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절 여덟번째 주일 / 7월 두번째 주일
출애굽기2, 생명과 폭력 사이에서
출애굽기 1:15–22, 2:11-14
정해빈 목사




이집트 바로 왕이 히브리인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싫어해서 그들이 사내아이를 낳으면 다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왕의 입장에서는 난민/노예/외국인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싫어할 수 있습니다. 난민/노예/외국인들의 숫자가 어느 정도 되어야 왕이 위협을 느낄까요? 전체 인구의 10%쯤 되면 두려움을 느낄까요? 이민을 오거나 합법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각 나라가 순수하게 난민을 얼마나 받아들이지를 알려주는 통계가 있습니다. 독일은 매년 대략 20만 명의 난민을 수용하는데 독일 인구가 8천만 명이니까 매년 0.25%를 난민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독일이라는 나라가 참 대단한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난민들을 따뜻하게 대한다고 해서 엄마 총리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캐나다는 매년 캐나다의 인구의 0.1%에 해당하는 3-4만여 명의 난민을 받고 있습니다. 2016년에는 약 3만 명의 시리아 난민들에게 영주권을 주었습니다. 한국은 매년 약 100여명의 난민을 받고 있는데 한국 인구가 5천만 명이니까 인구 대비로 따지면 0.0002%에 해당합니다. 난민을 받고 있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경제력은 세계 열두 번째인데 난민을 받아들이는 숫자는 세계 130번째입니다. 한국이 대단히 인색한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해외 언론들이 한국을 향해서 너희 나라는 과거 어려울 때 도움을 많이 받았으면서 난민에 대해서 왜 이렇게 인색하냐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독일처럼 매년 0.25% 20만 명을 난민으로 받아들이면 국민들 사이에서 난민들 숫자가 너무 많다고 불평을 터트릴 수 있습니다. 이집트의 바로 왕도 히브리인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싫어서 태어나는 사내아이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출애굽기 1장을 보면 십브라와 부아, 두명의 히브리 산파 이름이 나옵니다. 십브라와 부아는 사내아이를 죽이라는 바로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아이들을 살려 주었습니다. 히브리 여인들이 너무 건강해서 우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아이를 다 낳는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집트 왕의 명령을 거부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이들은 자신들이 히브리 사람이고 자신들이 하는 일이 산파라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산파(midwife)가 하는 일은 출산을 돕고 아이를 살리는 것이지 아이를 죽이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이들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내가 죽었으면 죽었지 태어난 생명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바로 왕도 무섭지만 하나님이 더 무섭습니다. 이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산파들의 신앙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산파들이 명령을 거부하자 바로 왕은 사내아이를 낳으면 강물에 던지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출애굽기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모세가 태어났고 어떻게 그가 살아남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부모가 모세를 낳고 몰래 숨어 키웠는데 3개월이 지나니까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갈대상자에 물이 새지 않도록 역청과 송진을 바른 다음에 아이를 넣어서 갈대 사이에 놓아두고 모세의 누나로 하여금 지켜보게 했습니다. 바로의 공주가 강에 목욕하러 왔다가 시녀들이 바구니를 발견하고는 공주에게 가지고 왔고 공주는 갈대상자 안에 들어있는 아이가 불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모세의 누나가 자기가 유모를 찾아보겠다고 말하고서는 어머니를 데리고 왔습니다. 어머니와 누나와 공주와 시녀들 덕분에 모세는 살 수 있었고 어머니의 젖을 먹을 수 있었고 나중에 공주의 양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모세가 40세가 되었을 때 궁궐 밖에 나가보니 이집트 군인이 히브리인을 때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화가 나서 이집트 군인을 죽이고 몰래 숨겼습니다. 하지만 이 일이 들통 나서 모세는 광야로 피신해야만 했는데 우물가에서 남자 목동들이 여자 목동들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여자 목자들을 도와주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모세는 십보라 라는 여자 목동과 결혼해서 그녀의 집에서 데릴사위가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1장과 2장을 읽어보면 모세와 관련하여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쪽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생명을 살리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또 한쪽에는 생명을 죽이고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히브리 산파들, 모세의 어머니와 누나, 이집트 공주와 시녀들, 모세를 집으로 초대한 십보라 이들은 모두 생명을 살리는 사람들이었고 반대로 바로 왕, 공사감독관, 이집트 군인, 여자들에게 행패를 부린 목동들은 생명을 죽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사람들과 생명을 죽이는 사람들 사이에 한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공통점이 무엇인지 발견하셨습니까? 공교롭게도 생명을 살리는 사람들은 다 여자들입니다. 히브리 산파들, 모세의 어머니와 누나, 이집트 공주와 시녀들, 모세를 집으로 초대한 십보라 이들은 모두 여성들이었고, 반대로 어린아이를 죽이라고 명령한 바로 왕, 히브리인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킨 공사감독관, 히브리인을 때린 이집트 군인, 여자 목동들을 괴롭힌 남자 목동들은 다 남자들이었습니다. 여자들은 한결같이 생명을 살리려고 노력했는데 남자들은 한결같이 생명을 죽이고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생명을 낳고 기르고 보호하는 것이 여성의 본능이라면, 부수고 죽이고 때리는 것은 남성의 본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세는 여성들 덕분에 살았고 남성들 덕분에 죽을 위기를 겪었습니다.


