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네번째 주일 / 1월 네번째 주일
열린 세계를 가진 나그네
히브리서 11:8 – 16
정해빈 목사



요즘 전 세계 민족들 가운데서 가장 고통받는 민족을 꼽으라면 시리아 국민들과 미얀마의 로링야 사람들을 꼽을 수 있습니다. 시리아에서는 정부군과 반군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는데 러시아와 이란은 시아파 정부군을 지원하고 있고 유럽과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는 수니파 반군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현재 500만 명 이상이 고국을 떠나서 난민이 되었고 캐나다도 5만 명 이상을 수용했습니다. 미얀마에서는 로힝야 사람들이 난민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100여 년 전 미얀마를 식민지로 만든 영국은 미얀마 사람들에게서 쌀 농장을 빼앗아 인도와 방글라데시에 사는 로힝야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로힝야 사람들은 원래 가난한 소작인들이었는데 영국이 자기들에게 땅을 줘서 쌀 농장을 짓게 하니까 미얀마로 몰려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대로 미얀마 사람들 입장에서는 영국이 자기들 땅을 빼앗아서 로힝야 사람들에게 주고 농사짓게 했으니까 미얀마 사람들이 로힝야 사람들을 좋게 볼 수가 없었습니다. 영국에 분노한 미얀마 사람들은 일본군이 동남아시아로 진출하자 일본군이 영국군을 몰아내기를 기대했습니다. 미얀마와 일본이 같은 편이 되었고 로힝야와 영국이 같은 편이 되었습니다. 과거의 이런 악연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미얀마는 로힝야 사람들을 적대적으로 대하고 국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시리아와 미얀마 사태를 보면 그들의 문제가 여러 가지로 복잡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의 가해자가 오늘날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옛날의 피해자가 오늘날의 가해자가 되기도 합니다. 만약 옛날에 강대국들이 약소국가들을 식민지로 만들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난민 문제가 이렇게 복잡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다른 민족들이 난민으로 고통받는 것을 보면서 동병상련의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우리 한민족도 지난 100년 전에 이와 비슷한 일들을 많이 겪었기 때문입니다. 1937년 소련의 스탈린은 한인들과 일본인들이 구별이 한 된다는 이유로 연해주에 살고 있던 17만 명의 한인들을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로 이주시켜 그곳에서 살게 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도착한 한인들은 맨손으로 땅에 굴을 파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1903년에는 약 100여명의 한인들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1905년에는 약 1000여명의 한인들이 배를 타고 멕시코에 도착해서 외국인 노동자로 외국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농장에서의 계약 기간이 끝나고 나니 생활이 막막해졌습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한인들 중 290명이 1921년에 멕시코에서 배를 타고 쿠바로 건너가서 그곳 사탕수수 밭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쿠바에 가면 한인후손회관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한인들이 난민과 외국인 노동자 신분으로 배를 타고 해외에 나가 살기 시작했습니다. 1년 전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신 이상철 목사님의 삶을 돌아보면 목사님의 삶 자체가 지난 100년 동안 한인들이 겪었던 고난의 역사를 대표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한말 일제에게 농토를 빼앗긴 부모님은 두만강을 건너 시베리아로 이주하였고 이 목사님은 그곳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소련을 피해서 중국으로 이주해야만 했고 청년 시절에는 일제 징용을 피해서 집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해방 후에는 중국 공산당을 피해서 가족을 남겨두고 홀로 남쪽으로 피신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피난과 난민 생활을 시작하셨지만 목사님은 고난의 역사를 기쁨의 역사로 바꾸셨고 우리들에게 꿈과 희망을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이 나의 땅이며 내가 뿌리내려야할 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방관자와 외국인으로 살지 말고 당당한 주인이 되어서 이 땅을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목사님께서는 2011년 자서전을 쓰시면서 책 제목을 “열린 세계를 가진 나그네”로 정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목사님의 두가지 삶의 자세를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나그네 신앙입니다. 나그네는 머무를 땅이 없어서 떠도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정치/경제적인 이유로 나그네/유목민/난민으로 살고 있습니다. 나그네는 어쩔 수 없이 떠도는 사람을 가리키지만 영적으로 해석하면 과거에 안주하지 않고, 이 땅에서의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실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더 좋은 본향을 향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나그네는 자신의 인생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땅의 소유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단순하고 검소하게 인생을 살아갑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면 그동안 쌓아왔던 것을 다 내려놓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이 영적인 나그네입니다. 이 목사님은 주님께서 부르시면 그곳이 어디든지 달려가서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선배들이 어떤 믿음을 가지고 인생을 살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과거와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더 나은 본향을 위해서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우리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들은 성경을 통해서 수천 년 전에 살았던 믿음의 선배들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1년 전 우리 곁을 떠나신 이 목사님을 통해서 영적인 나그네로 사는 삶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 지를 보았습니다.


