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후 두번째 주일 / 5월 다섯번째 주일

성령강림절, 우리의 과거를 회개합니다

사도행전 7:46-53

정해빈 목사

    




1.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7장에는 스데반이 한 긴 연설이 나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몇 개의 중요한 연설이 나옵니다. 베드로의 연설, 스데반의 연설, 바울의 연설이 나오는데, 그 중 하나가 스데반의 연설입니다. 오늘 말씀을 이해하려면 사도행전 67장을 같이 읽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6장을 보면 당시 예루살렘에는 로마에 노예로 끌려갔다가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온 동포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끼리만 모이는 회당을 짓고 회당에서 신앙생활하면서 메시야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해외 동포들이 한국으로 귀국해서 교회당을 짓고 자기들끼리 따로 모여 사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해외에서 온 이 사람들은 본토 사람들보다 더 율법과 성전과 전통에 충성했습니다. 때로는 해외 교포 사람들이 본토 사람들보다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사는 해외 교포 출신 유대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스데반이 이 회당에 들어갔다가 거기 사람들과 논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스데반도 해외 교포 출신이니까 해외 교포들이 세운 회당에 들어갔다가 거기 사람들하고 논쟁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스데반은 무조건 율법과 성전과 전통에 충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젊은 2세 교포였기 때문에 개방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고 예수님과 초대 교회를 통해서 유대교 지도자들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조상들의 교만을 비판하고 성전을 비판했습니다. 그러자 회당 사람들이 화가 나서 스데반을 붙잡아다가 공의회로 끌고 갔습니다. 사도행전 611절에 기록된 것처럼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고발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과거와 전통을 비판하면 기분이 나쁩니다. 스데반이라는 젊은 사람이 자신들이 하늘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율법, 성전, 전통을 비판하니까 사람들이 화가 나서 그를 붙잡아다가 재판정에 세웠습니다. 전통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좋지만 때로는 비판과 충고를 받아들일 줄 알아야 전통이 계속 발전합니다. 국가 전통도 그렇고 사회문화 전통도 그렇고 종교 전통도 그렇습니다. 국가도 잘못한 것이 있으면 비판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하고 사회와 종교도 잘못한 것이 있으면 비판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전통이 소중해도 비판과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전통은 폐쇄적이고 죽은 전통이 됩니다.


