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세번째 주일 / 4월 세번째 주일

누가복음 24:36-48, 사도행전 3:12-15

부활절, 트라우마에서 증인으로

정해빈 목사

 

 

폴란드의 작가 헨리크 센케비치는 [쿼 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라는 소설을 써서 1905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이 말은 라틴어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는 뜻입니다. 이 책을 내용으로 하는 영화가 만들어졌습니다. 베드로는 네로황제의 박해를 피해서 로마제국의 수도 로마를 떠나 지중해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당황한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고 묻자 주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내 양을 버리고 온 로마로 가서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려고 한다.” 이 말에 충격을 받은 베드로는 가던 길을 돌이켜 로마로 돌아가서 그곳에서 순교합니다. 한편 로마제국의 청년 장교 비니키우스는 기독교인 리디아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고 같이 붙잡히게 됩니다. 그때 같이 붙잡힌 베드로가 이들의 결혼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네로황제는 로마에 불을 지르고 기독교인들에게 누명을 씌웠습니다. 두 사람은 원형 경기장에 묶이게 되는데 같이 잡혀온 노예가 들소와 싸운 끝에 그들을 구해 줍니다. 성경 66권에 포함되지 않은 외경(外經, Apocrypha) [베드로행전]에 베드로 순교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3번 부인했고 지중해로 도망갔던 베드로, 예수님을 부인했던 것 때문에 트라우마에 시달렸던 수제자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모든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로마에서 복음을 전했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처럼 순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기독교 박해가 가장 심했던 시대는 네로황제 시대가 아니라 기원후 250-300년경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이 내외부적인 환경으로 흔들릴 때 황제들은 황제숭배를 강요하였고 이것이 기독교 박해의 주원인이 되었습니다. [쿼 바디스 도미네] 이야기와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누가복음 이야기는 예수님이 처형당하신 후에 제자들이 어떤 상처/트라우마를 겪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트라우마 혹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는 사람이 전쟁, 자연재해, 폭력, 사고 등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후에 발생하는 육체적/정신적 외상, 심리적인 반응을 가리킵니다. 외부적인 큰 사건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학대, 따돌림, 괴롭힘, 배신 등이 사람에게 우울증/무기력 같은 트라우마를 일으킵니다. 트라우마를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과거의 충격을 극복하지 못하면 사람은 그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과거의 충격을 극복한 사람은 그 충격을 목격한 증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충격이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사회에 기여할 수도 있고 같은 경험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도 있습니다. 트라우마는 너무도 큰 충격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고 사회제도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고 영적인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은 예수님의 처형 이후에 제자들에게 어떤 트라우마가 일어났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처형에 실망한 두 제자는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중 한 제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를 넘겨주어서 사형선고를 받게 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서 그분에게 소망을 걸고 있었던 것입니다.”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로마의 억압에서 해방시켜 주실 것을 제자들은 기대하였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처형된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가난한 자를 먹이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던 능력있는 주님께서 무력하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제자는 충격을 받아서 엠마오로 도망갔고 베드로는 지중해로 피신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단 3일 만에 이루어진 것으로 묘사를 합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이해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고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부활을 깨닫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고난을 이해하는데 10년이 걸렸을 수도 있고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부활을 이해하는데 10년이 걸렸을 수도 있습니다. 큰 충격/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제자들은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수난받는 메시야를 예언했던 구약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의 고난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승리하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도 나오지만 반대로 이사야 53장처럼 우리를 위해 고난받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도 나옵니다. 제자들은 고난받은 메시야를 예언한 구약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의 고난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예수님의 고난을 깨닫는 과정을 설명한 이야기가 누가복음 24장입니다.

 

두 명의 제자들이 엠마오를 향해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과 동행하였고 두 사람에게 당신의 고난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당신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마음이 그렇게도 무디니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마땅히 이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예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에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서 자기에 관하여 써 놓은 일을 그들에게 설명하여 주셨다.” 두 명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첫째로 예수님이 들려주신 성경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고난을 이해하기 시작하였고 둘째로 여관방에서 함께 나누었던 성찬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깨달았고 셋째로 이 사건은 3명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온전하게 이해하려면 3가지 과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말씀묵상을 통해서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깨닫기 시작했고 성찬을 통해서 더 확실히 깨달았고 3명의 만남을 통해서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말씀과 성찬이 이루어지는 곳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영으로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겪는 충격/트라우마는 혼자서 벗어날 수 없고 두명이 모여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3명이 모여야 합니다. 3명 이상의 공동체가 모여야 과거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3명 이상의 사람이 모여서 말씀과 성찬을 나누는 곳이 교회입니다.

