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세번째 주일 / 2월 네번째 주일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렸다

마가복음(Mark) 1:40-45, 7:31-37

정해빈 목사

  



1. 지난 주일에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오늘은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야기와 기적을 행하시는 이야기가 가장 많이 나옵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활동을 두 가지 단어로 요약하면 가르침과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왜 이렇게 기적 이야기가 많이 나올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예수님이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성경에는 왜 이렇게 기적 이야기가 많이 나올까요? 그만큼 예수님 시대에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간에 사람들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이 편히 쉴 시간이 없을 정도로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계속 예수님에게 몰려들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 시대에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몸과 마음이 아프고 병들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힘과 면역력이 점점 떨어지게 됩니다.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이치입니다. 그런가 하면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서 아플 수도 있고 개인적인 생활 습관이 잘못되어서 아플 수도 있습니다. 옛날에는 의학 기술이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염병 같은 병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옛날 사람들은 당뇨병, 콜레스테롤, 비만, 다이어트 같은 병들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주로 그런 병에 걸립니다. 이렇게 개인적인 생활 습관이 잘못되었거나 먹는 것이 잘못되어서 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병에 걸리는 이유가 개인적인 생활 습관 탓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적인 환경이 잘못되어서 병에 걸리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사람의 몸과 마음을 아프게 하는 몇 가지 사회적인 환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사회가 위험하고 불안하면 사람들은 몸과 마음에 병을 앓게 됩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로마 제국과 로마 제국이 임명한 헤롯 이라는 독재자가 유대 땅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식민지 백성이 되어 고통을 받습니다. 가족들 중에는 독립 운동을 하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악한 권력이 무력으로 백성들을 억압하고 과도한 세금을 부과합니다. 마가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이 귀신들린 사람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내 이름이 군대입니다” 대답을 합니다. 아마도 이 사람은 로마 군대로부터 억압을 받아서 정신을 잃어버렸던 것 같습니다. 사회가 위험하고 불안하고 불의하면 사람들이 고통을 받습니다. 옛날에는 정신이 조금만 이상하면 귀신에 걸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로 하면 일종의 정신병인데 옛날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다 귀신에 걸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회가 비정상적으로 굴러가고 스트레스가 많으면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한국처럼 살기 좋은 곳이 없습니다.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고 집 밖에 나가면 맛있는 식당도 많습니다. 전화로 주문하면 모든 것을 다 배달해 줍니다. 그런데 매일 40명, 일 년에 15,000명이 자살을 합니다. OECD 선진국 중에서 인구 대비 가장 많이 자살을 합니다. 이 세상에는 한국보다 못사는 나라들도 많은데 왜 그렇게 시골의 외로운 노인들과 청소년들이 자살을 많이 할까요? 아마도 무언가 굉장한 스트레스가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회가 위험하고 불안하고 불의하면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로 잘못된 종교가 사람들을 지배하고 억압하면 사람들은 몸과 마음에 병을 앓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가 그랬습니다. 사람이 지켜야 할 계명이 너무 많아서 일반 백성들이 그것을 다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계명을 지키지 못하면 자동적으로 죄인이 됩니다. 특히 종교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가장 만만한 사람들, 도저히 계명을 지킬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정죄하고 괴롭혔습니다. 어느 사회든지 가장 약하고 만만한 사람들이 희생양이 되기가 쉽습니다. 사람이 병이 든 것은 죄가 많아서 하나님께 벌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아픈 사람들 입장에서는 병들어 아픈 것도 서러운데 죄인이라고 손가락질까지 하니까 더 몸과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올바른 종교는 따뜻한 햇살과도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고 보여줍니다. 반대로 잘못된 종교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로막아서 아픈 사람을 더 아프게 합니다. 사람은 충분히 사랑을 주고받아야 건강해집니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동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생명은 사랑을 받아야 건강해 집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종교가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고 당신이 아픈 것은 벌을 받아서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그 순간 몸과 마음이 더 아플 것입니다. 