모세의 인생도 이와 유사했습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 남성의 성격과 여성의 성격이 있는데 모세는 처음에 남성의 성격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어느 날 궁궐 밖을 지나가다가 이집트 사람이 히브리 동포를 때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세는 동포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집트 사람을 죽이고 모래 속에 묻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또 길을 가다 보니까 이번에는 히브리 동포가 같은 동포를 때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신은 왜 동족을 때리오?” 하고 물었더니 그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단 말이오? 당신이 이집트 사람을 죽이더니 이제는 나도 죽일 작정이오?” 모세는 여기서 두가지 사실에 놀랐습니다. 첫째로는 이집트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그렇다고 해도, 히브리 사람이 더 약한 히브리 사람을 괴롭히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둘째로는 어제 자신이 이집트 사람을 죽인 것을 오늘 만난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이 히브리 사람은 어제 모세가 이집트 사람을 죽인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어제 모세가 이집트 사람을 죽인 것을 몰래 보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어제 이집트 사람에게 매를 맞은 사람이 오늘 모세에게 대드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제 모세가 이집트 사람에게서 매를 맞고 있는 히브리 사람을 구해 주었는데 오늘 바로 그 사람이 자기보다 약한 히브리 사람을 때리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목숨 걸고 고통받는 사람을 구해주었더니 바로 그 사람이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때로는 이렇게 마음이 간사해서 자기가 고통받을 때는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한탄하면서도 자기에게 조그만 힘이 있으면 자기보다 더 약한 사람을 괴롭히기도 합니다. 마치 군대에서 선임병에게 괴롭힘을 당한 사람이 나중에 선임병이 되어서는 후임병을 더 괴롭히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면 그 부당한 대우가 자기 밑에 사람에게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나도 당해보았으니까 너도 한번 당해보아라 이렇게 대응하면 안 될 것입니다. 모세는 이 사건을 통해서 큰 충격을 받았고 당장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광야로 떠났지만 근본적으로는 이 폭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광야로 떠나야만 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생명은 생명을 낳고 폭력은 폭력을 낳습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아랫사람이 더 아랫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면 폭력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나서서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야 합니다. 폭력의 악순환을 생명의 선순환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모세는 이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기 위해서 광야로 떠났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도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남성 에너지가 있고 생명을 살리고 보호하는 여성 에너지가 있습니다. 폭력적인 에너지는 가라앉히고 생명의 에너지는 높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폭력을 끊고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확산시키는 교회, 생명과 평화와 정의의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선포하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odus2, between life and violence
Exodus 1:15-22, 2:11-14


The king of Egypt said to the Hebrew midwives, called Shiphrah and Puah, “When you act as midwives to the Hebrew women and see them on the birthstool, if it is a boy, kill him but if it is a girl, she shall live.” But the midwives feared God. They did not do as the king of Egypt commanded them but they let the boys live. So the king of Egypt summoned the midwives and said to them, “Why have you done this and allowed the boys to live?” The midwives said to Pharaoh, “Because the Hebrew women are not like the Egyptian women for they are vigorous and give birth before the midwife comes to them.” So God dealt well with the midwives and the people multiplied and became very strong. Then Pharaoh commanded all his people, “Every boy that is born to the Hebrews you shall throw into the Nile but you shall let every girl live.” (Exodus 1:11-15)


One day, after Moses had grown up, he went out to his people and saw their forced labor. He saw an Egyptian beating a Hebrew, one of his kinsfolk. He looked this way and seeing no one he killed the Egyptian and hid him in the sand. When he went out the next day, he saw two Hebrews fighting and he said to the one who was in the wrong, “Why do you strike your fellow Hebrew?” He answered, “Who made you a ruler and judge over us? Do you mean to kill me as you killed the Egyptian?” Then Moses was afraid and thought, “Surely the thing is known.” (Exodus 2:11-14)


We can find from Exodus chapter 1 and 2 that there were two groups of people. On one side were people trying to save lives and on the other side were people trying to kill lives. Hebrew midwives, Moses' mother and sister, Egyptian princesses, maidens, and the women who invited Moses home were all life-saving people, On the contrary, the Egyptian Pharaoh king, construction supervisors, an Egyptian soldier, and the men who afflicted women shepherds tried to kill a life. Interestingly, all those who saved lives were women and all those who tried to kill a life were men. While women tried to give birth, nurture, and protect a life, men seemed to like to kill a life and exert violence against others. Moses was able to survive with the help of many women, and on the other hand, he had to face many dangers due to the violence of many men. Moses was sad to see that the Hebrew who was saved by Moses from an Egyptian soldier was beating the weaker Hebrew the next day. Moses was shocked by this incident and had to leave the wilderness to solve the problem of violence. Truly life gives birth to life and violence gives birth to violence. We are called to break out the vicious cycle of violence. We must change the vicious cycle of violence into a virtuous circle of life. May our church be a church that resists violence, saves lives, and declares to the world the kingdom of God of life, peace, and justice.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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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일곱번째 주일 / 7월 첫번째 주일
출애굽기1, 히브리 난민들
출애굽기 1:1 – 11
정해빈 목사



