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네번째 주일 / 12월 네번째 주일
성탄절, 큰 기쁨의 소식
누가복음 2:8 – 19
정해빈 목사




“그 지역에서 목자들이 밤에 들에서 지내며 그들의 양 떼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주님의 한 천사가 그들에게 나타나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여 준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들에서 양을 치며 밤에도 들에서 잠을 자야하는 가난한 목자들에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전하여 주었습니다. 성탄절은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에게 주는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성탄절이 있기 때문에 우리 인생에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다. 성탄절이 없었더라면 우리 인생은 메마르고 외로운 인생이 되었을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들은 세상을 살면서 메마르고 외로운 인생을 경험합니다. 몸은 아프고 날씨는 춥고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생이 힘들고 고통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정신의학 및 신경학과 교수인 아담 캐플린 박사는 우울증에 걸린 사람에게 함부로 위로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힘내, 네가 감정을 다스려야지, 가족을 생각해, 긍정적으로 생각해, 어떤 심정인지 알아, 너보다 더 안 좋은 상황에 있는 사람도 있어” 스스로 헤어나올 수 없는 상태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이런 말들이 아무런 도움이 안 되고 그냥 함께 있어 주고 상대가 겪는 어려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이 차라리 더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을 했습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힘들고 고통스럽고 메마르고 외로운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이 참으로 힘들고 외롭지만 우리가 그것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탄의 기쁜 소식이 있기 때문에 우리 인생에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곳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치료해 주시고 우리를 깨우쳐 주시고 우리를 일으켜 주시기 때문에 우리 인생에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다. 진실로 우리는 홀로가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큰 기쁨이 될 소식을 전하여 준다고 했는데, 여기 나오는 큰 기쁜 소식은 헬라어로 유앙겔리론을 가리키는데, 전쟁에 나간 로마 황제가 전쟁을 이겼을 때, 전령이 와서 전해주는 소식을 가리킵니다. 전령이 며칠 동안 말을 타고 로마 시내로 와서 큰 소리로 외칩니다. “로마 시민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우리 황제가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로마에서는 전쟁에서 이겼다는 소식이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이겨야 물자들을 약탈하고 노예들을 끌고 올 수 있습니다. 또 오늘 말씀에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다고 했는데, 여기 나오는 구세주는, Saviour, 세상을 구한 주인, 로마 황제를 가리킵니다. 로마 황제가 로마의 내전을 물리치고 전쟁을 종식시켰습니다. 그래서 로마 사람들이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가리켜서 구세주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전쟁에서 이긴 소식이 기쁜 소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굿간에서 태어났다는 소식이 기쁜 소식이고, 로마 황제가 구세주가 아니라 평화의 왕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이 구세주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낮고 천한 우리를 찾아오신 사건이 기쁜 소식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전하여 줍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십니다.” 진실로 성탄절은 기쁨의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아기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 인생은 힘들고 외로운 인생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셨기 때문에 우리 인생에 기쁨이 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웃을 일이 없지만 성탄절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웃을 수 있습니다. 주의 천사가 들에서 잠자는 가난하고 외로운 목자들에게 나타나서 주님의 탄생을 알려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들판에서 잠을 자는 가난한 목자들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힘들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셔서 그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을  일으켜 주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외롭지 않습니다. 진실로 우리는 홀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화와 기쁨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뻐하고 또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Merry Christmas! 아멘.  

Christmas, good news of great joy
Luke 2:8 – 19

That night in the fields near Bethlehem some shepherds were guarding their sheep. All at once an angel came down to them from the Lord and the brightness of the Lord's glory flashed around them. The shepherds were frightened. But the angel said, "Don't be afraid! I have good news for you which will make everyone happy. This very day in King David's hometown a Savior was born for you. He is Christ the Lord. You will know who he is, because you will find him dressed in baby clothes and lying on a bed of hay." Suddenly many other angels came down from heaven and joined in praising God. They said: "Praise God in heaven! Peace on earth to everyone who pleases God." (Luke 2:8 – 14)

After the angels had left and gone back to heaven, the shepherds said to each other, "Let's go to Bethlehem and see what the Lord has told us about." They hurried off and found Mary and Joseph, and they saw the baby lying on a bed of hay. When the shepherds saw Jesus, they told his parents what the angel had said about him. Everyone listened and was surprised. But Mary kept thinking about all this and wondering what it meant. As the shepherds returned to their sheep, they were praising God and saying wonderful things about him. Everything they had seen and heard was just as the angel had said. (Luke 2:15 – 20)

