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후 여섯번째 주일 / 6월 네번째 주일

하갈과 이스마엘을 기억하며

창세기 16:5 - 13

정해빈 목사

     



1.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16장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사래의 몸종 하갈을 부르시고 축복하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창세기 이야기 중에서 굉장히 중요하고 깊이 생각해 볼만한 말씀 중 하나가 바로 이 말씀입니다. 하갈이 아브라함의 집을 떠나 이집트로 가는 중에 수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하갈을 부르셨습니다. 수르는 가나안과 이집트의 경계선에 있어서 남쪽으로 한 발짝 만 더 가면 이집트 땅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나타나셔서 이집트로 가지 말고 아브라함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래 하갈은 아브라함의 부인 사래가 이집트에서 데리고 온 몸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의 자손이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말씀하셨지만 아브라함에게는 나이가 들도록 자식이 없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한 사래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여종 하갈을 통해서 자식을 보게 했습니다. 옛날 사회는 일부다처제 사회였고 자식이 중요했기 때문에 첫째 부인이 자식을 낳지 못할 경우 여종을 통해 자식을 보게 하는 일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갈은 아브라함의 두 번째 부인이 되었고 하갈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첫째 부인은 아이가 없었는데 둘째 부인은 아이를 가졌습니다. 이런 경우 첫째 부인은 둘째 부인을 핍박해서는 안 되고 둘째 부인 또한 첫째 부인을 멸시하면 안 됩니다. 그래야 가정에 평화가 옵니다. 하지만 사람 사는 일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하갈은 아이를 갖고 나서 자신이 아브라함의 아이를 가졌다는 생각에서 사래를 무시하기 시작했고 사래는 사래대로 화가 나서 하갈을 학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사래의 학대를 견디지 못한 하갈은 임신한 채로 자기 조국인 이집트 땅으로 도망을 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하갈이 이집트로 가기 위해 수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주의 천사가 나타나 하갈을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래의 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나의 여주인 사래에게서 도망하여 나오는 길입니다. 너의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면서 살아라.” 하갈은 본래 이집트 사람이니까 그냥 이집트로 가게 내버려 둘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갈에게 나타나셔서 사래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언뜻 보면 이 말씀이 부당하게 느껴집니다. 사래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도망쳐 나왔는데 다시 사래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너는 사래의 몸종이니까 너의 주제를 알고 그냥 학대받으면서 살라는 말씀일까요? 어떻게 이렇게 말씀하실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많은 자손을 주겠다. 자손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불어나게 하겠다. 너는 임신한 몸이다. 아들을 낳게 될 터이니 그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하여라. 네가 고통 가운데서 부르짖는 소리를 주님께서 들으셨기 때문이다.” 너의 자손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불어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래 이 말씀은 아브라함과 사래에게 주신 말씀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하갈에게도 똑같은 축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래 사이에 난 이삭도 사랑하지만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 난 이스마엘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겉으로 보면 아브라함 집안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인류의 운명을 바꿀 만한 큰 사건이기도 합니다. 사래가 히브리/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면 하갈은 이집트/팔레스타인 백성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사래가 유대교/기독교를 가리킨다면 하갈은 이슬람교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하갈이 서 있는 수르라는 곳은 가나안과 이집트의 경계선이 있는 곳이었는데 오늘날로 말하면 아랍 사람들이 정신적 고향으로 생각하는 Mecca로 가는 길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신적 고향으로 생각하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분기점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메카로 가는 길이 나오고 북쪽으로 올라가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나옵니다. 하갈이 마음에 한을 품고 고향으로 막 들어서려고 할 때 주의 천사가 나타나 하갈을 위로하고 다시 사래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2. 하갈 입장에서는 사래의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이 야속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사래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도망쳐 나왔는데 어떻게 다시 사래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까?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여기서 하갈이 고향으로 돌아가 버리면 하갈과 사래는 원수가 되고, 그들이 낳은 이스마엘과 이삭도 원수가 되고, 그들의 후손 이슬람 사람들과 유대/기독교인들도 원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태가 이렇게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하갈 앞에 나타나셔서 다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한번쯤은 해보는 질문을 떠오르게 됩니다. 그것은 인간 사회에 갈등이 생길 때 갈라서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고통스러워도 함께 사는 것이 옳은가 하는 질문입니다. 집안에서, 사회에서, 국가에서 서로 간에 갈등이 생길 때 완전히 갈라서서 원수로 살 것이냐, 아니면 고통스러워도 같이 살 것이냐, 성경은 바로 이 질문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에게 갈라서서 원수가 되지 말고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힘들어도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면서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구원이고 그것이 화해이고 그것이 살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에게 네가 아이를 가졌으니 사래를 굴복시키라고 말씀하지도 않으셨고 반대로 사래에게 하갈을 굴복시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갈 편도 들지 않으셨고 사래 편도 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두 사람이 함께 더불어 사는 것뿐이었습니다. 고통스럽지만 함께 더불어 사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한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영국 사람들이 워낙 자부심이 강해서 우리는 특별하다, 우리는 따로 떨어져서 살겠다, 이렇게 결정을 한 것 같습니다. 나와 피부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 것이냐, 아니면 갈라져서 원수로 살 것이냐, 바로 여기에 인류의 미래가 달려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함께 더불어 살지 않으면 이 세상은 혐오와 증오의 세상이 됩니다. 미국 플로리다 올랜도에서는 한 청년이 군대에서 사용하는 긴 총을 클럽에서 쏴서 대략 50명이 죽고 50명이 다쳤습니다. 한 명이 100명을 죽거나 다치게 만들었습니다. 미국에서는 군인들이 사용하는 총을 민간인들도 구입할 수 있는 모양입니다. 커피숍보다 총기판매점이 더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개인적인 원한이나 증오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고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더불어 살지 않고 상대방을 원망하고 증오하면 남는 것은 갈등과 충돌뿐입니다. 우리 민족도 66년 전에 6.25 전쟁을 겪었습니다. 나와 종교가 다르고 삶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이 힘들고 불편합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들 모두는 하나님의 집, 이 지구에서 함께 살아야 합니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앞에 나타나셔서 서로 원수가 되지 말라고, 증오하지 말라고,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인류에게 언제 평화가 오느냐, 갈라서고 원망하고 증오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저쪽을 다 죽인다고 해서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불편해도 사래와 하갈이 한 집안에서 함께 사는 것만이 참된 평화의 길이라는 것을 주님은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너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래와 하갈에게 똑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래의 후손도 축복하셨고 하갈의 후손도 축복하셨습니다. 종교가 다르고 인종이 다른 형제들이 함께 사는 길은 우리들 모두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서 함께 사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집을 나간 탕자가 회개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것처럼, 우리들 모두는 형제를 미워한 것을 회개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갈도 탕자이고 사래도 탕자입니다. 사래를 미워한 하갈도 회개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야 하고 하갈을 미워한 사래도 회개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다른 형제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공존하는 길만이 우리들 모두가 살 길입니다. 하갈도 하나님의 자녀이고 사래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모두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집에서 쫓겨난 하갈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떨어져서 원수로 살지 말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서 힘들어도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세상, 지구, 아버지의 집에서 형제들 모두가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면서 살 때 이 땅은 평화의 땅이 될 줄로 믿습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Remembering Hagar and Ishmael