둘째로 목사님은 열린 세계, 열린 마음을 가지고 인생을 사셨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고난을 겪으면서 자라셨기 때문에 고통받고 소외된 이웃들을 볼 때마다 그들과 함께 아파하셨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 토론토에 도착한 한인 이민자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셨고 때로는 사택을 개방에서 그들에게 쉼터를 제공하셨습니다. 한반도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일하셨고 캐나다의 소수자들과 원주민들을 위해 일하셨습니다. 소수자/이민자/유색인종으로 살다보면 우리들 스스로가 경계를 정해놓고 그 경계 안에서 살기가 쉽습니다. 소수자로 이 땅을 살다 보면 우리들의 마음이 좁아지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이 목사님은 그 경계를 넘으셨고 우리들에게 열린 마음으로 이웃들과 소통할 것을 주문하셨습니다. 다른 민족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당당하게 이 땅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약소국과 주변인으로 살아온 우리들의 경험이 이 사회에 기여할 부분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이 땅에는 약자들과 소수자들을 경멸하고 배척하고 증오하고 혐오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웃을 경멸하고 배척하고 증오하고 혐오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키는 작으셨지만 누구보다도 큰 가슴을 가지고 서로 다른 사람들을 품으셨던 목사님이 그리워집니다. 우리의 삶과 신앙이 보수적이고 배타적이고 협소하고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열린 마음을 가지고 이웃을 환영하고 포용하는 삶과 신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목사님은 우리들에게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우리 교회에 큰 꿈과 유산을 물려주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목사님의 뜻을 이어받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가슴을 크게 열고, 더 나은 하나님의 나라의 본향을 향해서, 열린 세계를 가진 나그네로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Wanderer of an open mind
Hebrews 11:8 – 16


By faith Abraham obeyed when he was called to set out for a place that he was to receive as an inheritance; and he set out, not knowing where he was going. By faith he stayed for a time in the land he had been promised, as in a foreign land, living in tents, as did Isaac and Jacob, who were heirs with him of the same promise... They confessed that they were strangers and foreigners on the earth, for people who speak in this way make it clear that they are seeking a homeland. If they had been thinking of the land that they had left behind, they would have had opportunity to return. But as it is, they desire a better country, that is, a heavenly one. Therefore God is not ashamed to be called their God; indeed, God has prepared a city for them. (Hebrews 11:8-9, 13-14)


During his time as Moderator from 1988 to 1990, The Very Reverend Dr. Sang Chul Lee faced many contentious issues, but he handled them with grace and compassion, urging church members to “live together, struggle together, and grow together.” Today’s United Church benefited greatly from the Rev. Lee’s leadership. As Moderator, he lifted up the voices of the isolated and oppressed, tackling issues relating to LGBTQ rights, racial equality, and Indigenous affairs. The United Church of Canada’s intercultural vision owes much to him, as he built bridges between our church and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Republic of Korea. Lee was named Rainbow Chief at the All Native Circle Conference in 1989 and from that moment became an honoured member. He said the United Church had a special role in the world. “The religious community is the one constantly supplying dreams and visions and hopes, not despair and destruction,” he once said. “Sometimes our dreams are so small. God’s dream is so much larger than ours.” - Observer, The United Church of Canada, January 30, 2017 -


We gathered here to remember our spiritual mentor and leader, the Late Very Rev. Dr. Sang Chul Lee who had passed away one year ago, whose death has sparked many of us in various ways. He has been a symbol of our church and showed us what path our church should go through his entire life. Recalling how wide, deep, and high minds he had for God and mankind, we want to cherish many spiritual heritages that he had left for us. He called himself "a wanderer of an open world." A wanderer refers to a person who does not settle down in the past, but moves forward for God's kingdom created by God. His life reminds us of how valuable living with God for justice and peace as God’s wanderer. He had also lived with an open heart, more exactly, “extra large size heart,” as he called himself with a sense of humor. Considering there are still many people in the world who despise, reject, and hate the weak and the minorities, we miss him who embraced all kinds of people with the love of God. I hope that our church will remember and follow his entire life who had lived with love and peace, a wanderer of an open heart.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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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세번째 주일 / 1월 세번째 주일
주현절, 삶의 의미를 찾아서
마가복음 1:14 – 20
정해빈 목사




최근에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이라는 사람이 쓴 책을 읽었습니다. 원래 책 제목은 [Men’s searching for meaning, 삶의 의미를 찾아서]인데 한글로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제목으로 의역을 했습니다. 빅터 프랭클은 오스트리아 빈 의과대학의 유대인 신경정신과 교수였는데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쳐들어가서 유대인들을 기차에 태워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냈습니다. 그는 1942년 37살 때 수용소에 끌려가서 3년을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1500명이 기차를 타고 며칠 만에 수용소에 도착했는데 독일 경찰이 1300명은 왼쪽에 서게 하고 200명은 오른쪽에 서게 했습니다. 빅터 프랭클은 오른쪽에 선 덕분에 수용소에서 생활하게 되었는데 왼쪽에 선 1300명은 어떻게 되었냐고 물으니까 사람들이 굴뚝을 가리켜 주었습니다. 1300명이 가스실에서 죽고 난 후에 불에 태워졌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도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언제든지 경찰이 내 이름을 부르면 나는 가스실로 끌려가서 죽어야만 합니다. 내가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알지 못하는 그런 두려움 속에서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곳은 그야말로 극한의 공포와 절망이 가득 찬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매일매일의 두려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야만 했고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 서서히 죽어갔습니다. 하지만 프랭클은 끝까지 이곳에서 살아남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길바닥에서 깨진 유리조각 하나를 주워 매일 같이 면도를 했습니다. 깨끗하게 면도를 한 그의 얼굴은 절망에 빠진 다른 사람들보다 더 건강하고 활기차 보였고 수용소의 간수들은 그를 가스실로 보내지 않았습니다.