 

엠마오로 향했던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서 다른 제자들에게 자신들의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주님이 유령이 아니라는 것과 주님이 새로운 몸으로 부활했다는 것을 그들에게 다시한번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의 손과 발을 보여주셨고 그들과 같이 식사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부활이 착각이 아니라 그들이 분명하게 체험할 수 있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왜 메시야가 고난받아야 하는 지를 다시한번 가르쳐 주셨습니다. 앞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고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주님과의 다양한 만남을 통해서 주님의 십자가 처형이 가져온 충격/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주님의 부활을 알리는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3장에서 동포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제자들이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이 수치스러운 사건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건이 되었습니다. 메시야의 죽음 때문에 트라우마에서 시달렸던 제자들은 자신들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부활의 증인이 된 것을 세상에 알리고자 마태/마가/누가/요한복음을 기록했습니다. 부활신앙은 우리를 일으켜 줍니다. 부활신앙은 트라우마를 증인으로 만들어 줍니다. 어떤 과거의 충격도 우리의 부활신앙을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과거의 충격과 상처와 절망에서 벗어나 부활의 증인으로 이 땅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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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두번째 주일 / 4월 두번째 주일

요한복음서 20:19-31

부활절, 불안한 존재에게 평화를 주시다

정해빈 목사

 

20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인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현대인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현대인들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그만큼 더 큰 불안을 느끼며 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보기에 현대인들은 크게 3가지의 이유로 불안을 느끼고 있습니다. 첫째로 현대인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불안을 느낍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옛날에도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의학기술의 발달로 수명이 길어졌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옛날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한 대량살상무기, 테러, 집단전염병, 자연재해, 기후변화 등으로 인한 새로운 죽음을 만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죽음에 대한 공포가 현대인들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둘째로 현대인들은 삶에 대한 회의 때문에 불안을 느낍니다. 옛날보다 먹고 살기는 좋아졌지만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삶에 아무런 의미와 목적을 찾지 못할 때, 왜 살아야 하는 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할 때, 삶이 지루하고 힘들 때, 사람들은 불안을 느끼게 됩니다. 셋째로 사람들은 죄/죄책감 때문에 불안을 느낍니다. 옛날에 비해서 세상사는 것이 더 힘들고 복잡해졌습니다. 복잡한 세상을 살다보니 양심의 가책을 받을 일도 많아졌고 경쟁할 일도 많아졌고 이웃에게 죄를 지을 일도 많아졌습니다.

 

폴 틸리히는 현대인들이 겪는 이 3가지의 불안, 죽음의 공포 때문에 오는 불안, 삶의 공허함 때문에 오는 불안, 죄책감 때문에 오는 불안을 극복하는 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처럼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이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부활신앙입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죽음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도 예수님처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할 것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때가 되면 죽어야 하지만,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요, 죽음 이후에 부활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기에 우리는 죽음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둘째로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삶의 공허함과 무의미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부활신앙은 내가 살아야만 하는 이유와 내가 해야 할 사명을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고난에서 일으켜 주신다는 것을 굳게 믿기 때문에 삶을 긍정하면서 기쁨과 감사함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셋째로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죄책감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가 이 복잡한 세상을 살면서 서로 경쟁하고 상처주고 다투면서 산다 하더라도 부활의 주님께서 제자들의 허물을 용서하셨던 것처럼, 부활의 주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우리들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20장에 의하면, 부활절 저녁에 제자들이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닫아걸고 있을 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평화와 성령을 주시고 그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여러분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내가 세상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였으니 세상을 무서워하지 말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불안한 것은 세상이 무섭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평화를 주셨습니다. 이 평화는 제자들에게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고 세상으로 전파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 사람들의 죄와 불안을 씻어주면 죄와 불안이 사라질 것이요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지 않으면 죄와 불안이 사람들에게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와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해방시켜야 할 사명이 제자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연약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항상 삶에 대한 불안이 있습니다. 삶에 대한 불안, 건강에 대한 불안, 미래에 대한 불안, 죽음에 대한 불안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피해 집안에 숨었던 제자들처럼, 우리도 때로는 이러한 죄와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을 피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오늘날 겪고 있는 것처럼 코로나 전염병이 두려워서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을 피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겪는 불안과 두려움은 세상에서 도피한다고 해서 없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활의 능력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습니다.

