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주일 / 3월 네번째 주일

부활,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셨습니다

사도행전 2:22-24, 32

정해빈 목사 

   



지난 목요일과 금요일 캐나다 토론토에서는 눈과 얼음비가 내렸습니다. 마치 겨울이 다시 온 것처럼 보였습니다. 몇년 전 얼음비가 와서 나무들이 부러지고 정전이 되었던 때가 떠오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화창하고 따뜻한 날씨 속에서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마치 자연의 모든 생명들이 부활을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을 때,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 곁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가지셨던 열정과 헌신이 죽음과 함께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음이 모든 것을 무효화시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많은 사람들이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길을 걸어갈 때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떡과 잔을 나눌 때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고기를 낚을 때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은 또 이렇게 외쳤습니다. “죽음이 주님을 가둘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죽음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죽음을 무서워합니다. 죽음은 우리 사이를 가로막아서 사랑하는 사람을 더 이상 볼 수 없도록 만듭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죽음의 힘은 거기까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볼 수 없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잊게 할 수는 없습니다. 죽음의 힘이 아무리 강해도 뜨거웠던 사랑의 힘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두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마음의 눈으로는 볼 수 있습니다. 두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영적인 눈으로는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죽음이 우리 주님을 가로막을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열정이 죽음보다 더 크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사랑의 힘, 생명의 힘이 너무 강해서 죽음이 이를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환상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떡과 잔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나셨음을 깨달았습니다. 진실로 생명이 죽음보다 강하고 정의가 죽음보다 강합니다.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고 진리가 죽음보다 강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빌라도도 죽었고 악한 권력자들도 다 죽었지만 우리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생명이 죽음보다 강합니다. 진리가 죽음보다 강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며 위로와 용기를 얻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들은 저 옛날 제자들이 말했던 것처럼 이렇게 고백하며 부활을 기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죽음이 주님을 가둘 수 없었습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대로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멘.


Death Could not hold the Lord

Acts 2:22-24, 32


Last Thursday and Friday, we saw snow and freezing rain. We thought that winter is coming back. But today we see that everything is gone. All the nature seems to say that is the Easter! When Jesus was crucified on the cross, all of his followers ran away. They thought that everything is over. They thought that all the passion and vision of Jesus ended with nothing. They thought that death makes everything nothing, useless, and void. But as time passed, more and more people began to say, “Christ is risen! We have seen the Lord! When we walk down the road, when we share the bread and the cup, we have seen the Lord! When we catch the fish again, we have seen the Lord! The Lord revealed himself to us, when we gathered again.” They also said, "Death could not contain the Lord! Death could not hold the Lord!" We think that death is the end of everything. We think that nothing in the world can block death. So we are afraid of death, since it seems to invalidate everything we cherish. We cannot see and touch anymore when our beloved died or even was killed. Death separates us physically from our beloved. 


But the followers of Jesus had witnessed resurrection and realized that God had raised Jesus from the dead. As Peter said in today's scripture, God made death powerless. God took away the power of death. Those who witnessed the resurrection of Jesus said that Jesus’s passion and vision were so powerful and real that even death could not block Jesus’s resurrection. Today's scripture shows that love is bigger than death. Life is bigger than death. Truth and justice is bigger than death. As the disciples said long time ago, today we boldly say, we have seen the Lord! death could not hold the Lord! “Where, O death, is your victory? Where, O death, is your sting? Thanks be to God! God gives us the victory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Therefore, my dear brothers and sisters, stand firm. Let nothing move you. Always give yourselves fully to the work of the Lord, because you know that your labor in the Lord is not in vain.” Amen.

