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세번째 주일 / 1월 세번째 주일

주현절,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빌립보서 4:1 – 7

정해빈 목사



날씨가 아주 추운 1월 세번째 주일입니다. 어제 토요일 있었던 제직수련회에서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함께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보통 교회를 가리켜서 성부, 성자, 성령께서 만들어 주신 성도의 모임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시고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부르신 것처럼 우리를 당신의 일꾼으로 부르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셨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성도의 모임”이 됩니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제자로 부르셨기 때문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제자 모임”이 됩니다. 셋째로 교회는 오순절 성령체험을 하고 나서 세워졌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공동체”가 됩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교회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성도의 모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제자의 모임,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공동체” 이렇게 3가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헬라어로 “에클레시아(Ecclesia)” 라고 부르는데 에클레시아는 “불러내다, 회의를 소집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에클레시아는 옛날 고대 그리스 도시들의 총회를 가리킵니다. 도시 시민들이 광장에 다 모였다고 해서 민회라고도 부릅니다. 옛날 아테네에서 전쟁이 벌어지거나 중요한 일이 벌어지면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서 회의를 하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 총회/민회에는 그 도시에 거주하는 “성인 남자 자유인 시민권자”만 참석할 수 있었고 아이, 여자, 노예, 이방인은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히브리/이스라엘 사회에서도 지파 백성들이 다 모이는 총회가 있었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카할(Qahal)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카할도 그리스의 에클레시아와 마찬가지로 누구나 참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성인 남자 정상적인 유대인”만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 여자, 병자/장애인, 이방인은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카할과 그리스의 에클레시아가 서로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신약성경의 초대교회를 가리켜서 “에클레시아”라고 불렀습니다. 고대 그리스나 고대 이스라엘의 기준으로 보면 초대교회는 에클레시아가 될 수 없었습니다. 첫째로 초대 교회는 도시 사람들이 다 모인 것이 아니라 많아야 50여명 모인 것이기 때문에 에클레시아가 될 수 없었고, 둘째로 초대 교회에는 성인 남자 자유인 시민권자만 모인 것이 아니라 아이, 여자, 나그네, 외국인, 병자, 가난한 사람들이 다 모였기 때문에 헬라인들이나 유대인들의 기준으로 보면 교회는 총회/민회/에클레시아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꿋꿋하게 교회를 에클레시아라고 불렀습니다. 왜 바울은 꿋꿋하게 교회를 에클레시아로 불렀을까요? 바울은 성인 남자 자유인 시민권자만 참석하는 모임은 진정한 사람들의 모임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누구나 참석할 수 있는 모임이 진정한 총회/민회/에클레시아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성도의 모임을 통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적은 숫자의 사람들이 모였지만 유대인과 헬라인, 남자와 여자, 주인과 종의 구별이 없고 모두가 함께 예배드리는 교회가 그 도시를 대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교회가 옛날 모임과 얼마나 달랐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어떤 모임이든지 누구든지 원하면 참석할 수 있지만 옛날에는 사람들이 모이는 모임에는 항상 구별과 차별이 있었습니다. 대체로 건강한 성인 남자 자유인 시민권자만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이러한 구별과 차별을 깨트리고 인류 역사에 처음 등장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사람은 인종이나 성별이나 계급에 상관없이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 교회의 식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인류의 희망이요 모범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이렇게 옛날 모임과 다르게 시작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교회로 모여서 함께 예배드리고 신앙생활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감격스러운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진실로 교회는 인류의 희망이요 모범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교회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교회는 교회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고 세상 구원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교회가 이렇게 감격스럽고 귀하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교회를 소중히 여기고 더 좋은 교회로 만들 사명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우리 교회를 더 좋은 교회로 만들 수 있을까요? 세상 구원을 위해서 우리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꼭 반드시 크고 대단한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크고 대단하지 않아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어제 제직수련회에서 3가지 구체적인 목회의 목표를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로 우리 교회가 토론토 노스욕 한인타운 새 건물로 이사했으니 열심히 전도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필요한 사람들, 교회 안다니거나 교회에 실망한 사람들에게 우리 교회를 소개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좋은 교회를 찾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분들에게 가서 “여기 건강하고 따뜻하고 올바른 교회가 있습니다.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합시다” 권유하고 전도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누구나 와서 은혜받고 교회의 식구가 될 수 있도록 교회의 문을 활짝 열자고 말씀드렸습니다.


두번째로 목회와 행정을 분리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한국교회들 중에는 하나의 기관이 교회의 모든 일을 다 결정하는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의 조직이 모든 권한을 갖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일은 목회자와 당회가 맡아서 하고 행정과 재정과 봉사는 제직회가 맡아서 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권한과 역할이 분명하고 모든 성도님들이 참여하고 민주적이고 투명하고 깨끗한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새해에는 성도님들께서 교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셔서 우리 교회가 자발적이고 자율적이고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교회가 되도록 도와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성도님들 스스로가 교회의 주인이 되어서 교회를 이끌어가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우리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먼저 체험하고 세상에 전하는 교회, 하늘의 기쁨이 충만한 교회가 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교회에는 하나님 나라의 기쁨, 말씀과 찬양과 기도의 기쁨, 성도의 교제의 기쁨, 사랑과 격려와 위로의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 이런 기쁨이 없다면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하늘의 기쁨이 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누구나 차별받지 않고 올 수 있는 교회, 자유롭고 평등한 교회, 은혜와 사랑, 격려와 위로가 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기쁨을 주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기도하고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바울은 오늘 우리가 읽은 빌립보서 4장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외쳤습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편지를 썼기 때문에 기뻐하고 싶어도 기뻐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바울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홀로가 아니고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는 교인들을 걱정하고 위로하고 교인들은 목회자를 걱정하고 위로하는 아름다운 관계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지금 고난을 겪고 있지만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할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힘주시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세상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에클레시아, 아무런 차별이 없는 교회를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뻐해야 하는 이유는 어려운 문제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 문제가 없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문제없는 교회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보다 기쁨이 클 때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어려운 점도 있고 문제도 있지만 그 문제보다 우리의 기쁨이 더 크면 우리는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새해에는 우리 교회가 더 기쁘고 행복한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먼저 체험하고 그 기쁨을 세상에 전하는 복된 교회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아멘.


