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여덟번째 주일/2월 네번째 주일
주현절, 황금률
누가복음 6:27 - 38
정해빈 목사



2월 네번째 주일, 주현절 여덟번째 주일입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서 누가복음 6장 말씀을 계속 묵상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6장 27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높은 수준의 삶의 윤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읽다보면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듣기 부담스러운 말씀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을 대표하는 말씀이 31절에 나오는 황금률(Golden Rule)입니다. “너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여라. Do to others as you would have them do to you.” 이 말씀대로만 살면 성경말씀 다 몰라도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다는 뜻에서 이 말씀을 황금 같은 율법이라는 뜻에서 황금률이라고 부릅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으면 먼저 남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에게 대접받고 싶으면 먼저 남을 대접하고,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으면 먼저 남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당신이 인정받고 대접받고 사랑받고 싶으면 당신이 먼저 상대방을 인정하고 대접하고 사랑하십시오. 남들이 나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당신이 먼저 그것을 하십시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황금률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종교의 가르침에 들어있습니다. 학교나 도서관이나 Community Centre에 가보면 여러 종교들의 황금률이 기록된 저런 그림/포스타를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과 비슷한 시대 유대교를 대표하는 랍비 힐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에게 해로운 것을 당신의 이웃에게 하지 마시오. 이것이 바로 율법의 핵심이고 나머지는 부연설명입니다. 가서 이것을 실천하십시오.” 유교의 [논어]에 보면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이라는 한자가 나옵니다. 어느 날 자공이라는 제자가 공자에게 “평생 지켜야 할 한마디 말이 있습니까?” 라고 물었더니 공자가 그것은 관용인데,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기독교는 대접받고 싶으면 먼저 대접하라고 능동적으로 표현을 했는데, 유교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수동적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그래서 유교의 가르침을 Silver Rule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슬람교의 경전인 쿠란에 보면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남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신앙인이 아니다, 나의 이웃이 사랑하는 것을 같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 신앙인이 아니다” 이런 말이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의 모든 종교들에 황금률이 나오는 것을 보면 황금률이 인간 삶에 필수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가는 말이 고아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이나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해 보라는 [역지사지] 같은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본능적으로 상대방이 먼저 나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기대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좋은 관계의 출발점이 상대방이 아니라 나에게서 출발한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잘 보여줍니다.


모든 종교에 황금률이 있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황금률이나 다른 종교가 말하는 황금률이나 다 똑같은 말씀이 아닙니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황금률이 다른 종교가 말하는 황금률보다 훨씬 더 강하고 철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접을 받고 싶거든 남을 먼저 대접하라는 황금률은 내가 남을 대접하면 나중에 그 사람이 나를 대접할 것이라는 약속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황금률에 머무르지 말고 더 나아가서 보답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도움을 주었으면 나중에 도움을 받는 것이 당연한 상식이었습니다. 특히 예수님 당시 로마 사회는 후견인/수혜자 사회였는데, 후견인이 수혜자를 보살펴 주면 수혜자는 후견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도움을 줘도 다시 나에게 보답할 수 없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대가를 기대하지 말고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대가를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나를 미워하는 원수에게도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 27절-28절을 보면 4가지 동사가 나오는데, 나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모욕하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을 행하고, 축복하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love, do good, bless and pray. 대접받고 싶으면 먼저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 말씀도 지키기 어렵고 보답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선을 베푸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그런데 원수를 사랑하고 선을 행하고 축복하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너무 어려워서 도저히 지킬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됩니까? 나를 괴롭히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을 행하고 기도하고 축복해 주어야 합니까? 이렇게 질문하고 싶은 것이 우리의 솔직한 심정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질문에 대해서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대접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다. 너희는 세상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자비로우시니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말씀하셨고 너희가 원수를 사랑하고 선을 행하고 축복하고 기도하면 하늘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큰 상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주일 성서일과의 구약성경 본문인 창세기 45장을 보면 요셉이 형들과 화해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철저한 황금률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셉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개인적인 원한 관계에 사로잡히지 말고 눈을 크게 뜨고 큰 그림을 볼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많이 쓰는 말 중에 big picture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좁게 보지 말고 그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큰 그림을 보라는 말입니다. 요셉은 형들 때문에 이집트의 종으로 팔려간 이후로 많은 고난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요셉에게는 형들이 원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나이가 들면서 점차 큰 그림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집트/가나안 지방에 흉년이 들었을 때를 대비해서 우리 집안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이집트로 보내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동생을 노예로 팔아넘긴 형들이 행동이 잘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형들은 분명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자비로운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사랑하셔서 요셉의 비극적인 인생을 긍정적인 인생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런 큰 그림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요셉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4가지 명령, 형들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고 축복하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라는 신학자는 하나님은 우리를 조종하는 인형극을 하는 사람(Puppeteer)이 아니라 화가(artist)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화가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겪는 비극/슬픔/아픔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십니다. 요셉이 만일 나를 팔아넘긴 형들 때문에 내 인생이 망쳤다고 생각하면 그는 형들을 사랑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치 화가가 때로는 부드러운 재료를 가지고 때로는 거친 재료를 가지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 듯이,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면 우리는 원수를 너그럽게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난과 시련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더 좋은 인생을 만들어 주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대가를 기대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고 원수를 사랑하고 선을 행하고 축복하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제국이 폭력으로 다스리니까 많은 유대인들이 폭력으로 저항을 했더니 로마제국이 더 큰 폭력으로 그들을 진압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런 상황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고민이 담겨 있습니다. 원수를 부끄럽게 하자는 것입니다. 원수가 회개할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저항을 하되 비폭력으로 저항하자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저항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비폭력 저항도 저항의 한가지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웃에게 선을 행하면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요셉처럼 아름다운 인생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주현절을 묵상하면서 황금률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더 철저한 황금률을 묵상하고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piphany, Golden Rule
Luke 6:27 - 38


