유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집트 제국은 자신들의 제국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코브라 뱀을 신으로 숭배했습니다. 뱀은 고대 그리스 신화에도 등장합니다. 의학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는 뱀 한마리가 휘감고 있는 지팡이를 들고 다녔고 이 지팡이가 오늘날 의학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뱀이 의학의 상징이 된 것은 독으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고 의학의 도움을 받으면 죽음의 허물을 벗고 다시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이 불뱀에 물렸다는 이야기는 그들이 실제로 광야에서 코브라 뱀에 물렸다는 이야기길 수도 있고, 뱀의 혀가 갈라진 것처럼 히브리 백성들이 분열하면서 서로 원망했다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고, 그들이 과거의 애굽 제국을 그리워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 백성들 중에는 거대하고 화려했던 애굽 제국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비록 그곳에서 노예로 살고 있었지만 먹을 것이 있었고 화려한 신전과 거대한 건축물이 있었습니다. 배고픈 자유보다 배부른 노예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집트 제국은 피라미드 사회였습니다. 맨 꼭대기에 있는 파라오 왕이 세상을 다스렸고 귀족-군인-평민-노예 순으로 인구가 많았습니다. 그 사회는 불평등한 사회였고 억압사회였고 계급사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가장 밑바닥 노예로 고통받았던 당신의 백성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주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과거로 돌아가려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서로 원망하고 과거로 돌아가려는 그들의 마음상태를 가리켜서 그들이 불뱀에 물렸다고 표현했습니다. 영적으로 불뱀에 물리면 서로 원망하고 과거의 애굽 제국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생명과 평화, 사랑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향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신앙입니다. 과거로 되돌아가는 신앙은 기독교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과거 사회는 계급 사회였고 불평등한 사회였고 폭력 사회였고 가부장적인 사회였습니다. 과거 사회에는 노예가 있었고 여성들은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했습니다. 소수의 권력자들이 폭력으로 다수의 사람들을 지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세상에서 억압받던 당신의 백성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요즘 미얀마에서는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에 의해서 국민들이 살해당하고 있습니다. 군인들은 이번에 세번째로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대부분의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오랫동안의 유럽 식민지와 해방, 군부 세력의 지배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얀마도 오랫동안의 군부 세력의 지배를 받다가 2015년 아웅산 수치 여사를 통해서 민주정부가 들어섰지만 이번에 다시 군부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민주주의 사회를 싫어하는 구세력들은 자신들이 지배했던 과거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기회만 있으면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치/경제/언론을 통제하고 국민들을 억압하고 있습니다. 어두웠던 과거로 돌아가려는 사람들,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 제국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 자유를 말살하는 사람들, 신체적/경제적/문화적 약자들과 소수자들을 괴롭히고 조롱하는 사람들이 오늘날의 불뱀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불뱀은 사람들을 물어서 사람들을 죽게 만듭니다. 불뱀이 제국이고 제국이 불뱀입니다. 히브리 백성들이 불뱀에 물렸다는 말은 그들이 과거의 애굽 제국을 그리워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광야의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과거로 돌아가려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광야의 고난이 힘들다고 하더라도 과거로 돌아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히브리 백성들을 보시고 심히 진노하셨습니다. 모세는 불뱀에 물린 백성들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중보기도하였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은 모세가 장대 위에 높이 달린 구리뱀을 보고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요한복음 3장을 보면 예수님이 당신의 사명을 말씀하신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장대 위에 구리뱀을 매단 것처럼, 오늘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하늘 높이 바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해서 희생된 미얀마 사람들, 인종차별철폐운동을 벌이다가 인종주의자의 총에 맞아 죽은 마틴루터킹 목사님,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벌이다 희생된 사람들, 생명과 평화와 정의와 사랑을 위해 희생된 순교자들이 인류를 살리기 위해 장대위에 높이 매달린 구리뱀 같은 사람들입니다. 불뱀에 물린 사람들이 장대 위에 높이 달린 구리뱀을 보고 살아난 것처럼, 정의를 위해 희생된 사람들을 통해서 인류는 과거로 퇴보하지 않고 미래를 향해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뜨겁게 사랑하셔서 자신의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불뱀에 물려서 서로 원망하고 서로 지배하고 서로 악을 행하려고 하는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통해서 바뀌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순간,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불뱀과 구리뱀 이야기는 땅/과거를 쳐다보지 말고 하늘을 쳐다보아야 광야의 고난을 극복할 수 있고, 죄와 악의 권세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을 가리켜 줍니다. 불뱀과 구리뱀 이야기는 어두었던 과거를 그리워하지도 말고 어두웠던 과거의 악습으로 되돌아가지도 말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의 땅을 향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자유의 땅을 향해서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불뱀에 물리면 서로 악을 행하고 과거를 그리워하면서 약속의 땅에 도착하지도 못한채 중간에서 다 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눈을 들어 우리를 향해 모든 것을 희생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마음과 생각이 바뀌게 되고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신 그리스도를 따라가게 됩니다. 광야는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과거에서는 떠났지만 아직 약속의 땅에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광야가 힘들다고 해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가 혼란스럽다고 해서 과거의 독재 국가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뜨거운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신 주님, 불뱀에 물린 우리를 살리기 위해 하늘 높이 십자가 위에 매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과거로 돌아가지 않고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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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세번째 주일 / 3월 첫번째 주일