Epiphany, rejoice in the Lord
Philippians 4:1 – 7


Therefore, my brothers and sisters, whom I love and long for, my joy and crown, stand firm in the Lord in this way, my beloved. I urge Euodia and I urge Syntyche to be of the same mind in the Lord. Yes, and I ask you also, my loyal companion, help these women, for they have struggled beside me in the work of the gospel, together with Clement and the rest of my co-workers, whose names are in the book of life. Rejoice in the Lord always; again I will say, Rejoice. Let your gentleness be known to everyone. The Lord is near. Do not worry about anything, but in everything by prayer and supplication with thanksgiving let your requests be made known to God. And the peace of God, which surpasses all understanding, will guard your hearts and your minds in Christ Jesus. (Philippians 4:1 – 7)


Paul said to the members of the Philippian church, "Rejoice always in the Lord." We can rejoice because the Lord is with us when we suffer. We can rejoice because the pastor worries and comforts the members and the members worry and comfort the pastor. We can rejoice because we believe that we will be resurrected as Christ is resurrected. We can rejoice because the Holy Spirit comforts us and strengthens us. We can rejoice because we have created a church that is free, equal, and non-discriminatory. We are delighted not because there is no problem. There is a problem, but we can rejoice because the joy within us is greater than the problem. I ask you to pray that our church will experience the joy of the kingdom of God first and be a blessed church that conveys its joy to the world.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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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두번째 주일/1월 두번째 주일
주현절, 예루살렘의 폭력과 베들레헴의 평화
마태복음 2:1 – 12
정해빈 목사




