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첫번째 주일 / 11월 다섯번째 주일

이사야서 64:1-9, 마가복음서 13:32-37

대림절, 진노를 거두어 주십시오

정해빈 목사

 

 

 

 

이집트에서 노예생활 했던 히브리인들은 이집트를 떠나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하나님만을 섬기는 정의롭고 평등한 나라를 세웠습니다. 하지만 고대 이스라엘 국가는 약소국가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주변 강대국들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왕이 죽고 난 후 나라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졌고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 제국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습니다. 아시리아 제국은 사마리아 땅에 다른 민족들을 이주시켜서 서로 피가 섞이도록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을 펴서 우리 민족이 한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 것처럼, 아시리아는 혼혈정책을 통해서 북이스라엘의 전통을 말살시키려고 하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지 대략 135년이 지난 기원전 587년 바벨로 제국이 남유다를 멸망시켰습니다. 바벨론은 남유다의 중요한 사람들을 바벨론 제국으로 포로로 끌고가서 바벨론을 위해서 일하게 했습니다. 아시리아 제국의 식민지 정책이 혼혈정책이었다면 바벨론 제국의 식민지 정책은 포로정책이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히브리인들은 나라가 망한 것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포로생활을 하면서도 율법을 다시 공부하고 구약성경을 편집하면서 민족의 재건을 꿈꾸었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용서하시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바벨론 제국에서 50년 동안 포로생활하면서 첫번째 좌절/고난을 겪었습니다.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 제국은 남유다에서 끌려온 포로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포로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예루살렘 성벽과 성전을 재건하고 나라를 다시 세우려는 꿈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향에 돌아와 보니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어 있었고 고향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타국에서 돌아온 자신들을 적극 환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향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타국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했고, 타국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고향에 남아있던 사람들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무너진 공동체 재건의 꿈은 사라지기 시작했고 남은 것은 서로에 대한 원망과 실망뿐이었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희망은 쉽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사야는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무너지고 공동체가 파괴된 모든 원인이 주님께서 진노하셨기 때문이고 주님께서 진노하신 이유는 우리가 오랫동안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진노하신 것은 우리가 오랫동안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찌 구원을 받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부정한 자와 같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나뭇잎처럼 시들었으니 우리의 죄악이 바람처럼 우리를 휘몰아 갑니다” 고향에 남아있는 사람들도 죄를 지었고 타국에서 돌아온 사람들도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보시고 크게 실망하셔서 우리의 고난을 외면하셨습니다. 옛날에는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고난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지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보시고 진노하셨고 우리를 떠나셨습니다. “아무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주님을 굳게 의지하려고 분발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우리에게서 얼굴을 숨기셨으며 우리의 죄악 탓으로 우리를 소멸시키셨습니다.” 우리의 죄악이 많다면 더 간절하게 주님을 찾고 회개해야 하는데 주님을 간절하게 부르는 사람도 없었고 공동체의 재건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에게서 얼굴을 숨기셨으며 우리의 죄악 탓으로 우리를 소멸시키셨다고 이사야는 고백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 나라를 다시 세우는 과정에서 두번째 좌절/고난을 겪었습니다.

 

