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두번째 주일 / 9월 두번째 주일
창조절, 창조의 원리는 사랑과 돌봄
시편 147:10 - 20
정해빈 목사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슨이 쓴 [이기적인 유전자, The Selfish Gene]라는 책이 있습니다. 1976년 옥스퍼드 출판사에서 출판되었는데 30년이 지난 2006년에 개정판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자연과학/생물학/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진화생물학의 교과서로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이 말하는 “이기적(selfish)” 이란 말은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욕심이 많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를 복제해서 끝까지 생존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유전자가 어떻게 해서든지 끝까지 생존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가리켜서 “이기적(selfish)”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우리 몸 안에는 유전자(DNA, Gene)가 있는데 유전자의 제일 큰 관심은 자기복제, 생존본능, 자기를 보존하는 것입니다. 유전자는 자기를 복제하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자기를 복제해서 계속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에 유전자는 이 목적을 위해서 항상 이기적인 선택을 합니다. 내가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내 몸 안에 있는 유전자가 이기적입니다. 내가 먼저 살아남기 위해서 남과 경쟁할 수도 있고 살기 힘든 환경을 극복할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유전자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복제, 자기보존을 하려고 합니다. 진화가 무엇이냐면 열등한 유전자는 사라지고 우수한 유전자가 자기를 복제해서 끝까지 살아남는 것이 진화입니다. 모든 생물은 자기를 보존하기 위해서 이기적으로 태어났습니다. 이기적인 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라고 이 책은 설명합니다. 자기복제, 자기보존은 모든 생명의 본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생명은 가능한 오래 생존하려고 하는 본능에 따라서 행동을 합니다. 만약 생존하려는 본능이 없다면 지구상의 모든 생명은 다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자기를 보존하고 복제하려는 유전자가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건강에 관심을 갖고 좋은 음식을 먹고 자녀를 낳습니다. 자기를 보존하려는 본능은 나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향해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죽지 않고 끝까지 생존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생명들이 이기적인 유전자의 지배를 받습니다. 몸 안에 있는 유전자가 자기를 보존하기 위해서 이기적인 선택을 하라고 명령을 내리면 모든 생명들은 유전자의 지시를 따르게 됩니다. 그런데 유전자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유일한 생명이 있는데 그 생명이 바로 인간입니다. 여기에 바로 인간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내 몸 안에 있는 유전자가 생존하기 위해서 이기적인 선택, 본능에 따라서 행동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사람은 때때로 이기적인 유전자의 명령을 거부하고 이타적인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때에 따라서는 나 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나 보다 약한 사람을 돌보기도 하고 선함과 아름다움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이 여러 명 모여 있는데 먹을 음식이 부족한 상황이 닥쳐왔습니다. 내 몸 안에 있는 유전자는 내가 먼저 살아야 하니까 내가 먼저 빨리 음식을 먹으라고 명령합니다. 그것이 내 몸 안에 있는 생존의 욕구입니다. 내가 먼저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 유전자의 명령을 거부하고 더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양보하기도 합니다. 오직 사람만이 생존본능/자기복제를 거부하고 더 높은 가치를 위해서 세상을 살기도 합니다. 바로 여기에 사람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사람이 언제 아름다우냐? 본능에 따라 살지 않고 더 높은 뜻에 살 때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유전자가 우리를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전자를 주인으로 모시고 살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사명을 기억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본능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이 세상을 사랑으로 돌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912년 영국을 떠나 뉴욕으로 가던 타이타닉 호가 침몰했을 때 여성들과 아이들이 먼저 구명보트에 탔고 선장은 끝까지 배에 남아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아마도 내 몸 안에 있는 유전자는 어떻게 해서든지 나부터 먼저 살아야 한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이타적인 결정을 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람만이 이기적인 유전자를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동물들을 가만히 보면 동물들도 때로는 이기적인 본능을 거부하고 이타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코끼리는 동료 코끼리가 죽었을 때 24시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슬퍼하고 흡혈박쥐는 자신이 애써 얻어 온 피를 배고픈 동료 박쥐에게 나누어줍니다. 이런 것을 보면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들도 본능에 따라 살지 않고 서로 사랑하고 돌보면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물들도 이렇게 서로 사랑하고 돌보면서 살아가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돌보지 않는다면 사람은 동물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인 것은 서로 공감하는 능력, 함께 아파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겉으로 보면 양육강식, 생존투쟁, 무한경쟁이 지배하는 세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자세히 보면 사랑과 돌봄의 원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이 지구가 망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돌보는 생명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돌봄의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여기시고 배우자를 만들어 주셨고 사람으로 하여금 이 세상을 아끼고 사랑하고 돌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유전자에는 나부터 생존하려는 본능도 있지만 서로 사랑하고 돌보는 본능도 있습니다. 이 세상의 기본 질서는 경쟁과 싸움이 아니라 상부상조와 공생입니다. 같은 종끼리 싸우고 경쟁하면 다 같이 죽게 되지만 서로 상부상조하면 그 종은 오랫동안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와 국가가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서로 다투고 싸우면 인간은 이 지구에서 멸종하게 될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돌보는 생명만이 이 지구에서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인류 역사는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47편 말씀을 보면 “주님은 힘센 준마를 좋아하지 않으시고 빨리 달리는 힘센 다리를 가진 사람도 반기지 아니하신다. 주님은 오직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과 당신의 한결 같은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을 좋아하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힘이 쎈 말을 좋아하지 않고 빨리 달리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 자신의 힘을 자랑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경외하고 주님의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을 좋아하신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고 돌보시는 것처럼 이 세상을 사랑하고 돌보는 사람을 주님은 좋아하십니다. “주님은 말씀을 보내셔서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시니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어 흐른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얼음처럼 차가운 세상이 따뜻한 세상으로 변하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본능에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오늘 말씀은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스려라”는 말씀은 억압하고 통치하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돌보는 것처럼, 우리들도 이 세상을 사랑하고 돌보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창조세계를 존중하고 사랑하고 돌보아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TV를 보다가 어느 강가에서 수컷 개가 죽은 암컷 옆에서 며칠동안 꼼짝하지 않고 계속 앉아 있고 다른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짓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러다가는 수컷도 죽겠구나 싶어서 동물 구조팀이 수컷을 안전하게 격리시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름없는 개에게도 사랑과 돌봄의 원리가 작동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양육강식, 적자생존, 정글의 원리가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러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경쟁하고 싸우는 생명은 지구에서 쉽게 멸종하지만 서로 사랑하고 돌보고 협력하는 생명은 끝까지 생존한다는 것을 지구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일 인류가 서로를 미워하고 난민을 추방하고 핵무기를 만들면 인류도 이 지구 역사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과 돌봄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사랑과 돌봄의 정신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Creation, creation with love and care
Psalm 147:10 - 20

