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여섯번째 주일 / 10월 두번째 주일

출애굽기 32:1-8, 빌립보서 4:1-9

고난과 회개 가운데서 드리는 추수감사

정해빈 목사

 

 

 

추수감사절이 오면 사람들은 Happy Thanksgiving이라고 부르며 감사예배를 드리고 가족모임을 갖고 칠면조 요리와 같은 만찬을 즐깁니다. 추수감사절은 글자 그대로 Happy 행복한 날입니다. 하지만 2020년 추수감사절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흩어졌던 가족/친구를 만날 수 없고 만난다 하더라도 서로 떨어져서 식사를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추수감사절을 지내며 우리는 지금 상황이 빨리 해결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모든 추수감사절이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옛날 신앙의 선배들은 전쟁 중에 추수감사절을 지내기도 했고 고난/가난/질병 가운데서 추수감사절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고난을 겪고 있을 때 감사를 고백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감사할 것이 없는데 어떻게 감사를 드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고난을 통해서 내가 이전에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깨달을 수도 있고, 고난을 통해서 교만했던 나의 삶을 회개할 수도 있고,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고 하나님께 더 의지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울 때 감사를 고백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난 가운데서 감사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고난 가운데서 드리는 감사가 진정한 감사입니다.

 

저 옛날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박국 선지자는 가진 것이 없어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만으로도 기뻐하였습니다.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 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 밭에서 거두어들일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련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련다.” (3:17-18). 성경에 나오는 감사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성숙한 고백이 하박국의 감사입니다 우리는 코로나19를 통해서 고난받고 있지만 이 고난을 통해서 많은 것을 깨닫고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깨달음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기독교는 가을에 추수감사절을 지킵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가을에 설날과 속죄일을 지킵니다.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히브리 달력에 의하면 새해는 양력으로 9월말-10월 초에 해당합니다. 그들은 새해를 “로슈 하샤나(Rosh Hashanah)”라고 부르는데 1월 1일에 나팔을 불기 때문에 나팔절이라고도 부릅니다. 또한 10일 간의 신년축제가 끝나는 날을 속죄일, “욤 키푸르(Yom Kippur)” 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1월 10일에 속죄일 금식을 하면서 자신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의식을 치르는데 이때가 캐나다의 추수감사절 시기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 속죄일은 오늘 우리가 읽은 출애굽기 말씀과 관련이 있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이 모세가 없는 동안에 금송아지 동상을 만들고 먹고 마셨습니다. 모세는 그 장면을 보고서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을 깨뜨렸습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것을 회개한 날이 오늘날의 속죄일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속죄일에 개인과 국가와 인류의 죄를 회개하고 구제헌금을 하고 물질을 나누며 새로운 삶을 결단합니다. 우리들은 오늘 유대인들처럼 고난을 경험하고 우리의 잘못을 회개하면서 2020년 추수감사절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신앙에 의하면 10월달 가을은 회개하는 날입니다. 때로는 고난과 회개 가운데서 추수감사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2020년에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과 회개 가운데서 드리는 추수감사를 기뻐 받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출애굽기 32장에 의하면 히브리 백성들은 출애굽 후에 50일 만에 시내산에 도착하였고 십계명을 받았고 세상을 축복하는 제사장 민족이 되기로 하나님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이집트의 노예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인이 된 것과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축하하고 싶었습니다. 지난 삶을 돌아보며 삶을 축하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방법이 옳아야 합니다. 그들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모세의 형 아론을 설득해서 금으로 만든 황소를 만들고 축제를 즐겼습니다. 그들은 다른 신을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하는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니까 금황소를 만들고 금황소가 하나님이라고 믿었습니다. 금황소는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아니라 보이는 하나님을 원했습니다.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 대신에 힘이 센 하나님을 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금황소 처럼 힘이 세기 때문에 아니라 자비로우시고 진실하시고 긍휼이 많으시고 고통받는 자들을 구원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합니다. 무언가 손에 잡히는 것을 좋아합니다. 영으로 계신 하나님,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 자유와 해방의 하나님은 멀게 만 느껴집니다. 그들은 황소 같이 힘이 세고 생산과 풍요를 보장하는 하나님을 믿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다 눈에 보이는 힘/물질/건물/동상을 더 좋아하였습니다. 기독교는 눈에 보이는 우상/동상/건물을 섬기지 않습니다. 영으로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섬깁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앙이 참된 신앙입니다. 금송아지 동상에 현혹되지 않는 신앙이 참된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을 오늘 말씀은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두번째 말씀으로 빌립보서 4장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사도바울은 2차 선교여행을 하던 중 바다를 건너 유럽, 마케도니아에 도착하였고 유럽의 첫번째 도시인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빌립보서를 썼는데 오히려 빌립보 교인들을 위로하고 축복하였습니다. 비록 지금 고난을 받고 있지만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했습니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빌4:4-7) 바울은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했습니다. 고난을 벗어나게 해 주셨으니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감사하고 그 다음에 구하라고 말했습니다. 구하는 것을 얻었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은 쉽지만 먼저 감사하고 나중에 구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울 때는 누구나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록 고난이 있을지라도, 아직 구하는 것을 받지 못했을지라도 먼저 감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고난/회개 가운데서 드리는 감사가 진정한 감사입니다. 구하기 이전에 먼저 드리는 감사가 진정한 감사입니다.