토기장이는 진흙을 빚어서 좋은 그릇을 만듭니다. 그런데 토기장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좋은 그릇이 만들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좋은 그릇이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한 토기장이는 그릇을 깨트려서 다시 진흙을 만든 다음에 더 정성을 기울여서 그릇을 다시 빚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해도 좋은 그릇이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화가 난 토기장이는 자신의 정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본래 흙의 재질이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 그 흙을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이와 같다고 이사야는 고백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토기장이가 되시고 우리는 토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받는 좋은 그릇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부르셨고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빚어주셨습니다. 좋은 그릇이 만들어지지 않을 때마다 참고 인내하시면서 우리가 좋은 그릇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시고 여러 번 실망하셨고 좋은 그릇을 만드는 것을 포기하셨습니다. 이사야는 주님께서 진노하시고 우리를 외면하신 것은 우리가 죄를 지어서 좋은 그릇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습에 실망하시고 우리를 버리셨습니다. 하지만 이사야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님은 우리를 빚으신 토기장이이십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이 손수 지으신 피조물입니다. 주님, 진노를 거두어 주십시오. 우리의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 보십시오. 우리는 다 주님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다 주님의 백성이오니 우리를 포기하지 마시고 우리가 주님께 쓰임받는 좋은 그릇이 될 수 있도록 다시한번 기회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코로나19 질병이 다시 확산되면서 전세계가 고통받고 있습니다. 과거의 사례를 보면 1차 확산과 2차 확산과 3차 확산이 지나가야 전염병이 완전히 사라진다고 합니다. 3차례의 확산 중에서 2차 확산이 가장 규모가 크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여러 회사들이 백신을 계발하고 있으므로 질병은 곧 물러갈 것입니다. 평생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을 겪으면서 우리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동안 인류가 자원을 낭비하고 자연을 훼손하고 동식물의 영역을 침범하고 창조질서를 어지럽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실망하시고 진노하시고 우리를 외면하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처럼 이 모든 일은 인류가 교만하였기 때문이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여러번 실망하시고 진노하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죄악을 보며 실망하셨을지라도 인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지금의 고통에서 인류를 다시 건져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님, 코로나로 죽어가는 사람들, 병원에서 치료받는 사람들, 격리생활하는 사람들, 직장을 잃어버린 사람들,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셔서 이 땅을 구원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마가복음 13장 말씀도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니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집주인이 갑자기 와서 너희가 잠자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처럼 좌절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이럴 때일수록 더 간절히 주님을 찾고 더 간절히 기도하고 더 간절히 주님을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우리를 향한 진노를 거두어 주십시오. 우리의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말아 주십시오. 우리는 다 주님의 백성입니다. 다시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며 회개의 기도를 드리오니 저희들의 기도를 받아 주시고 이 땅을 치료하여 주십시오.” 기도하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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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열두번째 주일 / 11월 네번째 주일

마태복음 25:31 - 46

창조절,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정해빈 목사

 

 

 

우리 교회가 속한 캐나다연합교회(The United Church of Canada)는 1925년 캐나다감리교회, 캐나다장로교회 70%, 캐나다회중교회가 합쳐서 시작된 캐나다 최대 개신교단입니다. 당시 캐나다 개신교는 여러 교파들이 난립하면서 서로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3개 교단이 합쳐서 캐나다 사회를 영적/도덕적으로 바르게 이끌고 이민자들에게 선교하기 위해서 캐나다연합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교단은 캐나다 사회에 좋은 역할을 많이 했습니다. 캐나다연합교회가 다문화정책, 전국민의료보험, 사회정의, 성소수자 인권, 환경과 복지를 강조하였기 때문에 캐나다 정부도 이러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올해가 교단 창립 95주년이 되고 2025년이 되면 캐나다연합교회 출범 100주년이 됩니다. 최근에는 캐나다 개신교 최초로 흑인 목사가 캐나다연합교회를 대표하는 총무로 선출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단은 “인종차별 없는 교회, to become an anti-racist church”를 교단의 목표로 정했습니다. 이 목표에 따라서 총회와 위원회와 지역회와 교회에서 인종과 성별을 배려하고 다양성을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인종차별 없는 교회를 교단의 목표로 정했다는 이야기는 뒤집어서 말하면 아직도 교회 내에 인종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아직도 크게 3가지 차별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인종차별이고 두번째는 성차별이고 세번째는 원주민차별입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백인들이 자신들이 가장 우월하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성들은 습관적으로 경솔하게 여성을 비하하고 희롱합니다. 원주민이 아닌 사람들은 이 땅에서 가장 먼저 정착했던 원주민을 미개인 취급합니다. 이 3가지 차별에 모두 해당되는 사람이 원주민 여성들인데 지금도 많은 원주민 여성들이 살해당하거나 학대를 당하고 있습니다.