재판정에 선 스데반은 사도행전 7장에 기록된 것처럼 아주 긴 연설을 했는데 크게 2가지 유대교 신앙을 비판했습니다. 첫째로 스데반은 조상들의 교만을 비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세워 출애굽 역사를 일으키셨는데 조상들은 모세의 말을 잘 듣지 않았습니다. 모세뿐만 아니라 예언자들을 모함하고 박해했습니다. 오늘 말씀 751-52,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언제나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당신네 조상들이 한 그대로 당신들도 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예언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들은 의인이 올 것을 예언한 사람들을 죽였고 이제 당신들은 그 의인을 배반하고 죽였습니다.”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죽인 것처럼,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도 의인으로 오신 예수님을 죽였다고 고발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부패한 정치/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예언자들을 죽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고발했습니다. 천사들이 전하여 준 율법을 받기만 하고 지키지는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로 스데반은 성전을 비판했습니다. 다윗이 성전을 짓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고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했는데 하나님은 사람이 손으로 지은 건물 안에 거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749,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를 위해서 어떤 집을 지어 주겠으며 내가 쉴 만한 곳이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냐?” 스데반이 예언자들을 죽인 조상들의 죄를 지적하고 다윗/솔로몬이 지은 성전을 비판하니까 유대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흥분해서 그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스데반이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었고 무슨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젊은 사람이 바른 말을 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랬더니 단지 전통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그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스데반은 유대교 전체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유대교,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악을 행하는 조상들을 비판했습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정치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을 비판하였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지 않는 성전을 비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죽인 정치/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젊은 사람이 용기있게 회개를 촉구하면 그 말을 잘 듣는가 아니면 최소한 무시하든가 하면 될 텐데, 흥분해서 젊은 사람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이 얼마나 경직되고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사람들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2. 성령강림절을 맞아 성령께서 하시는 여러 가지 사역을 우리가 묵상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모든 생명을 일으켜 주십니다. 믿는 사람들이 각자 신앙생활하지 않고 함께 모여서 신앙생활하도록 교회를 만들어 주십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고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료하십니다. 보혜사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를 변호하시고 진리를 깨우쳐 주십니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여러 가지 사역을 하시는데 그 중에 꼭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회개의 열매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우리의 잘못을 회개하도록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은 기쁨의 영이면서 동시에 회개의 영입니다. 내가 스스로 알아서 회개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스스로 알아서 회개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우리의 잘못을 깨우치셔야만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할 수 있습니다. 젊은 스데반이 교만한 유대교 지도자들과 부패한 성전을 비판했을 때 종교 지도자들과 해외에서 온 열광적인 유대교 신자들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았더라면 젊은 스데반을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았더라면 젊은 사람의 말을 듣고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젊은 사람을 격려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지 못해서 마음이 딱딱해져서 젊은 사람이 전통을 비판하는 것을 참지 못했습니다. 때로는 젊은 사람이 과거를 비판하고 전통을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나이 드신 분들은 무조건 젊은이들을 혼내려고 하지 말고 젊은이들이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그들의 말을 경청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더 경직되고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토요일 캐나다연합교회 토론토 연회가 있었습니다. 캐나다연합교회에는 13개의 연회가 있는데 우리 교회는 토론토 연회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남쪽 토론토부터 북쪽 베리 위까지 대략 270개 교회가 소속되어 있습니다. 교회 회의를 가보면 회의 맨 처음 순서로 이 땅에서 살았던 원주민들에게 감사하고 회개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교회 회의를 가보면 원주민 문제가 빠지지 않고 항상 나옵니다. 캐나다 정부와 캐나다 교회에게 있어 원주민 문제는 일종의 원죄와 같습니다. 사실 캐나다는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도 없고 다른 나라에게 해를 입힌 적도 없습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사과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옆 나라인 미국의 예를 든다면 과거 아시아나 중미, 남미에 쳐들어가서 정부를 무너뜨리고 미국 말 잘 듣는 정부를 세운 적이 많았습니다. 다른 나라를 많이 쳐들어갔고 전쟁을 많이 일으켰습니다. 20세기 역사를 조금만 들추어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서 캐나다는 다른 나라를 쳐들어간 적도 없고 다른 나라를 공격한 적도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원주민 문제였습니다. 맨 처음 유럽 정착민들이 도착해서 원주민들과 조약을 체결합니다. 그리고는 야금야금 땅을 빼앗기 시작합니다. 원주민 자녀들을 강제로 부모에게서 뺏어서 카톨릭과 개신교가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캐나다 정부와 캐나다 기독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식 사과를 하고 보상을 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번 회의에서도 원주민들과 정착민들과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갔는지 공부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그래도 캐나다 정부와 캐나다 기독교가 나름대로 과거 역사를 인정하고 정직하고 회개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우리 잘못을 깨닫게 하십니다. 국가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국가가 사과해야 하고 사회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사회가 사과해야 합니다. 종교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종교가 사과해야 하고 개인이 잘못한 것이 있으면 개인이 사과해야 합니다. 회개할 줄 아는 사회가 용기있는 사회이고 회개할 줄 아는 사람이 용기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신앙생활하고 있는가,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지난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거듭나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entecost, we repent our past

Acts 7:46-53


He pleased God and asked him if he could build a house of worship for the people of Israel. And it was finally King Solomon who built a house for God. But the Most High God doesn't live in houses made by humans. It is just as the prophet said, when he spoke for the Lord, "Heaven is my throne, and the earth is my footstool. What kind of house will you build for me? In what place will I rest? I have made everything." You stubborn and hardheaded people! You are always fighting against the Holy Spirit, just as your ancestors did. Is there one prophet that your ancestors didn't mistreat? They killed the prophets who told about the coming of the One Who Obeys God. And now you have turned against him and killed him. Angels gave you God's Law, but you still don't obey it. (Acts 7:46-53)


The debate depicted by Acts 6-7 is an intra-Jewish struggle over identity and the continuing role of Temple and Law between those who came from overseas. It happened when Stephen visited a synagogue built in Jerusalem by the free Jews who came from abroad. In his speech, Stephen introduces two Jewish groups: those who accept God’s message and messengers and those who reject them. The comparison Stephen develops in Acts 7 aligns Stephen and the church with Abraham, Joseph, the prophets, and Jesus. His opponents are aligned with the Egyptians, Joseph’s brothers, the rebellious in the wilderness who disobeyed Moses, and the ancestors who killed the prophets. The images, such as “stiff-necked people” and “uncircumcised in heart and ears” belong to Israel’s story of self-judgment, confession and repentance. Stephen’s words enrage his interlocutors, and they put him to death by stoning. Stephen thus becomes the first martyr of the Church.