여러분에게 사진 2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첫번째 사진은 최근 제주도에 난민 신청을 한 예멘 사람들 사진입니다. 중동 사우디아라비아 남쪽에 예멘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지금 내전이 벌어져서 많은 국민들이 말레이시아 같은 나라로 떠났는데 말레이시아 정부가 다 수용을 못하니까 약 500명이 다시 배를 타고 제주도에 왔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20만 명이 인터넷으로 청와대에 청원을 넣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예멘 사람들이 불쌍하니까 난민 심사를 해서 가능하면 받아주자는 청원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 사람들을 믿을 수 없고 종교도 이슬람이고 범죄를 저지를지도 모르니까 그 사람들을 받아주면 안 된다는 청원이었습니다. 그렇게 반대 청원을 한 20만 명이 대부분 기독교인들이었다고 합니다. 이슬람 사람들은 테러를 일으키는 사람들이니까 받아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테러를 일으키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전쟁을 피해서 온 사람들입니다. 극단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이슬람에도 있고 힌두교에도 있고 불교에도 있고 기독교에도 있습니다. 난민 심사를 해서 받을 사람은 받고 문제가 있는 사람은 받지 말자고 청원하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받지 말자고 청원을 했습니다. 어쩌다가 한국 기독교인들이 일반 국민들보다 더 폐쇄적인 사람들이 되었을까, 누구보다도 난민들을 따뜻하게 대해야 할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저렇게 차가운 사람들이 되었을까, 한국 기독교가 저런 식으로 하면 일반 국민들이 한국 기독교를 어떻게 볼까, 저런 식으로 하면 전도가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전체 기독교인들이 저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저런 생각을 하는 기독교인들이 저렇게 많다는 것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제주도에서 과수원을 하는 기독교인이 아이가 3명 있는 가정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같이 산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신문 기자가 왜 예멘 가정을 집으로 데리고 왔냐고 질문하니까 집 주인이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저희 집에 빈 방이 하나 있어서 가족을 데리고 왔습니다.”


두번째 사진은 최근 미국의 시사 주간지 Times 표지 사진입니다. 트럼프 대통령과 어린 아이가 서로를 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부모가 어린 자녀와 함께 밀입국을 한 경우 일단 석방한 뒤 재판을 거치도록 해왔기 때문에 가족이 헤어지는 일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트럼프는 “불법 이민자 부관용 정책”을 발표하면서 부모와 함께 입국한 아이들을 부모와 격리해서 따로 구금 시설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구금 시설이 충분하지 못하다 보니 어린 아이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지내야만 했습니다. 백악관에 따르면 '무관용 정책' 도입 후 2300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그들의 부모와 떨어져 임시시설로 보내졌습니다. 동물 우리처럼 철장이 쳐진 곳으로 아이들을 격리시켰습니다. 보온 담요 한 장 주고 콘크리트 바닥에서 지내게 했습니다. 부모와 떨어진 아이들은 정신적 충격과 심리적인 불안을 겪게 됩니다. 언론을 통해서 부모와 헤어진 아이들이 울고 있는 모습이 공개되자 트럼프의 부인인 멜라니가 무관용 정책에 반대한다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비난 여론이 높아지자 트럼프는 마지못해서 부모와 아이들을 격리시키는 정책을 취소시켰습니다. 부모와 아이들을 격리시키는 정책은 취소하겠지만 불법 이민자 무관용 정책은 계속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미국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가 지금부터 3000년 전 이집트에도 있었습니다. 미국 이야기는 난민들의 부모와 아이들을 떼어놓는 이야기이지만 3000년 전 이야기는 난민들의 아이들을 죽이는 이야기였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 왕이 히브리 노예들의 숫자가 늘어나면 나라에 위협이 되니까 히브리인들이 여자 아이를 낳으면 살려주고 사내아이를 낳으면 죽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출애굽기 1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의 가족 70명이 기근을 피해서 가나안에서 이집트로 이주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주라고도 말할 수 있고 난민을 신청했다고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땅이 없어서 여기저기 떠도는 사람들을 히브리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라는 말은 떠돌이/나그네/방랑자를 가리킵니다. 히브리 사람들이 쓰는 말이라고 해서 그들의 말을 히브리어라고 부릅니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뿌리가 되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 히브리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 이야기를 맨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창조 이야기를 제외하고 제일 처음 나오는 이야기가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야기인데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고향과 친척을 떠났습니다. 옛날에 고향과 친척을 떠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옛날에는 사람이 태어난 지역/집안에 따라서 대체로 사람의 운명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 자유를 찾아서, 믿음의 조상이 되라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난민이 됨으로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도 난민 생활을 하였고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의 후손 70명이 가뭄을 피해서 이집트로 가서 난민 생활을 하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유대교/기독교 신앙이 난민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파라오 왕은 공사 감독관들에게 히브리인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바로가 곡식을 저장하는 성읍 비돔과 라암셋을 건설하는 일에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야곱의 후손들이 강제 노동에 시달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이 어린 시절에 이집트로 팔려갔지만 꿈을 잘 해석하고 성실함을 인정받아서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야곱의 가족들은 요셉 덕분에 처음 애굽에 도착했을 때 힘들지 않게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이 죽고나서 요셉을 모르는 파라오 왕이 등장하면서부터 히브리 사람들은 노예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고대 사회에서 자신을 돌봐줄 후원자가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 수 있습니다. 흔히 고대 사회를 후견인(patron)-수혜자(client) 사회라고 말합니다. 후견인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밑에 사람들을 돌봐 줍니다. 그러면 그 혜택을 입은 수혜자들은 후견인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이렇게 고대 사회는 후견인-수혜자 관계를 맺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습니다. 요셉이 살아 있을 때는 요셉이 있었기 때문에 히브리 사람들이 편안하게 정착할 수 있었지만 요셉이 죽고 나서는 더 이상 히브리 사람들을 돌봐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은 자신을 보호해 줄 후견인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후견인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 불안한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었지만 그의 관심은 유대인이 아니라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가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디에서나 모여 살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모여 사는 곳에 가면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배경이 없는 사람들은 어디에서도 보호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로마 시대에 아무런 힘이 없는 사람들, 자신을 보호해 줄 후견인을 갖지 못한 사람들, 과거에 노예였던 사람들, 시골에서 도시로 올라온 사람들은 어디에서도 보호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교회가 바로 그런 사람들을 품어주고 그들의 후견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의 후견인이 되어 주셨던 것처럼, 교회가 바로 그들을 품어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도 난민의 경험이 있습니다. 6.25 전쟁 때 많은 피난민들이 남쪽으로 내려왔고 16만명의 아이들이 해외로 입양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어려울 때 많은 해외 나라들이 우리 민족을 도와 주었습니다. 우리들이 어려울 때 그런 도움을 받았으니 이제는 우리들이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예로 고통받는 히브리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아파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고통받는 사람들의 후견인이 되어 주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odus1, Hebrew refugees
Exodus 1:1 - 11