 

출애굽기 말씀은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고 착각하는 잘못된 신앙을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 있고 빌립보서 말씀은 고난 중에도 먼저 감사를 고백하는 신앙이 참된 신앙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고난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연을 통해서 풍성한 먹거리를 주시니 우리는 고난 중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삶이 힘든데 자연재해까지 닥쳤더라면 우리의 삶은 더 힘들어졌을 것입니다. 캐나다의 가을도 아름답지만 고향의 가을도 아름답습니다. 누렇게 익은 벼와 빨간색으로 물든 감나무와 아름답게 물든 단풍을 보면서 우리들은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올해에도 우리들에게 풍성한 가을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비로우시고 진실하신 하나님께서는 고난/회개 가운데서 고백하는 우리의 감사를 기뻐 받으시고 우리를 고난에서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서 드리는 감사가 진정한 감사이고 회개 가운데서 드리는 감사가 진정한 감사인줄로 믿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처럼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한분만으로도 기뻐하고 감사를 고백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감사를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감사를 받으시고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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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다섯번째 주일 / 10월 첫번째 주일

출애굽기 20:1-4, 7-9, 12-17, 빌립보서 3:5-12

창조절, 사람과 계약을 맺다

정해빈 목사

 

 

 

지난 주일에 “창조절, 자연과 계약을 맺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사람보다 먼저 자연을 창조하셨고 사람보다 먼저 자연을 축복하셨고 사람보다 먼저 자연과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계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연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질서에 순종하고 다른 피조물들과 평화를 누리면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영원토록 축복해 주십니다. 자연은 지금까지 이 계약을 잘 지켰습니다. 사시사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고 곡식이 자라고 해가 뜨고 비가 오는 것을 보면 자연이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질서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침이 되면 해가 뜨고 저녁이 되면 해가 집니다. 하루는 24시간으로 되어 있고 1년은 365일로 되어 있습니다. 달은 지구를 28일에 한바퀴 돌고 지구는 태양을 1년에 한바퀴 돕니다. 자연은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질서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중세시대 아씨시의 성자 프란시스는 “태양의 노래”에서 이렇게 자연을 노래했습니다.

 

“내 주여! 당신의 모든 피조물 중에도 언니 햇님에게서 찬양을 받으소서. 달과 별들의 찬양을 내 주여 받으소서. 언니 바람과 공기와 구름과 날씨 그리고 사시사철의 찬양을 내 주여 받으소서. 내 주여, 누나요 우리의 어머니인 땅의 찬양을 받으소서.”

 