예수님의 족보와 탄생과 소년 시절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도님들, 지금 말씀드리는 내용이 마태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인지 맞춰보시기 바랍니다. 로마 황제가 옛날 고향으로 돌아가서 호적 등록을 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바람에 북쪽 갈릴리에서 살던 요셉과 마리아는 남쪽 베들레헴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여관이 없어서 마구간에서 해산을 했고 양을 치던 목자들이 아기 예수를 경배했습니다. 어느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인지 아시겠습니까? 마구간 이야기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마태복음 이야기만 자세하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마리아와 요셉은 본래 자기들이 살던 베들레헴 집에서 아기 예수를 낳았는데 저 멀리 동쪽에 사는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예루살렘에 찾아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를 물었습니다. 헤롯 왕이 대제사장들과 율법교사들에게 물으니 그들이 미가서 5장 2절 말씀에 근거해서 그 장소가 베들레헴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베들레헴에 가서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 황금과 몰약과 유향을 드렸고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헤롯 왕은 군대를 보내서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와 아기 예수는 헤롯을 피해서 이집트로 피신을 떠났고 헤롯이 죽은 다음에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지 않고 북쪽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정착을 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루살렘의 분위기와 베들레헴의 분위기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폭력과 음모가 있었고 베들레헴에는 기쁨과 평화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을 통치하는 헤롯 왕은 본래 유대 사람이 아니라 에돔 사람이었는데 로마 권력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유대의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로마의 동쪽을 차지하고 있던 안토니우스와 로마의 서쪽을 차지하고 있던 옥타비아누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는데 처음에는 안토니우스를 지지하다가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한 다음에는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였고 그 덕분에 유대의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성격이 잔인하고 의심과 질투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10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의심이 많아서 부인과 아들과 장모를 죽이기도 했습니다. 메시야가 탄생했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군대를 동원해서 어린 아기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헤롯 뿐만 아니라 헤롯 옆에는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성경지식은 많이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이 생명과 평화와 정의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성경지식을 많이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이 중요한데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에 폭력과 음모가 있었다면 베들레헴에는 기쁨과 평화가 있었습니다. 요셉은 처음에는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를 버리려고 했다가 천사의 말을 듣고 마리아를 보호하기로 결심했고 나중에는 헤롯의 박해를 피해서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을 갔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께 선물을 드렸고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계시를 받고나서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요셉과 동방박사들은 신실한 사람들이었고 어린 생명을 보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폭력이 넘쳤고 베들레헴에는 사랑이 넘쳤습니다. 왈터 부르거만(Walter Brueggemann)이라는 구약학자는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의 거리가 9마일이라고 해서 “9마일의 차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9마일이면 대략 15km 정도 되는 가까운 거리입니다. 하지만 두 곳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습니다. 큰 도시 예루살렘에는 권력과 종교와 물질이 모여 있었지만 그곳에는 폭력이 있었고 베들레헴은 조그만 시골 마을이었지만 그곳에는 기쁨과 평화와 사랑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이야기를 자세히 읽어보면 출애굽기의 모세 이야기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태어날 때 이집트 바로 왕이 히브리 사람들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싫어서 사내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세의 부모와 히브리 산파들은 바로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아기 모세를 보호했습니다. 구약성경을 해설한 미드라쉬(Midrash) 책을 보면 모세의 부모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가 모든 사내아이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자 많은 히브리 남자들이 바로가 무서워서 결혼을 안 하거나 이미 결혼한 남자는 아내를 버리거나 이혼하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암람(Amram)이라는 이름을 가진 레위인은 바로의 명령을 거부하고 약혼자와 결혼해서 아론과 미리암을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장차 그를 통해 모세가 태어날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암람이라는 레위 사람이 바로의 명령을 거부하고 생명을 살리는 선택을 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린 아이는 미래의 희망인데 어린 아이를 죽이면 미래를 죽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어른들에게는 어린 아이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헤롯의 명령을 거부한 요셉과 마리아와 동방박사들, 바로의 명령을 거부한 모세의 부모와 히브리 산파들 모두가 생명을 선택하고 보호하기로 결단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는 아기 예수님이 이집트로 피난간 것을 영적으로 해석하면 진정한 왕/메시야/지도자는 자신의 백성들이 겪었던 고통을 몸소 경험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저 옛날 히브리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했던 것처럼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메시야도 이집트로 가서 같은 고난을 겪음으로서 백성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을 구원하기 원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은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자마자 난민이 되어서 고난을 받으셨다고 말합니다. 고통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몸으로 체험하기 위해서,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기 위해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아기 예수님은 어린 시절부터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지난 성탄절 즈음에 네덜란드에서 추방 위기에 몰린 난민을 보호하기 위해 두 달 동안 24시간 예배를 드린 교회가 있었습니다. 예배 중에는 국가도 방해할 수 없기 때문에 한 가정을 보호하기 위해서 계속 예배를 드렸습니다. 목사님들이 돌아가면서 설교하고, 어떤 교인은 앞에 나와서 찬양하고 어떤 교인은 기도하고 어떤 교인은 간증하면서 계속 예배를 드렸습니다. 여러분 두 달 동안 쉬지 않고 예배드렸다고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언제까지 계속 예배를 드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결국에는 법적인 해결방안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교회가 고통받는 한 가정을 도와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마태복음 1장과 2장에는 억울하게 고통받는 여인들과 외국인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4명의 여인들이 나오는데 다말은 남편이 죽고 나서 친정으로 쫓겨난 사람이었고, 룻 역시 남편을 잃고나서 시어머니를 모시는 외국 며느리였고, 기생 라합은 기생으로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고, 우리아의 아내 역시 다윗이 남편 우리아를 죽이는 바람에 과부가 되었고 강제로 다윗의 부인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억울하고 불행하고 차별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을 예수의 조상으로 만드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통해서 새 역사를 이루십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을 많이 알고 있는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아기 예수님을 찾지 않았지만 외국에서 온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종교도 다르고 피부색도 다르고 사는 곳도 다른 외국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들레헴에 제일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황제나 헤롯을 경배하지 않고 아기 예수를 경배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었고 오늘날로 말하면 깨어있는 시민들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는 지를 잘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의 폭력이 아니라 베들레헴의 평화가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요셉과 마리아, 동방박사들, 모세의 부모와 히브리 산파들처럼 연약한 생명을 축하하고 기뻐하고 보호하는 곳이 교회라는 것을 오늘 말씀은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예루살렘 같은 교회가 아니라 베들레헴 같은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가 고통받는 사람들, 외국인/나그네/낯선 자들/난민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그런 따뜻한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Violence of Jerusalem and peace of Bethlehem
Matthew 2:1 – 12


In the time of King Herod, after Jesus was born in Bethlehem of Judea, wise men from the East came to Jerusalem, asking, “Where is the child who has been born king of the Jews? For we observed his star at its rising, and have come to pay him homage.” When King Herod heard this, he was frightened, and all Jerusalem with him and calling together all the chief priests and scribes of the people, he inquired of them where the Messiah was to be born. They told him, “In Bethlehem of Judea; for so it has been written by the prophet: ‘And you, Bethlehem, in the land of Judah, are by no means least among the rulers of Judah; for from you shall come a ruler who is to shepherd[d] my people Israel.’” Then Herod secretly called for the wise men and learned from them the exact time when the star had appeared. Then he sent them to Bethlehem, saying, “Go and search diligently for the child; and when you have found him, bring me word so that I may also go and pay him homage.” When they had heard the king, they set out; and there, ahead of them, went the star that they had seen at its rising, until it stopped over the place where the child was. When they saw that the star had stopped, they were overwhelmed with joy. On entering the house, they saw the child with Mary his mother; and they knelt down and paid him homage. Then, opening their treasure chests, they offered him gifts of gold, frankincense, and myrrh. And having been warned in a dream not to return to Herod, they left for their own country by another road. Amen. (Matthew 2:1 – 12)