 

인종차별, 인종 선입관에 대한 예는 우리 주변에 아주 많이 있습니다. 교회 건물 스테인드글라스에 그려진 예수님 얼굴을 보면 모두 똑같이 백인 얼굴입니다. 예수님 얼굴이 그려진 성화를 보면 키가 크고 피부가 하얀 백인 얼굴을 한 사진이 대부분입니다. 고고학자들은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활동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얼굴이 동양인이나 흑인의 얼굴에 가깝다고 말합니다. 영국 BBC 방송은 고고학자들이 상상하는 예수님 얼굴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지난 4년 동안 TV에 등장하는 백악관(White House)의 주요 인사들은 몇몇 백인 여성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백인 남성들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노골적으로 백인 우월주의를 드러낼 수 있을까 놀랍기만 합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흑인 아버지와 인도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흑인/아시아/여성의 장벽을 뚫고 부통령이 된 카멀라 해리스(Kamala Harris)는 “내가 바이든 행정부의 첫번째 여성일지는 모르나 마지막은 아닐 것이며 오늘 밤 이것을 보고 있는 모든 어린 소녀들이 미국이 '가능성의 나라’란 것을 알게 될 것이라”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연설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미국 흑인 정치 평론가/변호사 벤 존스는 대통령 선거 소감을 묻는 CNN 방송사 대담에서 “당신이 무슬림이라면 미국 대통령이 당신이 미국에 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할까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이 이민자라면 미국 대통령이 당신의 아이를 빼돌리거나 아무런 이유 없이 추방할까봐 겁내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부터는 백인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주눅들지 않고 숨 쉴 수 있어서 좋습니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인종차별/성차별/원주민차별의 문제가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서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25장은 종말의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모든 민족을 불러서 양에 속한 사람들은 오른쪽에, 염소에 속한 사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라고 마태는 말합니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은 주님이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습니다. 하지만 의인들은 자신들이 주님에게 그렇게 한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언제 주님에게 그렇게 하였습니까” 말하니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왼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내가 주리고 목마를 때에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언제 우리가 주님을 대접하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똑같은 말씀으로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양과 염소에 속한 사람들 모두 괜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양은 착한 사람들이고 염소는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양에 속한 사람들은 지극히 작은 사람들을 친구처럼 대하였고 염소에 속한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에게는 잘 하였지만 지극히 작은 사람들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같은 무리의 사람들과 교제하고 같이 어울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얼마나 친구가 많은가, 얼마나 사교적인가 이런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시고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이 지극히 작은 사람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모습이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속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지극히 작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모든 성화나 스테인드글라스에는 키 크고 잘 생긴 백인 얼굴을 한 예수님의 얼굴이 그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예수님의 얼굴을 만나려면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노예해방운동을 한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쓰레기 청소를 하는 사람들을 만난 자리에서 쓰레기를 치우지 않으면 전염병이 확산되니까 여러분이 하는 일은 의사들이 수술하는 것과 똑같이 중요한 일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들, 생필품을 배달하는 사람들, 병원과 요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사람들처럼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오늘날의 예수님이라는 것을 오늘 말씀은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시고 우리들 모두를 구원해 주셨고 앞으로 완전하게 구원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은혜와 자비가 풍서하심을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 마태복음 25장 말씀을 보니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들을 양과 염소로 나누시고 칭찬할 사람은 칭찬하고 책망할 사람은 책망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들을 심판하신다고 하니 오늘 말씀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 땅에서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책임이 있기 때문에 칭찬받을 사람은 칭찬받을 것이고 책망받을 사람은 책망받을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사람을 친구로 대하는 사람, 지극히 작은 사람을 돌보고 그것을 기억하지 않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세상에는 아직도 인종차별과 성차별과 원주민차별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더 가난해지고 더 삶이 힘들고 불안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시선이 항상 낮은 곳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이들의 친구가 되고 지극히 작은 사람들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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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열한번째 주일 / 11월 두번째 주일