시편 19:7-14, 요한복음 2:13-22

사순절, 주님의 교훈은 완전하여서

정해빈 목사

 

 

호주연합교회 어느 목사님이 만드신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십계명] 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모세 시대에 십계명이 있었듯이 21세기에는 21세기에 맞는 십계명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1) 선하신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그분의 선을 따라가면 당신은 너그럽고 협력하고 품위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2) 이웃과 하모니를 이루는 행복한 삶을 사십시오. (3)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생명들에게 꼭 필요한 지구의 자원을 돌보십시오. (4) 동물과 새와 육지와 강과 바다의 생물들을 친절하게 돌보십시오. (5) 사람이 태어나서 상처와 승리를 거쳐 인생의 마지막이 될 때까지, 사람이 잠재력을 개발하고 가능한 한 완전한 인간이 되도록 서로 보완하고 도와주십시오. (6) 인류의 공동선에 참여하고 이 세상의 미래를 위해 당신의 재능/물질을 사용하십시오. (7) 인간의 존엄성과 희망과 성실성을 장려하고 유지하는 방법을 연구하십시오. 모든 인간이 자신의 존엄성, 희망, 성실성을 유지하며 세상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으십시오. (8)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롭게 펼쳐지는 삶의 신비와 경이로움을 환영하고 가까이 하십시오. (9) 인생의 성공과 목표에만 삶을 집중하지 말고 영성의 깊은 세계와 인류의 관심사를 위해서 공부하십시오. 미래에 생존할 수 있는 새로운 지식과 신앙에 참여하십시오. (10) 삶에 힘을 주고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께 예배드리십시오. 선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아름다우신 성령과 하나 되십시오.

 

