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첫번째 주일 / 9월 첫번째 주일

창세기 1:1-10, 요한복음 1:1-5

창조절, 창조주 하나님, 어머니 지구

정해빈목사

 

 

인류의 문명과 미래는 어떤 길을 걸어갈까요? 인류의 문명과 미래에 대해서 쓴 책들이 있습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 같은 책들이 그런 책들입니다. 그런데 최근 한국에서 인류의 문명과 미래에 대해서 쓴 두꺼운 책 한권이 나왔습니다. 책의 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붕새의 날개 문명의 진로: 팽창문명에서 내장문명으로]. 여러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서 해외 학자들이 쓴 책과 비교해서 뒤지지 않는 책이라고 칭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붕새의 날개”는 장자(莊子) 책에 나오는 가장 큰 새를 가리킵니다. 그다음 “팽창문명과 내장문명”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팽창문명은 서구문화를 가리키고 내장문명은 동아시아 문화를 가리킵니다. 지난 500년 동안 서구문화는 팽창문화였습니다. 정복하고 지배하고 개척하고 팽창하는 것이 서구 문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식민지 시대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서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아메리카/아프리카/아시아에 식민지를 건설했습니다. 유럽 제국들이 식민지를 건설할 때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유일하게 자신들이 동양사람이 아니라 서양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서양을 모방해서 아시아에 식민지를 건설했습니다. 유럽 땅이 좁다고 생각한 개척자들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이주해서 넓은 땅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신대륙이라고 말하면 안되지만 유럽 사람들은 아메리카를 신대륙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지난 500년 동안 정복하고 지배하고 개척하고 팽창하는 것이 서구문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미국 서부영화를 보면 총을 든 카우보이들이 서쪽으로 팽창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팽창문화는 큰 것을 선호합니다. 땅도 커야하고 집도 커야하고 차도 커야하고 먹는 것도 크게 먹어야 합니다. 팽창문화/정복문화/소비문화가 서구문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서양의 팽창문화는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21세기 지구상에 더 이상 팽창할 곳이 없습니다. 더 이상 식민지를 건설할 곳도 없고 신대륙을 발견할 곳도 없습니다. 팽창하기는커녕 지난 500년 동안의 팽창문화 때문에 자원은 고갈되었고 자연은 훼손되었고 기후는 망가졌습니다. 팽창문화, 과소비, 정복문화 때문에 지구가 망하게 되었습니다. 과학이 발전해서 인류가 우주로 진출해서 다른 별에 식민지를 건설하면 모를 까 인류는 지금 팽창문화 때문에 망하게 되었습니다.

 