But I say to you that listen, Love your enemies, do good to those who hate you, bless those who curse you, pray for those who abuse you. If anyone strikes you on the cheek, offer the other also, and from anyone who takes away your coat do not withhold even your shirt. Give to everyone who begs from you, and if anyone takes away your goods, do not ask for them again. Do to others as you would have them do to you. If you love those who love you, what credit is that to you? For even sinners love those who love them. If you do good to those who do good to you, what credit is that to you? For even sinners do the same. If you lend to those from whom you hope to receive, what credit is that to you? Even sinners lend to sinners, to receive as much again. But love your enemies, do good, and lend, expecting nothing in return. Your reward will be great, and you will be children of the Most High, for he is kind to the ungrateful and the wicked. Be merciful, just as your Father is merciful. Do not judge, and you will not be judged, do not condemn, and you will not be condemned. Forgive, and you will be forgiven, give, and it will be given to you. A good measure, pressed down, shaken together, running over, will be put into your lap, for the measure you give will be the measure you get back. (Luke 6:27-38)


Not only did Jesus tell us the Golden Rule, But he also taught us a more complete and thorough ethic. It was to give good to those who could not reward us, and to love our enemies, to do good, to bless, and to pray. Jesus told us to prevail over evil with good. When we do good, God will change our lives just as God has changed the life of Joseph. We are called not only to remember the golden rule but also to meditate and practice a more thorough golden rule.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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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일곱번째 주일/2월 세번째 주일
주현절,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누가복음 6:17 - 26
정해빈 목사

 

 

우리는 요즘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 예수님의 삶과 말씀을 묵상하는 주현절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매 주일마다 읽어야 하는 성서일과를 보면 요즘 누가복음 말씀이 계속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6장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셔서 평지에 서서 사방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시고 말씀을 전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을 고치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모세처럼 산에서 설교하셨기 때문에 산상설교라고 부르는데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평지에서 설교하셨기 때문에 평지설교라고 부릅니다. 산에서 설교하시면 산을 올라갈 수 있는 사람들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평지에서 설교하면 누구나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온 유대와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 해안 지방에서 사람들이 왔다고 기록을 했습니다. 유대인도 오고 헬라인도 오고, 남자도 오고 여자도 오고, 건강한 사람도 오고 병자도 왔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차별없이 모든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산 밑으로 내려오셔서 평탄한 곳에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말씀이 필요한 사람들, 몸과 마음의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 따뜻한 사랑과 위로와 환영이 필요한 사람들, 용서와 자유와 희망이 필요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산 밑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오늘날 교회도 예수님처럼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낮은 곳으로 내려와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물론 교회가 산 위에서 산 아래로 빛을 비추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빛을 비춘다는 의미로 보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빛을 비추는 것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섬기고 구원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교회는 낮은 곳에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부유해지고 높아지면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갈 수 있지만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갈 수가 없게 됩니다. 낮은 곳에 있는 교회, 모든 사람들에게 문을 활짝 여는 교회, 모든 사람들이 차별없이 편안하게 올 수 있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4가지 축복과 4가지 화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나 때문에 배척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고 이어서 부요한 사람들은 화가 있다. 지금 배부른 사람들은 화가 있다. 지금 웃는 사람들은 화가 있다. 모든 사람들이 너희를 좋게 말할 때 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산상수훈에는 팔복만 나오는데 누가복음에서는 4가지 복과 4가지 화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팔복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누가복음 말씀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누가복음 말씀이 마태복음 말씀보다 너무 구체적이고 내용이 직설적이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 당시에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이 많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베푸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6장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 4장에 나오는 취임설교에서도 제일 첫 음성으로 가난한 자들을 언급하셨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누가복음 4장과 6장 말씀은 예수님의 시선이 우선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그 사람의 시선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항상 가난한 사람들에게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품에 안으시고 먹이시고 입히셨고 동시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갖지 않는 부유한 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을 보면 부자와 나사로 비유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부자가 좋은 옷을 입고 날마다 찬치를 벌였는데 거지 나사로는 대문 앞에서 헐벗은 몸으로 구걸을 했고 개들이 그의 몸을 핥았습니다. 그러다가 부자는 지옥에 떨어졌고 거지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이 이야기는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는 것이 지옥에 떨어질 정도로 큰 죄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네가 살아 있을 동안에 너는 온갖 호사를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예수님이 가난한 자는 복을 받고 부자는 화를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그대로 부자와 나사로의 위치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일관되게 보여줍니다.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었을 경우 이자를 받으면 안 되고 겉옷을 담보로 잡았을 경우 해가 지기 전에는 돌려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추수할 때 네 귀퉁이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남겨놓아야 하고 칠년 째가 되면 땅에서 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먹게 해야 하고 빚을 면제해 주어야 합니다. 모세는 신명기 15장 1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반드시 손을 뻗어 당신들의 땅에서 사는 가난하고 궁핍한 동족을 도와주십시오. 그렇다고 하여 당신들이 사는 땅에서 가난한 사람이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이것은 내가 당신들에게 내리는 명령입니다.” 잠언 14장은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지만 궁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공경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남미의 해방신학자 구티에레즈는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편애하시는 것은 가난한 자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더 훌륭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가난하고 비인간적인 환경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이 풍성한 삶을 살기 원하시는데 가난한 사람들이 그렇게 풍성한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더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사랑하신다고 말했습니다.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를 때 땅이 파인 웅덩이가 있으면 물이 웅덩이에 제일 먼저 채워지듯이,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하는 가난한 자들을 가장 먼저 찾으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가장 먼저 채워 주십니다.