These are the names of the sons of Israel who came to Egypt with Jacob, each with his household: Reuben, Simeon, Levi, and Judah, Issachar, Zebulun, and Benjamin, Dan and Naphtali, Gad and Asher. The total number of people born to Jacob was seventy. Joseph was already in Egypt. Then Joseph died, and all his brothers, and that whole generation. But the Israelites were fruitful and prolific; they multiplied and grew exceedingly strong, so that the land was filled with them. Now a new king arose over Egypt, who did not know Joseph. He said to his people, ‘Look, the Israelite people are more numerous and more powerful than we. Come, let us deal shrewdly with them, or they will increase and, in the event of war, join our enemies and fight against us and escape from the land.’ Therefore they set taskmasters over them to oppress them with forced labour. They built supply cities, Pithom and Rameses, for Pharaoh. Amen. (Exodus 1:1-11)


Exodus chapter 1 says that 70 families of Abraham's grandson, Jacob's family, escaped from famine and migrated from Canaan to Egypt. They were called “the Hebrews” which refer to travelers, strangers, and wanderers. These Hebrews became the roots of Judaism and Christianity. Abraham, the fathers of faith, was called by God to leave his hometown and relatives. In the old days, people's destiny was usually determined according to the region and tradition where the person was born. Abraham, however, refused his fate, left his hometown, relatives and father's house, and became an ancestor of faith. His story reminds us of the fact that Abraham and 70 descendants of Abraham's grandson, Jacob, were all refugees. The Jewish / Christian faith began with these refugees. The Hebrews could live without difficulty when Joseph was the prime minister of Egypt. But after the death of Joseph, the Hebrews had to live slavery. Through this story, we can see how important it is to have a patron in ancient society. Ancient society is often referred to as a patron-client society. The custodian takes care of the people below, and the beneficiaries are loyal to the custodian. The Apostle Paul said that the church should be a place to care for those who have no power. He said that as the Lord has taken care of the poor and the sick, a church must be the place to protect those who have no power. We remember that when Korea was suffering from war, many foreign countries helped our nation. Since we have received such help, we should be able to help others. We are called to be a church that will rejoice with those who suffer.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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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여섯번째 주일 / 6월 네번째 주일

성령강림절, 여러분의 마음을 넓히십시오

고린도후서 6:1 13

정해빈 목사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후서 61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도록 하십시오 라고 말했고 12-13절에서 여러분의 마음이 옹졸합니다. 나는 자녀들을 타이르듯이 말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넓히십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두가지를 권면했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란 하나님의 선물/은사/축복을 가리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의로우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본래 그들은 말 잘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지식이 많거나 유명하거나 부유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본래 우상과 미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복음을 통해서 말 잘하는 사람이 되었고 방언하는 사람이 되었고 지혜있는 사람이 되었고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 유대인으로 개종할 필요도 없었고 할례를 받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보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고 여전히 과거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은혜는 받았는데 그들의 삶에는 은혜가 없었습니다. 바울의 편지를 읽어보면 바울이 세운 교회들 중에서 고린도 교회가 가장 문제가 많은 교회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일어나서는 안 되지만 교회에서 가끔 일어나는 안 좋은 일들이 고린도 교회에서 다 일어났습니다. 교인들 사이에서 소송이 벌어졌고, 교인들이 서로 갈라졌고, 간음하는 일이 벌어졌고, 성령의 은사가 잘못 사용되었고, 방언 때문에 교회가 시끄러워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성령의 은사를 받았지만 새사람,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은혜를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은혜로우시니 나도 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는 풍성하게 받았으면서도 자신들의 삶에서는 은혜가 없었습니다.

 

