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두번째 주일 / 4월 두번째 주일
부활절, 마리아와 베드로와 바울
마가복음 16:9-11, 요한복음 21:1-7
정해빈 목사



지난 주일부터 부활절 절기가 시작되었습니다.부활 때문에 기독교 신앙과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매주일이 작은 부활절입니다. 우리는 부활생명을 기뻐하고 축하합니다. 따라서 기독교 예배는 축제요 잔치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은 무엇일까요? 부활은 맨 처음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누구나 이런 질문을 한 번 쯤은 하게 됩니다. 부활을 이야기할 때 제일 먼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부활은 육체 소생이 아닙니다. 지금 육체가 잠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소생이라고 하는데 부활은 육체 소생이 아닙니다. 의학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사람이 며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가정을 해보겠습니다. 그 사람은 다시 살아났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죽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체로는 영원히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렸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나사로는 나이가 들어서 죽었을 것입니다. 부활은 육체 소생이 아니라 새로운 몸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여기 왼손에는 백합씨가 있고 오른손에는 백합꽃이 있습니다. 백합꽃을 처음 본 사람에게 씨가 변해서 꽃이 되었다고 말하면 그 사람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조그만 씨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꽃이 나올 수 있습니까? 하고 질문할 것입니다. 왼손에 애벌레가 있고 오른손에 나비가 있습니다. 나비를 처음 본 사람에게 애벌레가 변해서 나비가 되었다고 말하면 그 사람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징그러운 벌레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나비가 나올 수 있습니까? 하고 질문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은 마치 씨앗이 변해서 꽃이 된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씨앗이 지금 육체라면 백합꽃은 부활의 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썩을 몸이 썩지 않을 몸으로 변하는 것이 부활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부활의 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성경은 지금 몸이 아니라 새로운 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죽은 후에 새로운 몸을 입는 것이 부활입니다. 점이 1차원이라면 점과 점을 연결하는 선은 2차원이고 선과 선이 만나는 공간은 3차원입니다. 우리는 지금 3차원을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는 4차원, 5차원도 있을 것입니다. 4차원, 5차원의 세계가 부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활은 맨 처음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부활은 제자들의 부활체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부활은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가 없고 단지 제자들의 체험이 있을 뿐입니다. 부활은 증명이 아니라 체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체험은 너무도 분명하고 강렬해서 이 체험을 한 사람들은 결코 이 체험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어제 밤에 돌아가신 부모님이 꿈에 나타났습니다. 어제 내가 가만히 의자에 앉아있었는데 갑자기 돌아가신 부모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면 주변 사람들은 그 사람의 말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거짓말 하지 마라, 헛소리하지 마라, 어떻게 돌아가신 분이 나타날 수가 있냐?”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믿지 않아도 그 사람은 분명하게 체험을 했기 때문에 계속 그 체험을 주장하게 됩니다. 내가 분명히 보았고 들었다는데 다른 사람들이 믿을 수 없다고 말해도 소용없습니다. 부활이 이와 같습니다. 부활을 분명히 체험한 사람은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해도 자신이 직접 체험했고 보았고 경험했기 때문에 부활을 주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맨 처음 부활체험을 한 3명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들의 이름은 막달라 마리아, 베드로, 바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레의 첫날 새벽에 살아나신 뒤에 맨 처음으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일곱 귀신을 쫓아내 주신 여자이다. 마리아는 예수와 함께 지내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가 살아 계시다는 것과 마리아가 예수를 목격했다는 말을 듣고서도 믿지 않았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셨는데 제자들은 이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나 12제자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지 않으시고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 사이에서는 주님이 누구에게 제일 먼저 나타났느냐 하는 것이 경쟁이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그만큼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제일 뜨겁게 사랑하고 그리워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막달라는 오늘 말씀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한때 일곱 귀신들렸던 사람이었는데 주님을 만나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일곱 귀신들렸다는 말은 그녀를 괴롭히는 것이 7가지였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만큼 그녀의 삶이 그만큼 거칠고 힘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주님을 통해서 고침받았고 은혜받았고 변화받았습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그리워하고 주님의 죽음을 애통해했기 때문에 주님은 제일 먼저 그녀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두번째로 주님은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용서하시고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맡겨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수제자였지만 단순하고 성급한 사람이었고 주님을 배반한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고향에 돌아가 고기를 잡으려고 했는데 그날따라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젊은이들이 쓰는 말 중에 “멘붕, 멘탈붕괴”라는 말이 있습니다. 너무 충격적이고 어이가 없는 상황을 만나면 멘붕이 왔다고 표현을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한 것 때문에 정신적인 멘붕/트라우마를 겪었고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해서 경제적인 멘붕/트라우마를 겪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고기를 많이 잡게 하셨고 물고기를 숯불에 구워서 그를 먹이셨습니다. 베드로는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체험과 누군가가 숯불에 물고기를 구워놓은 것을 보면서 주님께서 자신을 찾아오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내 양을 돌보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처럼 정신적/육체적/경제적인 충격 속에 빠진 양들을 돌보아라”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도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강렬한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부활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주님은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삶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정통 유대교 엘리트, 율법과 성전을 자랑하고 민족 우월주의자였던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선포하는 사람, 약자들과 이방인들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다른 것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사랑하는 님이 나에게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님을 너무도 사랑하고 그리워할 때, 님이 비극적인 죽임을 당했을 때, 그리고 그 죽임에 대해 너무도 깊이 애통해 할 때, 님은 나에게 나타납니다. 주님의 죽음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이었고 주님의 죽음에 대해 깊이 애통해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은 오직 그런 사람들에게만 나타나셨고 그들에게 새로운 힘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임마누엘,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나는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나를 대신해서 상처받기 쉬운 어린 양들을 돌보십시오” 주님께서 그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해도, 이 사람들은 이러한 강렬한 체험을 했기 때문에 부활을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의 체험이 쌓이고 쌓여서 부활신앙이 되었습니다. 단 하루도 주님을 잊을 수 없는 사람들, 주님을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주님처럼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주님을 위해서 자기 인생을 바쳤던 사람들,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만 나타나셨습니다. 상대방을 깊이 사랑하면 그 사람이 나타납니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미안하면 미안할수록 그 사람이 나에게 나타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깊은 사랑을 체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부활은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을 애타게 찾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셨고 그들에게 힘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찾아오시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나를 대신해서 양들을 돌보아라”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힘과 용기를 얻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Easter, Mary, Peter, and Paul’s confession
Mark 16:9-11, John 21:1-7