이상 10가지의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십계명]을 보면 옛날 십계명에는 없었던 환경에 대한 계명을 비롯해서 우리의 삶을 아름답고 풍성하게 만드는 좋은 계명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들도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새로운 십계명]을 만든다면 “숲을 파괴하지 마십시오.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마십시오. 후손들에게 쓰레기를 남기지 마십시오. 민주주의를 실천하십시오. 폭력과 차별과 혐오를 멀리하고 다문화와 다양성을 존중하십시오” 같은 계명들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사순절 기간에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계명 한가지를 꼽으라면 “탄소금식”이 될 것입니다. 지구의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서 탄소소비를 줄이는 것입니다. 플라스틱 사용하지 않기, 1회용품 사용하지 않기, 장바구니 사용하기, 개인컵 사용하기, 소비 줄이기 같은 “탄소금식” 계명이 필요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히브리 백성들에게 주신 십계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했기 때문에 애굽의 종교와 문화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때로는 우상을 숭배하기도 했고 때로는 무질서한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악을 미워하면서 악을 본받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제국의 억압을 받으면서 살다보면 나도 모르게 제국의 폭력적인 문화를 따라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국의 억압에서 그들을 구원해 주셨고 그들이 과거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 민족이 되고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해서는 거룩한 예배와 거룩한 생활이 필요했습니다. 십계명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람을 억압하는 제국과 제국의 종교를 따라가지 말고, 생명과 자유와 해방의 하나님만을 섬기고, 가정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었습니다.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할 때 나의 거룩한 민족이 될 수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거대한 동상을 만들지 말고, 안식일에는 모든 피조물이 쉬게 하고, 부모를 공경하고, 거짓말하지 말고, 이웃의 것을 탐하지 말고 가난한 사람들을 학대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계명을 3가지 단어로 요약한다면 “거룩, 공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9편은 “주님의 교훈은 완전하여서 사람에게 생기를 북돋우어 주고 주님의 증거는 참되어서 어리석은 자를 깨우쳐 주고 주님의 교훈은 정직하여서 마음에 기쁨을 안겨 주고 주님의 계명은 순수하여서 사람의 눈을 밝혀준다”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의 교훈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기쁨과 지혜를 주고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 줍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읽을 때, 율법/십계명을 반드시 지켜야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정받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율법/십계명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감사요 응답입니다. 계명을 지켜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애굽의 억압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거룩한 제사장 민족으로 불러 주셨기 때문에 히브리 백성들은 이에 대한 감사로서 계명을 지켰습니다. 계명을 지켜야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복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구원받기 위해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구원 안에 머물기 위해서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교훈을 지키는 것은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기 때문이 아니라 시편 19편 시인이 고백한 것처럼, 주님의 교훈이 우리에게 생기를 북돋우어 주고 어리석은 자를 깨우쳐 주고 마음에 기쁨을 주고 사람의 눈을 밝혀주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눈을 밝혀주고 세상의 고난을 헤쳐나갈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줍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요한복음 2장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셔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을 쫓으시면서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왕이 건축을 시작한 이후 완공하기까지 80년이 걸린 거대한 건물이었습니다. 성전의 크기는 축구장 20배에 달했고 건물과 지붕은 금과 은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로마 사람들이 구경하러 올 정도로 지중해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건축물이었고 성전의 한쪽 끝에는 로마의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타락한 로마제국과 타락한 유대교가 만나서 지어진 곳이었고 권력과 재물이 쌓이는 곳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순례객들에게 동전을 환전하고 동물을 독점 판매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취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성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성전이 더 이상 필요없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성전이라는 말은 유대인만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들어갈 수 있어야 하고 제사가 아니라 기도하는 곳이 성전이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기도는 어느 곳에서나 할 수 있습니다. 두세 사람이 기도하는 곳에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곳이 어느 곳이든지 기도하는 곳이 성전이 됩니다. 성전에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곳이 성전이 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고 동물을 잡아서 드리는 제사를 주님은 허무셨습니다. 헤롯은 로마제국에 잘 보이기 위해 백성들의 피와 땀을 짜서 거대한 성전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고 말씀하셨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살아있는 성전을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은 완공된 지 3년 후인 주후 69년 로마제국에 의해서 파괴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참된 기독교 신앙은 건물이나 권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말씀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집트제국도 무너졌고 로마제국도 무너졌고 예루살렘 성전도 무너졌습니다. 국민들을 억압하는 부패한 권력자들과 독재자들은 때가되면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오직 살아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의 말씀을 통해서 사람에게 생기를 북돋우어 주셨고 어리석은 자를 깨우쳐 주셨고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교훈은 사람을 억압하지 않고 사람을 살립니다. 거대한 동상도 필요 없고 거대한 성전도 필요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생명의 말씀뿐입니다. 시편 19편의 고백처럼 주님의 교훈은 완전하여서 사람에게 생기를 북돋우어 주고 어리석은 자를 깨우쳐 주고 마음에 기쁨을 안겨주고 사람의 눈을 밝혀줍니다. 말씀은 절망에 빠진 사람을 다시 일으켜 줍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고통받고 특히 약자들이 고통받는 이 시대에 생명의 말씀으로 서로가 서로를 일으켜주고 서로가 서로를 축복하고 권면하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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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두번째 주일 / 2월 네번째 주일