The LORD doesn't care about the strength of horses or powerful armies. The LORD is pleased only with those who worship him and trust his love. Everyone in Jerusalem, come and praise the LORD your God! He makes your city gates strong and blesses your people by giving them children. God lets you live in peace, and he gives you the very best wheat. As soon as God speaks, the earth obeys. He covers the ground with snow like a blanket of wool, and he scatters frost like ashes on the ground. God sends down hailstones like chips of rocks. Who can stand the cold? At his command the ice melts, the wind blows, and streams begin to flow. God gave his laws and teachings to the descendants of Jacob, the nation of Israel. But he has not given his laws to any other nation. Shout praises to the LORD! (Psalm 147:10-20)

There is a book called [The Selfish Gene] by evolutionary biologist Richard Dawkins. The term "selfish" does not mean to be greedy but trying to survive to the end by copying itself. The greatest interest of genes is self-reproduction, survival instinct, self-preservation. The gene was born to replicate itself. Genes always make selfish choices because they have to replicate and survive. Every creature was born selfish to preserve itself. Self-reproduction, self-preservation can be said to be the instinct of all life. All life acts according to the instinct to survive as long as possible. If there was no instinct to survive, all life on Earth would have disappeared. We can say that instinct to preserve oneself is not bad but it is natural. In the book of Genesis, God said to the all the creatures, “grow, multiply, and fill the earth.” It is good for us to survive to the end without dying.

All life in this world is dominated by selfish genes. But humans are not subject to these genes. The scriptures say that we are not created to live for instincts but for higher values. Just as God made the world with love and care, we are called to serve God and care for this world with love. We are not created by instinct but by the image of God. People sometimes think of others first, care for weaker ones than themselves, and seek goodness and beauty. When the Titanic sank in 1912, the women and children first got on the lifeboat, and the captain stayed on the boat until the end. Perhaps the genes in his body should have told him to live first of all. But many people made altruistic decisions in such a difficult environment.

Today’s scripture says, “The LORD doesn't care about the strength of horses or powerful armies. The LORD is pleased only with those who worship God and trust God’s love. At God’s command the ice melts, the wind blows, and streams begin to flow.” We are not called to live by instinct but by the will of God. The history of the Earth shows us that the life competing and fighting is easily extinct on Earth, but the life that loves, cares and cooperates with each other survives to the end. If the humankind hates the refugees and make nuclear weapons, It will disappear from the Earth. As God created the world with love and care, we are also called to live with love and care.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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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첫번째 주일 / 9월 첫번째 주일
창조절, 아테네 사람들은 들으십시오
사도행전 17:16 - 28
정해빈 목사