When Stephen criticized the arrogance of ancestors and the corrupted temple, those who were Jewish authorities and proud of traditions and temple arrested and killed him. They refused his request for repentance by responding to his address as blasphemy and rebellion. Today’s story shows that only when the Holy Spirit touches our heart, we can look back our wrongdoings. The Holy Spirit is not only the spirit of joy but also repentance. “You stiff-necked people, uncircumcised in heart and ears, you are for ever opposing the Holy Spirit, just as your ancestors used to do. Which of the prophets did your ancestors not persecute?” Today’s message urges us to honestly acknowledge the fault of our nation, society, and even church, including our community and individuals. May God bless and touch our heart! May God move our heart to admit and confess what we have done wrong before. May God have a mercy on us and forgive our sings.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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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첫번째 주일 / 5월 네번째 주일

성령강림절, 교회는 성전이 아니다

사도행전 3:1 - 10

정해빈 목사

  



1. 지난 주일부터 성령강림절 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료하시는 성령님, 우리를 진리로 이끄시고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찬양합니다. 성령강림절은 또 교회의 의미를 생각하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서 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성령강림절은 교회가 무엇인며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교회가 어떻게 유지/발전되어야 하는 지를 가르쳐 줍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는 어떻게 성전과 다른가, 이런 주제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부활을 체험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나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 하나 둘 다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말씀을 공부하고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중 유대교 명절인 오순절/맥추감사절에 불같은 성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부활 체험과 성령 체험이 합쳐져서 교회가 만들어졌습니다. 부활 체험은 잃어버렸던 신앙을 되찾게 해 줍니다. 부활 체험은 나의 신앙을 일으켜 줄 수는 있지만 나의 개인적인 신앙 체험만 가지고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성령의 체험이 필요했습니다. 주님의 사역을 계속 이어가려면 나 혼자서는 안 되고 함께 모여서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두 세 사람이 있는 곳에 나도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서 교회를 이루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들 모두는 다 부족하고 불완전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복잡한 일도 생기고 갈등이 생기기도 합니다. 교회도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 실망스러운 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그냥 나 혼자 집에서 조용히 성경 읽고 찬송가 부르면서 신앙생활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때로는 나 혼자 조용히 집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나 혼자의 신앙을 지킬 수 있을지는 몰라도 주님의 사역을 이어갈 수는 없습니다. 주님도 공생애 기간 동안에 제자들과 함께 사역하셨고 부활 후에는 하늘로 승천하시면서도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함께하는 신앙입니다. 서로 사랑하려면 상대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도 혼자 계시는 분이 아니라 성부/성자/성령께서 서로 사귀고 교통하고 왕래하는 분이십니다. 제자들은 부활 체험과 성령 체험을 한 후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교회를 이루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통해서 주님께서 하신 하나님 나라 사역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3장 말씀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이 성전 입구에서 구걸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를 고쳐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십시오 이렇게 말하고 오른손을 잡아 그를 일으켰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이 성전 문 앞에서 구걸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성전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집이었다면 성전은 이 사람을 도와주었어야 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니까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사랑하신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고아와 같고 과부와 같고 나그네와 같습니다. 하지만 성전은 이 사람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이 사람이 미문(美門) “아름다운 문이라는 성전 문 앞에서 구걸했다고 했는데 겉으로는 성전 문이 아름다울지 몰라도 이 성전은 진정으로 전혀 아름답지 못했습니다. 성전에 금과 은은 많았지만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건물은 크고 화려하나 구걸하는 사람들을 전혀 돌보지 않았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예레미야는 성전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성전이다, 주님의 성전이다, 주님의 성전이다' 하고 속이는 말을 너희는 의지하지 말아라...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이 너희의 눈에는 도둑들이 숨는 곳으로 보이느냐? 여기에서 벌어진 온갖 악을 나도 똑똑히 다 보았다. 나 주의 말이다. (예레미야서 7:3, 11)”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고쳐 주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교회는 겉은 크고 화려하지만 가난한 사람을 돌보지 않는 성전이 되어서는 안 되고 사람을 살리고 치료하는 살아있는 모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2. 예수의 제자들은 부활 체험과 성령 체험을 한 후에 새로운 모임,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이 모임은 성전과 전혀 달랐습니다. 성전을 대신하는 새로운 모임이었습니다. 교회가 왜 성전이 아닌지 한두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상인들이 장사하는 것을 보시고 심히 화를 내시면서 하나님의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아버지의 집은 만민이 들어가는 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래 성전은 만민이 아니라 선택받았다고 여겨지는 유대인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면 안으로 들어가는 여러 개의 문이 있는데 문마다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더 거룩한 사람이 더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성전 바깥 뜰에는 누구나 구경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전 안에는 오직 건강한 유대인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방인과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성전 안쪽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성전 두 번째 문은 유대인 남성만 들어갈 수 있고 유대인 여성은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성전 세 번째 문은 성전을 관리하는 레위 지파만 들어갈 수 있었고 성전 네 번째 문은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었고 마지막 성전 다섯 번째 문은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전에는 인종과 신분에 따라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 여성들은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의 집은 만민이, 누구나들어가는 집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민이 들어가는 집, 이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누구나 올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의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은 제사가 아니라 누구든지 와서 기도하는 곳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래 성전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제사를 드리려니 소, , 가축을 끌고 와야 합니다. 제사를 드리려니 소와 양을 죽이는 사람도 필요하고 뼈와 살을 바르는 사람도 필요하고 제물을 불태우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성전은 겉으로는 거룩한 곳이었지만 실제로는 동물 냄새, 피 냄새, 고기 냄새가 진동하는 곳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의 집은 제사가 아니라 기도하는 곳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내 마음 안에 모시고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초대 교회는 더 이상 제사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중보자/구원자가 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복잡하게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필요가 없고 그냥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으니 거대한 성전을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 곳이나 모여서 기도하면 그곳이 교회가 됩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초막이나 궁궐이나 모여서 기도하면 그곳이 교회요 그곳이 하나님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어떤 사람이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났는데 성전 제사장도 그냥 지나가고 성전에서 일하던 레위 사람도 그냥 지나갔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그 사람의 상처를 싸맨 다음에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자기가 돈을 낼 터이니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이 사람을 돌보아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성전에서 일하던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피가 섞였다고 멸시받던 사마리아 사람과 여관집만이 강도만난 사람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성전은 강도만난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지만 여관은 강도만난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여관에 모인 사람들이 강도 만난 사람을 치료해 주는 장면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성전이 아니라 여관집입니다. 강도만난 사람을 받아주고 치료해주는 여관집이 성전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성전은 거룩하고 화려하고 여관은 초라하고 누추합니다. 그러나 강도만난 사람을 살린 곳은 겉으로 화려한 성전이 아니라 초라하고 누추한 여관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앞에서 구걸하는 사람, 나면서부터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십시오금덩어리와 은덩어리는 없지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사람을 살리는 곳이 교회입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생명을 살리는 교회, 모든 사람이 와서 기도하는 교회, 하나님을 내 안에 모시는 교회,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를 만들어 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entecost, a church is not a temple