두번째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마음이 옹졸한 사람이 되지 말고 여러분의 마음을 넓히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을 넓히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바울은 선교 여행 중에 고린도 교회를 세웠지만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바울을 차갑게 대했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사람들을 더 우대했습니다.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로부터 파송을 받았는데 고린도 교회 교인들 중에는 안디옥 교회로부터 파송받은 바울보다는 모교회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파송받은 받은 사람들을 더 우대했습니다. 파송받은 사람을 사도라고 하는데 사람들 중에는 바울이 사도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왜 바울을 낮게 보았을까요? 바울은 첫째로 예수님의 12 제자가 아니었고 예수님을 육신적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둘째로 바울은 과거에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고 셋째로 글은 잘 쓰지만 말은 잘 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바울이 자신들의 교회를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았고 예루살렘에서 온 다른 지도자들을 더 우대했습니다. 바울은 교회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고 스스로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게 했더니 고린도 교회 교인들 중 일부는 바울이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 사도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이 얼마나 진실한가, 그 사람이 복음을 위해서 얼만큼 헌신했느냐를 보지 않고, 대신 누가 당신을 보냈느냐, 누가 당신을 추천했느냐, 당신은 어디 출신이냐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넓은 마음을 갖지 못하고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아무도 우리가 섬기는 일에 흠을 잡지 못하게 하려고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아무에게도 거리낌거리를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하나님의 일꾼답게 처신합니다. 우리는 많이 참으면서 환난과 궁핍과 곤경과 매 맞음과 옥에 갇힘과 난동과 수고와 잠을 자지 못함과 굶주림을 겪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해서 헌신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를 믿고 따르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복음 안에서는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바울은 이 복음을 위해서 환난과 궁핍과 모욕과 수고를 받았고 복음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서 몸과 마음을 조심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바울이 새로운 사람으로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본래 정통 유대교를 신봉하는 민족/종교 우월주의자였고 가장 폐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유대교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스데반을 죽이고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으러 다녔습니다. 사람이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고 다른 신앙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다른 것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틀렸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마음이 옹졸한 사람이 되지 말고 마음을 넓히라고 말했는데 이는 자신의 경험을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누구보다도 폐쇄적이고 편협하고 옹졸한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에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었고 유대인 아닌 사람들과 신분이 낮은 사람들의 권리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는 받았지만 여전히 마음이 옹졸하고 좁은 사람들을 향해서 마음을 열고 같은 교회 식구들을 귀하게 여기고,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라고 말했습니다.

 

진실로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람, 마음이 넓은 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변화시켜 주십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우상숭배와 마술과 다툼과 시기와 분쟁과 분열과 술취함과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놀음을 멀리하고 대신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으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로마 사람들을 향해서 한 말입니다. 로마 사람들 중에는 음행과 우상숭배와 마술과 술 취함에 빠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새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술 중독에 빠진 사람이 가게 술병을 보니까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옆 가게에 가서 우유를 마셨다고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다른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로마서 2장에서 유대인들을 향해서 선민으로 선택받았다고 자랑하지 말고 진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했습니다. 정통 유대인들이 얼마나 폐쇄적인지를 보여주는 예가 요한복음 8장에 나옵니다. 어떤 여인이 간음하다 붙잡혔는데 사람들이 돌을 들어서 이 여자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율법에 그렇게 쓰여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간음을 했다면 남자/여자를 다 붙잡아야지 왜 여자만 데리고 옵니까? 또 율법에는 불효자식도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는데 그런 식으로 따지면 우리들 모두는 다 돌에 맞아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여러분들 중에 죄 없는 사람이 이 여자를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편협하고 옹졸한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넓은 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변화시켜 주십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로마 사람도 성령받아서 새사람이 되어야 하고 유대인도 성령받아서 새사람이 되어야 하고 우리들도 성령받아서 새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 의롭고 경건한 사람, 마음이 넓은 사람,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6.25 전쟁 때 손양원 목사님은 아들을 죽인 공산군을 용서하고 그를 양자 삼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와 같이 마음이 깊고 높고 넓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넓은 가슴을 가지고 모든 인류를 품에 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넓혀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고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를 주십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이 땅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서 일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entecost, open wide your hearts

2 Corinthians 6:1 13


As we work together with him, we urge you also not to accept the grace of God in vain. For he says, ‘At an acceptable time I have listened to you, and on a day of salvation I have helped you.’ See, now is the acceptable time; see, now is the day of salvation! We are putting no obstacle in anyone’s way, so that no fault may be found with our ministry, but as servants of God we have commended ourselves in every way: through great endurance, in afflictions, hardships, calamities, beatings, imprisonments, riots, labours, sleepless nights, hunger; by purity, knowledge, patience, kindness, holiness of spirit, genuine love, truthful speech, and the power of God; with the weapons of righteousness for the right hand and for the left; in honour and dishonour, in ill repute and good repute. We are treated as impostors, and yet are true; 9as unknown, and yet are well known; as dying, and seewe are alive; as punished, and yet not killed; 10as sorrowful, yet always rejoicing; as poor, yet making many rich; as having nothing, and yet possessing everything. We have spoken frankly to you Corinthians; our heart is wide open to you. There is no restriction in our affections, but only in yours. In returnI speak as to childrenopen wide your hearts also. Amen. (2 Corinthians 6:1-13)


