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절 여섯번째 주일 / 6월 네번째 주일

마가복음서 5:22-34, 고린도후서 8:9-14

성령강림절, 부정한 이들이 거룩해지고

정해빈 목사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유대교 사회가 거룩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결사회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셨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민족으로 부름받았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레위기는 먹는 것과 입는 것을 비롯한 일상생활에서 무엇이 거룩하고 무엇이 부정한지를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레위기를 보면 당시 유대교 사회가 거룩과 부정의 문제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이 많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렇게 엄격하게 거룩을 지켜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정결규정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엄격해지면서 피해를 보는 약자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면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는 3가지, 질병, 피흘림, 시체접촉은 반드시 피해야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은 공동체의 거룩을 위해서 격리되거나 추방되었야만 했습니다. 병자, 피 흘리는 여성들, 시체를 접촉했거나 점점 죽어가는 사람은 부정한 사람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규칙이 너무 엄격한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인도를 비롯한 여러 나라들 가운데에서는 종교적인 규칙이나 아버지의 권한이 너무 막강해서 조금만 규칙을 어겨도 자녀에게 벌을 주거나 자녀를 버리는 경우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회가 너무 엄격하면 사람들이 숨을 자유롭게 숨을 쉴 수가 없기 때문에 육체적인 환자와 정신적인 환자들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질병에 걸리거나 피를 흘리거나 죽어가는 사람은 육체의 고통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벌을 받았다는 정신적인 고통까지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방법은 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극단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엄격하고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거룩을 찬성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질병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 피 흘리는 사람들, 죽어가는 사람들을 환영하시고 그들의 아픔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소위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을 가족/마을에서 무조건 격리시킨 것이 아니라 그들 속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을 괴롭히는 죽음의 세력을 몰아내시고 그들의 몸과 마음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헤어졌던 가족들을 다시 만나게 해 주셨고 정결한 자와 부정한 자로 나누어졌던 공동체를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부정한 사람들을 제외시키고 격리시키면 하나였던 공동체는 깨끗한 사람들과 부정한 사람들을 나누어 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사람에게 조금만 문제가 있어도 그 사람을 공동체에서 제외시킨다면, 그런 식으로 한 명씩 한 명씩 당신은 질병에 걸렸으니까 공동체에서 나가라고 말하고 당신은 피를 흘리니까 공동체에서 나가라고 말하고 당신은 죽어가니까 공동체에서 나가라고 말한다면 끝까지 남아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방법을 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부정한 사람들을 만나시고 그들의 질병을 치료함으로써 건강한 사람과 부정한 사람들이 서로 화해하고 서로 함께 생활할 수 있도록 공동체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마가복음서 5장이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을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예수께서는 12년간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과 죽어가는 12세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피를 흘리는 여인과 죽어가는 소녀는 모두 부정한 사람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을 만날 수도 없었고 접촉할 수도 없었습니다. 12년간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은 의사를 만났으나 고침받지 못했고 재산도 허비하였고 가정과 공동체로부터 격리되어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낫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고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부정한 여인이 옷자락을 만졌기 때문에 예수님도 부정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여인을 꾸짖지 않으시고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회당장 야외로의 집에 들어가셔서 소녀의 손을 잡으시고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거라” 말씀하셨습니다. 피를 흘리는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것도 부정한 일이었고 예수님이 죽어가는 소녀의 손을 잡은 것도 부정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부정한 사람들을 소극적으로 피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들 속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을 만나시고 그들의 손을 잡아주시고 그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사람을 병들게 하는 악한 권세를 쫓아내시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12년간 혈루병을 앓는 여인과 12세 된 죽어가는 소녀는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12지파는 늙은 사람도 고통받고 있었고 어린 사람도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병자들과 죽어가는 사람들을 격리시키는 소극적인 방법만으로는 죽어가는 공동체를 살릴 수 없었습니다. 그 시대의 지식인/종교인/부유한 계층을 가리키는 회당장의 딸이 죽어간다는 이야기는 그 당시 사회와 종교가 고통받는 사람들을 살리는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께서는 부유한 회당장의 12살 된 딸이 왜 죽게 되었는지를 자세하게 살피셨습니다. 회당장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딸이 먹지 못해서 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린 딸이 육체적인 질병 때문에 죽게 되었는지 아니면 가부장적인 억압이나 정신적/종교적 억압 때문에 죽게 되었는지를 자세하게 살피시고 소녀와 성인의 경계선에 서 있는 아이의 손을 잡고 그를 일으켜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죽음/질병이 전파되는 것처럼 생명/치료의 힘도 똑같이 전파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코로나도 전파되지만 백신도 전파됩니다. 코로나가 전파되면 죽지면 백신이 전파되면 살 수 있습니다.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질병만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도 전파됩니다. 사탄은 죽음을 전파시키지만 주님은 생명을 전파시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격리와 배척, 질병과 죽음이 물러갑니다. 예수님에게 생명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정한 사람들을 거룩한 사람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피 흘리는 여인은 건강을 회복하였고 죽었던 소녀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배척하고 격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로하고 보살피고 일으켜야 공동체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고린도후서 8장은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교회를 돕기 위한 사도바울의 적극적인 자세를 기록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하나 여러분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가난으로 여러분을 부요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말하였습니다. 고린도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유하게 되었습니다. 예언의 은사도 받았고 방언의 은사도 받았고 부유한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은 부유함을 가난한 예루살렘교회를 위해서 사용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부유함을 소극적으로 간직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나누라고 말했습니다. 대신 억지로 하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하라고 말하였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넉넉한 살림이 그들의 궁핍을 채워주면 그들의 살림이 넉넉해질 때에 그들이 여러분의 궁핍을 채워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평형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평형/균형을 설교하였습니다. 하나님나라는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끼리, 부유한 사람들은 부유한 사람들끼리 사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평형/균형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모두가 획일적으로 똑같을 수는 없지만 적극적으로 나누고 베풀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모른체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예루살렘교회는 갈수록 가난해지고 고린도교회는 갈수록 부유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보살펴주고 서로가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어서 평형/균형을 이루기를 원했습니다. 적극적으로 부정한 사람들을 환영하신 예수님처럼, 적극적으로 나눔을 설교했던 바울처럼, 생명과 나눔을 전파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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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다섯번째 주일 / 6월 세번째 주일