[붕새의 날개 문명의 진로: 팽창문명에서 내장문명으로] 이 책을 쓴 김상준 교수는 인류의 문명이 팽창문명에서 내장문명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팽창문명의 반대가 내장문명입니다. 팽창은 밖으로 확장한다는 것을 가리키고 내장은 안으로 발전하고 내실을 더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팽창문화가 서양문화라면 내장문화는 동양문화입니다. 동양문화는 정복하고 팽창하는 문화가 아니라 공존, 평화, 음양의 조화를 존중하는 문화입니다. 아시아의 문화는 자연과의 조화, 수평적 협력을 강조합니다. 물론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아시아의 문화를 버리고 서양문화를 따라가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세계 모든 나라들이 서양의 팽창문화를 따라가려고 하다보니 자원고갈, 자연훼손, 기후변화가 더 심해졌습니다. 이제는 세계 모든 나라들이 팽창문화를 버리고 내장문화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미 그런 현상이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과거와 같은 팽창문화, 급격한 경제성장은 더 이상 불가능합니다. 이제는 경제성장을 논할 때가 아니라 인류의 생존을 걱정해야 할 때입니다. 지난 500년 동안 서양의 팽창문화가 세상을 이끌었다면 앞으로는 동양의 내장문화가 세상을 이끌어야 합니다. 동양의 유교, 불교, 도교의 가르침에는 팽창문화가 없습니다. 개척하고 정복하고 지배하라는 가르침이 없습니다. 대신 백성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가르침과 정치제도에 대한 내용만 들어있습니다. 코로나 시대에 아시아 국가들이 비교적 모범적으로 방역에 잘 대처하는 것도 자발적인 참여와 협동과 이웃을 배려하는 아시아 내장문화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창조절 절기를 시작하면서 인류의 미래, 지구의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보자는 뜻에서 팽창문화와 내장문화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인류와 지구의 미래를 위해서 우리들이 먼저 자연을 존중하고 소비를 줄이는 내장문화를 실천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창세기 1장은 천지창조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생명탄생의 6가지 단계로 읽을 수 있습니다. 1단계는 어둠의 단계입니다. 마치 산모의 자궁이 캄캄한 것처럼 태초에 흑암이 온 세상을 뒤덮었고 하나님의 영이 수면을 운행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정자와 난자가 만나 생명이 잉태되듯이 지구 생명을 낳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이 어둠 속에서 물과 만났습니다. 2단계는 물이 마르는 단계입니다. 마치 출산일이 가까워지면 산모의 양수가 줄어드는 것처럼 태초에 세상을 뒤덮었던 물이 갈라지고 그 사이에 마른 땅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3단계는 지구가 탄생하는 단계입니다. 하나님께서 물이 없는 곳을 땅이라고 부르시고 물이 있는 곳을 바다라고 부르셨습니다. 마치 아이가 태어나면 눈, 코, 잎, 손가락이 드러나는 것처럼 세번째 단계에서 지구는 땅과 바다가 구별된 온전한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창조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4단계는 성장하는 단계입니다. 마치 태어난 아이가 조금씩 자라는 것처럼 막 태어난 지구는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산과 바다와 강과 땅이 만들어지고 나무가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5단계는 지구가 어머니가 되는 단계입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지구는 시간이 지나면서 어머니 지구가 되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생명들이 태어났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와 땅을 거니는 동물과 바다를 헤엄치는 물고기들이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6단계는 사람이 출현하는 단계입니다. 창세기 2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흙에 생기를 불어넣어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생기는 하나님을 가리키고 흙은 지구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 아버지이시고 지구는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우리는 지구 어머니를 통해서 이 땅에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지구가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일하시고 7일째 되는 날 쉬셨다고 했는데 6일 동안의 창조 이야기를 생명출산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창조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캄캄한 우주에 생명의 별 지구를 낳으셨고 지구는 시간이 흘러서 어머니 지구가 되어 사람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지구가 나은 사람이 어머니 지구를 망가트리고 있습니다. 자식이 어머니를 망가트리고 있으니 우리는 불효자식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요한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창조된 것은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했는데 요한복음 1장도 마찬가지로 모든 피조물이 말씀을 통해서 생명을 얻었다고 말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나타났는데 그 속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말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태초에 지구를 낳으셨고 지구는 어머니 지구가 되어 식물과 동물을 낳았고 때가 되어 사람을 낳았는데, 그 중에서도 조금도 흠이 없는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 살아있는 말씀, 예수님을 낳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태어나려면 어머니 지구를 통해서 흙으로 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어머니 지구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낳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 하나님과 대화하셨고 자연과 대화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팽창문화가 아니라 내장문화를 사셨습니다. 창조절을 묵상하면서 흠과 죄가 없으시고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되시는 예수님, 참 인간으로 사신 예수님, 창조주 하나님과 어머니 지구를 기쁘게 하셨던 예수님을 바라보며 자연을 파괴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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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열다섯번째 주일 / 8월 다섯번째 주일

마가복음 7:1-5, 18-23, 야보고서 1:25-27

성령강림절, 경건은 긍휼의 마음에서 온다

정해빈목사

 

 

