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네번째 주일 / 1월 다섯번째 주일
마가복음서 1:21-28, 고린도전서 8:6-13
주현절, 생명을 일으키는 예배당

정해빈 목사

 

 

 

벤쿠버 다운타운 동쪽에 위치한 제일연합교회(First United Church)는 벤쿠버에서 세워진 가장 오래된 교회 중 하나입니다. 이 교회가 위치한 지역은 소위 위험한 우범지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교회는 1886년 벤쿠버 대화재가 났을 때부터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하기 시작하였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캐나다연합교회 지역선교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저소득층 주민들을 대상으로 영어교실, 직업훈련, 중고장터, 푸드뱅크, 보건교실, 미술음악캠프, 법률자문, 중독치유모임 등의 프로그램을 실시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범지대에 사는 여성들을 위한 “안전 거주지” 캠페인을 벌이는 등 사회복지와 사회정의를 위한 활동을 계속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래전 이 교회 건물이 처음 지어졌을 때, 이 건물은 주일예배를 위한 장소로만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지역주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교회 건물이 사용되었습니다. 최근에는 지역주민들이 일주일 내내 사용할 수 있고 집 없는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교회건물을 재개발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캐나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2차 대전이후 베이비붐이 일어나 인구가 증가하였을 때 많은 교회 건물들이 세워졌습니다. 그 당시에는 주일예배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큰 예배당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교인 숫자는 줄어들었고 더 이상 큰 예배당 건물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배당만 큰 교회가 아니라 지역주민들이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고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복합적인 건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토론토에도 동쪽 다운타운 리젠트 파크에 교단이 세운 저소득층을 위한 복합건물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랜싱연합교회도 기존 건물을 허물고 다목적예배당, 어린이집, 중고장터, 소예배실, 다목적실이 있는 건물을 새로 건축하였습니다. 주일날에만 사용하는 건물이 아니라 일주일 내내 지역주민들이 사용할 수 있는 건물이 지어졌습니다. 예배당에서는 거룩하게 예배만 드려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건물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속에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있는 성전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일 수 있고 서로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그런 공간/예배당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마가복음서 1장을 보면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있는 회당에 들어가셔서 율법학자들이 놀랄 정도로 권위있게 가르치시고 악한 귀신을 쫓아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악령에 걸린 사람이 회당에 앉아 있었다는 오늘 말씀은 회당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람을 자유롭게 만드는 곳이 아니라 사람을 억압하는 곳이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본래 회당은 율법학자/랍비들이 율법을 가르치는 곳이었습니다. 율법학자/랍비들이 율법을 바르게 가르쳤더라면 회당에서는 자유와 기쁨과 치유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학자들이 잘못된 지식으로 사람들을 억압/훈계하였기 때문에 악령에 시달리는 사람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셔서 율법이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율법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율법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자유롭게 하는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오늘날 수없이 많은 교회와 선교단체가 있고 수 없이 많은 설교와 성경공부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교회와 선교단체와 설교와 성경공부가 오늘날 고통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참된 기쁨과 자유를 주는지 아니면 억압을 주는지를 우리는 살펴보아야 합니다. 때로는 잘못된 정치가 사람을 억압하기도 하고, 때로는 잘못된 경제가 사람을 억압하기도 하고, 때로는 잘못된 종교가 사람을 억압하기도 합니다. 예수님 당시 갈릴리 백성들은 로마제국으로부터 정치적인 억압과 경제적인 박탈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정치적인 억압과 경제적인 박탈을 당하고 있다면 최소한 종교라도 백성들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시 유대교는 가난한 백성들에게 정결 규정을 강요함으로써 또 하나의 짐을 백성들에게 부과하였습니다. 