“Don't be afraid! I have good news for you, which will make everyone happy. This very day a Savior was born for you. He is Christ the Lord.” If there had been no Christmas, our lives would have been pointless and lonely. If there were no Christmas, there would be no joy in our lives. Because of Christmas, we can be happy and laugh. Even though our life is rough and difficult, we can rejoice because of Christmas. The angel appeared to the poor and lonely shepherds who slept in the fields and showed them the birth of the Lord. Truly we are not alone. God is with us. The Word made flesh. God has brought us peace and joy. Let us rejoice and be glad. God is with us. Glory in heaven and peace on earth!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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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세번째 주일 / 12월 세번째 주일

성탄주일,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

이사야 61:1-2, 8-11

정해빈 목사




마태복음 1장을 보면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이런 식으로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의 긴 족보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옛날 족보는 주로 부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남성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대개 집집마다 족보가 있는데 그 족보를 보면 어머니나 딸들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고 남성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식을 낳은 것은 여성인데 여성의 이름은 없고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장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대부분 남성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자세히 보면 특이하게도 5명의 여성 이름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도님들, 예수님의 족보에 왜 다섯 명의 여성들이 등장하는지, 다섯 여성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다말입니다. 다말은 야곱의 아들 유다의 며느리인데 남편도 잃고 자녀도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남편도 없고 자녀도 없는 여자는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했습니다. 옛날에는 남편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자식을 낳는 제도가 있었는데 남편의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시아버지 유다가 며느리 다말을 부정하다고 친정으로 쫓아버리게 되었습니다. 다말은 시댁과 친정 사이에서 오갈 곳이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다말은 시아버지를 유인해서 자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다말은 그렇게 해서라도 끈질기게 생명을 유지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그런 비참한 상황에 처하면 내가 이런 세상 살아서 무엇하나 하고 목숨을 끊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말은 그런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굳굳하게 생명을 이어갔습니다. 그 억척스러운 다말을 통해서 예수님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두번째 여인은 기생 라합입니다. 라합은 기생이라는 이름이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그런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옛날에는 여인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여리고 성에 들어온 히브리 정탐꾼을 숨겨주었고 결국 그 일이 인연이 되어서 히브리 사람과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라합은 이집트에서 탈출한 히브리 백성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꿈을 같이 꾸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꿈꾸었고 그 꿈을 위해서 함께 노력했습니다. 그런 꿈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라합은 보아스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고 장차 오실 예수님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 여인은 라합의 아들 보아스와 결혼한 외국 며느리 모압 여인 룻입니다. 룻은 히브리 사람과 결혼했다가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 나오미와 단 둘이 남게 되었습니다. 룻은 친정으로 돌아가지 않고 나오미를 모시고 나오미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와서 시어머니를 모셨습니다. 라합의 아들 보아스는 들판에서 이삭을 주우면서 시어머니를 모시는 착한 룻을 눈여겨보았고 그를 부인 삼았습니다. 네번째 여인은 우리아의 아내입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충성한 우리야 장군을 죽이고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았습니다. 우리야의 아내 입장에서는 참으로 힘들고 억울한 일이었습니다. 남편을 죽인 사람의 아내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고통을 기억하시고 그의 마음을 위로해 주셨습니다. 마지막 다섯번째 여인은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입니다. 옛날에는 15살 정도가 되면 시집을 갔기 때문에 마리아도 역시 어린 나이에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아마도 갈릴리 나사렛에서 사는 가난한 소녀 중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성령으로 아기를 잉태한다는 것은 어린 소녀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을 만난 뒤에 주님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마음이 내 구주 하나님을 좋아함은 그가 이 여종의 비천함을 보살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다섯 명의 여인들에게는 몇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불행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말은 남편과 자녀가 없어서 친정으로 쫓겨난 사람이었고, 기생 라합은 여리고 성에서 사는 가장 비천한 사람이었고, 룻은 시어머니를 모시는 외국 며느리였습니다. 우리야의 아내는 남편을 빼앗긴 사람이었고, 마리야는 갈릴리 나사렛의 가난한 소녀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굳굳하게 생명을 이어갔습니다. 그들이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굳굳하게 살아남았기 때문에 그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탄생할 수가 있었습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 여성 세례와 관련하여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895년 전삼덕 이라는 여성이 서울정동감리교회에서 한국기독교 역사 최초로 여성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남녀가 유별하다고 해서 흰 천에 구멍을 뚫고 전삼덕이 머리를 구멍위로 내밀면 서양 선교사가 그 머리 위에 물을 떨어뜨려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897년 12월 31일 정동감리교회에서 여성을 남성과 똑같이 교육하는 것이 옳으냐 하는 주제를 가지고 토론회가 열렸습니다. 미국 유학을 갖다 온 서재필이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자 역시 미국 유학을 갖다 왔지만 보수적인 윤치호는 이를 반대했습니다. 한 남성 교인이 “하와가 타락해서 인류에 죄가 생겼으니까 여성 교육은 타락을 조장할 것” 이라고 주장하자 2년 전에 여성 최초로 세례를 받았던 전삼덕은 “하와만 보지 말고 마리아도 보시오. 마리아가 없었으면 어찌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겠소”하고 외쳤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병자호란 때 많은 사람들이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돌아왔는데 몸을 더럽혔다고 고향에서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임금이 서울 냇가에 가서 씻으면 깨끗하게 되었다고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임금 홍자를 써서 그 냇가를 홍제천으로 부르게 되었고 임금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사는 동네라고 해서 홍은동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어린 소녀들이 성노예로 끌려가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 수모를 당하면서도 우리 할머니들이 굳굳하게 인생을 이어갔기 때문에 그들을 통해서 우리들이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서 말씀처럼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삶이 괴롭고 힘들어도 굳굳하게 견뎌야 합니다. 억울하고 힘든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사람이 참된 신앙인입니다. 만약 다섯 여인들이 내가 이런 세상 살아서 무엇하나 이렇게 생각했더라면 예수님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고통받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에도 우리들을 찾아오셔서 우리들에게 자유와 기쁨을 주십니다. “이 땅의 다말, 라합, 룻, 이름없는 우리야의 아내, 마리아들이여 힘을 내십시오. 구세주께서 여러분을 통해서 이 땅에 태어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찾아오셔서 여러분을 위로하시고 여러분을 통해서 새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메시지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주기 위해 주님은 오늘날에도 우리들을 찾아오십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고통 중에도 소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을 통해서 새 역사를 이루시는 분인 줄로 믿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우리들을 찾아오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위로와 용기를 얻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Christmas Sunday, good news to the oppressed