코로나 질병(Covid19)이 작년부터 올해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 감염을 예방하려면 4가지를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첫째로 백신주사를 맞아야 하고 둘째로 마스크를 써야하고 셋째로 손을 자주 씻어야 하고 넷째로 2미터 이상 거리를 유지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감염당하지 않으려면 또 내가 다른 사람을 감염시키지 않으려면 이 4가지를 실천해야 합니다. 미국에서는 주사 맞으면 100불을 준다고 홍보해도 맞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백신주사를 맞고 밖에 나갈 때는 마스크를 써야 하고 손을 씻을 때는 최소 20초 동안 비누로 손을 문지르면서 씻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뉴스를 보니까 손을 씻을 때 생일축하노래, Happy Birthday를 부르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생일축하 노래가 20초 정도 되니까 노래 끝날 때까지 손을 씻으라는 말입니다. 사람의 신체 중에서 가장 더러운 부분이 손입니다. 손으로 여기저기를 만지기 때문에 손을 씻는 것이 전염병을 예방하는데 가장 효과적입니다. 사람들이 손을 자주 씻다보니 감기 독감 환자가 줄어들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 7장 말씀에는 손을 씻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이 예수께 몰려와서 왜 당신의 제자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빵을 먹느냐고, 왜 장로들이 전하여 준 전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느냐고 따졌습니다. 여기 나오는 장로들의 전통은 성경에 나오는 전통이 아니라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따로 만든 전통을 가리킵니다. 구약성경 레위기에 나오는 정결규정은 주로 제사장이 해야 할 정결규정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일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정결규정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은 엄격하게 정결규정을 지켜야 하지만 일반 백성들은 몇 가지만 조심하면 됩니다.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고 시체를 만지지 않으면 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레위기에 나오는 정결규정이 일상생활에서 거룩을 실천하는데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반 백성들도 제사장들처럼 엄격하게 정결규정을 지켜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반 백성들이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하는 장로들의 전통을 따로 만들었습니다. 보통 어느 단체든지 그 단체가 지켜야 하는 규칙이 있고 그 규칙을 좀더 자세하게 설명한 부칙이 있습니다. 부칙이 있는 것은 그 위에 있는 규칙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위에 있는 규칙보다 아래에 있는 부칙의 내용이 더 많을 때가 있습니다. 규칙보다 부칙의 내용이 더 많다면 그 단체는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장로들의 전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레위기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장로들의 전통을 만들었는데 일상생활에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설명한 전통이 600개가 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공동접시를 이용해서 식사를 하기 때문에 위생을 위해서 손을 씻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주장하는 손 씻는 것은 위생 때문이 아니라 정결/거룩을 위해서 손을 씻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성막을 자세히 보면 제사장들이 번제를 드릴 때 손을 씻기 위해 사용했던 물두멍, 물을 담은 넓은 항아리가 있습니다. 번제를 드리다보면 손이 더러워지기 때문에 손을 씻어야만 했고 더 나아가서 제사를 드리기 때문에 정결/거룩을 위해서 제사장은 항상 손을 씻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서 제사장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지켜야 하는 정결규정, 장로들의 전통이 따로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물이 귀해서 위생을 위해서 손을 씻는 것도 쉽지 않은 가난한 백성들이 제사장들처럼 매번 식사할 때마다 손을 씻는 것은 쉬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은 제자들이 왜 장로의 전통을 따르지 않느냐고 예수님께 따졌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너희는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경건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가난한 자들을 먹이시고 병자를 고치시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손도 씻지 않고 먹었을까 이런 생각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위선자들이라고 말씀하셨고 겉으로는 경건한 척 하지만 마음은 경건하지 못한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밖에서 사람의 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 더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모든 음식은 깨끗합니다. 옛날 레위기는 위생을 위해서 또 전염병 감염을 막기 위해서 오징어나 미꾸라지나 장어 같이 조금이라도 이상하게 생긴 것은 먹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설사 그런 것들을 먹는다 하더라도 그것 먹었다고 해서 사람이 부정해지지는 않습니다. 모든 음식은 입 안으로 들어가면 소화되어서 배설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힐 수도 있고 세상을 더럽힐 수도 있습니다. 음행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의와 사기와 방탕과 악한 시선과 모독과 교만과 어리석음이 안에서 밖으로 나와서 사람을 더럽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제사장들이 하는 정결규정을 일반백성에게 강요하지 말고 그대들의 속마음이 참으로 경건한지 자신을 돌아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된 경건은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에서 온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야보고서 1장은 경건에 대해서 3가지로 설명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경건한 사람은 첫째로 자기 혀를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혀를 다스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신앙은 헛된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 아니하고 자기 혀를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경건한 사람은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볼보아주며” 고난을 겪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 주는 사람이 진짜로 경건한 사람입니다. 셋째로 경건한 사람은 세상의 유혹에서 자기를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혀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을 돌볼 줄 아는 사람, 세상의 유혹에서 자기를 지키는 사람이 참으로 경건한 사람이라고 야고보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최근 뉴스를 보니까 아프가니스탄 한국대사관, 한국병원에서 같이 일했던 아프가니스탄 직원 가족 391명을 한국정부가 가장 큰 군 수송기를 동원해서 한국으로 데리고 왔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한국 정부가 깔끔하고 신속하고 완벽하게 일을 잘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나면 보수적인 한국 기독교인들이 꼭 반대를 합니다. 이슬람교 사람들을 왜 데리고 오냐는 것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술 담배 안하는 것이 경건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도 있고 건강을 위해서 매일 포도주를 조금씩 마시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개인이 알아서 할 일이지 성경이 말하는 경건하고 큰 상관이 없습니다. 겉으로는 경건한 척 하면서 속으로는 긍휼의 마음이 없는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위선자들이라고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참된 경건은 긍휼의 마음에서 옵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처럼 자기 혀를 절제하고 세속에 물들지 않고 고난받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경건한 사람입니다. 코로나 시대를 맞이해서 손 잘 씻는 것도 중요하고 건강을 위해서 깨끗한 음식을 먹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자기 혀를 절제하고 세속에 물들지 않고 고통받는 이웃을 위해서 긍휼의 마음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기억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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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열네번째 주일 / 8월 네번째 주일