 

불안과 관련하여 옛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신들이 많았는데 불안의 신이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달라고 하늘의 신에게 부탁했습니다. 불안의 신은 자기가 사람을 빚었으므로 사람이 자기 소유라고 말했고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은 하늘의 신은 자기가 생기를 넣었으므로 사람이 자기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땅의 신이 등장해서 사람이 본래 흙에서 나왔으니 사람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3명의 신은 사람의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는 지를 최고의 신인 제우스 신에게 물었습니다. 제우스 신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늘의 신은 사람이 죽은 다음에 하늘의 생기를 가져가시오, 땅의 신은 사람이 죽은 다음에 육체를 가져가시오, 불안의 신은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 사람을 소유하시오.” 로마 사람들은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불안의 신의 소유가 되고 사람이 죽은 다음에 영혼은 하늘의 신의 소유가 되고 사람이 죽은 다음에 육신은 땅의 신의 소유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로마 사람들의 생각처럼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에 매일매일 불안의 신의 지배를 받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 걱정하고 불안해하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와 성령을 주신 후에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셨습니다.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안을 이길 수 있는 부활 소식을 그들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도마가 나타나서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일주일 후에 다시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시대에 태어나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못자국과 옆구리를 만질 수 있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우리도 도마처럼 주님의 못자국과 옆구리를 만질 수 있다면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증거를 보아야만 주님의 부활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불안을 씻어주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주고 사람들을 일으켜주는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을 체험하는 것은 못자국을 만졌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세계 곳곳에서 부활을 온 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을 뚫고 부활의 삶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는 부활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은 불안한 존재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여러분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말씀하셨습니다. 3차원 또는 4차원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나타나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움과 불안을 이기고 부활백성으로 이 땅을 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열매가 되신 것을 믿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활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음을 믿습니다. 모든 의인들과 순교자들이 그리스도를 따라서 죽음에서 일어나게 될 것을 믿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부활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나타나심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찾아가셨던 것처럼, 우리들도 죄와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일으키고 그들에게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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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 4월 첫번째 주일

요한복음서 20:13-18, 고린도전서 15:12-20

부활절, 잠든 사람들의 첫열매가 되셨습니다

정해빈 목사

 

 

 