창세기 17:1-7, 마가복음 8:31-38

사순절, 언약을 지키는 신실한 사람들

정해빈 목사

 

 

지난 2월 달에 있었던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서 22세의 흑인 대학생이 5분 동안 낭독한 축시가 큰 화제를 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 하버드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있는 이 대학생은 취임식 몇 주 전에 트럼프 지지자들이 총기를 휴대하고 의회 의사당 안에 들어와서 행패를 부리는 것을 보고서 이 시를 작성했습니다. “민주주의는 때로는 지체되지만 영구히 패배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 나라를 공유하기 보다는 망가뜨리려는 세력들을 보았다. 그들 때문에 민주주의가 거의 무너질뻔 하였다. 우리가 고통스럽게 목격했던 이 나라는 부서지지 않았고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새로운 여명은 우리가 그것을 펼쳐놓을 때 피어날 것이다. 빛은 언제나 있지만 우리가 용감할 때 볼 수 있고 용감해야 우리는 빛이 된다.” 그의 연설은 미국 사회가 250년 동안 지켜왔던 민주주의 전통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미국은 민주주의, 자유, 인권, 노예해방의 전통 위에서 세워졌습니다. 그것은 전통이면서 서로에 대한 약속/계약이기도 합니다. 처음 나라를 세웠을 때의 전통/약속/계약을 지키고 더 발전시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는 시를 통해서 잘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다른 사람들과 계약을 맺기도 하고 비즈니스 거래를 하기도 하고 동업을 하기도 하고 결혼서약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약속을 쉽게 깨트리고 있습니다. 유럽에서 여행사 가이드를 하는 한인 유학생이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단체여행을 오는 한국 여행객들 중에서 여행일정을 따르지 않고 즉흥적으로 일정을 바꾸어 달라며 고집을 피우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여행일정 약속을 따르지 않으면 현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고 말해도 막무가내로 일정을 바꾸라고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또는 반대로 여행사가 더 많은 이윤을 뽑아내기 위해서 가이드에게 일정에 없는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약속은 상대방과의 계약인데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서로를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사회가 되고 말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피조물과 언약(covenant)을 맺으시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말로 약속한다는 의미에서는 언약(言約)이라고 부르고 서로의 의무를 약속한다는 의미에서는 계약(契約)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피조물과 언약을 맺으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혼자 일하는 분이 아니라 피조물과 함께 일하시고 피조물을 인격적으로 대하시고 피조물을 하나님의 동역자로 부르셨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시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식물/동물과 언약을 맺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사람을 지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사람에게만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특별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다스리라”는 말은 세상을 지배하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해서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처럼 세상을 아름답게 관리하고 섬기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첫사람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지 못했고 불순종했고 세상을 아름답게 다스리지 못했고 에덴동산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첫사람의 후손들은 땅에 퍼졌고 악을 행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시고 물로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창세기 9장을 보면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노아와 두번째 언약을 맺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두번째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두번째 언약도 무효가 되었습니다. 노아의 후손들은 바벨탑을 쌓고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결국 언약은 무효가 되었고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언약은 한쪽이 지키지 않으면 무효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언제나 신실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신실하지 못했고 신실하지 못한 사람으로 인해 언약은 계속 파기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계속해서 파기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동역자를 찾으셨고 하나님께서 찾으신 세번째 사람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첫번째 언약은 첫사람이 깨트렸고 두번째 언약은 노아의 후손들이 깨트렸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언약을 깨트리지 않았고 언약 앞에서 신실하였습니다. 이러한 신실함이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고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대단한 업적이나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신뢰하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12장과 17장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내용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해야 할 사명은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에게 복을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에게 순종하며 흠 없이 살면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언약을 통해서 아브람은 아브라함이 되었고 사래는 사라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여러 민족의 아버지/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 언약을 통해서 신실함의 대표가 되었고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었고 인류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새로운 인류가 시작되었고 모든 생명이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해지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순종을 통해서 세상의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순종을 통해서 모든 인류가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나쁜 사람들을 없앤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사라와 같은 사람들의 순종과 신실함을 통해서 세상이 바뀌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처럼 나쁜 사람들을 죽인다고 해서 세상의 악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나쁜 사람이 없어져서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신실함을 통해서 세상은 바뀌게 될 것입니다. 언약을 지키는 신실한 사람들의 작은 실천을 통해서 세상이 바뀌게 된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마가복음 8장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고난을 예고하시는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예수께서 고난을 예고하시자 베드로는 항의하였고 예수님은 그를 꾸짖으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고난을 반대하였고 다른 길을 제안하였습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언약을 지키는 신실함이 아니라 세상의 이익과 영광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제안을 거절하셨고 마지막까지 하나님께 신실하셨습니다. 마지막까지 정의와 고난과 섬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진실로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런 신실한 십자가의 삶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부활의 첫열매, 우리의 구세주가 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신실하신 십자가의 삶을 통해서 세상의 악을 폭로하셨고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온 세상에 알리셨습니다. 신실하신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에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온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일상생활의 언약/계약이 쉽게 파괴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언약을 잘 지키고 세상을 아름답고 조화롭게 다스렸더라면 자연이 파괴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언약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서로 불신하고 의심하는 이 시대에 아브라함처럼 복의 근원이 되어 세상을 축복하고, 그리스도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신실함의 십자가 길을 걸어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 가정에서 맺은 언약, 이웃과 자연과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지킴으로서 세상에게 복을 베풀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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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여섯번째 주일 / 2월 두번째 주일
열왕기하 2:8-12, 마가복음서 9:2-9