Acts 3:1-10


The time of prayer was about three o'clock in the afternoon, and Peter and John were going into the temple. A man who had been born lame was being carried to the temple door. Each day he was placed beside this door, known as the Beautiful Gate. He sat there and begged from the people who were going in. The man saw Peter and John entering the temple, and he asked them for money. But they looked straight at him and said, "Look up at us!" The man stared at them and thought he was going to get something. But Peter said, "I don't have any silver or gold! But I will give you what I do have. In the name of Jesus Christ from Nazareth, get up and start walking." Peter then took him by the right hand and helped him up. At once the man's feet and ankles became strong, and he jumped up and started walking. He went with Peter and John into the temple, walking and jumping and praising God. Everyone saw him walking around and praising God. They knew that he was the beggar who had been lying beside the Beautiful Gate, and they were completely surprised. They could not imagine what had happened to the man. (Acts 3:1-10)


According to the scriptures, many disciples of Jesus had met the risen Christ after the crucifixion. This experience led them to reflect and meditate on all the ministry of Jesus. This experience made them stand up from despair. They gathered and blessed each other. Yet they were still in fear and indecision. They could make a church and preached the good news throughout the world only after having received the Holy Spirit. They were encouraged with the resurrection and called to become a church with the Holy Spirit. This church, gathering of the people of God, was different from the temple. Whereas only the Jew were able to come into the temple, all the people were welcomed to become a church. Whereas people came to the temple to offer a sacrifice to God, people gathered to praise and pray to God in the name of church. That was why Jesus said, “My house should be called a place of worship for all nations. But you have made it a place where robbers hide.”


Today’s scripture says that going into the temple, Peter and John saw a man who had been born lame was being carried to the temple door, known as the Beautiful Gate, and begged from the people who were going in. When he asked them for money, Peter said, "I don't have any silver or gold! But I will give you what I do have. In the name of Jesus Christ from Nazareth, get up and start walking." This story shows us what a church is and what a church should do. The temple did not take care the man, although they should do since it is called the house of God. It has a huge building and lots of property but it did not take care of him. Yet early church cared and raised him although they did not have any silver or gold. Pentecost reminds us of being the church that welcomes all the people and takes care of each other. We are not called to be the temple made of building and discrimination, but called to be the church, gathering of the people of God with love and care.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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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 5월 세번째 주일

성령강림절,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

사도행전 2:1 - 13

정해빈 목사

  