사무엘기상 17:43-49, 고린도후서 6:6-10

성령강림절, 손에 의의 무기를 들고

정해빈 목사

 

 

1989년 6월 5일 중국 정부가 민주화 시위를 하는 학생들을 진압하기 위해 천안문 광장에 탱크를 진입시켰을 때 한 청년이 탱크를 가로막고 있는 장면이 전세계에 방송된 적이 있었습니다. 선두에 선 전차가 방향을 틀어서 행진하려고 하였지만 이 학생은 계속해서 전차의 행진을 온 몸으로 막았습니다. 이 청년이 탱크 앞에 서 있는 사진은 중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1993년 캘리포니아의 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직원으로 일하던 에린 브로코비치는 본래 가난한 이혼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던 중 미국의 거대 에너지 회사 PG&E가 불법으로 중금속 크롬을 방출시켜서 수질오염을 일으켰고 이 때문에 마을 주민들이 암으로 사망하였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고 이 사실을 회사가 알게 되었습니다. 회사는 그녀에게 뇌물을 주며 회유하려고 하였지만 그녀는 이를 거절하였고 수백 명의 피해자와 함께 소송을 제기해서 소송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이 사건을 다룬 [에린 브로코비치] 영화가 2000년에 상영되기도 했습니다. 1955년 12월 1일 미국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퇴근길에 버스에 탄 흑인 여성 로자 파크는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버스 운전사의 지시를 거부하였고 이것 때문에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당시 미국 남부지역에서는 버스, 극장, 학교, 식당 등에서 백인과 흑인의 자리가 구별되어 있었는데 로자 파크는 여성의 몸으로 조용하게 비폭력적으로 불의에 저항하였습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미국에서는 1950-1960년대 본격적인 인종차별 반대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중국의 한 청년은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려는 군부세력과 맞섰고 캘리포니아의 한 백인 여성은 거대 에너지 회사와 맞섰고 앨라배마의 한 흑인 여성은 인종차별의 거대한 벽에 맞섰습니다. 그것은 마치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에 맞서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골리앗의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특별한 무기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발걸음이 옳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뜻이 옳았기 때문에 그들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고 잘못된 골리앗의 발걸음을 멈출 수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골리앗과 같은 거대한 장벽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중국의 청년과 두 여성의 이야기는 예외적인 경우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불의한 장벽이 거대하다고 하더라도 그 불의한 장벽이 영원이 계속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올바른 뜻과 명분을 가지고 조용하게 실천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서 잘못된 사회는 무너질 것이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사무엘기상 17장은 소년 다윗이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물맷돌로 쓰러트리는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사무엘기상 17:1절에 의하면 블레셋 족속은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고 이스라엘도 이에 맞서 사람을 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래 블레셋 민족은 에게해(그리스와 터키 사이)에서 사는 해양민족이었는데 동쪽으로 이주하여 가나안 해안가에 정착했습니다. 그들은 철기문명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이길 수 없었습니다. 당시 가나안에서 가장 강력한 민족이 블레셋 민족이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가나안 지역이 블레셋 이름을 따서 팔레스타인 지역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거인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희롱하였지만 아무도 이에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형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기 위해 전쟁터에 도착한 다윗은 이 장면을 보고 싸울 것을 자청하였고 사울 왕이 준 몸에 맞지 않는 갑옷을 거절하였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향해서 “너는 칼을 차고 창을 메고 투창을 들고 나에게로 나왔으나 나는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너에게로 나왔다.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를 쓰셔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기에 모인 이 온 무리가 알게 하겠다.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제로 다윗은 칼과 창이 아니라 물맷돌을 이용해서 거인 골리앗을 쓰러트렸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기술, 평소에 양을 공격하기 위해 달려오는 사자나 곰을 물리치는데 사용했던 물맷돌을 이용했기 때문에 거인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의 목적과 명분이 정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블레셋 민족은 약소국 이스라엘을 괴롭혔고 하나님을 모독하였습니다. 다윗은 이 사건을 통해서 전쟁의 승패가 무기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목적과 명분에 달려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게 해 주었습니다. 아무리 군사와 무기가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목적이 분명하지 않는 전쟁과 명분이 없는 전쟁은 결국 패배하게 될 것입니다. 불의는 정의를 이길 수 없습니다. 다윗은 전쟁의 승패가 무기에 달려있지 않다는 확신을 가지고 싸움에 임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면, 하나님의 정의가 함께 하면 싸워 이기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은 골리앗 같은 상대도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에서 자신이 복음을 위해서 받은 여러 가지 고난을 담담하게 고백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하나님의 일꾼답게 처신합니다. 우리는 많이 참으면서 환난과 궁핍과 곤경과 매 맞음과 옥에 갇힘과 난동과 수고와 잠을 자지 못함과 굶주림을 겪습니다.” 바울이 쓴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같은 편지를 보면 바울이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것 때문에 육체적/정신적으로 많은 고난과 핍박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로마인들로부터도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걸어가는 길이 유대인들과 달랐고 로마인들과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똑같이 사랑하신다고 말했기 때문에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은 로마제국이 걸어가는 길을 따라가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로마제국에 의해 처형당하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였고 예수님이 전하신 하나님나라 복음을 세상에 전했습니다. 그 길은 로마제국이 걸어가는 길과 달랐습니다. 로마제국은 식민지를 정복하고 백성들을 노예로 삼고 황제를 신으로 숭배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모든 사람을 차별없이 환영하였고 모든 사람을 환영하는 교회를 세웠습니다. 바울은 골리앗과 같은 로마제국에 맞서며 복음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바울은 세상을 소란하게 했다는 죄로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제국의 길을 따라가지 않고 예수의 길을 따라간 것은 마치 다윗이 골리앗과 맞서는 것과 같았습니다. 바울이 끝까지 로마제국에 비폭력적으로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이 걸어간 길이 옳고 의로운 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길이 옳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끝까지 로마제국에 저항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오른손과 왼손에 의의 무기를 들고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그렇게 합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한 불의의 장벽, 불공평의 장벽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잘못된 체제/사회/구조는 워낙 견고하기 때문에 그것을 무너뜨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오른손과 왼손에 의의 무기를 들고 있는 사람은 골리앗과 같은 거대한 불의의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2020년-2021년 골리앗처럼 거대한 코로나 감염 장벽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을 회개하고 지구촌 모든 국가가 서로 협력할 때 골리앗처럼 거대한 이 코로나 장벽도 무너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아버지의 날을 맞이해서 골리앗과 싸우며 가정을 위해 헌신하신 모든 아버지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주신 의의 무기를 들고 승리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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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네번째 주일 / 6월 두번째 주일