유럽에 있는 도시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가 그리스의 아테네입니다. 그리스 아테네를 방문하신 분들은 도시 곳곳에 수천 년 된 유적들이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이 쓰여질 당시에는 로마제국이 그리스를 점령했는데, 이탈리아 로마가 법과 행정과 군사력과 도로로 세상을 지배했다면 그리스는 종교와 철학과 예술로 로마 사회를 지배했습니다. 로마제국의 수도 로마가 행정수도라고 한다면 그리스의 아테네는 문화수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그리스의 수준높은 종교/철학/예술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문화를 모방했습니다. 로마제국을 그리스-로마 사회라고 하는데, 그만큼 그리스의 문화가 로마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아테네 사람들은 아테네 곳곳에 신전을 세우고 여러 신들을 숭배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여러 신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들은 신들의 우두머리인 제우스, 제우스의 아내인 헤라, 전쟁과 지혜의 신 아테나, 아름다움과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사냥과 출산의 여신 아르테미스, 곡물의 신 데메테르, 불의 신 헤스티아 등을 섬겼습니다. 혹시라도 신을 빠뜨려서 벌을 받을까봐서, “알지못하는 신에게” 이렇게 이름을 붙인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아테네는 종교성이 높고 철학과 예술이 발전한 도시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그리스 아테네를 대표하는 두 개의 철학 학파가 나옵니다. 첫번째는 에피쿠로스학파이고 두번째는 스토아학파입니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주의를 가리키는데 여기서 말하는 쾌락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상태가 아니라, “육체의 고통과 마음의 근심이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육체의 고통과 마음의 근심이 없는 상태가 최고로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육체의 고통과 마음의 근심은 세상 일에 욕심을 부리기 때문에 옵니다. 그러므로 명예와 명성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사치를 멀리하고, 걱정거리를 미리 제거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진정한 행복이 온다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복잡한 세상일에 신경쓰지 않고 자연을 벗 삼아서 조용하게 사는 삶이 가장 좋은 삶입니다. 어떤 사람이 당장 쾌락을 얻으려고 도박에 빠져들었다가 나중에 도박 중독이라는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진정한 쾌락주의자가 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쾌락을 얻으려면 육체에 고통이 없어야 하고 마음에 근심이 없어야 합니다. 그들은 고통이나 근심이 되는 일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런 욕심 내지 않고 그냥 조용하게 사는 삶이 가장 좋은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어떻게 하면 근심 걱정 없이 편안하게 인생을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두번째로 나오는 스토아학파는 이성과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감정적으로나 충동적으로 살면 안 되고 신이 주신 이성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평정심을 잃지 않아야 하고 이성을 개발해야 합니다. 신이 나에게 주신 국가와 사회와 가정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는데 그것은 “하늘이 무너져도 그대의 의무를 다하여라, 불행은 우리의 행복을 감소시킬 수 없다, 불행이 오면 불행을 이겨라” 라는 말이었습니다. 자기의지, 판단력, 평정심, 행동을 강조했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에피쿠로스학파는 육체의 고통이나 마음의 근심이 없는 소극적인 삶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생각했고 스토아학파는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자기의 의무를 다하는 적극적인 삶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에피쿠로스학파는 불행을 피하는 길을 택했고 스토아학파는 불행을 이기는 길을 택했습니다. 에피쿠로스학파는 국가나 명예나 출세에 관심이 없었고 스토아학파는 국가나 명예나 출세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어떤 인생이 참된 인생이냐? 불행을 미리미리 피하면서 살아야 하느냐 아니면 불행과 싸우면서 살아야 하느냐, 당시 사람들은 인생에 대해서 이런 서로 다른 두 가지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이 종교/철학/예술에 있어서 굉장히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2차 선교여행 때 지중해를 건너서 빌립보와 데살로니가를 거쳐서 그리스 문명의 중심지 아테네에 도착했고 아테네 언덕에 있는 아레오바고 법정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같이 종교와 철학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대학교수와 철학자들 앞에서 바울이 설교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크게 2가지를 강조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나 사람이 바치는 제사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아테네 곳곳에 성전을 세우고 화려하게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성전이나 제사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만물이 다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성전에 가두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건물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십시오.”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이 기분 나빴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라고 외쳤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오묘하고 신비로우신 분이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눈의 종교가 아니라 마음과 귀의 종교입니다. 예수께서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을 비판했듯이, 바울도 화려한 아테네 성전을 비판했습니다. 건물이 크고 화려하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건물에 계시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타락하면서 중세 시대 사람들이 크고 화려한 예배당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유명한 성당을 가보면 너무 화려해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곳을 방문했다고 해서 경건하다는 느낌이 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검소하고 단순한 예배당, 아무런 장식도 없고 하얀색 페인트에 조그만 십자가 하나 있는 예배당이 오히려 더 경건하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을 건물과 제사에 가두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둘째로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고 인류가 땅 위에 살게 하셨으며 인류가 살 시기와 거주할 지역의 경계를 정해 놓으셨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기 때문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고 우리들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들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건물 안에 계시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운 곳에 계신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 속에 계시고 내 마음 속에 계시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 계십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을 통해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는 것처럼, 우리들은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이 오늘날에는 당연하지만 옛날에는 당연하지 않았습니다. 아테네 출신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는 이성이 없기 때문에 집안에 있는 동물과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자신들이 최고의 지성인이고 최고의 종교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을 향해서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기독교 백인우월주의자들처럼 하나님을 잘못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하나님을 요술방망이나 슈퍼맨처럼 생각해서 내가 필요할 때마다 언제나 꺼내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배당을 크게 짓고 제사를 크게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두가 잘못된 생각들이고 교만스러운 생각들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붙잡을 수 없지만 동시에 내 안에 계시고 우리들의 사랑 속에 계십니다. 9월부터 시작되는 창조절 절기를 묵상하면서 겸손함 마음으로 신비롭고 오묘하신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고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깊이 체험하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Creation, to the people of Athens
Acts 17:16 - 28

So Paul stood up in front of the council and said: People of Athens, I see that you are very religious. As I was going through your city and looking at the things you worship, I found an altar with the words, "To an Unknown God." You worship this God, but you don't really know him. So I want to tell you about him. This God made the world and everything in it. He is Lord of heaven and earth, and he doesn't live in temples built by human hands. He doesn't need help from anyone. He gives life, breath, and everything else to all people. From one person God made all nations who live on earth, and he decided when and where every nation would be. God has done all this, so that we will look for him and reach out and find him. He isn't far from any of us, and he gives us the power to live, to move, and to be who we are. "We are his children," just as some of your poets have said. (Acts 17:22 – 28)

When Paul visited Athens, people called Epicureans and Stoics were living in Athens. Epicureans thought that happiness would come when we passively keep away any physical suffering or mental anxiety, but Stoics insisted that happiness would come, when we use our reason and actively fulfilled our all kinds of duties for society and nation. Whereas Epicureans tried to avoid physical and mental sufferings, Stoics tried to overcome misery. While Epicureans were not interested in honor, wealth, and achievement, Stoics were interested in honor, fame, and achievement. People in Athens liked to debate on life and happiness, and two groups had their own philosophy about life. Should we avoid misfortune? Or should we overcome unhappiness? Indeed the people of Athens were highly religious, academic, and philosophical.