마태복음 25:1-13, 데살로니가전서 4:13-18

창조절,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정해빈 목사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마태복음 25장은 “열 처녀의 비유”로 알려져 있는 말씀입니다. 옛날 중동지방에서는 결혼할 때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신부를 만난 다음에 신부를 신랑 집에 데리고 가서 혼인잔치를 벌였습니다. 이 때 신부의 친구들은 신랑이 신부 집에 오는 순간부터 신랑 집에서 잔치를 벌일 때까지 시중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신랑이 신부 집에 언제 오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신부의 친구들은 등에 불을 켜고 신랑을 기다렸습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은 등불과 기름을 갖고 있었고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은 등불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한밤중에 신랑이 도착하자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에 불을 켜고 신랑을 맞이했지만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불에 기름이 없어서 신랑을 맞이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불이 꺼져 가니 너희의 기름을 좀 나누어 다오” 이렇게 말하자 슬기로운 처녀들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에게나 너희에게나 다 모자랄 터이니 안 된다. 차라리 기름 장수들에게 가서 사서 써라.”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도착했고 문이 닫혀서 미련한 처녀들은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랑이 늦게 와서 다같이 잠이 들었지만 5명의 처녀들은 신랑이 늦게 올 경우를 대비해서 기름을 준비했고 나머지 5명의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비록 다같이 졸기는 했지만 슬기로운 처녀들은 미리 기름을 준비했기 때문에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전기가 없었기 때문에 등불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등불을 켜야만 내가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주변에 알릴 수 있었습니다. 등불이 없는 사람이 혼인잔치에 오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불청객이나 강도로 취급되었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신랑이 밤중에 올 때에 등불로 자기 얼굴을 비추어서 신랑이 자기 얼굴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해야 하고, 내가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빛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주님이 언제 오시든지 부끄럽지 않도록 의의 등불, 착한 행실의 등불을 켜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마태교회를 위해서 쓰여진 책인데 마태교회 교인들 사이에서는 예수님의 재림이 빨리 오지 않으니까 재림을 기다리지 않고 타락하고 방탕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로마제국도 영원한 것처럼 보였고 종말/재림/심판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종말/재림/심판이 없다면 굳이 경건하고 깨끗하게 살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신랑은 한밤중에 갑자기 들이닥쳤고 등불과 기름을 넉넉하게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는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등불과 기름은 선행/착한 행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16절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항아리) 아래에다 내려놓지 아니하고 등경(등잔대) 위에다 놓아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은 빛의 등불, 착한 행실의 등불을 켜고 신랑을 기다렸습니다. 이 세상이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고 거짓을 일삼고 방탕하고 타락하게 산 사람들은 주님이 오실 때에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빛의 등불, 의의 등불, 착한 행실의 등불, 사랑과 봉사와 섬김의 등불을 켜고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메시지입니다.

 

