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세번째 주일 / 3월 첫번째 주일
3.1운동과 기독교 신앙
다니엘서 1:1 - 8
정해빈 목사




오늘은 3.1운동 99주년 기념예배/청년주일로 드리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기독교신앙과 3.1운동의 관계에 대해서, 청년신앙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기독교신앙이 무엇인지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이 3.1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919년 3월에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고 4월 달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만들어졌으니까 내년이면 3.1운동 100주년 및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이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인구의 1/10인 200만 명이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는데 7,500명이 사망했고 16,000명이 부상했으며 47,000명이 투옥되었습니다. 전국각처, 남녀노소, 각계각층이 참여했고 한국인이 있는 세계 모든 곳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종교인들과 학생들이 앞장섰는데 기독교 대표 16인, 천도교 대표 15인, 불교 대표 2인 총 33명의 대표들이 모여서 만세운동을 계획했습니다. 동학(천도교, 불교)과 서학(기독교)이 교리를 떠나서 한마음으로 함께 참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3.1운동은 비폭력독립운동이었습니다. 일제가 순순히 물러날 리가 없는데 비폭력운동이 무슨 효과가 있을까? 우리들도 미국처럼 독립선언을 하고나서 바로 독립전쟁을 했어야 하지 않느냐?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구한말 의병항쟁이 있었고 안중근 의사와 같은 의거도 있었고 만주에서 활동했던 독립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제는 한국을 점령하면서 한국인의 손에 있던 총포와 화약을 다 빼앗았기 때문에 한국인의 손에는 아무런 무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채택한 것이 독립만세운동이었습니다. 가장 평화적인 방법으로 우리가 독립국임을 대내외에 알리려고 노력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비폭력은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역사와 사회를 바꾸는 큰 위력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총칼은 사람을 짓밟을 수는 있어도 사람의 양심을 빼앗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 고등학교에서 총기사고가 일어나서 17명이 죽으니까 대통령이 교사들이 총을 휴대하게 하자고 말했습니다. 교사들이 허리에 총을 차고 수업을 하면 총기사고가 줄어들까요? 내 손에 총이 있으면 화가 나면 총을 쏘게 되어 있습니다. 이번 평창 올림픽에 온 미국 언론들이 한국이 세계에서 제일 위험한 줄로 알았는데 총도 없고 경찰도 없고 너무 안전해서 깜짝놀랐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경찰이 없는 것이 아니라 숨어 있겠지만 총기사고가 없는 것이 미국 언론들에게는 신기하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총으로 평화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20세기에 있었던 모든 종류의 비폭력운동이 1919년에 있었던 3.1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3.1운동을 통해서 비폭력운동의 힘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3.1운동을 시작으로 중국의 5.4운동, 인도 간디의 독립운동, 미국 마틴 루터 킹의 민권운동, 아랍의 민주화운동, 한국의 촛불시위가 일어났습니다.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고 수백 만 명이 평화적으로 참여하는 독립운동/민주화운동은 그래서 힘이 크고 결과가 큽니다.

둘째로 3.1운동을 대표했던 33인들이 과도하게 포장되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사실 그들은 거리에서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음식점에 모여서 독립선언을 하고 종로경찰서에 끌려갔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경찰서로 끌려간 것은 자신들의 생명의 위험을 각오하는 길이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경찰서로 끌려갔다는 소식이 세상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들 중 이광수, 최남선 같은 사람들은 일제 말기에 변절하고 전향을 했습니다. 그들이 왜 끝까지 마음을 지키지 못했는지 아쉽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들이 1919년 만세운동을 이끈 지도자들이었다는 것을 깎아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한두 사람이 변절했다고 해서 독립운동이라는 거대한 물줄기를 바꿀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3.1운동으로 독립을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3.1운동이 실패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당시 일제는 조선을 넘어 중국을 침략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사람들이 독립만세운동을 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럴 때 일어난 3.1운동은 조선 사람들이 독립을 원한다는 것을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지도자들이 중국 상해에 모여서 임시정부를 만들었고 그 임시정부는 나라의 국민이 직접 주인이 되는 민국으로 정했습니다. 3.1운동 자체가 각계각층, 남녀노소, 신분귀천을 막론하고 모두가 참여했기 때문에 나라의 이름을 민국으로 정하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1919년 3.1운동의 최대 성과는 “왕조나 제국이 아니라 국민이 주인되는 대한민국”이 탄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반도 5000년 역사에서 최초로 국민이 주인되는 민국이 100년 전에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민국의 뜻에 대해서 이런 연설을 했습니다. “과거에는 황제가 1인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2천만 국민이 다 황제입니다. 황제가 무엇입니까? 주권자의 이름이니 과거의 주권자는 한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여러분이 다 주권자입니다. 과거의 주권자가 한사람이었을 때는 국가의 흥망이 1인에 있었지만 지금은 국민 전체에게 있습니다.” 안창호 선생의 말씀을 빌리자면 3.1운동을 통해서 국민은 “황제”가 되었고 “정부 직원은 국민의 종”이 되는 천지개벽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군주인 국민은 국민의 종인 정부 직원을 선하게 인도하는 방법을 연구하여야 하고 국민의 종인 정부 직원은 군주인 국민을 섬기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고 말했습니다.