우리가 살고있는 캐나다 주거지 주변을 자세히 걷다보면 무덤/공동묘지가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래된 교회/성당을 가보면 교회당 뒷마당에 성도들을 위한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살아있는 성도들은 매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당을 찾을 때마다 먼저 죽은 가족들을 만납니다. 동양 문화권에서는 무덤이 주거지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서양 문화권에서는 주거지와 가까이 있습니다. 삶과 죽음이 떨어져 있지 않고 부활을 믿는 기독교 신앙이 이런 문화에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2020년부터 시작된 코로나19로 인해 미국에서는 50만 명 이상, 캐나다에서는 2만 명 이상이 가족들과의 만남이나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갑작스럽게 감염되어서 세상을 떠난 사람들과 그 가족들이 겪었던 고통을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성경은 이 땅에서 정상적인 삶을 마치고 죽는 것을 가리켜서 조상에게로 돌아갔다, 하나님께로 돌아갔다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태어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나 사고나 재해나 질병으로 인한 갑작스러운 죽음은 정상적인 죽음이 아니라 죽임이요 고통이요 불의요 사망이요 원수입니다.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인류는 불의한 죽음의 권세로 인해 고통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죽음을 목격하며 우리는 우리의 죄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고 우리는 창조질서를 따르지 않았고 우리는 이웃을 살인하였고 우리는 자연을 파괴하였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탄식하며 모든 피조물이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는 날이 오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요한복음 20장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서 슬피 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두가지 때문에 울었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이 처형당하셨다는 것 때문에 울었고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보고 울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경험하는 죽음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보며 슬퍼합니다. 만약 거기에 더해서 고인의 시신을 볼 수 없다면 우리의 슬픔은 더 커질 것입니다. 고인을 애도하려면 고인의 시신이 있어야 합니다. 코로나 질병으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시신을 볼 수 없었던 가족들은 마리아가 경험했던 슬픔을 똑같이 경험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죽음과 슬픔이 끝이 아니요 부활의 놀라운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울고 있을 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마리아가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주님이 과거의 모습이 아니라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는 슬피 우는 마리아를 위로하시고 가서 제자들에게 부활소식을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었으니 이제 다시 하늘로 올라갈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요 죽음 이후에 새로운 부활의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불의한 권력자들이 예수님을 죽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무덤에서 일으켜 주셨습니다. 악을 행하는 불의한 권력자들의 삶이 틀렸고 예수님의 삶이 옳았다는 것을 부활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만약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죽은 사람의 부활이 있기 때문에 주님도 부활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먼저 부활하셨기 때문에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살다 죽은 성도들, 순교자들, 의를 실천하다가 죽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서 부활할 것을 바울은 굳게 믿었습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의로운 보상을 받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은 영원히 슬퍼할 것입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악을 행하며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추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부활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에 죽은 자의 부활이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동방정교회 부활절 그림을 보면 부활의 주님께서 무덤에 있는 의인들의 손을 잡고 그들을 일으키는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부활신앙을 믿기 때문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악을 행하는 권세자들은 잠시 세상을 호령할지라도 영원히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심판하시고 의인들을 무덤에서 일으키시고 그들에게 새로운 부활의 몸을 입혀 주실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 희생된 사람들, 전쟁으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 사고나 재해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 코로나19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사람들을 기억하시고 그들에게 부활의 은혜를 내려 주실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죽은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무덤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슬퍼하는 마리아를 위로하신 그리스도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슬픔 가운데 사는 모든 이들을 위로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부활신앙을 바라보며 세상의 절망과 싸워 이기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We have seen many tombs and countless deaths these days that could not have proper tombs since the outbreak of COVID-19. The pandemic brutally took our loved ones. We have been going through hard times these days. We cannot have social gatherings, we cannot join weddings or funerals, and even we cannot see our parents who stayed in long-term care. This is hard and painful. We are grieving and weeping over innumerable losses. As the Bible testifies, sudden death due to war or disease is our enemy and injustice. From the beginning to the present, humankind has suffered from the power of unjust and wrongful death. Witnessing these many deaths, we are compelled to confess our sins before God. Truly we have sinned against God, we have disobeyed the order of creation, we have murdered our neighbors, and we have destroyed nature.

 

According to John chapter 20, Mary Magdalene cried not only Jesus was executed, but also Jesus' body was missing. But the risen Christ appeared to her. This story reminds us of the fact that death is not the end of everything, but a new life of resurrection awaits us after death. Although the world's unjust powers killed Christ, God raised him up from the grave. Through the resurrection, God revealed to us that the lives of the evil powers were wrong and the life of Jesus was right.

 

In 1 Corinthians chapter 15, from Paul's confession, we can also see another insight about resurrection. Paul asserts that if there is no resurrection of the dead, then Christ has not been raised and if Christ has not been raised, then our proclamation has been in vain and our faith has been in vain. His message is clear. Christ has been raised from the dead and become the first fruits of those who have died. We can see through Paul's testimony that the resurrection of Jesus is not a one-time event, but the beginning of the resurrection of all the righteous. Paul firmly believed that those who devoted their lives before God and those who sacrificed their lives for justice would be resurrected after Christ on the last day.

 

If we look at the Eastern Orthodox paintings, we can see the resurrected Christ holding the hands of the righteous in the tomb and raising them up. We do not despair because we believe in this kind of resurrection. On the last day, God will judge the wicked, raise the righteous and clothe them with a new body. Truly Christ has been raised from the dead, the first fruits of those who have died.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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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고난주일 / 3월 네번째 주일

마가복음서 11:1-11, 요한복음서 12:12-16

종려주일, 폭력의 행진과 평화의 행진

정해빈 목사

 

 