Isaiah 61:1-2, 8-11


The Spirit of the LORD God has taken control of me! The LORD has chosen and sent me to tell the oppressed the good news, to heal the brokenhearted, and to announce freedom for prisoners and captives. This is the year when the LORD God will show kindness to us and punish our enemies. The LORD has sent me to comfort those who mourn, especially in Jerusalem. He sent me to give them flowers in place of their sorrow, olive oil in place of tears, and joyous praise in place of broken hearts. They will be called "Trees of Justice," planted by the LORD to honor his name. (Isaiah 61:1-3)


I, the LORD, love justice! But I hate robbery and injustice. My people, I solemnly promise to reward you with an eternal agreement. Your descendants will be known in every nation. All who see them will realize that they have been blessed, by me, the LORD. I celebrate and shout because of my LORD God. His saving power and justice are the very clothes I wear. They are more beautiful than the jewelry worn by a bride or a groom. The LORD will bring about justice and praise in every nation on earth, like flowers blooming in a garden. (Isaiah 61:8-11)


The five women who became the ancestors of Jesus in Matthew 1 have a few things in common. They were all oppressed and alienated. Tamar was the one who was driven out of her family because she had no husband and no children, Rahab was the lowest woman in Jericho, Ruth was the foreign daughter-in-law who took care of her mother-in-law, Uriah's wife was the one who was deprived of her husband, and Mary was a poor girl in Galilee Nazareth. However, they did not give up their life even in a difficult environment. Jesus could have been born through them because they survived so hard in such a difficult environment.


We are waiting for the Christ, Messiah who will bring good news to the oppressed, bind up the broken-hearted, proclaim liberty to the captives, and release to the prisoners. We are waiting for the Messiah who will clothe me with the garments of salvation and cover me with the robe of righteousness, We are waiting for the Christ who will hear our outcry, comfort our suffering, and do wonderful things with us.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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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첫번째 주일 / 12월 첫번째 주일
우리는 다 주님의 백성입니다
이사야서 64:5 - 9
정해빈 목사