주현절, 하늘의 빛과 땅의 고난

정해빈 목사

 

 

오늘은 2021년 주현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주현절(主顯節, Epiphany, 주님이 나타난 날)은 글자 그대로 주님의 빛이 이 땅에 나타난 날을 가리킵니다. 주님의 빛이 이 땅에 나타났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으로 밝은 빛 속에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자연적인 햇빛도 필요하고 영적인 햇빛도 필요합니다. 빛이 없는 캄캄한 엘리베이터 같은 곳에 갇혀있다고 생각하면 생각 만해도 끔찍합니다. 빛이 있어야 어둠과 병균이 물러가고 빛이 있어야 열이 나옵니다. 빛이 없으면 우리는 단 하루도 살 수가 없습니다. 어느 종교에나 빛을 기념하는 절기가 있습니다. 유대교는 12월에 하누카(Hannjkkah), 힌두교는 10월에 디왈리(Diwali) 빛의 축제를 기념합니다. 세계 기독교를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로 나눌 수 있는데 서방교회(Western Church)는 카톨릭과 개신교를 포함하여 주로 서쪽 지역에 퍼져있고 동방교회(Eastern Church)는 그리스/러시아/동유럽에 퍼져 있습니다. 서방교회는 아기 예수님이 동방박사들을 만나면서부터 예수님의 빛이 세상에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주장하고 동방교회는 예수님이 성인이 되어 세례를 받으면서부터 예수님의 빛이 세상에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대략 1월 6일부터 2월까지 주현절이 계속되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 동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빛을 주기 원하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땅이 혼돈하고 흑암이 가득할 때 “빛이 있어라” 말씀으로써 세상을 밝게 창조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때가 되었을 때 예수께서는 어둠의 땅 갈릴리에 오셔서 빛을 비추시고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고 가난한 자를 먹이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악한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주님께서 빛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이 세상이 어둡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으면서도 절망하지 않는 것은 주님께서 구원의 빛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주현절을 마감하며 저 하늘의 밝고 따뜻한 햇살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시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밝은 빛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마가복음 9장을 보면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을 때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가복음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1장부터 8장까지는 예수님의 공생애가 기록되어 있고 9장부터 16장까지는 예수님의 고난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가복음 9장부터 예수님의 고난이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마무리하신 후에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얼굴이 해 같이 빛나는 체험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가리킵니다. 앞으로 고난의 길을 걸어가실 예수님에게는 하늘의 영광과 축복과 격려가 필요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보여주신 신실하신 삶,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신실하신 삶을 인정하고 축복하는 의미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빛나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예언자를 대표하는 엘리야를 만나셨습니다. 모세가 예수님에게 나타났다는 이야기는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을 가리키고 마찬가지로 예언자를 대표하는 엘리야가 예수님에게 나타났다는 것은 예수님이 예언자의 완성이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높은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셨을 뿐만 아니라 믿음의 조상들을 또한 만나셨습니다. 누구든지 인생의 무거운 짐을 혼자서 지고 갈 수 없습니다. 하늘의 격려가 필요하고 믿음의 조상들의 격려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고난의 길을 걸어가실 예수님을 축복해 주셨고 과거에 이미 고난을 받았고 구약을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도 역시 예수님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축복과 조상들의 축복을 받으시고 영적인 힘을 얻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장면을 보고 너무 황홀해서 산 정상에 초막을 짓자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의 이 말은 산 위의 영광/번영/축복만을 원하는 우리들의 나약하고 이기적인 신앙을 가리킵니다. 