신경정신과 의사인 빅터 프랭클은 수용소에서 생활하면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수용소의 삶은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고 절망하게 만듭니다. 도저히 이 수용소를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희망을 포기하게 되었고 희망을 포기하니까 한명씩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환경에서도 내가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분명한 사람은 절망의 순간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프랭클은 내가 수용소를 나가면 대학에 돌아가서 수용소에서 경험한 것을 학생들에게 말해 주겠다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따뜻하고 편안한 강의실에서 젊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꿈을 매일 꾸고 상상을 했습니다. 그런 꿈과 상상이 그가 절망하지 않도록 그를 지켜 주었습니다. 그가 한 유명한 말들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가진 자유 중 최후의 자유, 본질적인 자유,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자유는 자신이 처한 환경이 어렵든 힘들든 어떻든지 상관없이 스스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하는 자유이다. 바로 이것이 최후의 자유이다.” “삶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은 언제나 그 목적을 실현할 방법을 찾을 것이다.” 사람은 보통 주어진 환경의 지배를 받습니다. 하지만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환경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은 어떤 역경이 닥치더라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환경을 이길 수 있는 삶의 의미와 목표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날씨가 화창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날씨가 우울하면 기분이 우울해집니다. 하지만 자신이 살아야 하는 이유가 분명하고 삶의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날씨가 좋은 안 좋든 상관없이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아갈 것입니다. 주어진 환경과 운명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바꿀 수 없지만 환경과 운명을 대하는 태도는 내가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빅터 프랭클은 수용소 경험을 토대로 의미치료(Logotheraphy)라는 치료 방법을 개발했습니다. 보통 우리가 치료를 위해서 정신 상담을 받으면 제일 먼저 이런 질문들을 받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 때문에 고통받고 있습니까? 당신이 과거에 받은 상처는 무엇입니까?” 내가 과거에 받은 고통이나 현재의 고민을 가지고 상담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의미치료는 과거나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가지고 상담을 시작합니다. “이미 주어진 환경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그 환경을 대처하는 방식은 당신에게 달려있습니다. 자유인, 책임적인 존재가 되십시오. 당신은 당신이 반드시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까? 당신의 인생 목적은 무엇입니까? 당신에게 있어 삶은 얼마만큼 중요합니까?” 과거나 현재가 아니라 미래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중심에 놓고 치료하는 상담기술이 의미치료입니다. 과거의 상처를 가지고 대화하는 것보다는 미래의 목적과 의미를 가지고 대화할 때 사람은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살아야 하는 의미와 목적이 분명할 때 자신감 있고 당당하고 성실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 1장을 보면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일 먼저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갈릴리 바닷가를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동생 안드레가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이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일꾼들과 배를 남겨 두고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시몬과 안드레는 고깃배 없이 바다에 그물을 직접 던지는 가난한 어부들이었고 야고보와 동생은 고깃배와 일꾼을 가지고 있는 여유있는 어부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자마자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소명이었고 거룩한 부르심이었습니다. 평생 인생을 걸고 헌신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 부르심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삶의 의미와 목적을 분명하게 보여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마가복음은 아주 간단하게 주님께서 그들을 부르자 그들이 즉시 주님을 따라갔다고 기록했지만 어쩌면 이 이야기 속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생략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 많은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고 주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단순히 물고기 많이 잡는 사람으로 살았지만 주님을 만난 후에는 인생의 목적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그들의 인생 목적이 되었습니다.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그의 동생이 그물과 배와 일꾼들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갔다는 말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는 말은 주님을 따르려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전에 중요하게 여겼던 삶의 우선순위를 내려놓고 더 중요한 삶의 우선순위를 붙잡아야 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전에는 물고기 많이 잡는 것이 중요했는데 이제부터는 사람을 살리는 어부가 되어서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어렵고 힘든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식탁으로 초대해서 함께 음식을 나누고, 병든 자들을 고쳐주고, 죄책감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자유하게 하고, 원수된 사람들을 서로 화해시키는 일이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일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일을 위해서 헌신할 사람들을 찾으셨습니다. 그것은 삶의 의미와 목적이 분명한 일이었고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일이었습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에, 살아야 하는 이유가 분명했기 때문에 제자들은 벅찬 마음으로 주님의 사역을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주님은 오늘날에도 우리들에게 사람을 살리는 어부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부라는 말 속에는 두 가지 뜻이 들어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들은 자신을 내준다는 의미에서 물고기가 되어야 하고 둘째로 사람을 살린다는 의미에서 어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맨 처음 기독교의 상징이 물고기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Ιησους Χριστος Θεου Υιος Σωτηρ 이에수스 크리스토스 테우 휘오스 소테르” 이 5개 단어의 헬라어 첫 글자를 합치면 익투스가 되는데 익투스는 헬라어로 물고기를 가리킵니다. 물고기처럼 이웃에게 자기를 주는 사람도 복된 사람이고 사람을 살리는 어부로 사는 사람도 복된 사람입니다. 빅터 프랭클은 삶의 의미와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에 수용소 생활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삶의 분명한 의미와 목적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위해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piphany, men’s searching for meaning
Mark 1:14 - 20