이제 3.1운동과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당시 기독교는 전체 인구의 1%인 20만에 불과했지만 3.1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두 개의 종이에 지도를 그려놓고 한쪽 지도에는 교회를 점으로 표시하고 또 다른 종이에는 3.1운동이 일어났던 지역을 점으로 표시한 다음에 두 종이를 겹치면 점들이 서로 일치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만큼 당시 기독교는 3.1운동에 앞장섰습니다. 3.1운동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메시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3.1 운동은 기독교인들이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당시 일본군은 경기도 제암리 교회 교인 30명을 교회당에 가두고 불을 질러서 모두를 숨지게 만들었고 이 사실을 스코필드 박사가 전세계에 알렸습니다.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신앙인들이 해야 할 당연한 의무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미국/캐나다로 이민와서 조국을 버리고 더 미국/캐나다 사람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제시대에도 더 일본 사람처럼 행동하는 조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형들의 미움을 받아서 이집트 제국으로 팔려간 요셉은 고향을 잊지 않고 흉년이 들었을 때 동포들을 먹여 살렸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나오는 다니엘은 나라가 망해서 어렸을 때 바벨론 제국에 끌려갔지만 조국을 잊지 않고 밤낮으로 기도했습니다. 3.1운동은 우리들에게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잊지 않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마지막으로 3.1운동은 우리들에게 폭력과 제국을 반대하며 평화를 위해서 일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기독교 신앙은 모든 종류의 폭력과 제국을 반대합니다. 여러분 제국이 무엇입니까? 다른 나라를 쳐들어가는 것이 제국입니다. 바벨론 제국은 유다를 침략한 다음에 다니엘 같은 청소년들을 끌고 가서 바벨론의 언어와 문학을 가르치고 바벨론 음식을 먹게 하고 왕을 모시도록 했습니다. 제국의 사상/종교를 가르치는 학문을 제국신학이라고 합니다. 제국은 그렇게 함으로서 식민지 청소년들을 제국의 신하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바벨론 음식을 멀리했습니다. 바벨론 음식을 멀리했다는 말은 단순히 음식을 안 먹었다는 말이 아니라 바벨론 제국의 종교/문화/정책을 따라가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영어 표현 중에 you are what you eat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서 내가 누구인지 결정된다는 표현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제국에 끌려갔지만 제국의 길을 따라가지 않고 정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시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우리 한인사회와 한인교회가 다니엘과 같은 의로운 청년들을 많이 후원하고 길러내야 하겠습니다. 요셉과 다니엘이 해외에서 살았지만 항상 조국을 위해 기도한 것처럼 우리 교회가 조국을 위해 기도하는 청년들을 많이 길러내야 하겠습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자가 되지 말고 섬기는 자가 되라는 주님 말씀을 기억하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고 제국신학을 멀리하며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3.1 Movement and Christian faith
Daniel 1:1 - 8

In the third year of the reign of King Jehoiakim of Judah, King Nebuchadnezzar of Babylon came to Jerusalem and besieged it. The Lord let King Jehoiakim of Judah fall into his power, as well as some of the vessels of the house of God. These he brought to the land of Shinar, and placed the vessels in the treasury of his gods. Then the king commanded his palace master Ashpenaz to bring some of the Israelites of the royal family and of the nobility, young men without physical defect and handsome, versed in every branch of wisdom, endowed with knowledge and insight, and competent to serve in the king’s palace; they were to be taught the literature and language of the Chaldeans. The king assigned them a daily portion of the royal rations of food and wine. They were to be educated for three years, so that at the end of that time they could be stationed in the king’s court. Among them were Daniel, Hananiah, Mishael, and Azariah, from the tribe of Judah. The palace master gave them other names: Daniel he called Belteshazzar, Hananiah he called Shadrach, Mishael he called Meshach, and Azariah he called Abednego. But Daniel resolved that he would not defile himself with the royal rations of food and wine; so he asked the palace master to allow him not to defile himself. (Daniel 1:1-8)

We are here today to commemorate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that took place on March 1st, 1919. This movement teaches that Christians should love and pray for their country. Although Daniel was taken to the Babylonian Empire when he was a child, he prayed day and night without forgetting his country. 3.1 Movement also teaches that we must work for peace and against violence and empire. Christian faith opposes all kinds of violence and empire. Although Daniel was dragged into the Empire, he did not follow “the theology of the empire” but served God of justice and mercy, who always remembers the suffering and saves them. We pray that our Korean community and church support young generation so that they live the life of Daniel.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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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두번째 주일 / 2월 네번째 주일
사순절, 형제증오와 유다의 회개
창세기 44:27 - 34
정해빈 목사



오늘 끝난 평창 겨울 올림픽에서 인상 깊었던 몇가지 장면이 있었습니다. 캐나다 하키 선수 출신인 세라 머리 (Sarah Murray)가 남북한해외 여자 하키 단일팀 감독을 맡았는데 나이도 젊은 사람이 어쩌면 저렇게 인상이 좋고 차분하고 침착하게 선수들을 잘 이끌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록 한 번도 이기지는 못했지만 모든 경기가 끝나고 나서 선수들을 격려하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보면서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다음에 여자 스피드 스케이트 팀추월 경기에서 한국 선수들이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 것을 보았습니다. 서로를 밀어주면서 3명이 같이 들어와야 하는데 2명은 일찍 들어오고 1명은 늦게 들어왔습니다. 같이 뛰는 3명도 마음이 맞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하나의 인상적인 장면은 한국 여자 컬링 팀이 은메달을 딴 사진입니다. 예전에 캐나다 시골에서 사는 분에게 캐나다는 겨울이 긴데 시골 사람들은 무엇하면서 지냅니까? 하고 물어보았더니 젊은이들은 하키를 하고 나이든 사람들은 컬링을 하면서 겨울을 보낸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캐나다처럼 컬링을 잘하는 나라들이 많지만 한국은 컬링을 시작한지 몇 년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한국 여자 컬링팀이 결증에 진출해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4명 선수 모두 경상북도 의성 출신으로 서로 자매이자 친구이자 고등학교 동기들입니다. 성도 모두가 김씨라서 해외에서는 Team Kim 이라고 부릅니다. 한동네에서 자매처럼 자라서 그런지 눈빛만 봐도 서로 잘 알기 때문에 호흡이 잘 맞아서 이런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이 서로를 의지하고 함께 일하면 좋은 결과를 내지만 가까운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면 너도 망하고 나도 망하고 다같이 망하게 됩니다.