잘못된 종교가 잘못된 신앙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사랑을 가로막으면 사람의 몸과 마음은 더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2.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병을 고치실 때 일정한 과정과 절차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신다는 소문이 갈릴리에 퍼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길을 가로막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옷을 붙잡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지붕을 뚫고 예수님께 다가가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보시고 “그대가 정말 낫기를 원합니까? 그대의 믿음이 그대를 구원하였습니다”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선하신 분이고, 나를 사랑하시고, 내 병을 고쳐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주님은 병에서 낫고자 하는 사람의 믿음을 먼저 보시고 그들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병에서 낫고자 하는 의지, 나을 수 있다는 확신이 중요합니다. 낫고자 하는 의지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의사도 그 사람의 병을 고칠 수 없습니다. 물론 믿음이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의 병이 다 낫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낫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의사도 그 사람의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간절하게 주님을 찾는 사람들을 먼저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대가 정말 병에서 낫고자 하는 지를 물으셨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거기에 주저앉지 말고 열심히 살려고 하는 의지가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 선한 분이신줄 믿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고쳐주실 줄 믿습니다. 주님, 내가 열심히 살겠습니다. 나를 고쳐주십시오” 주님은 이렇게 간절하게 호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보시고 그들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치료의 두 번째 단계는 몸과 몸의 만남입니다. 오늘 말씀 마가복음 7장을 보면 예수께서는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따로 데려가서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침을 뱉어서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따로 떨어진 장소, 그 사람을 자세하게 살피고 깊이 대화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로 그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그 사람의 몸을 만져 주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환자를 만지면 부정 탄다고 생각해서 아픈 사람을 절대로 만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픈 사람의 몸을 직접 만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말 한마디로 병자를 고치시지 않았습니다. “네 병이 나을 지어다”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가셔서 그 사람의 애환을 들으셨고 그 사람의 몸을 자세하게 만져주셨습니다. 한 사람의 병을 고치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 환자의 몸을 깊이 만져주셨습니다. 사랑이 있어야만 아픈 사람을 만질 수 있습니다. 사랑의 표현은 만지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이는 아픈 사람의 몸을 만질 수 없습니다. 만지면 부정 탄다고 해서 아무도 만지지 않는 그 사람을 예수님은 온 몸으로 만져주셨습니다. 최성혜 목사님 아버님 되시는 최용진 목사님께서 캐나다에 오셔서 우리 교회에 나오시면 성도님들을 만져 주십니다. 앞은 안보이시지만 대신 치료의 은사를 받으셔서 사람을 만지면 어디가 아픈지 정확하게 짚어내십니다. 온 힘을 다해서 몸을 만지시고 마사지를 해 주십니다. 사랑이 아니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아픈 사람을 따로 데리고 가셔서 온 힘을 다해 그 사람을 만져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세번째 단계로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보시고 하늘을 우러러 깊이 탄식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에바다, 열려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리게 되었습니다. 치료의 마지막 단계는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단계입니다.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보시고 깊이 탄식하셨습니다. 그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서 그의 아픔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아픈 사람을 껴안으시고 깊이 탄식하실 때 하늘 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병에서 낫고자 하는 믿음, 열심히 살고자 하는 믿음, 주님을 간절히 만나고자 하는 믿음이 기적을 일으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만져주실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으로 들어오셔서 함께 아파하실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을 간절하게 찾는 사람들을 만나주셨고 그들의 몸을 만지셨으며 그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셔서 같이 탄식하셨습니다. 아픈 사람을 끌어안으시고 깊이 탄식하시는 바로 그때 하늘 문이 열리고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늘 문이 열립니다. 주님께서 우리들과 늘 함께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치유의 기적이 오늘날에도 일어나는 줄로 믿습니다. 매순간마다 주님의 터치를 만나고 주님의 임재를 만나는 복된 성도님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His ears were opened, his tongue was released