Posted by 정해빈
,

종려주일 / 고난주일 / 3월 세번째 주일

받아라 이것은 내 몸이다

마가복음 14:17 - 26

정해빈 목사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는 오늘 일요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고, 월요일에 예루살렘 성전을 심판하셨습니다. 화요일에 성전 제사장들 및 헤롯 당원들과 토론하셨고, 수요일에 마르다/마리아/나사로의 집에서 식사하셨습니다. 목요일에 최후의 만찬을 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다가 로마 병사들에게 붙잡히셨습니다. 금요일 새벽에 대제사장들과 빌라도 총독에게 심문받으시고 금요일 오전 9시 십자가에 매달리셨다가 6시간이 지난 오후 3시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보낸 일주일을 가리켜 종려주일/고난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이 절기가 돌아오면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당하셨네, 예수님, 예수님, 나의 죄 위하여 보배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벌레만도 못한 나를 위해 주님이 돌아가셨다고 찬송을 부릅니다. 사순절이 돌아오면 교회에서 이런 설교와 찬송을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들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기 때문에 마땅히 죽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나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이제 나는 죄에서 용서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신앙을 가리켜서 “대속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랫동안 하나님께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해 동물 희생 제사를 드렸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으면 죄 값을 받고 죽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피를 흘려야만 죄가 용서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죽을 수는 없으니까 나 대신 동물을 죽임으로서 죄 값을 치르게 합니다. 오늘날 동물 애호가들이 들으면 동물이 무슨 죄가 있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동물을 죽여서 나 대신 죄를 사하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처형당하셨을 때 맨 처음 제자들은 너무 놀라고 당황스러워서 예수님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를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동물 제사 전통을 가지고 예수님의 죽음을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사에 바쳐질 동물은 흠이 없고 깨끗한 수컷이어야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흠이 없고 완전한 분이시기에 제물로 바쳐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들은 다 죄가 있고 흠이 있기 때문에 완벽한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만이 제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기독교인들은 100%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의 죽음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죽이는 잔인한 하나님이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셔서 피 흘리지 않아도 우리를 용서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탕자의 비유를 보면,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아무 조건없이 탕자를 껴안고 용서해 주었습니다. 네가 죄를 지었으니까 죄 값을 받아야 한다, 네가 피를 흘리던지 아니면 동물이 피를 흘리던지 피 제사를 드려야 한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돌아온 탕자를 그냥 맞아 주었고 용서해 주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죽여서 우리의 죄 값을 치루어야만 우리를 용서하는 그런 잔인한 분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시는 자비로우시고 진실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목적이 아니라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사시다가 그 결과로 마지막에 십자가를 지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악에 대한 저항입니다. 예수님은 빛을 비추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빛이 이 땅에 오니 어둠이 빛을 싫어합니다.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악한 귀신을 쫓아내시고 악을 책망하시니까 권력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조용히 사셨다면 십자가에 처형당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먹이시고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성전을 심판하셨기 때문에 권력자들에게 붙잡히셔서 죽임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의인의 죽음, 불의한 죽음, 억울한 죽음을 가리킵니다. 우리 주님이 그렇게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 순교자들/희생자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아파하면서 다시는 예수님과 같은 억울한 죽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소극적으로 생각하면 악한 권력자들에게 처형당하신 것이 되지만 적극적으로 생각하면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기 위해 죽으신 것이 됩니다. 소극적으로 생각해서 예수님이 불의한 권력에게 죽임당하셨다고 생각하는 것도 맞지만 보다 적극적으로 생각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내어주셨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에게 더 큰 감동을 줍니다. 마가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이 목요일 저녁에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고 있는 사람이 나를 넘겨줄 것이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제자들이 질문을 합니다. “그는 열둘 가운데 하나로서 나와 함께 같은 대접에 빵을 적시고 있는 사람이다.” 내 앞에 지금 빵 그릇이 있는데 그 빵 그릇에 손을 넣어 빵을 움켜쥐고 있는 사람이 나를 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빵은 예수님의 몸을 가리킵니다. 가롯 유다가 지금 내 빵 그릇에 손을 넣어서 내 빵을 움켜쥐고 있는 것처럼, 조금 있으면 가롯 유다가 나를 움켜쥘 것이다, 나를 붙잡을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가롯 유다가 당신을 배신할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신 다음, “받아라, 이것은 내 몸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제자 중 한 사람이 자기 몸을 붙잡을 것을 아시면서도 자기 몸을 내어주셨습니다. 내 몸을 줄 터이니 나를 가져라. 나를 먹고 더 이상 굶주리지 말아라. 나를 먹고 더 이상 배고프지 말아라. 내가 나의 것을 다 줄 터이니 나를 먹고 다시 일어서거라,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셨습니다. 이 빵을 내 몸이라고 생각하고 이 빵을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빵이 너희 몸속에 들어가는 것처럼, 내가 너희 속으로 들어가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자신을 내어주는 최고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자신의 몸을 주심으로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마가복음 15장을 보면 예수님과 바라바 중에서 바라바가 풀려나고 예수님은 처형당하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명절날이 되면 죄수 하나를 풀어주는 전통이 있었는데 빌라도가 누구를 풀어줄까 물었더니 사람들이 예수 대신 바라바를 풀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결국 바라바는 풀려나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바라바는 무장독립운동을 하다가 붙잡히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 옆에 있는 바라바, 자기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붙잡혀서 죽게 된 바라바, 그런데 바라바는 예수님 때문에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바라바가 살아났습니다. 바라바를 위해서 자기 몸을 내어주셨습니다. 자기 몸을 내어줌으로 다른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자기 몸을 내어주는 사랑의 극치가 바로 십자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하면 할수록 우리를 위해서 자기 몸을 내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한평생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하시다가 마지막에는 자기 몸을 다 내어 주셨습니다. 빛으로 오셔서 빛을 비추시다가 어둠에게 붙잡히셨습니다. 악에 저항하시다가 악에 붙잡히셨습니다. 삶의 마지막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마지막 한사람까지 살리기 위해 자기 몸을 내어주셨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주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 옆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기를 버리는 사랑, 제자가 자신을 배반할 것을 아시면서도 받아라, 이것은 내 몸이다, 나를 가져라, 나를 먹어라, 나를 먹고 배고프지 말아라, 나를 먹고 목마르지 말아라, 내가 너희와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말씀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깨닫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Take it, this is my body