Now after he rose early on the first day of the week, he appeared first to Mary Magdalene, from whom he had cast out seven demons. She went out and told those who had been with him, while they were mourning and weeping. But when they heard that he was alive and had been seen by her, they would not believe it. (Mark 16:9–11) After these things Jesus showed himself again to the disciples by the Sea of Tiberias; and he showed himself in this way. Gathered there together were Simon Peter, Thomas called the Twin, Nathanael of Cana in Galilee, the sons of Zebedee, and two others of his disciples. Simon Peter said to them, ‘I am going fishing.’ They said to him, ‘We will go with you.’ They went out and got into the boat, but that night they caught nothing. Just after daybreak, Jesus stood on the beach; but the disciples did not know that it was Jesus. Jesus said to them, ‘Children, you have no fish, have you?’ They answered him, ‘No.’ He said to them, ‘Cast the net to the right side of the boat, and you will find some.’ So they cast it, and now they were not able to haul it in because there were so many fish. That disciple whom Jesus loved said to Peter, ‘It is the Lord!’ When Simon Peter heard that it was the Lord, he put on some clothes, for he was naked, and jumped into the lake. (John 21:1-7)


The risen Christ appeared to Mary Magdalene, Peter, and Paul. Mary Magdalene was once possessed by seven demons but was healed by the Christ. The Lord appeared to her because she loved him more than any other person. Jesus also appeared to Peter, forgave him, and gave him a new mission. "Take care of my sheep who are lost." Jesus also appeared to Paul and changed his life. Paul, an orthodox Jewish elite, a prophet of law and a temple, and a national supremacist, gave up all his priorities after meeting the resurrected Jesus, and became a man living for the weak and the Gentiles, and proclaiming the Lord crucified. The risen Christ appeared to those who loved him more than other people. Resurrection is not an objective evidence but an experience of love. Love is eternal and does not disappear. May God bless you and the risen Christ appear to you!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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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 4월 첫번째 주일
부활절, 휘장이 찢어지고 무덤이 열리다
마태복음 27:50 – 56
정해빈 목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부활을 기뻐하고 부활을 선포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셨습니다. 정의가 불의를 이겼습니다. 빛이 어둠을 이겼습니다. 생명이 죽음을 이겼습니다. 죽음이 생명을 영원히 가둘 수 없었습니다. 빛이 어둠보다 강하고 생명이 죽음보다 강합니다. 빛과 생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의와 어둠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미국의 야구 선수이자 감독인 로렌스 피터 요기 베라가 남긴 말 중에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 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가 1973년 뉴욕 메츠의 감독을 맡고 있을 때 그의 팀은 꼴찌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한 기자가 베라에게 “이제 시즌이 끝났지요?” 하고 물었을 때 베라 감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It ain't over till it's over,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해에 베라 감독은 꼴찌였던 뉴욕 메츠를 월드 시리즈에 진출시켰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끝날 것처럼 보였지만 마지막에 모든 것이 뒤집어질 수도 있습니다. 불의한 권력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아 죽였을 때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정의는 패배하고 불의는 승리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무덤에서 일으키심으로 불의한 역사를 정의의 역사로 바꾸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누구의 손을 들어주느냐가 중요합니다. 완전히 끝날 때까지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은 부활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처형당하셨을 때 성전 휘장이 찢어지고 무덤이 열렸습니다.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는 말은 하나님과 인간을 가로막는 장벽이 무너졌다는 것을 가리키고 무덤이 열렸다는 말은 삶과 죽음의 장벽이 무너졌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인간의 삶을 힘들게 하고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무서운 두가지 장벽이 있는데 첫번째는 하나님과 인간을 나누는 장벽이고 두번째는 삶과 죽음을 나누는 장벽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장벽을 허물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성전 휘장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제사장과 성전 같은 중개인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만이 지성전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성전 휘장을 찢으심으로 우리들이 중개인을 거치지 않고 직접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삶과 죽음의 장벽을 허무셨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요 죽음 이후에 부활이 있음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 삶을 구속하는 가장 강력하고 무서운 장벽을 허무셨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가로막는 장벽은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잠자던 성도들을 무덤에서 일으키셨습니다. 오늘 읽은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부활하셨을 때 잠자던 성도들도 무덤에서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예수님만 혼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성도들도 같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열매입니다. 예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들도 예수님을 따라서 부활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니 우리도 부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일어나셨으니 우리도 죽음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장벽이 무너졌고 하나님과 인간을 나누는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절망에서 일어나십시오. 실패에서 일어나십시오. 무덤에서 일어나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 손을 잡고 우리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삶을 가로막는 장벽을 허무시고 우리를 무덤에서 일으키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삶의 위로와 용기를 얻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Easter, curtain torn and tombs opened
Matthew 27:50 - 56