종교는 본래 사람에게 착한 심성을 가르쳐 주고 사람에게 은혜와 기쁨과 치료와 자유를 주어야 하는데 이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갈릴리 백성들은 정치적인 악령, 경제적인 악령, 종교적인 악령 때문에 신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을 억압하고 비인간화하는 것들을 쫓아내시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우셨습니다. 사람을 억압하고 질식하게 만드는 정치/경제/종교/체제/제도/불의/편견은 사라져야 합니다. 예수께서 율법을 바르게 해석하시고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셨기 때문에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유와 해방을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악령에 의해 고통받는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역은 회당에서 일어났습니다. 오늘 말씀은 회당이 단순히 예배만 드리거나 지식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육체적/정신적/영적 치유가 일어나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예배당이 일주일에 한번 예배만 드리는 곳이 아니라 일주일 내내 만남과 치유와 사랑과 기쁨과 회복이 일어나는 거룩한 곳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때 교회당/예배당은 글자 그대로 하나님을 체험하는 “거룩한 장소”가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고린도전서 8장은 “우상에게 바친 고기”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 도시에는 우상숭배를 하고난 후에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시민들에게 나누어주는 축제가 있었습니다. 지식이 높은 교인들은 모든 음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니 우상에게 바친 고기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주장을 인정했습니다.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손해 볼 것도 없고 먹는다고 해서 이로울 것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여러분에게 있는 지식이 신앙이 약한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했습니다. 지식이 약한 사람은 지식이 강한 사람이 우상의 신당에 앉아서 먹는 것을 보고 용기를 내서 같이 고기를 먹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식이 약한 사람은 나중에 자신의 행동 때문에 신앙에 혼란이 생길 것이고 이 일로 인해 시험에 빠질 것입니다. 지식이 약한 사람은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순간, 자신이 우상에게 사로잡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지식이 약한 사람이 지식이 강한 사람 때문에 시험에 빠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바울은 음식이 내 형제를 걸어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그가 걸려서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자신은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연약한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는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오늘 말씀은 교회와 회당과 예배당이 사람을 억압하거나 지식을 자랑하는 곳이 아니라 아픈 사람을 고쳐주고 약한 사람을 배려하고 일으켜주는 거룩한 장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율법학자들의 잘못된 지식이 사람을 악령들게 만들었고 고린도 교회 지식인들의 지식이 신앙이 약한 사람을 혼란에 빠트렸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사람을 자유하게 하는 지식이 아니라 사람을 억압하고 혼란에 빠트리는 잘못된 지식이었습니다. 잘못된 지식은 사람을 억압하고 세뇌시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목사가 범죄를 저지르고 성도들을 억압/세뇌시키고 대형교회가 비리를 저지르고 극단적인 선교단체가 코로나를 확산시키는 한국 뉴스를 보면서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사람을 억압/세뇌시키는 지식은 성령이 아니라 악령입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셔서 해방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악령에 걸린 사람을 자유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 교회 예배당이 해방의 말씀이 선포되고 사람을 살리고 치유하고 일으키는 교회 예배당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지식으로 교만한 교회가 아니라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 교회, 약한 사람을 배려하고 일으키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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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세번째 주일 / 1월 네번째 주일
요나서 3:1-5, 10, 마가복음서 1:14-20
주현절, 사람을 살리는 어부