최근 한국에서 상영된 기독교 영화 중에 일제 시대 한국에 온 간호선교사의 삶을 다룬 [서서평] 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한국 이름은 서서평(徐舒平․), 본래 이름은 엘리자베스 요한나 세핑(Elsabeth Johanna Shepping, 1880-1934)인 그는 1880년 독일에서 태어나 9세에 미국으로 이민가서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의 간호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1912년 32세 나이에 조선 땅에 들어와서 1934년 54세로 소천할 때까지 22년 동안 일제강점기 시절 의료혜택을 받지 못했던 군산, 전주, 광주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환자들을 돌보았고 전주한일장신대, 대한간호협회, 여전도연합회를 세웠습니다. 보통 선교사 하면 메켄지, 언더우드, 아펜젤러 같은 남성 목회자나 알렌, 에비슨 같은 남성 의사들을 생각하기가 쉬운데 서서평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으로서, 의사가 아니라 간호사로서 조선 땅에 와서 환자들과 일생을 같이 했습니다. 그는 독일에서 미혼모에게서 태어났고 태어날 때 어머니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청소년 시절에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변화받아서 간호선교사를 자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미혼모로부터 버림받았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처럼 버림받은 고아와 과부들의 아픔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수치스러운 상처를 신앙으로 승화시켜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으로 돌보았습니다. 당시 자료를 보면 그는 한센병에 걸린 고아 14명을 자녀로 삼았고 오갈 데 없는 과부 38명과 한 집에 살면서 이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는 “조선이라는 나라에 간호사가 부족하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 선교를 지망하였습니다. 인도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본 마더 테레사 수녀가 노벨 평화상을 받았는데 이미 100년 전 한국 땅에는 조선의 마더 테레사라고 부를만한 서서평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의 책상에는 "성공이 아니라 섬김"(Not Success But Service)이라는 좌우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간호사'라고 부르지 않고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내어주고 정작 자신은 영양실조로 풍토병에 걸려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녀의 장례식은 광주 최초의 시민장으로 치러졌고 약 천명이 참석했는데 많은 한센병 환자들과 거지들이 그를 향해서 "어머니"라고 부르면서 울었다고 합니다.


서서평 선교사님의 이야기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잘 보여줍니다. 대림절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계절입니다. 평화의 왕으로 태어나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고 동시에 마지막 때에 이 땅에 오셔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완성하시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요한계시록이 고백한 것처럼,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새하늘과 새땅을 이루시고 창조세계를 회복하시고 완성하실 것을 우리들은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림절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낮고 천한 곳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을 기다리고 준비하고 환영하는 기간입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하나님과 사람은 서로 만날 수도 없고 가까이 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사람은 땅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지만 우리는 거룩하지 않기 때문에 거룩하지 않은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보면 거룩하지 않은 사람이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면 죽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땅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려면 간접적으로 기도를 해서 기도가 하늘로 올라가거나 동물을 불태우는 제사를 드려서 제사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든가 해야 합니다. 땅에 있는 사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방법은 하나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땅으로 내려오셔야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과 아픔과 질병과 탄식을 들으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아기 예수님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높은 하늘에서 낮고 비천한 땅으로 내려오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묵상하고 환영하고 감사드리는 절기가 대림절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서 64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모두 부정한 자와 같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나뭇잎처럼 시들었으니 우리의 죄악이 바람처럼 우리를 휘몰아 갑니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님은 우리를 빚으신 토기장이이십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이 손수 지으신 피조물입니다. 주님, 진노를 거두어 주십시오. 우리의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 보십시오. 우리는 다 주님의 백성입니다.” 저 옛날 히브리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을 때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다시 구원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부정한 자와 같고 더러운 옷과 같으며 나뭇잎처럼 시들었으며 우리의 죄악이 바람처럼 우리를 휘몰아 간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사야는 9절에서 “우리는 다 주님의 백성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비록 우리가 부정하다할지라도 주님께서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를 버리지 마시고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고 준비하는 기간이 대림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다 주님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비록 주님 보시기에 내 인생이 부끄럽고 보잘 것 없다 하더라도, 비록 우리들이 부서지고 깨지고 시들었을지라도, 비록 우리들이 범죄했을지라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우리를 찾아와 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기 때문에 우리 인생이 희망이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비참한 인생을 살았다하더라도 주님께서 나를 찾아오시면 내 인생이 밝게 빛날 것입니다. 서서평 선교사님이 고아와 나그네와 병자들을 찾아와서 그들을 치료해 주었던 것처럼, 주님께서는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들을 치료해주시고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위로와 소망을 얻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All of us are your people

Isaiah 64:5 – 9


Rip the heavens apart! Come down, LORD; make the mountains tremble. Be a spark that starts a fire causing water to boil. Then your enemies will know who you are; all nations will tremble because you are nearby. Your fearsome deeds have completely amazed us; even the mountains shake when you come down. You are the only God ever seen or heard of who works miracles for his followers. You help all who gladly obey and do what you want, but sin makes you angry. Only by your help can we ever be saved. (Isaiah 64:1 – 5)


We are unfit to worship you; each of our good deeds is merely a filthy rag. We dry up like leaves; our sins are storm winds sweeping us away. No one worships in your name or remains faithful. You have turned your back on us and let our sins melt us away. You, LORD, are our Father. We are nothing but clay, but you are the potter who molded us. Don't be so furious or keep our sins in your thoughts forever! Remember that all of us are your people. (Isaiah 64:6 – 9)