부활절이 지나고 성령강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부활 후 50일째 되는 날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님을 체험하고 교회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령강림절이기도 하고 교회의 생일이기도 합니다. 성령님을 체험한 후에 교회를 시작했다는 말은 성령께서 역사해야만 교회가 세워질 수 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성령께서 이끄셔야만 교회가 교회다워집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은 부활 후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40일 동안 제자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교회를 이루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야 하는 지를 가르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성경 공부만 해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성령님을 체험해야 합니다. 머리만 가지고는 안되고 가슴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신 이후에 10일 동안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부활 후 50일째가 되는 오순절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같은 성령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부활 후 50일이 중요합니다. 50일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활절과 성령강림절 사이 40일 동안 공부하고 10일 동안 기도해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40일 동안 공부하고 10일 동안 기도했더니 성령께서 내려오셔서 교회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부활만 가지고는 안되고 부활의 경험이 삶의 열매, 교회 공동체로 이루어지려면 40일 동안 공부하고 10일 동안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고 교회가 교회다워집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힘, 능력, 에너지를 가리킵니다. 기독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데 삼위일체 신앙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 성령님, 예수님이 한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오신 분이고, 그럼 하나님과 성령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성령님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하늘의 힘, 능력, 에너지라고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으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낮은 자를 일으키시고 생명을 지키십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모든 역사가 성령의 역사입니다. 캐나다연합교회가 최근에 만든 [신앙의 노래](Song of Faith)라는 신앙고백서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딱딱한 법률 문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고백하는 노래/찬양이 되어야 한다는 뜻에서 신앙고백서 제목을 신앙의 노래라고 지었습니다. 이 신앙고백서는 성령님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분은 태초부터 만물 위를 바람처럼 다니시며, 모든 기운과 물질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고 우리의 마음속에서 운행하십니다.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신실하시며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분, 세상에서 일하시되,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We sing of God the Spirit, who from the beginning has swept over the face of creation, animating all energy and matter and moving in the human heart. We sing of God the Spirit, faithful and untameable, who is creatively and redemptively active in the world. "성령께서 거룩한 분을 찬미하라고 도전을 주십니다. 익숙한 방식뿐만 아니라, 생소한 방식으로도 찬미하라 일어주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찬미합니다. 가슴 깊이 간절한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분, 근심과 고백을 감싸주시는 분, 그분은 우리와 세상을 변화시키십니다." The Spirit challenges us to celebrate the holy not only in what is familiar, but also in that which seems foreign. We sing of the Spirit, who speaks our prayers of deepest longing and enfolds our concerns and confessions, transforming us and the world.

 

성령께서는 하늘의 바람처럼 임하셔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만물을 새롭게 하십니다. 빈들에 마른 풀 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 주님의 약속된 성령 간절히 기다리네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생명 주옵소서 캐나다 알버타 포트 멕머레이에서 큰 화재가 발생해서 서울시 면적의 5배 가까이 되는 지역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2달째 비가 오지 않고 기온은 높고 바람이 불어서 산불이 커졌습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 성령의 단비가 내려오기를 고대합니다.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생명 주옵소서.”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으면 이 세상은 답답하고 힘든 세상, 기가 막힌 세상이 됩니다. 기가 통해서 세상이 정상적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세상이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을 때 우리들은 기가 막혔다고 말을 합니다. 기가 막히면 요즘 젊은 사람들 표현으로 하면 고구마 10개를 먹은 것처럼 가슴이 막히고 답답한 세상이 됩니다. 세상에 기가 막히면 세상 사는 것이 너무 힘들고 어렵게 됩니다. 세상 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성령의 기운이 역사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과 마음이 지치고 힘들게 됩니다. 세상 사는 것도 답답하고 인간 관계도 답답하고 우리의 몸도 아프게 됩니다. 오직 성령께서 역사해야 만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고 우리의 삶도 제대로 돌아갑니다. 낙심하는 자에게 용기를 주시고 며 생명을 잃어가는 자들에게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주십니다. 진실로 성령께서는 만물을 새롭게 하십니다.

 

세상이 꽉 막히고 답답한 것은 옛날이 더 심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같이 앉지 못했고 주인과 노예가 서로 같이 앉지 못했으며 유대인과 헬라 사람이 같이 앉지 못했습니다. , 인종, 계급 간에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존재했습니다. 온 세상에 편견과 차별과 장벽이 가득 찼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그 모든 편견과 차별과 장벽을 뛰어넘도록 제자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2장 말씀을 보면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성령을 받고 방언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루살렘을 방문한 사람들이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자기들의 고향 언어로 알아들었습니다. 말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편견과 차별과 장벽을 뛰어넘는 새로운 모임, 교회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자리에는 베드로도 있었고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도 있었습니다. 여성을 대표해서 막달라 마리아도 있었고 해외 교포 2세를 대표해서 스데반도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왔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던 구레네 사람 시몬도 있었고 시의원 아리마데 요셉과 니고데모도 있었습니다. 갈릴리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고 사마리아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근처에서 사는 사람들도 있었고 해외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인종도 달랐고 지역도 달랐고 언어도 달랐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인종과 지역과 계급을 뛰어넘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진실로 성령께서는 만물을 새롭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장벽과 차별과 편견이 물러가고 말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모든 사람을 환영하는 교회, 함께 울고 함께 기뻐하는 교회를 만들어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이 세상을 새롭게 하셔서 기가 막히고 답답한 세상을 기가 통하는 세상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우리 교회가 성령님의 오심을 환영하고 기뻐하는 교회, 모든 사람을 환영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이 땅을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Pentecost, make all things new