Viktor Frankl was a prominent psychiatrist living in Vienna when Nazi Germany absorbed in Austria in March 1938. Because he was a Jew, he was interned in Auschwitz but was fortunate enough to survive. Looking back on his Auschwitz experience, he wrote, “Everything can be taken from a man but the last of human freedoms, the right to choose one’s attitude in any given set of circumstances.” In other words, what happen to you, no matter how hurtful or unfair, is ultimately less important than what you do about what happen to you. Hi also said, “Striving to find meaning in one’s life is the primary motivational force in human.”


Jesus first called the fishermen as his disciples when he began his public life in Galilee, by saying to them. “Follow me, I will make you fish for people.” As soon as they were called by Jesus, they abandoned everything and followed him. It was a call worth living and dedicated to life. Because Jesus showed them the meaning and purpose of life, they were able to set aside what they were doing and follow him. Although Mark simply said, “once they were called, they followed him,” they probably had many conversations and heard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of God from him. Their life goal was to catch a lot of fish, but meeting with Jesus has changed their life goals. It was to convey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of God.


Just as Jesus made them his disciples, God also calls us to be fishers to save people today. First, we must be fish in the sense of giving ourselves, and second, we must be fishers in the sense of saving people. “Jesus Christ, the Son of God, the Savior, Ιησους Χριστος Θεου Υιος Σωτηρ.” The first Greek words of these five words are combined to make it Iitus, which is a Greek word for fish. Blessed are those who give themselves to their neighbors like fish, and blessed are those who live as fishers to save people. As Victor Frankl was able to withstand the life of the camp because he had a clear meaning and purpose of life, God gives us a clear purpose of life. May God lead us to live our lives for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of God.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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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두번째 주일 / 1월 두번째 주일
주현절, 우리가 언제 베풀었습니까
마태복음 25:34 - 46
정해빈 목사



요즘 몇 십 년 만에 날씨가 너무 추워서 바깥 활동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따뜻할 때가 있으면 추울 때가 있습니다. 옛날 어른들이 날씨가 춥고 눈이 많이 와야 벌레들이 죽어서 봄 농사가 잘 된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님들 모두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주일에 에베소서 3장 말씀을 읽으면서 3가지 메시지를 함께 묵상했습니다. 첫째, 우리가 주님을 찾기 이전에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선택하셨습니다. 둘째,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방인과 유대인이 한 몸을 이루는 교회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셋째, 교회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한 몸을 이룰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아름답고 풍성하고 따뜻하고 평등하고 정의로운지를 이 세상 통치자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어서 이방인과 유대인이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교회가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에 전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25장 말씀은 “최후의 심판”에 대한 비유 말씀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인자가 모든 천사와 더불어 영광에 둘러싸여 올 때에 그는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다. 그는 모든 민족을 그의 앞에 불러모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갈라서 양은 그의 오른쪽에 염소는 그의 왼쪽에 세울 것이다.”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모든 민족들을 불러 모으신 다음에 사람들을 오른쪽과 왼쪽, 양과 염소로 나누고 오른쪽/양에 속한 사람들은 칭찬하시고 왼쪽/염소에 속한 사람들은 책망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을 양과 염소로 나눈다는 말씀이 우리들에게 부담스럽게 들립니다. 사람이 사는 방식이 다양한데 어떻게 사람을 무 자르듯이 두 종류로 나눌 수가 있을까요? 그러면 나는 양인가 아니면 염소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람을 딱 두 종류로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사람들을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나누어서 저쪽 사람들을 모함하고 죽이는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을 읽을 때는 사람을 두 쪽으로 나누어서 나와 다른 저쪽 사람들을 비난하는 이야기로 읽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누가 양이고 누가 염소인가, 이렇게 읽기 보다는 주님께서는 어떤 기준으로 사람을 보시는가, 주님께서는 왜 어떤 사람들은 칭찬하셨고 어떤 사람들은 책망하셨는가? 주님께서 사람을 보실 때 무엇을 중요하게 보시는가? 이런 질문에 초점을 맞추어서 오늘 말씀을 읽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른쪽/양에 속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로 있을 때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 주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마지막 때 주님께서 양에 속한 사람들을 칭찬하는 6가지 이유가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1) 내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2)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고, (3) 나그네로 있을 때 영접하였고, (4) 헐벗을 때 입을 것을 주었고, (5)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었고, (6)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 주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다른 것을 물어보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들은 어느 교회 다니느냐? 너희들은 교회 몇 년 다녔느냐? 너희들은 교회 직분이 무엇이냐? 너희들은 성경책 몇 권 읽었느냐? 너희들은 기도 얼마만큼 하느냐? 이런 것 물어보지 않으시고 오직 6가지를 기준으로 그들을 칭찬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왼쪽에 속한 사람들에게 똑같은 기준을 가지고 너희는 나에게 6가지 선을 베풀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서 악마와 그 졸개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거라. 너희는 내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나그네로 있을 때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어 있을 때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찾아 주지 않았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마지막 때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질문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다른 것을 묻지 않으시고 오직 이 6가지를 물으실 것입니다. 이 6가지를 행한 사람은 칭찬받을 것이고 6가지를 행하지 않은 사람은 책망받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되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나를 돌본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주님의 관심이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자세히 보면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은 사람들이 주님께 대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주님을 대접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선을 베풀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이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선을 베푼 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이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들은 호의를 받아도 보답할 수 없는 사람들이 때문에 그들에게 선을 베푸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호의를 베풀면 보답을 기대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답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었다는 점에서 그들은 참으로 훌륭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더 나아가서 자신들이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선을 베풀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선을 베푼 것도 놀랍지만 그 선을 기억하지 못한 것이 더 놀랍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선을 베풀고 그 선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양이요 의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주님께서 오른쪽에 속한 사람들을 칭찬하니까 왼쪽에 속한 사람들이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왼쪽에 속한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겼습니다.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선을 베풀면서 살았는데 왜 우리더러 선을 베풀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까? 그들이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다시한번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좋은 인간관계를 위해서 선을 행할 수도 있고 보답을 기대하면서 선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친구에게 선을 행하는 것도 좋은 일이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관심은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름대로 선을 행하면서 살았지만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고 선을 행하지 않는 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모여서 한 몸을 이룬다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아름답고 풍성하고 따뜻하고 평등하고 정의로운지를 이 세상 통치자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지극히 작은 자에게 선을 베풀고 그 선을 기억하지 않는 교회가 참다운 교회입니다. 만일 교회가 신분과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신분과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이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곳이라면 그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사교 모임이 될 것입니다. 부자들만 모이는 교회, 지식인들만 모이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사교 모임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함께 모이고 부유한 자와 빈곤한 자가 함께 모이는 교회가 참다운 교회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들이 와서 쉼을 얻는 교회가 참다운 교회입니다. 주님께서 지극히 작은 자들을 자신과 동일시하신 것처럼 우리 교회도 지극히 작은 자들과 우리들을 동일시하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가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선을 행하고 그 선을 기억하지 않는 교회,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와서 배고픔을 채우고 목마름을 채우는 교회, 누구나 와서 쉼을 얻고 안식을 얻는 복된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piphany, when did we give you a favour
Matthew 25:34 – 46