When the ancient Hebrew people were taken captive to Babel, the prophet Isaiah prayed to God to save his people again. He said, “we are all like unclean garments, wilted like leaves, and our sins confessed to us as the wind. Because we sinned, crushed, broken, and wilted, our strength alone could not save us.” He confessed in verse 9 that "we are all God’s people." Indeed, we are all God’s people. We are not forsaken. Even though our lives are shameful and insignificant in the eyes of the Lord, and we are broken and wilted, God will not abandon us but will come to us. Our life is hopeful because God comes to us. No matter how hard and miserable we may have lived, God comes down to be with us and to save us. Meditating on the season of Advent, we await the Lord coming down to us from heaven.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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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열세번째 주일 / 11월 네번째 주일
말씀을 듣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야보고서 1:1-4, 요한계시록 1:1-3 
정해빈 목사




한 달 전에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서 “오직 말씀”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했습니다. 개신교 신앙은 성경번역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개신교인은 말씀을 직접 읽고 공부하고 질문하는 신앙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교회의 전통이나 의식이나 교황의 말이 우리 신앙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신앙의 전통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말씀을 붙잡고 씨름하고 공부하는 사람이 개신교인입니다. 말씀을 읽을 때는 성령의 도움도 받아야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성의 도움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성령의 도움과 이성의 도움을 받아서 말씀을 읽고 해석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맹목적인 신앙인이 아니라 성숙한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함석헌 선생님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묵상하고 생각하고 질문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신앙이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라 성숙한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성경을 읽고 필사하면서 말씀을 묵상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지난 번 설교에 이어서 성경을 읽을 때 생각해야 할 점 두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성경을 읽을 때는 그 시대의 상황을 염두해 두고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어떤 성서학자는 성경은 10%의 불순물과 90%의 보석으로 되어 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성경은 참으로 귀한 생명의 말씀이지만 성경 전체가 그런 것은 아니고 성경에는 불순물도 들어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을 통독하다 보면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 성경의 세 번째 책인 레위기에 옛날 제사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레위기를 지나서 민수기-신명기-여호수아, 성경의 여섯번째 책인 여호수아를 읽으면 히브리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원주민들을 죽이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학자들은 히브리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산악지대에 터를 잡았다고 추측합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서는 과장을 해서 히브리 백성들이 가나안 원주민들을 다 죽이고 그 땅을 차지한 것처럼 설명했습니다. 이런 말씀을 읽을 때는 여호수아서가 이스라엘 민족주의 관점에서 쓰여졌다는 것을 알고 읽어야 합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여호수아서와 같은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유럽 개척자들이 북미에 도착해서 원주민들을 다 죽였는데, 그들은 여호수아서를 읽으면서 여호수아가 가나안 원주민들을 다 죽인 것처럼 자신들도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다 죽여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때로는 성경 말씀이 인류 역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했습니다.