Mark 14:17 - 26


When it was evening, he came with the twelve. And when they had taken their places and were eating, Jesus said, ‘Truly I tell you, one of you will betray me, one who is eating with me.’ They began to be distressed and to say to him one after another, ‘Surely, not I?’ He said to them, ‘It is one of the twelve, one who is dipping bread into the bowl with me. For the Son of Man goes as it is written of him, but woe to that one by whom the Son of Man is betrayed! It would have been better for that one not to have been born.’ (Mark 14:17-21)


While they were eating, he took a loaf of bread, and after blessing it he broke it, gave it to them, and said, ‘Take; this is my body.’ Then he took a cup, and after giving thanks he gave it to them, and all of them drank from it. He said to them, ‘This is my blood of the covenant, which is poured out for many. Truly I tell you, I will never again drink of the fruit of the vine until that day when I drink it new in the kingdom of God.’ When they had sung the hymn, they went out to the Mount of Olives. (Mark 14:22-26)


Many Christians has thought for a long time that Jesus died for "Penal substitution." It is a theory of the atonement within Christian theology. It argues that Christ, by his own sacrificial choice, was punished in the place of sinners, thus satisfying the demands of justice so God can justly forgive the sins. Penal substitution derives from the idea that divine forgiveness must satisfy divine justice, that is, that God is not willing or able to simply forgive sin without first requiring a satisfaction for it. It states that God gave himself in the person of his Son, Jesus Christ, to suffer the death, punishment and curse due to fallen humanity as the penalty for our sin. As opposed to this theory, Athanasius said, “Christ's death enables us to die to sin by our participation, and not as a satisfaction or payment to justice as such.”


Today's scripture shows that Jesus died not for our sin, but for the love for us. When Jesus and his disciples were eating together on Thursday, Jesus said, “One of you, who is dipping bread into the bowl and eating with me, will betray me.” Jesus implied, “Just as one person is grabbing my bread, he will grab me soon.” Although Jesus knew that this happen to him, Jesus took a loaf of bread, blessed it, broke it, gave it to them, and said, “Take, this is my body.” Jesus gave his body to them as the bread of life. Mark chapter 15 also says that Pilate the governor of Judaea was asked by people to free Barabbas, not Jesus. Barabbas, which means the son of father, was able to be released thanks to Jesus beside him. Jesus gave his body to Barabbas to save him. Considering Palm and Passion Sunday, we meditate on the meaning of Jesus. Jesus died, not to be punished in the place of sinners or to satisfy the demands of justice, but to love us and to quench our hunger and thirst by giving out his body to us. We hear Jesus’ voice even today, “I give you everything that I have. Take my body, and rise again. You are not alone. I am always with you.” Whenever taking the bread and the cup, we confess that Jesus is with us. Amen.  