Mark 1:40-45, 7:31-37


A leper came to him begging him, and kneeling he said to him, ‘If you choose, you can make me clean.’ Moved with pity, Jesus stretched out his hand and touched him, and said to him, ‘I do choose. Be made clean!’ Immediately the leprosy left him, and he was made clean. After sternly warning him he sent him away at once, saying to him, ‘See that you say nothing to anyone; but go, show yourself to the priest, and offer for your cleansing what Moses commanded, as a testimony to them.’ But he went out and began to proclaim it freely, and to spread the word, so that Jesus could no longer go into a town openly, but stayed out in the country; and people came to him from every quarter. (Mark 1:40-45)


Then he returned from the region of Tyre, and went by way of Sidon towards the Sea of Galilee, in the region of the Decapolis. They brought to him a deaf man who had an impediment in his speech; and they begged him to lay his hand on him. He took him aside in private, away from the crowd, and put his fingers into his ears, and he spat and touched his tongue. Then looking up to heaven, he sighed and said to him, ‘Ephphatha’, that is, ‘Be opened.’ And immediately his ears were opened, his tongue was released, and he spoke plainly. Then Jesus ordered them to tell no one; but the more he ordered them, the more zealously they proclaimed it. They were astounded beyond measure, saying, ‘He has done everything well; he even makes the deaf to hear and the mute to speak.’ (Mark 7:31-37)


According to the four gospels, Jesus cured and healed the sick during his public ministry. Matthew said in 4:23, "Jesus went throughout Galilee, teaching in their synagogues and proclaiming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and curing every disease and every sickness among the people. So his fame spread throughout all Syria, and they brought to him all the sick, those who were afflicted with various diseases and pains, demoniacs, epileptics, and paralytics, and he cured them. And great crowds followed him from Galilee, the Decapolis, Jerusalem, Judea, and from beyond the Jordan." In short, Jesus either taught the Kingdom of God or healed many people during his ministry. When the sick came to Jesus for healing, Jesus always asked them first, "Do you want to be made well?" In other words, Jesus wanted to confirm their belief by asking, "Do you believe that God loves you? Do you believe that God is good? Do you believe that God is not the one who punished you with disease?" The scriptures assert that the healing starts with this confirmation. They show that the miracle of healing always begins with their eagerness and passion for new life.


When a deaf man who had an impediment in his speech came to Jesus, Jesus took him aside in private place, away from the crowd, where he can open his mind safely to Jesus. Then Jesus put his fingers into his ears and spat and touched his tongue. This explanation shows that Jesus did not say merely a few words to heal him, but Jesus did everything with his body. In an ancient time, people never touched the sick because they believed that once they touch a sufferer, they become impure. But Jesus touched his body affirming his presence before God. Then looking up to heaven, Jesus sighed and said to him, ‘Ephphatha’, that is, ‘Be opened.’ The scripture says that immediately his ears were opened and his tongue was released. Jesus healed those who came to him by touching and sighing their suffering. It was Jesus’ sympathy and compassion that made healing possible. We pray for those who are suffering from the world of injustice and despair. May God touch their body and mind, and the heaven of healing be open for them.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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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두번째 주일 / 2월 세번째 주일