Paul said to them, “First, God does not need a temple and sacrifice built and offered by human hands because Creator God made everything in this world. Do not confine God to the temple. Do not boast about the building before God. Do not mistake that you know God well. Be humble before God. Second, God gave life and breath to all people, made mankind to live on earth, and set the boundaries of mankind's time and place of residence. God is not far away from us. We live, move, and exist in God. We are all children of God. Do not think that only you are people of God. Everyone in this world is all people of God.” Today’s scripture reminds us that we should serve God with a humble heart. Meditating on the new season of Creation, let us praise God who comes to us with mystery and awe. Truly, we live, move, and exist in God.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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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열세번째 주일 / 8월 네번째 주일
성령강림절, 인종의 장벽을 넘어서
마태복음 15:21 - 28
정해빈 목사


성도님들 반갑습니다. 벌써 8월 네번째 주일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두로와 시돈, 가나안 지방으로 가실 때가 있었습니다. 두로와 시돈, 가나안 지역은 갈릴리 북쪽 지금의 레바논 지역을 가리킵니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그 지역에 사는 동포들을 만나기 위해 그곳에 가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지역에 사는 가나안 원주민 여자가 예수께 나와 이렇게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 딸이 귀신이 들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너무 바쁘셔서 대답을 안했을 수도 있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모든 사람을 다 만날 수가 없어서 대답을 안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 여인은 계속 도움을 요청하니까 제자들이 나서서 이 여인을 안심시켜서 보내야 하지 않겠냐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나의 사명은 나의 동포, 나의 백성들을 구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민족에게는 관심이 없다고 말씀하시고 이 여인의 청을 거절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이 속담에 의하면 가나안 원주민 사람은 개가 됩니다. 실제로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 사람들을 개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물러서지 않고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설사 나를 개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그러니 나에게도 부스러기 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뒤로 물러서지 않고 예수님을 붙잡고 대화하고 때로는 예수님과 논쟁하는 이 여인의 의지가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들에게 인종과 성의 문제를 생각하게 해 줍니다. 인종차별, 성차별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딸을 고쳐달라고 온 이 여인은 첫째로 두로와 시돈 지방에 사는 가나안 원주민이었고 둘째로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습니다. 당시 기준으로 보면 이 사람은 유대인이 아니라 가나안 원주민이었고 거기에 더해서 여성이었으니 이 사람은 무시해도 좋을 만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오랫동안 강대국 제국들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앗시리아-바벨론-페르시아-그리스-로마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제국들의 침략에 저항하였고 그것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활동하신 갈릴리는 하나님만을 왕으로 섬기는 전통이 살아있는 곳이었고 외세에 저항하는 대표적인 지역이었습니다. 이렇게 갈릴리 사람들은 식민지 백성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차별을 받으면서도 동시에 힘이 약한 주변의 원주민들을 배척하고 무시했습니다. 비록 우리들은 지금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우리들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고, 너희들은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과 제자들도 유대인이기 때문에 가나안 원주민 여자가 와서 도와달라고 하니까 처음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힘이 약한 사람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습니다. 힘이 약하면 억울한 일을 당해도 세상이 잘 알아주지 않습니다. 선진국에서 사람이 죽으면 크게 뉴스가 되지만 가난한 나라에서 사람이 죽으면 뉴스가 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힘이 약한 사람은 사람들이 들을 때까지 여러 번 외쳐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입니다. 이 여인도 예수님의 귀에 들릴 때까지 외치고 또 외쳤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에게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이라고 불렀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의 족보가 나오는데 그 족보를 보면 가나안 원주민 여성 3명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거쳐서 다윗을 거쳐서 예수님에게 이르는 족보에 다말, 라합, 룻의 이름이 나옵니다. 다말, 라합, 룻이 있었기에 다윗이 태어날 수 있었고 예수님이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피 속에 가나안 원주민들의 피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살다 보면 이런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남들이 우리를 차별하면 우리는 분노하고 억울해 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렇게 차별을 받으면서도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우리보다 힘이 약한 사람들을 차별하기도 합니다. 백인들이 동양인을 차별하면 우리는 분노하지만 우리들도 무의식적으로 힘없고 약한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나 피부색이 검은 사람들을 무시하기도 합니다. 또는 우리들이 무의식적으로 백인들에게는 상냥하지만 흑인들에게는 차갑게 대하기도 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들도 차별받으면서 동시에 차별하면서 세상을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인종차별은 남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가 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런 면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들도 사람을 차별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인종차별과 성차별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인종/민족우월주의자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소수민족, 소수종교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독일 게르만 민족은 자기 민족이 제일 우수하다고 주장하면서 유대인들과 집시들을 학살했고,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을 열등하다고 차별했고, 중국 사람들은 오랫동안 주변 나라들을 오랑캐라고 무시했습니다. 오늘날에는 기독교 백인우월주의자들이 공공연하게 유색인종과 유대인과 이슬람종교인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지지난 주 미국 버지니아 샬러츠빌에서는 기독교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나찌 깃발과 KKK 깃발을 들고 행진하기도 했고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집회에 차를 몰고 와서 테러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옛날 미국 남북전쟁이 한창일 때, 백인들이 하얀 옷을 입고 횃불을 들고 행진하면서 흑인들을 나무에 매달아 죽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라진 줄로 알았던 KKK 깃발과 나치 깃발이 다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캐나다도 예외는 아닙니다. 지난 1월 29일 퀘벡의 한 이슬람 사원에 괴한들이 총을 발사해서 6명이 숨지고 18명이 다친 일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백인우월주의자들은 유색인종, 유대교, 이슬람 사람들을 테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백인우월주의자”라는 말이 얼마나 잘못된 말인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잘못된 생각이기는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자기가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백인우월주의자”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기독교인이 인종차별주의자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인종차별을 반대하면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께서는 유대인과 가나안 사람과 사마리아인과 로마인을 차별없이 대하셨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 신자들은 헬라인들을 향해서 예수를 믿는 것과 동시에 유대인처럼 할례/음식/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우월주의자들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헬라인들에게 유대인의 전통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면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오늘날로 말하면 진보적인 사람이었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예수께서는 가나안 원주인 여자를 향해서 “그대의 믿음이 참으로 큽니다. 그대의 소원대로 될 것입니다” 말씀하시고 그 여인의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셨지만 나중에는 이 여인의 노력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 여인도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라는 사실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의 편견을 깨트려 주었습니다. 인종 문제에 있어서는 이 여인이 예수님의 선생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난 6월 7월 8월 성령강림절 절기를 지켰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성령을 받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방언하는 사람이 성령받은 사람일까요? 제일 꼴찌 은사가 방언이고 제일 첫째 은사가 사랑입니다. 누가 성령받은 사람이냐? 인종에 대한 편견없이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성령받은 사람입니다. 성령께서는 차별과 증오의 장벽을 허무십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인종의 장벽을 뛰어넘어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entecost, beyond racial barrier
Matthew 15:21 – 28