 

최근 뉴스를 보다가 미국 인구의 1%가 전체 재산의 50%를 갖고 있고 인구의 19%가 42%의 재산을 갖고 있고, 인구의 80%가 7%의 재산을 갖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미국 전체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1억 5천만 명이 버는 소득보다 상위 400명이 버는 소득이 더 많다고 합니다. 빈부격차가 너무 크니까 부자들 스스로 부유세를 더 내겠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빈부격차가 너무 심하면 가난한 사람도 불행하고 부자도 불행합니다. 부자들이 집집마다 경호원을 배치하고 밖에 나갈 때도 경호원을 데리고 나가고 그러면 부자들도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부유한 자들에게 화가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부자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자선을 베풀고 세금을 많이 내는 부자가 있다면 우리는 그 부자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입니다. 대신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는 부자와 물질의 탐욕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랜싱연합교회 1층에 내려가 보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Food Bank와 중고장터를 주중에 운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그들과 함께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가난과 기도, 이 두 가지가 오늘날 예수님을 따르는 증거라고 말했습니다. 탐욕을 멀리하고 스스로 절제하고 나누는 가난을 가리켜서 깨끗한 가난, 성빈/청빈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기도가 필요하고 나와 세상 사람들 사이에는 자발적인 가난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기독교 전통 중의 하나가 자발적인 가난의 전통입니다. 빈부격차가 심해서 서로 미워하면 서로 불행하지만 자발적인 가난은 감동을 주고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켜 줍니다. 예수님, 세례요한, 중세 시대의 성자 프란치스코 모두 이웃사랑을 위해 가난한 삶을 살았고, 한국 기독교 역사에 등장하는 광주 무등산 주변에서 활동했던 이세종, 맨발의 성자 이현필, 한평생 병자들을 돌본 미국간호사 서서평 모두가 가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장사해서 돈을 벌고 부유해지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돈을 벌고 부유해지는 것이 우리 삶의 최종 목적이 아니라 부유함을 넘어서 구제와 나눔과 성빈/청빈에까지 이르도록 노력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위해서는 기도하고, 나와 이웃과의 관계를 위해서는 절제하고 나누는 거룩한 가난의 삶을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piphany, blessed are you who are poor

Luke 6:17 – 26

 

He came down with them and stood on a level place, with a great crowd of his disciples and a great multitude of people from all Judea, Jerusalem, and the coast of Tyre and Sidon. They had come to hear him and to be healed of their diseases, and those who were troubled with unclean spirits were cured. And all in the crowd were trying to touch him, for power came out from him and healed all of them. Then he looked up at his disciples and said: “Blessed are you who are poor, for yours is the kingdom of God. Blessed are you who are hungry now, for you will be filled. Blessed are you who weep now, for you will laugh. Blessed are you when people hate you, and when they exclude you, revile you, and defame you[d] on account of the Son of Man. Rejoice in that day and leap for joy, for surely your reward is great in heaven; for that is what their ancestors did to the prophets. But woe to you who are rich, for you have received your consolation. “Woe to you who are full now, for you will be hungry. Woe to you who are laughing now, for you will mourn and weep. Woe to you when all speak well of you, for that is what their ancestors did to the false prophets." (Luke 6:17-26)

 

Jesus said. "Blessed are the poor now, for the kingdom of God is yours." Just as water is first filled in a puddle of earth, God looks for the poor who can not live a whole life and fills them with love and blessing first. A theologian says that poverty and prayer should be the evidence of following Jesus today. If prayer is needed between God and me, voluntary poverty is needed between me and the world. We are called to pray for God's relationship with me and to practice the holy life of poverty for our relationship with our neighbors who are hungry.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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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여섯번째 주일/2월 두번째 주일
주현절,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시편 90:1 – 12
정해빈 목사