정해빈 목사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은퇴하신 이상현 교수는 주변인의 신학(Theology of Marginality)을 주장했습니다. 주변인은 미국사회 주류가 아닌 사람들, 그 중에서도 아시아 출신 이민자들을 가리킵니다. 주변인은 주류가 아니기 때문에 주류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소외받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이상현 교수는 주변인이 소외의식을 가지고 세상을 살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주변인은 주류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고 주류가 가질 수 없는 창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득권에 갇혀 있는 사람은 세상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잘 보지 못합니다. 하지면 주변인은 주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문제가 무엇인지, 세상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볼 수 있습니다. 역사를 보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동력은 언제나 변방 주변부에서 일어났습니다. 또한 주변인은 경계인(Liminality)입니다. 경계(Liminality)는 문지방, 탁자의 가장자리,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경계 지대를 가리킵니다. 중심의 시각에서 경계를 보면 경계는 변두리입니다. 하지만 경계는 변두리가 아니라 창조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곳입니다. 경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양쪽을 넘나들면서 양쪽과 교류하고 소통할 수 있습니다. 이민자인 우리들은 캐나다와 한인의 경계(In-Between)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캐나다 문화와 한인 문화를 잘 융합하고 연결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창조적인 변화는 주변/경계에서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주변인/경계인으로 사셨습니다. 이 땅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고 하늘과 땅을 연결하셨습니다. 또한 정치, 경제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지 않으시고 북쪽 변두리 경계에 위치한 갈릴리에서 활동하셨습니다. 당시 갈릴리에는 유대인/헬라인들이 뒤섞여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정치, 문화적으로 소외되었던 주변인/경계인 갈릴리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고 그들과 함께 새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변화가 주변인/경계인들을 통해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주변인/경계인으로 사는 사람들을 통해서 새역사를 이루십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민자, 주변인/경계인으로 이 땅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중심에 사는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창조성을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주변/경계에 위치한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와 같은 이민자들을 통해서 북미 사회에 새로운 변화, 새로운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 1장은 예수께서 때가 되었을 때 갈릴리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세례요한이 잡힌 뒤에 갈릴리에 오셔서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선포하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움직이는 것을 기다리고 하나님은 사람이 움직이는 것을 기다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려면 하늘과 땅이 만나야 합니다. 땅이 움직여야 하늘이 움직입니다. 예수님은 지금이 바로 그 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믿으라고 말슴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위해 갈릴리 바닷가를 지나가시면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헬라 철학자들과 유대 랍비들은 제자들을 구하러 다니지 않았습니다.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직접 스승을 찾아 다녔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직접 갈릴리를 다니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할 제자들을 찾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혼자서 일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고 함께 일할 동역자들을 찾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함께 협력하고 함께 일하는 공동체(community)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예수께서 공생애 중에 행하신 첫번째 행동이 제자들을 찾으셨다는 것은 함께 일하는 동역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기독교 신앙은 공동체(community) 신앙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언제나 함께 기뻐하시고 함께 협력하시며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일하십니다. 예수께서도 혼자 일하시지 않으시고 함께 일할 동역자를 찾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닷가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셨고 역시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는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따라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고 결단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헬라 철학자들과 유대 랍비들은 제자들에게 지식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독일의 본 훼퍼 신학자는 대부분의 독일 교회들이 히틀러의 게르만 국가주의에 찬성했을 때 이에 저항하였습니다. 그는 [나를 따르라]는 책을 통해서 신앙을 갖는 것은 기독교에 대한 지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 고난받으신 그리스도를 몸으로 따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믿는 사람만이 복종하고 복종하는 사람만이 믿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마음으로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이 우리의 삶과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부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New Revised Standard Version 영어 성경은 “Follow me and I will make you fish for people”로 표현을 했습니다. 헬라어의 원래 뜻은 알리에이스 안트로폰(ἁλιεῖς ἀνθρώπων), “사람들의 어부들”입니다. 사기전화, 보이스 피싱(voice fishing)이라는 말이 쓰이는 것처럼, 사람을 낚는다는 말은 쓰이기에 따라서 부정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사람을 낚는다는 말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사람을 죽음에서 건진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헬라어가 말하는 본래 의미는 “사람들의 어부들” 즉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는 어부, 사람들을 살리는 어부입니다. 예수께서는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어부, 사람들을 살리는 어부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까지는 나와 내 가족을 위해서 일했다면 이제부터는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요나서를 보면 요나가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시리아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보기에 원수와 같은 나라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의 민족주의자였던 요나가 보기에 아시리아는 약소국을 괴롭히는 악의 상징과도 같은 제국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니느웨 백성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시는 분이라는 것이 못마땅하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원수인 니느웨 사람들도 구원하기 원하신다는 것이 못마땅하였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3일 걸어가야 하는 도성을 하루만 걸으면서 회개를 선포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니느웨 백성들이 요나의 불성실한 선포를 듣고도 모두 회개하였다고 기록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어부, 사람들을 살리는 어부,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어부”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세상을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요나와 갈릴리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이 바로 사람들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변부/경계인으로 사는 우리들을 부르시고 우리들을 통해서 새역사를 이루십니다. 우리들은 주변부/경계인으로 살고 있지만 우리들에게는 중심에 사는 사람들이 갖지 못하는 창조성이 있고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새역사를 시작하실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사람을 살리는 어부로서 이 땅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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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두번째 주일 / 1월 세번째 주일
사무엘기상 3:15-20, 고린도전서 6:13-20
주현절, 소명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정해빈 목사