Genesis 16:5 - 13


Abram's wife Sarai had not been able to have any children. But she owned a young Egyptian slave woman named Hagar, and Sarai said to Abram, "The LORD has not given me any children. Sleep with my slave, and if she has a child, it will be mine." Abram agreed, and Sarai gave him Hagar to be his wife. This happened after Abram had lived in the land of Canaan for ten years. Later, when Hagar knew she was going to have a baby, she became proud and was hateful to Sarai. Then Sarai said to Abram, "It's all your fault! I gave you my slave woman, but she has been hateful to me ever since she found out she was pregnant. You have done me wrong, and you will have to answer to the LORD for this." Abram said, "All right! She's your slave, and you can do whatever you want with her." But Sarai began treating Hagar so harshly that she finally ran away. (Genesis 16:1-6)


Hagar stopped to rest at a spring in the desert on the road to Shur. While she was there, the angel of the LORD came to her and asked, "Hagar, where have you come from, and where are you going?" She answered, "I'm running away from Sarai, my owner." The angel said, "Go back to Sarai and be her slave. I will give you a son, who will be called Ishmael, because I have heard your cry for help. And later I will give you so many descendants that no one will be able to count them all. But your son will live far from his relatives; he will be like a wild donkey, fighting everyone, and everyone fighting him." Hagar thought, "Have I really seen God and lived to tell about it?" So from then on she called him, "The God Who Sees Me." (Genesis 16:7-13)


In Chapter 16:8 the Lord says to Hagar, “Go back to your mistress and submit to her.” It looks harsh to Hagar who ran away from Abraham’s house to escape Sarah’s hate. But God permits Hagar to look beyond the present to see the multitude of people that would come from the baby she is carrying. The boy is to be called Ishmael, which means “God shall hear,” or, “Whom God hears.” She recognizes the LORD as the One who sees her. Today’s passage shows that God blesses not only Sarah’s descendants but also Hagar’s posterity. God knows that if Hagar cross over to Egypt, Sarah and Hagar become mutual enemies. History shows that this hostility would lead to the trouble between Judaism/Christㅑanity and Islam. God does not give favor to neighbour Sarah nor Hagar. What God wants to them is to live together peacefully although it is much painful than living apart. Surprisingly, God blesses Hagar as much as God blesses Sarah. We are called to live together with other people who are much different from us in religion, race, and thought. God loves them as God loves us. This story shows that only when we open our mind toward other people, we will make a better world.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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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다섯번째 주일 / 6월 세번째 주일