Posted by 정해빈
,

사순절 다섯번째 주일 / 3월 세번째 주일

사순절, 여성들의 아픔과 치료

마가복음(Mark) 5:21 - 34

정해빈 목사






1. 오늘 St. Patrick's Day(3월 17일), 아일랜드 명절 행사가 있어서 다운타운이 복잡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난 화요일, 38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여성의 날’(International Women's Day) 이었습니다. 185738일 미국 여성 노동자들이 저임금 및 비인간적인 작업 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뉴욕 시내를 행진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 러시아 여성들이 세계 1차 대전에서 희생된 2백만이 넘는 러시아 군인들을 위해 19172월 마지막 일요일에 빵과 평화를 위해 시위를 벌였는데 이로부터 4일 후 러시아 황제가 물러나고 새로 들어선 임시 정부는 여성들의 참정권을 보장했습니다. 러시아 여성들이 행진한 223, 2월 마지막 일요일이 서양 달력으로 38일이 됩니다. 이런 일들이 계기가 되어서 1977년 유엔은 매년 3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정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인정받고 활동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여성이 여전히 차별받고 억압받는 곳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 세상에는 여성들이 정당하게 대우받지 못하는 곳이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여성의 날을 통해서 여성의 위치를 다시 한번 생각하고 여성의 존재를 생각하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치시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들의 고통을 안타까워하시고 여성들의 아픔/상처/질병을 치료하시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이 두 명의 여성을 치료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지지난 주일에 예수님의 기적과 병 고침 이야기를 말씀드렸는데 오늘 한 번 더 기적 이야기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마가복음 5장을 보면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 계실 때 12년간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께 다가가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일이 벌어집니다. 여기서 말하는 혈루증은 보통 혈우병(血友病, hemophilia), 혈액이 응고되지 못해서 계속 피가 흘러나오는 병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단순히 피가 응고되지 못해서 생기는 병이라기보다는 여성의 몸과 관련된 병이라고 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불규칙적인 월경 과다 유출로 인해 자주 피를 흘렸을 수도 있고 또는 자궁 질병으로 인해 자주 피를 흘렸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산부인과에 가면 쉽게 치료받을 수 있었지만 옛날에는 정확한 진단과 치료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여인의 입장에서 볼 때 자주 피를 흘리니 참으로 민망하고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26절을 보면 여러 의사에게 보이면서 고생도 많이 하고 재산도 다 없앴으나 아무 효력이 없었고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고 기록을 했습니다. 의사들을 찾아가 치료를 받았지만 아무 효력이 없었고 재산은 없어지고 상태는 더 악화되었습니다. 남자 의사를 만날 때마다 자신의 몸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도 수치스러웠을 것입니다. 12년 동안 피를 흘렸으니 그녀의 상태는 지금 최악의 상태였습니다. 몸은 비쩍 말라 죽기 직전이었고 더 이상 의지할 곳도 없었습니다. 가정을 꾸릴 수도 없었고 남편을 가까이 할 수도 없었고 아이를 낳을 수도 없었습니다. 가정과 사회에서 완전히 버림받게 되었습니다. 여기 나오는 이 여인은 생명이 말라가고 꺼져가는 중년 여인의 고통을 가리킵니다.

 