 

 

 

2010년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책으로 큰 화제를 모았던 마이클 샌달(Michael J. Sandel)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최근 [공정하다는 착각]이라는 책을 써서 다시한번 주목을 받았습니다. 책의 원래 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The Tyranny of Merit: What's Become of the Common Good?, 능력의 폭정: 과연 무엇이 공동선을 만드나?] 한글 번역 서적은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를 이 책의 부제로 달았습니다. 책의 제목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능력주의”에 대한 환상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노력했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노력하고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서 그것은 당신이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성공했기 때문에 나는 성공을 누릴 권리가 있고 당신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당신이 게을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능력주의”는 각자 처한 삶의 환경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가난한 환경을 뚫고 소위 세상적으로 성공한 사람들, “개천에서 용 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요즘 세상은 이런 일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부유한 동네/집안에서 태어나서 좋은 학교를 다니고 비싼 과외를 받고 부모나 집안을 통해서 좋은 정보/인맥을 얻는 사람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에 취직을 합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부유한 재산을 물려받을 것이고 좋은 배경에서 태어난 사람은 좋은 배경을 물려받을 것이고 지식인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지식을 물려받을 것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이미 절반의 성공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서울대학교 신입생의 52%가 소득 상위 20%에 해당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전체 신입생의 1/3에 해당하는 기회균형, 지역균형선발 학생을 제외하면 일반 신입생의 대부분이 상류층 자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세계적인 기업가가 나오지 않는 것은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기업할 수 있는 환경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게 노력하고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면 남들보다 더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불우한 환경을 뚫고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통계로 보면 불우한 환경을 뚫고 성공한 사람보다는 좋은 환경 때문에 성공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능력주의”는 부자/성공한 사람에게는 교만을 주고 가난한 사람/실패한 사람에게는 절망을 줍니다.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노력 때문에 성공했다고 생각하고 실패한 사람은 자신의 노력이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마이클 샌달 교수는 성공한 사람은 자신이 남들보다 좋은 환경을 가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겸손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공한 사람은 자신이 남들보다 사회적인 혜택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신의 성공을 그들과 나누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이 사회는 완벽하지는 않아도 조금 더 공정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능력주의에 대한 잘못된 생각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고 이 사회를 병들게 만듭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할 것이고 무시받은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들을 향해 적개심을 가질 것입니다. 2016년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도 능력주의에서 낙오된 백인 저학력/저소득층이 워싱턴 엘리트에 대해 반감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이클 샌달 교수는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은 잡화상 계산원들, 배달원들, 방문의료서비스담당자들, 그밖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으면서 박봉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해주었다”고 말했습니다. 박봉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의 일을 소명으로 여기는 평범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 사회가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사무엘기상 3장은 고대 이스라엘 사사시대에 어린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옛날 사사시대에는 왕이 없었고 사사(판관)가 행정/외교를 담당했고, 제사장이 제사/일상생활을 담당했습니다. 사무엘이 어렸을 때 늙은 엘리와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제사장직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홉니와 비느하스는 행실이 좋지 못했습니다. 사무엘기상 2장에 의하면 두 아들은 백성들이 제물로 드리는 고기를 빼앗았고 성막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간음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의 집안에게 저주를 내리셨고 엘리의 집안 대신 사무엘을 선택하셨습니다. 본래 사무엘은 에브라임 지파 산간지방에서 사는 엘가나와 한나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가 산간지방에서 살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사무엘의 집안이 평범한 집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부모는 사무엘을 서원하여 낳았기 때문에 사무엘이 젖을 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를 엘리에게 나실인으로 바쳤습니다.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늙은 제사장 엘리의 시종을 맡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무엘기상 3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무엘을 3번 부르셨고 그에게 선지자/제사장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엘리의 집안은 본래 제사장 집안이었으나 두 아들이 자신들의 사명을 소홀히 여겼기 때문에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특권으로 여기고 소홀히 하는 사람은 공동체에 해를 끼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성공/특권이 자신의 능력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쉽게 교만해지고 쉽게 유혹에 빠지고 쉽게 타락할 것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 기득권/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기득권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이 모든 기득권이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저절로 주어졌다는 것을 깨닫고 겸손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겸손하지 못했고 오히려 반대로 기득권을 남용하였고 공동체에 해를 끼쳤습니다. 참된 소명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만일 내가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면, 만일 내가 다른 사람보다 유리한 환경의 혜택을 보고 있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고, 내가 가진 기득권/특권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고린도전서 6장에서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 중에는 영혼구원과 육체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나의 영혼은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니 육체는 어차피 썩어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육체로 무엇을 하든지 상관이 없다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종교/철학에 대한 지식이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주장을 하면서 방탕한 삶을 살았고 신앙 수준이 높지 않은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지 못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육체의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몸은 음행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성전이라고 말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사도바울은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소명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내가 가진 좋은 환경/특권/기득권은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고전15:10)”이라는 유명한 고백을 했습니다. 나의 몸도 주님의 것이고 나의 성공도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사/건강/물질/환경/성공을 가지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며 겸손하게 인생을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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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첫번째 주일 / 1월 두번째 주일
마가복음서 1:4-11, 사도행전 19:1-7 
주현절, 평범한 삶에서 부름을 받다
정해빈 목사

 

 

 

신앙의 선구자들의 삶을 보면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다가 어느 순간 하나님의 부르심을 체험하고 인생의 소명을 깨닫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늘의 부름을 받을 때까지 다른 사람들처럼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늘의 부름을 듣는 어떤 순간을 체험하였고 그 체험이 그들의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영웅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사람들 중에는 왕족/귀족의 집안에서 태어나서 영웅으로 교육받고 성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 평범한 삶을 살다가 어느 순간 때가 되어 하늘의 부름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출신배경은 비천하지만 하늘의 부름을 받고 깨달음을 얻어 어려운 시대를 구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신배경은 평범하고 비천하지만 마음과 뜻이 바른 사람을 선택하셔서 그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펼치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일하는 특별한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모든 사람이 응답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응답하는 그 사람의 순종이 그 사람을 특별하게 만듭니다. 평범하게 살던 사람들이 때로는 선구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때로는 역사와의 만남을 통해서, 때로는 서적을 통해서, 대로는 성경말씀을 통해서 하늘의 부름을 듣고 거듭나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늘의 부름입니다.