Resurrection is the sign of God, showing God is alive and powerful. Since we believe in Resurrection, we can rise again from whatever happened to us. Lawrence Peter Yogi Berra, a very famous baseball player and coach of Major League, once said, “it ain’t over till it’s over.” Yes it ain’t over till it’s over. Through His death and resurrection, Jesus broke down the barrier between God and human being, and the barrier between life and death. The Gospel of Matthew says when Jesus was crucified on the cross, the curtain of the temple was torn down, and the door of the tomb was opened. The curtain the temple symbolizes the barrier between God and human being. For a long time, we are heard that we can not see God directly, but only through “intermediaries” such as priests or temples. But through his death and resurrection, Jesus removed all these barriers so that all people can see God without such “intermediaries or brokers.” Jesus opened the way for us to see and meet God directly.


Jesus also removed the barrier of death and life through his death and resurrection. He showed us that death is not the end but there will be the resurrection at the end of death. Truly Jesus had abolished the two barriers, the most powerful and frightening barriers that bind and crush our spiritual lives. Truly, there is no barrier to the love of God. Death cannot defeat life, and injustice cannot defeat justice. Dear sisters and brothers, don’t be afraid of anything. The barriers of death collapsed. The barrier between God and human being collapsed. So I want all the believers to look to the Lord who has come to us to tear down all the barriers. We are very thankful for the fact that neither death, nor rulers, nor barriers, nor powers, nor anything else in the world will be able to separate us from the love of God in Christ Jesus our Lord.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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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 3월 네번째 주일
종려주일, 나를 따라오너라
요한복음 12:20 – 33
정해빈 목사