The story of Matthew chapter 2 reveals the contrast between the violence of Jerusalem and the peace of Bethlehem. Whereas King Herod, the high priest, and scribes in Jerusalem sought to kill baby Jesus, Joseph, Mary, and the Magi in Bethlehem worshiped and protected him. Today's scripture shows that the church must be the place of joy and peace. Both Joseph, Mary, and Magi in Matthew, and Moses' parents and Hebrew midwives in Exodus devoted their lives to protect a baby endangered. Their stories teach us that the church must celebrate and protect those vulnerable lives. Just as Jesus’s parents rejoiced with the wise men from the East, we are also called not only to support those in need, but also to celebrate our life with foreigners, strangers, and Gentiles. May God lead us to make a good church, and to live together with suffering people, foreigners, strangers, and refugees.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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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주일/주현절 첫번째 주일
신명기 30:15 – 20
생명을 선택하십시오
정해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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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기해년(己亥年) 돼지띠 새해가 밝았습니다. 성도님들 모두 새해 건강하시고 기쁘고 감사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시기를 빕니다.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것을 공전이라고 부르는데 365일 1년이 걸리고, 지구가 스스로 한 바퀴 도는 것을 자전이라고 부르는데 데 24시간 하루가 걸립니다. 자연의 질서로 따지면 1월 1일부터 지구가 다시 태양을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1년이라는 새로운 시간과 기회를 주셨습니다. 부모님들이 어린 자녀에게 용돈을 줄 때, 집안 청소하고 공부 잘 하고 부모 말 잘 들으면 용돈을 줍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방식은 이와 정 반대입니다. 무엇을 잘해서 용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먼저 용돈을 줍니다. 어느 날 부모가 어린 자녀를 불러놓고 한 달 용돈으로 100불을 먼저 줍니다. 그러면 어린 자녀는 뜻밖의 큰 선물을 받고나서 너무 기뻐서 이 돈을 아끼고 저축하면서 꼭 필요한데 써야겠다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식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1년이라는 새로운 시간과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들이 무엇을 잘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그냥 먼저 무조건적으로 시간이라는 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이라는 큰 선물을 주셨으니 우리들은 그 선물을 소중히 여기면서 살아야 합니다. 큰 은혜를 주셨으니 그 은혜를 잘 사용해야 하는 의무가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히브리 백성들을 노예에서 해방시키신 다음에 율법/계명을 주셨습니다. 자유/해방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율법/계명이 왔습니다. 율법/계명을 잘 지키면 자유/해방을 주겠다가 아니고 자유/해방을 먼저 주시고 나서 그 다음에 율법/계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자유/해방을 먼저 주셨기 때문에 그 은혜에 감사해서 율법/계명을 지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언약적 율법주의”라고 부릅니다. 율법/계명을 지키면 축복받고 안 지키면 벌 받으니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선물을 먼저 받았기 때문에 그 은혜와 선물을 잊지 않기 위해서 율법/계명을 지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벌 받으니까 율법/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와 선물이 너무 감사하기 때문에 그것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마음으로 율법/계명을 지킵니다. 우리들이 무엇을 잘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새로운 시간과 기회를 주셨습니다. 새로운 시간과 기회를 주셨으니, 마치 어린 자녀가 부모님으로부터 큰 용돈을 받고나서 너무 감사해서 용돈을 아끼고 소중하게 쓰듯이,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시간과 기회를 소중히 여기며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확장하기 위해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2년 전인 1987년 1월에 한국 사회의 재야 종교 지도자였던 김재준, 함석헌 두 분이 1월 1일을 맞아 “새해 머리에 국민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글을 발표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김재준 목사님은 이 글을 발표하시고 나서 며칠 후에 돌아가셨고 함석헌 선생님은 2년 후에 돌아가셨습니다. 1987년 1월 한국 사회를 걱정하면서 두 분의 원로 지도자가 국민들에게 이런 글을 발표하셨습니다.


“시시각각으로 어두움 속으로 치닫는 정국을 보다 못해 우리는 한국의 늙은이들의 대표로 자처하면서 온 마음을 모아 탄원합니다. 정부 당국에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여러분은 잘못 출발했습니다. 국민이 바라는 정권교체란 군사정권의 종식을 뜻하지 그 안에서 사람만 바꾸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설령 여러분이 어떤 방법으로 재집권한다고 해도 국민은 더 이상 여러분의 통치를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학생들에게! 학생들의 몸부림은 우리 민족의 몸부림으로 알기에 우리는 희생되는 여러분의 소식을 들을 적마다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여러분은 새시대의 주인이어야 하기 때문에 끝까지 지성인답게 행동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행동이 옳고 그름은 국민이 얼마나 호응하느냐에서 반영됩니다. 군인들에게! 그대들은 민족 전체를 위해 도둑이 못 들어오게 하는 것이 사명이지 결코 안에서 부귀영화를 누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만큼 나라를 위해 수고하는 이들이 어디 또 있습니까. 그런데 정치권력에 눈이 어두운 극소수의 군인들 때문에 여러분 전체가 국민의 불신을 사는 것은 그대로 보고 있을 수만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튼튼한 전선을 위해서도 정치에 맛을 들인 군인은 다시 등장하지 말도록 여러분이 함께 단결해야 할 것입니다. 근로자와 기업주에게! 여러분과 기업주가 함께 만들어 내는 재산은 절대로 어느 개인이나 족벌의 것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에서 생기는 재산이 어떻게 분배되어 의롭게 쓸 수 있도록 여러분이 깊이 간여하는 것은 권리이며 의무입니다. 기업주들도 이러한 본뜻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개인의 것이라는 생각이나 오히려 내가 은혜를 베풀고 있다는 전근대적인 착각을 버리기 바랍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건설을 위하여 한 역할을 담당할 뿐이라는 겸허하고 가난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32년 전에 이런 글을 쓰셨는데 지금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어느 군대 사령관은 쿠데타를 계획했다가 발각이 되자 미국으로 도피해서 여기저기 도망자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가장 큰 재벌 기업은 아버지가 쓰러지고 나서 아들이 세금을 내지 않고 상속받으려고 회계장부를 조작했다가 발각이 되었습니다. 국민들로부터 가장 존경을 받는 대법관들이 법과 양심에 근거해서 공정하게 재판하지 않고 권력자들과 재판을 거래했다가 역시 발각이 되었습니다. 군인과 기업가와 대법관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하나님 주신 시간과 기회를 바르게 사용하지 않으면 개인 인생도 망치게 되고 국가도 망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모세는 오늘 우리가 읽은 신명기 30장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히브리 백성들에게 “생명을 택하라”고 유언을 했습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손이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새로운 땅을 주셨으니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율법/계명을 잘 지키고 생명을 택하라고 말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언약을 다시한번 갱신했다고 해서 “언약갱신”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도 2019년 새해를 앞두고 언약을 갱신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우리들이 특별히 잘 한 것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은혜로 새로운 시간과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런즉 새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주님 주신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마음으로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 불의를 멀리하고 바르고 진실되게 이 땅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도님들 중에는 “작년이나 올해나 사는 것이 똑같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는 것이 너무 힘들고 어렵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힘 드셔도 힘을 내셔야 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을 믿고 견디고 버티셔야 합니다. 올해를 참고 견디시는 분에게는 더 좋은 내년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사는 것이 어렵고 힘들지만, 다시 힘을 내라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새로운 시간과 기회를 주셨습니다. 비록 우리 삶이 어렵고 힘들지만 새로운 시간과 기회를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생명을 선택하며 이 땅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새해에 우리들 모두를 좋은 길,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New Year/The First Sunday of Epiphany
Deuteronomy 30:15 - 20
Choose Life