산 위의 영광이 아무리 좋아도 산 위에서 계속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산 위에서 산 아래로 내려와야 합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자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하늘의 영광은 땅의 고난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높은 산에서 하늘의 능력을 받으시고 하산하셔서 고난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개인의 영광으로 누려서는 안 되고 땅에서 고난받는 이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는 장면은 마치 우리가 코로나19로 인해 고통받고 있을 때, 일제 강점기 때 고난 받았던 조상들과 해방과 전쟁을 겪었던 조상들이 우리에게 나타나 우리를 격려하는 장면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보다 더 큰 고난을 받았던 우리의 조상들이 꿈에 나타나서 지금의 고난을 잘 견디라고 격려한다면 우리는 큰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얼굴이 해 같이 빛나는 체험과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는 체험을 통해서 고난을 견딜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열왕기하 2장은 엘리야가 하늘로 승천할 때 제자 엘리사가 스승의 능력을 계승하는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엘리사는 하늘로 떠나는 스승을 붙잡고 세상의 고난을 이길 수 있는 갑절의 능력을 달라고 매달렸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살았던 북이스라엘은 아합 왕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바알종교를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스승이 하늘로 올라간다고 하니 홀로 남은 엘리사에게는 두려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독재자와 우상과 싸울 수 있는 갑절의 능력을 물려달라고 스승에게 요구하였습니다. 구약성경을 자세히 보면 모세와 엘리야 사이에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원전 1,200년대 모세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바로 왕과 대결하며 히브리 백성들을 노예에서 해방시켰고,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만들었고, 요단강 근처에서 생을 마감하였고, 지금까지 그의 무덤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기원전 800년대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북이스라엘의 독재자 아합과 대결하였고, 엘리사를 후계자로 만들었고, 요단강에서 생을 마감하였고, 무덤없이 하늘로 승천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독재자/우상과 대결하였고, 기적을 일으켰고, 야훼 하나님의 뜻을 히브리 백성들에게 가르쳤고, 자신의 뜻을 이어갈 후계자를 키웠고, 무덤이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모세/엘리야처럼 악과 대결하셨고, 기적을 일으키셨고, 높은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셨고, 제자들을 가르치셨고, 무덤이 없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은 고난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산 위에서 얼굴이 해 같이 빛나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산 아래 어둠 속에서 고난받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에게 하늘의 빛을 비추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산 위에서 영광만 받으려고 하는 이기적이고 기복적인 신앙 때문에 기독교가 신뢰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 아래로 내려가시는데 기독교는 자꾸 영광만 받으려고 하고 자꾸 높아지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빛을 산 아래로 가지고 내려가서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현절을 마무리하며 하늘의 빛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날씨가 추운 겨울철을 지내면서 밝은 햇살이 얼마나 고마운지를 우리는 매일 실감하고 있습니다. 밝은 햇살을 쬐면 어두운 생각이 물러가고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고 밝아집니다. 예수님은 높은 산에서 얼굴이 해같이 빛나는 영광을 받으셨기 때문에 산 아래의 고난을 견디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의 빛/영광/은혜/사랑을 받은 사람은 땅의 고난을 견딜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의 빛을 받으면 고난을 견딜 수 있습니다. 하늘의 빛을 받으면 어둠이 물러갑니다. 이 땅의 고난이 깊으면 깊을수록 좌절하지 말고 하늘의 빛을 받아서 그 빛의 능력으로 고난을 극복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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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다섯번째 주일 / 2월 첫번째 주일
마가복음서 1:29-39, 고린도전서 9:16-23