성령과 공동의 선

고린도전서 12:1 - 11

정해빈 목사

      



1. 지난 5월부터 성령강림절을 맞아 계속해서 성령에 대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한 번 더 성령의 사역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성경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두 가지 이미지가 나오는데 첫째는 불과 바람이고 둘째는 물과 비둘기입니다. 불과 바람은 강한 성령을 나타내고 물과 비둘기는 조용한 성령을 나타냅니다. 불과 바람이 불면 열이 나고 어둠이 물러가고 더러운 것이 태워지듯이 성령께서 역사하면 마음이 뜨거워지고 어둠이 물러가고 더러운 것이 태워집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불타는 떨기나무를 보며 하나님을 만났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만났습니다. 시내산에서 계약을 체결할 때 “불 가운데서 내려오시는 하나님”을 만났고 엘리야도 제단을 불로 태우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의 제자들도 오순절 날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다가 불같은 성령을 만났습니다. 불같은 성령을 만나면 마음이 뜨거워지고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는 확신이 생깁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은 불같은 성령을 체험하고 용기를 내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소유를 교회로 가지고 와서 필요에 따라 나누며 살았습니다. 예수를 따르면 핍박받는 시대에 교회를 세운 것이나 교인들이 자기 소유를 가지고 와서 필요에 따라 서로 나눈 것 모두가 불같은 성령께서 역사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안에는 각자 소유욕과 이기심과 욕심이 있는데 우리 힘으로 이런 소유욕과 이기심과 욕심을 물리칠 수가 없습니다. 불같은 성령께서 역사하셔야만 우리 안에 있는 소유욕과 이기심과 욕심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불같은 성령을 만나면 사람도 뜨거워지고 교회도 뜨거워집니다.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고 주님을 위해서 더 헌신하게 됩니다. 대체로 보면 뜨거운 성령 체험을 한 분들이 신앙생활도 더 열심히 하고 헌신도 더 열심히 합니다. 불같은 성령께서는 우리를 뜨거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고 우리 교회를 뜨거운 교회로 만들어 주십니다.


성령에 대한 두 번째 이미지는 물과 비둘기 입니다. 성령께서는 불과 바람같이 강하게 역사하시지만 때로는 물과 비둘기 같이 조용하고 부드럽게 역사하십니다. 불과 바람 같은 성령은 사람을 순식간에 변화시키지만 물과 비둘기 같은 성령은 사람을 조용하고 천천히 변화시킵니다. 강한 성령도 있지만 부드러운 성령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물로 세례 받으실 때 비둘기 같은 성령을 체험하셨습니다.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하기도 하고 옛날에 편지/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비둘기 같은 성령을 받으면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됩니다. 거친 사람이 부드러운 사람이 됩니다. 에스겔과 요한계시록을 보면 하나님의 보좌에서 생수가 솟아 나와 모든 생명을 살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엘 선지자도 하나님께서 봄비와 가을비를 내려 주셔서 곡식이 많이 쌓이게 하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니고데모가 “내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은 생명을 자라게 하고 더러운 것을 씻기고 조용히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불이 아버지 같은 성격을 가리킨다면 물은 어머니 같은 성격을 가리킵니다. 어머니가 양수로 생명을 품고 잉태하고 생산하고 먹이듯이 성령께서는 물처럼 부드럽고 온유하게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를 씻어주시고 자라게 하십니다.