이렇게 자연은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고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과의 계약을 잘 지키고 있습니다. 물론 자연이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창세기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창조를 다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고 했는데 영적으로 보면 창조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 여섯째날에 해당하고 아직 일곱째 날이 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이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지진/홍수/태풍 같은 자연재해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자연재해도 크게 보면 자연의 질서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보다 먼저 자연과 계약을 맺으셨고 자연은 지금까지 하나님과의 계약을 잘 지키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자연이 지구를 파괴하거나 지구의 생명들을 죽이고 있다는 뉴스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자연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부모의 말을 잘 듣는 자녀처럼, 자연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질서에 순종하였고 계약을 잘 지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연을 축복하시고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연은 항상 하나님께 순종하였기 때문에 복잡한 계명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남을 지배하고 자연을 파괴하고 스스로 신이 되려고 합니다. 사람이 쉽게 교만해지고 탐욕스러워지고 불순종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바르게 인도할 구체적인 계명이 필요하셨습니다. 그것이 십계명입니다. 십계명과 같은 구체적인 계명이 없다면 사람은 이웃과 자연을 파괴하려고 할 것입니다. 너희가 십계명을 기억하고 지키면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약백성이 되는데 꼭 필요한 최소한의 계약이 십계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십계명의 제1계명은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고대사회는 다신교 사회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신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술의 신 [바카스], 전쟁의 신 [마르스], 제국을 지켜주는 [태양신], 사랑의 신 [에로스], 생산과 풍요의 신 [바알] 같은 신을 사람들은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노예로 고통받는 히브리인들을 구원해 주신 자유와 해방의 하나님, 자비로우시고 진실하신 사랑의 하나님,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보호하시는 하나님, 모든 생명을 사랑하시고 모든 생명이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것은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파괴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계명이 없다면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어기고 스스로 신이 되어서 이 세상을 지배하고 파괴하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지킬 때 이 세상은 생명과 평화, 정의와 사랑이 충만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빌립보서 3장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자신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설명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할례를 받았고 정통 유대교 랍비였고 가장 정통성이 있는 지파 중 하나인 베냐민 지파 출신이었고 율법을 가장 잘 지키는 바리새파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유대교에 대한 우월감이 지나쳐서 초대교회를 박해하였고 십계명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율법을 다 지켰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자신이 가졌던 육체의 자랑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 때에 남들에게 인정받으려면 명예/지식/재물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육체의 자랑이 죽음과 부활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명예/지식/재물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명예/지식/재물로 우리를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육체의 자랑거리를 오물로 여겼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으로 구원을 받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육체의 자랑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은 신실함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육체의 자랑도 아니고 단순히 입으로 고백하는 믿음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는 신실함입니다. 바울은 오늘 우리가 읽은 빌립보서 3장 9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율법에서 생기는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오는 의를 얻으려고 합니다.” 여기 나오는 “믿음”이라는 말을 “신실함/충성됨”으로 바꾸면 오늘 말씀을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신실함을 나도 따라갈 때, 나도 예수님처럼 의롭게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삶을 사셨던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이요 계약의 완성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계약/계명을 끝까지 실천하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진실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까지 신실한 삶을 사셨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계약을 다 지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신실함을 기뻐하셨고 그래서 예수님을 무덤에서 일으키셨습니다. 바울은 나에게 한가지 소원이 있다면 나도 예수님처럼 하나님 앞에서 평생 신실한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셨던 것처럼 나도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자랑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계약백성으로서 얼마나 신실한 삶을 살았는지를 보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하나님과의 계약도 그렇고 세상에서의 계약도 그렇고 결혼서약도 그렇고 계약을 지키는 신실함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말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계약을 지키는 신실함으로 구원받습니다. 자연은 하나님과의 계약을 잘 지켰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과의 계약을 잘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구약백성들에게는 십계명을 만들어 주셨고 신약백성들에게는 신실하신 예수님을 본받으라고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자연이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질서에 순종하고 하나님과의 계약을 잘 지키는 것을 보면 우리들이 부끄러워집니다. 왜 우리는 자연처럼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지 못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오직 계약을 지키는 신실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을 찬양하고 자연을 돌보고 이웃을 사랑하고 모든 생명을 풍성케 하는 계약백성의 삶을 신실하게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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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네번째 주일 / 9월 네번째 주일

창세기 8:20-22, 9:12-17, 요한계시록 22:1-5

창조절, 자연과 계약을 맺다

정해빈 목사

 

 

 