Jesus left and went to the territory near the cities of Tyre and Sidon. Suddenly a Canaanite woman from there came out shouting, "Lord and Son of David, have pity on me! My daughter is full of demons." Jesus did not say a word. But the woman kept following along and shouting, so his disciples came up and asked him to send her away. Jesus said, "I was sent only to the people of Israel! They are like a flock of lost sheep." The woman came closer. Then she knelt down and begged, "Please help me, Lord!" Jesus replied, "It isn't right to take food away from children and feed it to dogs." "Lord, that's true," the woman said, "but even dogs get the crumbs that fall from their owner's table." Jesus answered, "Dear woman, you really do have a lot of faith, and you will be given what you want." At that moment her daughter was healed. (Matthew 15:21-18)

When a Canaanite woman asked for help, Jesus at first did not listen to her request. It would be because Jesus was too busy or this woman was not Jewish. Even Jesus said, “I am only sent to the sheep that have lost the way of the house of Israel. It is not right to give bread to dogs.” However, this woman did not back down and replied, “Dogs also eat crumbs that fall on their masters' table.” This conversation made Jesus realize that God loves everyone. Finally Jesus said to the Canaanite woman, “Your faith is indeed great. I will be your wish,” and healed her daughter. Jesus acknowledged that this woman is also a loving daughter of God. This woman broke Jesus' prejudice. In racial matters, this woman became the teacher of Jesus.

We hear news these days that racial supremacists terrorized people who marched against racial discrimination, even some of them marching with Nazi flags. Racial discrimination and sex discrimination continue today. But today's Word shows that the Holy Spirit breaks the barrier of discrimination. We have meditated on the season of the Holy Spirit last 3 months, from June to August. Today’s scripture shows that those who love people without prejudice are the ones who received the Holy spirit. Truly the Holy Spirit breaks apart the barriers of discrimination and hatred. As Christians, we cannot be racists. We are called to be the person of the Holy Spirit who goes beyond the barriers of race and loves all people.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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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열한번째 주일 / 평화통일주일 / 8월 두번째 주일
성령강림절, 에서와 야곱이 화해하다
창세기 33:1 - 10
정해빈 목사