사람에 따라서 불 같은 성령을 만나야 되는 사람이 있고 물 같은 성령을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과거와 다른 사람으로 완전히 새롭게 변화 받아야 하는 사람은 불과 바람 같은 성령을 받아야 하고 반대로 신앙의 성장이 필요한 사람, 평화가 필요한 사람은 물과 비둘기 같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보통 교회에서는 기사와 이적을 체험하고 방언을 말해야 저 사람이 성령 충만하다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성령 충만은 뜨겁게 받는 것도 있지만 조용하게 받는 것도 있습니다. 뜨겁게 받느냐 조용하게 받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가 무엇이냐, 성령 받고 나서 그 사람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느냐가 중요합니다. 아무리 뜨겁게 성령 충만을 받아도 삶의 열매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조용하게 성령 받아서 조용하게 삶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 뜨겁게 성령 받고 아무 열매가 없는 사람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2.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물의 이미지보다 불의 이미지가 더 강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기질이 화끈해서 쉽게 불붙고 바람을 잘 탑니다. 우리 말에 신명나게 일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언가에 빠지면 깊이 빠집니다. 종교학자들은 한국 사람들의 마음 속에 무교/샤머니즘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 민족은 저 옛날 몽골, 시베리아에서 왔는데 몽골, 시베리아는 무교/샤머니즘이 강한 곳이었습니다. 한국에 가 보면 사주보거나 점치는 곳도 많고 종교도 많습니다. 유명 연예인이 사라졌다가 무당/점술가가 되어서 나타나기도 합니다. 무교의 기질이 있기 때문에 쉽게 뜨거워지고 쉽게 바람을 타고 쉽게 유행을 탑니다. 한국 사람들이 술 잘 마시고 노래 잘 부르는 것도 무교적인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K-Pop이라고 해서 한국 노래가 아시아는 물론 캐나다까지 퍼져서 캐나다에도 한국 젊은 가수들이 오면 자리가 꽉 찹니다. 이런 무교/샤머니즘의 속성이 때로는 좋은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모든 국민들이 힙을 합쳐서 짧은 시간에 경제도 발전시켰고 민주주의도 발전시켰습니다. 하지만 불과 바람 같은 성격은 긍정적인 효과도 있지만 부정적인 효과도 있습니다. 무교/샤머니즘에는 윤리와 도덕이 부족합니다. 종교에 윤리와 도덕이 빠지면 그 종교는 무당 종교, 오직 나만 잘되게 해 달라는 기복 종교, 무조건 신에게 복을 비는 종교가 되기 쉽습니다. 성령을 받아서 마음이 뜨거워진 것은 좋지만 그 뜨거워진 것이 나의 욕심을 채우는 것이라면 그 성령은 위험합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사모해야 하겠지만 그 성령 충만이 나의 감정을 해소하거나 나의 욕심을 채우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말씀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쓴 편지인데 고린도는 옛날부터 종교가 활발한 곳이었습니다. 종교 활동이 활발하면서 동시에 방탕하고 타락했습니다. 어떻게 종교 활동이 활발한데 타락할 수가 있을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종교가 타락을 막는 것이 아니라 타락을 부추겼습니다. 항구 도시는 원래 오고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옛날 그리스에서는 뱃사람들이 이쪽 바다에서 저쪽 바다로 나가려면 반드시 고린도를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오고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무당들도 많았고 종교들도 많았습니다. 사진을 보시면 저렇게 절벽을 깎아서 이쪽 바다에서 저쪽 바다로 나가는 길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고린도에는 아프로디테(Aphrodite, 비너스) 여신을 모시는 신전이 산 위에 있었는데, 1000여명의 여자 무당들이 손님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진으로 보시는 언덕이 아크로고린도(Acrocorinth) 라는 산입니다. 고린도가 이렇게 무당들도 많고 신비 체험을 하는 사람들도 많고 방탕한 곳이다 보니 고린도 교회 교인들 중에도 이런 문화를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교인들 중에는 무당 종교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신비 체험을 하고 방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신비 체험을 하고 방언을 말하는 것은 좋은데 자꾸 자기 자랑을 하고 예배를 어지럽힙니다. 예배 시간에 갑자기 방언을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다 보니 예배가 소란스러워지고 질서가 흐트러집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들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시는데 그 다양한 은사를 주시는 이유는 공동의 선,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지혜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지식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믿음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병 고치는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기적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하는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을 분별하는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하는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를 주시는데 그 모든 것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공동의 선을 위해서 주시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바울은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을 하고 모든 비밀과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성령께서는 때로는 불과 바람같이 임하시고 때로는 물과 비둘기 같이 임하십니다. 불같이 뜨거운 성령을 받아도 좋고 물같이 조용한 성령을 받아도 좋습니다. 어떤 성령을 받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고 어떤 열매를 맺느냐가 중요합니다. 성령을 받으면 받을수록 사람은 더 겸손해지고 조용히 이웃을 위해 헌신합니다. 성령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 감사하고 더 기도하고 더 기뻐하는 사람, 공동의 선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헌신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The Spirit for the common good

1 Corinthians 12:1 – 11


My friends, you asked me about spiritual gifts. I want you to remember that before you became followers of the Lord, you were led in all the wrong ways by idols that cannot even talk. Now I want you to know that if you are led by God's Spirit, you will say that Jesus is Lord, and you will never curse Jesus. There are different kinds of spiritual gifts, but they all come from the same Spirit. There are different ways to serve the same Lord, and we can each do different things. Yet the same God works in all of us and helps us in everything we do. The Spirit has given each of us a special way of serving others. Some of us can speak with wisdom, while others can speak with knowledge, but these gifts come from the same Spirit. To others the Spirit has given great faith or the power to heal the sick or the power to work mighty miracles. Some of us are prophets, and some of us recognize when God's Spirit is present. Others can speak different kinds of languages, and still others can tell what these languages mean. But it is the Spirit who does all this and decides which gifts to give to each of us. (1 Corinthians 12:1-11)


In 1 Corinthians chapter 12, Paul speaks about the Holy Spirit who gives various talents in believers’ lives both individually and corporately. The problem is that some spiritual elitists have really messed this up. They have regarded their gifts of the Spirit as making them superior to other members of the Corinthian community. In this text Paul emphasizes unified divine action, which empowers diverse human activity for the common benefit of all. The Spirit works in each Christian not so much for the benefit of any individual Christian but for the benefit of the entire community. Thus the Spirit’s activity is quite diverse; no single Christian receives all the Spirit’s gifts. Yet each Christian is empowered by the Spirit for ministry which builds up the whole community.