사무엘기상 16:6-13, 고린도후서 5:14-17

성령강림절, 겉모습이 아닌 중심

정해빈 목사

 

 

캐나다 사회는 매년 5월을 “아시아문화유산의 달”로 지키고 있고 6월을 “원주민역사의 달”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5월에는 아시아 문화를 기리는 행사가 많이 열리고 있고 6월에는 북미에서 제일먼저 정착한 원주민들의 역사와 문화를 기리는 행사들이 많이 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우리의 마음을 놀라게 하고 슬프게 하는 뉴스가 보도되었습니다. 19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운영된 브리티시컬럼비아(BC) 주 캠루프스 원주민 기숙학교 부지에서 어린이 215명의 유해가 발견되었습니다. 과거 캐나다 정부는 원주민 아이들을 원주민 문화와 격리시키기 위해 5-6세 된 아이들을 부모에게서 떼어내어 강제로 기숙학교에 집단 수용하였고 그곳에서 백인동화교육을 실시했습니다. 아이들은 기숙학교에서 원주민 언어 사용을 금지당했고 열악한 환경과 엄격한 규칙 때문에 많은 육체적/정신적 학대를 당했습니다. 15만 명의 원주민 아이들이 139개 기숙학교에 보내졌고 이번에 유해가 발견된 캠루프스 기숙학교는 가장 규모가 큰 곳이었습니다. 1890년부터 1996년까지 연방정부를 대신해서 카톨릭 교회가 60% 이상의 기숙학교를 운영하였고 나머지는 캐나다연합교회와 성공회가 맡았습니다. 215명의 유해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기숙학교에서 살았던 아이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얼마나 많은 학대와 고통을 받았는지를 보여줍니다. 캐나다 정부는 원주민 어린이들을 기억하는 의미에서 매년 9월 30일을 “오렌지색 티셔츠를 입는 날(Orange Shirt Day)”로 정하고 있습니다. 기숙학교로 끌려가는 손녀에게 할머니가 오랜지색 티셔츠를 입혀 준 것이 유래가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올해부터 9월 30일을 원주민 희생자들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정부의 공식 휴일로 정했다는 뉴스가 발표되었습니다.

 

원주민들은 2007년 연방정부를 대상으로 캐나다 역사상 가장 큰 집단 소송을 제기하였고 연방 대법원은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만들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진실과 화해위원회]는 10년 동안 조사를 실시한 후에 총 94개의 권고안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권고안 중에는 카톨릭 교황의 사과를 비롯해서 기숙학교를 운영했던 교회의 책임을 묻는 권고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진실과 화해위원회]는 총 15만 명의 피해자 가운데 6,00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권고안에 따라 캐나다 정부는 지금까지 280억불의 보상금을 지급했습니다. 원주민 기숙학교는 원주민을 미개인으로 취급하는 백인우월주의 문화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북미에 정착한 백인 개척자들은 원주민들을 미개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누가 과연 이 지구의 미개인일까요? 자연을 존중하는 원주민들이 미개인일까요? 아니면 자연을 훼손하는 문명인이 미개인일까요? 원주민, 흑인, 아시아인을 무시하는 백인우월주의 문화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 남아 있습니다. 인류역사를 보면 원주민들/흑인들의 문명이 가장 앞서 갈 때도 있었고 아시아인들의 문명이 가장 앞서갈 갈 때도 있었고 백인들의 문명이 가장 앞서 갈 때도 있었습니다. 피부색, 인종, 지역, 종교, 언어 등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문화는 하루빨리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사무엘기상 16장은 사무엘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미래 지도자로 소년 다윗을 선택하는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본래 고대 이스라엘은 12지파가 자율적으로 다스리는 사사시대 사회였습니다.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탈출한 히브리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 왕의 억압이 없는 평등한 사회를 건설했습니다. 오늘날의 지방자치시대처럼 각 지파들이 자율적으로 각자의 지파를 다스렸고 어려운 일이 닥칠 때는 임시 지도자, 판사, 제사장들을 뽑아서 그들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사시대의 자유/자치/자율은 무너졌고 백성들은 자신들을 통치할 왕을 요구하였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히브리 백성들은 자유/자치/자율을 부담스러워 하였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외모가 뛰어나고 가장 키가 크고 베냐민 지파를 대표하는 사울을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으로 선택하였습니다.(사무엘기상 9장). 사울은 처음에는 백성들을 잘 이끌었으나 나중에는 욕심이 생겨서 왕의 역할과 제사장의 역할까지 겸임하려고 하였습니다.