오늘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종려주일/고난주일입니다. 4개의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머무셨던 마지막 일주일을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복음서 내용의 절반을 할애해서 예수님 마지막 일주일을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일요일에 입성하셨고 월요일에 성전을 심판하셨고 화요일에 성전 제사장들 및 헤롯 당원들과 토론하였고 수요일에 마르다/마리아/나사로의 집에서 식사하셨고 목요일에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다가 로마 병사들에게 붙잡히셨습니다. 금요일 새벽 대제사장들과 빌라도 총독에게 심문받으시고 오전 9시 십자가에 매달리셨다가 오후 3시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일주일 전 오늘 일요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유월절은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명절이었습니다. 해외에서 사는 유대인들과 시골에서 사는 유대인들이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찾았습니다. 옛날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주셔서 조상들을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셨듯이,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주셔서 로마의 억압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 주실 것을 그들은 기도하였습니다. 로마제국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는 유월절날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 해안가에 있는 기병대와 보병을 예루살렘으로 행진시켰습니다. 기병대와 보병은 칼과 창을 들고 말을 타고 화려한 복장을 하면서 서쪽 문을 통해서 예루살렘 성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로마제국은 무력시위를 통해서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였고 백성들을 위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시간에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동쪽 문을 통해서 성전에 들어오셨습니다. 빌라도의 행진은 폭력의 행진을 가리키고 예수님의 행진은 평화의 행진을 가리킵니다. 로마제국은 군마를 타고 행진하였고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행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행진을 통해서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빌라도의 행진이 폭력을 과시하고 제국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면, 예수님의 행진은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은 빌라도의 행진을 환영하지 않았고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영하였습니다.

 

왕이나 군대장군은 전차나 군마를 타고 도시에 입성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도시에 입성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어미 나귀를 타셨고 그 옆에 새끼 나귀가 어미 나귀를 따라다녔다고 기록했습니다. 반면에 마가/누가/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새끼 나귀를 타셨다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의 기록처럼 새끼를 돌보는 어미 나귀를 타셨을 수도 있고 다른 복음서들의 기록처럼 어린 나귀를 타셨을 수도 있습니다. 어미 나귀이든 새끼 나귀이든 나귀는 전쟁할 때 타는 동물이 아니라 집에서 기르거나 농사지을 때 필요한 작고 온순한 동물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셨다는 이야기는 예수님이 백성들을 짓밟는 권력자가 아니라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겸손하신 왕, 평화의 왕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두가지 행동을 하셨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예루살렘 평화 행진을 통해서 로마제국의 폭력에 저항하셨고 둘째로 부패한 예루살렘 성전을 폐쇄하심으로 종교권력에 저항하였습니다. 정치권력에 반대하고 종교권력에 반대했던 이 두가지 사건 때문에 예수님은 붙잡히셔서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은 폭력을 사용해서 악에 저항하지 않으시고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악에 저항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먹이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악령을 쫓아내시고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말씀으로 사람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은 이런 예수님을 두려워하였고 음모를 꾸며서 밤중에 은밀하게 예수님을 체포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종려주일에 행하셨던 평화의 행진을 우리가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세상에는 폭력의 행진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평화의 행진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을 차별하고 약자를 억압하고 조롱하고 지배하는 폭력의 행진을 멈추어야 합니다. 지난 3월 16일 미국 애틀랜타에서는 21살의 백인 청년이 마사지 업소 3곳에 총을 난사해서 총 8명이 사망하였는데 그중에 7명이 여성이었고 4명이 한인 여성이었습니다. 뉴스에 의하면 독실한 보수 기독교인이었던 이 청년은 선악에 사로잡혀서 마사지 업소에서 일하는 아시아 여성들을 악이라 생각하고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잘못된 증오에 갇혀 있는 사람은 약자를 대상으로 화풀이를 합니다. 가장 만만하고 약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화풀이를 합니다. 일부 미국 백인 남성들에게 여성혐오주의(Misogeny), 아시아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 남부지역은 바이블벨트라고 불릴 만큼 보수적인 기독교의 영향력이 강한 곳인데 남성우월주의/가정폭력/성폭력/성차별이 가장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잘못 믿으면, 성경을 잘못 읽으면 주님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남성우월주의/인종차별/성차별의 배후에 잘못된 기독교 신앙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잘못 믿으면, 예수님의 삶을 따르지 않고 잘못된 선악에 사로잡히면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고 유럽 기독교인들이 원주민들을 죽이는 일이 반복될 것입니다. 기독교가 어떤 하나님을 믿을 것인지, 폭력의 행진을 할 것인지 아니면 평화의 행진을 할 것인지를 이 사건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주님을 환영하였습니다. 종려나무는 대추열매를 많이 맺기 때문에 다산을 상징하고 오아시스에서 자라기 때문에 물과 생명을 상징합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히브리 백성들이 광야를 걸어가다가 종려나무를 보며 기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종려나무가 있는 곳에는 오아시스가 있고 물과 그늘이 있습니다. 종려나무는 땅 속 깊은 곳까지 뿌리를 내리고 위로는 30미터까지 올라가고 나무를 베고 남은 그루터기를 불태워도 그 그루터기에서 다시 싹이 나기 때문에 고난을 이기는 용기와 강인한 생명을 상징했습니다. 또한 옛날 사사 드보라가 종려나무 아래에서 공정한 재판을 진행했기 때문에 종려나무는 공정한 재판과 정의를 가리켰습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주님을 향해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주님, 우리에게 종려나무와 같은 풍성한 생명과 안식을 주십시오.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 공정한 재판과 정의를 주십시오.”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삶을 어린 나귀와 종려나무로 비유했습니다. 어린 나귀는 평화와 섬김을 가리키고 종려나무는 고난을 견디는 용기와 생명과 정의를 가리킵니다. 어린 나귀는 무거운 짐을 들고 묵묵하게 길을 걸어가고 종려나무는 메마른 사막에서 뿌리를 깊게 내려 물을 찾아내고 오하시스를 만들어 줍니다. 만약 인류에게 희망이 있다면 나귀처럼 무거운 짐을 들고 묵묵하게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인류에게 희망이 있다면 종려나무처럼 메마른 사막에 물을 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나귀같은 삶을 사셨고 종려나무 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슈바이처 박사의 말대로 예수님은 죄악의 낭떠러지로 향하고 있는 인류의 수레바퀴를 막기 위해서 홀로 저항하셨고 그 결과로 거대한 수레바퀴에 짓눌려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자기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악의 낭떠러지에서 깨어날 수 있었고 잘못된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갈 것인가? 죄악의 낭떠러지로 끌고 갈 것인가, 생명과 평화와 정의의 방향으로 끌고 갈 것인가는 우리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평화의 길을 우리들도 동참할 때, 폭력과 차별과 죄악의 수레바퀴는 그 발걸음을 멈추게 될 것입니다. 종려주일/고난주일을 묵상하며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종차별과 독재와 폭력의 행진을 멈추고 평화의 행진을 묵묵하게 걸어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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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다섯번째 주일 / 3월 세번째 주일