Apostle Paul urged to the people in Corinth that they should not accept the grace of God in vain and also open wide their hearts. The grace of God here refers to God's gift and blessing. They became aware of Jesus through Paul and became acquainted with the grace of God through Jesus. They have come to know how good and merciful and righteous God is. Before believing in Jesus, they were neither knowledgeable nor famous. They had believed in idols and superstitions. But they were blessed by God and became the leaders of the church with tongues and wisdom. Despite this grace, however, there was no grace in their lives. They were stingy and often fought each other. The Corinthians did not value their grace, even though they received God's abundant grace and love. Paul also told them to widen their hearts. Although Paul set up the Corinthian church, some of them saw Paul inferior. Why did they look down on Paul? Paul was not the first disciples of Jesus and did not know Jesus physically. Secondly, Paul persecuted Christians in the past. Thirdly, he wrote well, but he did not speak well. In addition, Paul did not ask for the price in order not to disturb the church. But some members insisted that Paul did not demand the price because he thought he was not qualified as an apostle. Paul was saddened to see that the Corinthians were unconcerned and prejudiced. We are called to proclaim the grace of God to the world. God calls us to open wide our hearts, to welcome people, and to work for peace and reconciliation of the world.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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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다섯번째 주일 / 6월 세번째 주일
성령강림절, 성령의 능력은 제한이 없다
사도행전 10:44 - 48
정해빈 목사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10장에는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사는 로마제국 군인 백부장 고넬료를 만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고넬료는 로마 사람이지만 유대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고 유대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넬료는 기도하다가 베드로가 지금 욥바에 있는데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를 집으로 데리고 오라는 천사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고넬료는 하인들을 욥바로 보내서 베드로를 집으로 초청했습니다. 고넬료의 하인들이 욥바에 도착했을 때쯤 베드로는 기도하러 지붕에 올라갔다가 하늘에서 큰 보자기가 땅으로 내려오는데 네 발 짐승들과 땅에 기어다니는 것들과 공중의 새들이 보자기 안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야, 일어나서 잡아먹어라,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속되고 부정한 것은 한 번도 먹은 일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레위기에 기록된 대로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 환상을 듣자마자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가 머무는 곳에 도착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베드로는 로마 사람 고넬료를 만나라는 뜻에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환상을 보여주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베드로가 하인들을 따라서 가이사랴에 사는 고넬료의 집에 가보니 고넬료의 식구들이 베드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대 사람으로서 이방 사람과 사귀거나 가까이하는 일이 불법이라는 것은 여러분도 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사람을 속되다거나 부정하다거나 하지 말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원래 유대 사람은 이방 사람을 가까이 하면 안 되는데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을 멀리하지 말라고 지시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성령께서는 편견과 차별과 인종과 문화의 경계를 넘어서 사람들을 서로 만나게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으니 모든 사람이 귀합니다. 이 세상에 부정한 사람은 없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가족들에게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가 어느 민족에 속하여 있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베드로의 말이 감동적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지 않으시고, 둘째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가 어느 민족에 속하여 있든지 다 받아주신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부어 주셨습니다. 이 예수는 두루 다니시면서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억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고넬료의 식구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나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베드로와 베드로의 일행들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베드로와 베드로의 일행들은 그때까지 오직 예수를 믿는 유대인만 성령받고 방언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고넬료의 식구들이 성령받고 방언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이 사람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았으니 이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 다음에 고넬료의 가족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이 최초로 성령을 받고 방언을 말하고 세례를 받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인종이나 언어나 배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믿고 무슨 일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나사롓 예수께서 하셨던 하나님 나라 사역을 따라가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고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인종의 편견에 사로잡혔던 베드로는 보자기 체험과 고넬료와의 만남을 통해서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능력에는 제한이 없고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풍성하시고 무한하시고 끝이 없으셔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한없는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마치 햇빛이 어제도 비치고 오늘도 비치고 내일도 비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제한이 없고 끝이 없습니다. 햇빛이 비치면 동물과 식물들은 햇빛을 통해서 에너지를 얻습니다. 그런데 햇빛은 고갈되지 않습니다. 오늘 하루 종일 햇빛이 비추었다 하더라도 내일이 되면 또 햇빛이 우리를 비추어 줍니다. 햇빛이 없어질 까봐 걱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무한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부족하고 제한적이기 때문에 나만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부족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없고 나만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아버지의 유산이 많아서 모든 자녀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넉넉하게 가질 수 있으면 자녀들은 서로 싸울 일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유산이 부족하기 때문에 내가 먼저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면 자녀들은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첫사람 아담을 지으시고 아담은 가인과 아벨을 낳았는데 하나님께서 동생의 제사를 기뻐 받으시는 것을 보고 형 가인은 동생을 죽였습니다. 만약 가인이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동생도 사랑하시고 나도 사랑하신다고 생각했더라면 시기심이 일어나서 동생을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삭은 쌍둥이 에서와 야곱을 낳았는데 옛날에는 상속권을 가진 장자가 아버지의 유산 대부분을 가졌기 때문에 에서와 야곱은 아버지의 상속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서로 싸웠습니다. 만약 에서와 야곱이 아버지의 재산은 너무 많아서 둘이 나누어 가져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더라면 그들은 그렇게 서로 싸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불안감을 느끼고 그 불안감 때문에 부족한 것을 먼저 차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무한하고 제한이 없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도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다른 사람에게도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베드로도 성령 충만을 받았고 고넬료도 성령 충만을 받았고 고넬료의 식구들, 노인들과 여성들과 아이들도 성령 충만을 받았습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를 보면 가장 천한 계층이었던 백정 박성춘이라는 사람이 콜레라 전염병에 걸렸다가 캐나다 의사이자 고종 황제의 주치의이자 나중에 세브란스 병원을 세운 에비슨을 만나 치료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박성춘은 이 일을 계기로 교회에 나가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했는데 양반들이 백정과 같이 예배드리기 싫다고 교회를 떠나 양반 교회를 세우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박성춘이 다니는 교회는 백정들이 몰려와서 교인들이 늘어났고 양반들이 따로 세운 교회는 교인이 줄어서 나중에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박성춘이 다니는 교회는 나중에 서울 인사동에 있는 승동 교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양반에게도 성령을 부어 주시고 백정에게도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절이 유대인들의 성령강림 사건이었다면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난 성령 사건은 이방인들의 성령강림 사건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을 유대인들에게도 부어주시고 이방인들에게도 부어주셨습니다. 진실로 성령의 능력은 제한이 없고 끝이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출신이나 인종이나 배경에 상관없이 우리들 모두가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일하게 하십니다. 성령의 일에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트럼프와 김정은의 마음을 움직여서 한반도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오게 할지 누가 알겠습니까? 성령께서 역사하면 사람이 변화되고 세상이 변화됩니다. 그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풍성하신 하나님, 풍성하신 성령님을 통해 우리들도 새사람으로 변화받는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entecost, unlimited is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Acts 10:44 – 48