우리들은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말씀을 통해서 형제사랑과 형제증오의 결과가 얼마나 큰 차이를 일으키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는 이야기도 나오고 형제들이 서로 미워하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어쩌면 형제들이 서로 미워하는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 피를 나눈 형제들이 서로를 미워할까요? 아마도 그것은 형제가 나와 가장 가깝고 많은 것을 공유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라면 내가 이렇게까지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서로 모르는 사람은 나와 상관없기 때문에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형제는 나를 잘 알고 같은 집안이고 부모의 사랑과 재산을 가지고 경쟁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가까운 형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서로 미워하기도 합니다. 창세기 4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그들 사이에서 가인과 아벨을 주셨는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좋아하시니까 가인이 화가 나서 동생 아벨을 죽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맨 처음 가족부터 형제살인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가인은 부모를 떠나 한평생 떠돌아다니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12장부터 시작되는 아브라함 가족 이야기를 보면 여기에서도 형제들이 서로를 미워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자식이 없던 아브라함은 나중에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았고 사라를 통해서 이삭을 낳았는데 어머니가 다른 이스마엘과 이삭은 누가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느냐는 문제를 가지고 경쟁하였고 마침내는 서로 갈라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뒤를 이어서 이삭이 족장이 되었고 이삭은 리브가를 통해서 쌍둥이 형제 에서와 야곱을 낳았는데 에서와 야곱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서로 경쟁하면서 세상에 나왔고 장자권을 누가 갖느냐 하는 문제 때문에 20년을 원수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에 나오는 형제간의 갈등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를 꼽으라면 야곱의 형제들이 겪었던 갈등 이야기를 꼽을 수 있습니다. 야곱은 여러 부인들 사이에서 12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가장 사랑하는 부인 라헬에게서 낳았던 열한번째 아들 요셉과 열두번째 아들 베냐민을 가장 사랑했습니다. 아버지가 요셉을 사랑하니까 형들이 질투가 나서 요셉을 이집트로 가는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고서는 아버지에게는 요셉이 짐승에게 물려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 일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을까요? 요셉을 편애한 아버지 야곱에게도 책임이 있고 배다른 동생을 상인에게 팔아넘긴 형들에게도 책임이 있고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니까 그것이 좋아서 맨날 좋은 옷 입고 형들이 나에게 절을 하는 꿈을 꾸었다고 말하는 요셉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어쨌든 야곱의 형제들은 요셉을 미워하였고 요셉은 그 결과로 이집트로 가서 노예생활과 감옥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꿈이 많은 사람이었고 총명하고 긍정적인 사람이어서 이집트의 왕 바로의 꿈을 잘 해석해서 이집트의 총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서 야곱의 아들들은 식량을 구하러 이집트로 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막내아들 베냐민은 집에 남겨두고 나머지 10명만 이집트로 보냈는데 요셉은 이집트에 온 형들을 알아보았지만 형들에게 자신을 알릴 수가 없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성공했기 때문에 형들에게 복수할 필요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화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형들이 옛날 자기를 팔아넘긴 것을 후회하고 있는지 아니면 여전히 옛날 그대로인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요셉은 자신과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동생 베냐민, 아버지 야곱이 요셉 다음으로 아끼고 사랑했던 막내아들 베냐민을 대상으로 형들을 시험했습니다. 형들이 배다른 동생 베냐민을 하찮게 여기면 형들은 옛날과 똑같다는 것을 가리키고 형들이 베냐민을 아끼면 형들이 과거 행동을 회개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요셉은 형들을 첩자로 몰아서 한명은 여기 남아있고 나머지 9명은 고향으로 가서 고향에 있는 베냐민을 이곳으로 데리고 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형들은 고향으로 가서 막내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이집트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요셉은 베냐민의 짐에다가 은잔을 몰래 집어넣고는 은잔이 없어졌다는 이유를 대서 형들의 짐을 다 조사하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베냐민의 짐에서 은잔이 나왔습니다. 요셉이 베냐민은 이집트의 종이 되고 나머지 형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자 유다가 요셉에게 이렇게 간청을 했습니다. “이 아이가 돌아오지 않으면 아버지는 곧바로 숨이 넘어가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저희들이 백발이 성성한 아버지를 돌아가시도록 만든 꼴이 되고 맙니다. 저는 아버지에게 그 아이를 안전하게 집으로 다시 데리고 오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저 아이 대신에 소인을 주인 어른의 종으로 삼아 여기 머물게 해주시고 저 아이는 형들과 함께 돌려보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 아이 없이 제가 어떻게 아버지의 얼굴을 뵙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의 아버지에게 닥칠 불행을 제가 차마 볼 수 없습니다.” 요셉은 넷째 형 유다가 베냐민 대신 자신이 이집트의 종으로 남겠다는 말을 듣고 형들이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요셉이라는 것을 밝히고 형들과 화해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유다가 회개하고 변한 것은 아버지가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자식을 편애했습니다. 모든 원인이 아버지의 편애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늙으신 아버지를 가장 먼저 걱정했습니다. 자식을 편애하는 아버지가 밉다고 해서 아버지가 사랑하는 요셉을 내버렸는데 이번에는 막내아들까지 내버리면 아버지가 더 이상 이 세상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유다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도 망하고 그런 아버지를 보는 자식들도 망하게 된다는 것을 유다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가까운 가족/형제끼리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고 복수하면 가족이 다 망한다는 것을 유다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서 네번째 아들 유다가 아브라함/이삭/야곱의 뒤를 이어서 믿음의 족장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가 믿음의 맏아들이 되었을까요? 왜 유다의 혈통에서 다윗이 나오고 그의 후손들인 유다 지파가 이스라엘의 정신적인 주인이 되었을까요? 서로 배다른 형제들을 품어주고 용서하고 회개하는 넓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유다는 믿음의 족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과거를 회개하고 아버지를 사랑하고 배다른 동생을 사랑하는 유다를 보시고 이스라엘 12지파의 운명을 그에게 맡기셨습니다. 형제를 품을 수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고 믿음의 족장/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순절을 맞이해서 우리들도 혹시 형제를 증오하고 미워하지는 않았는지 우리들 자신을 돌아보면서 유다와 같이 모든 가족들을 품어주는 큰 믿음의 조상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Lent, brotherly hatred and repentance of Judah
Genesis 44:27 - 34