See, I have set before you today life and prosperity, death and adversity. If you obey the commandments of the Lord your God that I am commanding you today, by loving the Lord your God, walking in his ways, and observing his commandments, decrees, and ordinances, then you shall live and become numerous, and the Lord your God will bless you in the land that you are entering to possess. But if your heart turns away and you do not hear, but are led astray to bow down to other gods and serve them, I declare to you today that you shall perish; you shall not live long in the land that you are crossing the Jordan to enter and possess. I call heaven and earth to witness against you today that I have set before you life and death, blessings and curses. Choose life so that you and your descendants may live, loving the Lord your God, obeying him, and holding fast to him; for that means life to you and length of days, so that you may live in the land that the Lord swore to give to your ancestors, to Abraham, to Isaac, and to Jacob. Amen. (Deuteronomy 30:15 - 20)


Moses said in Deuteronomy 30, "Choose life," to the Hebrew people who are about to enter the land of Canaan. He advised them that since God has given them a new land, they should keep the law and the commandments with gratitude for His grace. Today's Word teaches us that we must obey the law because we have already received the grace from God, not for keeping the law to receive grace. We are called to "choose life." Let us walk into the new journey of 2019, remembering that we are already given a new time and opportunity by God.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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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열네번째 주일 / 8월 네번째 주일
출애굽기9, 실패와 감사
신명기 34:1 – 12
정해빈 목사




성경 66권 중에서 가장 중요한 책을 꼽으라면 예수님의 삶과 말씀을 기록한 4복음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복음서를 제외하고 가장 중요한 책을 꼽으라면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꼽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두 단어로 요약한다면 창조신앙과 구원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셨고 지금도 창조하신다고 고백하는 신앙이 창조신앙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억압에서 해방시켜 주셨다고 믿는 신앙이 구원신앙입니다. 창조신앙을 알려면 창세기를 읽어야 하고 구원신앙을 알려면 출애굽기를 읽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복음서를 제외하고 가장 중요한 책이 창세기와 출애굽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에는 역사 이전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고 실제 인간 역사를 구체적으로 기록한 책은 출애굽기입니다.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유대교/기독교의 시작이 출애굽기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를 제대로 이해하면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출애굽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 많은 종교들이 있는데 기독교의 특징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고통당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특징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출애굽기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만큼 출애굽기의 내용이 중요하기 때문에 지난 7월-8월 두 달 동안 9번에 걸쳐서 출애굽기 말씀을 전했습니다. (1) 히브리 난민들, (2) 생명과 폭력 사이에서, (3) 지팡이와 뱀, (4) 자유인이 되십시오, (5) 약속을 지키십시오, (6) 예배와 평등, (7) 부서진 십계명, (8) 모세의 가족, (9) 실패와 감사. 오늘은 출애굽기 마지막 시간으로 “실패와 감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출애굽기를 통해서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이 고통받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과 기독교 신앙이 자유와 약속의 신앙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출애굽기를 통해서 이런 깨달음뿐만 아니라 모세라는 사람의 인생을 통해서도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모세의 인생은 우리의 인생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120년을 살았는데 마지막까지 눈은 빛을 잃지 않았고 기력은 정정하였습니다. 우리도 모세처럼 그렇게 건강하게 오래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세는 힘들고 어려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모세처럼 힘든 인생을 산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하게 오래 살았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힘든 인생을 살면서도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모세는 성공과 실패를 모두 경험했습니다. 그의 인생을 보면 절반은 성공했고 절반은 실패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집트 바로왕과 담판을 벌이고 히브리 노예들과 함께 이집트를 탈출하고 홍해바다를 건너고 하나님과 계약을 체결하고 40년 광야 생활을 거쳐서 가나안 땅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그의 인생에는 이렇게 놀랍고 영광스러운 순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세의 인생에는 실패도 있었습니다. 그는 첫째로 가족을 잘 돌보지 못했고 둘째로 젊은 시절에 동포를 괴롭히는 이집트 사람을 죽였다가 광야로 피신을 해야만 했습니다.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가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셋째로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내려오다가 금송아지를 섬기는 백성들을 보고는 화가 나서 십계명 돌판을 깨트리기도 했습니다. 넷째로 그는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기만 하고 들어가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모세는 4번 실패를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실패는 가슴 아프고 억울한 일이었습니다. 자신이 출애굽을 일으키고 광야를 거쳐서 여기까지 왔는데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니 모세 입장에서는 너무도 슬프고 억울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모세처럼 성공과 실패를 경험합니다. 우리들 중에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않을 것입니다. 나는 결혼생활도 잘했고 자식농사도 잘했고 공부도 많이 했고 돈도 많이 벌었고 건강관리도 잘했고 인간관계도 잘했다고 말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할 것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좋아서 결혼했는데 성격이 맞지 않아서 아슬아슬하게 결혼생활을 할 수도 있고, 자녀를 키우면서 내 자녀에 대한 기대가 많았는데 자녀가 부모 기대대로 자라지 않을 수도 있고, 공부를 많이 하고 싶었지만 공부를 많이 못할 수도 있고, 돈을 많이 벌고 싶었지만 돈 버는 재주가 없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을 수도 있고, 건강관리를 잘못해서 건강 때문에 고생할 수도 있고, 가족/친척/이웃과 인간관계가 좋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결혼생활도 100점, 자식농사도 100점, 공부도 100점, 돈버는 것도 100점, 건강관리도 100점, 인간관계도 100점이라고 말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모세처럼 우리 인생을 되돌아 볼 때 아쉽고 후회가 되는 순간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성공할 때도 있었지만 실패할 때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어떤 마음으로 보내느냐가 중요합니다. 인생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보내면 인생 전체가 아름답게 되고 인생의 마지막을 잘못 보내면 인생 전체가 잘못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모세를 통해 배울 것이 있습니다.