While Peter was still speaking, the Holy Spirit fell upon all who heard the word. The circumcised believers who had come with Peter were astounded that the gift of the Holy Spirit had been poured out even on the Gentiles, for they heard them speaking in tongues and extolling God. Then Peter said, ‘Can anyone withhold the water for baptizing these people who have received the Holy Spirit just as we have?’ So he ordered them to be baptized in the name of Jesus Christ. Then they invited him to stay for several days. (Acts 10:44-48)


The story of Peter and Cornelius recorded in Acts 10 shows how beautiful and enriched the different racial and ethnic encounters are. The Holy Spirit moved Cornelius to invite Peter to his home, and the Holy Spirit moved Peter to meet other races without prejudice. Jews like Peter neither talk with the Gentiles, share their meals, nor entered their homes. But the Holy Spirit has broken this prejudice of Peter. Cornelius, the centurion of the Roman Empire, honored the Jews, feared God, and gave charity. Through Peter's encounter with Cornelius, he realized that Gentiles could also experience the Holy Spirit just like the Jews and speak tongues. Indeed,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is infinite, endless, and unlimited. The Spirit of God is so high, deep, and abundant, it can give grace to all the people of the world. The Holy Spirit equally blesses the master and servant, the man and the woman, the Jew and the Gentile. If Pentecost was the day for Jewish people, the Holy Spirit event in the house of Cornelius in Acts 10 was for the incident of the Gentiles. Indeed,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is unlimited and endless. The Holy Spirit touches our hearts and makes us all work for God's justice and peace, regardless of race, ethnicity or background. There is no impossibility in the work of the Holy Spirit. When the Holy Spirit works, people change and the world changes. May the Holy Spirit who is infinite, endless, unlimited, and abundant, bless and transform us into new people of God.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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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네번째 주일 / 6월 두번째 주일

성령강림절, 자율과 협력의 교회

사도행전 2:40 - 47

정해빈 목사




6월 두번째 주일, 성령강림절 네번째 주일입니다. 교회학교 학생들과 함께 영어로 [한반도의 평화와 공존, 번영을 위한 기도]를 드렸는데 한글로 기도문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캐나다연합교회 한인 목회자들이 기도문을 만들었습니다. 평화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와 화해하시고, 사람들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시는 하나님, 오늘 우리는 한반도에 살고 있는 남과 북의 형제자매들을 기억하며 우리의 마음을 모아 기도합니다. 반만년의 역사를 지닌 한민족은 식민지배와 세계전쟁의 상흔으로 7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남북으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며 살아왔습니다. 동족간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분노와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이들의 삶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제 분열과 대립을 넘어 평화와 화해의 시대로 나아가려 하는 이들의 걸음걸음을 인도하시고 힘을 북돋아 주옵소서. 개인과 시민사회, 정치가와 세계 지도자들에게 평화의 영을 불어 넣으시어 무력 보다 대화와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모두에게 선이 되는 공동 번영의 길로 나아가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우리는 또한 전쟁과 갈등으로 고통받고 있는 전세계 많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땅에서, 시리아와 중동 지역에서, 오랜 갈등과 폭력으로 살던 터전에서 내몰리고 난민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위에 함께 하옵소서. 세계 공동체가 정치, 군사적 이익이 아닌, 생명 존중과 평화 공존의 가치를 위해 함께 노력해 나가도록 우리를 깨우치시고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제자 된 우리들이 항상 깨어 기도하게 하시고 역사 가운데 임하시고, 또 우리 가운데서 일하시는 진리, 자유, 평화의 영이신 하나님의 성령을 따라 용기 있게 나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이 기도 내용처럼 6/12 화요일에 있을 북미정상회담에서 좋은 결과가 나오고 또 그 이후의 회담이 잘 진행되어서 한반도에 평화와 번영이 정착되고 서로 자유롭게 왕래하는 그날이 오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요즘 성령강림절을 맞이해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 이야기를 계속 묵상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떠나시고 난 후에 제자들만 남아서 교회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스승이 떠나시고 난 후에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스승이 계셨을 때는 스승만 따라가면 되었는데 이제는 스승이 안계시니까 제자들 스스로 모든 것을 스스로 헤쳐 나가야만 했습니다. 성령께서는 제자들이 교회를 잘 이끌어 갈 수 있도록 그들에게 믿음과 용기와 지혜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12세기의 수도승이자 신비가인 요아킴 피오레는 구약의 시대가 성부의 시대이고, 신약의 시대가 성자의 시대라면, 오늘날 시대는 성령의 시대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고, 신약시대에는 성직자/목회자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시대에는 한 두 사람의 성직자/목회자가 교회를 이끌어 가는 시대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성령을 체험하고 은사를 받아서 모든 사람이 자율적으로 참여하고 협력하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성령의 시대는 목회자의 시대가 아니라 평신도의 시대이고 모든 사람이 성령을 받고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를 가지고 서로 협력하면서 함께 일하는 시대입니다.