한두 가지 예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구약성경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를 읽으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히브리 백성들이 페르시아 제국이 들어서고 난 후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와서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면서 이스라엘을 다시 일으키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보니 고향에 사는 유대인 남자들이 다른 나라 부인들하고 결혼해서 살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칙령을 발표해서 민족을 다시 일으키려면 피가 섞이면 안 되니까 유대인 남편들에게 이방 부인들과 헤어지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강제로 가족을 해체시키고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을 쫓아내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다른 민족 사람과 결혼했다면 그 사람을 나의 가족으로 여기면서 함께 살아야 합니다. 이런 말씀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려고 하면 우리들도 배타주의/국수주의/민족우월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한가지 더 예를 들면, 요한복음에는 정통 유대인들을 저주하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유대인들을 가리켜서 “너희들은 악마의 자식이라” 고 표현을 했습니다. 당시 요한교회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유대회당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정통 유대인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예수님도 유대인이고 제자들도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이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니라 부패하고 타락한 정치/종교 권력자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요한복음의 이런 말씀들이 인종차별/반유대주의의 근거가 되어서 히틀러 같은 사람은 유대인들을 수백만 명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성경에는 잘못 읽으면 인류에 큰 해를 끼치는 책들이 여러 권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는 반드시 상황과 배경을 알고서 읽어야 하고 그 말씀을 적용할 때는 그 말씀을 오늘날에 적용해도 되는지 깊이 생각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 중에는 그 말씀을 오늘날 그대로 적용해도 되는 것이 있고 적용하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를 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생각해야 두 번째 사실은 말씀을 귀로 듣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계시록을 보면 “말씀을 읽는 사람과 듣는 사람과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말씀을 크게 읽는 사람과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크게 읽는 사람은 한 사람이고 말씀을 듣는 사람은 여러 사람입니다. 2000년 전에는 성경책도 귀했고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도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로마제국의 핍박을 받고 있는 초대교회 교인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요한계시록을 썼습니다. 초대 교회는 요한계시록을 예배 시간에 읽었는데 글을 읽을 줄 아는 교인이 앞으로 나와서 큰 목소리로 낭독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교인이 100이라면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1명에 불과했습니다. 1명이 나와서 큰 목소리로 낭독하면 99명은 그 말씀을 귀로 들었습니다. 옛날 초대 교회 성도님들은 말씀을 귀로 들었습니다. 말씀을 귀로 들으면 그 말씀이 귀를 거쳐서 가슴으로 와서 우리의 가슴을 울리게 됩니다. 옛날 성도님들은 귀로 말씀을 들으면서 큰 위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자세히 보면 성경 말씀이 듣기 어려운 내용이 아니라 한 사람이 읽고 나머지 사람들이 귀로 듣기에 좋도록 쓰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 초대 교회 성도님들은 우리 옛날 어른들이 판소리를 듣는 것처럼 그렇게 말씀을 들었습니다. 소리꾼이 나와서 심청전 이야기를 판소리로 들려줍니다. 심청이가 공양미 300석을 부처님께 바치면 아버지의 눈을 뜰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뱃사람들에게서 300석을 사는 대신 항해의 안전을 위해 자신을 제물로 바치기로 결정을 합니다. 그래서 인당수(印塘水)에서 물에 빠졌는데 심청의 효성에 감동한 용왕이 심청을 연꽃에 태워 다시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그때 마침 이곳을 지나던 뱃사람들이 연꽃을 임금님께 바쳤는데 연꽃에서 나온 심청은 왕과 혼인했습니다. 소리꾼이 나와서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지는 장면을 판소리로 들려주면 청중들은 그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로 들으면서, “아이고 불쌍해서 어쩌나” 이렇게 탄식을 하면서 그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옛날 초대 교회 성도님들도 이와 같았습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큰 목소리로 성경 말씀을 읽으면 나머지 성도님들은 그 말씀을 귀로 읽으면서 그 말씀에 은혜받고 위로받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우리들이 성경을 눈으로 읽지만 귀로 듣는 것이 여전히 중요합니다. 성경을 눈으로 읽어도 은혜가 되지만 귀로 들으면 더 은혜가 됩니다. 성경봉독하시는 분들이 성경을 큰 목소리로 천천히 읽으면 성도님들이 그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성경에는 여호수아, 에스라/느헤미야, 요한복음, 요한계시록 같이 조심해서 읽어야 할 책들이 있습니다. 그런 책들을 읽을 때는 당시의 상황과 배경을 알고서 읽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불순물도 있고 보석도 있습니다. 그러나 10%의 불순물이 있다고 해서 90%의 보석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살아 운동력이 있어서 우리를 일으켜 주고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말씀을 귀로 들으면 그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시련과 환난에 빠진 우리들을 일으켜 줍니다. 말씀을 귀로 들으면 그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몸과 마음의 아픔과 질병을 치료해 줍니다. 말씀을 읽는 사람도 복이 있고 듣는 사람도 복이 있고 지키는 사람도 복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면서 그 말씀에 의지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Blessed are those who hear the Word

James 1:1-4, Revelation 1:1-3


James, a servant of God and of the Lord Jesus Christ, to the twelve tribes in the Dispersion: Greetings. my brothers and sisters, whenever you face trials of any kind, consider it nothing but joy, because you know that the testing of your faith produces endurance; and let endurance have its full effect, so that you may be mature and complete, lacking in nothing. If any of you is lacking in wisdom, ask God, who gives to all generously and ungrudgingly, and it will be given you. (James 1:1 - 5)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which God gave him to show his servants what must soon take place; he made it known by sending his angel to his servant John, who testified to the word of God and to the testimony of Jesus Christ, even to all that he saw. Blessed is the one who reads aloud the words of the prophecy, and blessed are those who hear and who keep what is written in it; for the time is near. (Revelation 1:1 – 3)


When reading the Bible, we must know the context of the times when the Bible was written. For example, the book of Joshua records that the Hebrews entered the land of Canaan, killing the natives, and conquering the land of Canaan. The scholars speculate that the Hebrews did not conquer the land but rather settled in the land of mountains. However, Joshua insisted that the Hebrew people had killed all the Canaanite peoples and occupied the land. When we read these words, we should know that the book of Joshua was written from the perspective of Israeli nationalism. We know that similar things like the book of Joshua had happened In human history, European pioneers who had arrived in North America killed many Aboriginal people. They would have thought that it was okay for them to kill Native Americans, just as the Hebrews killed all the Canaanite. Sometimes the Bible has had a negative impact on human history.