 

함경북도 두만강 아오지 경흥 출신 청년 송창근은 북간도에서 독립운동하는 이동휘 선생으로부터 “너는 커서 목사가 되어서 민족을 위해서 일하라”는 말을 듣고 서울 유학을 시작했습니다. 같은 고향 출신 청년 김재준은 고향에서 금융조합 말단 직원으로 일하다가 송창근의 권유로 서울로 유학 와서 어렵게 생활하던 중에 서울 승동교회에서 열린 사경회에서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듣고 성령/중생체험을 했습니다. 남강 이승훈 선생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연설을 듣고 감동을 받아 평안북도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웠고 고당 조만식 선생은 오산학교의 교장으로 일했습니다. 청년 함석헌은 민족사상과 기독교신앙이 모인 오산학교를 다니면서 하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청년 이상철은 북간도 캐나다연합교회가 세운 은진중학교를 통해서 기독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이후 성경책과 한국/일본/러시아의 기독교 소설을 읽으며 감동을 받고 하늘의 소명을 깨달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선구자를 통해서, 역사를 통해서, 서적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하늘의 부름을 받게 되었고 이에 순종함으로서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마가복음 1장은 예수께서 때가 되었을 때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유년/소년 시절을 생략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세례받기 전까지 무엇을 하셨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들처럼 평범한 삶을 사셨을 것입니다. 유년 시절에는 갈릴리 농촌과 어촌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경험했을 것이고 청소년 시절에는 헤롯이 갈릴리에 건설 중인 건축공사에 목수인 아버지와 함께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친 노동을 하면서 역사와 현실에 눈을 뜨셨을 것이고 앞으로의 삶에 대해서 고민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회개를 선포하는 광야의 예언자 세례요한을 만나게 되었고 그를 통해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세례 받으셨을 때 하늘이 갈라지는 체험을 하셨고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하늘이 갈라졌다는 말은 하늘의 뜻이 보였다는 말이고 하늘의 뜻이 나에게 분명하게 전달되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어느 순간 어느 계기를 통해서 하늘이 갈라지는 것 같은 체험을 한 사람은 그 순간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하늘의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이 음성은 다른 사람들은 들을 수 없었고 예수님의 귀에만 들렸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음성을 통해서 하늘 아버지께서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하늘 아버지께서 자신의 공생애를 축복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늘이 열리는 체험과 하늘의 음성을 듣는 체험이 예수님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이 두가지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공생애를 본격적으로 준비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후에 세례요한 공동체에 들어가셔서 오랫동안 그들과 함께 생활하셨습니다. 영적인 훈련을 받으며 자신의 때가 올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던 중에 세례요한이 헤롯으로부터 처형당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아시고 갈릴리로 돌아오셔서 본격적으로 하나님나라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세례받기 이전이 평범한 사생활이었다면 세례받은 후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공생애 생활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도 세례받고 하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끌어 주는 세례요한이 필요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회개의 세례를 행하고 금욕을 실천하는 세례요한이 없었더라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소명을 확실하게 깨닫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시는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고 세례요한의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이 요단강으로 사람들을 불러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다면, 예수님은 직접 갈릴리 마을로 들어가셔서 사람들을 만나셨고 회개의 세례 대신 그들을 먹이시고 그들의 병을 고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이 사람들을 불러서 회개시켰다면, 예수님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슬픔과 아픔을 치료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하나님나라 사역도 세례요한 같은 선구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선구자는 평범한 사람을 깨우쳐주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도록 도와줍니다. 세례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알리는 선구자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사도행전 19장은 사도바울이 3차 선교여행 중에 에베소에 들러 12명에게 성령 세례를 주는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세례요한이 행한 회개의 세례는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이 행하신 성령의 세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였고 세례요한의 가르침대로 회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신 성령의 세례를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유대인/이방인, 남자/여자, 주인/종의 차별이 무너지고 온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이 전파되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손을 얹으니 성령이 그들에게 내리셨고 그들은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들이 방언/예언을 하였다는 말은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였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평범한 삶을 살던 12명의 에베소인들이 사도바울과의 새로운 만남을 통해 하늘의 부름/소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소아시아 선교의 중심지가 된 에베소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평범한 사람들, 평범하지만 마음과 뜻이 바르고 곧은 사람들을 부르셔서 하늘이 갈라지는 것을 보게 하시고 하늘의 음성을 듣게 하십니다. 하늘이 갈라지는 것을 보는 체험과 하늘의 음성을 듣는 체험을 통해서 소명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평범한 사람을 부르셔서 그 사람을 비범한 사람으로 만드시고 그 사람을 통해서 새역사를 이루십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때로는 선구자를 통해서, 때로는 낯선 만남을 통해서, 때로는 역사를 통해서, 때로는 말씀묵상을 통해서, 때로는 성령체험을 통해서 하늘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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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한인연합교회 주일가정예배 순서