2월 두번째 주일, 주현절 여섯번째 주일입니다. 지난 주일 설날감사예배를 드리고 다시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새해를 맞이해서 퀴즈 한 가지를 내겠습니다. 성도님들 아래 시를 보시고 이 시가 가리키는 대상이 무엇인지 맞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민첩하고 교활한 파말마, 근심의 전달자, 추한 밤의 친구이자 꼴불견, 너는 청춘을 좀먹는 자, 거짓 즐거움의 못된 노예이며, 슬픔을 구경하는 천박한 자. 너는 모든 것을 낳고 또한 모든 존재하는 것을 소멸시킨다. 네가 맡은 일은 원수에 대한 증오심을 없애고, 세상에서 생기는 오해는 종결시키는 것이다. 너의 영광은 다투는 국왕을 화해시키는 것이고, 허위의 가면을 벗기고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악을 행한 자가 뉘우칠 때까지 고통을 주는 것이고, 오만한 건축물을 네 힘으로 폐허화하고 빛나는 황금 탑을 먼지로 더럽히는 것이다.” 여러분 이 시의 대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은 아닙니다. 민첩하고 교활하고 근심을 전달하고 추한 밤의 친구이고 청춘을 좀먹는다고 했습니다. 원수에 대한 증오심을 없애고 세상에서 생기는 오해를 종결시키고 국왕을 화해시키고 허위의 가면을 벗기고 진실을 드러내고 악을 행한 자가 뉘우칠 때까지 고통을 주고 건축물을 폐허로 만든다고 했습니다. 정답은 “시간”입니다. 영국의 극작가 셰익스피어가 시간을 가리켜서 이렇게 다양한 단어로 표현을 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 시간은 무엇일까요? 시간은 축복일까요 아니면 저주일까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시간이 때로는 사람에게 부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간은 부정적으로 보면 민첩하고 교활해서 우리에게 너무 빨리 다가오고 우리의 청춘을 좀먹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시간을 두려워하고 시간 때문에 근심합니다. 어렸을 때는 시간이 빨리 갔으면 좋겠다, 빨리 나이를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시간이 늦게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어렸을 때는 시간이 너무 안가서 지루했는데 나이가 들어서는 시간이 너무 빨리가서 걱정입니다. 반대로 시간은 긍정적으로 보면 원수에 대한 증오심을 없애주고 세상에서 생기는 오해를 종결시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오해가 풀리기도 하고 거짓이 밝혀지고 진실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우리가 보통 시간이 약이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밝혀진다고 말하는데 이런 경우에는 시간이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 없고 피조물인 사람에게만 시간이 필요합니다. 태어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 천지창조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제일 먼저 빛을 창조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습니다. 빛을 창조하시고 낮과 밤을 나누셨다는 말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제일 먼저 시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천지창조 이전에는 시간이 없는 영원한 세상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시간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피조물인 우리들은 시간을 생각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런데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에 따라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고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시간을 무서워합니다. 우리들도 가끔 살다보면 시간 가는 것이 무섭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시간의 끝에는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끝나면 죽음과 불안과 허무와 절망과 이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시간을 싫어하고 무서워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축복과 선물로서 시간을 주셨다고 믿는 사람은 시간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시간의 끝에는 두려움이 아니라 삶의 완성과 기쁨과 감사와 새로운 만남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감사를 드립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7절-8절에서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다 싸웠기 때문에 죽는 것이 두렵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나에에 의의 면류관을 씌워 주실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시간의 끝에는 죽음과 불안과 허무와 절망과 이별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시간의 끝에는 삶의 완성과 기쁨과 감사와 구원과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를 태어나게 하시고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하지만 열심히 살았습니다. 저의 시간이 다 끝나면 사랑의 하나님을 뵙고 십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시간의 마지막에 이런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헬라어에는 시간를 가리키는 두가지 단어가 있는데 크로노스는 주어진 시간, 의미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가리키고, 카이로스는 나에게 의미와 기쁨과 보람을 주는 영적인 시간을 가리킵니다. 중세 시대의 해시계를 보면 “매 순간 상처를 입히고 마지막에는 죽인다(Vulnerant omnes, ultima necat)” 라는 글자가 쓰여져 있습니다. 시간이 매 순간 상처를 입히고 마지막에는 우리를 죽인다고 생각해서 해시계에 저런 글자를 써 놓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에는 허무하고 무의미한 시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의미와 기쁨을 주는 시간도 있습니다. 시간을 크로노스로 보면 하루하루가 그냥 지나가고 지루하고 허무하게 보이지만, 시간을 카이로스로 보면 하루하루가 의미있고 기쁨과 보람이 넘치는 날이 됩니다. 기독교를 대표하는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인 어거스틴은 우리의 몸은 어쩔 수 없이 물리적인 시간(크로노스)을 살지만, 우리의 마음은 영적인 시간(카이로스)를 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이가 들고 주름살이 늘어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은 마음 먹기에 따라서 영적이고 기쁨이 충만한 시간(카이로스)를 살 수 있습니니다. 구약 성경 여호수아서를 보면 여호수아가 아모리 족속과 싸울 때, 태양과 달이 멈추게 해달라고 기도했더니 태양과 달이 멈추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물리적으로 태양과 달이 운행을 멈출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종종 세상을 살면서 어느 순간이 너무 중요하고 소중해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고 그 순간이 잊혀지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살면 시간이 덧없이 빠르게 지나가지만 순간순간을 소중하게 살면 시간은 나에게 천천히 다가오고 의미있게 다가옵니다. 나에게 의미와 기쁨을 주는 시간이 카이로스인데, 우리가 만일 매순간 카이로스의 마음으로 세상을 산다면 시간은 우리에게 축복으로 다가 올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30대 딸을 둔 어느 어머니가 다시 젊어지고 싶어서 얼굴 피부재생수술을 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30대 딸이 어머니를 보고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엄마, 나는 얼굴만 젊어진 엄마보다는,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 삶을 가르쳐 주는 우아하고 지혜로운 엄마, 주름살 있는 옛날 엄마가 더 좋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죽는 날이 가까워지기 때문에 시간을 무서워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믿는 사람은 시간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시간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축복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간의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크로노스가 아니라 카이로스, 사랑하고 감사하고 기뻐하고 봉사하면서 이 땅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90편 시인은 “우리에게 우리의 날을 계수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주어진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아무런 의미없이 세상을 살면 시간가는 것이 무섭지만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고 생각하면 시간가는 것이 무섭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물리적인 시간을 막으려고 하기 보다는 하루하루 내게 주어진 시간을 의미있는 시간으로,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시간으로 바꾸어 사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시간의 끝에는 죽음과 어둠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광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실 줄로 믿습니다. 하루하루 주어진 시간을 소중하게 계산하면서 복되고 감사한 삶을 사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piphany, teach us to count our days
Psalm 90:1 – 12