Acts 2:1-13


We sing of God the Spirit, who from the beginning has swept over the face of creation, animating all energy and matter and moving in the human heart. We sing of God the Spirit, faithful and untameable, who is creatively and redemptively active in the world... The Spirit challenges us to celebrate the holy not only in what is familiar, but also in that which seems foreign. We sing of the Spirit, who speaks our prayers of deepest longing and enfolds our concerns and confessions, transforming us and the world. [Song of Faith, The United Church of Canada]


On the day of Pentecost all the Lord's followers were together in one place. Suddenly there was a noise from heaven like the sound of a mighty wind! It filled the house where they were meeting. Then they saw what looked like fiery tongues moving in all directions, and a tongue came and settled on each person there. The Holy Spirit took control of everyone, and they began speaking whatever languages the Spirit let them speak. Many religious Jews from every country in the world were living in Jerusalem. And when they heard this noise, a crowd gathered. But they were surprised, because they were hearing everything in their own languages. They were excited and amazed, and said: Don't all these who are speaking come from Galilee? Then why do we hear them speaking our very own languages? Some of us are from Parthia, Media, and Elam. Others are from Mesopotamia, Judea, Cappadocia, Pontus, Asia, Phrygia, Pamphylia, Egypt, parts of Libya near Cyrene, Rome, Crete, and Arabia. Some of us were born Jews, and others of us have chosen to be Jews. Yet we all hear them using our own languages to tell the wonderful things God has done. Everyone was excited and confused. Some of them even kept asking each other, "What does all this mean?" Others made fun of the Lord's followers and said, "They are drunk." (Acts 2:1-13)


The events of the day of Pentecost are both surprising and expected. Expected because throughout the gospel of Luke, the first volume of the two-volume work that includes Acts, the Holy Spirit intervenes supernaturally on major occasions. Expected, also, because the disciples know that the coming of the Spirit is promised, from the very beginning of the gospel. Yet the coming of the Spirit is also surprising. Gathered in Jerusalem to celebrate the Jewish festival of Pentecost, bystanders are amazed to hear many languages spoken by Galileans, who are notorious for being monolingual. Pentecost Sunday celebrates the animating and sustaining presence of God’s Spirit within the church. Perhaps it is for this reason that Pentecost is often celebrated as the “birthday of the Christian church.” The Spirit gives the church its mission and the power to undertake it. Today’s story raises a question such as what mission the Spirit is giving to our church. The Holy Spirit makes all things new. It abolishes all the barriers of prejudice and discrimination and leads us into the new life of mutual understanding. It helps us to make a new community called church where all people are welcomed as the people of God and share their life with love. Come, the Holy Spirit, make all things new.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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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여섯번째 주일 / 5월 두번째 주일