성탄절 후 두번째 주일 / 신년주일

2021년 1월 3일

정해빈 목사

 

 

예배의 부름 / 시편 147편

 

예루살렘아, 주님께 영광을 돌려라. 시온아,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네가 사는 땅에 평화를 주시고 가장 좋은 밀로 만든 음식으로 너를 배불리신다. 주님이 이 땅에 명령만 내리시면 그 말씀이 순식간에 퍼져 나간다. 양털 같은 눈을 내리시며 재를 뿌리듯 서리도 내리시며 빵 부스러기같이 우박을 쏟으시는데 누가 감히 그 추위 앞에 버티어 설 수 있겠느냐? 그러나 주님은 말씀을 보내셔서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시니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어 흐른다. 주님은 말씀을 야곱에게 전하시고 주님의 규례와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알려 주신다. 어느 다른 민족에게도 그와 같이 하신 일이 없으시니 그들은 아무도 그 법도를 알지 못한다. 할렐루야. 아멘.

 

공동기도 / 다같이

 

사랑의 하나님, 성탄절 후 두번째 주일, 2021년 신년주일 가정예배를 드리며 자비로우시고 진실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께서는 저희들이 새로운 마음으로 새출발할 수 있도록 2021년 새해를 저희들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다시한번 시간과 기회를 주셨기 때문에 저희들이 과거의 잘못을 뒤로하고 새출발을 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2021년 새해에는 인류를 절망에 빠뜨렸던 전염병이 물러가고 중단되었던 일상의 삶이 다시 회복되게 하옵소서. 이 일을 계기로 저희들 모두가 자연을 존중하고 환경오염을 줄이고 우주만물이 공생하는 삶을 살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새해를 시작하며 소망하고 간구하는 모든 성도님들을 축복하시고 응답하여 주옵소서. 또한 저희 교회가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교회되게 하옵소서. 아멘.

 

신앙고백 / 캐나다연합교회 새신조

 

우리는 홀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세계에서 삽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창조하시며, 화해시키고 새롭게 하기 위하여, 말씀이 몸을 이룬 예수님 안에 오셨으며, 우리와 남들 안에서, 성령으로 역사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이루라고 부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찬양하고, 우주만물을 존중하며 살고, 남들을 사랑하며 섬기고, 정의를 추구하며 악에 항거하고, 십자가형을 당하시고 살아나셔서, 우리의 심판자와 희망이 되신, 예수님을 선포하라고 부름 받았습니다. 삶에서, 죽음에서, 죽음을 넘는 삶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홀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멘.

 

새창조의 선언 / 인도자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여 준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아멘. (눅 2:10-11)

 

찬송가 / 552장 (구찬송가 358장): 아침 해가 돋을 때

 

성경봉독 / 예레미야서 31:7-14, 요한복음서 1:1-9 

 

참으로 나 주가 말한다. 너희는 기쁨으로 야곱에게 환호하고 세계 만민의 머리가 된 이스라엘에게 환성을 올려라. '주님, 주님의 백성을 구원해 주십시오.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해 주십시오.' 이렇게 선포하고 찬양하여라. 내가 그들을 북녘 땅에서 데리고 오겠으며 땅의 맨 끝에서 모아 오겠다. 그들 가운데는 눈 먼 사람과 다리를 저는 사람도 있고 임신한 여인과 해산한 여인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올 것이며 그들이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을 인도하겠다. 그들이 넘어지지 않게 평탄한 길로 인도하여 물이 많은 시냇가로 가게 하겠다.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이고, 에브라임은 나의 맏아들이기 때문이다. 뭇 민족들아, 너희는 나 주의 말을 듣고 먼 해안지역 사람들에게 이 말을 전하여라. '이스라엘을 흩으신 분께서 그들을 다시 모으시고 목자가 자기 양 떼를 지키듯이 그들을 지켜 주신다.' 그렇다. 나 주가 야곱을 속량하여 주고 야곱보다 더 강한 자의 손에서 그를 구원해 냈다. 그들은 돌아와서 시온 산 꼭대기에서 찬송을 부르고 주의 좋은 선물,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양 새끼와 송아지들을 받고 기뻐할 것이며 그들의 마음은 물 댄 동산과 같아서 다시는 기력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 때에는 처녀가 춤을 추며 기뻐하고 젊은이와 노인들이 함께 즐거워할 것이다. 내가 그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놓고 그들을 위로하여 주겠다. 그들이 근심에서 벗어나서 기뻐할 것이다. 그 때에는 내가 기름진 것으로 제사장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것이며 내 좋은 선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겠다. 나 주의 말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창조된 것은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다. 그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 사람은 그 빛을 증언하러 왔으니 자기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아멘.