According to the testimony of the scriptures, the Holy Spirit comes to us first like fire and wind. Just as fire and wind shine light, make heat, and oust darkness, the Spirit of fire and wind touches our heart so that we become the people of God. The Spirit also comes to us like water and dove. This Spirit comes to us quietly and peacefully and encourages us to work and continue the mission of God. It is not important whether we receive the Spirit of fire or water. Rather, it is more important how we are changed and how we build up the community with the help of Spirit. Paul said in his letter that to each is given the manifestation of the Spirit for the common good. The Spirit generates saving faith in Jesus into every believer and spiritual gifts are not ends in themselves but are for the benefit of the entire community. Truly the Spirit comes to us not just for each person’s desire, but for the sake of the entire community. Truly the Spirit makes us work for the common good.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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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네번째 주일 / 6월 두번째 주일

성령께서 너희를 변호하실 것이니

요한복음 14:15 - 21

정해빈 목사

    



1.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4장 말씀은 예수님의 고별 설교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고별 설교를 통해서 제자들을 위로하시고 격려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제 곧 내가 세상을 떠날 것이다 말씀하시니까 제자들이 걱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이 떠나시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리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 그는 진리의 영이시다.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여기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두 가지 말씀이 나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 대신 보혜사를 보내셔서 그가 영원히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 둘째 보혜사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으로 오셔서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첫째로 우리가 고아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떠나신다고 하니 걱정이 많이 되었을 것입니다. 영적으로 고아가 되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옆에 계시면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셨고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바다를 잠잠케 하셨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신다고 하니까 제자들이 걱정이 많아졌습니다. 마치 부모 옆에서 안심하고 놀던 자녀가 갑자기 부모가 없어지니까 걱정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떠나시면 누가 우리를 보호해 주고 가르쳐 줍니까? 누가 우리를 먹여주고 입혀 줍니까? 제자들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제자들을 향해서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떠나면 나 대신 너희를 변호해 주고 상담해주고 위로해 주는 보혜사 성령께서 오실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나오는 보혜사(保惠師)는 한자로 말하면 보호해 주고 은혜를 베풀어 주는 선생, 변호사, 상담가/카운슬러를 가리킵니다. 우리들도 세상에서 억울하고 곤란한 일을 당하면 변호사, 상담가/카운셀러를 찾아갑니다.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을 때 변호사, 상담가/카운셀러를 찾아가서 도움을 받습니다. 평소에는 그런 분들이 필요없는 것 같아도 내가 어려울 때 그 분들의 도움을 받으면 그 분들이 고맙게 여겨집니다. 물론 세상에서는 그 분들의 도움을 받으려면 시간과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런데 보혜사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오셔서 값없이 우리를 위로하시고 변호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대신해서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를 변호하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남미의 해방신학자인 Leonardo Boff 신부는 [Come, Holy Spirit, 오소서 성령이여] 라는 책에서 성령은 comforter of the poor, 가난한 사람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옛날 초대 교인들은 대부분 가난했습니다. 성령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좌절하지 않도록 그들을 붙들어 주십니다.


생태 신학자 메튜 폭스(Matthew Fox)[내 몸과 영혼의 지혜]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19세기 고아원에서 한 살 이내의 영아사망률이 9099%에 이르렀는데 그 주요한 이유가 아기들을 안아주고 귀여워해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안마(massage)를 해준 아기는 안마를 안 해준 아기보다 50% 더 빨리 몸무게가 늘어났고 주변에 대해 보다 주의력을 보였다. 또한 그들은 보다 침착했고 덜 흥분했으며 덜 울었다. 어미 개가 강아지를 핥아주는 것은 강아지를 깨끗하게 씻어주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를 건드려 자극을 주려는 것이다. 뱃속의 태아(胎兒)들도 자궁 속에서 양수(羊水)의 따뜻함에 의하여 만지고 만져진다. 젖먹이는 것도 입술의 신경세포들을 접촉하는 것이고 배내옷과 기저귀도 아기가 자궁 속에서 늘 받았던 것과 같은 따스함을 준다. 어머니가 아기를 만지면 아기는 자궁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도 만지는 것이 가능함을 배운다. 세계가 자궁이 되고 자궁은 성장해서 세계가 되는 것이다.” 마치 어머니가 아기를 만지면 아기가 좋아하는 것처럼, 보혜사 성령께서는 신선한 공기와 바람과 사랑의 영으로 우리를 따뜻하게 만져 주시고 보살펴 주십니다.