가정 주일, 디모데 가정과 우리 가정

디모데후서 1:1 - 7

정해빈 목사




1. 오늘은 5월 두번째 주일, 어버이 주일/가정 주일로 예배드리는 날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성경 말씀을 기억하면서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합니다. 부모님이 멀리 사신 분들은 전화를 드리거나 가까이 사신 분들은 선물을 들고 찾아뵈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이유는 부모를 통해서 우리가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생명을 중요시합니다. 부모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부모님을 공경하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생명을 공경하는 것이고 생명을 공경하는 것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오늘은 또 가정 주일로 예배드리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가정을 소중히 여기고 가정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도 큰 눈으로 보면 하나의 가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아버지/어머니가 되시고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주의 기도를 가르치실 때 제일 먼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세계 교회들이 모이는 큰 모임을 가면 오이쿠메네(Oikoumene)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집이요 우리들은 하나님의 식구입니다. 우리들이 이 땅에서 서로 사이좋게 지내야 하는 것도 우리들 모두가 하나님의 형제자매이기 때문입니다. 자비로운 아버지/어머니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지으시고 지금도 이 세상을 위해 일하십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처럼 자비로운 아버지/어머니가 되어서 우리들의 가정을 잘 가꾸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가정을 통해서 사랑과 위로를 받고 행복을 얻습니다. 우리 삶에 가정만큼 소중한 곳이 없습니다. 바깥 일이 잘 안되어도 가정이 행복하면 견딜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바깥 일이 잘 되어도 가정이 편안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밖에서 돈 많이 벌어도 가정이 행복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가정을 통해서 사랑과 위로를 받지만 때로는 가정을 통해서 아픔과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족이기 때문에 제일 먼저 사랑과 기쁨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제일 먼저 분노와 미움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가정이 나와 가장 가까운 곳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시고 진실하신 아버지/어머니인 것처럼, 우리들도 자비롭고 진실한 아버지/어머니가 되어야 하는데 자비롭고 진실한 아버지/어머니가 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사는 가정보다 해외에서 사는 이민 가정이 가정을 잘 가꾸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한국에서는 부모와 자녀들이 같은 말을 하고 같은 책을 보고 같은 뉴스를 보고 같은 TV를 봅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문화 차이와 세대 차이가 있지만 크게 보면 같은 언어, 같은 문화권에서 살기 때문에 근본적인 충돌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해외 이민 가정은 부모의 문화와 자녀의 문화가 서로 다릅니다. 부모는 한국 책을 보고 자녀들은 영어 책을 봅니다. 부모는 한국 TV를 보고 자녀들은 영어 TV를 봅니다. 부모가 먹는 음식과 자녀가 먹는 음식이 다르고 부모가 쓰는 말과 자녀가 쓰는 말이 다릅니다. 부모가 영어를 배우거나 자녀가 한국말을 배우지 않으면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기도 합니다. 최근에 나이아가라 근처 스토니크릭에서 총기 사고가 나서 오래 전에 현지인과 결혼한 한국 어머니와 형제들이 죽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민 생활을 하면서 가정을 잘 가꾸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한국에서 어렵게 경쟁하면서 자란 한국 부모들 입장에서 보면 자녀들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여기서 자란 자녀들은 무조건 부모에게 머리 숙이지 않고 자기 할 말을 다 합니다. 자녀들이 시간도 잘 안 지키고 늦게 일어나고 학교생활도 잘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속이 상합니다. 이 아이가 언제쯤 철이 들려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기독교 교육을 가르치셨던 문동환 교수님은 사람이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셨습니다. 사람이 언제 어떻게 성인이 되느냐, “, , 의 과정을 거쳐서 성인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은 깨달을 각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은 단절할 단자, 잘못된 것을 깨닫고 거기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는 일어설 기자, 스스로 일어나서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각과 단과 기는 언제 오느냐, 누가 강제로 줄 수 없고 자신이 스스로 깨달아야 합니다. 어느 순간 정신이 번쩍 드는 순간이 있는데 그 순간은 고난을 통해서 올 수도 있고 어떤 삶의 계기를 통해서 올 수도 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드는 각의 순간은 누가 만들어 줄 수는 없고 본인이 스스로 깨달아야 합니다. 부모가 옆에서 도와줄 수는 있지만 대신 해줄 수는 없습니다. 자녀가 오랜 시간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 비로소 자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달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스스로 ()” 하면 ()”이 오고 하면 ()”가 일어나게 됩니다. 각과 단과 기의 순간을 통해서 자녀들은 비로소 성인이 됩니다. 기독교 교육은 자녀들이 각과 단과 기를 거쳐서 성인이 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스스로 자기 인생을 세워 나가도록 교회와 가정이 옆에서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2. 오늘 우리가 읽은 디모데후서 1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가 나옵니다. 예수님을 1세대, 베드로와 바울을 2세대라고 표현한다면 디모데는 3세대를 대표하는 초대 교회 지도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 같은 3세대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에 초대 교회는 계속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디모데 같은 훌륭한 사람이 나올 수 있었을까?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비결은 가정 신앙 교육입니다. 디모데는 자라면서 신앙 교육을 잘 받았습니다. 오늘 말씀 5절을 보면 디모데는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를 통해서 믿음을 물려받았습니다. 본래 디모데는 헬라 사람 아버지와 유대 사람 어머니와 같이 살면서 일종의 다문화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를 통해서는 로마/헬라 교육을 받았고 어머니를 통해서는 유대교 신앙을 물려받았습니다. 신앙 교육에 있어서는 어머니 쪽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유대인 할머니, 어머니를 통해서 신앙 교육을 잘 받았습니다. 신앙 교육에 있어서는 어머니 쪽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외할머니 로이스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먹고 살기 바빠서 자녀를 충분히 사랑하고 돌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대신 할아버지 할머니는 손주를 충분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주지 못하는 사랑을 할아버지 할머니가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을 받은 아이들은 훨씬 더 밝고 건강하게 자랍니다. 물론 할아버지 할머니 때문에 자녀 버릇이 나빠질 수도 있지만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이 사는 것이 자녀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디모데는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사랑과 신앙을 통해서 자존감이 강하고 신실한 청년으로 자랄 수 있었습니다.