모세는 억울하고 아쉬움 많은 인생을 살면서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히브리 동포들을 축복하였습니다. 우리가 오늘 신명기 마지막 34장을 읽었는데 신명기는 모세의 유언을 기록했습니다. 마지막 34장 앞장을 보면 모세는 32장에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고 33장에서는 히브리 백성들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32장 “하나님은 반석, 하시는 일마다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은 올곧다. 그는 거짓이 없고 진실하신 하나님이시다. 의로우시고 곧기만 하시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뒤흔들고 새끼들 위에서 퍼덕이며 날개를 펴서 새끼들을 받아 그 날개 위에 업어 나르듯이 주님께서만 홀로 그 백성을 인도하셨다.” 33장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다음과 같이 복을 빌어 주었다. 주님께서 시내 산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해처럼 떠오르시고 바란 산에서부터 당신의 백성을 비추신다. 주님께서 뭇 백성을 사랑하시고 그에게 속한 모든 성도를 보호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발 아래에 무릎을 꿇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모세의 마음 속에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도 있었을 것이고 히브리 백성들에게도 섭섭한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고 동포들의 미래를 축복해 주었습니다. 모세가 건강하게 오래 살면서 끝까지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내 인생에 아쉬움도 있고 후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후손들을 축복하며 산다면, 우리들도 모세처럼 그렇게 아름답게 인생을 마무리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하고 축복하면 오래 삽니다. 장수의 비결은 감사와 축복에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쓴 [노인과 바다]를 보면 노인이 84일간 물고기를 못 잡다가 85일째 되는 날 자기 배보다 더 큰 물고기를 잡고 3일간 씨름한 끝에 물고기를 끌고 항구로 돌아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상어떼들이 몰려 들어서 항구에 도착해보니 물고기는 뼈만 남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이 꼭 노인과 같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성공했는데 성공 뒤에 실패가 따라왔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산티아고 노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사람은 부서질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다. 고난과 시련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모세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a man can fail, but not grumble. He is thankful and blessing. 사람은 실패할 수는 있어도 원망하지는 않는다. 그는 감사하고 축복한다. 우리 인생에 실패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원하는 것을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 아쉬운 순간이 있을지라도 감사하고 축복할 때, 우리 인생은 아름다운 인생이 될 것입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중요합니다. 모세처럼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감사와 축복으로 아름답게 장식하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odus9, failure and gratitude
Deuteronomy 34:1 - 12


Then Moses went up from the plains of Moab to Mount Nebo, to the top of Pisgah, which is opposite Jericho, and the Lord showed him the whole land: Gilead as far as Dan, all Naphtali, the land of Ephraim and Manasseh, all the land of Judah as far as the Western Sea, the Negeb, and the Plain—that is, the valley of Jericho, the city of palm trees—as far as Zoar. The Lord said to him, ‘This is the land of which I swore to Abraham, to Isaac, and to Jacob, saying, “I will give it to your descendants”; I have let you see it with your eyes, but you shall not cross over there.’ Then Moses, the servant of the Lord, died there in the land of Moab, at the Lord’s command. He was buried in a valley in the land of Moab, opposite Beth-peor, but no one knows his burial place to this day. Moses was one hundred and twenty years old when he died; his sight was unimpaired and his vigour had not abated. The Israelites wept for Moses in the plains of Moab for thirty days; then the period of mourning for Moses was ended. Joshua son of Nun was full of the spirit of wisdom, because Moses had laid his hands on him; and the Israelites obeyed him, doing as the Lord had commanded Moses. Never since has there arisen a prophet in Israel like Moses, whom the Lord knew face to face. He was unequalled for all the signs and wonders that the Lord sent him to perform in the land of Egypt, against Pharaoh and all his servants and his entire land, and for all the mighty deeds and all the terrifying displays of power that Moses performed in the sight of all Israel. (Deuteronomy 34:1-12)