He will put the sheep at his right hand and the goats at the left. Then the king will say to those at his right hand, “Come, you that are blessed by my Father, inherit the kingdom prepared for you from the foundation of the world; for I was hungry and you gave me food, I was thirsty and you gave me something to drink, I was a stranger and you welcomed me, I was naked and you gave me clothing, I was sick and you took care of me, I was in prison and you visited me.” Then the righteous will answer him, “Lord, when was it that we saw you hungry and gave you food, or thirsty and gave you something to drink? And when was it that we saw you a stranger and welcomed you, or naked and gave you clothing? And when was it that we saw you sick or in prison and visited you?” And the king will answer them, “Truly I tell you, just as you did it to one of the least of these who are members of my family, you did it to me.” (Matthew 25:33 - 40)


Then he will say to those at his left hand, “You that are accursed, depart from me into the eternal fire prepared for the devil and his angels; for I was hungry and you gave me no food, I was thirsty and you gave me nothing to drink, I was a stranger and you did not welcome me, naked and you did not give me clothing, sick and in prison and you did not visit me.” Then they also will answer, “Lord, when was it that we saw you hungry or thirsty or a stranger or naked or sick or in prison, and did not take care of you?” Then he will answer them, “Truly I tell you, just as you did not do it to one of the least of these, you did not do it to me.” And these will go away into eternal punishment, but the righteous into eternal life.’ (Matthew 25:41 - 46)


Today's story does not emphasize on who belongs to a sheep and a goat. Rather Matthew invites us to focus on how the Lord appreciates us and what matters to us when the Lord comes down to us again. The Lord said to those on the right, “you gave me food, something to drink, clothing, took care of me, and visited me.” Likewise, the Lord said to those on the left that they did not give him these good things. The Lord said that caring for one of the least was like caring for him. Those who were praised by the Lord not only took care of the least, but also did not remember their good deeds. May our church does good to the least and does not remember the good. May our church will be the place where people come to fill their hunger and thirst. May our church will be a blessed place where everyone, no matter who they are and where they came from, come to have a rest and peace in God’s presence.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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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첫번째 주일 / 1월 첫번째 주일
신년주일, 교회는 하나님의 지혜
에베소서 3:1 – 12
정해빈 목사