주현절, 열병에서 일어나 이웃을 섬기다 

정해빈 목사

 

 

사람의 정상적인 신체온도는 36.5℃ 입니다. 사람은 에너지의 75% 이상을 체온유지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코로나를 예방하기 위해 교회당 입구에서 체온을 재보면 건강한 사람들의 체온이 똑같이 36.5℃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의 신체가 정교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체온이 36.5도 인 것은 그 온도에 다다랐을 때 몸 안의 효소 활동이 가장 활발하기 때문입니다. 체온이 1도가 떨어지면 면역력이 30% 감소하고 1도가 높아지면 면역력이 5배 증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체온이 떨어지면 몸 안의 장기와 근육이 딱딱해지고 혈액순환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건강한 삶을 살려면 체온이 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아프면 체온이 저절로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몸 안에 들어온 바이러스와 싸우기 위해서 몸이 체온을 높여서 백혈구들을 불러 모으기 때문입니다. 몸이 아플 때 적당히 열이 올라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고열이 나는 것은 좋지 못합니다. 고열이 나는 것은 몸 안에 있는 바이러스가 너무 많아서 바이러스에 의해 몸이 공격당했다는 것을 알리는 표시입니다. 코로나에 감염될 경우 무증상으로 감염되는 사람도 있지만 대체로 40도 가까이 체온이 높아지고 피로, 마른기침, 미각과 후각 기능이 떨어지게 됩니다. 이때는 빨리 고열을 낮추어 합니다. 사람은 육체적인 질병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충격과 스트레스를 겪을 때 몸에서 열이 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일이 생기면 열불이 난다고 표현을 합니다. 세계정신의학사전에 화병(Hwa-Byung)이 등록되었다는 뉴스를 본적이 있습니다. 경쟁사회가 주는 스트레스, 정치/경제/사회의 불안, 가족/직장에서의 갈등, 재난이나 정신적인 충격 등이 화병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또한 코로나로 인한 격리생활이 길어지면서 육체적/경제적/정신적 스트레스가 깊어지고 있습니다. 격리생활이 길어지면 화가 쌓이거나 반대로 우울증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인데 사회적인 활동을 할 수가 없으니 분노/화가 쌓이기도 하고 반대로 무기력/우울증이 쌓이기도 합니다. 육체적인 병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열병/우울증을 잘 다스리는 것이 우리들 모두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마가복음서 1장을 보면 예수께서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후에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셔서 시몬의 장모를 일으키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공생애 장소가 회당에서 가정집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께서는 처음에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하지만 회당에서는 예수님을 적대시하는 서기관들/율법학자들 때문에 제대로 활동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회당을 나오셔서 동네와 가정집을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는 시몬의 장모가 왜 열병에 걸려 누워있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사람은 누워있을 때 큰 고통을 받습니다. 육체의 고통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가사일을 하지 못하고 누워있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열악한 사회환경, 영양부족, 위생, 풍토병 때문에 열병을 앓았을 수도 있고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에 열병을 앓았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셨고 그의 손을 잡아 그를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이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쳤다는 소식이 퍼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고침받기 위해 시몬의 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시몬의 집이 사람들의 모임 장소/초대교회가 되었고 열병에서 고침받은 시몬의 장모는 일어나서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일으켰다”는 헬라어는 부활(Egeiro, 에게이로)을 가리키고 “시중들었다”는 헬라어는 섬김(diakoneo, 디아코네오)을 가리킵니다. “일어남과 시중” 이 두가지 단어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무덤에서 일어나셨을 뿐만 아니라 누워있는 사람을 일으키셨고 사람을 섬기기 위해 오셨습니다. 부활에는 미래의 부활도 있지만 현재의 부활도 있습니다. 죽은 사람이 일어나는 것도 부활이지만 지금 누워있는 사람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일상을 회복하고 이웃을 대접하는 삶으로 바뀌게 된 것도 부활입니다. 시몬의 장모가 예수님이 하셨던 사역을 똑같이 재현하였습니다. 마가복음 15장 41절에 의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실 때 열두 제자들은 다 도망갔지만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섬기던 여자들만이 끝까지 곁에 있었습니다. 시몬의 장모도 그들 중 한 명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교회의 맨처음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일어나는 곳이고 섬기는 곳입니다. 열병/화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일어나서 이웃을 섬기는 곳이 교회입니다.