 

설교 / “신년주일, 하나님의 임재를 찬양하고”

 

우리가 매주일 고백하는 캐나다연합교회 새신조(A New Creed)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찬양하고”(to celebrate God’s presence)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이 고백처럼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임재하신다는 것을 찬양하고 기뻐하고 축하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우리의 삶 자체가 기뻐하고 축하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삶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혜요 선물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특별한 날(생일, 입학, 졸업, 취직, 결혼, 출산 등)을 기뻐하고 축하합니다. 하지만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매일의 삶 자체가 기뻐하고 축하해야 할 일입니다. 심지어 서양 기독교에서는 성도의 장례식을 “하나님을 찬양하고 희망을 선포하면서 성도의 삶을 축하하는 예배”(worship that celebrates the life of the person who has died, while praising God and proclaiming hope)로 드립니다. 장례식 예배를 고인께서 남기신 아름다운 삶을 기뻐하고 감사하고 축하하는 예배로 드리는 것은 우리의 삶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은혜요 선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매순간 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에 대해서 감사하고 기뻐하고 축하할 수 있습니다. 하루하루 살아있음을 기뻐하고 감사를 드립시다. 2020년이 지나고 2021년이 온 것을 기뻐하고 감사를 드립시다. 일상의 삶이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고 있음을 기뻐하고 감사를 드립시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은 찬양하고 기뻐하고 축하하고 감사하는 신앙입니다.

 

캐나다연합교회 역사를 보면 리디아 구루치(Lydia Gruchy)는 1936년 첫번째 여성 목사가 되었고 로이스 윌슨(Lois Wilson)은 1980년 첫번째 여성 목사 총회장이 되었고 엔 스콰이어(Anne Squire)는 1986년 첫번째 평신도 총회장이 되었고 이상철 목사님은 1988년 첫번째 아시아 출신 총회장이 되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여성이 목사가 되는 것과 평신도/여성/비백인이 총회장이 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편견을 극복하고 역사는 발전하였습니다. 오타와에 있는 캐나다 국회의사당에 가보면 “다섯 명의 여성”(The Famous Five) 동상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 한 여성이 “여성은 사람이다.”(Women are Persons)라는 선언서를 들고 있습니다. 1920년대 캐나다 법에 의하면 자격이 인정되는 사람(qualified Person)을 상원의원(Senator)으로 지명한다는 규정이 있었는데 5명의 여성들은 이 자격에 여성이 포함되는지를 물었습니다. 1928년 캐나다 대법원은 만장일치로 “여성은 '사람'에 속하지 않는다”(Women are not such 'Persons')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5명의 여성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영국 최고법원에 항소하였고 1929년 영국 최고법원은 “‘Persons'에 'men'과 'women'이 모두 포함된다” 며 캐나다 대법원의 판결을 뒤집었습니다. 이 판례로 인하여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인류 역사에는 많은 오류와 편견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의 발전을 믿으며 이를 기뻐하고 축하합니다. 인류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함께하심(임재)을 찬양하고 역사의 발전을 기뻐하고 살아있음을 기뻐하고 새해가 시작된 것을 축하합니다. 우리의 삶에 편견/차별, 고난/시련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찬양하고 우리의 삶을 기뻐하고 축하할 수 있습니다. 2021년 새해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서로 기뻐하고 축하합시다. 우리는 날마다 찬양하고 기뻐하고 축하하고 감사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예레미야 31장은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해 사방으로 흩어진 북이스라엘 동포들을 향해서 예레미야가 선포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시고 가장 약한 사람들, 눈 먼 사람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임신한 여인과 해산한 여인을 고향으로 데리고 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가장 약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주의 좋은 선물,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양 새끼와 송아지들을 받고 기뻐할 것이며 그들의 마음은 물 댄 동산과 같아서 다시는 기력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두가 차별받지 않고 평화롭고 풍요롭게 사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 때에는 처녀가 춤을 추며 기뻐하고 젊은이와 노인들이 함께 즐거워할 것이다. 내가 그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놓고 그들을 위로하여 주겠다. 그들이 근심에서 벗어나서 기뻐할 것이다.” 예레미야는 고난받는 백성들에게 미래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임재를 찬양하고 기뻐하고 축하하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찬양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 고난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의 삶에 고난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우리는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이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미래를 바라보며 고난 가운데서도 삶을 축하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찬양하고 기뻐하고 축하하는 삶입니다. 고난이 깊으면 깊을수록 하나님의 임재를 찬양하고 살아있음을 기뻐하고 축하할 때,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며 지금의 고난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요한복음서 1장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말씀으로 빛을 만드셨고 때가 되매 그 말씀의 빛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 가운데서 임하셨다고 선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어둠이 가득했을 때 “빛이 있어라” 말씀하심으로 이 세상에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빛은 태양빛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영광/질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빛을 만드셨기 때문에 이 우주가 혼란스럽지 않고 아름답고 조화있고 질서있는 우주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때가 되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임하셨고 그 육신 속에 있는 빛이 세상을 비추었습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이 빛으로 이 땅에 오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찬양하고 기뻐하고 축하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태초에 말씀으로 빛을 만들지 않으셨다면 이 우주는 어둡고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빛으로 오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빛을 창조하셨으니 우리는 기뻐합니다. 예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을 비추셨으니 우리는 기뻐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에는 찬양하고 기뻐하고 축하하고 감사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우리 삶에는 고난뿐이고 찬양하고 감사하고 기뻐하고 축하해야 할 일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세상은 점점 불공평해지고 빈부격차는 커지고 환경오염은 심해지고 전염병은 확산되고 불의는 득세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적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 삶에 찬양하고 감사하고 기뻐하고 축하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심(임재)을 기뻐합시다. 실수와 잘못을 통해서 과거를 반성하고 다시 출발할 수 있음을 기뻐하십시다.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를 기뻐합시다. 역사의 발전을 기뻐합시다. 전염병이 치료되고 있음을 기뻐합시다. 과학자들/기숙자들처럼 인류의 미래를 위해 헌신하는 선구자들이 있음을 기뻐합시다. 살아있음을 기뻐합시다. 새해를 시작할 수 있음을 기뻐합시다. 서로의 삶을 축하해주고 서로를 존중하고 작은 생명을 기뻐할 때, 이 세상은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매주일 고백하는 캐나다연합교회 새신조의 선언처럼 “하나님의 임재를 찬양하고 우주만물을 존중하며 살고 남들을 사랑하고 섬기며” 2021년 신축년(辛丑年)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설교 후 기도 / 봉헌 기도