우리는 오늘 신년주일/주현절을 맞아 에베소서 3장의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바울은 1절에서 자신을 소개하면서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갇힌 몸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의 일로 갇힌 몸이 되었다는 말은 자신이 예수께 붙잡혔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내가 주님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붙잡았습니다. 내가 주님을 찾기 이전에 주님이 먼저 나를 찾으셨습니다. 주님이 먼저 나를 찾은 것은 나에게 어떤 사명을 맡기기 위함이었습니다. 2절 말씀,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도록 나에게 이 직분을 은혜로 주셨습니다.” 내가 주님께 붙잡힌 것은 이방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고 그들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사명/직분 때문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모든 성도 가운데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런 귀한 직분을 주셨으니 그것이 바로 은혜요 선물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6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직분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 비밀의 내용인즉 이방 사람들이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 사람들과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함께 한 몸이 되고 약속을 함께 가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 사람들과 유대 사람들이 똑같이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이 되고, 약속을 함께 받는 자가 되는 것, 그 사명을 위해서 주님께서 나를 붙잡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방 사람들과 유대 사람들이 모여서 한 몸, 교회를 이루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사명은 단순히 이방 사람들과 유대 사람들이 모여서 한 몸을 이루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한 몸, 교회를 이룰 뿐만 아니라 그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보여주는 것이 그가 받은 사명이었습니다. 1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제 교회를 통하여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에게 하나님의 갖가지 지혜를 알리시기 원하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교회의 사명은 이 세상의 권세자들/통치자들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아름답고 풍성하고 따뜻하고 평등하고 정의로운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 그것이 바로 교회가 해야 할 사명이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3가지 영적인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내가 예수를 믿은 것은 내가 예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먼저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붙잡힌 사람들입니다. “나를 따르라, 나의 제자가 되어라,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하여라,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여라” 이 사명을 위해서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둘째, 교회는 이방 사람들과 유대 사람들이 한 몸을 이루는 곳입니다. 복음 안에서는 인종차별도 없고 성 차별도 없고 계급 차별도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차별이 있을지 몰라도 교회 안에서는 유대인이든지 헬라인이든지 모두가 한 가족이 되고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교회는 이 세상 권세자들/통치자들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아름답고 풍성하고 따뜻하고 평등하고 정의로운지를 보여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 통치자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통치하지 않고 불의와 거짓과 폭력을 행사할 때, 교회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높으신 뜻을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교회를 통해서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도록 교회는 하나님의 지혜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단순히 교인 수를 늘리거나 교인들을 영적으로 만족시키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부흥하는 것도 중요하고 교인들의 영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기에 그쳐서는 안 되고, 더 나아가 이 세상의 통치자들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우쳐주고 보여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통치자들이 교회를 거울삼아서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도록 교회는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진실로 교회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선포하고 그 지혜를 삶으로 보여주는 곳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018년을 시작하면서 우리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는가를 묵상하기 원합니다. 첫째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선택하시고 우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둘째로 에베소 교회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었던 것처럼, 우리 교회도 오래된 성도님들과 새로 오신 성도님들이 하나되고, 나이드신 성도님과 젊은 성도님들이 하나되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셋째로 우리 교회가 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아름답고 풍성하고 따뜻하고 평등하고 정의로운지를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주보 뒷장을 보시면 2018년 기도 제목이 적혀있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우리들 모두가 이런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함께 기도하기를 소망합니다. (1) 이 땅에 생명과 정의와 평화를 주소서. 이 땅에 생명이 살아있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평화가 넘쳐나게 하옵소서. 이 땅에 지진이나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고 남북한이 화해하게 하옵소서. (2) 따뜻하고 건강한 교회되게 하소서. 교회가 행복하면 우리들의 삶도 행복하고 교회가 기쁘고 따뜻하면 우리들의 삶도 기쁘고 따뜻합니다. 우리 교회가 따뜻하고 건강한 교회되도록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3) 어린이/청년/젊은 가정을 환영하게 하소서. (4) 난민들과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일하게 하소서. (5) 사마리아 성도님들의 건강을 지켜 주소서. 이런 제목을 가지고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2018년을 시작하면서 두 가지 부탁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우리 교회가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교회되도록 노력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따뜻한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지금보다 더 따뜻한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블루어스트릿연합교회에서 예배드릴 때는 예배당이 너무 커서 웅장한 느낌은 있었지만 따뜻한 느낌은 들지 않았습니다. 강대상과 성도님들 사이가 한 10미터쯤 떨어져 있었습니다. 랜싱연합교회로 와보니 예배당이 깨끗하고 현대식이고 아담해서 웅장한 느낌은 없지만 서로 붙어서 앉으니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듭니다. 우리 교회는 수백 명 모이는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서로 이름을 알고 한 가족처럼 가깝게 지낼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과거보다 더 따뜻한 교회 되도록 노력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서로의 이름을 알고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는 교회되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로, 우리 교회가 건강한 교회 되도록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성도님들이 주인 의식을 가지고 교회 운영에 참여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목사 혼자서 모든 일을 다하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아닙니다. 목사는 예배/설교/기도/심방/성경공부와 같은 영적인 일을 합니다. 영적인 일을 제외한 행정/재정/봉사는 성도님들이 맡아서 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목사는 휴가를 갈 수도 있고 안식년으로 몇 달 교회를 비울 수도 있습니다. 목사가 없어도 교회가 흔들리지 않고 더 잘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성도님들께서 주인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교회를 운영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서로 모여서 한 몸을 이루어라,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아름답고 풍성한지를 너희 교회가 세상에 보여주어라,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2018년에는 우리 교회가 더 사랑이 넘치고 주님께 쓰임받는 복된 교회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New Year, church is God’s wisdom
Ephesians 3:1 - 12