영어 성경책 중에 [녹색성경, The Green Bible]이라는 성경책이 있습니다. 하늘, 땅, 바다, 식물과 동물이 나오는 성경구절을 녹색으로 표시했습니다. 옛날 성경책을 보면 중요한 성경구절을 빨간색으로 표시했는데 [녹색성경]은 자연이 나오는 부분을 녹색으로 표시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책을 만들 때 재생용지와 콩으로 만든 잉크를 사용했습니다.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를 말하라면 [녹색성경]을 만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녹색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깨달음도 얻을 것이고 기독교의 새로운 미래도 열릴 것입니다. 남아프리카에서 인종차별반대운동을 벌였고 1984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던 데스몬드 투투 주교는 [녹색성경]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연약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가족들이고 그들이 가장 심하게 가뭄, 이상고온, 홍수와 기상이변의 피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서지고 있는 우리의 집/지구를 보존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분별한 소비문화에 빠져서 대체할 수 없는 지구의 자원을 집어 삼키고 있습니다.” [녹생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창조의 원리와 자연의 중요성에 대해서 보다 크고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녹색성경]으로 성경을 읽으면 자연을 기록한 구절이 굉장히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사야서를 보면 자연을 기록한 장면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사11:6).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처럼 피어 즐거워할 것이다. 사막은 꽃이 무성하게 피어 크게 기뻐하며 즐겁게 소리 칠 것이다.” (사35:1). 예수님도 마태복음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6:26).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설명하실 때,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 누룩과 겨자씨, 알곡과 가라지, 포도원, 밭에 감추인 보화, 그물과 물고기 등 자연을 예로 들어서 설명하셨습니다. 이렇게 자연의 관점으로 성경을 읽으면 사람이 우주의 주인공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 의하면 사람은 맨 마지막 여섯째 날에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세상을 만드실 때 자연과 식물과 동물을 먼저 만드셨고 마지막으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사람이 마지막에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지구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그동안 사람들은 마치 지구의 주인이 사람인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마지막에 창조된 사람에게 지구의 소유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에게 소유권이 있고 그 다음에 자연과 식물과 동물에게 소유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피엔스] 책을 쓴 인류학자 유발 하라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7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의 한 구석에서 자기 앞가림에만 신경쓰는 별로 중요하지 않는 동물이었다. 이후 몇 만 년에 걸쳐 이 종은 지구 전체의 주인이자 생태계 파괴자가 되었다. 오늘날 이들은 신이 되려고 한다. 이들은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체 불만스러워한다. 이들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또 있을까?” 호모 사피엔스는 인간을 가리킵니다. 그의 글은 호모 사피엔스,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그리고 인간이 자연 앞에서 얼마나 겸손해야 하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사람보다 먼저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자연을 사람보다 먼저 축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것들에게 복을 베푸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여라. 새들도 땅 위에서 번성하여라" 하셨다.” (창1:22) 이렇게 자연을 먼저 축복하신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1:27-28) 창조의 순서도 자연이 먼저이고 축복의 순서도 자연이 먼저이고 계약의 순서도 자연이 먼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조/축복/계약을 맺을 때 사람보다 자연이 항상 먼저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녹색성경]은 이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관계를 “계약/언약”이라고 표현합니다. 계약은 상대방과의 약속과 신뢰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과 약속과 신뢰의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피조물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이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축복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창세기 8장과 9장을 보면 홍수가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 노아와 계약을 맺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노아와만 계약을 맺은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과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내가 구름을 일으켜서 땅을 덮을 때마다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서 나타나면 나는 너희와 숨 쉬는 모든 짐승 곧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홍수를 일으켜서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을 물로 멸하지 않겠다.” (창 9:12-15). 하나님께서는 땅 위에서 살과 피를 지닌 모든 생명과 언약을 맺으셨고 그 징표로 무지개를 보여주셨습니다.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홍수가 나서 자연이 파괴된 것도 자연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계약을 깨트렸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과 다시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안심하면서 이 땅을 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요한계시록 22장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도성 예루살렘에 대한 환상을 기록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악과 저주와 어둠과 박해는 물러갔고 새하늘과 새땅이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도성 예루살렘을 보니 생명수가 하나님의 보좌에서 시작해서 도시로 흘러갔고 강 양쪽에는 치료하는 생명나무 열매가 열렸습니다. 어둠이나 다시 저주 받을 일이 없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영원토록 다스리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가 창조의 시작이라면 요한계시록은 창조의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자연과 맺은 계약을 기억하시고 마지막 날에 창조세계를 온전하게 완성시키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보다 먼저 자연을 창조하셨고 사람보다 먼저 자연을 축복하셨고 사람보다 먼저 자연과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런데 자연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과의 계약을 잘 지키고 있는데 사람이 계약을 어기고 자연을 파괴하고 말았습니다. 자연이 파괴된다면 그 책임은 사람에게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범죄함에도 불구하고 신실하시기 때문에 이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금까지 지키셨습니다. 우리 자신을 볼 때 염치가 없고 부끄럽지만 하나님께서 자연과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시고 이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고 계약을 지켜주시기를 우리는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적을 바라지 않습니다. 평범한 일상이 파괴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말할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숨 쉴 수 있고 걸을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이 계속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에 낮과 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계속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팔이 부러져서 숟가락을 들 수 없는 사람은 평소에 숟가락을 들어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과의 계약을 지키지 못한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비록 저희들이 범죄할지라도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이 땅을 보존하시겠다는 그 약속을 지켜주옵소서 기도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기억하고 우리도 하나님처럼 계약을 지키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 이 땅이 파괴되지 않고 평범한 일상, 낮과 밤이 계속되도록 이 땅을 지켜 주옵소서 기도하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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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세번째 주일 / 9월 세번째 주일