Sir, our father then reminded us that his favorite wife had given birth to two sons. One of them was already missing and had not been seen for a long time. My father thinks the boy was torn to pieces by some wild animal, and he said, "I am an old man. If you take Benjamin from me, and something happens to him, I will die of a broken heart." That's why Benjamin must be with us when I go back to my father. He loves him so much that he will die if Benjamin doesn't come back with me. I promised my father that I would bring him safely home. If I don't, I told my father he could blame me the rest of my life. Sir, I am your slave. Please let me stay here in place of Benjamin and let him return home with his brothers. How can I face my father if Benjamin isn't with me? I couldn't bear to see my father in such sorrow. (Genesis 44:27-34)

The book of Genesis tells us that Judas and his brothers, who saw his father love Joseph more than them, were jealous and sold Joseph to slavery. But Judas later repented and protected Joseph's brother Benjamin. Although his father Jacob had always favored his children from old times, Judas tried to understand his old father and to reconcile the family. The scripture says that Judas, the fourth of Jacob's twelve sons, finally became the patriarch of the family after Abraham, Isaac, and Jacob. Why did Judas become the firstborn of faith? Why did David come out of the line of Judah and his tribe became the spiritual head of Israel? Judas could be the leader of his family because he had an open heart to embrace and forgive different brethren.

God entrusted Judah with the destiny of the twelve tribes of Israel, acknowledging the fact that he had repented of his past wrongdoings, cared for his old father, and protected his other brother. Today’s scripture reminds us that only those who welcome and embrace their siblings can become the agent and messenger of God. The season of Lent gives us an opportunity to look back and repent our past life. Just as Judas had worked for the reconciliation of his family, we are also called to work for the reconciliation with our family, neighbor, and nation.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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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첫번째 주일 / 2월 세번째 주일
사순절, 사랑의 능력을 주셨으니
요엘 2:12-14, 요한복음 15:9-14
정해빈 목사




지난 수요일부터 사순절 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부활절 40일 전 수요일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라고 부릅니다. 지난 수요일 토론토 대학 임마누엘 신학교에 가서 아시아신학센터가 주관하는 설날점심식사에 참석하고 오후에는 재의 수요일 채플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는 저녁에 교회당으로 와서 랜싱연합교회와 함께 재의 수요일 예배를 한 번 더 드렸습니다. 그런데 지난 수요일은 재의 수요일이면서 동시에 Valentine Day 였습니다. 재의 수요일과 발렌타인 데이가 같은 날에 있는 경우가 거의 희박한데 올해는 같은 날에 있게 되었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다운타운으로 내려가는데 젊은이들이 손을 잡고 꽃을 들고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식당마다 자리가 꽉 차고 꽃집과 초콜릿 가게는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일 년에 두 번 2월 발렌타인 데이와 10월 할로윈 데이 때 사탕과 초콜릿이 제일 많이 팔린다고 합니다. 이런 문화들이 자본주의 문화의 한 단면일 수 있습니다. 무언가 이런 이벤트가 있어야 장사가 잘 됩니다. 물론 이런 이벤트를 꼭 나쁘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연인끼리, 가족끼리, 친구들끼리 선물을 주고받으며 사랑을 고백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발렌타인 데이나 재의 수요일 모두 기독교 문화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로마 황제가 군인들이 군 복무 중에는 결혼하지 못하게 했는데 발렌타인이라는 신부가 황제의 명을 어기고 결혼하는 싶어하는 사람들을 결혼시켜 주어서 순교를 당했는데 여기서 발렌타인 데이가 시작되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 길거리를 걸어가다가 두가지 상반된 얼굴을 보았습니다. 한쪽에서는 젊은이들이 꽃과 선물을 들고 활짝 웃는 모습이 보였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이마에 재로 십자가를 표시하고 걸어가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발렌타인 데이는 인생의 가장 밝은 모습을 보여주고 재의 수요일은 인생의 가장 어두운 면을 보여줍니다. 우리들은 서로 사랑할 때 인생이 너무 아름답고 기쁘다는 것을 깨닫고 반대로 우리 몸이 재로 변하게 되는 것을 볼 때 인생이 허무하고 연약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들은 인생의 가장 밝은 모습과 가장 어두운 모습 그 중간 어딘가에서 지금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재의 수요일에서 부활절까지 40일간은 세례를 준비하는 기간이었고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고 금식하는 기간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고난은 부활과 함께 가장 중요한 메시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난이 기독교 신앙의 절반을 차지한다면 부활이 나머지 절반을 차지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기독교 신앙에서 고난을 빼버린다면 기독교 신앙은 반쪽짜리 신앙이 되고 말 것입니다. 고난을 회피하고 축복만 생각하는 신앙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물론 기독교는 고난을 찬미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고난과 아픔과 죄와 죽음은 극복되고 사라져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하나님 나라가 올 때까지 고난의 순례의 길을 걸어가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고난받으시고 죽으신 것처럼,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받고 영광도 받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사순절을 지내면서 죄 없으시고 의로우신 예수님이 왜 고난받으셨는지를 묵상하고 이 땅에서 억울하게 고난받는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사순절을 지내면서 인생에는 밝은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슬프고 어두운 면도 있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인들은 40일 동안 매일 성경을 읽고 구제와 봉사를 하고 유흥과 오락을 줄이며 경건한 생활을 했습니다. 우리들도 이런 전통을 따라서 40일 동안 매일 성경을 읽고 이웃을 위해 중보기도를 한다든지, 하루에 1달러씩 모아서 구제헌금을 하거나 봉사활동을 한다든지, 자녀들 컴퓨터 사용 시간을 1시간 줄인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경건의 시간을 보내면 사순절이 뜻 깊게 다가올 것입니다. 사순절은 우리들의 인생을 더 의미있고 진실하고 풍성하게 만들어 줍니다.