달란트 비유, 세번째 사람의 결심

마태복음 25:14 - 29

정해빈 목사





1. 사순절을 맞이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에 대해 설교하려고 합니다. 비유 설교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오늘 설교가 약간 어려울 수도 있는데 최대한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활동을 두 가지 단어로 요약하면 가르침과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하시면서 주로 가르치셨고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복음서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예수님이 가르치셨다는 이야기와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가르침과 기적 중에서 가르침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하나님 나라가 세상 나라와 어떻게 다른지, 하나님 나라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치셨는데 그때 주로 비유를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비유를 사용해서 말하면 청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무슨 이야기를 할 때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예를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청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를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누룩과 같다 이런 식으로 비유를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예수께서는 달란트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하늘 나라는 이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늘 나라는 하나님 나라를 가리킵니다. 마태는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이름을 감히 부를 수가 없어서 하나님 대신에 하늘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지금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높은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어쨌든 지금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달란트 비유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첫 번째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 두 번째 종에게는 두 달란트, 세 번째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열 달란트로 만들었고 두 번째 사람도 두 달란트를 네 달란트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 사람은 땅을 파고 한 달란트를 숨겼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주인은 첫 번째 사람과 두 번째 사람을 똑같이 칭찬했습니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하지만 세 번째 사람이 한 달란트를 그냥 땅에 묻어두었다고 말하자 주인은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알았다. 그렇다면 너는 내 돈을 돈놀이 하는 사람에게 맡겼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내가 와서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받았을 것이다.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서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가진 사람에게는 더 주어서 넘치게 하고 갖지 못한 사람에게서는 있는 것마저 빼앗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달란트 비유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셨습니다. 도대체 이 비유가 하나님 나라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요?

 

보통 교회에서는 이 말씀을 성실함과 게으름으로 해석을 합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사람은 성실하게 일해서 주인에게서 받은 달란트를 두 배로 만들었는데 세 번째 사람은 게을러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사람을 칭찬했고 세 번째 사람을 책망했습니다. 헬라어 달란트를 영어로 표현하면 탤런트(talent)가 됩니다. 주인은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을 똑같이 칭찬했습니다. “사람마다 받은 재능이 서로 다릅니다. 하지만 내가 재능을 적게 받았다고 불평하지 말고 내가 받은 재능을 100% 활용하면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똑같은 상을 내리십니다. 그러니까 내가 달란트 2개 받았다고 불평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재능을 활용하십시오.” 보통 이렇게 교회에서 설교를 많이 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비유의 말씀을 영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해석이 아니라 교회의 해석입니다. 교회는 지난 2000년 동안 예수님의 비유를 이런 식으로 영적으로 해석했습니다. 게으른 사람이 되지 말고 부지런한 사람이 되자, 이런 식으로 해석했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게으른 사람이 되지 말고 부지런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본래 말씀하시고자 하는 비유는 이런 도덕적인 설교를 하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예수님 당시의 사회/종교의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상황에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는지를 알아야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의 본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2. 이 말씀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종들에게 재산을 맡긴 주인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가 누가복음에도 나오는데 누가복음 1912절을 보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장면이 나옵니다. 귀족 출신의 어떤 사람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오려고 먼 나라로 길을 떠날 때에 자기 종 열 사람을 불러다가 열 므나를 주고서는 내가 올 때까지 이것으로 장사를 하여라하고 말하였다. 그런데 그의 시민들은 그를 미워하므로, 그 나라로 사절을 뒤따라 보내서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 마태복음에서는 주인이 여행을 떠나면서 3명의 종에게 재산을 맡겼는데 누가복음에서는 귀족이 왕으로 임명받기 위해 먼 나라로 떠나면서 10명의 종에게 재산을 맡겼습니다. 누가복음은 여기에 한 가지 사실을 더 추가했습니다. 시민들이 그 귀족을 싫어해서 대표단을 먼 나라로 보내서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말하게 하였습니다. 누가복음이 이 귀족이 누구인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순간 청중들은 이 귀족이 누구인지 금방 알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실제로 로마 황제로부터 왕으로 임명받기 위해 먼 길을 떠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헤롯 대왕의 큰 아들 헤롯 아켈라오는 아버지가 죽자 유대 땅의 왕이 되기 위해 로마 황제를 찾아갔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 대표자들이 아켈라오가 왕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역시 길을 떠났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주인은 헤롯 아켈라오를 가리킵니다. 그는 로마 황제로부터 왕으로 임명받기 위해 먼 길을 떠나면서 자신의 종들에게 재산을 맡겼습니다. 한 달란트는 노동자가 15년간 벌어들이는 액수를 가리킵니다. 오늘날로 계산하면 다섯 달란트는 5 Million/50, 두 달란트는 2 Million/20, 한 달란트는 1 Million/10억을 가리킵니다. 귀족이 종들에게 재산을 맡겼는데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 종들은 귀족의 재산을 관리하는 관리자/매니저들이었습니다. 귀족은 관리자들에게 내 재산을 늘리라고 말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관리자들은 귀족에게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열 달란트로 만들었고 두 번째 사람은 두 달란트를 네 달란트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귀족의 재산을 늘리려면 귀족의 땅에서 농사짓고 있는 소작인 농민들의 것을 빼앗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마른 수건을 쥐어짜듯이 농민들이 농사를 지으면 농민들에게 10-20%만 주고 나머지는 소작료로 거두어 가야만 귀족의 재산을 두 배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는 오랫동안 고민했을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는 귀족이 하라는 대로 했지만 더 이상은 이런 식으로 살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귀족이 돌아왔을 때 세 번째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인님, 나는 주인이 굳은 분이시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줄로 알고 무서워하여 물러가서 그 달란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농사를 짓든 장사를 하든 심은 데서 거두고 뿌린데서 모으는 것이 정상입니다.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려면 남의 것을 빼앗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세 번째 사람이 이렇게 말하자 주인은 화가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알았다. 그렇다면 너는 내 돈을 돈놀이 하는 사람에게 맡겼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내가 와서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받았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마음이 굳고 무서운 사람인줄 알았으면 왜 최소한 이자 놀이라도 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래 유대교 율법에서는 동족들에게 이자 놀이를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사순절을 맞이해서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살펴보았는데 오늘 내용이 좀 무거웠습니다. 그런데 본래 사순절 기간이 그런 기간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내 삶을 돌아보는 기간이 사순절입니다. 가끔 영화나 드라마/연속극을 보면 회사나 국가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이 일과 양심 사이에서 고민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옳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대가로 높은 자리에 앉아 있고 많은 돈을 만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주인공이 결심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만약 위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지금 갖고 있는 높은 지위와 명성을 잃어버리겠지만 더 이상은 이런 일을 할 수가 없다고, 손해를 보더라도 도덕적/양심적/신앙적으로 바르게 살아야 하겠다고 결심을 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바로 그 이야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어려운 결단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예수를 따르다 보면 인생에 한두 번 이런 고민을 할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세상의 가치와 하나님 나라 사이에서 어느 쪽에 설 것인가,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이 올 때 선택은 전적으로 나의 몫입니다. 예수께서는 어려운 순간에서 고민하고 결단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생명을 택하고 이웃 사랑을 택하고 정의를 택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arable of talents, the third person's decision