2. 두 번째로 보혜사 성령은 위로의 영이시면서 동시에 진리의 영이시기도 합니다. 진리의 영으로 오셔서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해 주십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원수를 사랑하여라, 이렇게 기도하여라, 이렇게 세상을 살아라, 아버지 하나님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주님의 말씀이 필요할 때 주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십니다. 가장 필요한 순간에 가장 필요한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십니다. 지혜가 필요할 때 지혜를 주시고 깨달음이 필요할 때 깨달음을 주십니다. 거친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가 실족하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지혜롭지 못한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세상 살아서 무엇하나 이런 생각을 할 때도 있고, 욕심에 사로잡혀서 잘못된 판단을 할 때도 있고, 경솔하고 어리석은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진리의 영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생각을 바로잡아 주시고 진리를 깨우쳐 주십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십니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 히틀러에 반대했다가 순교당한 디트리히 본훼퍼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이 신학자는 감옥에서 쓴 편지 [옥중 서신]에서 현대인의 신앙생활은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사는 것과 같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것을 다 조정하시고 저 하늘 위에 앉아 계신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늘에서 눈과 비가 내리는 것이나 우리들 삶의 작은 부분까지도 하나님께서 다 계획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렇게 믿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하나님이 눈과 비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눈과 비를 내린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어도 세상은 스스로 알아서, 스스로의 힘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본 훼퍼는 이런 현대 세상을 가리켜서 어른이 된 세계라고 불렀습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하나님이 없는 세상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힘이 없어 보입니다. 그럼 오늘날과 같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할까요? 참다운 신앙인은 하나님 없이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살아야 한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하나님 없이라는 말도 중요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보고 계신다고 믿고 하나님 앞에서 성숙하고 책임 있는 신앙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살지 않기 때문에 악을 행하고 죄를 짓고 이기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인류가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셔 살기는 편해졌지만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전쟁 위험이 높아지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양심 앞에서, 진리 앞에서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옆에 계실 때는 아무 것도 걱정할 것이 없었습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예수께 물어보았고 몸과 마음이 아프면 예수님으로부터 치료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먹여주셨고 입혀주셨습니다. 악을 물리쳐 주셨고 병마와 귀신을 쫓아 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떠나고 나니 두려움이 닥쳐왔습니다. 주님이 떠나시면 우리들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누가 우리를 가르쳐 줄 수 있습니까? 누가 우리를 지켜줄 수 있습니까? 누가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있습니까?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내가 떠나면 나를 대신해서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없이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살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들을 도와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부모 밑에서 행복하게 살던 자녀가 부모가 떠나면 스스로 알아서 살림을 하고 가정생활을 꾸려야 하는 것처럼 우리들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스스로 알아서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알아서 신앙 생활을 하려고 하니 걱정과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우리들을 고아로 내버려 두지 않고 우리들을 따뜻하게 만져주시고 변호하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우리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십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 없이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바르고 진실되게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The Holy Spirit will defend you

John 14:15 - 21


Jesus said to his disciples: If you love me, you will do as I command. Then I will ask the Father to send you the Holy Spirit who will help you and always be with you. The Spirit will show you what is true. The people of this world cannot accept the Spirit, because they don't see or know him. But you know the Spirit, who is with you and will keep on living in you. I won't leave you like orphans. I will come back to you. In a little while the people of this world won't be able to see me, but you will see me. And because I live, you will live. Then you will know that I am one with the Father. You will know that you are one with me, and I am one with you. If you love me, you will do what I have said, and my Father will love you. I will also love you and show you what I am like. (John 14:15-21)


In the Farewell Discourses Jesus says repeatedly, "Don't be worried! Have faith in God and have faith in me. Don't be worried that I will leave you. When I depart, the Father will send the spirit to you, to call to your remembrance all that I said and the spirit will teach you all things." In this discourses, the spirit is called the Counselor and the Paraclete which means an advocate or helper. The spirit will guide those in whom it resides into all truth. The spirit will take what is mine, says Jesus, and declare it to you. It is the experience of the indwelling life of God in the form of the spirit. It comes as the life-giving breath of God flows to the disciples from Jesus, who has passed from death into life because he could give his life away in love for others.


As a German theologian Dietrich Bonhoeffer said, we are living in the world where there seems no God. Today we live in religionless Christianity, as if there were no God. But we are also called to live before God. When Jesus was about to leave his disciples, they were afraid. So Jesus said to them, "I will not leave you orphaned. The Advocate, the Holy Spirit, whom the Father will send in my name, will teach you everything, and remind you of all that I have said to you. Do not let your hearts be troubled, and do not let them be afraid." Although Jesus is not anymore with us physically, we are not afraid because the spirit is with us. This spirit comes to us in order to comfort the poor and the hopeless in the world. We are encouraged to live "without God but before God," since the spirit of Advocate and Helper is with us. The spirit moves as wind and works in the world on behalf of God and Jesus. This spirit defends and help us live the world as the people of God.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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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세번째 주일 / 6월 첫번째 주일