재의 수요일이 되면 이마에 재를 바르는 의식을 행합니다. 보통 재와 씨앗과 기름을 섞어서 만드는데 재는 우리 죄악을 가리키고 씨앗은 우리가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가리키고 기름은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름 바르셔서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셨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재의 수요일은 첫째로 우리들이 흙에서 왔으니 때가 되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가리켜 줍니다. 우리들이 흙에서 왔다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연을 가리켜서 어머니 자연(mother nature)라고 부르는데 우리들은 어머니 자연에서 왔기 때문에 때가 되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들은 재를 이마에 바르는 의식을 통해서 내가 자연에서 왔음을 깨달으며 겸손을 배우고 자연에게 감사하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기독교 영성 훈련 중에 “촉루관 체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촉루(髑髏)는 백골/해골을 뜻합니다. 옛날 수도사들은 장례를 치르지 않고 버려진 시신을 산으로 가져가서 시신의 살이 없어지고 뼈가 바람에 날리고 완전히 자연으로 스며들 때까지 6개월 혹은 1년 동안 지켜보면서 삶과 죽음을 묵상했습니다. 지금도 신학교에 가면 관 속에 들어가서 내가 죽었을 때를 묵상하는 훈련을 하게 합니다. 죽음을 소홀히 하면 삶을 소홀히 하게 되고 죽음을 소중하게 생각하면 삶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관 체험을 통해서 내가 때가 되면 흙이요 먼지로 돌아간다는 것을 깨닫고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동시에 나도 그리스도처럼 겉사람이 죽고 속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재를 이마에 바르는 의식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묵상하고 우리의 삶을 더 진실하게 살도록 인도해 줍니다.


둘째로 우리는 재를 이마에 바름으로서 우리의 죄악과 욕심과 탐욕을 회개합니다. 재를 뒤집어쓴다는 것은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엘서 말씀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지금이라도 너희는 진심으로 회개하여라. 금식하고 통곡하고 슬퍼하면서 나에게로 돌아오너라.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 요엘은 옛날 이스라엘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갈라져 있을 때 남유다의 선지자였는데 남유다의 왕 요아스가 우상을 숭배하고 부패하게 된 것을 보고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순절은 회개의 기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의롭고 진실하게 살지 않은 것과 이웃의 고통에 무관심한 것과 자연을 남용하고 오용한 것을 회개하는 기간입니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여성들 사이에서 “Me Too”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아시는 분은 아실 것입니다. 옛날에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 성추행을 당해도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당당하게 말하고 가해자에게 사과를 요구하겠다는 운동이 Me Too 운동입니다.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철저한 고백과 회개가 있어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너무 빨리 용서를 말하면 안 됩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으면 피해자가 용서할 때까지 가해자는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2018년 사순절에는 남자들이 많이 회개해야 될 것 같습니다. 일본 아베 총리가 한국에 와서 소녀상을 다 철거하라고 요구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독일은 일본과 같은 가해자이지만 전 세계에 있는 유대인 학살 기념관을 철거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피해자가 그만 해도 된다고 할 때까지 계속 사과를 합니다. 일본은 독일의 이런 자세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올림픽 잔치에 와서 일어나지도 않고 박수도 치지 않습니다. 지도자가 그런 행동을 하니까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지 않습니다. 재를 이마에 바른다는 것은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하나님과 이웃들 앞에서 한 잘못된 행동들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주 너희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너라. 주님께서는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며 오래 참으시며 한결같은 사랑을 늘 베푸시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많으셔서 뜻을 돌이켜 재앙을 거두기도 하신다.” 우리 주님께서는 진정으로 잘못을 고백하고 회개하는 사람을 용서하시고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재를 이마에 바른다는 것은 우리가 먼지임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질그릇 속에 사랑의 능력을 불어넣어주셨으니 남은 인생 사랑하며 살겠다는 고백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비록 흙에서 왔을 지라도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우리에게 사랑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친구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함께 아파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 인생이 아름답습니다. 사람은 가도 사랑은 남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의 몸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 사람이 남겨준 사랑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순절을 지내면서 주님 주신 사랑의 능력으로 우리 인생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Lent, the power of love