Matthew 25:14 - 29

 

The kingdom is also like what happened when a man went away and put his three servants in charge of all he owned. The man knew what each servant could do. So he handed five thousand coins to the first servant, two thousand to the second, and one thousand to the third. Then he left the country. As soon as the man had gone, the servant with the five thousand coins used them to earn five thousand more. The servant who had two thousand coins did the same with his money and earned two thousand more. But the servant with one thousand coins dug a hole and hid his master's money in the ground. Some time later the master of those servants returned. He called them in and asked what they had done with his money. The servant who had been given five thousand coins brought them in with the five thousand that he had earned. He said, "Sir, you gave me five thousand coins, and I have earned five thousand more." "Wonderful!" his master replied. "You are a good and faithful servant. I left you in charge of only a little, but now I will put you in charge of much more. Come and share in my happiness!" (Matthew 25:14 - 21)

 

Next, the servant who had been given two thousand coins came in and said, "Sir, you gave me two thousand coins, and I have earned two thousand more." "Wonderful!" his master replied. "You are a good and faithful servant. I left you in charge of only a little, but now I will put you in charge of much more. Come and share in my happiness!" The servant who had been given one thousand coins then came in and said, "Sir, I know that you are hard to get along with. You harvest what you don't plant and gather crops where you haven't scattered seed. I was frightened and went out and hid your money in the ground. Here is every single coin!" The master of the servant told him, "You are lazy and good-for-nothing! You know that I harvest what I don't plant and gather crops where I haven't scattered seed. You could have at least put my money in the bank, so that I could have earned interest on it." Then the master said, "Now your money will be taken away and given to the servant with ten thousand coins! Everyone who has something will be given more, and they will have more than enough. But everything will be taken from those who don't have anything. (Matthew 25:22 - 29)