사마리아 사람과 아프리카 사람

사도행전 8:5-8, 34-40

정해빈 목사 





1. 사도행전을 보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크게 3가지 단계를 거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부활 신앙을 통해 잃어버렸던 신앙을 되찾는 단계입니다. 예수님이 처형당하신 후 제자들은 뿔뿔이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하나님 나라의 열정이 다 없어졌습니다. 신앙도 잃어버렸고 용기도 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부활 체험을 하고 나서 잃어버렸던 신앙을 되찾았습니다. 부활 신앙은 잃어버렸던 신앙, 실패했던 신앙을 되찾게 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에서 다시 일으키셨다,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 나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부활 체험을 한 사람은 두 번 다시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나타셨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체험 신앙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신앙의 두 번째 단계는 성령 체험을 통해서 모이는 교회를 만드는 단계입니다. 제자들은 부활 체험을 통해 잃어버렸던 신앙을 되찾았지만 여전히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함께 모이지 못했습니다. 부활 체험에 더해서 성령 체험이 필요했습니다. 부활 체험이 잃어버렸던 신앙을 되찾게 해 준다면 성령 체험은 모이는 교회를 만들어 줍니다. 성령이 역사하면 교회가 생겨납니다. 부활 체험을 통해 잃어버렸던 신앙을 되찾은 제자들은 성령 체험을 통해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때 비로소 제자들은 모이는 교회를 만들고 함께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기도했습니다. 함께 모여 사랑을 나누고 물질을 나누었습니다. 함께 모이는 교회를 통해 예수께서 하신 하나님 나라 사역을 이어갔습니다.


신앙의 세 번째 단계는 흩어지는 단계입니다. 부활 체험과 성령 체험을 통해 잃어버렸던 신앙을 되찾았고 함께 모이는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우리들을 모이는 교회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시고 우리들을 세상으로 흩어지게 하셔서 세상 사람들과 만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신앙의 세 번째 단계입니다. 교회는 제일 먼저 모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모여야 힘이 납니다. 모이지 않으면 힘이 나지 않습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일주일에 한번 주일 예배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의 첫 번째 사명은 모이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영적으로 주님의 몸과 같습니다. 머리와 가슴과 다리, 손과 발이 모여 한 몸을 이루어야 합니다. 서로 모여 영적인 한 몸을 이루어서 서로가 서로를 돌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모여서 신앙생활 하여라, 모여서 기도하여라, 모여서 서로가 서로를 돌보아라, 내 양들을 먹여라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모이는 단계에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잘 모였으면 또 잘 흩어져야 합니다. 교회는 모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흩어지는 것이 목적입니다.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힘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받은 힘을 가지고 세상으로 흩어져서 세상을 섬기고 변화시켜야 합니다.