 

사랑의 하나님, 2021년 새해를 시작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저희들의 삶이 당연한 것이 아니요 매순간이 기뻐하고 감사하고 축하해야 할 순간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날마다 주님의 임재를 찬양하게 하시고 찬양과 기쁨의 능력으로 고난을 극복하게 하옵소서. 신년주일 예배를 드리며 감사한 마음으로 봉헌하고 새해의 소망을 기도하는 성도님들을 기억하시고 축복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 620장: 여기에 모인 우리

 

축복 기도 / 인도자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은혜와 창조주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하심과 우리의 위로자와 치료자가 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2021년 첫번째 주일 신년주일을 맞아 찬양과 기쁨과 감사를 고백하며 새해를 시작하는 모든 성도님들의 삶과 가정과 일터 위에 이제부터 영원토록 함께 해 주옵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교회의 삶과 소식

 

Merry Christmas 메리 크리스마스!

Happy New Year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1. 오늘은 2021년 신년주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성탄절(Christmas) 후 두번째 주일입니다. 2021년 신축년(辛丑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성도님들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2. 다음 주일(1/10)부터 오전 10시 Zoom 실시간 온라인 주일예배를 드립니다. (이메일을 알려주시면 초청 이메일을 보내드립니다. 문의: 고상호 장로, brad.ko@gmail.com). Zoom 실시간 온라인 주일예배를 드릴 수 없는 분들에게는 낮 12시 교회 카톡 단체방과 홈페이지(www.akuc.org)에 예배 동영상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컴퓨터/핸드폰을 사용하지 않는 성도님들에게는 가정예배 순서지를 미리 보내드립니다. 교회학교는 주일 오후 1:30 Zoom 온라인 예배를 드립니다. 또한 금요일 오전 9:30 교회 카톡 단체방에 금요성경공부 동영상을 보내드립니다.

 

3. 수표로 헌금하실 분은 교회 주소로 우편 발송하실 수 있습니다. (Alpha Korean United Church, 49 Bogert Avenue, Toronto, ON. M2N 1K4). 온라인(E-Transfer)으로 헌금하실 수 있는 분은 정학필 재정위원장님(647-285-5506)께 문의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21년 헌금봉투를 구역장님을 통해 나누어 드렸습니다. 헌금봉투가 필요하신 분은 재정위원장님께 문의 바랍니다.

 

4. 요나회(청년회) 구역원들이 안전하고 건강하게 지내실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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