 

사울의 마음이 변한 것을 본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가서 그의 아들들 가운데 한명을 기름 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첫아들에게 기름부으려고 하자 주님께서 이를 허락하지 않으셨고 나머지 아들들에게 기름붓는 것을 역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그의 준수한 겉모습과 큰 키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내가 세운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판단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주는 중심을 본다.” 주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은 양떼를 돌보기 위해 밖에서 일하고 있는 이새의 8번째 아들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은 당시 작은 마을에 불과했고 다윗은 이새의 막내아들이었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가장 외모가 뛰어나고 가장 키가 크고 가장 좋은 집안사람인 것에 비해서 다윗은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사람의 중심을 보고 판단하셨습니다. 다윗은 눈이 아름다고 들에서 양떼를 돌보는 성실한 소년이었습니다. 사무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고 그날부터 주님의 영이 다윗을 감동시켰습니다.

 

사도바울이 쓴 고린도전후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바울을 육신의 기준으로 바라보고 그를 평가절하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2차 선교여행 때 고린도 도시를 방문하였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와 함께 교회를 세웠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세웠기 때문에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존경을 받기에 마땅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육신의 기준으로 볼 때 바울은 예수님의 12 제자도 아니었고 예루살렘 교회의 파송을 받지도 않았고 육신의 질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인들은 바울이 글에는 힘이 있지만 말에는 약하다고 평가하였습니다. 옛날 고대사회에서는 상대방을 설득시키는 웅변술/수사학이 지식인의 평가 기준 중 하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교인들을 향해서 육신의 기준으로 볼 때 자신이 자랑할 것이 많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정통 베냐민 지파 출신이었고 나면서부터 할례를 받았고 최고의 율법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 시대 최고의 랍비/지식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육신의 자랑을 배설물로 여기고 평생을 복음을 위해 살았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아니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아무도 육신의 잣대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겉모습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바울 자신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육신의 잣대로 사람들을 평가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육신의 잣대를 버렸습니다. 육신의 기준으로 볼 때 자랑할 것이 많았지만 그 모든 자랑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과거의 자랑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겉모습을 보고 사람을 평가할 때 인종차별과 편견은 계속될 것입니다. 진실로 성령께서는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바꾸어 주십니다. 우리들 모두는 과거의 자랑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함을 통해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생명을 차별없이 사랑하는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었는지를 물으실 것입니다. 사람을 겉모양을 보고 차별하였던 인류의 지난 죄악을 회개하며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는 성령님을 따라서 이 땅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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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세번째 주일 / 6월 첫번째 주일

사무엘기상 8:6-11, 마가복음서 3:22-30

성령강림절, 성령은 자립의 영

정해빈 목사

 

 

 