요엘서 1:8-10, 17-20, 로마서 8:18-27

창조절, 광야와 희망

정해빈 목사

 

 

캐나다의 일간 신문 Globe and Mail에 최근 [세상은 절망적이지만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The world seems dire. But we must not give up on hope] 라는 칼럼이 실린 것을 보았습니다. 세상에는 희망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희망은 환상이라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사람들에게 비현실적인 이루어질 수 없는 막연한 환상을 심어줍니다. 둘째로 희망은 거짓말이라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지금의 어려운 현실을 숨기거나 왜곡하고 조금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는 거짓된 정보를 심어줍니다. 셋째로 희망은 수동적이라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어려운 현실을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고 누군가가 이 어려움을 해결해주기를 기다리거나 그냥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되겠지 하는 수동적인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로마시대의 철학자 세네카는 “희망과 두려움은 쌍둥이이다. 나약한 사람은 고난을 만날 때 두려워하거나 막연히 희망한다. 희망과 두려움 모두 현실을 타개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1600년대 네덜란드의 철학자였던 스피노자도 “희망은 지식이 부족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들이 갖는 것이고 합리적인 이성의 도움을 받으면 쓸데없는 희망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희망은 환상이고 거짓말이고 수동적이기 때문에 지금의 어려움을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주장을 경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의 주장대로 잘못된 희망을 가지면 환상에 빠지거나 거짓말에 속거나 수동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의 현실을 부인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현실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현실에서부터 구체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 모든 희망은 쓸데없는 것이고 현실을 극복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것일까요?

 

희망에는 잘못된 희망도 있지만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좋은 희망도 있습니다. 참된 희망은 현실을 부정하지도 않고 막연한 환상을 주지도 않습니다. 참된 희망은 어려운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최선을 다해서 해결책을 찾고 최선을 다해서 현실을 극복하려고 노력합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도 쉽게 포기하지만 희망이 있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희망을 갖고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반대로 희망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희망을 포기하면 그 자리에 절망이 우리를 찾아옵니다. 우리가 힘든 고난을 만날지라도 절망하지 않는 것은 이 고난을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과 용기와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희망의 원리]라는 책을 쓴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두려움을 물리치고 미래를 상상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지금의 현실을 뚫고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희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현실을 단순히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 맞서 싸운다. 이 때문에 희망은 본래의 인간됨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인간은 ‘보다 나은 가능한 삶’에 대한 희망을 통해 현실의 억압이 주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두려움을 피하기는커녕, 무엇이 두려움을 일으키고 있는지를 뚜렷하게 바라보고 비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희망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것이고 절망과 두려움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를 우리에게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을 극복할 수 있도록 믿음과 지혜와 용기와 상상력과 창의력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과 지혜와 용기와 상상력과 창의력을 합친 것이 희망입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지혜/용기/상상력/창의력을 통해서 현실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 희망입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요엘서 말씀을 보면 기원전 400년대 페르시아 제국 밑에서 살던 백성들 가뭄과 메뚜기 재앙을 받아서 고통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가뭄이 들어서 곡식이 떨어지고 풀밭이 사라지고 물이 마르고 땅이 갈라졌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이런 재난을 종종 경험합니다. 가뭄과 홍수와 태풍, 자연재해와 전염병을 경험합니다. 성경은 이런 재난을 한마디로 [광야생활]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창조절 세번째 주일의 주제는 광야(Wilderness)입니다. 성경에는 광야에서 고난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우리가 광야생활을 경험하는 것은 자연이 불완전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사람이 자연에게 해를 끼쳤기 때문일 수도 있고 권력자들이 부패하였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 백성들도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견디지 못해서 이집트를 탈출해서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이 선을 행하면 땅도 선을 행하고 사람이 악을 행하면 땅도 악을 행합니다. 요엘 선지자는 땅이 황폐화된 것을 보며 부패한 제사장들과 귀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지금이라도 너희는 진심으로 회개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금식하고 통곡하고 슬퍼하면서 나에게로 돌아오너라.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 (2:12).