열왕기상 8:41-43, 에베소서 6:10-20

성령강림절, 인류의 평화를 위한 기도

정해빈목사

 

 

인류 역사를 보면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처럼 약소국가가 강대국을 물리친 경우가 가끔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트남과 아프가니스탄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가 베트남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났는데도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물러가지 않자 베트남은 독립전쟁 끝에 프랑스를 물리치고 독립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를 물리치고 나서 시간이 지난 후에 베트남과 미국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인구로 보나 군대로 보나 미국이 이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베트남이 이겼습니다. 미국을 물리치고 나서 시간이 지난 후에 이번에는 베트남 바로 위에 있는 중국이 쳐들어왔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구로 보나 군대로 보나 중국이 이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베트남이 이겼습니다. 프랑스와 미국과 중국을 물리친 베트남 사람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이지만 경제를 개방해서 오늘날 아시아에서 잘 사는 국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요즘 뉴스에 계속 나오는 국가가 아프가니스탄입니다. 아프가니스탄 위에는 러시아가 있고 밑에는 인도가 있고 오른쪽에는 중국이 있고 왼쪽에는 이란이 있습니다. 중동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비단길(실크로드)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강대국들이 이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 눈독을 들였습니다. 식민지 시대에 영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했다가 이기지 못하고 패배해서 물러갔고 두번째로 소련이 침략했다가 역시 마찬가지로 이기지 못하고 패배하고 물러갔습니다. 영국과 소련이 물러간 다음에 2001년 9.11 테러를 일으킨 오사마 빈 라덴이 아프가니스탄에 숨었는데 아프가니스탄이 이 사람을 내놓지 않자 미국이 세번째로 쳐들어갔다가 결국 아무런 성과없이 20년 만에 철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영국과 소련과 미국을 물리친 아프가니스탄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강대국들이 다른 나라를 쳐들어갈 때는 나름대로의 이유와 명분이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하는 탈레반은 소수민족과 여성을 학대하고 불교유적지를 파괴했습니다. 탈레반과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은 인류에서 사라져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강대국이 그 나라를 쳐들어가는 방식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미국이 20년간 아프가니스탄과 전쟁을 하면서 1조 달러를 지불하고 2400명의 병사들이 죽었지만 모든 노력이 수포로 들어갔습니다. 나라를 바꾸려면 그 나라가 자유와 개방의 나라가 되도록 주변에서 도와주어야 합니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그것이 제일 효과적입니다. 그 나라가 문제가 있다고 해서 다른 나라가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가면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킵니다. 프랑스와 미국과 중국이 베트남을 쳐들어갔지만 이기지 못했습니다. 영국과 소련과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쳐들어갔지만 이기지 못했습니다. 군대를 이끌고 다른 나라를 쳐들어가는 방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역사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이렇게 역사의 교훈이 있는데도 강대국들은 잘못된 역사를 계속 반복하고 있습니다. 힘을 통한 방법은 문제를 더 악화시킵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에베소서 6장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무장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로마제국의 병사들이 적과 싸우기 위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장을 한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악한 영과 싸우기 위해 영적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에베소서는 말합니다. 