미국의 블룸버그(Bloomberg) 통신이 지난 수요일(5/25) “코비드 회복 순위(The Covid Resilience Ranking)”를 발표한 적이 있었습니다. 뉴질랜드, 싱가포르, 호주, 이스라엘에 이어서 한국이 5위를 차지했습니다. 뉴질랜드, 싱가포르, 이스라엘은 1천만 명 이하의 인구를 가지고 있고 호주는 2천 5백만 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5천만 명이 넘는 인구를 가진 나라는 한국이 유일합니다. 한국이 상위 국가들 중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코로나 방역을 잘 대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최근 한국은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통해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백신 보급을 담당하기로 합의를 보기도 했습니다. 백신위탁생산능력 1위가 미국, 2위가 한국이라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선진국으로 알려진 북미와 유럽 주요 국가들은 코로나 방역 모범 국가 순위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전통적으로 선진국으로 알려진 국가들은 오랫동안 개인의 자유를 중요시했습니다. 선진국 국민들은 개인의 자유가 침해당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정부가 국민들에게 마스크를 쓰고 거리두기를 하라고 요청해도 정부의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시아 문화에 속한 선진국 국민들은 개인의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내가 남에게 피해를 줄 것을 걱정해서 공동체를 위해서 마스크를 쓰고 거리두기를 잘 하였기 때문에 코로나 방역 모범 국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가 되려면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질서가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개인의 자유는 중요하지만 개인의 자유만을 주장할 때 공동체는 피해를 입게 될 것입니다. 지나친 개인의 자유가 공동체에게 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번 코로나 사태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5월은 아시아 문화유산의 달입니다. 아시아 문화에는 공동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긍정적인 문화도 있지만 권위주의/폐쇄주의/가부장주의와 같은 부정적인 문화도 있습니다. 부정적인 문화는 탈피하고 긍정적인 문화는 계승해야 할 것입니다. 자유(自由)는 무엇에 얽매이지 않는 권리를 가리키고 방종(放縱)은 아무 거리낌이 없이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참된 자유는 나의 자유와 공동체의 질서를 모두 소중하게 여깁니다. 만약 이러한 자유를 잃어버리고 자유가 방종으로 흐른다면 그 자유는 통제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질서를 함께 유지하면서 살 것이냐 아니면 지나친 방종 때문에 통제받으면서 살 것이냐 두가지 선택이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성숙한 사람들이 모인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질서 모두가 가능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사무엘기상 8장은 히브리 백성들이 사무엘 선지자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는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본래 히브리 백성들은 오랫동안 이집트에서 바로왕의 억압을 받으며 노예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러한 왕의 억압이 없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였을 때 하나님만을 왕으로 섬기고 12지파가 자율적으로 다스리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했습니다. 왕 대신 판사/사사들이 다스리는 시대를 사사시대라고 부릅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가 사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사시대는 억압이 없는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시대였고 12지파가 서로 상의하면서 나라를 운영하였기 때문에 오늘날로 말하면 지방자치시대와 같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히브리 백성들은 자유/자치/자율을 잃어버리고 무질서하고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사무엘 선지자를 찾아가서 우리를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자유/자치/자율을 부담스러워하였습니다. 