Christ Jesus made me his prisoner, so that I could help you Gentiles. You have surely heard about God's kindness in choosing me to help you. In fact, this letter tells you a little about how God has shown me his mysterious ways. As you read the letter, you will also find out how well I really do understand the mystery about Christ. No one knew about this mystery until God's Spirit told it to his holy apostles and prophets. And the mystery is this: Because of Christ Jesus, the good news has given the Gentiles a share in the promises that God gave to the Jews. God has also let the Gentiles be part of the same body. (Ephesians 3:1-6)


God treated me with kindness. His power worked in me, and it became my job to spread the good news. I am the least important of all God's people. But God was kind and chose me to tell the Gentiles that because of Christ there are blessings that cannot be measured. God, who created everything, wanted me to help everyone understand the mysterious plan that had always been hidden in his mind. Then God would use the church to show the powers and authorities in the spiritual world that he has many different kinds of wisdom. God did this according to his eternal plan. And he was able to do what he had planned because of all that Christ Jesus our Lord had done. Christ now gives us courage and confidence, so that we can come to God by faith. (Ephesians 3:7-12)


We can learn three spiritual messages from today's word, Ephesians chapter 3. First, before we chose Jesus, He called us first. "Follow me, and be my disciple, preach the good news to the world, proclaim the kingdom of God." For this mission the Lord has called us out from the world. Second, church is a place where the Gentiles and Jews are formed and united in Christ. The apostle Paul declared in his letter that there must be no racial, sexual, or class discrimination within the gospel. There may be many discrimination in the world, but in the church, no matter who you are, we are called to be one family and one body. Third, church should show to the rulers of this world how beautiful, rich, warm, equal, and righteous is the wisdom of God. When the authorities of this world do not rule the world according to the will of God, but exercise injustice and violence, church must show them the will of God in their place. Church must reveal God's wisdom so that they repent of their mistakes and realize the will of God. Church will have to take on the mission of light and salt so that the rulers of the world can use the church as a mirror to realize what God's good will is. Truly church is the wisdom of God. It should be the place that declares the wisdom of God who created and still creates the world with justice, life, and peace.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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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후 첫번째 주일 / 12월 다섯번째 주일
송년주일, 주님 앞에 나타날 수 있도록
베드로후서 3:8 – 15
정해빈 목사




2017년 12월 31일 오늘 날씨가 가장 추운 날입니다. 오늘 아침 토론토 날씨가 영하 22도, 지금 날씨가 영하 15도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뜨거운 사랑의 에너지로 이 겨울을 잘 보내야 하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기독교 신앙을 한마디로 말해 보시오? 누군가가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한다면 우리는 다양한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창조의 시작과 완성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십자가 죄용서와 구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믿음과 은혜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 성육신 사건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사랑과 정의와 생명과 평화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여러 가지 다양한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창조, 역사, 십자가, 죄용서, 구원, 믿음, 은혜, 성육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나라, 사랑, 정의, 생명, 평화, 이 모든 말들이 기독교 신앙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을 말할 때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종말 신앙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마지막 목표는 종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고 끝이 온다,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이 땅의 악을 심판하시고 이 세상을 평화의 세상으로 완성하시고 회복하실 것이다, 이 땅을 새하늘과 새땅으로 만드실 것이라는 믿음이 종말신앙입니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첫 음성으로 “때가 찼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찼다, 때가 가까이 왔다는 신앙이 기독교 종말신앙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마지막 말씀을 보면,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고백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신다는 신앙이 기독교 종말 신앙입니다.


종말에는 개인적인 종말이 있고 사회적인 종말이 있고 우주적인 종말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종말은 나의 개인적인 삶이 끝나는 것을 가리키고 사회적인 종말은 부패하고 타락한 사회가 바뀌고 나라가 바뀌고 정부가 바뀌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주적인 종말은 주님이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새하늘과 새땅으로 만드실 종말을 가리킵니다. 기독교 신앙은 개인적인 종말과 사회적인 종말과 우주적인 종말을 다 포함합니다. 이 3가지 종말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 종말을 준비하는 신앙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나 개인의 종말도 대비해야 하고 잘못된 사회역사가 올바른 사회역사로 바뀌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이 온전하게 회복되는 우주적인 종말을 고대해야 합니다. 종말은 마지막을 뜻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종말에는 기쁜 종말도 있고 슬픈 종말도 있습니다. 고등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날은 좋은 종말입니다. 이제 고등학교 생활은 끝이 났습니다. 군인이 제대하는 날은 좋은 종말입니다. 이제 군대 생활은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에는 좋은 종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슬픈 종말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나는 종말은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당신은 이제 3개월밖에 살지 못합니다 이런 청천병력 같은 소리를 들으면 우리는 종말이 나에게 찾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가까운 가족이나 형제나 친구가 세상을 떠나면 우리는 종말이라는 것이 나에게 먼 일이 아니라 언제든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것이 창조의 원리입니다. 태어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습니다.