우리는 오늘 사순절 마지막 주일, 종려주일/고난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보내신 마지막 일주일을 종려주일/고난주일이라고 부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는 오늘 일요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고, 월요일에 예루살렘 성전을 심판하셨습니다. 화요일에 성전 제사장및 헤롯 당원들과 토론하셨고, 수요일에 마르다/마리아/나사로의 집에 머무르셨습니다. 목요일 저녁에 최후의 만찬을 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다가 로마 병사들에게 붙잡히셨습니다. 금요일 새벽에 대제사장과 빌라도 총독에게 심문받으시고 금요일 오전 9시 십자가에 매달리셨다가 6시간이 지난 오후 3시 운명하셨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께서는 오늘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는데 군중들이 주님을 환영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종려나무는 오하시스에서 자라기 때문에 사막 길을 걸어가다가 종려나무가 보이면 오하시스가 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출애굽을 한 히브리 백성들이 광야를 걸어가다가 종려나무를 보며 기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종려나무가 있는 곳에 물과 그늘이 있습니다. 또 종려나무는 대추 열매를 많이 맺기 때문에 다산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둘째로 종려나무는 밑으로는 땅 속 깊은 곳 물 있는 곳까지 뿌리를 내리고 위로는 30미터까지 올라가고 나무를 베고 남은 그루터기를 불에 태워도 그 그루터기에서 다시 싹이 나기 때문에 고난을 이기는 용기와 강인한 생명과 승리와 부활을 상징했습니다. 그래서 이 나무는 유대인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상징하는 나무가 되었습니다. 셋째로 옛날 여자 사사였던 드보라는 종려나무 아래에서 공정한 재판을 진행했습니다. 종려나무는 공정한 재판과 정의와 정직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주님을 향해서 “주님,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과 안식을 주십시오. 우리에게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용기와 강인한 생명과 죽음을 이기는 승리와 부활을 주십시오. 우리에게 공정한 재판과 정의와 정직을 주십시오” 이렇게 외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2장 말씀을 보면 유대교 명절인 유월절에 그리스/헬라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기 위해 찾아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주님을 뵙고 싶어한다는 소식을 들으신 주님은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헬라 사람들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고 자신들이 자랑하는 많은 신들과 영웅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우스 신을 자랑했고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들을 자랑했습니다. 그리스/헬라 사람들은 웅변을 잘하고 말을 잘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제야 비로소 주님께서 참 메시야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말 잘하는 사람도 많고 철학자들도 많고 왕들도 많고 신들도 많지만 주님 같은 분은 없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리스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참 메시야는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고,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어야 열매를 많이 맺는 것처럼 자기를 버려서 이웃을 살리는 사람이 참 메시야라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주장하는 자칭 영웅/통치자/철학자/메시야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를 따르십시오. 내가 세상을 구원하겠습니다. 내가 나라를 일으키겠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부자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이들은 이렇게 주장하면서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들이 진정한 지도자가 아니라 거짓말쟁이요 사기꾼이라는 것이 세상에 드러나게 됩니다. “지금은 이 세상이 심판을 받을 때이다. 이제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날 것이다. 내가 땅에서 들려서 올라갈 때에 나는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어 올 것이다.” 주님께서는 내가 십자가에 들려 올라갈 때에 이 세상의 통치자들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죄 없으신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모습을 보면서 주님과 세상 왕들을 비교하게 됩니다. 주님과 세상 왕들을 비교함으로서 누가 참 왕이고 누가 참 메시야인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렇게 비교되는 것 자체가 세상 통치자들이 심판을 받는 것과 같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초대교회가 박해받은 시절 지하 동굴 카타콤에 예수님이 두 팔을 벌리고 서 계시는 그림이 있습니다. 사람이 손을 자기 앞으로 하면 무엇을 자기 쪽으로 움켜쥐는 모습이 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손을 밖으로 벌리면 자기를 개방해서 이웃을 환영하고 베푸는 모습이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향해서 손을 들고 서 계십니다. 지하 동굴 그림이 보여주는 것처럼 손을 벌려서 이웃을 환영하시고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통해서 주님과 세상 왕들을 비교하였고 그런 비교를 통해서 세상 왕들은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목자 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셨습니다. 마가복음 6장 34절, “예수께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으므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래서 그들에게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다.” 저 옛날 에스겔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참 목자가 없으므로 그들이 흩어져서 들짐승의 밥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의 거짓 목자들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선한 목자로 오신 주님께서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려고 오는 것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 주님은 우리들이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옛날 히브리/유대인들은 죄를 지었으면 그 죄값으로 피를 흘려야 한다고 생각해서 동물의 피를 흘려서 죄를 사죄하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예수님이 우리 대신 피를 흘리셔서 우리 죄값을 사해 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꼭 이렇게 유대교 식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선한 목자로 오신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돌보고 지키기 위해 오셨다가 이리와 늑대 같은 이들에게 붙잡히시고 죽으셨습니다. 양들을 사랑하고 돌보고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참 사랑은 자기 목숨을 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으면 고난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습니다. 우리 옛말에 기쁨은 함께하면 두배가 되고 고난은 함께하면 절반으로 줄어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의 고난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같이 아파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의 고난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우리도 고난받은 이들의 고난을 같이 그리고 대신 짊어질 때 그들의 고난은 절반으로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종려주일을 묵상하며, 우리들도 주님처럼 이웃의 고난을 같이 짊어짐으로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그들을 살리는 선한 목자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alm Sunday, follow me
John 12:20 – 33


Now among those who went up to worship at the festival were some Greeks. They came to Philip, who was from Bethsaida in Galilee, and said to him, ‘Sir, we wish to see Jesus.’ Philip went and told Andrew; then Andrew and Philip went and told Jesus. Jesus answered them, ‘The hour has come for the Son of Man to be glorified. Very truly, I tell you, unless a grain of wheat falls into the earth and dies, it remains just a single grain; but if it dies, it bears much fruit. Those who love their life lose it, and those who hate their life in this world will keep it for eternal life. Whoever serves me must follow me, and where I am, there will my servant be also. Whoever serves me, the Father will honour. Now my soul is troubled. And what should I say—“Father, save me from this hour”? No, it is for this reason that I have come to this hour. Father, glorify your name.’ Then a voice came from heaven, ‘I have glorified it, and I will glorify it again.’ The crowd standing there heard it and said that it was thunder. Others said, ‘An angel has spoken to him.’ Jesus answered, ‘This voice has come for your sake, not for mine. Now is the judgement of this world; now the ruler of this world will be driven out. And I, when I am lifted up from the earth, will draw all people to myself.’ He said this to indicate the kind of death he was to die. (John 12:20 - 33)