다른 나라들처럼 왕이 권력을 쥐고 나라를 통치하고 외적과 싸우고 나라를 일으키는 것이 더 효율적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무엘은 왕을 세우면 왕이 당신들의 아들들에게는 병거와 말을 다루는 일을 시킬 것이고 당신들의 딸들에게는 왕을 시중드는 일을 시킬 것이고 당신들의 밭과 포도원에서 나는 가장 좋은 것을 가져갈 것이고 마침내 당신들을 왕의 종으로 만들 것이라고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에 왕이 생기면 그 왕이 이집트의 바로왕처럼 행동할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하지만 히브리 백성들은 사무엘의 말을 듣지 않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왕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우리도 모든 이방 나라들처럼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그 왕이 우리를 이끌고 나가서 전쟁에서 싸워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나라가 아니라 다른 나라들처럼 왕이 통치하는 힘센 제국을 히브리 백성들이 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자유/자치/자율을 부담스러워하였고 대신에 왕이 모든 일을 다 맡아서 처리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사사기를 보면 사사시대에 히브리 백성들이 방탕하고 무질서하게 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당한 권력으로부터의 자유, 12지파가 자율적으로 다스리는 나라를 만들어 주셨지만 그들은 그러한 자유/자치/자율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질서있는 자유가 아닌 방탕하고 부질서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사무엘 선지자를 찾아가서 우리는 자유를 지킬 능력이 없으니 왕을 뽑게 해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이 자유와 자치와 자율 대신에 왕이 명령하는 제국의 나라를 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유를 버리고 통제받기를 원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마가복음서 3장은 백성들을 정치/종교적으로 통제하려는 사람들과 사람들을 자유하게 하려는 예수님과의 충돌을 기록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예수님이 바알세불(귀신들의 왕)에 사로잡혔고 귀신 두목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사탄이 어떻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한 나라가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그 나라는 버틸 수 없다. 또 한 가정이 갈라져서 싸우면 그 가정은 버티지 못할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에 충만한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을 먹이셨고 병자를 고치셨고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사탄이라면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자유/자치/자립을 주지만 악령은 우리를 구속하고 통제합니다. 성령은 우리가 화해/일치의 삶을 살도록 인도하고 악령은 나라와 가정이 갈라져 싸우게 만듭니다. 성령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고 억압하고 통제하는 악한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부하고 자립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악한 권세에게 사로잡혀 통제받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스스로 깨우치고 자립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튼튼해야 합니다. 마음이 약해지면 잘못된 권력, 잘못된 종교, 잘못된 생각이 우리를 통제하려고 할 것입니다. 저 옛날 히브리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하나님나라를 거부하고 왕의 통제를 받기 원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갈릴리에서 악령을 쫓아내고 자유를 선포하셨지만 주변 사람들은 불안해하였고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가족들조차도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에도 무당을 찾아가고 부적을 붙여야만 안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 사람에게 찾아가서 모든 부적을 버리고 자유로운 삶을 살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그러한 삶을 불안해 할 것입니다. 스스로 깨우치고 스스로 자립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자유가 주어져도 그 자유를 부담스러워하고 다른 사람의 지시/통제를 받는 것을 더 편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종의 영이 아니라 자녀의 영을 부어 주십니다. 악령은 우리를 억압하고 통제하려고 하지만 성령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고 우리가 자립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잘못된 권력/종교/생각에 통제받지 아니하고 자유/자립/자치의 백성이 되도록 우리를 깨우쳐 주십니다. 우리를 해방시켜주시고 우리의 자립하도록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아 개인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삶이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를 살리는 삶, 사랑/화해/일치, 자유/자치/자립의 삶을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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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두번째 주일 / 5월 다섯번째 주일