Revelation 1:3 says, “blessed is the one who reads aloud the words of the prophecy, blessed are those hear and keep what is written in it.” Two thousand years ago, the Bible was precious and few people could read it. The Apostle John wrote Revelation at the exile to encourage the early Church members under the persecution of the Roman Empire. When the Early Church read his letter at the time of worship, a member who could read the text came forward and read it with a loud voice and the rest listened to it. They met and experienced the words in such a way. When we listen to the word with our ears, the word will come into our heart to heal and touch us. We are able to get great comfort and courage while listening to the words of God through ears.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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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아홉번째 주일 / 10월 다섯번째 주일
기독교개혁 500주년, 오직 말씀
시편 1:1 - 6
정해빈 목사



지금부터 500년 전인 1517년 10월 31일에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500년 전 종교개혁은 성경번역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시 성경은 라틴어로 되어 있어서 일반 신자들은 성경을 읽을 수 없었고 라틴어를 읽을 줄 아는 성직자들만 성경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라틴어는 학문적인 언어라서 신부들 가운데서도 라틴어를 못 읽는 신부들이 많아서 예배드릴 때 설교를 하지 않고 그냥 예배 순서와 기도문을 외워서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교회에서 성경이 소홀히 취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성직자들만 읽어야 하고 평신도들은 굳이 성경을 읽을 필요가 없고 성직자들이 말하는 것만 들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로마 교황청은 다른 성경으로 번역하는 것을 금지했고 심지어는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사람을 화형시키기도 했습니다. 영국의 존 위클리프는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다고 해서 죽은 다음에 시신이 화형당했고 체코의 얀 후스는 라틴어 성경을 체코어로 번역했다고 해서 화형당했습니다. 당시 로마 교황청은 성경번역을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지만 500년 전에는 이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틴 루터는 목숨을 걸고 독일 국민들이 사용하는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을 했습니다. 마침 유럽에서는 쿠텐베르크가 발명한 인쇄술 때문에 대량인쇄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 왜 마틴 루터는 성경을 번역했을까요? 성직자만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평신도들은 그것을 그냥 따라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구든지 직접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을 통해서 직접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직접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을 통해서 은혜받고 변화받아서 책임적인 존재로 살아가야 합니다. 성직자가 나 대신 성경을 읽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직접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당연한 말 같지만 500년 전에는 성경을 일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목숨을 걸 만큼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개신교 신앙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를 중요시합니다. 내가 직접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신앙이 개신교 신앙입니다.


그럼 왜 중세 카톨릭은 성경을 소홀하게 취급했을까요?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성경의 권위보다 교회/교황의 권위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이 삶과 신앙의 모든 문제를 다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지 않는 삶과 신앙의 문제는 전통/제도/교리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에서 50% + 전통/제도/교리에서 50%를 참고하면 삶과 신앙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성경은 소홀하게 취급되고 전통/제도/교리는 점점 더 중요하게 취급되었습니다. 성경은 뒷전에 제쳐두고 교황의 칙령이나 주교회의 결의문이나 교리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고 교황의 결정을 믿고 따르라고 강요했습니다. 전통/제도/교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다 보니 성경에 없는 복잡한 의식과 전통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카톨릭 예배를 가보면 지켜야 할 의식도 많고 순서도 많고 성모마리아, 성베드로, 성인을 추모하는 기념일이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카톨릭은 7성사, 7가지 의식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세례/성체/고해/견진/성품/혼인/병자 이렇게 7가지 의식이 있습니다. 이 7가지 의식 중에서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이 직접 행하신 의식은 세례와 성찬식뿐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가들은 7가지 의식 중에서 5가지를 없애고 세례와 성찬식만 교회에서 하도록 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중세 카톨릭이 성경말씀보다 교황의 말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앙의 근거는 오직 말씀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개신교 신앙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두가지 뜻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로 개신교 신앙은 저항하고 개혁하는 신앙이고 둘째로 개신교 신앙은 하나님 말씀과 씨름하고 질문하는 신앙입니다. 첫째로 개신교 신앙은 불의에 저항하고 잘못된 사회를 개혁하는 신앙입니다. 종교개혁 전통이 강한 독일이나 덴마크 같은 북유럽 국가들을 보면 사회복지제도가 잘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은 교회를 바꿀 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꿉니다. 교회와 세상을 바꿀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나를 반성하고 나를 개혁하는 신앙이 개신교 신앙입니다. 둘째로 개신교 신앙은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씨름하고 질문하는 신앙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대화하고 질문해야 합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에 성직자가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수동적인 신앙인이 아니라 적극적인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직접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말씀과 씨름하고 고민하고 공부하고 질문하면서 성장하는 신앙이 개신교 신앙입니다.