Jesus, our Lord and Shepherd, had suffered for us. Mark 6:34 says that Jesus saw a great crowd and felt compassion for them as they were like sheep without a shepherd. So he taught them many things. The ancient prophet Ezekiel also stated that the Israelites did not have a true shepherd, so they were scattered and became the food of the wild animals, because of the false shepherds of Israel who eat their own. But the Lord, who came as a good shepherd, gave his life for the sheep. John 10:10 says, “Thieves are only to steal, kill, and destroy. But I have come to bring the sheep to life and to overflow.” The Lord came to love, care for, and keep us, and as a result, he was caught and killed by those thieves who had earthly powers. True love is to give his life. If I do not love others, I do not have to remember their pain and suffer with them. It is the love for them that I take their suffering. Our old saying says, joy is doubled and suffering is reduced to half when we share it together. Because Jesus loved us, he took our suffering instead. As Jesus did for us, when we bear the afflictions of others, their suffering will be cut in half. The Lord has told us to follow him. Remembering Palm Sunday, we meditate on bearing our neighbor's sufferings like our Lord. We are called to share their pain and live a life of a good shepherd.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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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다섯번째 주일 / 3월 세번째 주일
사순절, 도전과 돌봄과 세움
마가복음 1:29 – 39
정해빈 목사



우리는 요즘 사순절을 지내며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오늘 사순절 다섯번째 주일 예배를 드리고 다음 주일에는 사순절을 마감하는 종려주일/고난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그것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빛이 세상에 왔는데 어둠이 빛을 싫어해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큰 눈으로 바라보면 크게 3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고 설교하셨습니다. 영어로는 Teaching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가 세상 나라와 무엇이 다른지, 하나님 나라에서는 우리들이 어떻게 가정생활/신앙생활/사회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설교와 비유를 통해 가르치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고치셨습니다. 영어로는 Healing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몸이 아픈 사람들과 마음이 슬프고 지쳐있는 사람들을 위로하시고 치료하셨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죄인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초청해서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습니다. 함께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는다는 말은 그들을 나의 친구로 환영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영어로는 Eating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식탁에 초대해서 함께 음식을 나누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Teaching과 Healing과 Eating은 따로 떨어져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고 이어서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고치시고 마지막으로 그들과 함께 식탁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론이고 병 고침과 식탁 교제는 실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먼저 가르치신 후에(1번) 그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예로 병을 고치시고(2번) 이어서 모든 사람들을 초대해서 함께 식사하셨습니다.(3번). Teaching, Healing, Eating 이 세 글자의 첫 단어를 붙이면 THE가 됩니다. THE는 그분을 가리킵니다. 우리 다같이 “그분 목회(THE Ministry)”를 합시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매주일 모여서 하나님 나라 말씀을 배우고, 서로를 치료하고, 식탁에 앉아 함께 음식을 나눌 때, 하나님 나라는 바로 거기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그런데 학자들 가운데서는 THE Ministry 가지고는 부족하고 예수님의 공생애를 좀 더 구체적이고 역사적이고 실제적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CCC(Challenge, Care, Community)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우리말로 하면 오늘 설교 제목처럼 도전/돌봄/세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LA에서 목회하시는 박원일 목사님께서 [마가복음의 정치적 읽기]라는 책을 쓰셨는데 그 책을 보니까 예수님의 목회를 이렇게 설명한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첫번째로 세상에 도전하시고 저항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는데 그 가르침은 단순한 가르침이 아니라 세상에 도전하고 저항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Teaching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Challenge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예수님 당시 세상은 정치적으로는 로마 황제가 다스리는 황제의 나라였고 종교적으로는 예루살렘 성전이 다스리는 성전의 나라였습니다. 황제의 나라는 폭력으로 세상을 다스렸고 성전의 나라는 성전을 통해서 세상을 지배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황제의 나라도 아니고 성전의 나라도 아닌, 정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정치/종교 권력자들이 백성들을 짓누르고 횡포를 부리고 있다고 말씀하셨고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는 세상 권력자들처럼 횡포를 부리는 자가 되지 말고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시면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죄인이라고 낙인찍인 사람들을 향해서 성전에 갈 필요도 없이 그 자리에서 그들에게 죄사함을 선언하셨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처음에는 회당에서 설교하시다가 나중에는 갈릴리 사람들 가정으로 들어가서 설교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회당에서 도전하는 설교를 하시니까 회당 지도자들이 싫어합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갈릴리 사람들의 가정으로 들어가서 말씀을 전하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 나라와 다르기 때문에 세상과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에 도전할 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도전을 줍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다보면 때로는 우리 마음이 불편하기도 하고 도전(challenge)이 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런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 자신을 돌아보고 내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바르게 살고 있는지를 점검하게 됩니다. 때때로 우리들은 교회에 오면서 부드럽고 따뜻하고 위로가 되는 말씀을 기대하기도 합니다. 세상 살기가 힘드니까 교회에 와서는 위로되는 말씀을 듣고 싶어합니다. 세상 사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교회에서도 꼭 그렇게 부담되는 말씀을 들어야 하나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맛보는 곳이기 때문에 기쁨이 넘쳐야 하고 은혜롭고 따뜻한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교회에서는 반드시 하나님 나라의 도전하는 말씀이 울려 퍼져야 합니다. 잘못된 세상에 도전하고 저항해야 합니다. 그런 말씀이 없다면 교회는 단순이 친목단체/사교단체가 되고 말 것입니다. 머리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확 드는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잘못된 세상을 꾸짖고 저항하고 도전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와 생명을 선포해야 합니다. 잘못된 세상에 도전하고 저항하는 교회, 하나님 나라의 정신이 살아있는 교회가 참된 교회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돌봄(Care) 목회를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돌봄은 단순히 환자를 고쳤다는 뜻이 아니라 그 아픈 사람을 정신적/신체적/사회적으로 건강하게 만들어서 그 사람을 사회의 일원으로 복귀시킨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옛날에는 병든 사람을 죄인 취급하였고 가까이 하지도 않았고 접촉하지도 않았고 사회의 일원으로 끼워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픈 사람들을 직접 만나셨고 그들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병자/장애인/여자/이방인/사마리아인/혼혈인 같은 사람은 유대 사회의 일원으로 대접받지 못했습니다. 나병환자, 앞 못 보는 사람, 혈루병을 앓은 페니키아 여인, 귀신들린 사람, 주님은 이런 사람들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선언하셨고 그들을 건강한 사람으로 만들어서 그들을 사회의 일원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가 예수님의 돌봄(Care) 목회를 하려고 한다면 교회는 소외된 사람들을 쫓아내고 배제하고 혐오하기 보다는 이런 사람들을 환영하고 이런 사람들이 사회의 일원이 되도록 도와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치료하고 환영하고 돌보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주님은 세움(Community) 목회를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의 집에 가서 열병을 앓고 있는 장모를 고치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은 열이 적어도 문제지만 열이 너무 많아도 문제입니다. 몸이 차가운 사람은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하고, 반대로 몸이 너무 뜨거운 사람은 몸의 열을 낮추어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하는 말 중에 “열 받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슴에서 열이 솟아오르고 분노가 치솟게 되면 건강을 해치게 됩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왜 열병을 앓았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풍토병일 수도 있고 딸과 사위가 마음에 안 들어서 열병을 앓았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켜서 열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장모가 일어나서 손님들을 시중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병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누워있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건강을 회복하고 나서 장모는 손님들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일어났다, 시중들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세움 목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우리들에게 공동체/교회를 물려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말씀하시고 제자들의 모임, 교회를 물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각자 집에서 혼자 신앙생활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우리들을 부르셔서 교회를 세워 주셨습니다. 교회는 사랑을 배우고 연습하는 곳이요, 섬김을 실천하는 곳입니다. 교회에서 사랑하는 훈련, 섬기는 훈련을 해야 세상을 섬길 수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고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고 시기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사랑하고 섬기는 훈련을 할 때 우리는 교회 밖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사시면서 하신 3가지 목회, 도전/돌봄/세움의 목회를 이곳에서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Lent, challenge, care, community