옛날 구약 성경을 쓴 옛날 사람들은 피 속에 생명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은 피가 들어간 음식, 선짓국이나 순댓국을 먹지 않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피를 영양분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옛날 사람들은 피 속에 어떤 영적인 생명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사람이 자꾸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은 영적인 생명을 바깥에 버리는 사람이 되고 자연스럽게 부정한 사람이 됩니다. 구약 성경 레위기서를 보면 이와 관련된 말씀들이 많이 나옵니다. 여성의 하혈을 죄의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하혈하는 여인은 부정하니까 접촉하면 안 됩니다. 여성이 남자 아이를 출산하면 7일 동안, 여자 아이를 출산하면 14일 동안 불결하다고 간주되었습니다. 남자 아이를 출산하면 33일 동안, 여자 아이를 출산하면 66일간의 정화 기간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는 예배 처소 출입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월경이 끝나거나 출산이 끝나면 속죄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월경이나 출산은 속죄가 아니라 축하를 해 주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축하 대신 속죄 제물을 바치라고 했습니다. 여성은 생명을 낳기 위해 피를 흘리기 때문에 오히려 축하해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옛날 사람들은 그런 이해가 부족했습니다. 무조건 피를 흘리면 부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옛날 사람들의 생각이 남성적이고 근시안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이 여인은 지금 한계 상황에 처했습니다. 가족도 없고 재산도 없고 너무 아프고 지쳐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한계 상황에 처하면 모든 것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마지막으로 하고자 하는 일을 과감하게 시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여인은 두 번째를 택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용기를 내서 예수님께 다가갔습니다. 기적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살고자 하는 마음, 한계를 넘어서려는 용기가 있을 때 기적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용기를 내서 예수님의 몸을 만졌습니다. 피 흘리는 여인은 사람들의 눈에 띄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보면 부정하다고 피하기 때문에 스스로 알아서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아야 합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용기를 내어 예수께 다가갔습니다. 보이지 않는 사람이 보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는 이 여인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넒은 세상으로 나가지 못하고 가족이나 마을 안에 격리되어 살아가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힌두교를 믿는 인도 시골에서는 여성이 피를 흘리거나 몸이 아프면 집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집 밖에 머물러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장벽을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장벽과 차별과 한계에 갇혀 있는 여성들을 만나주셨고 그들을 새로운 삶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니 예수님이 사람들 사이에 가려서 보이지 않습니다. 남자 제자들이 예수님 주변을 에워싸고 있어서 그들을 뚫고 예수님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여인은 용기를 내서 남자 제자들을 헤집고 들어가서 예수님의 몸을 만졌습니다. 부정한 여인이 손을 대면 손을 댄 모든 사람들은 부정한 사람이 됩니다. 아마도 남자 제자들이 깜짝 놀라서 이 여인을 욕하고 밀쳐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여인을 만나주셨고 이 여인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 여인은 가부장적 경계에 도전했습니다. 남자 제자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으니 이것을 남자들만의 울타리(Inner Circle)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남자 제자들 안으로 뚫고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과감하게 남자들만의 울타리(Inner Circle)을 뚫고 들어가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1980년에서 1982년까지 캐나다연합교회 최초로 여성 총회장이 되신 Lois Miriam Wilson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분이 [흔히 들을 수 없는 성서의 여성 이야기]라는 책에서 이 여인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예수는 그 여인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고 밝히려 했는가? 예수는 그 여인이 금기를 깨뜨렸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며 그 결과로 그 여인이 심한 고통을 당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예수는 그녀의 행위를 공개하기를 원했음에 틀림없다. 그렇게 하여 다른 여인들도 그것에 의한 유익을 얻게 하려 함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모든 진실을 예수께 이야기했을 때, 예수는 그녀의 신앙과 모험을 행하는 능력이 그리고 전통, 종교, 문화적인 금기를 깨뜨린 결단력이 그녀를 온전하게 만들었다고 선언한다.” 만약 예수님이 이 여인을 그냥 무시하고 지나쳤다면 이 여인은 남자들을 비집고 들어온 행동 때문에 큰 모욕을 당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녀를 공개하고 그녀를 인정해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그녀가 남성들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Lois Wilson 목사님께서 같은 여성 입장에서 오늘 말씀을 잘 해석해 주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 성경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입니다. 안심하고 가거라, 아무도 그대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건강하여라, 다시는 아프지 말아라, 우리 주님께서 이 여인의 몸과 마음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오늘 말씀을 자세히 보면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인 외에 12살 된 소녀가 고통당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께 와서 12살 된 딸이 죽게 되었으니 고쳐 달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는 혈루증 앓는 여인을 먼저 고치신 다음에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 들어가서 소녀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 말씀하셨습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인은 중년 여성의 고통을 가리키고, 12살 되어서 죽게 된 소녀는 젊은 여성의 아픔을 가리킵니다. 사회와 종교가 너무 엄격하고 가부장적이면 여성들이 고통을 받게 됩니다. 젊은 여성도 고통을 받고 늙은 여성도 고통을 받습니다. 예수께서는 고통받는 여성들을 일으켜 주셨습니다. “달리다굼,” 여성들아 일어나라,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살지 말고 보이는 사람으로 살아라. 더 이상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살아라, 한계에 갇혀 살지 말고 한계를 넘어서는 사람이 되어라. 하나님의 딸로서 기쁘고 당당하게 살아라,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하시고 여성들의 아픔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달리다굼, 주님을 만나 치료받으시고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통해 위로와 용기를 얻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Jesus healed women’s grief