Joel 2:12-14, John 15:9-14


Yet even now, says the Lord, return to me with all your heart, with fasting, with weeping, and with mourning; rend your hearts and not your clothing. Return to the Lord, your God, for he is gracious and merciful, slow to anger, and abounding in steadfast love, and relents from punishing. Who knows whether he will not turn and relent, and leave a blessing behind him, a grain-offering and a drink-offering for the Lord, your God? (Joel 2:12-14)


As the Father has loved me, so I have loved you; abide in my love. If you keep my commandments, you will abide in my love, just as I have kept my Father’s commandments and abide in his love. I have said these things to you so that my joy may be in you, and that your joy may be complete. ‘This is my commandment, that you love one another as I have loved you. No one has greater love than this, to lay down one’s life for one’s friends. You are my friends if you do what I command you. (John 15:9–14)


Last Wednesday was Ash Wednesday. After the Epiphany, 40 days of Lent, began on Ash Wednesday. Ash Wednesday is the first day of Lent, which is six weeks of repentance before Easter. It drives its name from the placing of repentance ashes on the foreheads of participants to either the words "Repent, and believe in the Gospel" or the dictum "Remember that you are dust, and to dust you shall return." The ashes may be prepared by burning palm leaves from the previous year's Palm Sunday celebrations. Among Roman Catholics, Ash Wednesday is usually observed by fasting, repentance, or abstinence from particular foods. Ashes Wednesday first indicates that we have to return to the soil again because we have come from the nature. Second, we repent of our iniquities and greed by applying ashes on our foreheads. Third, it indicates that God loves us for the rest of our life since God has blessed us with the power of love even though we are dust. Although we came from the dust, we are called to live the life of love that God has given us. Although our bodies will return to the earth, the love that we left behind will not disappear. We are called to make our life more beautiful with the power of love that we have been given by God.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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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여섯번째 주일 / 2월 둘째 주일
주현절, 회개와 기쁜 소식2
마태복음 5:3-9, 9:14-15
정해빈 목사




요즘 한국 평창에서는 지난 금요일 개막된 2018 동계 올림픽이 열리고 있습니다. 1988년에 하계 올림픽, 2002년에 월드컵이 열렸는데 하계 올림픽이 열린지 30년 만에 동계 올림픽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지난 목요일 토론토총영사관과 민주평통토론토협의회와 조성준 장로님(주의원)이 주최하는 “올림픽기 게양식 및 선수단 응원식”이 온타리오 주 의사당에서 있었습니다. 개막식을 보다가 아리랑 노래가 울리면서 남북한 선수들이 공동 입장하는 장면을 보면서 가슴이 울컥하고 뜨거워졌습니다. 김연아 선수가 스케이팅을 타면서 성화 봉송하는 장면도 아름다웠습니다. 토론토 스타(Toronto Star) 신문을 보니까 평창 올림픽의 문제는 문제가 없는 것이 문제라고, 완벽한 개막식이었다고 쓴 글을 보았습니다. 올림픽 뉴스를 보다가 반가운 얼굴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캐나다 출신 여자 아이스하기 선수(캐롤라인 박, 박은정)가 지금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 팀에서 뛰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돌아가신 박재선 장로님의 손녀딸입니다. 토론토 서쪽 브램튼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아이스하키 선수로 활동을 했습니다. 미국 프린스턴 대학 아이스하키 선수로 전액 장학금을 받고 들어갔고 졸업 후에는 콜롬비아 의대에 들어가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한국에서 동계 올림픽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한국팀 선수로 뛰게 되었습니다. 제가 브램튼에서 교육목사할 때 캐롤라인을 가르쳤는데 한국 팀에서 뛰고 있는 모습이 너무도 자랑스럽습니다. 박재선 장로님이 저 장면을 보셨더라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스하키 경기는 5명씩 나와서 경기를 하는데 굉장히 힘들기 때문에 1분마다 선수를 교체한다고 합니다. 1조 5명이 1분간 뛰고 뒤로 빠지면 2조 5명이 나와서 1분간 뛰고 이어서 3조 5명이 1분간 뛰고 이어서 4조 5명이 1분간 뜁니다. 1조부터 4조까지 1분씩 뛰면 다시 1조가 경기에 투입됩니다. 1조부터 4조까지 5명씩 총 20명이 경기에 참가하는데 그중 한국 선수가 17명 북한 선수가 3명이라고 합니다. 한국 선수와 북한 선수와 캐나다 한인 선수가 한 팀이 되어서 같이 뛰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불과 한두 달 전만 해도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 아니냐는 염려가 가득했습니다. 하루하루 불안한 마음으로 고국 뉴스를 보았고 CNN 같은 방송국은 내일 전쟁이 일어날 것처럼 뉴스 속보를 보여주었습니다. 다행이 평창 올림픽을 계기로 남과 북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번 평창 올림픽이 평화 올림픽이 되어서 이번 올림픽을 계기로 남과 북이 만나고 북한과 미국이 만나서 하나씩 하나씩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를 기대합니다. 해외 한인 교회들도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교회는 갈등을 부추기는 곳이 아니라 평화와 화해와 용서를 위해서 일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도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말씀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를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믿는다고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 일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갈등과 싸움을 부추기는 사람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평화를 위해서 일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라고 불러 주실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8복 선언을 하시면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것이요, 슬퍼하는 사람은 위로를 받을 것이요, 온유한 사람은 땅을 차지할 것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배부를 것이요, 자비한 사람은 자비를 받을 것이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복과 전혀 다른 하나님 나라의 복을 선언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것이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그 말씀은 아마도 마음을 비우고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비움이라면 재물은 집착입니다. 비움과 집착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비움을 붙들면 집착을 내려놓아야 하고 집착을 붙들면 비움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나도 모르게 내가 무언가에 집착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명예나 권력이나 재물일 수도 있고 지식이나 도박이나 취미일 수도 있고 배우자나 자녀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무언가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것이 너무 좋고 재미있고 갖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집착하는 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 집착을 내려놓아야만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집착하지 않는 사람, 마음을 비운 사람, 마음이 맑고 깨끗한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첫번째 메시지로 “때가 찼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회개와 기쁜 소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가 필요한 사람은 회개하고 기쁜 소식이 필요한 사람은 기쁜 소식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을 때 누가 회개해야 하는지는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예수님은 8복 선언을 통해서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자비롭고, 마음이 깨끗하고, 평화를 위해 일하고,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슬퍼하는 사람들, 마음이 온유하고 자비로운 사람들은 들으십시오. 비록 세상은 여러분이 힘이 없다고 해서 무시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을 기억하십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오고 있으니 기뻐하십시오. 하나님 나라가 여러분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제일 먼저 찾으실 것입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사람들은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팔복을 행하는 사람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마태복음 9장을 보면 바리새인들과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예수님께 따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 당시 정통 유대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목요일 올라갔다가 월요일 내려왔다고 해서 목요일과 월요일 금식을 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내용이 아니라 자기들이 정한 규칙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을 자세히 보면 원래는 일 년에 한번 대속죄일에 금식하도록 되어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금식하는 날짜가 계속 추가되어서 예수님 당시에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는 것이 전통이 되었습니다. 다만 한가지 예외가 있었는데 결혼식을 하는 일주일 동안에는 금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왜 금식하지 않느냐고 따지는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서 하늘에서 신랑이 왔기 때문에 지금은 금식할 것이 아니라 잔치를 벌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금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잔치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금식하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먹이는 것이 하나님 나라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오고 있으니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랑의 식탁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금식이 아니라 잔치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건강을 위해서 금식/단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이웃과 함께 음식을 먹고 더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더 낫습니다. 우리들은 주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 때문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믿기 때문에 우리들은 고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세상을 부러워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지금 여기서 만들어 가면 우리들은 기뻐할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음식을 나누면 기쁨이 우리를 찾아옵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여러분의 것입니다. 지금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piphany, repentance and good news2
Matthew 5:3-9, 9:14-15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or they will be comforted. Blessed are the meek, for they will inherit the earth. Blessed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will be filled. Blessed are the merciful, for they will receive mercy.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will see God.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will be called children of God. (Matthew 5:3-9)