Lord, you have been our dwelling place in all generations. Before the mountains were brought forth, or ever you had formed the earth and the world, from everlasting to everlasting you are God. You turn us back to dust, and say, “Turn back, you mortals.” For a thousand years in your sight are like yesterday when it is past, or like a watch in the night. You sweep them away. They are like a dream, like grass that is renewed in the morning. In the morning it flourishes and is renewed. In the evening it fades and withers. For we are consumed by your anger. By your wrath, we are overwhelmed. You have set our iniquities before you, our secret sins in the light of your countenance. For all our days pass away under your wrath. Our years come to an end like a sigh. The days of our life are seventy years, or perhaps eighty if we are strong. Even then their span is only toil and trouble. They are soon gone, and we fly away. Who considers the power of your anger? Your wrath is as great as the fear that is due you. So teach us to count our days that we may gain a wise heart. (Psalm 90:1 – 12)


The Greek word Kronos refers to the given time flowing meaninglessly, and Kairos refers to spiritual time giving meaning and joy. When we look at the time in Kronos, it seems boring and empty every day, but when we see the time in Kairo, day becomes a meaningful and joyful day. Augustine says our bodies live physical times (Kronos), but our minds can live spiritual times (Kairo). Joshua, the leader of the Hebrew people, prayed that the sun and moon would stop when they were fighting the Amorites. Physically, the sun and the moon will not stop running. But we have a moment when the time is so important and precious that time seems to have stopped and the moment is not forgotten. Truly, those who believe in God do not fear time. Not only did God give us time to bless us, but also God is waiting for us at the end of time. Psalm 90, a poet of the book we read today, prayed, "Teach us how to count our days." The poet prayed that the time given by God would not be forever so that he would cherish the time given. At the end of the time, we believe that not death and darkness, but the glorious God is waiting for us. We are called to live a blessed and thankful life while valuing the time given each day.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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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다섯번째 주일/2월 첫번째 주일
주현절, 고통과 지혜는 함께 자란다
누가복음 2:41 – 52
정해빈 목사