로마제국의 병사들이 머리에 투구를 쓰고 가슴에 가슴막이를 하고 허리띠를 동이고 칼과 방해를 들고 신발을 신은 것처럼 우리들도 악한 영과 싸우기 위해서 구원의 투구를 쓰고 정의의 가슴막이로 가슴을 가리고 진리의 허리띠로 허리를 동이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몸에 지니고 믿음의 방해를 들고 평화를 전하는 신발을 신으라고 말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의 싸움은 인간을 적대자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싸워야할 상대는 사람이 아니라 이 세상을 통치하는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 세상을 지배하는 악한 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을 망가트리는 폭력의 영이 악한 영입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말한다면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무기를 판매하고 마약을 판매하고 여성과 소수민족을 차별하고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집단과 그들을 조종하는 영이 악한 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저자는 이 세상에 악한 통치자가 있는 것은 그 통치자를 지배하는 악한 영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 악한 영이 있고 선한 영이 있습니다. 생명을 죽이는 영은 악한 영이고 생명을 살리는 영은 선한 영입니다. 악한 영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나쁜 생각을 하고 나쁜 행동을 한다면, 그것을 영적으로 해석한다면 악한 영이 역사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어야만 악한 영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저자는 이 세상을 파괴하는 악한 영과 맞서 싸우되 폭력적인 방법이 아니라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싸우자고 말했습니다. 로마제국이 칼과 창을 들고 세상을 정복했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구원과 정의와 진리와 성령과 믿음과 평화의 신발을 신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을 섬기고 변화시켜야 합니다. 어떤 나라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그 나라를 쳐들어가는 방식으로는 그 나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삶으로 보여주셨던 것처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마음으로 그 나라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인류가 함께 노력해서 그 나라 국민들의 도덕 수준을 높여 주어야 하고 의식주를 도와주어야 하고 민주주의가 얼마나 좋은지를 알려주어야 합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그 나라들이 문화적으로 선진국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유엔이 도와줄 수도 있고 민간단체가 도와줄 수도 있습니다. 에베소서 저자는 평화를 전하는 신발을 신자고 말했습니다. 로마제국의 군대가 전쟁하기 위해서 신발을 신었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평화를 전하는 신발을 신고 세상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열왕기상 8장을 보면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솔로몬은 이 성전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축복받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성전에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축복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말씀을 오늘날에 맞게 해석하면 우리가 모여서 예배드리는 이 예배당이 축복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예배당이 서로를 축복하고 복을 나누어 주는 축복의 장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기도한 솔로몬은 이어서 이방인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이방인들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똑같이 이 성전을 통해서 축복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솔로몬이 나중에 범죄했지만 이 기도만큼은 좋은 기도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속하지 아니한 이방인이라도 주님의 크신 이름을 듣고 이 성전을 바라보면서 기도하거든 주님께서는 그 이방인이 주님께 부르짖으며 간구하는 것을 그대로 다 들어 주셔서 땅 위에 있는 모든 백성이 주님의 이름을 알게 하시고 주님을 경외하게 하시며 이 성전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곳임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 솔로몬이 한 이방인을 위한 기도를 오늘날의 방식으로 표현하면 인류의 평화를 위한 기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기도한 것처럼 이 땅에 사는 모든 인류가 비록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미얀마의 국민들, 아프가니스탄의 국민들이 다른 나라의 국민들처럼 인간으로 대접받으며 존귀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그들을 구원해 주십시오 기도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에베소서가 말한 것처럼 구원의 투구를 쓰고 믿음의 방패를 들고 평화의 신발을 신고 지구촌의 모든 인류에게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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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열세번째 주일 / 8월 세번째 주일