매 주일마다 읽어야 하는 성경말씀을 성서일과라고 부릅니다. 구약에서 하나, 시편에서 하나, 복음서에서 하나, 서신서에서 하나, 이렇게 4개의 본문으로 되어 있는데, 전 세계의 많은 교회들이 성서일과를 따라서 매주일 성경본문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요즘 성서일과를 보면 구약의 말씀으로 창세기 야곱 이야기가 계속 나옵니다. 야곱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은 신앙적인 교훈을 줍니다. 그래서 저도 요즘 성서일과를 따라서 야곱 이야기를 계속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야곱에 대한 세번째 이야기입니다. 야곱이 20년간 살았던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오는 중에 형 에서를 만나 화해했습니다. 서로 원수가 되었던 형과 동생이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성경 이야기는 화해의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죄를 범해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는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들을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죄를 범해서 자연과 원수가 되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들이 자연과 화해하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며 왕래도 하지 않고 원수처럼 지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아 지방으로 가셔서 사마리아 사람들, 사마리아 여인과 만나시고 대화하심으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을 화해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남녀 차별이 심했는데, 예수님은 여성들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동역자로 삼아 주심으로서 남성과 여성을 화해시켜 주셨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성경책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화해의 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갈등하고 싸우고 죽이는 이야기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 전체를 읽어보면 성경의 메시지가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 용서와 화해를 다룬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 만물이 서로 화해하고 평화를 누리도록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셔서 우리들이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도록 역사하십니다. 악령은 싸우고 다투고 미워하고 갈등하게 만들지만 성령은 사랑하고 용서하고 화해하게 만듭니다. 우리들도 성령을 따라서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미워하고 싸우고 복수하는 신앙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신앙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33장을 보면 야곱이 형 에서와 화해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화해는 그냥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야곱은 형과 화해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첫째, 형에게 사람을 보내서 자신이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정중하게 미리 알렸습니다. 둘째, 형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양과 염소와 소와 낙타와 나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염소 이백 마리, 양 이백 마리, 송아지 쉰 마리, 낙타 서른 마리, 나귀 서른 마리, 오늘날로 말하면 선물 폭탄을 준비해서 그것을 3개로 나누어서 형에게 주었습니다. 선물을 한번 주는 것보다 3번 주는 것이 더 효과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셋째, 마찬가지로 형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자신의 부인들과 가족들을 3그룹으로 나누어서 형을 만나도록 했습니다. 종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이 맨 앞에 서게 했고, 레아에게서 난 자녀들이 두 번째로 서게 했고, 자신과 라헬이 마지막에 서게 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야곱이 얼마나 머리가 좋은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형이 가족들을 죽이려고 하면 일부라도 살아남아야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야곱은 형의 마음을 누그러트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형과 동생이 만났을 때의 감동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야곱이 형을 만나자 마자 사죄의 뜻으로 일곱 번 땅에 엎드려 절을 했고 에서가 동생을 껴안고 함께 울었습니다. 에서가 동생과 화해한 것은 선물을 많이 주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선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심어린 마음입니다. 에서는 야곱이 일곱 번 땅에 엎드려 절하는 것을 보고 동생에 대한 원한을 풀었습니다. 야곱이 살아남기 위해서 절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야곱의 이런 행동은 형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형보다 세상에 먼저 나오려고 형의 발꿈치를 붙잡고 나온 야곱이 형 앞에서 일곱 번 엎드려 절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기적이고 교활한 야곱이 일곱 번 땅에 엎드려 절을 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야곱이 에서를 만나기 전에 하나님을 만나 크게 변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32장을 보면 야곱이 에서를 만나기 전날 밤에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면서, 형과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고민하면서 밤새도록 씨름을 했습니다. 하나님과 씨름했다는 말은 하나님을 붙잡고 밤새도록 기도하고 고민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시간은 야곱의 인생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두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야곱은 움켜쥐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하나님과 씨름하는 자)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남을 속이고 경쟁하고 무언가를 움켜쥐면서 세상과 씨름하면서 살았다면 이제부터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 하나님과 씨름하는 사람이 되라는 뜻에서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야곱은 무언가를 붙잡는 것을 잘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세상의 물질과 권력을 붙잡는 사람이었다면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붙잡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번째, 하나님께서 야곱의 허리를 쳐서 야곱을 평생 절뚝이며 사는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허리는 힘을 상징합니다. 허리뼈/엉덩이뼈를 쳤다는 말은 이제부터는 육체적은 힘을 쓸 수가 없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허리를 치셔서 야곱이 더 이상 힘을 쓰면서 살 수 없게 만드셨습니다. 야곱을 겸손하게 만드시려고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남을 속이면서 살지 말고 남에게 의지하면서 살아라, 힘 자랑하지 말아라, 겸손한 사람이 되어라.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뜻에서 그의 허리를 치셨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만나는 두가지 체험, 이름이 바뀌고, 허리를 다치는 체험을 통해서 겸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런 체험이 있었기에 야곱은 형 앞에서 일곱 번 땅에 엎드려 절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졌다면 하나님과 화해해야 하고 가족들과 멀어졌다면 가족들과 화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에 평안이 옵니다. 우리들이 화해해야 하는 이유는 화해하지 않으면 나의 삶에 평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먼저 화해해야 내 삶에 은혜와 평안이 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 인간과 자연의 화해, 남북한의 화해, 우리들의 화해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들은 오늘 8월 두번째 주일, 8.15 해방 72주년, 평화통일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2017년 8.15 평화통일 남북공동기도문"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올해도 어김없이 8월이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남과 북/북과 남에서 따로따로 광복을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얼마나 혹독한 세월이 흐르고, 잔인한 대결 속에 지냈습니까? 비록 일제의 억압은 사라졌지만, 아직도 민족끼리 증오하고 있으며, 여전히 주변 나라들의 간섭을 받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은혜의 하나님! 우리나라, 삼천리에 성령의 은총을 내리시옵소서. 평화의 맑은 햇살이 백두에서 한라까지 두루 비추고, 기쁨의 소나기가 온 나라의 메마른 대지를 적시게 하옵소서. 이 땅과 세계에 흩어진 팔천만 민족이 누구나 행복하고, 저마다 주인으로 살도록 인도하옵소서. 그리하여 하나 되어 더욱 커진 우리 민족이 온 세계를 두루 섬기게 하옵소서.” 화해라고 해서 같이 살아야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에서와 야곱은 화해했지만 떨어져 살았습니다. 약간 떨어져 사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화해의 첫걸음은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지 않고 사는 것이 화해입니다. 에서와 야곱이 화해한 것처럼, 저희 민족이 화해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앞에서 힘 자랑하지 않게 하시고,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화된 것처럼, 저희들도 하나님과 씨름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기도하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entecost, Esau and Jacob were reconciled
Genesis 33:1 – 10

Now Jacob looked up and saw Esau coming, and four hundred men with him. So he divided the children among Leah and Rachel and the two maids. He put the maids with their children in front, then Leah with her children, and Rachel and Joseph last of all. He himself went on ahead of them, bowing himself to the ground seven times, until he came near his brother. But Esau ran to meet him, and embraced him, and fell on his neck and kissed him, and they wept. When Esau looked up and saw the women and children, he said, ‘Who are these with you?’ Jacob said, ‘The children whom God has graciously given your servant.’ Then the maids drew near, they and their children, and bowed down; (Genesis 33:1 – 6)

Leah likewise and her children drew near and bowed down; and finally Joseph and Rachel drew near, and they bowed down. Esau said, ‘What do you mean by all this company that I met?’ Jacob answered, ‘To find favour with my lord.’ But Esau said, ‘I have enough, my brother; keep what you have for yourself.’ Jacob said, ‘No, please; if I find favour with you, then accept my present from my hand; for truly to see your face is like seeing the face of God—since you have received me with such favour. Please accept my gift that is brought to you, because God has dealt graciously with me, and because I have everything I want.’ So he urged him, and he took it. (Genesis 33:7 – 11)

2017 North South/South North Joint Prayer for Peaceful Reunification

God of grace! Once again, we greet the month of August, the month of Independence where North and South still celebrate separately and remember it differently. It has been a long, harsh period, one with cruel struggles between the two countries. No longer are we oppressed by Japanese forces, but our people are still filled with contempt for each other and our country is still challenged by neighboring forces. Lord, pity us.