이사야서 6:1-8, 로마서 8:12-17

성령강림절, 성령은 자녀의 영

정해빈 목사

 

 

독일의 종교철학자 루돌프 오토는 1911년 북아프리카를 여행하던 중 모로코의 한 회당에서 유대인들이 부르는 아름다운 기도찬양을 들었습니다. 그는 이 기도찬양을 듣다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신비체험을 하였습니다. 이 체험에 근거해서 쓴 책이 [성스러움의 의미, The Idea of the Holy]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사람은 진선미(眞善美)에 더하여 거룩(聖)을 사모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신비체험을 통해서 신의 특별한 사랑/능력을 받고 싶어 합니다. 사람은 신적인 존재를 만날 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 체험은 두가지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첫번째 반응은 두려움이고 두번째 반응은 황홀입니다. 신비체험을 한 사람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강력한 신적 능력 앞에서 두려움을 느낍니다. 신비체험을 하는 순간 몸을 움직일 수도 없고 말을 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이 순간 절대적인 능력 앞에서 내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자신이 신을 마주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신비체험을 하는 순간 부들부들 떨며 두려워합니다. 신비체험의 두번째 반응은 황홀입니다. 사람은 신비체험을 하는 순간 처음에는 두려워 떨지만 나중에는 신의 능력을 만나면서 황홀/환상/감격/기쁨을 체험합니다. 신비로운 환상이나 방언이나 능력을 받기도 하고 신의 특별한 사랑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신비체험은 일상생활에서는 만날 수 없는 황홀하고 매력적인 순간입니다. 이러한 체험을 한 사람은 이 순간이 너무 아름다워서 마치 변화산에 서 있는 베드로가 황홀체험을 하고 나서 이 산에 초막을 짓자고 말한 것처럼, 황홀한 체험에 계속 머물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고통받는 이웃을 외면하고 황홀/환상/감격/기쁨에 머물고자 하는 신앙은 바른 신앙이 아닐 것입니다. 신비체험은 개인적인 체험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 아름다운 열매로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무당들도 신비체험을 하고 신들림을 경험합니다. 모든 종교에는 신비체험의 성격이 어느 정도는 다 있습니다. 신비체험이 무조건 나쁜 것도 아니고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경험하는 신비체험이 참된 것인지 아니면 거짓된 것인지는 신비체험을 경험한 사람이 어떤 삶을 사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참된 신비체험을 경험한 사람은 그 신비체험을 통해서 얻은 능력과 기쁨을 가지고 고통받는 이웃을 구원하고 축복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진실로 모든 종교에는 신비체험이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러한 신비체험이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체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체험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더 아름답고 풍성하게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광신적인 신비체험, 나에게 오면 환상을 보여주고 미래를 알려주고 병을 고쳐준다는 무당같은 신비체험은 우리의 삶을 병들게 만듭니다. 모든 사람이 특별한 신비체험을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관심있게 일상생활을 들여다 보면 내가 살아있는 매 순간이 신비체험의 순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기관이 운영하는 명상센터에 가보면 “마음 깨닫기, Mindfulness)” 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음식을 먹을 때 음식의 맛에 집중하면서 천천히 먹는 법을 배우고 미로 같은 동그란 길을 걸어가면서 명상하는 법을 배웁니다. 숨을 들이쉬면서 두 걸음을 걷고 다시 숨을 내쉬면서 두 걸음을 걷습니다.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지금 걷고 있는 것에 집중합니다. 마음을 발끝에 모으고 조용히 걸으면서 걷고 있는 나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방법이 걷기 명상입니다. 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꼼꼼하게 꽃을 바라보면서 꽃과 대화를 나누거나 조용히 나 자신, 내 마음/감정과 대화를 나누기도 합니다. 또는 토요일 온라인건강교실을 통해서 내 몸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하심을 체험할 수도 있습니다. 