열왕기상 3:5-13, 에베소서 5:15-20

성령강림절, 교만한 지혜와 겸손한 지혜

정해빈목사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열왕기상 3장에는 솔로몬이 지혜를 달라고 기도한 것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칭찬받는 유명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된 솔로몬은 기브온에 있는 산당에 올라가서 선악을 분별하고 재판을 잘 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기브온은 옛날에 여호수아와 가나안 백성들이 평화조약을 맺었던 곳입니다. 솔로몬이 기브온에서 기도했다는 말은 옛날 여호수아가 가나안 백성들과 평화조약을 맺고 가나안에 잘 정착한 것처럼 자신에게도 가나안 땅을 평화스럽게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왕이 통치를 잘 하려면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솔로몬은 적절한 곳에서 적절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종에게 지혜로운 마음을 주셔서 주님의 백성을 재판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많은 주님의 백성을 누가 재판할 수 있겠습니까?”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기도를 들으시고 솔로몬에게 지혜 뿐만 아니라 부귀와 장수와 명예까지 선물로 주셨습니다. “네가 스스로를 생각하여 오래 사는 것이나 부유한 것이나 원수갚는 것을 요구하지 아니하고 다만 재판하는 데에 듣고서 무엇이 옳은지 분별하는 능력을 요구하였으므로 이제 나는 네 말대로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준다. 너와 같은 사람이 너보다 앞에도 없었고 네 뒤에도 없을 것이다. 나는 또한 네가 달라고 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화도 모두 너에게 주겠다. 네 일생 동안 왕 가운데서 너와 견줄 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여기까지 읽으면 솔로몬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고 솔로몬이 지상 최고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가장 먼저 지혜를 달라는 기도를 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기도를 기뻐 받으셨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 중 하나가 바로 이 말씀입니다. 부모님들은 자식을 위해 기도하면서 우리 자식에게 솔로몬과 같은 지혜를 달라고 기도합니다. 솔로몬처럼 지혜 뿐만 아니라 부귀와 장수와 명예를 달라고 기도합니다. 솔로몬은 우리들이 갖고 싶어하는 것을 모두 다 가졌습니다. 지혜와 부귀영화를 가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님들은 우리 자녀들이 솔로몬과 같은 축복을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솔로몬은 기도한대로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선물로 받았고 덕분에 백성들을 바르게 재판할 수 있었습니다. 두 명의 여자가 한 아기를 가지고 와서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합니다. 솔로몬이 칼로 아이를 둘로 나누어서 두 여자에게 주라고 말하자 한 여자가 아들에 대한 모정이 불타올라서 이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셔도 좋으니 아이를 죽이지 말아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이를 본 솔로몬은 누가 진짜 엄마이고 가짜 엄마인지를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동양과 이집트에서 가장 지혜가 뛰어난 사람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솔로몬을 찾아왔습니다. 열왕기상 5장 32절에 의하면 솔로몬은 삼천 가지의 잠언을 말하였고 천다섯 편의 노래를 지었고 모든 초목과 짐승과 새와 물고기를 알았습니다. 열왕기상 10장을 보면 아프리카의 시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알아보기 위해서 솔로몬을 찾아왔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최고의 지식도 가졌고 지혜도 가졌고 재물도 가졌고 명성도 가졌습니다. 그는 사람이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졌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성경이 솔로몬의 긍정적인 모습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면도 자세하게 기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레바논의 백향목을 가져다가 7년에 걸쳐서 성전을 지었고 이어서 13년에 걸쳐서 궁궐을 지었습니다. 그는 20년 동안 성전과 궁궐을 짓기 위해서 15만 명의 백성들을 동원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외국 여자들을 좋아해서 칠백 명의 후궁과 삼백 명의 첩을 두었는데 그 아내들이 솔로몬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열왕기상 11장 4절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솔로몬이 늙으니 그 아내들이 솔로몬을 꾀어서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다. 그래서 솔로몬은 자기의 주 하나님께 그의 아버지 다윗만큼은 완전하지 못하였다.” 처음 왕이 되었을 때 백성들을 바르게 다스릴 수 있도록 지혜를 달라고 기도했던 솔로몬이 시간이 지나면서 20년 동안 백성들을 동원해서 성전과 궁궐을 짓고 여자들을 좋아하고 하나님을 멀리하고 다른 신들을 섬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죽고 나서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12지파 중에 10지파가 북이스라엘을 따로 세웠습니다. 그만큼 백성들이 솔로몬을 싫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지혜로운 왕이 아니라 부패하고 타락한 왕으로 인생을 마쳤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두 쪽으로 쪼개기까지 하였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솔로몬과 같은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솔로몬과 같은 사람이 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솔로몬의 인생이 이렇게 망가진 것은 그가 겸손한 지혜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교만한 지혜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지혜에는 두가지 종류의 지혜가 있습니다. 교만한 지혜가 있고 겸손한 지혜가 있습니다. 교만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선악을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은 무조건 옳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판결이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교만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지혜를 받았던 솔로몬은 겸손을 잃어버리고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누구도 그를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교만한 지혜를 자랑하는 사람은 결국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됩니다. 솔로몬의 인생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뱀은 지혜를 상징하는 동물이었습니다. 뱀이 아담과 하와를 속여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열매를 먹게 하였습니다. 이 열매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선과 악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지혜가 교만한 지혜입니다. 우리는 선과 악을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뱀은 솔로몬을 가리킵니다. 창세기 말씀이 솔로몬 시대에 쓰여졌습니다. 솔로몬의 교만을 책망하기 위해서 창세기가 쓰여졌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 자기가 선과 악을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 검사와 판사입니다. 검사는 사람을 쳐다볼 때 죄인 바라보듯이 사람을 쳐다보고 판사는 그 사람이 죄가 있는지를 없는지를 판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검사와 판사는 자신의 판단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항상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만약 검사와 판사가 나는 무조건 옳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사회를 위해서 해를 끼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에베소서 5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살피십시오. 지혜롭지 못한 사람처럼 살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으십시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우쳐 주는 것이 지혜입니다. 보통 지혜를 말할 때, 인생에서 성공하는 비결, 회사에서 인정받는 비결, 공부 잘하는 비결, 돈을 잘 굴리는 비결, 처세술이 지혜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오늘 우리가 시편 111편을 교독한 것처럼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있는 말씀이요 지혜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과 그분의 삶을 따라가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내가 선악을 판단할 수 있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생명과 섬김의 길을 따라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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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열두번째 주일 / 8월 두번째 주일
사무엘기하 18:31-33, 에베소서 4:25-32
성령강림절, 다윗이 울부짖다
정해빈 목사