지난 주에 미국에서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었습니다. 4년 전에 뽑힌 대통령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세금을 탈세하고 여성을 비하하고 불륜을 저질러도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겠다, 백인들의 자존심을 세우겠다는 말 한마디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4년이 지난 후 특히 코로나 19 질병이 확산되면서 한 나라의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국민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현재 매일 15만 명, 총 천만 명이 확진되었고 15만 명이 죽었고 인구 10만 명당 3,000명의 확진자가 발생했습니다. 캐나다는 인구 10만 명당 650명, 한국은 50명의 확진자가 발생했습니다. 지도자가 무능하다는 것을 국민들이 깨닫고 이번에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했습니다. 최근 한국에서는 전직 대통령이 대법원에서 징역 17년형을 선고받고 구속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도 지금 미국 대통령과 비슷합니다. 전과 11범이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은 것을 알면서도 부지런하고 일 잘하고 국민들을 부자 만들어준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그 사람을 뽑았습니다. 평생 쓰고 남을 만큼 돈이 많았으면서도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지 재벌기업으로부터 뇌물을 받았고 대통령직을 이용해서 사적인 이익을 취했습니다. 우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지만 그 날과 그 때는 언젠가는 오게 되어 있습니다. 기름을 준비하고 등불을 켜라는 말은 종말의 때가 오더라도 부끄럽지 않도록 선한 행실의 기름, 빛과 진리의 기름을 준비하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지키 카터(Jimmy Carter) 전 미국 대통령은 그리스도께서 오늘 오후에 오신다고 생각하고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올해 나이 96세인 지미 카터는 대통령에서 물러난 후에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집을 짓는 봉사활동을 했고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일했습니다. 지미 카터는 예수님이 내일 오신다고 하더라도 전혀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에게 종말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에 살아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이끌려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2000년 전 사도바울은 물론이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인데 그때가 되면 주님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에 살아있는 우리가 구름 속으로 올라간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말씀을 상징적으로 이해하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되면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이 땅을 떠나서 주님께로 올라갈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이런 종말 신앙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로마제국 아래에서 살았지만 로마 사람들처럼 방탕하고 나태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깨끗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믿음의 등불을 켜며 주님의 다시오심을 기다렸습니다. 종말신앙을 가져야만 타락하고 방탕한 삶을 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종말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하고 주님이 언제 오시든지 부끄럽지 않도록 빛의 등불을 켜고 하루하루를 경건하게 살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마태복음 24장을 보면 제자들이 주님께 그 날과 그 때를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들 모두는 그 날과 그 때에 관심이 많습니다. 때와 시기를 알 수만 있다면 우리는 미래를 잘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미래를 알지 못합니다. 코로나 질병이 언제 끝날지, 내 인생이 어떻게 될지, 내가 언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언제 나를 부르셔도 당황하지 않도록 늘 깨어 기도하며 빛의 등불, 사랑의 등불, 의의 등불을 밝히며 언젠가 찾아올 그날과 그때를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 부끄럽거나 책망받지 않고 오히려 주님께 칭찬받을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하고 주님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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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여덟번째 주일 / 10월 네번째 주일

신명기 34:1-12, 데살로니가전서 2:1-8

창조절, 아쉬움 속에서 감사를 고백합니다

정해빈 목사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여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상처주는 말과 행동을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꿔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으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나는 자랑스럽게 대답하기위해 지금 나는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놓은 좋은 말과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겠습니다.”

 