Mark 5:21 - 34


Once again Jesus got into the boat and crossed Lake Galilee. Then as he stood on the shore, a large crowd gathered around him. The person in charge of the Jewish meeting place was also there. His name was Jairus, and when he saw Jesus, he went over to him. He knelt at Jesus' feet and started begging him for help. He said, "My daughter is about to die! Please come and touch her, so she will get well and live." Jesus went with Jairus. Many people followed along and kept crowding around. In the crowd was a woman who had been bleeding for twelve years. She had gone to many doctors, and they had not done anything except cause her a lot of pain. She had paid them all the money she had. But instead of getting better, she only got worse. (Mark 5:21-26)


The woman had heard about Jesus, so she came up behind him in the crowd and barely touched his clothes. She had said to herself, "If I can just touch his clothes, I will get well." As soon as she touched them, her bleeding stopped, and she knew she was well. At that moment Jesus felt power go out from him. He turned to the crowd and asked, "Who touched my clothes?" His disciples said to him, "Look at all these people crowding around you! How can you ask who touched you?" But Jesus turned to see who had touched him. The woman knew what had happened to her. She came shaking with fear and knelt down in front of Jesus. Then she told him the whole story. Jesus said to the woman, "You are now well because of your faith. May God give you peace! You are healed, and you will no longer be in pain." (Mark 5:27-34)


March 8th is International Women's Day. This day reminds us of the dignity and human rights of all the women in the world. We remember that Jesus welcomed and loved women, treated them with great respect and dignity, and healed their physical and spiritual sufferings. Today’s scripture shows that Jesus healed the bleeding woman. According to Mosaic Law, women who were ceremonially unclean weren't allowed to touch anyone. But desperate women do desperate things. For 12 long years blood had flowed from her body, making her physically sick and socially unacceptable. Because of the continual bleeding, the woman would have been continually regarded in Jewish law as a menstruating woman, and so ceremonially unclean. In order to be regarded as clean, the flow of blood would need to stop for at least 7 days. Because of the constant bleeding, this woman would have lived in a continual state of uncleanness which would have brought upon her social and religious isolation.


When the woman approached Jesus without a male sponsor and tried to reach beyond the limits of social and religious taboo, Jesus recognized her courage and healed her grief. Right after this healing, Jesus visited and healed Jairus' 12 year old daughter who was almost dead, by taking her by the hand and saying to her, “Talitha cum,” which means, “Little girl, get up!” Today’s scripture shows that Jesus recognized the realities of the women of all ages who were suffered from the patriarchal religious system which bear discrimination against women. Jesus stood with them and cured their sorrow. Jesus' life grants life-changing healing. It is a healing authority that crosses boundaries, both ethnic and gender ones. Jesus chooses not to leave people in the conditions in which he finds them and gives the power to alter that condition. We pray that all the women be healed and they get up from social barriers. Amen.