 

 

어느 종교이든지 그 종교의 경전을 보면 공통적으로 천지창조 이야기가 들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천지창조 이야기를 보면 그 종교가 어떤 종교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제일 먼저 빛을 창조하셨고 순서대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남자와 여자를 똑같이 창조하셨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종교이든지 그 종교 경전의 1장이 중요합니다. 1장을 읽으면 그 종교가 어떤 종교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은 아름답습니다. 혼돈과 흑암과 무질서가 물러가고 빛이 들어왔고 온 세상에 생명이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에는 갈등이나 싸움이나 죄악이 없습니다. 창세기 1장만 읽어도 은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렇게 아름답게 창조하셨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을 돌보게 하셨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종교의 창조 이야기가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히브리 백성들은 나라가 망한 후에 포로가 되어 바벨론 제국으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바벨론 종교의 창조 이야기, 수메르 신화를 알게 되었습니다. 바벨론 제국의 창조 이야기는 끔찍합니다. 마르둑이라는 신과 티아마트라는 신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는데 마르둑이 티아마트의 시체를 둘로 나누어서 한쪽을 위로 던져서 하늘을 만들었고 또 한쪽을 밑으로 던져서 땅을 만들었습니다. 그 다음에 마르둑은 흙에다가 죽은 티아마트의 피를 섞어서 인간을 만든 다음에 신을 시중드는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바벨론 창조 이야기에 의하면 전쟁에서 패배한 신의 시체를 통해서 세상과 인간이 창조되었습니다. 바벨론 종교의 창조 이야기가 무섭고 폭력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조 이야기를 보면 그 종교가 생명과 평화를 사랑하는 종교인지 아니면 폭력을 사용하는 종교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한민족에게도 단군신화와 천지창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옛날 하늘에 환인(桓因)이라는 신이 있었는데 환웅(桓雄)이라는 아들이 인간세상을 돕고자 하여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서 3천명을 이끌고 태백산에 내려와서 나라를 세웠습니다. 홍익인간(弘益人間),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하늘의 지혜와 기술을 인간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어느 날 곰과 호랑이가 환웅을 찾아와서 인간이 되고 싶다고 말하자 환웅은 쑥과 마늘을 주면서 이것을 먹으면서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인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호랑이는 100일을 견디지 못했고 곰은 100일을 견뎌서 여자가 되었고 환웅과 여자가 결혼해서 단군이 태어났습니다. 우리 민족의 천지창조 이야기도 창세기처럼 아름답습니다. 홍익인간이라는 뜻도 아름답고 신과 인간과 동물이 서로 만나는 이야기도 아름답습니다. 단군신화에는 전쟁이나 갈등 같은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반면에 서양의 천지창조 이야기는 살벌합니다. 서양의 문화는 그리스 문화에서 시작되었는데 그리스 신화를 보면 아버지와 아들이 권력을 놓고 갈등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늘의 신과 땅의 신이 만나서 시간을 지배하는 크로노스를 낳았습니다. 크로노스는 아버지 우라노스를 제거하고 모든 신들의 왕이 됩니다. 크로노스는 아들 제우스를 낳았는데 이번에는 제우스가 아버지 크로노스를 제거하고 모든 신들의 왕이 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제거하고 왕이 되니까 또 그 아들의 아들이 아버지를 제거합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권력을 놓고 아버지와 아들이 다툼을 벌이는 문화가 서양 문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류는 시간이 흐르면서 창세기에 나오는 아름다운 창조 이야기나 단군 신화에 나오는 홍익인간 이야기를 버리고 권력 다툼을 벌이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크로노스와 아들 제우스가 싸우는 그리스 신화가 인류 역사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권력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고 아들은 아버지의 권력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우리들 모두는 죄인이고 가인의 후손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고 세상을 떠돌아다니면서 성을 쌓았습니다. 