지난 일주일은 최근 들어 가장 춥고 가장 눈이 많이 온 일주일이었습니다. 지난 월요일 50년 만에 가장 많은 26cm 눈이 왔고 영하 20도 날씨가 며칠간 계속되었습니다. 성도님들 모두 큰 어려움 없이 일주일을 잘 보내셨을 줄로 압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겨울이 그냥 쉽게 지나갈 리가 없고 이런 과정을 거친 다음에 겨울이 지나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들의 인생도 그렇고 자녀들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쉬운 인생은 없습니다. 어렵고 힘든 기간을 거치면서 사람은 나이가 들어가고 자녀들은 점차 어른으로 성장해 갑니다. 도종환 시인이 쓴 “흔들리며 피는 꽃” 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아름다운 꽃이 피려면 비바람에 흔들리고 젖는 과정을 거친 다음에 꽃이 피듯이 우리들의 인생도 눈보라에 흔들리고 젖는 과정을 거쳐야만 아름답고 성숙한 인생이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2장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청소년 시절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청소년 시절 이야기가 누가복음 2장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첫째로 예수님도 우리들의 청소년 시절과 마찬가지로 때로는 부모님을 애타게 하고, 때로는 인생에 대해서 고민도 하고, 때로는 누군가와 깊게 토론도 하면서, 고민과 방황과 깨달음을 통해서 점점 어른으로 성장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아무런 고민도 안하고 방황도 안하신 것처럼 생각하기가 쉬운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질문하고 공부하고 대화하고 깨달으면서 점차 어른으로 성장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열두 살 되었을 때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다고 되어 있는데, 본래 유대교에서는 남자가 13살 되었을 때 "바 미쯔바"(bar mitzbah) 성인식을 치르고 성전에 올라가고 율법을 지킬 의무가 주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12살 때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아마도 소년 예수가 총명하니까 부모님이 일찍 예수를 데리고 갔던 것 같습니다. 유월절 제사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하루가 지난 다음에 부모는 예수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찾다가 예수가 성전에서 선생들과 토론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부모가 아이가 없다는 것을 하루가 지난 다음에 발견할 수 있을까요? 마을 사람들과 친척들이 함께 갔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부모는 예수를 사흘 뒤에 성전에서 찾았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나중에 3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아이는 열두 살쯤 되면 자아가 형성되고 독립심이 발달해서 서서히 부모에게서 멀어지면서 자기 세계를 쌓기 시작합니다. 어머니가 “얘야, 이게 무슨 일이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고 말하니까 소년 예수는 어머니에게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라고 대답했습니다. 좋게 표현하면 영적인 아버지의 집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는 것을 가리키지만, 다르게 표현하면 소년 예수가 이런 퉁명스런 대답을 통해서 서서히 부모 곁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식은 자라면서 서서히 부모 생각과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부모가 3일 만에 간신히 소년 예수를 찾았는데 소년 예수는 내가 성전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대답했습니다. 자녀를 기르다보면 자녀가 부모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가 오면 부모는 이 아이가 왜 부모 말을 안 들을까 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이 아이가 서서히 자립할 준비를 하는구나 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유년기에서 소년기로 바뀔 때가 바로 그런 시기입니다. 소년기가 되면 아이는 안전하지만 좁은 가족의 품을 떠나 위험하지만 더 넓은 세계로 나가려고 준비를 합니다. 지금까지는 부모가 결정하고 부모가 보호해주었지만 이제부터는 자기 스스로 결정하고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준비를 합니다. 이 모두가 어른이 되는 과정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번째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아이를 바르게 지도할 선생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말씀 46절 – 47절을 보면 “그는 선생들 가운데 앉아서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의 슬기와 대답에 경탄하였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지금까지는 소년 예수가 부모와 대화를 하였다면 이제부터는 선생들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는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어른들이 대화에 끼어주지 않았는데 지금 소년 예수는 선생들에게 질문하였고 선생들은 소년 예수를 어른으로 대접해 주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사람이 성장하려면 처음에는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그 아이와 대화하고 가르치고 그 아이를 넓은 세계로 이끌어 주는 선생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훌륭한 선생이 있었기에 소년 예수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의 역할이 중요하고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가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의 잠재력을 이끌어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부모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점들을 발견하고 아이의 잠재력을 개발시켜 주는 그런 선생의 역할을 감당하는 곳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설날을 맞이해서 교회학교와 청년들이 어른들에게 세배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예수님과 대화했던 성전의 선생들처럼 아이들과 청년들을 축복해주고 어른으로 키워주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세번째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신앙 성장에는 모험과 고통이 뒤따른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설교 제목처럼 고통과 지혜는 함께 자라는 것이 영적인 이치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말씀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의 가정도 완벽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가정이 완벽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녀는 때가 되면 부모의 생각을 뛰어넘어서 자신만의 인생을 살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부모의 속을 애타게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모험과 고통을 통해서 자녀의 인격과 생각과 신앙은 자라게 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고통과 모험을 통해서 신앙이 성장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야곱은 아버지와 형을 속인 뒤에 20년간 고향을 떠나 살았는데 그런 고통과 모험을 통해서 조금씩 성장하였고 마침내 아브라함과 이삭의 뒤를 잇는 족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야곱의 형 에서는 집을 떠나지 않고 살았는데 집을 떠난 야곱이 믿음의 족장이 되었습니다. 탕자의 비유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 유산을 가지고 집을 떠났다가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껴안고 옷을 입히고 금반지를 끼워주고 잔치를 벌였습니다. 큰아들이 항의하니까 너는 항상 내 옆에 있지만 둘째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니 기쁘지 않느냐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당신의 경험을 가지고 탕자 이야기를 말씀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집 안에만 있는 큰아들과 같은 삶을 살지 않았고 집을 떠나서 큰 깨달음을 얻고 난 후에 집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과 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혹시 내 아이가 야곱이나 탕자처럼 살고 있다면 너무 꾸짖지 마시고 이 아이가 큰 인물, 큰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지금 방황하고 있구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부모에게 순종하며 사셨고 점점 자라면서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지혜와 키는 저절로 자라지 않고 모험과 고통을 통해서 자랍니다. 모험과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낯선 사람과 만나고 대화하고 질문할 때, 우리의 신앙은 넓어지고 깊어지고 높아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이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때로는 모험/고통을 통해서, 때로는 낯선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서, 때로는 질문/대화/토론을 통해서, 때로는 영적 스승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은 자라게 될 것입니다. 소년 예수처럼, 모험과 고통이 있어도 모험과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 모험과 고통을 통해서 신앙이 자라고 지혜가 자라는 우리들과 우리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piphany, pain and wisdom grow together
Luke 2:41 – 52


Now every year his parents went to Jerusalem for the festival of the Passover. And when he was twelve years old, they went up as usual for the festival. When the festival was ended and they started to return, the boy Jesus stayed behind in Jerusalem, but his parents did not know it. Assuming that he was in the group of travelers, they went a day’s journey. Then they started to look for him among their relatives and friends. When they did not find him, they returned to Jerusalem to search for him. After three days they found him in the temple, sitting among the teachers, listening to them and asking them questions. And all who heard him were amazed at his understanding and his answers. When his parents saw him they were astonished; and his mother said to him, “Child, why have you treated us like this? Look, your father and I have been searching for you in great anxiety.” He said to them, “Why were you searching for me? Did you not know that I must be in my Father’s house?” But they did not understand what he said to them. Then he went down with them and came to Nazareth, and was obedient to them. His mother treasured all these things in her heart. And Jesus increased in wisdom and in years, and in divine and human favor. (Luke 2:41 – 52)