For two months in July and August, we had an opportunity to learn from the Exodus that God we confess is compassionate and saves the suffering, and that the Christian faith is the faith of freedom and covenant. In addition, we have gained a lot of wisdom through the life of Moses. Although Moses had lived a hard life, he lived for 120 years. Until the end, his sight was unimpaired and his vigour had not abated. How could Moses have lived a healthy life long enough to survive such a difficult life? Moses experienced both success and failure. He did not take good care of his family, fled to the wilderness during his youth, broke the tablets of the Ten Commandments, and could not enter the dreamland of Canaan. In this way, we can say that Moses experienced four failures. Moses did not grudge even when he faced failure. Rather, he gave thanks to God at the end of his life, and blessed the Hebrew compatriots. Moses thanked God in Deuteronomy 32 and blessed the Hebrew people in chapter 33. In the heart of Moses, there would have been a resentful heart to God, and to the Hebrew people a resentful heart. But Moses thanked God for leading him to this far and blessed the future of his compatriots. Because Moses had a heart of gratitude and blessing, he lived long and healthy, and was able to fulfill his mission to the end. There may be a failure in our lives. We can not have everything we want. Although there may be moments of failure in our lives, when we thank God and bless people, our lives will be a successful life. Like Moses, I pray that everyone be the one who beautifully decorates the last moment of life with thanksgiving and blessings.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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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열네번째 주일 / 8월 세번째 주일
출애굽기8, 모세의 가족
출애굽기 18:1 – 7
정해빈 목사



지난 8월 15일은 광복절 73주년이었습니다. 주보 7면을 보시면 8.15 평화통일 남북/북남 공동기도주일 기도문이 있습니다.

사랑의 하느님!
한 하늘아래 하나의 강토에서 살고 있는 남과 북의 그리스도인들은 올해에도 광복절을 맞이하고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조국의 광복절은 해마다 돌아오지만 우리는 그 감격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73년간 분단된 채 갈등하면서 온전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음을 진실로 고백합니다.

역사의 하느님!
우리는 2018년 광복절을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맞이합니다. 지난 시기 우리 민족이 겪어온 분단과 전쟁, 적대와 대결의 세월이 물러가고 평화와 번영의 무지개가 한라에서 백두까지 피어오름을 바라봅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느님께서 이 땅에 평화와 통일, 번영의 새 역사가 펼쳐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평화의 하느님!
분단과 갈등의 대명사였던 판문점에서 역사적인 남북정상의 상봉과 회담이 진행되고 판문점선언이 채택되어 마침내 남과 북은 화해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분단의 장벽과 전쟁의 불씨들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민족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공동의 발전을 가로막는 분단의 걸림돌들과 전쟁의 온상들을 말끔히 거둬내고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와 동북아시아와 세계의 평화와 안전의 디딤돌이 되게 하옵소서.

희망의 하느님!
우리가 더 큰 꿈을 꾸기 원합니다. 5천년의 민족사를 자랑하던 우리 민족이 70여 년 간이나 남과 북으로 갈라져 살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더 이상 분열의 불행과 고통을 강요당할 수 없습니다. 이제 새로운 시간의 분수령에서 우리 민족의 삶이 역사적 전환점을 맞이하도록 이끌어주옵소서. 마음과 마음을 열고 화해와 통일로 이어지는 평화와 번영의 새 역사를 이루어주옵소서.

창조의 하느님!
믿음의 눈으로 보니 분열과 대결의 상징이었던 판문점이 평화와 통일, 번영의 시작점으로 존재합니다. 이제 그곳에서 맺은 평화의 선언이 활짝 꽃피어 온 겨레가 그처럼 바라던 평화와 통일의 열매가 맺어지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남과 북, 해외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번영을 위해 힘써 일하도록 힘과 지혜와 용기를 주시고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적극 지지해 나서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8년 8월 15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