Then the disciples of John came to him, saying, ‘Why do we and the Pharisees fast often, but your disciples do not fast?’ And Jesus said to them, ‘The wedding-guests cannot mourn as long as the bridegroom is with them, can they? The days will come when the bridegroom is taken away from them, and then they will fast. (Matthew 9:14-15)


Jesus said, "Blessed are those who work for peace, and they will be children of God." When religious leaders protested, "Why do not your disciples fast?" Jesus said that since bridegroom came, now is the time to rejoice rather than fast. In God's kingdom, not a fast, but a feast will happen and everyone will be fed. In the kingdom of God, the poor will be blessed, those who mourn will be comforted, and those who work for peace will become children of God. We can rejoice here and now to hear the kingdom of God Jesus promised for us. Jesus blessed us by having showed how the kingdom of God permeated the world through the Beatitudes. We can rejoice here and now in the midst of affliction since we believe the realm of God. We are called to live out kingdom of God without envying the wrong world. Jesus taught us that the Kingdom of God would come down to us when we love each other and share open table with strangers. We are called to proclaim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of God.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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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다섯번째 주일 / 2월 첫째 주일
주현절, 회개와 기쁜 소식1
마가복음 1:14-15, 2:18-22
정해빈 목사





우리는 지난 1월 첫째 주일부터 세상의 빛으로 오신 주님을 묵상하는 주현절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때가 되었을 때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으시고 세례요한과 같이 활동하시다가 요한이 잡힌 뒤에 갈릴리로 오셔서 본격적으로 공생애, 하나님 나라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 1장 14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가장 먼저 선포하신 메시지가 나옵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은 3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둘째, 회개하여라, 셋째,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의 메시지를 다시 두가지로 요약하면 “회개와 기쁜 소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가 필요한 사람은 회개하고 복음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복음(福音)이란 복될 복자, 소리 음자, 기쁜 소식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 하나님의 정의가 바로서는 나라를 가리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그 나라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하는데 회개가 필요한 사람은 회개해야 하고 기쁜 소식이 필요한 사람은 기쁜 소식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회개해야 할 사람은 어떤 사람이고 기쁜 소식을 믿어야 할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첫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회개”란 단순히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과 태도를 바꾸는 것을 가리킵니다. “회개”를 헬라어로 메타노이아(metanoia)라고 부르는데 삶의 방향과 태도를 저쪽에서 이쪽으로 바꾸는 것을 가리킵니다. 잘못을 저질렀으면 회개해야 하는데 말로만 회개할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과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거짓과 불의와 죄악 가운데 살았다면 이제부터는 거짓과 불의와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 쪽으로 삶의 방향과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패하고 타락한 정치/경제/종교 지도자들이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부패하고 타락한 정치/경제/종교 지도자들 때문에 기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유대와 갈릴리를 지배한 로마제국과 헤롯 집안을 가리키고 경제 지도자들은 부유한 지주들을 가리키고 종교 지도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들과 사두개인 같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첫번째로 회개해야 할 사람들은 부패하고 타락한 정치 지도자들입니다. 정치 권력자들이 권력을 남용하고 자유를 억압하면 사람은 기쁨이 없는 억압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 갈릴리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왕이시라고 믿었고 모세와 엘리야가 물려준 정의롭고 평등한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약속의 땅을 주셨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외부인들이 자기들 땅을 차지하려는 것에 분노하였고 이에 저항했습니다. 유대인 역사를 보면 갈릴리 사람들이 로마제국과 헤롯에 저항해서 봉기를 일으켰던 예가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당시 갈릴리는 저항과 분노의 땅이 되었습니다. 독재자가 횡포를 부리면 국민들은 정서적인 불안과 억압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귀신 들린 사람들과 아픈 사람들이 많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패하고 타락한 권력자들을 향해서 회개하라고 외치셨고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최근에 청년들과 함께 “1987” 이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1987년에 있었던 일들을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전두환이라는 사람이 권력을 잡고 자기들끼리 모여서 실내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으려고 합니다. 대학생들이 이에 저항하다가 서울대생 박종철이 물고문으로 죽고 연세대생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죽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저도 대학생이었는데 영화를 보다가 그때 일이 다시 떠올라서 영화를 보다가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독재자가 권력을 잡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합니다.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붙잡아다가 고문하고 죽이고 감옥에 집어넣습니다. 