예레미야서 31:31-34, 요한복음서 12:20-26

사순절, 가슴에 새기는 새언약

정해빈 목사

 

 

구약성경에 기록된 예언자들 중에서 가장 강렬하고 고통스러운 인생을 산 사람이 예레미야입니다. ‘눈물의 선지자’로 알려진 예레미야는 기원전 627년 하늘의 소명(召命)을 받고나서 약 50년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근처 베냐민 아나돗 마을의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이 남유다를 멸망시킬 것이라고 예언하였고 실제로 남유다가 멸망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는 남유다가 바벨론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것이 역사의 순리라고 말하였고 이러한 예언 때문에 남유다의 지도자들과 예루살렘 백성들로부터 조롱과 모욕을 받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그는 베로 허리띠를 묶고 항아리를 깨트리고 멍에를 목에 매는 등 상징적인 행동을 통해서 남유다가 심판받을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고 비판하였고 성전이 고아/과부/나그네를 돌보지 않고 정의를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제사를 많이 드린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이런 예언을 하자 제사장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달려들었습니다. 궁중 예언자였던 하나냐는 예레미야를 비판하면서 이미 포로로 끌려간 포로들이 2년 만에 다시 돌아올 것이고 바벨론이 가져간 성전 기구들을 다시 돌려줄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포로들이 70년 만에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보니 예레미야의 예언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역대기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50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70년 동안 회개하고 땅이 안식을 누리는 시간이 필요했다고 해석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사람들의 조롱과 모욕을 견디지 못하고 예언을 중단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가슴속에서 불과 같이 타올라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오늘 우리가 읽은 예레미야서 31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언약을 주실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옛날 히브리 백성들은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되었을 때 시내산에서 언약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히브리 백성들이 과거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어 세상의 빛이 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 민족이 되기를 바라셨고 이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언약/십계명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히브리 백성들은 시내산에서 받은 언약/십계명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를 비롯해서 많은 예언자들이 언약/십계명을 잘 지키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계명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고 그 결과로 인해 망국의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지켜본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남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때 그들에게 새언약을 주실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옛언약이 돌판에 기록되었다면 새언약은 백성들의 마음에 기록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옛날 조상들은 돌판에 새겨진 십계명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들이 언약을 잊지 않도록 그들의 마음에 새겨주겠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예언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찬양하면서 마지막 때가 되면 세상 모든 민족이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부패하고 타락한 성전을 찬양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성전에 가지 않아도 세상 모든 민족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사람은 때때로 자신의 행동이 죄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죄를 저지를 때가 있습니다. 죄를 알지 못해서 저지르는 죄는 심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이 죄를 저지르는 것은 죄를 알지만 죄를 무시하고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범법자를 가리고 법을 공정하게 집행해야 하는 검사/판사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법을 악용합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땅을 개발해야 하는 주택공사 직원들이 자신들만 아는 정보를 이용해서 부동산 투기를 합니다. 미국 Wall Street의 금융회사들이 이익에 눈이 멀어 잘못된 금융상품을 만들어서 일반 투자자들의 자산을 빼앗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계약서를 체결하기도 하고 비밀준수서약, 이해관계충돌방지서약, 직무서약을 하기도 합니다. 단체와 단체, 단체와 개인, 개인과 개인이 언약/계약/서약을 맺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서약을 마음에 새기지 않으면 그러한 서약은 휴지조각이 되고 말 것입니다.