Mark 1:29 – 39


As soon as they left the synagogue, they entered the house of Simon and Andrew, with James and John. Now Simon’s mother-in-law was in bed with a fever, and they told him about her at once. He came and took her by the hand and lifted her up. Then the fever left her, and she began to serve them. That evening, at sunset, they brought to him all who were sick or possessed with demons. And the whole city was gathered around the door. 34And he cured many who were sick with various diseases, and cast out many demons; and he would not permit the demons to speak, because they knew him. In the morning, while it was still very dark, he got up and went out to a deserted place, and there he prayed. And Simon and his companions hunted for him. When they found him, they said to him, ‘Everyone is searching for you.’ He answered, ‘Let us go on to the neighbouring towns, so that I may proclaim the message there also; for that is what I came out to do.’ And he went throughout Galilee, proclaiming the message in their synagogues and casting out demons. (Mark 1:29 – 39)


If we summarize Jesus' public ministry in three categories, we can say “challenge, care, and community.” First, Jesus “challenged” the unrighteous world. The world at the time of Jesus was politically ruled by the Roman emperors and religiously by the kingdom of the temple. But Jesus proclaimed God of justice and mercy, who loves orphans, widows, and strangers. Jesus told his disciples to be servants instead of tyrants like the world powers. Jesus also challenged the religious power by insisting that humans are not for the Sabbath, but the Sabbath are for humans. Today’s scripture shows that Jesus was rejected by the synagogue leaders for these reasons and he went into Galilee's house to teach the kingdom of God to them. Secondly, Jesus cared those discriminated. The word "care" refers to making a person mentally, physically, and socially healthy and returning that person to their families. Jesus took care of the sick, disabled, woman, gentile, samaritan and welcomed them. Thirdly, Jesus initiated “community of love and care.” When having ascended into heaven, Jesus said to his disciples, "Love one another, just as I have loved you," and handed down church to his disciples. Here in the church, we are called to learn and practice love. Here In the church, we are called to learn and practice love so that we are able to love the world. Jesus showed us three ministries, challenge, care, and community. We are called to continue these ministries.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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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네번째 주일 / 3월 두번째 주일
사순절, 하나님 나라의 씨알
마가복음 4:26 – 32
정해빈 목사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학교들 중에서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학교들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북간도 용정에 있었던 은진중학교입니다. 은진중학교는 캐나다선교부가 김약연과 이동휘 선생의 요청에 따라 세운 학교였는데 기독교신앙과 민족교육을 가르쳤습니다. 당시로서는 용정에서 시설이 가장 좋은 학교였고 캐나다 선교사님들이 버팀목이 되었기 때문에 일제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신앙교육/민족교육/한글교육을 할 수 있었습니다. 강원룡, 문익환, 문동환, 송몽규, 윤동주, 이상철, 전택부 등이 이 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김재준 목사님도 미국 유학을 마치고 은진중학교에서 교목으로 일하시면서 제자들을 길러내셨습니다. 은진중학교가 동쪽 끝 북간도에 있었다면 서쪽 끝에 있는 학교는 오산학교였습니다. 남강 이승훈 선생이 “교육으로 나라를 일으켜야 한다”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연설을 듣고 사재를 털어서 고향 평안북도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웠습니다. 조만식 선생이 교장을 역임했고 김소월, 이중섭, 주기철, 한경직, 함석헌 등이 이 학교를 다녔습니다. 학교 선생으로는 신채호, 이광수, 염상섭, 유명모 등이 있었고 함석헌 선생님은 이 학교를 졸업하고 나중에 다시 모교로 돌아와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은진중학교가 캐나다선교부가 세운 기독교학교였다면 오산학교는 한인들이 세운 기독교학교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함석헌 선생이 평양고등학교를 다니다가 3.1운동에 참여했는데 당시 일본인 교장은 3.1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에게 반성문을 써야만 학교를 다시 다닐 수 있게 했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다시 학교에 다니기 위해서 반성문을 썼지만 함 선생님은 양심을 속이면서까지 반성문을 쓸 수 없다고 말하고 스스로 자퇴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오산학교 3학년에 편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오산학교에서 다석 유명모 선생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지난 2010년 교수신문이 전국 대학교 교수들에게 지난 100년 동안의 한국 역사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사상가로 누구를 생각하느냐고 설문조사를 했더니 함석헌 옹을 꼽는 사람들이 제일 많았습니다. 함 선생님은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삼천만 앞에 울음으로 부르짖는다>와 같은 글을 통해서 한국 사회와 한국 기독교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셨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한민족을 깨우치고 민족을 화해하는 길로 가기보다는 교권분열과 교파싸움을 일으키고 무당이 되어서 기적/방언/신유/축복 집회만 연다고 비판하셨습니다. 