 

예수께서는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셨을 뿐만 아니라 밤이 될 때까지 소문을 듣고 온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음날 이른 새벽에 외딴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찾았을 때, 주님은 “가까운 여러 고을로 가자. 거기에서도 내가 말씀을 선포해야 하겠다. 내가 이 일을 하러 왔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도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많은 환자들을 고치는 일은 영광의 일이면서도 동시에 힘든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일은 좋은 일이면서도 때로는 힘든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래서 조용한 시간에 외딴 곳에 가셔서 기도하심으로 새힘을 얻으셨습니다. 사람들을 만남으로서 힘을 얻는 순간도 있지만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홀로 기도함으로서 힘을 얻는 순간도 있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보여줍니다. 함께 있음과 홀로 있음의 순간이 모두 필요하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교회가 어떤 곳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교회는 첫째 고통받는 사람을 일으키는 곳이고 둘째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곳이고 셋째 홀로 기도하는 곳입니다. 이 3가지 모습이 모두 갖추어져 있을 때, 우리의 삶은 온전히 회복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고린도전서 9장에서 자신은 복음 전도자로 부름받았기 때문에 이 일을 한다고 해서 자랑거리가 될 수는 없지만 자신의 권리를 이용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을 만 하다고 말했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 중에는 예루살렘 모교회가 바울을 파송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즉 바울이 파송받아서 고린도 교회에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울을 대접할 필요도 없고, 바울도 이것을 잘 알기 때문에 대접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실 예루살렘 모교회가 바울을 파송한 것은 아니었고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파송을 받았습니다. 바울 입장에서는 예루살렘 모교회로부터 파송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고린도 교회를 세웠기 때문에 얼마든지 개척자로서 이에 합당한 대우를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바울은 최고 엘리트였고 천막을 만드는 기술자였기 때문에 교회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이 종이 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엘리트였던 사람이 예수 믿고 변화받아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의 종이 되려고 노력하였고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의 종이 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당시 유대인들은 헬라인들과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거리낌 없이 헬라인들을 만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 것에만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는 한 사람에게라도 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열병에서 일어난 시몬의 장모는 이웃을 대접하였고 엘리트였던 바울은 변화받아 모든 사람의 종이 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시몬의 장모와 바울처럼, 섬김을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모두가 힘든 시기에 우리들의 작은 노력으로 서로가 서로를 일으켜주고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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