 

이 말씀처럼 재난이 왔을 때 해야 할 첫번째는 회개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이 재난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달라고 주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로마서 8장에서 모든 피조물이 고난을 겪으며 신음하고 있고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광야와 같은 우리의 삶을 가리켜서 피조물이 신음하고 있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질병 때문에 신음하고 억압 때문에 신음하고 죽음 때문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은 아프면 신음소리를 냅니다. 바울은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면서 신음소리를 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제국에서 평화를 누리는 일부를 제외하고 억압으로 인해 신음하고 종살이하는 다수의 사람들을 목격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고통받는 이 세상을 구원해 주시기를 소망하였습니다. 바울이 가졌던 소망은 수동적인 환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박해 가운데서도 절망하지 말고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하나님나라를 실천하라고 말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아시고 모든 피조물의 구원을 위해 간구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의 신음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이 세상을 온전하게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과 소망이 있기 때문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코로나19, 소득감소, 빈부격차, 기후위기, 자연재해가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불안감/우울증이 증가하였고 이기주의/배타주의가 증가하였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격리생활이 길어지면서 사회생활은 축소되었고 이웃에 대한 관심도 줄어들었습니다. 세상이 불안하면 마음의 여유도 없어지고 이웃에 대한 배려와 관심도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사람들과의 만남도 줄어들고 여행도 할 수 없고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인생에 대한 불안과 우울증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고난을 이기려는 용기와 미래에 대한 희망이 더 중요합니다. 세상이 힘들면 힘들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희망입니다. 우리가 희망을 잃어버리면 절망이 우리를 찾아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통해서 이 세상을 온전하게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고통받고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을 불쌍히 여기시고 모든 우주만물을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협력하여 지금의 고난을 극복할 수 있도록 믿음/지혜/용기/창의력/상상력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비록 지금 광야 같은 힘든 인생을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에 절망하지 않고 고난 너머에 있는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새하늘과 새땅으로 만드실 그날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새로운 미래를 위해 열심히 땀 흘리고 광야에서 희망을 바라보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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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두번째 주일 / 9월 두번째 주일

창세기 3:16-19, 4:9-16, 마태복음 12:38-40

창조절, 땅에서 왔으니 땅으로 돌아갑니다

정해빈 목사

 

 

 

인류 역사를 위협하는 3가지 재앙은 전쟁과 자연재해와 전염병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전염병이었습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전쟁이나 자연재해로 죽은 사람도 많았지만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중세시대 1300년대에는 유럽에서 전 인구의 1/3이 흑사병으로 죽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과학기술과 의학기술이 전염병을 극복한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19를 겪고 보니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인간이 자연을 함부로 대할 때 자연이 인간에게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1517년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마틴 루터도 흑사병으로 인해 두 동생과 두 딸을 잃었습니다. 루터는 1527년 “치명적인 전염병에서 도망가야 하는가?”라는 짧은 글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이 글에서 전염병에서 도망가는 것은 죄가 아니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의학적인 대처법과 약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악인이 독과 치명적인 병을 퍼트렸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께 자비를 베푸셔서 우리를 지켜 달라고 간구할 것이다. 나는 소독하여 공기를 정화할 것이고 약을 지어 먹을 것이다. 나는 내가 꼭 가야 할 장소나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아니라면 피하여 나와 이웃 간의 감염을 예방할 것이다. 혹시라도 나의 무지와 태만으로 이웃이 죽임을 당하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이웃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나는 누구든 어떤 곳이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갈 것이다.”

 

“불이 났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라며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물에 빠졌을 때 헤엄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이라며 익사해야 하는가? 다리가 부러졌을 때 의사의 도움을 받지 말고 ‘이건 하나님의 심판이야. 저절로 나을 때까지 참고 버터야 해’라고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배고프고 목마를 때 왜 당신은 먹고 마시는가? ‘우리를 악에서 구해 주소서’라는 주기도문을 암송해서는 안 되는가? 만일 누군가 고통 가운데 있다면 나는 즉시 기꺼이 뛰어들어 그를 구할 것이다.”