대단하고 특별한 환상이나 신비체험은 아니지만 이런 명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 나의 삶 곳곳에서 활동하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먹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걸을 수 있는 모든 것이 신비체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이사야서 6장은 이사야 선지자가 경험한 신비체험을 기록했습니다. BC 740년 52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던 웃시야 왕이 죽었을 때 남유다는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북쪽의 앗시리아는 남유다를 침략하려고 하였고 서쪽에는 새롭게 등장한 베벨론이 남유다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이사야는 하늘 보좌에 앉아계시고 날개에 둘러싸여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다” 하늘에서 부르는 우렁찬 노랫소리에 성전 문지방의 터가 흔들렸습니다. 이 환상을 본 이사야는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주님을 만났으니 죽게 되었다고 고백하며 두려워 떨었습니다. 신비체험의 첫번째 반응인 두려움과 떨림을 이사야가 경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 한 날개가 제단에서 숯을 부집게로 들고 와서 이사야의 입에 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악은 사라지고 너의 죄는 사해졌다.” 주님께서는 이사야를 징계하신 것이 아니라 이사야를 깨끗하게 하셨고 이사야를 축복하셨고 이사야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물으셨습니다.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하는 이 질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단수로 계신 분이 아니라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누가 갈 것인가 물었을 때 이사야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주님,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신비체험이 처음에는 놀라움/두려움/죄책감으로 시작해서 황홀/감격/기쁨으로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세상으로의 파송으로 끝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하늘의 능력을 받은 후에 산 아래로 내려가신 것처럼, 이사야도 신비체험을 통해서 하늘의 능력을 받은 후에 주님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령체험은 한편으로는 우리를 부끄럽고 두렵게 만들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황홀/감격/기쁨을 줍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신비체험을 통해서 죄를 용서받고 황홀/감격/기쁨/능력을 가지고 고통받는 세상을 위해서 일하도록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하십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능력을 상속받았기 때문에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자녀도 고난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서 고난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나라를 공동으로 상속받게 될 것이기 때문에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종은 주인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자녀는 아버지와 삶과 기쁨을 나눕니다. 종의 영을 받은 사람은 두려움을 말하지만 자녀의 영을 받은 사람은 사랑과 풍성함과 기쁨을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 중에는 청교도 신앙처럼 하나님을 무서운 아버지로 여기는 신앙이 있습니다. 무서운 아버지에게 혼나지 않으려면 계명을 엄격하게 지켜야 합니다. 그 사람의 신앙이 두려운 신앙에 속한 것은 그 사람이 자녀의 영이 아니라 종의 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두려운 신앙에 빠진 사람은 자신도 두려워하고 다른 사람도 두려워합니다. 그 사람은 나와 다른 사람을 쉽게 과장하고 두려워하고 혐오하고 증오하고 배척합니다. 한국 기독교인들 중에는 이슬람교나 성소수자들을 원수로 여기고 그들이 세상을 망하게 하는 것처럼 과장되게 공포를 조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은 종의 영이 아니라 자녀의 영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나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평화롭게 살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진실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사야처럼 세상을 위해서 일하고 사도바울처럼 이방인을 환영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특별한 신비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고 일상생활의 명상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어떠한 체험이든 이러한 체험을 통해서 우리를 자녀삼아 주시고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시는 주님을 따라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봉사하고 더 많이 세상을 위해서 섬기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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