윤리적인 기독교는 사라지고 타계적/몰역사적/반지성적/현실도피적인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고 민족을 깨우치고 국민들이 생각하는 백성이 되도록 도와주어야 하는데 이런 데는 관심이 없고 저급하고 이기적인 물질욕망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함 선생님의 사상을 [씨알 사상]이라고 말을 합니다. 씨알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참나,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가리킵니다. 내 안에 있는 말씀과 성령의 불씨/얼/뜻/정신이 씨알입니다. 씨앗의 껍질이 깨질 때 거기에서 생명이 자라듯이 나의 껍질이 깨지고 내 안에 있는 참나, 말씀과 성령의 불씨/얼/뜻/정신이 자랄 때 거기에서 참 생명이 자리게 됩니다. 사회의 눈으로 보면 씨알은 세상의 밑바닥에서 궂은 일을 하면서 생명을 이어가는 민초/민중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밑바닥 민초/민중들은 고난의 역사 가운데서 가장 많은 피해를 겪으면서도 굳굳하게 생명을 이어갔습니다. 그런 면에서 밑바닥 민초/민중들이 역사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양반/귀족/특권층들은 세상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망쳐왔습니다. 역사와 우주의 중심이 민초/민중이라고 보는 사상이 씨알 사상입니다. 복숭아는 껍질과 살과 씨로 되어 있는데 껍질은 사람의 겉모습, 첫인상/말솜씨/명성/지위/개성/재주를 가리킵니다. 사람을 처음 볼 때는 그 사람의 겉모습에 매력을 느끼게 되지만 껍질이 인간관계를 지속시키지는 못합니다. 인간관계를 지속시키는 힘은 껍질 안에 들어있는 살입니다. 살은 마음과 같아서 관계를 맺으려면 마음을 상대방에게 주어야 합니다. 상대방에게 주지 않으면 살은 썩게 됩니다. 껍질과 살을 주고나면 마지막으로 남는 것이 씨인데 씨가 땅에 떨어지면 거기에서 새로운 생명이 나오게 됩니다. 예수께서 껍질과 살을 이웃에게 주고 밀알이 되신 것처럼 씨앗이 되어서 다음 생명을 일으키는 삶이 씨알의 삶입니다. 씨알에는 두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씨알은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자립합니다. 씨앗이 스스로 싹을 틔우듯이 씨알은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자기관리/자기혁명/자기성장이 씨알의 정신입니다. 둘째로 씨알은 고난을 통해서 새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삶에 고난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습니다. 고난이 있지만 그 고난을 통해 연단 받아서 더 단련되고 성숙되는 삶이 씨알의 정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씨앗으로 설명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서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농부가 씨앗을 땅에 뿌렸는데 첫 번째 씨는 길가에 떨어져서 새가 먹어버렸고 두 번째 씨는 돌짝밭에 떨어져서 해가 뜨자 말라버렸고 세 번째 씨는 가시덤불에 떨어져서 조금 자라다가 가시에 막혀서 자라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세 번 실패하고 나서 네 번째 씨가 좋은 땅에 떨어져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에서는 일꾼들이 땅에 씨를 뿌렸는데 원수들이 가라지를 뿌려서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씨앗이 자라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스스로 자라는 씨의 비유에서는 씨앗이 땅에 떨어졌는데 사람이 일하지 않고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낮과 밤이 바뀌는 동안 땅이 일을 해서 씨앗이 열매를 맺게 되었다고 말씀하셨고,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서는 겨자씨는 아주 작지만 그것이 땅에 떨어지면 크게 자라서 공중의 새들이 그늘 아래서 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키가 큰 백향목이 아니라 겨자씨입니다. 백향목은 성전에 쓰일 정도로 키 큰 나무이지만 겨자씨는 다 자라면 1미터 정도 되어서 작은 덤불을 이룹니다. 하나님 나라는 혼자서만 크게 자라는 나무가 아니라 키는 작지만 함께 자라서 빽빽한 덤불을 이루어서 새들이 그늘 아래서 쉬고 알을 낳는 곳과 같습니다. 이 겨자씨가 바로 씨알입니다. 함께 자라면서 함께 서로를 붙들어주고 지켜주는 삶이 바로 씨알의 삶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이 땅에 떨어질 때 이 땅의 역사는 정의와 평화와 생명의 역사로 바꾸게 됩니다. 물론 그것이 쉽게 되지는 않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때로는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땅에 떨어졌지만 길가에 떨어지고 돌짝밭에 떨어지고 가시덤불에 떨어져서 열매를 맺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이 땅의 역사가 때로는 퇴보하기도 하고 거꾸로 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3번 실패했어도 네 번째 씨앗이 땅에 떨어졌을 때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남북한 정상회담이 4월에 있고 북미 정상회담이 5월에 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한두 달 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뉴스가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기시고, 또 나라를 위해서 피 흘린 선혈들의 피가 헛되지 않아서 이 땅을 살려주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좌절하고 실패하면서도 오늘 말씀처럼 낮이 바뀌고 밤이 바뀌는 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씨앗 스스로의 힘으로 조금씩 자라게 될 것입니다. 씨알에는 씨알 스스로의 힘이 있습니다. 고난과 좌절 가운데서도 역사를 바꾸고 미래를 개척하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씨앗을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둘째로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우리 마음 밭에 떨어질 때 우리 마음 밭은 변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우리 마음 밭에 떨어져서 열매를 맺어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 속이 알찬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헛된 유혹과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때때로 세상을 살다보면 내가 내 자신을 자책할 때가 있습니다. 왜 나는 이 정도밖에 되지 못할까, 왜 내가 이런 실수를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내 안의 속사람/씨알이 영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이 땅에 떨어져서 이 땅을 변화시키고,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내 마음 밭에 떨어져서 나의 속사람이 성장하고 내 마음이 하나님을 모시는 사람이 되도록 역사해 주옵소서, 기도하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Lent, seeds of the Kingdom of God