성경은 성경이 스스로 해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는 말씀이 말하려고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잘 생각하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읽지 말고 그 말씀의 속뜻이 무엇인지를 잘 헤아려서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모순되는 부분도 있고 같은 주제에 대해서 구약과 신약이 서로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레위기에서는 부정한 음식을 먹지 말라고 했는데, 사도행전에서는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보자기에 쌓여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부정한 음식을 먹으라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도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말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여성을 열등하게 취급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예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동등하게 대하셨습니다. 성경말씀이 같은 주제에 대해서 다른 내용을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성경 전체의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생각해서 읽으면 되고 더 구체적으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서 읽으면 됩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생각하실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행동하실까? 예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성경을 읽으면 성경 전체가 말하려고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메시지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우리와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통해서 구원받고 믿음을 통해서 구원받고 말씀을 통해서 구원받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편 말씀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누가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이냐? 주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묵상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주님의 말씀을 멀리하면 첫째 악인의 꾀를 따르게 되고, 둘째 죄인의 길에 서게 되고, 셋째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멀리하면 우리 머리 속에 악한 생각, 딴 생각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악인의 꾀를 따르다 보면 그 다음에는 실제로 죄인의 길에 들어서게 되고 마지막에는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돼서 하나님과 완전히 멀어지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가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주고 보호해 줍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개신교 신앙은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말씀의 신앙입니다. 우리 신앙의 근거는 역사도 아니고 전통도 아니고 교황의 말도 아니고 오직 말씀뿐입니다. 역사와 전통과 사람이 하나님 말씀보다 더 우선할 수 없습니다. 누가 개신교인이냐? 말씀을 읽고 사랑하는 사람이 개신교인입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할 뿐만 아니라 직접 손으로 필사하는 것도 신앙성장에 큰 도움을 줍니다. 내가 죽기 전에 평생에 한번 성경을 필사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성도님들 중에 성경 전체를 필사하신 분이 계시면 저에게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큰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영어를 공부하는 청년들은 영어성경을 필사하면 영어도 깊이 알고 성경도 깊이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철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깨우쳐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치료해 주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 발을 비추는 등불인줄로 믿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The 500th Reformation, by Scripture alone

Psalm 1:1 – 6


God blesses those people who refuse evil advice and won't follow sinners or join in sneering at God. Instead, the Law of the LORD makes them happy, and they think about it day and night. They are like trees growing beside a stream, trees that produce fruit in season and always have leaves. Those people succeed in everything they do. That isn't true of those who are evil, because they are like straw blown by the wind. Sinners won't have an excuse on the day of judgment, and they won't have a place with the people of God. The LORD protects everyone who follows him, but the wicked follow a road that leads to ruin. (Psalm 1:1 – 6)


The Reformation began with Bible translation. 500 years ago, the Bible was written in Latin so ordinary believers could not read the Bible, and only clergymen who could read Latin could read the Bible. At that time, the Vatican banned translation into other Bibles and even burned those who translated it into other languages. They considered Bible translation as challenging the authority of the church. But Martin Luther took his life and translated the Bible into the German language used by the German people. So why would Martin Luther translate the Bible? He thought that anyone should read the Bible directly and meet God through the Word. Protestantism attaches importance to the relationship between God and me through the Word.


Psalm 1 says, "Blessed are those who do not follow the schemes of the wicked, do not stand in the way of sinners, do not sit at the place of the arrogant, but rejoice in the law of God only and meditate on the law day and night." Truly blessed are those who rejoice in the word of God and meditate day and night. On the other hand, if you keep away from the word of God, then you will follow the schemes of the wicked man, stand in the way of the sinner, and finally sit in the seat of the arrogant. If we keep away from the word of God, evil thoughts come into our heads. The word of God protects us from entering the path of sinners.


The Protestant faith is based on faith, grace, and the Word. The foundation of our faith should not be based on history, tradition, or the words of the Pope. Truly history, tradition, and church doctrines can not take precedence over God's Word alone. Anyone who meditates on the Word of God day and night will bear fruit along the roots like a tree planted in the stream and its leaves will not fade away. When we read and meditate on the Scriptures, God reminds us, comforts us, and heals us through the Word. I believe that the Word of God is a lamp that shines on our feet. May everyone love and meditate on the Word of Life and live according to it.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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