종말 신앙은 우리를 깨어있게 만들고 우리의 삶을 소중하게 살도록 이끌어 줍니다. 나에게 당장이라도 종말이 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루하루를 소중하고 아름답게 살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종말신앙은 우리를 긴장하게 만들고 우리를 깨어있게 만들고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종말 신앙이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취해서 살지 않습니다. 종말 신앙이 없는 사람은 이 세상의 권력과 젊음과 재물이 영원하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종말이 다가오는 지도 모르고 이 세상에 취해서 살아갑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어느 순간 권력과 젊음과 재물이 사라질 때 크게 당황하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종말 신앙이 있는 사람은 종말이 와도 크게 당황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게 될 것입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종말신앙을 가지고 로마제국의 핍박을 견뎠습니다. 그들이 로마제국의 핍박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종말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이 저렇게 강하고 영원한 것 같아도 때가 되면 이 제국은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악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세상의 핍박을 참고 견딜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베드로후서 3장 말씀은 초대 교인들이 어떻게 종말 신앙을 믿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초대교회 교인들 중에는 종말이 빨리 와서 로마 제국이 망하고 세상이 심판받으면 좋겠는데 주님이 빨리 오시지 않으니까 실망하는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베드로후서는 그런 교인들에게 주님께서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회개할 때까지 오래 참고 기다리신다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과 달라서 때로는 하루가 천 년 같을 수도 있고 천년이 하루 같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빨리 오시지 않고 참고 기다리시는 것이 우리들에게는 기쁜 소식입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 당장 종말이 와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불려나간다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 서 있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너는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서 살았느냐? 너는 무엇을 하다가 이제 왔느냐?” 이렇게 물으신다면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너는 뜨겁게 살았느냐? 너는 뜨겁게 사랑하였느냐? 너는 뜨겁게 봉사하였느냐?” 이렇게 물으신다면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더 열심히 살라는 뜻에서 종말을 뒤로 미루시고 우리들에게 아직 사랑하고 일하고 봉사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날은 도둑같이 올 것입니다. 그 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녹아버리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일은 드러날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녹아버릴 터인데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날을 앞당기도록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말씀은 종말을 불에 타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옛 것이 없어지고 새 것이 만들어지는 것을 불에 비유했습니다. 불이 불순물을 녹여서 순금을 만드는 것처럼 불은 껍데기를 태우고 알맹이를 남깁니다. 종말이 되면 껍데기는 다 없어지고 영원한 것만 남게 될 것입니다. 불에 타서 없어질 것을 위해서 살지 말고 영원한 것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오늘 말씀은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권력도 없어지고 젊음도 없어지고 재물도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처럼 거룩하고 경건한 삶과 사랑의 삶만이 마지막까지 남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따라 정의가 깃들여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이것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도 없고 흠도 없는 사람으로 아무 탈이 없이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있도록 힘쓰십시오.” 마지막 날에 티도 없고 흠도 없는 사람으로 아무 탈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2017년 마지막 예배를 드리면서 2017년을 무사히 마치고 2018년 새해를 맞이할 수 있도록 기회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삶이 2017년으로 끝나지 않고 2018년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기회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주님 앞에 섰을 때 책망받지 말라는 뜻에서, 더 열심히 살고 더 뜨겁게 사랑하고 봉사하라는 뜻에서 우리들에게 새로운 시간을 주셨습니다. 누구에게나 종말은 반드시 옵니다. 하지만 나의 종말이 언제 오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날과 그때는 주님만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종말이 언제 오든지 주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설 수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2017년 마지막 날을 보내면서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 올 때까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Last Sunday, so that God finds you pure

2 Peter 3:8 – 15


Dear friends, don't forget that for the Lord one day is the same as a thousand years, and a thousand years is the same as one day. The Lord isn't slow about keeping his promises, as some people think he is. In fact, God is patient, because he wants everyone to turn from sin and no one to be lost. The day of the Lord's return will surprise us like a thief. The heavens will disappear with a loud noise, and the heat will melt the whole universe. e) Then the earth and everything on it will be seen for what they are. Everything will be destroyed. So you should serve and honor God by the way you live. (2 Peter 3:8-11)


You should look forward to the day when God judges everyone, and you should try to make it come soon. On that day the heavens will be destroyed by fire, and everything else will melt in the heat. But God has promised us a new heaven and a new earth, where justice will rule. We are really looking forward to that! My friends, while you are waiting, you should make certain that the Lord finds you pure, spotless, and living at peace. Don't forget that the Lord is patient because he wants people to be saved. This is also what our dear friend Paul said when he wrote you with the wisdom that God had given him. (2 Peter 3:12–15)


On the last day of December 31, 2017, we give thanks to God for giving us an opportunity to finish this year with the grace of God, and to start the coming year of 2018. The last Sunday of service of 2017 reminds us of an apocalyptic faith. Christianity always awaits the end, wait for the Lord to come again, and dreams of the kingdom of God. All of us will stand before God on the last day. But God slowed the end and gives us a new time in the sense that we live harder and love and serve more hotly. The end would come to anyone. But we do not know when our end will come. Only God will know that day and then. But blessed are those who can stand before the Lord in the last days without shame. We are called to remember the ending faith and wait for the day of God in holy conduct and godly life.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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