힘이 세고 남의 것을 빼앗는 가인이 인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사무엘기하 18장에도 아버지 다윗과 아들 압살롬이 권력 다툼을 벌이다가 압살롬이 죽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윗에게는 여러 명의 자식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 암논이 이복 누이인 다말을 욕보인 일이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화가 났지만 암논이 맏아들이기 때문에 책망하지 않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말의 친오빠인 압살롬은 아버지와 배 다른 형 암논에게 앙심을 품었고 2년쯤 지난 뒤에 암논을 죽이고 도망을 갑니다. 아버지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으니까 맏아들 암논도 똑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망다니던 압살롬은 시간이 지나서 왕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압살롬은 아버지를 밀어내고 왕이 되기 위해서 사람들을 모으고 백성들의 민심을 얻기 위해서 노력한 끝에 결국 아버지를 쫓아내고 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무엘기하 18장을 보면 다윗의 부하들과 압살롬의 부하들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을 때 다윗이 부하들에게 압살롬이 아직 철이 없으니 나를 보아서라도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지만 다윗의 부하 요압은 다윗의 부탁을 거절하고 압살롬을 죽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통곡하며 슬피 울었습니다. “압살롬아, 압살롬아, 너 대신에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되어야 할 맏아들 암논은 다말을 간음한 것 때문에 압살롬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압살롬은 반역을 꿈꾸다가 죽었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군사령관 요압은 다윗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가 왕인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한때 하나님께 사랑받고 백성들에게 사랑받았던 다윗이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나단 선지자의 예언대로 다윗의 집안에 칼부림이 그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라 다윗이 왕이 된 후에 교만하고 범죄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신중하게 처신하였더라면 그는 이런 비극을 만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에베소서 4장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새로운 삶, 새로운 생활윤리를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요즘 에베소서 말씀을 계속 묵상하고 있는데 그리스도인의 교회생활, 일상생활에 대한 좋은 가르침이 에베소서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변화받고 주님의 제자가 된 우리들은 에베소서의 말씀대로 거짓을 버리고 참된 말을 해야 하고 화를 내더라도 죄를 짓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해야하고 해가 지도록 노여움을 품어서는 안됩니다. 도둑질하는 사람은 이제부터는 수고를 하면서 제 손으로 떳떳하게 일해야 하고 더 나아가서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잘못된 행동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라는 말은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갈 때 성령께서 우리를 보며 슬퍼하시고 탄식하신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을 버리고 서로 친절히 대하고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 용서하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도덕 교과서처럼 너무 당연한 말씀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인류 역사는 에베소서의 말씀과 반대되는 길을 걸어왔습니다. 바벨론 신화도 마찬가지고 그리스 신화도 마찬가지고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인류는 갈등하고 다투고 싸우는 길을 걸어왔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에는 인터넷 뒤에 숨어서 댓글로 상대방을 비방하고 혐오를 부추기고 가짜 뉴스를 퍼트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다윗이 죽은 압살롬을 생각하며 크게 울부짖었던 것처럼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다윗이 울부짖었던 것처럼 성령을 떠난 삶은 고통스러운 삶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허물많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고 덕을 세우는 그런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님을 슬프게 하는 삶이 아니라 성령님을 기쁘게 하는 그런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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