Posted by 정해빈
,

사순절 네번째 주일 / 청년주일

3.1절 기념주일,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

시편(Psalms) 37:34 - 40

정해빈 목사

   



1. 우리 교회는 매년 3월 첫째 주일을 3.1절 기념주일/청년주일로 지킵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경 이야기 대신 역사와 영화 이야기를 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여 인류 평등의 대의를 밝히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고하여 민족자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유하게 하노라.” 독립선언서의 첫 번째 내용입니다. 3.1 운동이 일어난 지 40일이 지난 1919410일 중국 상해 임시정부 지도자들이 모여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대한민국 임시헌장을 만들었습니다. 500년간 지속되었던 조선 왕조를 끝내고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만들겠다고 선포했습니다. 한반도 5000년 역사에 최초로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했습니다.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이 아니라 국민이 다스리는 민국, 군주가 주인이 아니라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공화국을 선포했습니다. 3.1 운동의 열기가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대한민국의 출발은 19193.1절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최근 한국에서 두 편의 영화가 큰 화제를 모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영화는 일본군 성 노예 위안부로 끌려갔던 10대 소녀들의 이야기를 다룬 귀향이라는 영화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귀향(鬼鄕)은 귀신 귀자 고향 향자를 써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영혼을 가리킵니다. 최대 20만 명의 조선 처녀들이 성 노예로 끌려갔는데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정부에 정식 등록된 위안부 여성은 238명에 불과하고 그 중에서 현재 45명이 살아 있습니다. 일반 시민 73천명이 영화 제작 비용을 후원했고 주요 배우들이 재능 기부로 참여했습니다. 처음에는 세상의 관심을 받지 못해 1-2개의 스크린에서 상영했는데 점점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지금 현재 한국 Box Office 1, 800개 이상의 스크린에서 상영하고 있습니다. 젊은 영화감독이 2002년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사는 나눔의 집을 방문했다가 강일출 할머니가 미술심리치료 과정에서 그린 태워지는 처녀들이란 그림을 보게 됩니다. 위안부로 끌려간 소녀들이 산속 구덩이에서 불타는 것을 목격한 할머니가 그때의 기억을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영화감독이 그 그림을 보고 충격을 받아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을 합니다. 그 후 14년의 노력 끝에 2016224일 영화를 개봉하게 되었습니다. 영화감독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충격을 받아서인지 몸도 많이 아팠어요. 그리고 새벽에 꿈을 꿨죠. 구덩이에서 불에 타 죽은 소녀들이 어느 순간 일어났는데 피로 얼룩진 옷들이 흰옷으로 바뀌고 상처도 없어진 거예요. 발을 살짝 들더니 소녀들이 하늘을 나는데, 뭐랄까 장관이었죠. 돌아가신 분들이 지금 고향으로 너무 돌아오고 싶어 하는구나,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어요. 그때부터 이걸 영화로 구현하고 싶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나서 복수나 심판보다 슬픔을 잘 표현해서 좋았다, 너무 아름다웠고 너무 슬펐다고 말했습니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영화의 첫 대사는 숨바꼭질 노래로 시작합니다. 남의 눈에 뜨일까봐 숨어야만 하는 어린 소녀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 시대에는 국가와 사회가 그리고 어른들이 어린 소녀들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19412차 대전 때 캐나다 정부가 BC 주에 살고 있는 일본계 케네디언 22천명을 내륙 지방으로 강제로 이주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그 후 캐나다 정부는 300 Million의 배상금을 일본 정부에 주었고 일인당 21,000불을 배상했습니다. 1870년부터 1990년까지 120년 동안 캐나다 정부가 15만 명의 원주인 자녀들을 강제로 기숙학교에 살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난 2008년 정부는 진실과 화해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을 만들어 진상을 조사했고 피해자 가족들에게 $350 Million을 배상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20만 명의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해 고작 10 Million을 주기로 합의했습니다. 사과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1970년 독일의 수상 빌리 브란트가 폴란드 유대인 추모비 앞에서 무릎 꿇고 참회했던 그런 행동을 일본 정부는 할 의사가 없어 보입니다. 많은 국민들이 이번 합의에 분노하는 뜻에서 이 영화를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2. 요즘 한국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두 번째 영화는 동주라는 영화입니다. 1917년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나 1945216일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했던 윤동주 시인의 일대기를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북간도 명동촌은 함경북도 회령 북쪽, 두만강 너머에 있는 땅을 가리킵니다. 일제 시대에 많은 애국지사들이 명동과 용정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안중근 의사도 명동마을 뒷산에서 사격 연습을 하기도 했습니다. 윤동주, 문익환, 송몽규는 명동소학교와 캐나다 선교사님들이 세운 용정 은진중학교를 같이 다녔습니다. 특히 윤동주와 송몽규는 명동소학교, 은진중학교, 연희전문학교, 일본 유학,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까지 일생을 함께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윤동주와 문익환은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했다가 신사 참배를 거부하는 바람에 학교가 폐교당하기도 했습니다. 사진을 보시면 가운데가 문익환, 오른쪽이 윤동주, 왼쪽이 송명규, 밑에 앉은 사람이 정일권입니다. 주는 19452월 해방을 몇 개월 앞두고 일본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일본군들이 죄수들을 상대로 생체 실험한 것이 사망의 원인이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있는 사람을 상대로 생체 실험을 할 수 있을까요, 인류 역사상 가장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군대가 바로 일본 군대였습니다. 이 세상에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군대가 사라지고 생체 실험이 사라지고 성 노예가 사라져야 하겠습니다. 영화 귀향은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소녀들의 아픔을 다루었고 영화 동주는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소년들의 아픔을 다루었습니다. 하지만 귀향동주모두 복수와 증오와 심판을 주제로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100년 전 고난의 시대를 살아갔던 젊은이들의 고뇌와 아픔을 담담하게 잘 묘사했습니다.