 

성령님이 인도하는 교회는 한마디로 말하면 자율과 협력의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사도행전 말씀을 통해 제자들이 성령을 체험하고 나서 어떻게 자율적으로 협력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가 자율과 협력의 교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몇가지 예가 있습니다. 첫째로 제자들은 자율과 협력의 방법으로 예수님을 배반한 가롯 유다를 대신하는 새로운 제자를 뽑았습니다. 예수님이 떠나시고 나서 12명의 제자들이 초대 교회를 이끌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셨으면 예수님이 뽑으면 되지만 예수님이 안계시니까 성도들이 스스로 결정을 해야 했습니다.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이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오는데 성도들은 먼저 가롯 유다를 대신할 만한 사람으로 투표를 통해서 요셉과 맛디아를 뽑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시는 주님, 주님께서 이 두 사람 가운데서 누구를 뽑아서 이 섬기는 일과 사도직의 직분을 맡게 하실 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한 후에 제비뽑기를 통해서 맛디아를 선출했습니다.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을 뽑아야 하는데 또 투표로 뽑으면 뽑히지 않은 사람은 기분이 나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한 후에 제비를 뽑았습니다. 2명은 성도들이 뽑았지만 그중에서 누가 뽑힐 지는 하나님께서 결정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제비를 뽑았다는 말은 성도들과 하나님이 서로 협력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성도들은 성도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기다렸습니다. 초대교회가 자율과 협력,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중요한 의사를 결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초대 교회는 자율적이고 신앙적이고 서로 협력하는 교회가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둘째로 사도행전 6장을 보면 성도들이 구제/봉사를 담당할 7명의 제직을 뽑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도 역시 초대 교회가 자율과 협력의 교회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가난한 과부들이 많았는데 히브리 말을 하는 과부들은 구제를 잘 받았는데 헬라 말을 하는 과부들은 구제를 잘 받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자들이 히브리 말을 하는 사람들이다 보니까 히브리 말을 하는 과부들이 더 잘 보살핌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헬라 말을 하는 과부들이 불평하니까 제자들이 모여서 우리들은 말씀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을 전담하고 구제와 재정과 행정과 봉사는 헬라 말을 하는 7명의 지도자를 뽑아서 그들이 전담하도록 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당회원들은 예배/기도/심방 같은 영적인 일을 맡고 제직회원들은 행정/재정/봉사를 맡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교회의 모든 사역을 독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은 영적인 일을 전담하고 물질적인 일은 젊은 지도자들에게 맡겼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늘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갈등을 없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보다는 갈등이 있을 때 그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할 줄 아는 지혜로운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서로 사역을 분담하고 협력함으로서 갈등을 해결했습니다. 목회를 분담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목회에 참여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2장 말씀에 의하면 베드로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 비뚤어진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말하였고 성도들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고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습니다.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런 일들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사게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가 영적으로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에 힘쓸 뿐만 아니라 물질을 서로 구제하고 나누는 교회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진 자에게서 물질을 강제로 빼앗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사회, 모든 사람이 똑같이 가난해지는 사회는 잘못된 사회입니다. 그래서 공산주의가 망했습니다. 능력있고 열심히 일한 사람은 더 많이 벌고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은 적게 버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떤 사람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최저임금만 받는데 토론토의 공기업 사장들이 수백만 불을 연봉으로 받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늘날 이 세계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빈부격차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는 강제로 물질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기쁜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물질을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초대 교회를 가리켜서 사랑의 공산주의라고 표현을 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떠나시고 난 후에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자율적으로 서로 협력하고 서로 의지하고 서로 사랑과 물질을 나누는 그런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들도 성령의 인도함을 따르는 교회, 자율과 협력의 교회, 사역을 분담하는 교회, 사랑과 물질을 나누는 그런 교회를 만들어 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entecost, a church of autonomy and cooperation

Acts 2:40 47


‘Save yourselves from this corrupt generation.’ So those who welcomed his message were baptized. They devoted themselves to the apostles’ teaching and fellowship, to the breaking of bread and the prayers. Awe came upon everyone, because many wonders and signs were being done by the apostles. All who believed were together and had all things in common; they would sell their possessions and goods and distribute the proceeds to all, as any had need. Day by day, as they spent much time together in the temple, they broke bread at home and ate their food with glad and generous hearts, praising God and having the goodwill of all the people. And day by day the Lord added to their number those who were being saved. (Acts 2:40-47)


According to the Book of Acts, Jesus' disciples were led by the Holy Spirit to build a joyful, free, cooperative church. If we explain the first church in a nutshell, we can say that it was the church of Word and Prayer, and of autonomy and cooperation. First, when selecting a new leader on behalf of Judas Iscariot who betrayed the Lord, they elected a leader through a voting process in which everyone participated. They elected two candidates first, and after prayed, they chose one of them by drawing lots. We can see from this story that the early church tried to make a decision in an autonomous, democratic and faithful way. Second, the disciples shared the ministry. While they devoted themselves to the Word and prayer, the seven newly elected leaders were in charge of finance and service. The early church was a church where everyone participated, collaborated and shared equally. They not only worked on teaching, fellowship, table and prayer, but also shared everything. Not only did they study and pray spiritually, but also materially helped each other. The disciples, after the Lord departed, were motivated by the Holy Spirit to create a church that cooperated autonomously. I believe that we are also called to create a church that follows the guidance of the Holy Spirit, a church of autonomy and cooperation, a church that all people participate in the ministry with joy and love.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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