 

디모데가 훌륭한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던 두 번째 비결은 바울과 같은 훌륭한 스승을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자식처럼 아끼며 사랑했고 디모데는 바울을 스승으로 섬겼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22절에서 디모데가 자식이 아버지에게 하듯이 복음을 위하여 나와 함께 봉사했다고 말했습니다. 1차 여행을 할 때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처음 만났고 2차 여행할 때 디모데를 자신의 동역자로 발탁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와 함께 고린도전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빌레몬서 같은 편지들을 썼습니다. 사람이 성장하려면 좋은 친구, 좋은 선생, 좋은 멘토를 만나야 합니다. 젊은 사람이 사회에 진출하려고 하면 모르는 것이 많기 때문에 힘이 듭니다. 그 때 선배 한 사람이 살짝만 도와주면 그 사람은 자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사회를 먼저 경험한 사람이 살짝 도와주는 것이 대단하지 않은 것 같아도 당사자에게는 큰 힘이 됩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멘토가 되어서 디모데를 잘 이끌어 주었습니다. 후배를 잘 이끌어 주는 사람을 멘토(mento)라고 부릅니다. 그리스 신화 오디세이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전 1200년경 고대 그리스 이타카 왕국의 왕 오디세이가 유명한 트로이 전쟁에 출전하며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가장 믿을 만한 친구에게 맡기고 떠났는데 그의 이름이 멘토였습니다. 오디세이가 전쟁에서 돌아오기까지 약 10년간 멘토는 왕자의 친구, 스승, 상담자, 부모로서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 이후 젊은 사람의 인생을 지혜와 신뢰로 이끌어 주는 사람을 멘토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꼭 유명하고 똑똑해야만 멘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 시간과 여유가 있는 사람, 지혜와 경험이 많은 사람, 믿음이 깊은 사람이 젊은 사람들의 멘토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가정주일을 맞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가정을 생각합니다. 우리들 모두가 가정의 회복과 행복을 위해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집에 있는 가정은 작은 가정이고 교회는 큰 가정입니다. 우리들의 가정과 교회가 영적인 멘토가 되어서 우리들의 자녀들을 디모데처럼 믿음의 자녀들로 키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문동환 교수님이 말한 ()” “()” “()”의 과정을 기억합니다. 자녀들이 스스로 깨닫도록 옆에서 도와주어야 합니다. 할머니의 사랑, 어머니의 기도, 바울의 지도를 통해서 디모데가 성장한 것처럼, 우리들의 자녀들이 스스로 깨달아 영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가정과 교회가 자녀들을 붙잡아주고 이끌어 주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Timothy’s family and our family

2 Timothy 1:1 7


Paul, an apostle of Christ Jesus by the will of God, for the sake of the promise of life that is in Christ Jesus, to Timothy, my beloved child: Grace, mercy, and peace from God the Father and Christ Jesus our Lord. I am grateful to Godwhom I worship with a clear conscience, as my ancestors didwhen I remember you constantly in my prayers night and day. Recalling your tears, I long to see you so that I may be filled with joy. I am reminded of your sincere faith, a faith that lived first in your grandmother Lois and your mother Eunice and now, I am sure, lives in you. For this reason I remind you to rekindle the gift of God that is within you through the laying on of my hands; for God did not give us a spirit of cowardice, but rather a spirit of power and of love and of self-discipline. (2 Timothy 1:1-7)


Welcoming the season of spring and mother’s day in May, we cherish our parents and family. We confess that God created the world as the place of God’s residence. By building up the world and creating us, God becomes our heavenly father and mother, and we become God’s children. The greek term “Oikoumene” refers to the inhabited world. We believe that we lives in the world of Oikoumene, which means the household of God. We are encouraged to love each other since we are created as the children of God. “Obey your parents in the Lord, for this is right. Honor your father and mother. This is the first commandment with a promise, so that it may be well with you and you may live long on the earth.” (Ephesians 6:1-2) We are called to honour parents since they gave birth to us and raised us with love.


We have grown up through the love of parents and the help of neighbours. We can see the good example of home teaching and mentorship from the family of Timothy. First, he was raised by grandmother Lois and mother Eunice and learned God through them. Paul mentioned that Timothy’s sincere faith lived first in his maternal family and now lives in him. It shows how important each family's spiritual tradition is. This tradition helped him become a new leader representing the 3rd generation in the early Christianity. Second, Paul had invited him to join his mission trip and taught him many things as his mentor. As a more experienced and spiritually knowledgeable person, Paul helped him to grow and unfold his talents given by God. We pray that our children will grow like Timothy through the guidance of family and good mentorship. We pray that our family become the family of sincere faith and our church the place of spiritual mentorship. We pray that God bless our children so that they live out their lives with God.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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