Mark 4:26 - 32


He also said, ‘The kingdom of God is as if someone would scatter seed on the ground, and would sleep and rise night and day, and the seed would sprout and grow, he does not know how. The earth produces of itself, first the stalk, then the head, then the full grain in the head. But when the grain is ripe, at once he goes in with his sickle, because the harvest has come.’ He also said, ‘With what can we compare the kingdom of God, or what parable will we use for it? It is like a mustard seed, which, when sown upon the ground, is the smallest of all the seeds on earth; yet when it is sown it grows up and becomes the greatest of all shrubs, and puts forth large branches, so that the birds of the air can make nests in its shade.’ (Mark 4:26 32)


Today's scripture states that when the seed of the kingdom of God falls on the earth, it will turn into a land of justice, peace, and life. Sometimes, the seed may fall on the roadside, or a rocky field, or a thorny bush. But Jesus confirms that even if it fails three times, the fourth seed would bear 30 times or 60 times the fruit when it falls to the ground. The kingdom of God may experience frustration and failure. But as the days and nights change, the seeds will gradually grow by the power of the seed itself without us knowing. The seed has the power to change history and pioneer the future in the midst of suffering and frustration. God gave the seed to us.


The seeds of the kingdom of God change not only the world but also our inner self. When the seeds fall into our heart, it helps us grow as the agents of God. Only then can we escape from vain temptations and desires. We sometimes find ourselves to blame us. "Why did I make this mistake?" We often regret our wrong attitude. Probably the reason would be because my inner self is not growing as much as expected. Let's pray that the seeds of the kingdom of God fall on this land so that they change the world, and the seeds fall on my heart so that they change my inner self. We are called to grow and work with the seeds of the Kingdom of God.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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