지난 주일에 모세가 그렇게 힘든 인생을 살면서도 지치지 않고 건강하게 끝까지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었던 이유를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모세가 겸손하기 때문이고 둘째로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고 셋째로 실패를 통해서 배우고 성장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백성들이 우상숭배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십계명 돌판을 땅바닥에 깨뜨려버렸습니다. 새로운 나라, 하나님 나라의 꿈이 깨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다시 부르셔서 십계명 돌판을 직접 다시 만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번째 돌판은 하나님께서 직접 만들어 주셨는데 두번째 돌판은 네가 직접 만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두번째 돌판을 만들면서 어떻게 하면 백성들과 함께 천천히 하나님 나라를 세울 수 있을지, 좀 더 구체적이고 실현가능한 꿈을 꾸었을 것입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이야기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가 모세가 자기 손으로 십계명 돌판을 만드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모세는 그렇게 힘들고 실패하고 스트레스가 많은 인생을 살면서도 120년 동안 지치지 않고 마지막까지 성실하게 인생을 살았습니다. 모세라는 사람의 성품과 믿음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세는 참으로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세가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모세의 강점과 약점을 모두 살펴볼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이 행복하려면 5가지가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행복한 가정,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동료, 영적인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신앙/종교, 보람을 느끼는 일, 사회에 공헌하는 봉사, 가정/친구/신앙/일/봉사 이렇게 5가지가 있어야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을 합니다. 모세는 함께 일하는 친구/동료들이 있었고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보람을 느끼고 있었고 백성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모세는 이렇게 행복에 필요한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5가지 중에서 한가지 모세가 갖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행복한 가정이었습니다. 위대한 사람들은 큰일을 하기 때문에 가정을 돌보지 못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너무 중요하고 스트레스가 많다 보니까 가정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큰일을 하는 것은 좋지만 아내와 자녀들 입장에서는 빵점짜리 가장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공적인 일도 중요하지만 사적인 일도 중요합니다.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 바깥 일과 가정 일에 균형을 맞추며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서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출애굽기 18장 말씀을 보면 장인 이드로가 모세의 가족, 딸과 두 손자를 데리고 모세를 방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세가 그동안 떨어져 살다가 오랜만에 가족을 만났는데 가족하고는 아무런 말을 안 하고 장인하고만 공적인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오랫동안 떨어져서 살다보니까 그랬는지 그냥 데면데면하고 무덤덤하게 가족을 만났습니다. 이와 반대로 모세의 형 아론은 가정을 잘 돌보았던 것 같습니다. 출애굽기 말씀을 자세히 보면 아론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제사장 직을 승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론의 가정이 원만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세의 가정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모세가 히브리 백성들을 돌보는 일에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가족들을 돌보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민수기 12장 1절-2절을 보면 모세의 형과 누나인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가 구스 여인 십보라와 결혼한 것을 비방하면서 “주님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의 아내를 비방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반대로 아론과 미리암이 십보라를 위해서 모세를 책망하는 이야기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이 언제 나를 부르실지 모르니까 항상 대기해야 한다는 이유로 옛날 도피생활할 때 얻었던 부인 십보라를 멀리하니까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책망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도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처럼 가정을 잘 돌보면서도 하나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충성한다는 이유로 하루 24시간 하나님 앞에만 서있지 말고 할 수 있는 대로 가정을 돌보라고 모세에게 충고했습니다. 모세의 가족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두번째 본문은 사사기 18장에 나오는 우상을 섬기는 모세의 손자 요나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을 필사하는 서기관들이 모세의 손자가 우상을 숭배하는 거짓 예언자가 된 것이 불편해서 히브리어 철자 “눈, 영어로 n”을 첨가해서 모세를 므낫세로 바꾸었습니다. 할아버지 모세는 출애굽을 하고 계명을 받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했는데 손자 요나단은 우상을 섬기고 계명을 파괴했습니다. 할아버지의 신앙이 후손에게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민족을 위해서는 큰일을 했지만 가정은 잘 돌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넬슨 만델라의 딸이 “우리 아버지는 국민들에게는 좋은 아버지였는지는 몰라도 나에게는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인종차별 철폐를 위해서 일하고 감옥에도 가다보니까 자녀를 돌보지 못했습니다. 큰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가족의 희생이 뒤따르기도 합니다. 큰일과 작은 일,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을 균형있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능한 최선을 다해서 가정과 일을 균형있게 대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삶을 기뻐 받으실 것입니다. 큰일을 하기 때문에 다른 것을 희생시키기 보다는 모든 것을 균형있게 대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가족/친구/신앙/일/봉사 다섯가지 모두를 균형있게 행하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odus8, Moses’ family
Exodus 18:1 - 7

Jethro, the priest of Midian, Moses’ father-in-law, heard of all that God had done for Moses and for his people Israel, how the Lord had brought Israel out of Egypt. After Moses had sent away his wife Zipporah, his father-in-law Jethro took her back, along with her two sons. The name of one was Gershom (for he said, ‘I have been an alien in a foreign land’), and the name of the other, Eliezer (for he said, ‘The God of my father was my help and delivered me from the sword of Pharaoh’). Jethro, Moses’ father-in-law, came into the wilderness where Moses was encamped at the mountain of God bringing Moses’ sons and wife to him. He sent word to Moses, ‘I, your father-in-law Jethro, am coming to you, with your wife and her two sons.’ Moses went out to meet his father-in-law; he bowed down and kissed him; each asked after the other’s welfare and they went into the tent. (Exodus 18:1-7)

It is said that a person can live a happy life when he or she has five things: a happy family, a dependable friend, a faith to receive spiritual comfort, a rewarding work, and a service that can contribute to society, Among 5 strands, Moses had colleagues who worked with him, had a deep faith, felt reassured about what he did, and worked hard for his community. But there was one thing that Moses did not have. It was a happy family. There are many cases that great people often work hard for the common good and fails to care for their family. They may not have enough time to care for their family because what they do is so important. Surely, it would not be easy to live in such a way that we live in a balance between public and private work, outside and family work.

According to Exodus chapter 18, Moses and his family lived away for a long time. Since Moses worked hard for the Hebrew people, he could not care for his family. Numbers chapter 12 shows that Aaron and Miriam, a brother and sister of Moses, gave an advice to Moses that he could do God's work while taking good care of his family. Also, according to Judges chapter 18, Jonathan, the grandson of Moses, lived a life of false prophets worshiping idols. While his grandfather had an exodus, received a commandment, and built a new nation, his grandson Jonathan served idols and destroyed his commandments. We can see here that grandfather's faith was not passed on to his descendants. We are called to balance the great and small, the public and the private. God will be pleased when we take care of our family and at the same time do our job diligently.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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