 

Traditionally, the Parable of Talents was used to emphasize the role of talents given by God. Rather than complaining or burying our talents, we are told to develop our talents diligently, then God will give us the same prize as others. Everyone has talents but not everyone uses their talents. Jesus appears to stress the importance of a person using their talents. A talent is useless unless it is used. There is no one that has no talents. We have the talent of helping, giving encouragement, or using our personal time at the expense of ourselves to help others, however there are many who simply bury their talents. God has placed each one of us on this earth for the purpose of using our talents, not for ourselves but for the glory of God.

 

Historically speaking, however, this parable is nothing to do with our talents or diligence. Such interpretation is of the church, not of Jesus. According to Luke chapter 19 which describes this parable in a detailed way, the landlord was not God, but a nobleman. He wanted to go to a distant country to get royal power for himself. Contrary to the first two servants who doubled their money, the third person buried his money and said, “Master, you were a harsh man, reaping where you did not sow, and gathering where you did not scatter seed; so I was afraid, and I went and hid your talent in the ground." The nobleman rebuked him, "You wicked and lazy slave! You knew that I reap where I did not sow, and gather where I did not scatter? Then you ought to have invested my money with the bankers." The third person knew that his master was a harsh man, demanding his servants to earn money by any means. In ancient country, the only way for a landowner to double his wealth was to squeeze his peasantry or tenants. The third person refused to suppress the peasants. Instead he chose justice and what is right before God. Today's scripture asks us what it means to live for the Kingdom of god. Following Jesus and justice sometimes ask us a cost. Yet Jesus said that the Kingdom of God is like this.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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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첫번째 주일 / 2월 두번째 주일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사람들

요한복음 2:1 – 11

정해빈 목사


 




1.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 1장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얼마나 아름답게 만드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날에 빛을 만드시고 둘째 날에 하늘을 만드시고 셋째 날에 땅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늘에는 새를 채우시고 바다에는 물고기를 채우시고 땅에는 식물과 동물을 채우셨습니다. 이렇게 모든 생물을 지으신 후에 마지막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생물을 향해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잘 살아라, 자손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라, 행복하게 살아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잘 살라는 말은 죽지 말고 영원히 살라는 말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때가 되면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행복하게 살다 행복하게 죽어라, 마지막까지 행복하게 살아라, 말씀하셨습니다. 행복하게 살다가 행복하게 죽는 것이 우리들 모두의 소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것을 다 만들어 주셨습니다. 높은 하늘, 신선한 공기, 맑은 물, 아름다운 동산의 열매들을 다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창세기 1장은 생명의 잔치에 대한 이야기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온 세상에 생명의 기운이 가득차고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가득합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성경은 어두운 책이 아니라 밝은 책입니다. 요한복음 2장으로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신 것 자체가 가나의 혼인 잔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잔치요 축제입니다. 창세기 이야기는 생명의 잔치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1장은 이렇게 생명을 축복하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모든 것이 풍성하고 행복합니다. 영적으로 보면 가나의 혼인 잔치와 같습니다. 그런데 창세기의 내용이 2장 3장부터 조금씩 바뀌기 시작합니다. 생명의 축제/잔치로 시작된 창세기 이야기가 조금씩 어두운 이야기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생명의 축제/잔치가 깨지고 슬픔과 탄식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생명의 잔치가 깨지는 과정을 보면 그 몇 가지 원인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잘못된 말입니다. 뱀이 등장해서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는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먹어도 좋지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뱀은 하나님께서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느냐? 이렇게 사실을 왜곡했습니다. 뱀은 사실을 왜곡했을 뿐만 아니라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되라고 아담과 하와를 부추겼습니다. 왜곡된 말, 욕심을 부추기는 말이 생명의 잔치를 파괴합니다. 뱀의 역할을 오늘날로 말하면 언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언론이 사실을 왜곡하거나 사람들의 욕심을 부추기면 생명의 공동체는 깨지게 됩니다. 잘못된 말, 욕심을 부추기는 말 때문에 평화로웠던 에덴동산에 갈등이 생기고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말의 역할이 참 중요합니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사회 공동체를 잘 유지하려면 좋은 말, 바른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좋은 말이 공동체를 살리고 공동체를 일으킵니다.