God who rules history! For the last 72 years, we dreamed of being one, but we lived like foes, not living up to our dreams. We lived separated from our family and torn apart by different ideology and systems. Lord, bring the history of our people together with your holy hands. Let us hope for unification with passionate hearts and work together so fervently that we shed the sweat of hope. For every August we encounter, help us sincerely repent with our hearts, and fill us with a strong will for unification.

God who leads peace! Lord, we speak of one people, one sisterhood/brotherhood while filled with hatred against each other. We have violated the spirit of the Inter-Korean Basic Agreement, the June 15 Joint Declaration, and the October 4 Joint Declaration and also firmly locked the doors of the Keumkang Mt. and Gaeseong Industrial Complex. Thus, we were left with a greater danger and greater threat. Lord, listen to our desperate cries that thirst for peace.

God who gives hope! Lord, help us to dream once more of a beautiful land where no joint-military exercise is needed. Let us welcome a new world where we are not interfered with or challenged by neighboring strong powers. Let us once again begin with the same overwhelming determination we had as of August 15, 1945. Please quickly open the doors of intercommunication and let us walk hand in hand for joint prosperity. Lord, let the North and South greet each other without prejudice. Help us newly begin a history of reconciliation and embracement on this land.

God of grace! Bestow your grace upon the whole of Korea. Shine down pure rays of peace from Baekdu to Halla, and wet the entire land with showers of joy. Give happiness to the 80 million fellow Koreans throughout this land and this world, and guide them to be leaders of their own lives. Bring our strengthened community to be servants of the world.

God of Peace, we pray in Jesus name.

August 15, 2017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n Korea
Korean Christian Federatio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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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열번째 주일 / 8월 첫번째 주일
성령강림절, 야곱의 기도
창세기 28:20-22, 32:9-11
정해빈 목사