김준엽 뇌성마비 시인이 쓴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이라는 시입니다. 윤동주 시인의 시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김준엽 시인이 쓴 시가 맞습니다. 이 시인은 내 인생의 가을이 쓸쓸하지 않도록 더 많이 사랑하고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서 좋은 말과 행동의 열매를 거두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이 아름답고 풍성한 가을열매들처럼 아름답고 풍성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후회와 아쉬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후회와 아쉬움 속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아름답고 감사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의 부름”으로 읽은 시편 90편은 전체 150편의 시편 중에서 유일하게 모세가 쓴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모세는 주님께서 대대로 우리의 거처/안식처(dwelling place)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은 세계가 생기기 전부터 계셨고 영원부터 영원까지 살아계십니다. 주님 앞에서는 천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 순간과도 같습니다. 풀이 아침에 돋아나서 꽃을 피우다가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리는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거두시면 우리의 인생은 한 순간의 꿈과 같이 사라져버립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빠르게 날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비교하면 우리의 시간은 너무도 짧기만 합니다. 하지만 모세는 우리에게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짧기 때문에 값어치가 있습니다. 원래 귀한 것들은 항상 부족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짧은 인생을 사는 동안 우리를 인도해 주시고 때가 되면 주님의 품으로 부르셔서 영원히 안식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시간이 너무 짧고 우리의 삶에 후회도 있고 아쉬움도 있지만 삶에서 죽음에서 죽음을 넘는 삶에서 언제나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주님은 언제나 우리가 편안히 머무를 영원한 거처(dwelling place)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집이 없는 사람은 집을 떠났다가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대대로 우리의 거처/안식처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는 안식할 수 있고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신명기 34장 말씀을 보면 모세가 느보산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인생을 마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가나안 땅을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120세였고 그의 눈은 빛을 잃지 않았고 기력은 정정하였습니다. 그의 인생에는 성공의 순간도 있었고 실패의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는 이집트 바로왕과 담판을 벌였고 히브리 노예들과 함께 이집트를 탈출하였고 홍해바다를 건넜고 하나님과 계약을 체결하였고 40년 광야 생활을 지나서 가나안 땅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가족을 잘 돌보지 못했고 젊은 시절에 동포를 괴롭히는 이집트 사람을 보며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가 실패하였고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내려오다가 금송아지를 섬기는 백성들을 보고는 화가 나서 십계명 돌판을 깨트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또한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바라보기만 하고 들어가지 못한 것은 모세 입장에서 보면 분명 아쉽고 억울한 일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또한 모세만큼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서 산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는 이집트 제국과 대결했고 말 안 듣는 히브리 백성들을 이끌고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그렇게 스트레스 많은 인생을 살면서도 120세까지 장수하였고 마지막까지 기력이 쇠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모세를 보며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평생의 목표였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모세는 얼마나 억울했을까, 둘째로 그렇게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모세는 어떻게 그렇게 마지막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억울하고 아쉬움 많은 인생을 살면서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히브리 동포들을 축복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신명기 34장을 읽었는데 바로 앞장 신명기 33장을 보면 모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히브리 백성들을 축복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의 마음 속에는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 섭섭하고 히브리 백성들에게 섭섭한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고 동포들의 미래를 축복해 주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주님을 의지하고 감사하였기 때문에 모세는 120세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내 인생에 후회와 아쉬움이 있을지라도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아쉬움이 있지만 지난 삶을 되돌아보며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후손들을 축복한다면 우리도 모세처럼 마지막까지 건강하고 아름답게 인생을 마무리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거처/안식처가 되시니 우리는 불안해 할 필요도 없고 아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원하는 것을 다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항상 감사하고 후손들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감사하고 축복하면 오래 삽니다. 장수의 비결은 감사와 축복에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우리는 어느 때든지 아첨하는 말을 한 일이 없고 구실을 꾸며서 탐욕을 부린 일도 없습니다. 우리는 또한 여러분에게서든 다른 사람에게서든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한 일이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권위를 주장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서 마치 어머니가 자기 자녀를 돌보듯이 유순하게 처신하였습니다.” (살전 2:5-7) 사도바울은 자신이 교회를 세웠기 때문에 사람들의 영광/대접을 요구할 수도 있었고 권위를 내세울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권위를 내세우지도 않았습니다. 마치 어머니가 자기 자녀를 돌보듯이 유순하게 처신하였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면서도 개인적인 명예/영광/탐욕을 부리지 않았고 항상 감사하며 겸손하게 처신했기 때문에 초대교회의 존경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모세와 사도바울 모두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성공할 때도 있었고 실패할 때도 있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많은 시련과 스트레스를 겪으면서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 어디서든지 항상 감사하였고 이웃을 축복하였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원하는 것을 다 얻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쉬움이 있지만 이미 많은 복을 받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의 안식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부름받고 쓰임받은 것만으로도 우리는 주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의 삶에 아쉬움이 있을지라도 지난 삶을 되돌아보며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드리고 후손들을 축복하며 인생을 마감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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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일곱번째 주일 / 10월 세번째 주일

출애굽기 33:17-23, 데살로니가전서 1:1-10

창조절, 나의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다

정해빈 목사

 

 

 