권력자가 대통령 직을 이용해서 횡포를 부리고 돈을 뒤로 빼돌리고 자기 이익을 취하면 나라 살림은 거덜나고 나라의 질서는 무너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오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니 정직하게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번째로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 부유한 사람들을 향해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갈릴리에는 경제적인 불평등이 극심해서 땅이 있는 사람들은 과도한 세금을 바쳐야 했고 땅이 없는 사람들은 일용직 노동자가 되거나 여기저기 떠돌아다녀야만 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비유들을 자세히 보면 포도원 농장, 일꾼들에 대한 비유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포도원 농장, 일꾼들에 대한 비유들은 그 당시 갈릴리 사람들이 경제적인 불평등과 차별로 인해 얼마나 심하게 고통당하고 있었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누가복음 16장을 보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재지주를 대신해서 농장을 관리하는 청지기/중간관리자(옛날에는 그런 사람을 “마름”이라고 불렀습니다)가 있었는데 주인의 재산을 뒤로 빼돌리다가 적발이 되어서 주인으로부터 해고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앞으로 살 길이 막막합니다.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주인에게는 해고당했고 소작인들에게는 인심을 잃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소작인들, 빚진 자들의 인심을 얻어야만 앞으로 살 길이 열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빚진 자들을 불러서 빚을 절반으로 줄인다는 증서를 써 주었습니다. 이 사람이 주인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문서를 위조해서 빚을 절반으로 줄이도록 잔꾀를 부렸을 수도 있고 주인에게 쫓겨나기 전에 회개하는 심정으로 마지막으로 농사꾼들에게 호의를 베푼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부재지주들과 지주 밑에서 일하는 나쁜 중간 관리자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백성들을 돌보지 않고 부를 축적하는 자들을 향해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번째로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치/경제 권력자들이 악을 행하면 종교 지도자들만큼이라도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야 하는데 종교 지도자들도 부패하고 타락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잘못된 정치와 경제가 사람을 힘들게 하지만 때로는 잘못된 종교가 사람을 더 힘들게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강요하였고 성전에 세금을 바치라고 강요하였고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말씀처럼 왜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주님께 따졌습니다. 몸이 아픈 사람들을 향해서는 몸이 아픈 것은 당신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종교는 강요하고 정죄하고 증오하는 곳이 아니라 사랑하고 용서하고 기뻐하는 곳이 되어야 하는데 예수님 당시 종교는 백성들을 위로하고 기쁨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삶을 더 무겁고 힘들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지 않고 백성들을 억압하고 짓누르는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오고 있으니 회개하고 삶의 방향과 태도를 바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회개와 기쁜 소식을 동시에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가 필요한 사람은 회개하고 기쁨이 필요한 사람은 기쁜 소식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회개만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기쁨도 선포하셨습니다. 세상이 부패하고 타락했다고 해서, 세상 살기가 어렵고 힘들다고 해서 우리가 슬퍼하면서 살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오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닮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닮으면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나누고 돌보면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왜 기뻐해야 하는지는 다음 주일에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오면 하나님의 정의가 바로 서게 될 것입니다. 주의 날이 가까이 왔음을 깨닫고 잘못된 삶의 태도와 방향을 바꾸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piphany, repentance and good news1
Mark 1:14-15, 2:18-22


Now after John was arrested, Jesus came to Galilee, proclaiming the good news of God, and saying, ‘The time is fulfilled, and the kingdom of God has come near; repent, and believe in the good news.’ (Mark 1:14 – 15)


According to the Gospels of Mark, Jesus was baptized by John the Baptist in the Jordan River and when John was arrested, he came to Galilee and began his public ministry for the Kingdom of God. In Mark 1:14, which we read today, Jesus proclaimed. “The time has come. The kingdom of God is near. Repent. Believe in the Gospel.” If we summarize Jesus' message in two ways, it would be "repentance and good news." Since the time at which God rules over the world with justice comes near, Jesus said, those who need repentance should repent and those who need good news hear that news. Then who did Jesus urge to repent and to hear good news?


Jesus strongly demanded the fallen political, economic, and religious leaders to repent, for the kingdom of God is near. When God's kingdom comes, Jesus declared, God will rule the world with justice. Jesus was grieved that people could not rejoice because of their corruption and injustice. Here political leaders refer to the Roman empire and Herod's family who ruled Judea and Galilee, economic leaders refer to wealthy landowners, and religious leaders refer to the high priests and Sadducees of the temple in Jerusalem. "Repentance" refers not simply to confessing wrong, but to changing the direction and attitude of life. Repentance is called “metanoia” in Greek, which means changing the direction and attitude of life from here on out.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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