간혹 교회들을 보면 흩어지기는 잘하는데 모이는 것은 잘하지 못하는 교회가 있고 반대로 모이는 것은 잘하는데 흩어지는 것은 잘 하지 못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모이는 것도 잘해야 하고 흩어지는 것도 잘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흩어지는 것을 소홀히 합니다. 세상은 더럽고 무서운 곳이니까 세상으로 흩어지지 말고 교회에 가만히 모여 있으라고 가르치는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를 가보면 일주일 내내 교인들을 붙잡아 둡니다. 화요일에는 화요성경공부, 수요일에는 수요예배, 목요일에는 구역장교육, 금요일에는 금요기도회, 토요일에는 주일 준비, 주일에는 주일 예배, 이렇게 교인들을 일주일 내내 교회에 붙잡아 둡니다. 그렇게 교인들을 일주일 내내 붙잡아 두면 가정생활은 언제하고 직장생활은 언제하고 세상활동은 언제 하겠습니까? 교인들은 동네 청소도 열심히 하고 학교 봉사도 열심히 하고 지역 봉사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흩어지지 않고 우리들끼리만 모여 있으면 안 됩니다. 교회는 먼저 모여 예배드리고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은혜를 받았으면 그 받은 은혜를 가지고 세상으로 흩어져서 복을 베풀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2.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말씀에는 모이기에 힘썼던 예루살렘 교회가 큰 박해로 인해서 사방으로 흩어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자들이 교회에 모여서 뜨겁게 예배드리고 기도했습니다. 물질과 음식을 서로 나누고 모든 사람을 차별없이 환영했습니다. 그랬더니 기적이 일어나서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보수적인 유대교 지도자들이 초대 교회를 박해해서 사도들을 제외하고 헬라 말을 하는 교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를 당하고 나머지 교인들은 유대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교회에 박해가 일어난 것이 슬프고 고통스럽습니다. 박해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아주 큰 교회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교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예루살렘 교회가 흩어지지는 않고 모이기만 하니까 성령께서 더 많은 일을 하라고 교인들을 사방으로 흩어지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의 헬라파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빌립이 박해를 피하기 위해 사마리아 지방으로 갔다가 거기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기사와 이적을 행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원래 유대 사람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사이가 좋지 않아서 유대 사람들이 사마리아 지방에 잘 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빌립은 사마리아 지방으로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가 일어난 것이 전화위복이 되어서 빌립이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외부적으로 어떤 계기가 주어지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낯선 지역, 낯선 사람들을 내가 일부러 찾아가서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다 습관적으로 잘 아는 사람을 만나고 잘 아는 지역을 찾아갑니다. 낯선 사람, 낯선 지역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우리를 도전하셔서 낯선 사람을 만나고 낯선 지역을 찾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빌립은 성령의 음성에 순종해서, 유대 사람들이 멸시하는 사마리아 지역에 찾아가서 그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마리아 지역에서 선교하던 빌립은 또 한번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 이집트로 가는 남쪽 땅 가사에 도착하게 되고 거기서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나게 됩니다.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마침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빌립은 이 사람을 만나 성경을 설명해 주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빌립에게 있어 사마리아 사람도 낯선 사람이었지만 에티오피아 내시는 더 낯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첫째 흑인이었고 둘째 거세당한 내시였습니다. 유대교 기준으로 보면 가까이 하면 안 되는 멸시해도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빌립은 인종에 대한 편견, 성에 대한 편견을 깨트리고 그에게 다가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낯선 사람들을 찾아가고 환영하고 낯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라는 것을 오늘 말씀은 다시 한번 가르쳐 줍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지난 주말에 있었던 캐나다연합교회 토론토 연회에서 담요 운동(Blanket Exercise)이라는 프로그램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강당 바닥에 담요 수십 장을 깔아놓고 사람들이 담요 위에서 움직입니다. 담요는 캐나다 지도를 가리키는데 지난 수백 년 동안 원주민들이 살았던 캐나다 땅이 어떻게 조금씩 변해갔는지, 정착민들이 어떻게 원주민들 땅을 조금씩 빼앗았는지를 몸으로 체험하게 합니다. 강당에 모인 사람들은 담요 운동을 하면서 원주민 역사, 캐나다 역사를 몸으로 체험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지난 역사를 배우고 회개하고 원주민들을 이해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1시간 정도 담요 위를 걸으면서 실습을 하다보면 가슴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고 우리를 낯선 곳으로 인도하셔서 이전에 알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고 이전에 알지 못했던 역사를 알게 하십니다. 인종의 편견을 깨트리고 낯선 사람들을 환영하게 하십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난민들이나 원주민들이 사마리아 사람들과 아프리카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집과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 가는 것이 두렵지만 그런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예전에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됩니다. 집과 고향을 떠난 청년 여러분, 성령께서 나를 더 넓은 곳으로 인도하셨음을 깨닫기 바랍니다. 우리를 낯선 곳으로 부르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낯선 사람들을 환영하고 그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The Samaritans and the Africans

Acts 8:5-8, 34-40


At that time the church in Jerusalem suffered terribly. All of the Lord's followers, except the apostles, were scattered everywhere in Judea and Samaria. Saul started making a lot of trouble for the church. He went from house to house, arresting men and women and putting them in jail. The Lord's followers who had been scattered went from place to place, telling the good news. Philip went to the city of Samaria and told the people about Christ. They crowded around Philip because they were eager to hear what he was saying and to see him work miracles. Many people with evil spirits were healed, and the spirits went out of them with a shout. A lot of crippled and lame people were also healed. Everyone in that city was very glad because of what was happening. (Acts 8:1-8)


The official said to Philip, "Tell me, was the prophet talking about himself or about someone else?" So Philip began at this place in the Scriptures and explained the good news about Jesus. As they were going along the road, they came to a place where there was some water. The official said, "Look! Here is some water. Why can't I be baptized?" He ordered the chariot to stop. Then they both went down into the water, and Philip baptized him. After they had come out of the water, the Lord's Spirit took Philip away. The official never saw him again, but he was very happy as he went on his way. Philip later appeared in Azotus. He went from town to town, all the way to Caesarea, telling people about Jesus. (Acts 8:34-40)


The acceptance of the message about Jesus among the Samaritans marks another crucial step in the expansion of boundaries for the early Christ movement. We know not only who the Samaritans are, but also of the tension/distrust that have existed between Jews and Samaritans since the post-exilic period. The transcending power of the gospel continues in the another episode. Philip is instructed by an angel to go to the road the runs from Jerusalem to the southwest toward Gaza, an important city on the Mediterranean coast. There he encounters an Ethiopian eunuch who was returning to Ethiopia from Jerusalem, where he had been to worship, presumably in the Temple. This Ethiopian official would not have been permitted to worship in the Temple, not because of his race, nationality, or status, but because of his sexual identity. The race, nationality, or sexual identity of the person did not seem to matter to Philip. Today's stories show that the gospel transcends ethnic, racial, and cultural boundaries constructed by hate, fear, and tradition. Today’s scriptures instructs us to go out beyond our limits and to meet and welcome today’s Samaritans and Africans.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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