 

캐나다 역사를 보면 영국 혹은 캐나다 정부가 원주민들과 계약을 맺었다가 그 계약을 지키지 않는 경우가 여러번 있었습니다. 1899년 빅토리아 영국 여왕은 한반도의 4배에 해당하는 캐나다 알버타주의 자원과 토지를 원주민들과 영국이 나눠쓰기로 조약을 맺었습니다. 그 지역 근처에 있는 루비콘 호수는 이 조약에 해당되지 않았기 때문에 원주민들은 호수에서 자유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50년이 지난 후에 루비콘 호수 근처에 천연가스와 석유가 묻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었고 많은 석유회사들이 루비콘 호수 근처에 들어와서 자원개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원주민들이 토지 개발을 중단할 것을 요청하였지만 주법원은 원주민들이 루비콘 호수를 소유하고 있다는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정부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석유회사들은 호수 주변에 400개의 파이프를 박아서 석유를 생산했고 원주민들은 공기오염에 시달렸습니다. 원주민들은 1988년 캘거리 동계 올림픽을 반대하는 시위에 나섰고 1990년 유엔인권위원회는 원주민들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결국 2018년 연방/주정부는 계약을 무시한 과거의 잘못을 사과하였고 배상금과 영토 일부를 원주민들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국가나 단체나 개인이 계약을 어기는 것은 과거에 맺은 계약을 마음에 새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들 모두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쉽게 흔들리고 쉽게 언약을 배반하고 쉽게 약속을 파기합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연약함을 아시고 새언약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날마다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의 언약을 뼈에 새기는 사람은 시편 1편의 고백처럼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함 같으니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요한복음 12장은 예수님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의 일을 기록했습니다. 유월절 명절을 지키려고 해외에서 온 교포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예수님을 뵙기를 청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소식을 들으시고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예언자들이 마지막 때가 오면 세계 모든 민족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많은 예언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유월절날 해외 교포들은 성전에 가지 않고 예수님을 만나뵙기를 원했습니다. 성전에 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해외 교포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세계 모든 민족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 언약을 지키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인종차별도 없고 성차별도 없고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해외 교포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작은 사람으로부터 큰 사람에 이르기까지, 이웃이나 동포 모두가 주님을 아는 때가 올 것이라고 말했던 예레미야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시고 새언약의 계명을 십자가를 통해서 완성하셨습니다. 새언약의 삶을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충만하신 사랑이 십자가를 통해서 온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새언약을 온 몸으로 완성하시고 실천하신 주님, 유대인과 헬라인, 남자와 여자, 주인과 종, 해외 교포들을 아무런 차별없이 환영하신 주님, 새언약의 밀알이 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이 땅에서 신실한 언약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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