 

“섬기는 일을 맡은 사람들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자리를 지켜 주기를 권합니다.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는 힘과 위로가 되어 주고 죽기 전에 성찬을 베풀어 줄 선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시장, 판사 같은 공직자들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각자의 자리를 지켜 주기를 권합니다. 시립병원의 의사, 간호사, 경찰관 같은 공무원들도 계속 맡은 직무를 수행해 주기를 권합니다. 부모와 후견인도 아이들에 대해 힘껏 보살펴 주기를 권합니다.”

 

마틴 루터는 위의 글에서 기독교인은 치료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고 동시에 위생관리에 솔선수범해야 하고 고통받는 이웃을 돕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위의 글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교회는 세상에 피해를 주어서는 안되고 세상의 모범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창조절 첫번째 주일의 주제가 나무/숲(Forest Sunday) 이라면, 오늘 창조절 두번째 주일의 주제는 땅(Land Sunday)입니다. 창세기 3장에 의하면 아담/하와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고 3가지의 벌을 받았습니다.

 

“내가 너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너는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것이다.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 이것은 인간관계의 고통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가족, 친척, 이웃, 직장에서 인간관계의 고통을 경험합니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서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너는 들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먹을 것이다.” 이것은 경제, 돈, 노동의 고통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먹고 살기 위해서 거친 땅을 경작하며 이마에 땀을 흘려야 하는 고통을 경험합니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것은 죽음의 고통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고비를 넘으면서 살아야 하는 고통을 경험합니다.

 

특히 두번째 고통과 세번째 고통은 땅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이 불순종하고 하나님과의 사이가 멀어지니까 땅과 사람의 거리도 멀어졌습니다. 땅이 사람에게 등을 돌리니까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땅이 좋은 열매를 내주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면 땅도 사람에게 불순종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순종하면 땅도 사람에게 순종합니다. 창세기 4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여서 아벨의 피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아벨의 피가 땅에 떨어졌다는 말은 가인이 한 행동을 땅이 목격했다는 것을 가리키고 땅이 약자의 증인이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람의 피가 땅에 떨어지니까 땅이 약자 편에 서서 울부짖었습니다. 왜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냐고, 왜 살인을 해서 피를 땅에 떨어 트리냐고 땅이 울부짖었습니다. 땅이 아담에게 등을 돌린 것처럼, 가인이 악을 행했기 때문에 땅이 가인에게도 등을 돌렸습니다. 그래서 가인은 아무리 열심히 밭을 갈아도 농산물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땅이 사람에게 호의적일수도 있고 적대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흙에서 왔으니 마지막 때에 흙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땅에서 왔으니 땅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땅이 우리의 고향입니다. 이것은 겉으로 보면 저주인 것 같지만 우리가 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당연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나라가 망했을 때 끝까지 남아서 농사짓는 사람들을 암하렛츠라고 불렀는데 번역하면 “땅의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땅의 사람들입니다. 땅을 많이 밟으면 건강에 좋다고 합니다. 우리는 땅을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들 중에는 휴거(Rapture),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선택받은 사람들이 공중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못된 신앙입니다. 참된 기독교 신앙은 땅을 버리지 않습니다. 주의 기도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뜻이 하늘에서도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고백하는 신앙이 참된 기독교 신앙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우리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만나기 위해 이 땅으로 내려오신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프고 병들고 오염된 이 땅을 버리지 않으시고 이 땅을 새하늘과 새땅으로 덧입혀 주실 것입니다. 땅을 버리고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지구/땅이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이 영원히 살아야 할 곳입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마태복음 12장을 보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기적/표징을 요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요나가 사흘 낮과 밤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사흘 낮과 밤 동안 땅 속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땅 속에 묻히는 것을 가장 무서워합니다. 누구나 죽으면 땅 속에 매장되어야 합니다. 캄캄한 곳에 묻힌다고 생각하니 무섭기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땅 속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께서도 부활 이전에 사흘 동안 땅 속에 묻히셨습니다. 우리 보다 먼저 땅 속에 매장되셨고 땅 속에서 3일을 지내셨습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땅 위에도 계시고 땅 속에도 계십니다. 이 땅/지구는 없어져야 할 곳이 아니라 우리의 고향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터전인 줄로 믿습니다. 창조절을 묵상하면서 이 땅, 이 지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땅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땅을 밟고 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의 터전, 우리의 고향인 이 땅을 소중히 여기고 아름답게 돌보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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