 

어떤 분이 영화 평을 하면서 동주와 몽규도 감동적이었지만 동주와 몽규를 취조하던 일본 순사가 조서에 사인을 거부하며 절규하는 동주를 바라보면서 살짝 눈물이 고이는 장면이 감동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런 시대에 태어나 시인으로 살고자 했던 나 자신이 부끄럽다며 오열하는 동주의 마지막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동주는 살면서 부끄럽다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하루하루 하나님과 민족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창씨개명을 미루고 미루다가 일본 유학을 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하고는 <참회록>을 썼습니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滿) 이십 사년 일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동주의 순수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용기 있고 정직한 사람만이 참회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순수하고 깨끗하지 못하면 자신이 무엇을 부끄러워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동주는 참 여리고 착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582장은 김재준 목사님이 작사하신 곡인데 가사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습니다. 어둔밤 마음에 잠겨 역사에 어둠 짙었을 때에여기서 말하는 어두운 시대는 일제 시대를 가리킵니다. “계명성 동쪽에 밝아 이 나라 여명이 왔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한국을 가리키고 빛 속에 새롭다는 광복을 가리킵니다. “이 빛 삶 속에 얽혀 이 땅에 생명탑 놓아간다.” 원래는 1-2절로 되어 있는데 나중에 문익환 목사님이 옥중에서 3절을 쓰셨습니다. “맑은 샘줄기 용솟아는 고향 북간도의 용정을 가리키고 거칠은 땅에 흘러적실 때는 그의 고향 마을 앞을 흐르던 해란강을 가리킵니다. “기름진 푸른 벌판이 눈앞에 활짝 트인다.” 찬송가 중에서 가장 한국적인 찬송가 582, 하나님께서 한민족에게 자유와 평화를 주실 것을 염원하는 찬송가가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37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을 기다리며 주님의 법도를 지켜라. 주님께서 너를 높여 주시어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니 악인들이 뿌리째 뽑히는 모습을 네가 보게 될 것이다. 악인의 세력을 내가 보니 본고장에서 자란 나무가 무성한 잎을 뽐내듯 하지만 한순간이 지나고 다시 보니 흔적조차 사라져 아무리 찾아도 그 모습 찾아볼 길 없더라.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있으나 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할 것이니 악한 자들은 미래가 없을 것이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에게 미래가 있습니다. 부끄러워할 때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 끊임없이 자기를 돌아보는 사람, 그런 나라와 민족에게 미래가 있습니다. 오늘 청년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지금부터 100년 전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청년들을 생각해 봅니다. 그들의 삶은 생사를 넘는 삶이었을 것이고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삶이었을 것입니다. 청년의 삶이 그때만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의 청년들은 요즘 같은 경쟁 시대에 그들 나름대로의 고민과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100년 전 가장 어두웠던 시대를 살면서도 하나님과 민족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했던 그 시대의 젊은이들을 기억하십시다. 아무리 세상이 거칠고 어려워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이 땅에 정의와 평화의 생명탑을 쌓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