생명의 잔치를 깨뜨리는 두 번째 원인은 잘못된 종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가인과 아벨을 낳았는데 가인이 시기하여 아벨을 죽였습니다. 형제 살인의 원인은 종교 분쟁이었습니다. 누구의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시느냐, 하나님이 누구를 더 사랑하시느냐, 하나님이 누구 편이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형제를 살인하게 되었습니다. 종교 경쟁이 일어나면 그 종교가 무서운 괴물이 되어서 생명의 잔치를 파괴하게 됩니다. 최근에 중동 지역 이슬람교 갈등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한 수니파가 80%, 이란/이라크를 중심으로 한 시아파가 20%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남쪽은 수니파, 북쪽은 시아파로 되어 있는데 수니파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라크 바그다드 시내에 담벼락이 세워져 있고 길 하나 사이로 두 파가 서로 총을 쏘고 있습니다. 같은 이슬람교를 믿은 사람들이 두 파로 나누어져서 서로를 악마의 자식들이라고 저주하면서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저렇게 싸우고 죽일 거면 차라리 종교가 없어지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때로는 잘못된 언론이 생명의 공동체를 파괴하기도 하고 때로는 잘못된 종교가 생명의 공동체를 파괴하기도 합니다. 창세기 1장에 기록된 풍성한 생명의 잔치가 잘못된 언론과 잘못된 종교 때문에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2. 생명의 잔치가 깨어졌을 때 누군가는 그 깨어진 잔치를 다시 복원시켜야 합니다. 누군가는 부서지고 깨어진 세상을 살만한 세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집안이 부서지고 깨어지면 누군가가 팔을 걷어 부치고 쓸고 닦아야 합니다.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살림하는 사람이고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생명의 잔치가 깨어졌을 때 대처하는 3가지 대처방식이 있습니다. 첫째는 생명의 잔치가 깨어졌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경우입니다.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앞에 포도주 잔이 남아 있는 사람은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가정, 교회, 세상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삶이 편안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잘 알지 못합니다. 아주 부유하고 깨끗한 고급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하루하루 얼마나 힘겹게 살아가는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모두가 다 자기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먹고 살기 힘든 사람은 세상이 바뀌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먹고 살기 편한 사람은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합니다. 두 번째는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을 알지만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잔치집의 주인과 신랑 신부는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잔치 집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무언가 세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지만 내가 직접 나서지는 못합니다. 누군가가 나 대신 나서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생명의 잔치가 깨어졌을 때 대처하는 세번째 방법은 생명의 잔치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팔을 걷어 부치고 일을 하는 경우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일꾼들이 돌 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부었습니다. 땀을 흘리며 큰 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부었습니다. 기적은 누군가가 항아리에 물을 채울 때 일어납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 기적의 주인공은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일꾼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꾼들이 물로 채운 항아리를 마지막에 포도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지 않았다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포도주가 떨어졌는지를 전혀 알지 못했고 어떤 사람은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오직 일꾼들만이 가만히 있지 않고 빈 항아리에 물을 채웠습니다. 성경은 여기 나오는 일꾼들을 헬라어로 Diakonia로 표현했는데 이 디아코니아가 바로 봉사자/일꾼/집사를 가리킵니다. 혼인 잔치 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 바로 이 사람들입니다. 청소하는 사람들도 이 사람들이었고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사람들도 바로 이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누가 포도주가 떨어진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요? 누가 깨지고 부서진 세상을 치료할 수 있을까요? 일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꿉니다. 땀 흘리는 사람들,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꿉니다. 요즘 미국에서는 버니 샌더스라는 사람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버몬트 주 벌링턴이라는 조그만 도시의 시장을 지냈고 주 상원의원을 지냈지만 원래 이 사람은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30년 이상 사회의 약자를 위해서 묵묵하게 일했습니다. 사람들이 점점 이 사람의 말에 열광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은 선진국들 중에서 가장 불평등이 심한 나라입니다. 상위 1%의 사람들이 미국이 벌어들이는 돈의 99%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미국 중산층들은 줄어들고 빈곤층은 늘어났으며 3500만 명이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저 임금을 인상해서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깨지고 부서진 세상을 바꾸기 위해 땀 흘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희망이 있습니다. 절망하고 포기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생명의 잔치가 깨졌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만이, 그리고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땀 흘리는 사람만이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땀 흘리는 사람은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열심히 땀 흘리는 사람에게는 우울증에 걸릴 시간이 없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우울증이 찾아오지만 열심히 땀 흘리고 봉사하는 사람에게는 우울증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세상이 가면 갈수록 가난한 사람들이 살기 힘든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나서서 세상을 바꾸어야 합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디아코니아, 봉사자/일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역사를 바꾸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땀 흘리는 사람들을 기억하시고 그 사람들을 통해 새 역사를 이루십니다. 새 역사의 기적을 꿈꾸며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Those pouring water into the jar