옛날 고대 종교들은 눈을 즐겁게 하는 종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집트/가나안에 있는 종교들은 큰 동상/성전을 만들었고 화려한 옷을 입은 제사장/무당들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옛날 종교들이 큰 건물을 짓고 화려한 제사장/무당들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그래야 권위를 세울 수 있고 사람들을 끌어 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눈을 즐겁게 하는 종교는 눈에 보이는 화려함과 쾌락으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그래서 거짓된 종교일수록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다른 고대 종교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다른 종교들의 유혹을 많이 받았습니다. 다윗/솔로몬과 헤롯이 예루살렘 성전을 크게 지은 것도 다른 종교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종교들은 큰 성전과 화려한 제사장/무당들을 가지고 있는데 자신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으니까 초라해 보입니다. 그래서 다윗/솔로몬과 헤롯은 다른 종교들과 비슷하게 보이려고 예루살렘 성전을 크게 지었고 많은 제사장들로 하여금 성전을 관리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히브리 백성들에게 십계명의 두번째 계명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 나를 위해서 하늘과 땅과 땅 아래 모양을 본떠서 눈에 보이는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옛날 종교들은 다 신을 상징하는 형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금하셨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기독교는 눈의 종교가 아니라 말씀을 귀로 듣는 귀의 종교이고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주님의 성품을 마음으로 닮아가는 마음의 종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눈의 종교가 아니라 귀와 마음의 종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다른 종교보다 수준이 높습니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 입장에서는 눈에 보이는 화려한 다른 종교가 매력적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에 묵상했던 것처럼, 히브리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없을 때 십계명을 어기고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히브리 백성들에게 나를 위해서 눈에 보이는 형상을 만들지 말고 오직 자비로우시고 진실하시고 긍휼이 많으신 주님의 성품만을 본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고 하나님의 성품을 마음으로 본받음으로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첫 번째로 읽은 출애굽기 33장을 보면 금송아지 사건이 지난 후에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히브리 백성들을 이끌고 가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잘 알고 또 너에게 은총을 베풀어서 네가 요청한 이 모든 것을 다 들어 주마" 약속하셨습니다. 모세가 기도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았고 최고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많은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왕에게 10가지 재앙을 내렸고 홍해 바다를 나누었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 주셨고 바위를 지팡이로 쳐서 물이 나오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주님의 영광을 지금 보여달라고 말했습니다. 과거에 아무리 많은 기적을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과거일이고 지금 힘드니까 지금 당장 큰 능력을 보여 달라고 말했습니다. 모세도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성품보다 눈에 보이는 영광/기적에 매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도 모세처럼 히브리 백성들처럼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영광/기적/축복을 받기 원합니다. 우리 중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하나님, 저는 주의 말씀을 귀로 듣고 주님의 성품을 마음으로 닮아가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저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저에게는 눈에 보이는 영광/기적이 필요 없습니다. 지금까지 너무 많은 축복을 받았으니 저에게 주실 복이 있으면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다른 사람에게 복을 베풀어 주십시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고 내 힘만으로는 현재와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확실한 영광/축복을 계속 바라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의 영광이 지나갈 때에 네가 나의 등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 말씀하셨습니다. 얼굴은 볼 수 없고 등만 볼 수 있다는 말씀은 눈에 보이는 기적을 기대하지 말고 등 뒤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마음/성품을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 신앙의 위대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할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오직 자비로우시고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의 성품만을 의지하며 신앙생활 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얼굴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눈에 보이는 영광/기적/얼굴을 따라가는 신앙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기적을 쫓아가는 사람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하나님께 실망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영광/기적/얼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가 필요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자비가 필요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마음을 믿으며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어떠한 고난이 와도 자비로운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고난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2차 선교여행 중에 유럽에 건너가서 제일먼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했고 그 다음에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데살로니가전서 1장에서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이 환난을 당하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말씀을 묵상하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칭찬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많은 환난을 당하면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서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우리를 어떻게 영접했는지, 어떻게 해서 여러분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살전 1:6, 9) 여기 보시면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표현이 나오고 “우상을 버리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긴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옛날 로마제국 시대에는 어느 도시를 가든지 눈에 보이는 우상들과 신전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리스/로마제국이 자랑하는 눈을 즐겁게 하는 우상들을 버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은혜/긍휼의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2000년이 지나고 보니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하는 건물/동상/우상들은 다 사라졌지만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은혜/긍휼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의 얼굴/영광/기적을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성품만을 의지하며,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김을 받을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성품만을 의지하면서 신앙생활 할 수 있겠냐고 물으셨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기적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기적을 원하는 사람은 기적이 떨어지면 신앙을 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가 풍성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진실하시고 나를 치료하시고 나를 끝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귀로 말씀을 묵상하고 마음으로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신앙이 가장 복된 신앙입니다. 비록 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나는 홀로가 아니요 언제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이 믿음이 나를 지켜줄 줄로 믿습니다. 언제나 항상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시고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거친 세상을 담대하게 헤쳐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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