Through Luke 2, we can see how Jesus' youth was unique and different from others. At the age of 12, Jesus, who went up to the temple with his parents, did not go home and had a few days of discussion with the temple teachers. First, we can see through the word that Jesus, like ourselves, has grown up to be an adult as he was anxious, conversing and discussing faith and life. As the children grow up, they slowly begin to think differently with their parents and have a curiosity about the outside world. Second, we can learn from today's story that the role of the teacher who will lead the child right is crucial. The role of a parent is important at first to grow a child, but later it is important for the teacher to talk, teach, and lead the child to a broader world. Because of these great teachers, the boy Jesus could grow up to be an adult. Today's passages indicate that our church should be a church that will listen to children's stories and lead their potential. Third, we can realize that faith growth is followed by adventure and suffering. We know a lot about the Bible story of faith growing through pain and adventure. Jacob grew bitterly through the pain and adventure of his hometown for twenty years after deceiving his father and brother, and finally became a patriarch behind Abraham and Isaac. The prodigal son who left home with his father's inheritance returned home after disposing of his property. Perhaps Jesus had spoken the prodigal son with his own experience. Today’s story reminds us that through our adventure, suffering, strangers, questions, conversations, discussions, and through spiritual teachers, our faith will grow. We are called, Like boy Jesus, not to be afraid of adventure and suffering, and believe that through adventure and suffering, faith and wisdom will grow.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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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네번째 주일/1월 네번째 주일
주현절, 나를 사람들의 본보기로 삼으셨으니
디모데전서 1:12 - 17
정해빈 목사



오늘 예배는 이상철 목사님 2주기 추모예배로 드립니다. 오늘 추모예배를 맞이해서 3가지 이야기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번째 이야기는 “북간도 독립운동” 이야기입니다. 2019년은 3.1절 100주년, 상해 임시정부가 선포한 대한민국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래서 올해에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들이 많이 열리고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를 보면 당시 기독교인들 숫자가 많지는 않았지만 3.1 운동과 독립운동에 열심히 참여하였습니다. 지난 2019년 1월 1일과 1월 2일 한국기독교방송(CBS)에서 “북간도의 십자가”라는 제목으로 특집 다큐멘타리를 방송한 적이 있었습니다. 압록강과 두만강 북쪽 지역을 간도 땅이라고 부르는데 서북쪽은 서간도, 동북쪽은 북간도라고 부릅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3월 13일 북간도 서전평야에서 3만 명의 한인들이 참여하는 독립만세운동이 열렸습니다. 두만강 북쪽 땅에서 3만 명이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니 놀랍기만 합니다. 그때 평화적인 만세운동을 벌이다가 여러 명이 희생당했는데 그 이후로 본격적인 독립운동이 시작되었고 북간도는 상해임시정부의 토양이 되었습니다. 이동녕, 이동휘, 김약연, 문재린, 문익환, 문동환, 윤동주, 송명규, 김재준, 정대위 등 많은 지도자들이 북간도에서 배출되었습니다. 당시 북간도 용정에서는 캐나다연합교회가 운영하는 은진중학교와 명신여자중학교가 있었고 캐나다 선교사님들은 기독교인들의 독립운동을 후원하였습니다.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북간도 지역은 기독교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이런 역사를 생각해 보면 우리 교회가 속한 캐나다연합교회에 감사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상철 목사님께서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나신 후에 소련의 핍박을 피해서 7살 때 북간도로 이주하셔서 용정에 있는 은진중학을 다니셨고 그곳에서 교목으로 계시는 김재준 목사님을 만나셨습니다.


두번째 이야기는 이상철 목사님께서 방송설교집 [지구촌 일각에 서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목사님은 1970년대에 일주일에 한번씩 교민들을 향해서 방송설교를 하셨는데 그 책에 보면 [한국 민족을 자랑한다]라는 제목의 글이 나옵니다. “종종 동포들 입에서 ‘한국 사람은 할 수 없어’하는 말을 듣는 수가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서 한국 사람은 신통치 않은 민족이라고 말합니다. 저도 사실은 그렇게 생각하고 말해 온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지난 10여 년 동안 외국 생활을 하면서 여러 민족을 접촉하면서 내 생각은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지난 몇 해 동안 ‘한국 사람은 틀렸어’ 하는 말 대신에 ‘한국 사람은 훌륭해!, 한국 민족은 희망이 있는 민족이야’ 하는 말을 자주 하였습니다. 첫째로 한국 사람은 인정이 넘쳐흐르는 민족입니다. 커피 마시러 가자고 해놓고서는 커피를 마신 후 자기 커피 값만 내고 네 커피 값은 네가 내라고 자연스럽게 말하는 서구 사람보다는 음식점 카운터에서 서로 자기가 돈을 내겠다고 밀고 당기는 한국 사람들이 나는 존경이 가고 좋아집니다. 둘째로 한국 사람은 정서적이고 로맨틱합니다. 서구 사람들의 외향적인 정열은 금방 식어버리지만 한국 사람들의 내향적인 정열은 오래 가고 쉽게 식지 않고 두고두고 마음에 간직할 만한 저력이 있어 훨씬 믿음직하고 흐뭇합니다. 셋째로 한국 사람은 단결력이 없어서 희망이 없는 민족이라고 자학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한국 사람은 과잉 단결의욕을 가진 민족이라고 보여집니다. 마지막으로 한국 사람은 정의감이 강한 민족입니다. 일본 식민지하에서나 북한 공산치하에서나 남한 독재정권 하에서 뜻 있는 한국 사람들이 정의와 자유를 외치고 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하고 사형을 당한 사실은 세계에서 그 유례를 보기 힘든 자랑스러운 모습입니다.”