John 2:1 – 11


On the third day there was a wedding in Cana of Galilee, and the mother of Jesus was there. Jesus and his disciples had also been invited to the wedding. When the wine gave out, the mother of Jesus said to him, ‘They have no wine.’ And Jesus said to her, ‘Woman, what concern is that to you and to me? My hour has not yet come.’ His mother said to the servants, ‘Do whatever he tells you.’ Now standing there were six stone water-jars for the Jewish rites of purification, each holding twenty or thirty gallons. Jesus said to them, ‘Fill the jars with water.’ And they filled them up to the brim. (John 2:1-7)


He said to them, ‘Now draw some out, and take it to the chief steward.’ So they took it. When the steward tasted the water that had become wine, and did not know where it came from (though the servants who had drawn the water knew), the steward called the bridegroom and said to him, ‘Everyone serves the good wine first, and then the inferior wine after the guests have become drunk. But you have kept the good wine until now.’ Jesus did this, the first of his signs, in Cana of Galilee, and revealed his glory; and his disciples believed in him. (John 2:8-11)


If you look at Genesis chapter 1, the first book of the Bible, you can see how God carefully and beautifully created the world for us. God made the light on the first day, the heaven on the second day, and the earth on the third day, letting all the living creatures fill the space, and finally said,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earth and subdue it.” According to Genesis, God blessed the world and gave us everything we need. It is about the feast of life. It is about the story of joy and abundance. Spiritually speaking, the creation story corresponds to the story of the wedding at Cana; a joyful and abundant life. The story of creation is bright and beautiful. However, this feast of life did not last long. Genesis 2 and 3 shows that the snake, symbolizing the wrong speech, broke the good relationship between God and people, and even between man and woman, and then religious competition brought down the murder of brother.


When the wine gave out at a wedding in Cana, Jesus said to the servants, “Fill the jars with water.” So they filled them up to the brim. This story shows that there are 3 types of people in the world. The first type of people do not know that the wine run out of. The second type of people know that there is no wine but they do not know what to do. The third type of people know the reality and do whatever to fix the problem. According to the Gospel of John chapter 2, it was the servants who made the miracle possible. If they did not fill the jars with water, Jesus could not have done a miracle, turning water into wine. They fill the jars with water and deliver new wine to the people. We know that this world is like a wedding in Cana where the wine run out of soon. Today’s story shows that only those who work hard can change the world. The scripture calls these servants “diakonia” which means stewards or deacons. Instead of complaining the world of inequality and discrimination, we are called to work to fix the world as God’s servants.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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