히브리/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믿음의 조상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 하나님 백성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너는 믿음의 조상이 되어라, 복의 근원이 되어라, 너희 후손이 바다처럼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이스라엘 사람들의 첫번째 조상은 아브라함이지만 그들의 실제적인 조상은 야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낳은 12 아들이 나중에 이스라엘의 12 지파가 되었습니다. 히브리/이스라엘 사람들이 야곱을 실제적인 조상으로 여긴 것은 단지 야곱의 자녀들이 12지파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야곱의 인생이 자신들의 인생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야곱이 첫째가 아니라 둘째로 태어난 것처럼, 히브리/이스라엘 백성들도 강대국 백성이 아니라 약소국 백성으로 태어났습니다. 야곱이 불리한 환경을 극복하고 자기 인생을 개척한 것처럼, 그들도 불리한 환경을 극복하고 살아남았습니다. 야곱이 어려운 순간마다 기도하면서 어려움을 극복한 것처럼, 그들도 어려운 순간마다 기도하면서 어려움을 극복했습니다. 본래 히브리/이스라엘 백성들은 강대국 사이에서 방랑하는 노예/나그네들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노예 생활을 하기도 했고 강대국들의 지배를 받기도 했고 포로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 끝에 오늘날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이스라엘 사람들은 야곱의 인생이 자신들의 인생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히브리/이스라엘 사람들은 야곱을 자신들의 실제적인 조상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부모를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는 길에 광야에서 자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것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돌베개를 기념비로 세우고 그곳 이름을 “베델,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렀습니다. 야곱은 라반의 집에 도착해서 함께 살다가 둘째 딸 라헬을 사랑하게 되었고 7년을 일하면 결혼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받게 됩니다. 7년을 하루처럼 일하고 결혼하고 보니까 옆에 누워있는 사람이 둘째 딸 라헬이 아니라 첫째 딸 레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외삼촌에게 항의하니까, 외삼촌이 “우리 동네에서는 둘째 딸이 먼저 결혼하는 법이 없다. 네가 라헬을 얻고자 하면 7년을 더 일해야 한다”고 말을 했습니다. 결국 야곱은 라헬과 결혼하는 조건으로 7년을 더 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라반의 꼼수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야곱이 그동안 일한 품삯을 달라고 하면서 양과 염소 중에서 얼룩이 졌거나 점이 있거나 색깔이 검은 양과 염소를 달라고 하니까 라반이 꾀를 부려서 얼룩이 졌거나 점이 있거나 색깔이 검은 양과 염소를 자기 아들들에게 주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야곱도 꾀를 부려서 양과 염소를 나무 가지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곳에서 물을 먹였습니다. 나무 가지 앞에서 물을 먹고 교미를 한 양과 염소는 무늬가 있는 새끼들을 낳았습니다. 이렇게 야곱과 라반은 서로 속고 속이면서 20년을 살았습니다. 서로 속고 속이면서 사는 인생이 행복할 리가 없습니다. 결국 야곱은 가족들을 이끌고 라반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곱은 7년 더하기 7년 거기에 6년을 더해서 총 20년을 일한 후에 가족과 재산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우리 옛말에 “뛰는 사람 위에 나는 사람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야곱은 똑똑한 사람이었고 남을 잘 속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덕분에 가족과 재산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보다 더 똑똑하고 교활한 외삼촌 때문에 고생을 해야만 했습니다. 남을 속이며 사는 사람은 잠깐 성공할지는 몰라도 언젠가는 자신보다 더 머리가 좋은 사람에게 속게 되어 있습니다. 꾀를 부리는 사람은 꾀로 망하게 될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보다 더 머리가 좋은 사람을 만나서 호되게 고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오랜 시간 동안 연단시키시고 훈련시키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야곱이 하나님께 드리는 두가지 기도가 나옵니다. 첫번째 기도는 야곱이 베델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에 드리는 기도였고 두번째 기도는 얍복강에서 홀로 남아서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첫번째 기도는 야곱이 집을 떠나면서 드리는 기도였고 두번째 기도는 20년이 지난 후에 집으로 돌아오면서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두가지 기도에 각각의 특징이 있습니다. 성도님들, 야곱의 첫번째 기도를 읽어보시고 이상한 점이나 어떤 특징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베델에서 홀로 잠을 자다가 하나님을 만난 후에 이렇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고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고 제가 안전하게 저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시면 주님이 저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며 제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에서 열의 하나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이 기도에 이상한 점이나 특징을 찾으셨습니까?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축복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조건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를 지켜 주시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시면,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섬기고 열의 하나를 바치겠다고 서약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자신을 축복하셨으면, “하나님, 저를 기억하시고 축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주님 뜻대로 살겠습니다” 이렇게 말해야 정상인데, 야곱은 얼마나 머리가 좋은지 마치 사업하는 사람들이 협상하듯이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하시는지 지켜보고 나서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기도를 서원기도라고 합니다. 우리들도 때로는 이 문제가 해결되면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도를 자꾸 하다보면 하나님과 협상하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하나님을 섬기고 해결해 주지 않으면 하나님을 섬기지 않겠다는 식으로 조건을 거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시험하고 협상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야곱의 성격이 이기적이고 계산적이다보니까 기도할 때도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야곱은 20년이 지난 후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에 얍복강에 홀로 남아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보살펴 주신 하나님, 아버지 이삭을 보살펴 주신 하나님, 고향 친족에게로 돌아가면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저에게 약속하신 주님, 주님께서 주님의 종에게 베푸신 이 모든 은총과 온갖 진실을 이 종은 감히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제가 이 요단강을 건널 때에 가진 것이라고는 지팡이 하나뿐이었습니다만 이제 저는 이처럼 두 무리나 이루었습니다. 부디, 제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저를 건져 주십시오.” 성도님들, 두번째 기도의 특징이 무엇인지 발견하셨습니까? 두번째 기도에서는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을 말했고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고향을 떠날 때는 지팡이 하나뿐이었는데 지금 큰 가족을 이루었다고 말했고 형 에서의 손에서 자신을 지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첫번째 기도에서는 거래하고 협상하듯이 기도했는데 두번째 기도에서는 겸손하게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고 말했습니다. 야곱은 야곱(발꿈치를 잡았다)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처럼 불리한 환경을 극복하고 경쟁하면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원하는 것을 얻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른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뒤를 이어서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함이었지 남과 경쟁하고 승리하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이 사실을 나중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인생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성격을 겸손한 성격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보통 유대인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비즈니스를 잘 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럼 왜 유대인들은 머리가 좋고 계산을 잘할까요? 가정교육 때문일 수도 있고 신앙교육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 한가지를 더한다면 그들이 야곱의 후손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핏속에 야곱의 기질이 있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머리 좋고 계산 잘하고 똑똑하다고 해서 믿음의 조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의 조상이 되려면 복의 근원, 복을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 복을 나누어주라는 뜻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우리들을 복의 근원으로 부르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들과 우리 교회가 변화받아서 움켜쥐는 사람이 아니라 베푸는 사람으로, 복의 근원되는 인생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entecost, Jacob‘s two prayers
Genesis 28:20-22, 32:9-11

So Jacob rose early in the morning, and he took the stone that he had put under his head and set it up for a pillar and poured oil on the top of it. He called that place Bethel; but the name of the city was Luz at the first. Then Jacob made a vow, saying, ‘If God will be with me, and will keep me in this way that I go, and will give me bread to eat and clothing to wear, so that I come again to my father’s house in peace, then the Lord shall be my God, and this stone, which I have set up for a pillar, shall be God’s house, and of all that you give me I will surely give one-tenth to you.’ (Genesis 28:18-22)

And Jacob said, ‘O God of my father Abraham and God of my father Isaac, O Lord who said to me, “Return to your country and to your kindred, and I will do you good”, I am not worthy of the least of all the steadfast love and all the faithfulness that you have shown to your servant, for with only my staff I crossed this Jordan, and now I have become two companies. Deliver me, please, from the hand of my brother, from the hand of Esau, for I am afraid of him; he may come and kill us all, the mothers with the children. Yet you have said, “I will surely do you good, and make your offspring as the sand of the sea, which cannot be counted because of their number.”’ (Genesis 32:9-12)

Today's Words show us how Jacob's prayer has changed. Jacob gave his first prayer when he left home. The first prayer was to deal and negotiate with God. He vowed, "If you keep me, if you give me food and clothing, and if you let me go back to your father's house, I will serve you my God and give one-tenth to you." But 20 years later, Jacob gave God a more spiritual prayer. In the first prayer he tried to negotiate with God. But in the second prayer he humbly said that everything is the Lord's grace. Jacob was a smart and competent man. But God did not call him to compete with others and win the race. Just as called Abraham and Issac, God called Jacob to be the ancestor of faith, the source of blessing. We are also called to be the source of blessing, not someone who grabs something but blesses the world.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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