이런 내용의 글을 방송하셨는데 그 다음 주에 “다시 한국 민족을 자랑한다”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은 방송 설교를 하셧습니다. “지난 토요일 아침, 나는 한국 사람이 훌륭한 민족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이에 대해 여러분들이 각자의 견해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한국 사람이 그렇게 훌륭한 민족이라면 어째서 반만 년의 역사를 항상 외적인 억압과 내적인 당파 싸움으로 일관했느냐? 고 묻는 분도 계셨습니다. 나는 이런 역사적인 비극이 한국 사람의 죄 때문이라든지 우리의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한국 민족이 아니라 한국 민족을 침략하고 우리 문화를 짓밟고 생존권을 약탈해간 강대국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민족은 역사의 비극을 경험하면서 종교적인 희망을 개척해 왔습니다. 그래서 한국 민족은 종교적인 민족이 되었습니다. 고난과 절망을 신앙으로 견뎌온 한국 민족의 신앙경험은 세계인에게 나누어 줄 충분한 가치가 있고 그것으로 한국 민족이 인류에게 공헌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인들은 친절하고 무슨 말이든지 금방 동의하고 이쪽 의견을 무조건 수락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예의적인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운데, 한국 사람들은 대하는 태도가 일대일이고 개방적이고 자기 의견을 분명히 밝히고 그러면서도 친근미와 동지의식이 강해서 훨씬 믿음직하다는 외국인들의 이야기를 종종 듣곤 합니다. 저는 이런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한국민족은 그 깊은 곳에 세계인이 될 수 있는 소양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내용의 방송 설교를 하셨는데 우리가 한번쯤 되새길만한 내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번째 이야기는 일본인으로 태어났다가 한국인으로 귀화한 호사까 유지라는 분이 쓴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라는 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일본 사람들에게 사무라이 무사 정신이 있다면 한국 사람들에게는 선비 정신이 있습니다. 일본은 사무라이 무사 정신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어렸을 때 피아노를 배우는 아이들은 많지 않지만 초등학교에 수영장을 설치해서 전교생이 수영교습을 받아야 하고 중고등학교에서는 스포츠가 활발해서 거의 모든 고등학교에 야구부가 있습니다. 반대로 한국의 선비 문화는 철학/문화/예술/예절을 중요시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실제적인 일을 가지고 토론을 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추상적인 사상을 가지고 토론을 벌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저자는 일본 사람들은 우월감과 편협함을 버리고 다른 민족과의 예절을 더 배워야 하고 한국 사람들은 피해의식과 추상적인 논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작은 일에 총명하고 큰 일에 둔하고 한국 사람들은 큰 일에 총명하고 작은 일에 둔하다고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3가지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이 세가지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사랑하시고 우리를 복음으로 변화시켜 주시고 우리를 새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히 우리들과 우리 민족에게는 반성하고 고쳐야 할 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고난을 통해서 때로는 깨달음을 통해서 과거의 우리를 미래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가 읽은 디모데전서 1장에서 자신을 가리켜서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내가 믿지 않을 때에 알지 못하고 한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물론 바울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대교를 사랑했고 율법을 열심히 지켰습니다. 하지만 그는 교만하고 배타적이고 우월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바울을 자비롭고 너그러운 사람, 이방인을 사랑하는 사람, 생명과 평화의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 뜻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끝없이 참아 주심의 한 사례를 먼저 나에게서 드러내 보이심으로써 앞으로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본보기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사람이 이렇게 변화될 수 있다는 본보기로 나를 삼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민족을 변화시켜 주시고 사람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바울을 부르신 것처럼, 이상철 목사님을 일찍 부르셔서 민족과 인류를 위해서 일하게 하시고 그를 우리들의 신앙의 모범/본보기로 삼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부름받은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높고 넓고 깊은 것인지를 우리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상철 목사님은 키는 작으셨지만 누구보다도 가슴이 크셔서 모든 사람들을 품에 안으셨습니다. 우리들에게 크고 높고 넓은 신앙을 물려주신 신앙의 선배님들을 기억하며 그 아름다운 신앙을 계속 이어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piphany, making an example to believers
1 Timothy 1:12 – 17)


I am grateful to Christ Jesus our Lord, who has strengthened me, because he judged me faithful and appointed me to his service, even though I was formerly a blasphemer, a persecutor, and a man of violence. But I received mercy because I had acted ignorantly in unbelief, and the grace of our Lord overflowed for me with the faith and love that are in Christ Jesus. The saying is sure and worthy of full acceptance, that Christ Jesus came into the world to save sinners—of whom I am the foremost. But for that very reason I received mercy, so that in me, as the foremost, Jesus Christ might display the utmost patience, making me an example to those who would come to believe in him for eternal life. To the King of the ages, immortal, invisible, the only God, be honor and glory forever and ever. Amen. (1 Timothy 1:12 – 17)


Just as God loved and transformed the apostle Paul, God has protected and transformed the Koreans for the past 100 years. God has also transformed the Very Rev. Sang Chul Lee, who was born in Russia and made him an example of faith. He showed us how high and wide the life of the person called to God can live. The Very Rev. Dr. Lee was not tall, but his heart was bigger than anyone, so he held everyone in his arms. We are called to keep that beautiful faith, remembering our seniors of faith who have given us a big, high and wide faith.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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